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2년 담마와나선원 까티나축제 오후법문 및 질의응답 (20221106)

담마마-마까 2022. 11. 14. 10:15

https://youtu.be/px82tjKHALg?feature=shared 

 

* 2022년 담마와나선원 까티나축제 오후법문 및 질의응답 (20221106)

 

어쨌든 시간이 될 때까지는 해드릴테니까, 중간에 하다가 질문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질문을 하면 됩니다 이.

상가스님들 오늘 많이 왔죠? 상가 스님들이 물론 다 소중하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스님들이 가장 소중해야 될까?

어떤 스님이 가장 소중해요? 여기 선원장 스님? 아니면 일 년에 겨우 몇차례 와가지고 여러분들에게 간단하게 법 전해주고 하는 빤냐와로 스님? 아니면 이사장 스님? 어떤 스님이라?

(수행자 : 자기에게 선법이 잘 증장되는 스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법이?

(수행자 : 선한 마음이 더 증장이 잘 되니까요.)

그렇지.

(수행자 : 상가를 위해서 하시는 스님이요.)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상가스님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가스님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뭔가 선한 마음들이 자꾸 우러나지고 존경하는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야만이 그게 상가스님이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되는 겁니다.

물론 상가스님이라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 법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그대로를 전달해줘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거는 기본이고! 그게 안 될 거 같으면 그런 존경하는 마음도 일어나지도 않는 거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잘 지도해주고 법문을 잘하고 또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할 것 같으면 잘 답해주고 하는 스님도 물론 중요한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스님을 뵈었을 때 ', 내가 진짜 수행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나지게 되고, 그 스님을 통해가지고 내가 '이 상가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마음들도 일어나지고, 이런 스님들이 오히려 더욱더 훨씬 낫습니다. 그게 법납이 작든 많든 간에.

그 얘기는 바꾸어 얘기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감정적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있는 것들만 찾으면 감정적인 것들에 빠지게 됩니다.

아, 이 스님 법문이 나에게 이익이 있다, 아니면 수행을 잘 지도해준다, 그건 개인의 문제인 것이지 전체의 이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가장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게 여러분들입니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보통 인간을 뜻합니다.

보통 인간이 됐을 때 그 사람 눈에는 상가 스님들이 바르게만 걸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든지 찬탄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가를 물론 뒷받침해주고 유지해주는 것들은 재가자이지만, 그래서 그런 재가자들의 바램에 맞게끔 계속해서 공부를 해나가고 여러분들을 지도해주는 입장이 또 상가스님들이지만, 여러분들이 진짜 존경해야 되는 거는 그런 뛰어난 지도자가 아니라, 그리고 가끔씩 오는 그런 스님들이 아니라,

평상시 자주 접하면서도 그 스님에 대해서 내가 마음에서 항상 환희심이 일어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스님들이 가장 여러분들한테 좋은 스님입니다. 그건 일반적인 스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일반적인 스님들 많죠? 많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이 되어라.

 

요즘은 스님이 법문 다니는 곳이 테라와다를 안 하고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특히 한달에 한번씩 가는 경주 같은 경우에는 경주 교수들이 많아요. 교수들이 많고 그런덴데 거기 가면 삼귀의·오계 이런 것도 없고 그냥 오로지 테라와다에 대한 얘기만 해달라고 이렇게 하는 덴데, 그래서 처음에는 안 할려고 했거든. 안 할려고 했는데 몇번 와가지고 계속 간청을 하기에 '아이고, 저렇게 얘기하는데 내 소리가 안 들어갈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중에는 또 인연있는 사람이 있겠지, 나름 법을 공부할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 해서 가서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일년에 한 두번 갔나 세번 갔나 그렇게 하다가 요즘은 아예 다른 사람 법문 듣고 하는 것은 취소해버리고, 한달에 한번씩 모이고 있는 덴데, 그냥 스님만 해달라고 해가지고 계속 내가 가서 해주고 있는데, 그러면서 그 사람들도 많이 좀 바뀌는 것들이 눈에 보여요. 그래서 요즘엔 가면 오계는 받기 싫대. 그 대신에 삼귀의는 하고 싶다고 해서 삼귀의 삼창은 해주고 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처음에 왔을 때 스님을 보면 무조건 삼귀의 오계를 하고 빨리어로 자기들 방식대로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타부타 일절 얘기 없이 그냥 내 할 일만 하고, “스님 조금 일찍 와서 차한잔 하시고...” 이리 얘기하는데 일찍 가지도 않고 딱 제시간에 나가갖고 딱 법문만 하고 내내 그냥 와버리니까, 개인적인 시간을 전혀 안 가지는 거지.

