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불기 2566년 안거해제_노력을 하려면 바르게 하십시요. (20221002.담마와나 선원)

담마마-마까 2022. 10. 31. 20:31

https://youtu.be/hBFAai1Xq-U

* 불기 2566년 안거해제_노력을 하려면 바르게 하십시요. (20221002.담마와나 선원)

(5:2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편하게 앉으십시오. 음, 얼굴들 한번 봅시다.

얼마 전에 태풍 불었죠? 태풍 불었을 때, 울주 선원 앞에 아름드리 나무가 하나 있어요. 혼자 하나 딱 서 있었는데 그게 그냥 뚝 부러지더라고. 굉장히 오래된 큰 나무였는데도 그게 뚝 부러졌어요. 그런데 숲에 이렇게 같이 있는 나무들은 옆으로 좀 기울기는 했어도 부러지지는 않아요. 다른 나무들이 같이 지탱을 해주니까 부러지지를 않아.

그걸 보면서 아무리 두껍고 잘났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이 세상을 지탱하고 버텨나간다는 게 참 어렵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같은 도반들이 서로 이끌어주고 할 때 그래도 부러지지는 않고 다시 또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잊지 말고, 그래도 서울에 선원이 있으니까 힘들어도 그래도 자주 와가지고 수행하고 법문 듣고 하는 것들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태풍이 불 때 그걸 보면서 '아, 참 도반이란 게 보잘것없는 도반들이라 할지라도 같이 버텨준다는 게 참 고마운 존재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내가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는데 '아, 이걸 지금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걸 계속 이렇게 노력을 해나가야 되는지' 좀 헷갈리는 때들이 있습니다.

요즘 울주 선원에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매주 토요일마다 와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그 스님이 그런 질문을 해요. “언제까지 계속해야 됩니까?” “스님이 사띠하라고 하니까 하기는 하는데, 언제까지 계속 사띠를 해야 됩니까?” 그럽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해야 돼죠? 사띠를?

 

아, 그거 얘기하기 전에, 스님은 아까 강시들을 좀 많이 봤어요.

와서 공양 올리고 절하고 가는데 마음이 여기 와있는 게 아니고 딴 데 가있으니까 강시 같애요. 그렇지 않으면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사띠가 없는 자들은 시체와 같습니다. 왜 절 하나 하는데도 사띠를 안 하고 그렇게 절들을 하고 있어요? 후딱 빨리하고 갈라고 생각하지, 마음을 그렇게 먹으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떤 경우든지 그 사띠는 무르익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노력을 해야 될까?

죽을 때까지? 뭐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되면 어떻게 돼요? 그건 시간 낭비 아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띠를 할 경우에는 결과가 나와야 됩니다.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시간 낭비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띠를 안 하고 죽은 시간이 되는 겁니다.

 

어떤 결과들이 나와야 될까?

사띠하면 맨 처음 어떻게 돼요? 대상과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그래서 두 가지가 딱 맞아떨어지면 그때 잡념도 안 생기죠? 망상도 안 생기고, 설령 다른 사람들이 소리치고 떠들더라도 그 소리가 귀에 안 들려옵니다.

쉽게 말하면 일반적일 때는 여러분들은 눈의 노예가 돼있든지, 귀의 노예가 돼있든지, 입의 노예가 돼있든지, 감각기관의 노예로서 살고 있는 형태입니다. 의식입니다.

'예쁘다' '맛있다' 이러고 산다는 거라. 그거는 그 노예로서 살고 있다는 얘기라.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씹는다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노예로서 산다는 거라.

 

그런데 사띠를 정확하게 하고 있으면 그런 소리들도 들리지도 않고, 맛을 느끼더라도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고 있는 동작을, 씹으면 씹는다고 알아차리고, 넘기면 넘긴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럼 마음은 어떻게 돼요?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마음이 깨끗한 상태로서 가볍게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구나 하는 걸 느껴야 됩니다.

그게 노력을 기울였을 때 첫 번째로 일어나는 결과물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대상을 사띠하고 있을 때는 그때의 마음은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으면 안 돼.

사띠하는 것 자체는, 사띠라고 하는 것은 항상 청정한 마음에 속합니다. 그럼 사띠하고 있을 때의 마음은 항상 깨끗하고 고요하고 부드러워진 상태가 돼있는 거라.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어쨌든 계속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대상을 알아차리고, 안 될 때는 강제로라도 마음을 거기다 갖다 붙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한시간 동안 좌선을 하고 한시간 동안 경행을 하고 하든지 해서 강제로라도 그렇게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데, 노예가 돼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라.

