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찟따 담마따(citta dhammata) (20220903)

담마마-마까 2022. 10. 13. 16:43

https://youtu.be/UxnsSvQSIzE

* 찟따 담마따(citta dhammata) (20220903)

 

··· 어쨌든 저번에 얘기했지만, 추석 때까지는 좀 모아가지고, 추석 끝나고 나서 스리랑카 상가에 보시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마 겨울에는 스님이 태국에 가기 전에 스리랑카부터 먼저 들리고 갈려고 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가 어려울 때니까 어려울 때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고 가서 같이 한 사람이라도 스님들이 수행하는 모습들을 보이는 것이 안 낫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팔 한번 잘 보세요. 뭐라고 하는지. <스님께서 허공에다 손으로 글자를 쓰심> 뭐라고 했어요?

다시 할게요. <스님께서 허공에다 손으로 글자를 쓰심> 뭐라고 했어요?

(수행자 : 심상)

심상이라고 본 사람들은 모양을 본 거죠? 모양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은 거라. 잘 맞췄는데 어리석다니까 좀 이상하죠? 조금 전에 여기(허공)에 썼지만 그게 남아 있어요? 안 남아 있죠.

 

"찟따 담마따(citta dhammata)"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걸 '심상'으로 읽었든 아니면 그냥 '보인다' 하고 그걸 알아차리고 있든 그건 각자의 몫인데, 그걸 단지 알아차림만 지속돼 나갔을 경우에는 스님이 그걸 쓸 동안에는 선한 마음만 있을 거라. 그것을 그냥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동안에는. 그런데 그 마음은 계속적으로 변하고 생멸하는 것들이라. 앞에 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그다음 것이 일어나고 또 그것도 조건 따라서 사라져버리는 거죠.

 

왜 그럼 '심상'이라고 읽은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느냐면,

스님이 항상 그런 얘기를 하죠? "공양을 올릴 때 세 가지를 염두에 두라" 하고 얘기합니다.

처음에 올리기 전에 마음을 기쁜 마음을 일으키라. 공양을 올릴 때는 고요한 마음을 일으켜서 그것을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리고 공양을 올리고 나서는 돌아가면은 당연히 행복한 마음들이 들도록, 그래서 행복한 마음을 그대로 알아차리고.

사실은 그게 기본적인 마음의 흐름들입니다.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어디에도 집착할 필요도 없이 평온한 마음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때는 앞에 있던 마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공양 올릴 때 항상 4가지를 생각합니다.

공양 올릴 스님이라는 그 대상을 생각하고, 공양 올릴 물품 공양물이든 아니면 보시금이든 또는 또 다른 물품이든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공양 올릴 때 일어나는 마음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공양 올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그런데 그 4가지 중에서 마음에 여운이 안 남아있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공양 올릴 물품이 있다, 마음에 여운이 없을 거 같으면 스님이 그걸 공양을 잡숫든 안 잡숫든 전혀 관계가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공양 올리는 중에 '아이고, 내 거 좀 더 많이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요. 아니면 좀 더 많이 잡숫기를 바라고, 그러는 거라. 그거는 내가 공양 올리는 물품에 집착하는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이렇게 (허공에다가) 스님이 글씨를 쓸 때 '심상' 이라고 읽는 것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마음에 그것이 남아있어버리면 그거는 집착이 되고 그것은 윤회의 원인이 돼버립니다. 존재욕구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런데 성자들은 그런 게 없습니다.

그냥 그 마음의 법칙을 분명히 알아서 그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공양 올리는 사람도 없고 올릴 대상도 없었고 받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허공에다 글씨 쓰면 그때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냥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흐름이고 마음의 법칙일 뿐입니다.

그게 "찟따 담마따(citta dhammata)"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봐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죠? 왜 그럴까?

애착할 것이 있고 집착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걸 가끔씩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멀리 어디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이고, 집이 최고야!” 그럽니다. 왜 그럴까? 나에게는 내가 편히 쉬고 의지할 집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이 애착의 대상이 돼있습니다. 뭐 집만 그러겠어요? 자기 가족들, 특히 자기 자식들. 그런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공허하고 무료한 걸 견디지 못하니까 주변에 뭔가를 자꾸 만듭니다. 같이 술 먹을 사람, 아니면 같이 운동을 할 사람, 그런 식으로 자꾸 뭘 만들게 됩니다. 거미줄을 칩니다.