그래서 처음엔 좀 이상하게 생각했대. 그러다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자기 할 일만 하고 가시고, 그리고 뒤를 남기지 않고 하니까 오히려 자기들도 편하고 그러면서 '아, 저게 스님들이 해야 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부터 조금 조금씩 바뀌는 게 보여요.

요즘은 삼십칠조도품을 해달라고 하더라고. 수행 좀 해보겠다고. 그걸 조금씩 해주고 있는데, 바뀌는 모습들을 보니까 기쁜 마음도 들고 내가 법을 배우고 익힌 보람이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 두 번째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인 이성적인 인간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것들을 따지면 안됩니다. 비교하면서 우위를 따지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배우고 있는 수행,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종교나 테라와다나 이런 것들에 대한 우선권이나 그것이 높다든지 이런 마음들을 가지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라한이 되지는 않았을 거고, 테라와다를 알아도 테라와다 전체를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리고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비교하는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도 아닐 건데 뭘 가지고 과연 내가 지금 수승한 수행법을 하고 있고 수승한 것들을 하고 있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이 없이 그냥 어떤 종교든지 받아들이게 되고 또 내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것들도 존중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말리까 왕비한테 빠세나디 왕이 물어본 것이 있죠?

"누가 가장 소중하냐?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 다음에 뭔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도 저 사람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이 그냥 일반적인 이성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지 자꾸 우위를 따지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부분으로 여러분들한테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선한 행위, 선한 것들이 아니면 하지 말아라.

보통은 자꾸 핑계를 댑니다. 뭐 어쩔 수 없이 애 교육 때문에 거짓말도 해야 된다, 아니면 뭐 때문에 뭐를 해야 된다, 그런 말은 통용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말과 행동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채로 될 거 같으면 그건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건 철칙으로 딱 지켜야 됩니다.

그런 것들만 잘 해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잘 살아가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 더 덧붙이면 그래도 사띠하라. 잘 죽을려면 사띠하라.

아까도 스님들하고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인제는 어디 상처가 나고 할 것 같으면 이게 아무는 게 좀 더디고 아물어도 전에 같지 않게 흉터가 남고 시커매지고 이리 되더라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제 나도 죽음에 자꾸 다가가지는 것 같다. 당장 죽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다른 스님들도 빨리 수행을 좀 더 열심히 하고 여러 가지 체계들도 빨리 세워야 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도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이지 삶을 향해서 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언제든지 여러분들은 죽을 수밖에 없고, 그건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언제 내 앞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걸 잊어버리면 안되기 때문에 그걸 위해서라도 사띠하는 것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사띠 안 하고 죽으면 참으로 불행하게 됩니다.

그래도 이 법을 이생에서 만난 것은 그래도 잘 죽기 위한 겁니다.

1차적인 목표가 그겁니다. 사띠 안 하면 아무리 내가 수행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의식을 잃어버리든지 아니면 나쁜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지,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무수한 생 동안 여러분들이 지은 업이 있기 때문에 그 업들이 언제 작용을 할지도 모릅니다. 항상 사띠하는 마음을 놓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죽은 시간이고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사띠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띠를 안 할 때마다 '아, 또 내가 놓쳤네' 하는 것보다 ', 내가 또 죽은 시간을 보냈네' 마음을 먹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질의응답>

자! 서두를 얘기를 했고, 질문이 있는 사람들은 질문을 한번 해보십시요.

 

(수행자 질문 : 아까 오전에 법문하신 것 중에요 제일 처음에 반복해서 실천하고 두 번째가 수행방법을 말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세 번째가 교학부분이고 네 번째가 법을 듣고 다섯 번째로 인터뷰를 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두 번째(수행방법), 세 번째(교학) 부분이 이해가 잘 안돼서 한번만 더 간략하게 말씀 좀 해주십시요. 윗자에 대한 얘기까지 하셨습니다.)

 

스님 답변 : 바라밀, 수행으로 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다섯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인제 수행에서 바라밀을 쌓는다는 거는 사띠가 계속 지속돼있을 거 같으면 자연스럽게 바라밀은 쌓여집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짓는 즉시 드러나지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짓는 즉시 그것은 차곡차곡 쌓여지는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가 드러나지지 않고 그것이 쌓이지 않으면 그것은 바라밀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보면 됩니다.

