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2년 붓다의 길따라 선원 안거해제법회 및 수계식 (20221008)

담마마-마까 2022. 11. 9. 18:11

https://youtu.be/O5C5RcFJKTQ

* 2022년 붓다의 길따라 선원 안거해제법회 및 수계식 (20221008)

"도반이 있음으로 인해서, 안거 기간이 있음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이익 일곱 가지"

(7:2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법문을 간단하게 하고 수계식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물이 뭐가 있어요?

뭐를 가지고 행복해지는 거라? 나이 드신 분들은 손주들 재롱부리는 거?

(수행자 : 질병 없이 오래 사는 것...)

오래 사는 거? 장수도 행복을 가져다주기는 하겠지. 오래 살고 싶은 모양이지?

(수행자 : 아닙니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물이 주변에 많으면 참 좋은데, 그래도 여러분들은 그런 보물이 옆에 많이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거 말고, 재산이나 아니면 오래 사는 거나, 아니면 가족이나 이런 것들 말고, 어쨌든 여기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하면 여러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도반들입니다.

 

가장 큰 보물은 나에게 같이 수행할 수 있는 도반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반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들이 많아요.

사실은 가장 고마워해야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가장 행복해야 되는데, 가끔씩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같이 수행하는 도반이니까 “도반인데 이런 얘기도 못해? 도반이니까 이런 부탁도 못 들어줘?” 그럽니다.

도반은 그런 관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죠? 세속적인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만큼 나를 잘 이끌어서 도와 과에 이르게 하는가 하는 것들, 수행과 도에 대한 것들이 도반의 영역에 포함이 됩니다.

 

그외에 것들을 도반들한테 바란다든지 아니면 내가 그런 도반이 될려고 노력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아닙니다. 물론 그중에는 사회적인 친분이 있어야 같이 수행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친분을 쌓기 위해서 뭐 여러 가지 부탁들도 하고 또 부탁들을 들어주는 경우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거는 그냥 친구 관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지 도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들 곁에 도반들이 많으려면 여러분 자신이 도반이 되어야 되겠죠?

절대 내가 도반이 되지 못하면 내 주변에는 도반이 형성이 안 됩니다.

좋은 사람 옆에 좋은 사람들이 같이 모이게 되는 것이지, 악한 사람 옆에 좋은 사람들이 붙어있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여러분들은 그래도 삼개월간 같은 도반들하고 같이 수행이라도 좀 할 수 있고 또 법문을 들을 수가 있고, 그래서 사실은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들은 이런 도반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스님도 법문을 할 때 법문을 듣는 대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죠.

여러분들을 부를 때 제자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도반이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부처님 제자들을 부를 때와 부르는 것이 똑같습니다. 「아우소(Avuso)」, 「반떼(Bhante)」라고 부르게 됩니다. 아우소, 반떼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같은 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인데 일찍 그 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 반떼가 되는 거고, 뒤따라 오는 사람들이 아우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거는 평등한 입장이기 때문에 동료이자 친구가 도반이라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여러분들은 저한테는 똑같은 도반입니다. 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 그러면은 그런 도반들, 수행을 하는 자들과 같이 있으면 어떤 이익들이 있을까?

 

안거 때 어떤 이익들이 있었어요? 맨날 일주일에 한번씩 팔계지키라 하니까 귀찮죠?

그런데 오계 지키는 거보다 팔계 지키는 것이 조금 더 어렵죠? 아마 틀림없이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팔계를 지키면 어떤 이익들이 있어요? 좀더 마음이 안정이 됩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그러면 당연히 수행을 좀 더 할 수가 있겠죠. 또는 그 시간들을 좀 더 선한 일에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반들과 같이 불재일에 참석하고 한다는 것은 내가 선한 사람들, 선우가 되는 첫째의 조건이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극구 평상시 때 오계를 지켜라, 또는 이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이런 불재일을 정해서 팔계를 지켜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계를 지키는데 용을 쓰고, 또 계를 지키는데 너무 형식적인데 빠져버리고, 계를 지키기는 하는데 다른 나쁜 일들을 많이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은 악한 것들이 많이 물들게 됩니다. 그런데 어떡하나,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선한 사람이 돼서 선한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형식적으로 되다보면 자꾸만 악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은 악한 과보들을 그대로 또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악한 결과들이 자꾸 일어나니까, '나는 계를 잘 지키고 하는데도 왜 이렇게 나에게 나쁜 일들만 자꾸 일어날까' 하고 자꾸 다른 데서 그 핑계거리를 찾을려고 합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이런 안거 기간 동안에 선한 마음들이 많이 일어난 사람들이 되었는지 한번 스스로들 다 자자, 자책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조금은 더 선한 마음이 많이 일어났을 거라고 스님은 생각을 하겠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안거 기간중에 수행을 하면서 위빳사나 열여섯 단계 중에 한두 단계라도 성취를 한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자기가 이때까지 만약에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 있는 상태는 됐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갔어요? 원인·결과가 분명히 보인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그것들이 무상한 성품으로 보였다든지, 아니면 그 현상들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보여서 그것이 멈추는 데서 의도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든지, 그래서 그다음 일어나는 것이 생기는 것들이 보였다든지, 조금은 성취가 있었습니까? 아마 있었을 거라고 스님은 짐작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안거기간 동안에 여러분들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바로 이 두 번째, 그런 지혜입니다.

