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2년 까티나축제_시간은 숨어서 알 수가 없다 (20221029)

담마마-마까 2022. 11. 10. 21:19

https://youtu.be/By2rfGfehHM

 

* 2022년 까티나 축제_시간은 숨어서 알 수가 없다 (20221029)

 

오늘은 까티나 가사날이기도 하고, 이제 스님들이 가사를 받고 나면 만행을 떠날 수 있는 그런 때이기도 합니다. 스님들은 사실은 만행을 가면 거기서도 수행을 하고 또 법문을 하고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재가자들은 보통 까티나가사가 끝나고 나면 인제 올해의 일은 다 끝났다 하는 생각으로 안이하게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오늘은 법문을 「시간은 숨어서 알 수가 없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2014년도에 보니까 스님이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제목으로 한 스무 페이지 복사본을 내준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인용했던 게 사밋디 존자에 대한 얘기를 중심으로 해서 적었습니다. 오늘도 사밋디 존자에 대한 것을 가지고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사밋디(Samiddhi) 스님은 일찍 출가를 했죠? 젊었을 때. 사리뿟따 존자를 스승으로 해서 출가를 했습니다. 스님도 일찍 출가를 했는데, 어쨌든 일찍 출가한 스님들은 장애가 뭐냐면 굉장히 유혹이 많습니다. 그래서 태국이나 미얀마 같은 경우에 보면 오래도록 출가생활을 하는 분보다 출가 생활을 일찍 끝내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본인은 오래도록 하고 싶은데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아. 조금 공부 열심히 한다, 아니면 좀 잘생겼다 그러면 어쨌든 저 스님을 데려가고 싶어하는 거라.

 

스님도 태국에서, 스님은 잘생긴 건 아니죠? 잘생긴 건 아닙니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팔계를 지니는 청신녀들을 매치(Maechi)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분홍색 승복을 입고 절 안에서 지냅니다. 그 매치 중에 한 분이 매일 방문 앞에 와가지고 합장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공양물 올리고 그러기에 '아, 그런 갑다' 이렇게 했는데, 매일 같이 그렇게 와있고 꾸띠 옆을 청소를 하고 그러더라고. 나중에 주변 스님들이 자꾸 나한테 얘기를 하는 거라. 저 매치가 왜 스님 방앞에 와있는지 아느냐? 난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스님이 좋아가지고 스님을 데려가려고 매일 방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거라.

출가 생활을 할 때는 어떻게 데려갈 방법이 없으니까 밖에서 매일 그렇게 공양물 올리고 뭐하면서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 그러면 마음이 동해버리면 그분 따라서 승복을 벗고 나가야 되는 거라. 그래서 도저히 그 사원에서 못지내겠다 싶어가지고 다른 데로 옮겼어요. 치앙마이 쪽으로 옮겼는데 나중에 그쪽으로도 어떻게 알고 또 왔더라고. 그래가지고 그 매치 덕분에 세 군데를 스님이 옮긴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경전에 나오는 사밋디 장로도 꼭 그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젊을 때 출가를 했는데, 젊을 때 출가하면 이익이 또 뭐냐 하면 공부를 아주 짬지게는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사마디 수행도 할 수 있고 위빳사나 수행도 할 수 있고 경전공부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이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빨리 성과가 있습니다.

그건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지금 나이드신 분들은 아깝게도 수행하면 힘이 딸리는 걸 느낄 겁니다. 젊었을 때는 전혀 그런 힘이 딸리지를 않거든. 그런 얘기까지 있었습니다. 책을 놔놓고 책장만 싸악 넘겨도 그 글씨가 그냥 머리속에 다 박힌다고. 진짜 그렇거든 젊었을 때는. 그 정도로 수행하고 경전공부하고 하는 데는 참 도움이 많이 되는데 그만큼 또한 장애가 많이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밋디 장로에게 천신 중에 여신이 있거든. 여신이 와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 왜 젊었을 때 열심히 가정생활하고 열심히 돈 벌고 또 열심히 누릴 거 누리고 그리 안 합니까? 그러고 나서 나이 들어서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해도 늦지 않는데 왜 그냥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느냐는 거라. 출가를 해가지고.

"시간을 그냥 보내지 마십시요"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수행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수행한다고 금방 결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오욕락을 즐기는 건 맛있는 걸 먹으면 금방 혀에서 맛있다 하고 금방 알게 됩니다. 뭔가 즐기는 거리들을 찾으면 금방 그것들을 아는데, 거 왜 그걸 안 하고 수행한다고 앉아가지고 그렇게 있느냐는 거라.

"젊었을 때는 젊었을 때의 나이에 맞게끔 놀고 나서 나중에 수행하고 그리해도 안 늦습니다" 하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때 이 사밋디 존자가 이 여신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시간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리고 그 시간이라는 것은 숨어서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을 절대로 헛되이 보내지는 않고 있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어제도 있었고 또 오늘도 있었고 또 앞으로 미래도 있을 겁니다. 그걸 확신할 수 있습니까? 또 그런 시간이 있으면 예측이 가능하면 여러분들 죽을 때 언제 죽을지도 알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 병이 들 때 언제 병이 들지 알 수가 있습니까?

 

며칠 전에도 스님은 아버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으로 남긴 게 돌아가시고 나서 그냥 나를 화장해서 흩어버려라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가족들이 다 반대를 하는 거라. 어머님은 화장을 해가지고 납골을 모셔놨는데, 아버님은 어쩔 수 없다. 아버지도 납골을 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출가한 스님의 입장에서는 그럼 어머님까지도 흩어버리면 되겠네 이렇게 하고 싶은데 차마 그 얘기는 못하는 거라. 왜 그러냐면 그거는 남아있는 가족들의 몫이기 때문에 출가스님 입장만 내세우지를 못하니까 뭐 그렇게 하시오 스님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흩어버려라 했는데 유족들은 안 흩어버리고 그냥 그걸 모시는 거라.