두 번째 빠리얏띠(Pariyatti)하고 세 번째 사와나(savaṇa) 법문 듣는 것을 얘기했고,

 

(수행자 : 법문 듣는 것은 네 번째였고, 다섯 번째는 인터뷰하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아, 다섯 번째는 질의응답 하는 것, 뭐 어떤 게 헷갈리는 겁니까?

 

(수행자 : 제가 듣기로는 두 번째가 수행방법을 잘 알아야 된다는 말씀이신 것 같고, 세 번째 교학을 좀..)

아디가마(adhigama)를 말하는 거죠? 아디가마가 여러 가지 수행 방법에 대해서 잘 이해해가지고 그걸 그때그때 맞게끔 마음을 사띠를 하는 건지, 느낌을 사띠하는 건지 사띠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즉시즉시 사념처를 다 사띠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라는 그걸 얘길한 거고.

 

(수행자 : 그다음 세 번째에..)

 

빠리얏띠(Pariyatti) 학습하는 것을 말합니까? 학습하는 것은 수행뿐 아니라

조금 전에 수행 방법(adhigama)에 대한 것들은 사념처를 다 하라는 것이고,

이거는 수행뿐 아니라 일반적인 교학적인 부분들 경전공부든지 법문을 듣는다든지 이런 것들은 빠리얏띠(Pariyatti)라고 해서 학습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공부하는 것들은 다 두루두루 익히라는 그런 뜻입니다. 됐습니까? (수행자 : 예)

 

(수행자 질문 : 그리고 오늘 법문하신 내용은 아닌데,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평소에 도과의 얘기를 들으면 도의 마음은 한순간에 있다고, 한순간이라면 일초가 될까말까하는 떨어지는 순간의 얘기처럼 들리는데요, 사향사과라고 해서 향을 얘기할 때는 법을 따르는 행자 하고 이런 거 할 때는 제가 듣기로는 그 이미지가 며칠 몇달 쭉 긴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게 다른 건지 향()이랑 도()..)

 

도와 과는 틀린 겁니다. 도와 과는 틀린 거고, 찰나 간에 도는 이루어지는 거고, 쉽게 말하면 계단을 가가지고 계단 탁 올라가는 거는 올라가는 거는 한 찰나인 것이지 그것이 올라가는 것이 계속 올라가지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탁 올라가고 나면 그다음 비스듬히 가는 부분은 이것은 길어지는 거고, 그래서 과는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가 있는데 도는 어떤 경우든지 한번 일어나고 나면 끝이라는 얘깁니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도와 과는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되는 거고, 단지 도에 이르면 과는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수행자 : 사향사과 할 때 향은 도랑 닮은 건가요?)

사향사과가 뭐죠?

(수행자 : 예류향 예류자 할 때)

아, 예류향 예류과? 그게 도와 과입니다.

(수행자 : 그러니까 제가 듣기로는 도는 한순간의 마음인데, 인터넷에 예류향에 대한 설명을 보면요, 법을 따르는 행자도 ... 제가 느끼는 이미지로는 한순간의 마음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것으로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요?)

 

나는 지금 말을 이해를 못하겠는데...

 

(수행자 : 제가 이해를 하기로는요, 제가 스님 법문을 비슷한 거 본 적이 있는데 예류도의 마음과 예류과의 마음이 다른 것이고 사쌍팔배 할 때 예류향이라는 성자가 있잖습니까? 그 예류향 성자를 나누는 기준이 굉장히 다양해가지고, 법수자 신수자부터 해가지고 어떤 사람은 예류향..)

 

예류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정들을 거칠 수가 있습니다. 그걸 얘기하는 겁니까? 그 과정들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 거고, 그거는 뭐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향에 도달해가지고 그걸 오래도록 지속한다? 그건 이미 과의 상태로 넘어가버린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대신에 과의 상태에 도달하더라도 과가 똑같다고는 얘기는 못합니다.

과에서는 또 익히는 것들이 조금씩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류과에 도달했다, 그러면 예류과에 도달했을 때 처음에 만약에 탐심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엷어져있는 상태인데 마지막 예류과의 상태에서는 거의 영향을 못 미치는 상태가 되고. 그러면 마음의 작용은 엷어져 있는 거하고 영향을 아예 못 미치는 거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탐심은 남아있다는 거라. 두 부류에서는. 이런 차이는 있다는 거라.