선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지혜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도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지혜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스님도 그 선우나 도반에 속하는 겁니다. 수행에 대한 질의응답을 해주고, 부처님 가르침을 대신해서 법을 전해주기 때문에. 그래서 어떨 때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아, 수행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거 같으면 나는 여러분들한테 좋은 도반 노릇을 한겁니다.

수행을 해나가면 조금씩 조금씩 지혜가 하나씩 더 높아져야 되는 것이지, 그 지혜가 일어나지 않고 그냥 똑같은 패턴으로 흘러가버리면 안됩니다. 아마 그런 도반들이 있었고, 그런 수행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러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흐리멍텅한 상태에서 똑같은 패턴으로 살게 됩니다. 똑같은 수행을 지속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스님 아버님이 아직 생존해 계시는데 지금 응급실에서 아마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 거 같애요. 아마 얼마 안 가서 운명을 달리 할 상태가 될 거라. 대부분 그럴 거 같으면 힘듭니다.

그런데 그 힘든 상태에 있어도 마음은 괴롭지 않고 평온한 상태가 되도록 하라는 겁니다. 수행을 해나가는데 다리가 구부러져 있으니까 한시간 앉아있을려니까 고통스럽고 힘든데, 그것들을 관찰하다 보니까 마음은 그냥 그것들을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괴로운 현상들을 관찰을 하니까 마음은 전혀 괴롭지가 않거든. 물론 그런다고 해가지고 다리가 괴로움에 빠져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다리를 풀려면 다리 펴기가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괴로움 속에 있지만 그 괴로움을 받지를 않는 상태가 됩니다.

 

수행기간에 수행을 해나가면 그런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어떤 상태에 빠지든지 그 마음은 괴롭고 즐겁고 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스님이 서울 가면 누군가가 간호사 분이 닙부띠라고 하는 간호사입니다. 꼭 영양제를 놔줍니다. 영양제를 맞으면 한 삼일간은 굉장히 힘이 있어요. 딱 3일 가더라고. 그게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계속 유지가 되나가다가 3일 지나고 나면 뚝 떨어져요. 그걸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스님이 올라갈 때마다 '아, 이번에도 또 영양제 맞겠지' 하고 바랍니까? 그건 아니겠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런 좋은 것을 맞고 이래서는 안된다 해가지고 안 맞습니까? 그건 아니라는 거라.

 

즐겁고 괴로운 것들은 우리가 언제든지 받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를 해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 잘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마음은 항상 그렇게 평온한 상태를, 어떤 조건이 있더라도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괴로운 일이 있지만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즐거운 일이 있지만 즐거움에 당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정신적으로 잘 극복해내는 것도 같은 도반들과 같이 수행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이익들입니다. 이런 수행기간 동안, 안거기간 동안에 얻을 수 있는 행복 중에 또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 가족 중에 서열이 몇번 정도 될까? 대부분 나이들면 서열이 자꾸 떨어지죠?

(수행자 : 서열이요? 서열이 일등입니다.)

일등입니까? 그럼 고집 많이 부리고, 막 시키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하고 그러겠네? 자기 주관이 강하고?

(수행자 :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가장이니까 일등이죠.)

가장이라도 인제는 돈을 못 버는 가장이잖아?

(수행자 : 그래도 일등입니다.)