앉아있으니까 수행도 잘 안되고 '그냥 경행할래' 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경행합니다. 경행할 때 하면서 오만 거 다보고 '어, 예쁘네' '아, 좋다' 이러면서 또 경행을 합니다. 뭔 수행이 될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서 사띠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결과물이 나와야 됩니다.

그 첫 번째가 ', 마음이 청정해지는구나' 하는 것들을 느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지고 있는가?

이게 뭔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것이 딱 각인이 돼야 됩니다.

 

어, 내가 지금 경행을 하고 있는데, 발을 들어올리고 있다 하면 발을 들어올리고 있다 하고 분명히 알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발을 들어올릴 때는 발을 들어올리는 건 육체적인 현상이지만 그걸 아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두리뭉실하게 돼버립니다.

그냥 '내가 안다'고 돼버립니다. 수행하는 게 뭐 때문에 그러는데?

 

맨 처음이 수다원과에 이르러야 되는 겁니다.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맨 처음에 깨져야 하는 것이 「유신견」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신견이 깨지면 나머지 두 가지는 점점 더 엷어지면서 깨져버리게 됩니다.

그럼 이게 뭔지 분명하게 알 때는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서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돼야 됩니다. 그게 정신적인 현상인지 육체적인 현상인지 그걸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가 있게 되고,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져야만이 '아, 내가 이 대상을 분명하게 알고 있구나' 하고 얘길 할 수가 있다는 거라.

마음의 청정과 지혜의 청정이 서로 어울려서 일어나지 않으면은 바르게 노력하고 있지 않는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첫 번째, 노력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뭔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라. 괜하게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노력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라고 할 것 같으면 스님이 한시간 동안 좌선하고 한시간 동안 경행하라고 하니까 용을 씁니다. 한시간 동안 그 시간 채울려고. 고생하고, 무슨 뭐 극기훈련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노력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한시간 동안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들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뽀틸라 얘기 다들 아시죠? 육문(六門) 중에서 "다섯 가지는 막아버리고 하나의 문만 열어놔라." 오소리를 잡듯이 오소리가 나오는 찰나 간에 탁 그때 오소리를 잡아야만이 되는 거라.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에 분명하게 그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순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찰나 찰나를 사띠를 하지 않은 상태가 되면 그건 노력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찰나 찰나에 사띠가 이루어져야만이 내가 지금 바른 노력을 하고 있다는 뜻이라.

오소리를 잡을 때는 딱 정확한 그 타이밍에 손을 탁 뻗어야만이, 오소리가 나올 때 손을 뻗어야만이 오소리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오소리 굴에 문은 여러 개가 있기 때문에 다른 문은 다 닫아버리고 한 문만 보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라. 한시간 동안 좌선을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다른 거는 다 닫아야 됩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거 여기는 없나? 대부분 선원에 가면 원숭이 해가지고 요렇게 표 되어있는 거 봤죠? 손으로 눈 가리고 입 가리고 코 가리고 하는 거, 선원마다 가면 그거 대부분 다 있습니다. 왜 그래놨겠어?

 

오온을 스스로 방어해야 된다는 거라. 오온을 방어하지 못하면 수행은 딴데로 흘러가버리게 되고 그냥 개념적으로 흘러가버리게 됩니다.

이왕 노력을 할 거 같으면 그냥 용을 쓰지말고 다른 거 다 닫고 하나만 열어놓고 하는 것들로 노력을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조금 전에도 빤냐완따 스님한테 계를 받았죠? 받고나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계는 반드시 받았으면 그날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은 지켜야 됩니다. 계를 지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돼야됩니다. 자연스럽게 되지 못하면 그것은 용을 써서라도 억지로라도 그 계는 반드시 지켜야 됩니다.

특히나 지금은 안거 기간 중입니다. 안거 기간이면 팔계를 지켜야 되는 게 테라와다 불자들의 의무입니다. 오후에는 그럼 먹지 말아야 돼. 용을 쓸 때는 그런 것들로서 용을 써야 되는 거라. 계를 지키면서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의 생활로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다음이, 이왕 수행을 할 거 같으면 대상이 변하는 것들이 보여야만이 그 대상들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변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것들을 쫓아가기 바쁘기 때문에 앞에 것들을 집착할 여유가 없습니다.

대상은 진짜 빨리 변합니다. 여러분들 시간은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이 시간도 여러분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이라. 뭘 망상하면서 그 시간을 보내고 뭘 딴 것 하면서 보낼 시간이 어디에 있어요? 집착할만한 것도 없고 다른 것도 할 여유도 없다는 거라.