 

그런 차이는 있기 때문에 쭉 시간이 지나면서 번뇌라고 하는 것들은 점점 엷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같은 과에 있다고 하더라도 똑같다고는 얘기는 못합니다. 마음의 상태라든지, 그런 차이는 있을 수가 있는데 향이, 그러니까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가지고 여기에 이르렀든 이르르고 나면은 그것은 똑같은 과가 돼버린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가지고 아라한과에 이르렀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이 걸어온 길하고 제자들이 걸어온 길은 다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과에 이르는 것은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 "여섯 명의 아라한이 존재를 한다, 61명의 아라한이 존재를 한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이지, 만약에 지나온 과정이 다 다르기 때문에 과에 이르러도 각각 다 다르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거지.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사마타를 닦을 때요 사마타 가기 전에 근접삼매를 가잖아요. 인식과정을 여쭙고 싶은데요, 본삼매에 들어가면 자와나가 계속 된다고 하잖아요. 존재지속심으로 내려가지 않고 자와나가 계속되는데 그 차이점을, 그러고 삼매에서 나와서 위빳사나를 할 때 그때는 자와나 - 존재지속심 그다음에 - 자와나 이렇게 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자와나를 어떻게 수행자가 인식할 수 있는지..)

 

그 자와나가 인식이 됩니까? 삼매에 들었을 때?

 

(수행자 : 아니요. 인식은 안 되지만 그러면 그 자와나가 계속 된다는 거는 결국 의문전향이 그 자와나에 간 다음 어느 시간 파동으로 인식이 되든지 이렇게 해서 계속 의문전향으로 간다는 거를 알 수가 있는 것 같은데요..)

 

글쎄요. 제가 경험하고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거는 아비담마에서나 자와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지 삼매에 들었을 때는 그게 1선정 말고 2, 3, 4선정에서 삼매에 들었을 때 본삼매에 들었을 때는 본인이 삼매에 들고나서는 생존욕구만 존재를 하고 사띠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것이지 다른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게 뭐 자와나가 일어나고 하는 것은, 단지 생존욕구가 일어나는 것들이 분명하게 다르게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걸 자와나라고 할 것 같으면 뭐 틀린 말은 아닐 수가 있는데, 그것 자체가 자와나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수행자 : 그런데 파욱 스님 어느 스님 한분의 책을 제가 봤는데요 항상 사마타를 닦을 때 자와나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라, 본삼매에 들어가기 전에 특히, 그런 말씀을 할 때 그럼 자와나 존재지속심에 빠지지 않는다는 거는 사띠를 놓치고 있다는 말인지 그것이 상관있는 것인지..)

 

사띠를 놓쳤으면 삼매에 들지도 못하지. (수행자 : 못하죠.)

그것은 경전 상에서 말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삼매에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일단은 사띠는 계속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자와나 없이 살아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와나에 안 빠질래야 안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생존욕구는 반드시 있게 돼있는 것이고, 그 생존욕구 없이 삼매에 들어라 하는 얘기와 마찬가진데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거라.

 

(수행자 : 그러면 자와나에 빠지지 말라는 그거는 수행자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가서요..)

 

저도 그거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삼매에 들 때는 2선정부터 4선정까지 과정에서는 자와나라는 것들을 별도로 인식하고 그것들에 안 빠질려고 노력하는 부분은 사실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의 대상에 얼마만큼 깊이 몰입을 하느냐, 뭐로 가지고 몰입을 하느냐에 따라서 선정이 구분이 되는 것이지 그 자와나에 가지고 신경을 쓸 수 있는 부분은 아닌거라.

 

(수행자 : 그 책에서 하도 강조를 하길래, 그러면 그거는 수행자가 뭐를 가지고 내가 자와나에 빠지느냐, 빠지지 않으냐 그게 저는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삼매에 들면은 생존욕구는 구분이 됩니다. 그거는 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게 강하게 일어나는 과정도 있고 그렇지 않고 엷게 나타나는 과정들도 있고 그런 것은 있습니다. 그게 떨림으로서 나타나지게 됩니다. 그걸 대상으로 할 때, 그게 생존욕구라는 걸 분명하게 아는데, 자와나에 빠지지 않고 삼매에 든다고 하는 것은, 자와나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거라. 삼매에 이미 드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스님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려되는 부분이 뭐냐면 삼매에 들었을 때 나오는 과정에서 어떻게 나올 것이냐 하는 것들은 집착하고 하는 것들이 더 많으면 많을수록 삼매에서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그럴 때에는 자와나에 빠져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한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거는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아비담마를 공부를 하다 보면 수행하고 완전히 매치되는 부분이라고 얘기하기 힘드는 부분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용어상에서 그걸 자와나라고 부르는 건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수행에서는 안 보이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런 것들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어에 너무 매이지 말고 실제 일어나는 대상들이 그걸 쉽게 말하자면 생존욕구라고 하지만 생존욕구를 어떤 식으로 내가 아느냐 하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지 말(용어)인 생존욕구나 자와나라고 하는 것들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럼 스님께서는 생존욕구가 일어난다고 하시잖아요. 알 수 있다고 그러시잖아요. 그럼 그 생존욕구가 어떻게 수행자는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까?)