그래도 일등이라? 그래. 그렇게 그게 진정한 일등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가족들 친족들 중에서도 그래도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아, 저 사람을 보면 나는 저 사람 따라서 살고 싶어, 저 사람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냥 위계질서로써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나 삶의 형태들을 보고 '아, 그 사람이 그래도 최고야'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저 사람은 절대 거짓말도 안 하고, 남을 해치는 것도 안 하고, 마음을 항상 자비롭게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들을 일으킬 수 있도록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은 "아, 참 뛰어난 사람이다" 하고 인정을 해주게 됩니다.

 

수행이 잘 되어나갈 때 마음이 고요해지면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설혹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더라도 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러분들은 그 무리 속에서 더욱더 빛나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냥 힘으로, 아니면 서열로써 누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런 사람들이 되어나갈 때 '아, 참 잘 살아왔구나' 하는 마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서 존경하는 마음들이 생길 수 있도록 되는 것이 여러분들이 나아가야 될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그게 네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대부분 동남아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왜 수행합니까? 또는 왜 보시하고 좋은 선행들을 합니까?" 하고 물어보면 뭐라고 그래요? "사후 천상세계에 태어나고 싶어서!" 대부분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걸까? 아라한이 되지, 왜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걸 목표로 할까?

과연 그러면 여러분들은 수행한다고 하면서 좋은 도반들하고 있으면서 이런 수행기간 동안에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조건들은 만들고 있는 건가?

 

예를 들어봅시다. 가끔씩 스님은 태국에 가서, 특히 동북부쪽에 가면 거기는 참 많이 가난합니다. 거기 제자가 있기도 한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진짜 측은한 마음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들 하고 같이 우는 것도 아니지만 항상 측은한 마음들은 계속적으로 내줍니다. 까루나라고 그러죠?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을 거 같으면 자기가 오늘 일을 하지 않으면 일당을 못 받아. 그러면 가족들이 먹고 살기가 참 힘든데도 절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와서, 그냥 그일 팽개치고 와서 그냥 해주는 거라.

 

왜 그러냐하면 그 절이라고 하는 곳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고 수행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판단들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내가 일에 대한 애착이라든지 가족들에 대한 애착보다는 그보다 더 좋은 것들을 찾는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과연 그런 애착들이 얼마나 엷어졌을까?

탁발을 그쪽 지역에서 나가보면 가장 따뜻한 밥을 만들기 위해가지고 무던하게 노력을 합니다. 자기들은 집에 가서 식은 밥을 먹을지언정 스님들한테 공양올리는 거 맨 처음 지어서 아주 보슬보슬한 거 그걸 따뜻하게 유지할려고 참 많이 노력들을 하는 것이 보입니다.

 

가족들에 대한 애착이나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들이 없어야만이 천상세계에 태어납니다. 그것들이 있으면 절대 천상세계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겨우 잘해봐야 사람들이 기르는 동물 정도? 또는 아주 재수가 좋으면 아주 낮지만 힘들게 살아가야 되는 것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력 안 해도 잘 살 수 있는 부유한 가정에 태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애착을 버릴 수 있는 도구로써 그렇게 탁발공양 올리고 또 그러기 위해서 천상세계를 원하는 것 그거는 좋은 거다. 물론 아쉬운 부분은 있겠죠. 수행할려고 안 하고 자꾸 바라밀만 쌓을려고 자꾸 그럽니다. 그런 부분은 아쉬운 부분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라밀조차도 올바르게 쌓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 한데 천상세계에 태어날려한다고 그 사람들한테 뭐라 할 수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들이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느냐는 거라.

 

도반들이 있으면 그 도반들하고 같이 항상 선한 일을 할 수가 있고, 수행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천상의 세계에 태어날 좋은 조건들을 갖추게 됩니다. 이런 안거기간 동안에는 더더욱 열심히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다섯 번째입니다. 천상세계로 나아가는 것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뭘 봐도 뭘 해도 행복한 것들, 뭘 봐도 긍정적인 것들, 그게 떠나지 않는 겁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그럽니다. 남들 험잡고 비난하는 쪽으로만 많이 발달돼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더라도 꼭 나쁜 것들만 먼저 보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마음속에 기쁨이 없는 거라. 마음속에 행복감이 없는 거라.