이생은 여러분들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는 시간들입니다. 이 시간도 여러분들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냥 그대로 사띠하면서 보내야 되는 시간이지 어떤 것들에 집착할 수 있는 시간들은 아니라는 거라.

 

쉽게 말해서 「바른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바른 노력이라고 그럽니다.

내가 오온을 잘 방어하고 있는지,

내가 계를 지키는데 자연스러워져 있는지, 쉽게 말하면 수행하기 위한 밑바탕이 되어 있는지,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면서 집착하는 것이 없는지,

그 세 가지가 될 것 같으면 지금 내가 바르게 노력하고 있는 거라. 바르게 수행을 하고 있는 거라.

 

그다음에,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는데 그걸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대상은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는데, 배가 불러오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걸 정확하게 뭐라고 말을 못하는 거라. 그래서 앞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나, 뒤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나 구분을 못하는 거라. 노력은 분명히 하고 있는데.

과연 그 마음에 탐진치가 없이 지금 사띠를 하고 있는 걸까?

탐진치가 없이 사띠를 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게 다른 것을 분명히 봐야 되는 거라. 이게 안 보이는 거라.

 

혹시 화가 났을 때 누가 관찰해본 사람 있어요? 만약에 누군가가 뭔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다, 무슨 소리를 듣고 나한테 화가 확 일어났다, ‘나는 수행자니까 화가 일어난 걸 관찰해야 돼’ 화를 관찰했다. 그것까지는 할 수 있겠는데, 왜 관찰했죠? 화를 일으킨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하나의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노력은 했지만 실감은 못한다는 것은, 거기서 끝나버린다는 거라. 화가 일어나는 걸 관찰을 하긴 했는데, 이게 왜 화가 일어났는지를 모른다는 거라. 왜 화가 났죠? 왜 화났어요? 그 소리를 듣고 마음에서 그 소리를 밀어내는 거라.

 

대상을 밀어낼려고 하니까 화가 일어나는 거라.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애착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니까 집착을 하게 되는 거고.

수행은 대상을 밀어내거나 붙잡을려고 해서는 수행이 안 됩니다. 그럼 적어도 내가 이걸 밀어낼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면 밀어낼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려야 돼. 집착할려는 마음이 생겼으면 집착할려는 마음이 생겼다고 알아야 되는 거라.

그것 정도는 알아야만이 수행하는데 ', 내가 수행하는 실감이 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거라.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밀어내고 집착하는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어,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 집착하는 마음을 관찰을 해야 되는 것이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밀어낼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밀어낼려는 마음을 먼저 관찰을 하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가벼울 때 다시 대상을 알아차려야만이 그 대상이 변하는 것이 보인다는 거라.

 

그렇게 관찰을 해보니까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앞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과 뒤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길이가 다르든지 아니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강도가 다르든지 뭐가 다르다는 걸 알아야 되는 거라.

다름을 알 때 무상을 알 수 있는 포인트가 탁 맞춰지게 됩니다.

 

아까 남의 말을 듣고 화가 일어났죠? 화를 탁 관찰했다, 관찰해보니까 '어, 내가 금방 그 말을 밀어낼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면 몸은 어떻게 변할까? 신체 변화는 감지를 합니까?

분명히 다릅니다. 갑작스럽게 신체가 탁 바뀌는 것이 느껴집니다. 심장소리도 그렇고 신체의 열기나 이런 것들도 그렇고 탁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노력한 만큼 자기가 실감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실감을 못해? 그냥 자동적으로 아니면 그냥 의무적으로 할려고 해서는 그거는 수행이 아닙니다. 괜한 시간낭비이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 있고 노력을 할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실감들을 분명하게 찰나 찰나 간에 느낄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하루 만에 되는 건 아니죠?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런 결과물들은 자꾸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수행은 점점 더 향상되어 나갑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아까 스님이 맨 처음에 노력은 결과를 내야 된다 하고 얘기하니까 그 결과만 낼려고 자꾸 노력을 합니다.

여러분들 목표는 뭐죠? 해탈하는 거죠!

그럼 오늘 목표는 뭐죠? 해탈하는 겁니까?

한시간 동안 좌선하고 있으면 한시간 동안 좌선하고 있을 때의 목표는 뭐죠? 그것도 해탈하는 겁니까?

 

스님들은 수행을 할 때 좌선 삼매에 들어갈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삼십분 동안 삼매에 들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딱 수행을 하면 삼십분 동안 좌선삼매에 들어갑니다. 또는 '누군가 “스님 공양하세요” 하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나는 깨어나겠다. 다른 소리에는 일절 반응하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다른 소리는 안 들리는데 “스님 공양하세요” 하는 소리는 딱 정확하게 들립니다. 그건 해탈하는 거 하고는 관계없죠?