 

떨림으로 알게 됩니다.

(수행자 : 지금 떨림이라고 그랬습니까?)

예. 삼매에서 떨림으로, 삼매 안에서. 왜냐 하면 그게 없으면 삼매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거든.

 

(수행자 : 그럼 스님! 삼매의 떨림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잖아요. 그리고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 가지고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대상에 분명하게 몰입돼가지고 그 대상만 일어나는 상태인데 그 대상을 어떤 식으로 알아차리느냐 하는 것들만 차이가 납니다. 일단 2선정이나 3선정 같은 경우에는 떨림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나 이런 것들에서 일어나는 떨림이나 생존욕구로 인해서 일어나는 떨림하고는 차이가 좀 납니다.

그래서 아, 이건 생존욕구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구분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그게 떨림이 점점 더 옅어지고 거의 없어지는 수준까지 가게 되면 선정은 더욱 깊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구분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수행자 : 예를 들어서 선정상태에서 삐띠들이 처음에는 강하게 일어났다가 그게 점점점점 약해지면서 다른 떨림을 느낄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조용한 가운데. 그러면 그 삐띠의 떨림은 알겠는데요 그다음에 삐띠가 가라앉고 그다음에 아주 조용한 그 떨림은 그냥 떨림으로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지금은 그렇습니다. 본인이 분명하게 이게 생존욕구다 하는 것들은 그게 일어나면 자기가 압니다.

지금은 삐띠가 사라지고 나서 떨림이 있다는 것은 후속작용으로서 일어나는 것들이고 그래서 그것들의 과정을 겪고 나서 아직은 쉽게 말하면 그 상태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삼매에 들어서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하는 것은 아직 안된다는 얘기거든. 그러면 그 상태가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내가 어떤 순간에 삼매에서 깨어나고 하는 것들이 삼매에서 자유자재로 되는 상태가 되고 나면은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은 생존욕구에 대한 구분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지금은 그냥 그대로 지켜보면 됩니다. 후속작용으로서 기쁨이나 고요함이나 즐거움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서 일어나는 떨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아직은 그냥 그 떨림은 그냥 그대로 지켜보면 됩니다.

 

(수행자 : 그럼 나중에는 배에서 진정될 때는 떨림조차 없어지는 단계에..)

 

예. 없어지고 사띠만 있게 됩니다. 그 대신에 그런 상태가 지속이 쭉 돼면 거기서 놀면 안 되요. 놀면 안 되고, 그것들이 싫은 마음이 분명히 일어나져야 됩니다. 그래야 빨리 다음으로 전환이 되고 선정에서 자재하게 됩니다. 계속 더 지켜봐요.

 

(수행자 질문 : 고요함이 이어지게 되면요, 일상생활에서 '아, 행복하다. 편안하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이게 왜 행복한가 생각을 해봤더니 괴로움이 없어졌기 때문에 행복하더라구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그러면은 그 괴로움이 없어졌을 때 그런 고요함이 있을 때의 행복, 일상에서의 그런 행복은 추구할만한 것인가?)

 

아닙니다. 전혀 의미없습니다. 그거는 좋고 싫음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분명히 봐가지고, 그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평온함이 일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경우가 다르는데,

그렇지 않고 그거 그냥 괴로움이 사라지고 나서의 행복한 것들이나 편안함이 온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들입니다. 돈 많이 생겼으면 좋았다가 그런 좋은 것들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게 없어지면 괴로움이 또 일어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괴롭고 행복하고 고요하고 하는 것들은 괴로운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렇게 추구할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수행에서 그런 부분이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너무 그것에 대해서 마음을 깊게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들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 됩니다.