 

사후라고 하더라도 내가 죽고 나서 내가 어떻게 될지 하는 것도 사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목숨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내가 언제 병이 걸릴지도 모르고 또 언제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거라. 그리고 나서 죽고 나서도 그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알 수가 없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거는 죽고 나서 어디로 갈 건데? 여러분은 천상세계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시간은 여러분들은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른다는 거라. 그런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목숨은 뭐로 이루어져 있어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라.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알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이 작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도 몸이라고 하는 의지처가 없으면 마음이 작용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만 아무리 모셔놔 봐야 그것은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못한 것이 되는 거고, 마음만 혼자 영혼으로 존재를 해봐야 그걸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몸과 마음이 있어야만이 여러분들을 여러분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몸과 마음을 수행 대상으로 해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보니까 아, 이것은 느낌이구나. 텁텁한 느낌이고 무거운 느낌이고 가벼운 느낌이구나. 뭔가를 내가 또 알고자 할 것 같으면 아, 이것은 뭐구나. 인식할 때는 이것은 뭐구나 하고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오온을 낱낱이 알아서 그것들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게 될 때 그 어디에도 집착을 안 하게 됩니다.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느낌이 일어난 것들을 사띠할 뿐입니다. 그러면 그 느낌은 당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 사라진 것에도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온을 철저히 알고 그 오온을 무상 고 무아로써 분명하게 관찰을 하게 될 때, 그러면 그 오온은 개별적으로 다 연관성이 있고 그 오온에는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세 가지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오로지 현재에만 살아가게 됩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를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만이 존재를 할 뿐입니다.

현재에 존재할 거 같으면 여러분 죽을 때 죽는 줄을 분명하게 알게 될 거고, 그렇게 내가 죽고 날 거 같으면 내가 죽고 나서 적어도 악처에는 안 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시간은 오온을 모르면, 오온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시간을 모르는 사람이 돼버리고, 오온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시간을 지배하고 시간을 아는 자들이 돼버립니다.

 

가사축제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은 좀 많이 해이해집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들도 조금씩 등한시 할 가능성들도 커집니다.

그런데 사밋디 존자를 스님이 들먹였던 이유는 뭐냐면

"지금이 여러분들은 젊을 때입니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더 늦어집니다."

그냥 대충 공덕만 쌓고 이생에서 살아가는데 내가 가장으로서 내가 부모로서 해야 될 의무들만 다하고 그냥 생을 마치면 된다? 그런 안일한 것이 없습니다. 내 생명이 언제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안일하게 보낼 수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들은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 망 깔-- 우빳짜가- (mā maṁ kālo upaccagā.) 그럽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말아라!

 

지금 해야 될 일이 까티나 가사 올리는 겁니까? 아니면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이 가정에서 충실하게 하는 것이 지금 해야 되는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까티나 가사를 올리든 아니면 집안에서 해야 될 일을 가장으로서 해야 될 일을 하든 어떤 경우든지 사띠를 놓치지 않는 삶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수행자로서 살아갈 때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끔 됩니다. 그럴 때 그 까티나 가사는 공덕이 배가될 것이고 해야 될 일을 하게 될 때는 그 속에는 탐진치가 없이 살아가게끔 된다는 겁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라 하는 것은

사마나 담마 까라나깔라 (Samana dhamma karana kal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로서 법에 맞게끔 그 법을 분명하게 행하는 시기라는 뜻입니다.

 

행할 때 그 사띠가 바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이왕 수행을 배웠으면 모든 일들에 수행하고 연관되도록 해야 됩니다.

사띠와 삼빠자나를 놓쳐버리는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온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고,

그런 사람들은 세 가지가 기승을 부린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견해에 파묻히게 되고,

자아라고 하는 것에 파묻히게 되고,

갈애라고 하는 것에 파묻히게 된다는 겁니다.

남이 이런 얘기 할 거 같으면 자기하고 안 맞으면 '어, 그거 틀렸어' 하고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게 됩니다. '아, 오늘은 내가 공덕을 좀 많이 쌓아야 되겠다' 할 거 같으면 자기 차례가 아닌데도 내가 뭔가를 또 할려고 내세우게 됩니다. 아니면 남을 깍아내리려고 한다든지. 그러면서 살아가는 삶은 자꾸 갈애가 들끓는 것들만 계속할려고 합니다.

 

사띠를 하는 삶은 견해가 없는 삶이 되게 됩니다.

사띠를 하는 삶은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게끔 됩니다.

사띠가 있는 삶은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 없어지는 삶이 되게 됩니다.

단지 내가 지금 행해야 될 것들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시간은 여러분들을 기다려주지를 않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이 시간이지만 사띠를 하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 것이 되어야 됩니다.

 

까티나 가사를 올리려, 여러분들은 공덕을 지으러 왔습니다. 공덕을 지을 때도 사띠를 분명하게 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 가사축제가 끝나고 나면 좀 느슨해지는 마음들도 틀림없이 생길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지금 사띠를 할 시간밖에는 존재를 하지 않습니다.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수행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불제자들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도 그것들을 바라고 여러분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올린 것입니다.

항상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도록 가슴속에 손을 얹고 아, 내가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고 있나, 출가자들은 내가 부처님과 같이 살아가고 있나 하는 것들을 되새길 수 있는 그런 오늘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