 

목표는 해탈이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들은 한 시간이면 한 시간의 목표가 따로 있습니다.

'이 한 시간 동안 적어도 사띠를 놓치지 않고 수행하겠다'

'이 한 시간 동안은 망상 안 부리고 수행하겠다.'

강한 결의를 가지고 수행하지 않으면 그냥 뜬구름 잡는 것이 돼버립니다. 지금 당장 한 시간도 잘 못하는데 언제 해탈할 거라?

그게 쭉 이어져서 마지막에 해탈을 하는 건데, 지금도 못하는데 내일 할 수 있어? 못한다는 거라.

 

바라밀 중에서 아딧타나(adhiṭṭhāna) 라고 해서 결정심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때 깨달음에 이르게 했던 가장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이 아딧타나 입니다. 수자따의 공양을 받고 '내가 이 자리에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아딧타나를 탁 내지 않았으면 힘든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수행은 순간순간 하는 것이지 먼 미래에 목표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스님들이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매일매일 쫓아가기 바빠요. 한 몇페이지 되는 걸 빨리어로 외우고 오라고 그래요. 이 책 언제 다 마친다는 거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선은 지금 그거 몇페이지 외워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내일 수업에 들어가서 수업 참관을 못해. 무조건 외워야만이 그 수업을 들어갈 수가 있는 거라. 그럼 수업 듣기 위해서는 그걸 외워야 되는 거라. 오늘 외우고, 내일 외우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어느새 그 한권의 책이 외워지고, 그 한권을 다 떼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수행을 할 때 그냥 수행한다는 핑계만 대지 말고,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실천하면서 그것들의 목표들을 세워서 자꾸 나아가도록 하는 형태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매일 매일 조금 조금씩 하면은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한 시간 했던 거하고 뒤에 한 시간 했던 거하고 차이가 있는 게 분명히 보여집니다.

결정심을 내고 '내가 이번에는 사띠를 놓치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한번 해보십시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게 흘러가는 것이 보입니다. 일어나는 것이 사라지고 나서 사라지는 것이 또 일어나지게 되고, 그 흐름이 보인다는 거라.

그런 흐름들이 보이면 수행할 때 '내가 나의 관념들, 나의 생각들, 나라고 하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지게 되는 거라.

 

꿈은 크지만 지금 현재 해야 되는 것들은 순간순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그날 목표들을 분명하게 할당해서, 그걸 결정심을 내고 수행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성취를 했을 때 '아, 참 내가 오늘 잘했구나' 하는 마음들이 들게 됩니다.

 

그다음에, 노력하는 것은 경전에는 그렇게 돼있습니다.

"이상적인 노력은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러분들 마음에 탐, 진, 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특히나 지금 수행하시는 분들은 탐, 진은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할지 모르는데 치_게으름 부리는 것들은 기승을 부립니다. 눈에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스님이 60대 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행을 해보면 수행에 힘이 딸리는 게 느껴집니다. 20대, 30대 때는 힘이 딸린다고 안 느꼈거든. 그런데 20대 30대로 갈 수 있습니까? 리셋 버튼을 탁 누르면 탁 돌아가져요? 못 돌아갑니다.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다시 리셋해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마음을 청정히 하고 더러움을 제거할려고 하지 않으면 점점 나이가 들면 들수록 힘들어집니다. 언제 할려고 그래?

 

적어도 죽음에 이르러가지고 '아, 나 살고 싶어! 죽기 싫어!' 하는 그런 마음은 일어나지 않아야 될 거 아니라. 청정한 마음으로 그래도 아, 숨을 관찰하면서 편안하게는 죽어야 될 거 아니라. 다음생을 좌우하는 가장 큰 것이 일반적인 것이 그것들이라는 거라. 마지막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이 다음 의식을 좌우합니다.

크게 죄를 짓지 않고 크게 잘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닐 거 같으면, 대부분은 그렇지는 않거든. 그럼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이라. 적어도 그거 하나는 해야 될 거 아니라.

 

시간이 다 되어서, 이런 것들이 바른 노력의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이 엷어지고,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다가, 완전히 유신견이 탁 떼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도의 흐름에 탁 들어가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해야 되는 노력들은 또 따로 있습니다. 그건 다음 시간에 시간이 되면 그 부분에 대한 노력들도 다시 설명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노력을 할려면 바르게 하십시요.

수행할려면 수행답게 해야 되는 거고, 지금 이생을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가야 됩니다.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야 되는 것이지, 얼버무려가면서 살려고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그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