괴로운 것이 있어도 약간 덤덤하게 받아들일려고 하고, 즐거움이 있어도 아, 이것도 변하는 것이지 하고 마음먹고 너무 즐거움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조절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의 폭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감정의 폭이 되도록이면 최대한 좁게 만드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래야 그다음 찾아오는 대가를 덜 치르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그런 괴로운 것이라든지 즐거운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터부시하고 그냥 나는 마음을 오히려 평온하게 가지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거라. 사띠를 해야 될 거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때는. 그게 오히려 훨씬 더 의미있는 것이지 너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몰입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질문 : 디가니까야에서든 맛지마니까야에서든 일관되게 쭉 표현돼고 있는 것들이 처음에 출가를 하고 그이후 감각기관을 단속한다는 것이 나오는데, 그다음에 고요한 곳이나 빈 집에나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알아차림을 갖추는 것, 이런 단계가 나오는데, 저는 그렇다면 감각기관을 단속한다는 것과 그 알아차림이라는 게 항상 같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렇게 구분이 돼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요?)

 

감각기관을 단속을 할 때 사띠없이 단속이 가능합니까?

(안 되겠지요.)

안됩니다. 단지 그 감각기관은 사띠가 깊지 않아도 단속할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거고.

그다음에 출가하고 나서 깊은데 가가지고 쉽게 말해서 사띠한다, 그러면 사띠가 왠만큼 깊지 않으면 하기 힘듭니다.

특히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출가자들이 일년에 한차례는 공동묘지 있는 데서 수행하게끔 하거든요. 그때는 진짜 무섭습니다. 얼마 전에도 스님이 수행처 옆으로 가는데 저쪽에 독사 있는 것이 보여요. 그래서 이걸 그냥 지나갈까 아니면 내가 돌아갈까 하다가, 결국은 보고 있는데도 걔가 안 비키고 있는 거야. 내가 가는 자리에서. 그래서 그냥 내가 비켰어요. 그런데 일반 사람들 같으면 그런데서 독사를 탁 만나면 겁이 먼저 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사띠가 강하지 않으면 겁나는 것에 그냥 휩싸여버립니다. 그래서 출가하고 나서 사띠가 강하지 않으면 수행을 지속을 못합니다.

 

특히 이번 겨울에 스님이 폴가스두와(Polgasduwa)에 있는 비구 아일랜드에 가는데 거기는 굉장히 빡세게 수행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들어갈 때 맹세를 하고 가거든.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여기서 나오지 않겠다 하고, 서약을 하고 들어가. 그런 곳인데 얼마 전에도 거기 서양분 한 분이 자살을 했어요. 거기는 꾸띠가 뚝뚝 떨어져있어가지고 누가 죽어도 몰라요. 한달 뒤엔가 발견됐는데, 자살을 한 거는 뭐냐면 그 홀로 지내는 것에 대해서 못 견디니까 자살을 한 거라. 사띠를 어느 정도 하고 깊은 사람만이 거기 들어갈 수 있는데도 못하는 거라.

 

그래서 일반적으로 감각기관을 잘 방어하기 위한 사띠와 고요한 곳에 가서 하는 사띠는 사띠의 깊이는 분명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그것들을 구분을 해놓은 것이지 감각기관이라 해가지고 그 사띠없이 감각기관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걸 잘 다스리면 만약에 사띠가 강해질 거 같으면 그런 고요한 곳에 가서도, 폴가스두와에서도 다른 스님들도 다 살아가고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견뎌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좀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제가 나이를 먹고 앞으로는 병이 나서 죽는 일뿐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약간 두려운 것은 사띠를 얼만큼 개발해야지 그런 자기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내서 죽음에 가까워서 이 사띠를 놓치지 않는 것인지 이런 의문이 자꾸 들게 되거든요. 그래서 얼마만큼 사띠를 해야 되는지..)

 

자동적으로 사띠가 될 때! 사띠는 자동적으로 되면 죽음에 이르도록 사띠를 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의도적으로 자꾸 사띠를 하게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게 힘들어집니다. 어느 정도 수행을 계속적으로 하고 하면 일정한 부분에서는 내가 하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사띠를 하게 됩니다. 그 상태가 돼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 그 자동으로 되는 단계가 소멸의 지혜 단계인가요?)

 

그거하고는 관계 없습니다.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나마루빠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그다음에 상카루뻭카냐나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거고, 그거는 전혀 그거하고는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원인·결과에 대한 것들이 완전하게 되고 나면, 사띠는 거의 대부분은 보면 그렇게 용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돼나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수행에서 만약에 수행이 잘 안된다, 그러면은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게 물질적인 현상인지 정신적인 현상인지 그것만 자꾸 구분할려고 해보면은 수행은 조금은 진척이 있게 됩니다. 아예 안 될 때 말하는 겁니다 이.