그런데 수행을 하면 할수록 법의 기쁨들을 맛보기 때문에 항상 기쁨의 마음들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보더라도 좋은 것들이 보이게 되는 거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 기쁨들을 같이 누릴려고 하고, 행복한 것들을 같이 누릴려고 하게 되는 것이지,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지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자꾸 누리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속에서는' 아, 그래도 이런 수행을 할 수 있고, 이런 법을 들을 수 있고, 이런 보시를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마음들로 항상 가득차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일곱 번째, 여러분들은 어쨌든 수행을 시작을 했으면, 어느 누가 오늘 수계하는 사람들 중에서 바라는게 "이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는 얘기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래야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계속 쳇바퀴 돌듯이 뭐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뭐 다른 중생으로 또 태어났다가 쳇바퀴 돌듯이 하는 거 참 힘이 듭니다.

윤회는 거대한 강이라고 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강물도 바다에 닿습니다. 종착역에 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윤회도 언젠가는 끝나는 때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수행은 그런 흐름과 같습니다.

한 단계가 흘러갔으면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 단계가 흘러가지면 그다음 단계가 생겨납니다.

도라는 것도 거대한 흐름입니다.

그 흐름에 자꾸 들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자꾸 갈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주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도의 흐름, 도로 가는 흐름의 길로 가는 건지, 아니면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샛길로 빠진 건지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도의 흐름으로 자꾸 나아가도록 만들어서 도와 과를 이루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이 여러분들이 목표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일어나는 일초일초 찰나찰나를 사띠하는 것뿐이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되지, 그걸 놓쳐버리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도의 흐름으로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도반이 있음으로 인해서, 또는 이런 안거 기간이 있음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고 이익입니다.

인제 삼개월 기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길을 알았으면, 그 맛을 봤으면 그것을 계속 따라가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이 해제가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들한테 좀 더 나은 삶이 되고 나은 조건들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자꾸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하고 수계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수계자 세 사람, 처음에 홍면희님은 맨 이쪽에, 그다음 두 번째 박도신, 그다음에 김제근 이쪽으로, 나머지 분들은 이쪽으로 (빙 둘러서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수계의식 시작하십시시오. 나모땃사부터 같이 하십시오.

~~~

세 사람 다 들으십시오.

계사스님은 계를 주는 여러분들 스승은 빤냐와로입니다. 다시 복창해보십시오. 빤냐와로 (빤냐와로)

 

홍면희님은 빨리어 법명이 아바니- 입니다. 아바니-는 토지라는 뜻도 있고, 토대라는 뜻도 있고, 또는 집안을 지탱해주는 어머니라는 뜻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윤회의 흐름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라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강을 따라 계속 거슬러 올라갈려면 힘이 듭니다. 그리하더라도 수행을 한단계 한단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간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살아라 하는 뜻으로써 아바니-라고 했습니다. 아와니 아봐니 이렇게 하기도 하는데 그리하면 발음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편하게 발음되는 아바니라고 하는 뜻이 맞을 겁니다. 그래서 아바니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박도신님은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가 선정과 수다원에 이르는 자가 되고 싶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선정과 지혜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이걸 다 수렴할 수 있는 글이 뭐가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이름을 윗자야 라고 지었습니다.

윗자야라고 하는 것은 명지자(明知者) 라는 뜻입니다. 밝을 明자는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선정에 통달한 자'라는 뜻입니다. 지는 알지(知) 자를 씁니다. 그래서 '지혜를 갖춘 자' 또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삼명에 통달한 자'라는 그런 뜻입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다 구비한 자들을 뜻할 때 명지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빨리어 이름이 윗자야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윗자야 입니다.

 

김제근님은 아무거나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행동은 아무거나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지은 거는 자신의 행위는 자신이 받는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걸 항상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사깜마라고 지었습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의 책임이지 어떤 다른 것들이 책임이 될 수 없고, 탓을 하면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사깜마입니다.

선한 행위를 자꾸 지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악한 행위들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 깜마의 법칙은 분명합니다. 하나를 지었으면 하나의 결과가 일어나면 참 좋은데 그렇지 않고 여러 결과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는 여러 원인들이 모여야만이 하나의 결과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좋은 일들을 많이 지으십시요. 그런데 나쁜 행위 하나는 한번 내가 결과를 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번 받는다고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게 사깜마입니다. 사깜마라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선한 일들을 자꾸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 사람 법명이 아바니-, 윗자야, 사깜마 입니다.

지금부터 스님이 그걸 인정하는 게송을 하겠습니다.

수나뚜메 반떼 상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