그런데 본인이 사실은 그 거미줄에 걸린다는 생각은 안 하고 계속적으로 그렇게 애착할 수 있는 대상들, 도구들을 자꾸 만들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집이 있게 돼있고 가족이 있게 돼있고, 또 주변 동료들도 있고 좋아하는 것들 따라서 그룹들을 만들게 돼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선원에 오는 것도 꼭 그런 것들의 거의 일종이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좋은 것들 따라서 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얼마만큼 애착을 가지고 집착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들을 문제삼는 것들입니다.

 

"찟따 담마따(citta dhammata)"라고 하는 것은 마음은 그냥 흐름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의지해야 될 것은 실제로는 사실은 집이 아니고 여러분들 마음입니다. 마음을 잘 붙잡아놔야 되는 것이지 아무리 집이 좋다해서 집에가도 마음이 불편하면 그 집은 지옥이 돼버립니다.

 

이번 추석에도 틀림없이 사람들이 모이고 누군가가 또 무슨 일을 하고 하게 됩니다. 그럼 마음에 애착이 있고 집착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왜 우리는 왔는데 누구는 안 왔느냐 하면 갈등이 생겨납니다. 또는 이번에는 반드시 부모님 집에 가야 된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늦게 된다면 마음이 불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그때 일어난 마음들은 다 다르게 돼있고 그 마음들을 그냥 그대로 관찰을 해버리면 아주 평온할 건데 의지해야 될 마음은 의지하지 않고, 이런 것들을 자꾸 의지할려고 하는 거라. 집이나 가족이나 뭔가 행사나 이런 것들을 의지하고 그걸 애착의 대상으로 잡습니다.

 

요즘은 추석 풍습도 많이 바뀌었죠? 꼭 다 모여가지고 뭔가 하는 건 아니죠? 그게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 상황이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서 그런 것들은 바뀌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그 바뀐 것들을 따라가지 못하면 마음이 전에 것들을 집착하고 애착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안 맞으면 마음이 불편하게 되고 다툼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추석 지나고 나면 '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그런 마음이, 똑같은 애착의 마음이 그대로 또 생겨나게 됩니다.

 

돌아가야 할 곳은 여러분들의 마음이고, 의지해야 될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이라는 거라.

그 마음에서 어떤 것도 애착이 일어나지 않고 집착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존재욕구가 더 강하게 되는 일은 없도록 만들어야 되는 게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이라는 거라.

 

어느 신이 부처님을 보니까, 부처님은 한곳에 머물고나면 그곳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는 거라. 언제 올지 누구도 모르는 거라. 그건 부처님도 모르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모르고.

대부분 사람들은 어디 가더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부처님은 집이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집이 없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나는 집이 없어”

집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이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애착을 가지고 존재욕구를 일으키는 대상으로서 삼지는 않는다는 뜻이라. 머물러야 될 때는 최대한 머물고, 법문을 해야 될 때는 법문을 하고, 수행을 해야 될 때는 수행을 합니다. 똑같이 여러분들하고 같이 생활하는데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은 없다는 뜻이라.

 

특히 추석 같은 때는 애착이나 집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여러분들을 윤회의 고리에 자꾸 얽어매는 존재욕구는 강하게 돼버립니다. 이번 추석에는 마음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의지해서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외에 다른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그런 것들을 집착하고 애착을 가지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그리하면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부처님에게 다시 신이 물어봅니다. 집이라는 것을 먼저 물어보고 나서, 그다음에는 가족이 있는가 없는가, 그다음에 아들 딸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여러 가지 얽매이는 것들 뭐 행사나 여러 가지 행사나 모임들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가 없는가,

사실은 부처님도 다 있습니다. 부처님도 부처님을 낳아주신 어머니가 있었고, 그리고 라훌라라고 하는 아들도 있었고, 부처님이 옛날에 머물던 집도 있었고, 또 부처님이 가르치고 인도해야 될 상가도 있었고, 각각의 그룹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없다고 했을까?

 

아까 글씨를 썼을 때와 꼭 마찬가집니다. 애착하고 집착하고 하게 될 것 같으면 그것들이 다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애착하고 집착하지 않으면 그때그때 일어나는 마음의 흐름일 뿐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내가 머물고 집착하고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이 그대로 있어주질 않는다는 뜻이라.

 

존재욕구를 강화시켜주는 흐름들은 되도록이면 이번 추석에는 좀 멀리하고, 그래서 마음에서 '아, 이게 진짜 마음의 생멸의 흐름이구나' 하는 것들을 잘 관찰해서 편안하게 추석들을 보내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