그러면 '아, 이게 물질적인 현상이다' 하고 만약에 판단했다, 그럴 것 같으면 물질적인 현상인데 내가 이렇게 매달리고 집착할 이유가 뭐있고, 정신적인 현상이다 할 것 같으면 그 정신적인 현상들도 어떤 현상인지가 분명히 보입니다.

내가 의도가 나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인식하는 것으로 인한 건지 이런 식으로 오온에 대한 것들을 그렇게 구분을 하다 보면 정신적인 현상들도 '아, 내가 이것만 가지고 내가 매달릴 이유가 뭐있느냐' 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정 수행이 안된다, 그러면 그렇게라도 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구분을 하는 것들, 그런 마음을 자꾸 가지면 조금 대상에 대해서 붙잡는 것들이 좀 덜하게 됩니다.

수행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대상을 어떻게 내가 사띠하느냐에 따라서 수행은 잘되고 안되고 하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떨어뜨려 놔놓고 없는 듯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질문에는 사띠는 자동적으로 될 때까지!

 

'언젠가는 되겠지' 하고 마음먹지 말고 진짜 용을 써야 됩니다.

그런데 그 용을 쓰는 거는 시간의 용이 아니라 얼마만큼 내가 그것을 죽을 듯이 그냥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그러면 금방이라도 자동적으로 되는 거고, 그렇지 않고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듯이 내가 대충 이렇게 하면 평생가도 안됩니다. 할 때는 좀 단디해요. 단디!!

 

(수행자 질문 : 질문이 이어지는데요, 그런데 죽을 때가 되면요, 정말 죽을 정도로 아프다, 죽을 위험이 있을 때는 숨이 잘 안 쉬어지거든요. 호흡이 잘 안될 때 닥치면 엄청난 공포감이 있는데 그거는..)

 

살고 싶어서 그런거지.

 

(수행자 : 그런 공포가 닥쳤을 때 사띠가 잘 안되거든요. 예전에는 사띠가 어떻게라도 되는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숨이 안 쉬어졌을 때 정신을 약간 잃는 순간들이 있어요. 숨이 안 쉬어져서 정신을 잠시 잃었다가 깨어나서 다시 호흡을 하는데 호흡이 예전같이 폐활량으로 숨이 안 쉬어지고 이런 공포상태가 있는데 그런 것도 지금 말씀하신 그 정도가 되면 사띠가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사띠가 자동적으로 되면 그런 공포감이 안 일어납니다. 지금은 그냥 죽는 게 두렵고 살고싶기 때문에 그런 공포감이 일어나는 것이지 다르게 자꾸 생각하지 마십시요.

그럴 때는 지금은 사띠가 문제가 아니고 당장 숨을 쉬어야 되는 게 더 급한 겁니다. 당장 숨을 쉬어야 되는 게 더 급한 거라고. 숨 넘어가고 나면 사띠를 어떻게 할 거라? 그러면 의도적으로라도 자꾸 숨을 쉴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거는 왜 그러냐하면 지금 현재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내가 살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건 수행으로서 다스리기 전에는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그게 습관이 자꾸 된다 그러면 조그만 것으로 인해서도 공포감이 일어나고 두려움이 일어나고 아니면 나보다 나이든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인해서 긴장감이 일어나지고 이럴 것 같으면 그건 빨리 자기 자신이 바꾸어야 되는 것이지,

그런 상태가 되는 것으로 그래서 조금 편하게 할려고 하는 것으로서 자꾸 바꾸어야 되는 것이지, 그 상태를 지속해서는 조그만 문제를 가지고도 긴장이 되고 숨을 못쉬게 되는 상태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건 생활패턴을 조금씩 바꿀 필요성이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것은 지금 현재에서는 수행으로서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뭐 생존욕구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그렇게 비관할 필요는 없고 숨을 쉬면 됩니다.

 

(수행자 질문 : 그리고 일상수행 말고 집중수행에 들어갔을 때요, 수행센터에서 수행하는 게 너무너무 힘들고, 힘든 게 뭐가 힘드냐면 사띠를 앞 찰나하고 뒷 찰나하고 똑같은 강도로 계속 사띠를 두는 게 사실은 익숙하지 않으니까 힘들고, 그래서 집중수행 하다가 보면 업앤다운이 있어서 어떨 때는 수행이 잘됐다가 어떨 때는 안됐다가 이럴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위빳사나 수행자는 쉴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건가요?

저의 질문이 뭐냐면 위빳사나의 열 가지 장애가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사전에 미리 교학적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다 무상하구나 이런 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 그런 현상들이 나타났을 때 사띠하면 사라져야 되는데 사라지지 않았다고 혼났거든요. 봤을 때 사라졌느냐? 안 사라졌습니다. 혼났거든요.

 

왜냐하면 좋아해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사띠했을 때 안 사라진거니까 혼났는데, 저는 그때 그게 다 무상한 것도 알고 다음 순간에 안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다 아는데 너무 힘이 드니까, 예를 들면 빛이 뜬다, 몸이 둥둥 떠오르는 것 같다는 이런 느낌이 들 때는 하여튼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조금 덜 힘들기 때문에, 이 정도만은 잠깐 쉬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더 강하게 사띠하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기를 원했거든요.

 

그랬을 때 저는 혼나기는 “니가 그런 식으로 하면 수행이 빨리 진전이 안된다”라고 혼났고, 제 생각에는 맞는 말씀이긴 한데 너무 힘들다, 하루 열두시간씩 좌선수행을 계속하다보면 너무 힘들다, 잠깐 그렇게라도 좀 쉬면 안 될까?

아니면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위빳사나 수행자는 쉴 수 있는 여력이 있는지, 너무 힘들면 그러면 사실은 혼나니까 수행지도자한테 보고 안 하고 몰래 불당 앞에 가가지고 '이띠삐소' 하면서 붓다눗사띠 하고 그랬거든요. 그거 하면 몸에 삐띠가 생기면서 좀 편해가지고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자는 정말 하드코어하게 계속 대상으로..)

 

그건 저한테 물어봐야 될게 아닌 거 같은데, 그건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잖아? 그걸 내가 나쁘든 좋든 간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고, 본인이 수행하고 싶으면 그냥 수행 계속하는 거고, 그렇지 않고 즐거운 대상에 조금 즐기고 놀면 조금 더 편안해지면 그렇게 하는 거고 그런 것이지, 그걸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 대신에 수행하는 사람이 쉴 공간이 어딨느냐? 아직은 강제적으로 사띠를 하고 있잖아. 그럼 쉴 공간은 지금 당장은 없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쉴 공간이 딱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사띠를 안 해버리면 쉬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되기 전에는 안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건 본인이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는데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했죠. 바라밀을 쌓을 기회는 많이 있는데, 수행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빨리 했으면 훨씬 빨리가고 멀리 갈 수 있는데 그걸 자꾸 늦춰서 기회조차도 없는 상태가 될 수가 있다는 거라.

 

주석서에는 그걸 75세라고 나왔거든. 1살부터 25살까지, 26살부터 50살까지, 51살부터 75세까지 3단계로 나눠가지고, 네가 1단계였을 거 같으면 아라한이 되고 불환과가 되었을 텐데 그건 놓쳐버렸고, 2단계였으니까 불환과_아나가미나 될 수 있는 거고 일래과가 될 수 있는 것밖에 안되고, 3단계에 처했으니까 어쩔 수없이 수다원 밖에 이르지 못하는 거고, 그리고 75세가 넘었으면 너는 기회가 없다 하고 아예 짤라버렸거든.

 

(수행자 : 스님! 옛날은 75세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85세..)

 

그래도 주석서에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마만큼 일찍하면 일찍할수록 좋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고, 단지 수행을 하면 할수록 자꾸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때는 좀 쉬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쉬어주는데 단지 악한 마음은 먹지 말고 선한 마음을 먹고 쉬라는 거라.

 

(수행자 : 제가 궁금한 것은 니까야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기억이 정확하게 안 나지만 위빳사나 수행을 전쟁터에서 화살이 빗발치는 것에 비유하고 사마타 수행을 전장에서 빗발치는 화살을 피해서 잠시 숨어서 있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위빳사나 수행하다가 좀 힘들면 사마타 수행하면 됩니까? 사실은 그걸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사마타 수행하면 됩니다. 수행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피곤하고 힘들면 사마타 수행으로 전환합니다. 전환해가지고 거기에서 머물다가 나오면 몸이 많이 회복이 되거든. 그렇게는 합니다. 그 대신에 그렇게 자동으로 전환될려고 할 것 같으면 사띠가 자동으로 돼야 됩니다. 그게 안 된다면 그것조차도 안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차피 사마타 수행 비슷하게 하면서 삐띠가 일어나든 뭘하든 간에 삼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즐거움을 느끼고 좀 쉬는 기분이라 할 거 같으면 그렇게 해가지고 좀 쉬어도 되고,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사띠 놔버리고 그냥 좀 쉬는 것도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수행자 : 그건 아니고, 본삼매에 아직 들어갈 수준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상이 엄청 많다가 하나의 대상만 보고있어도 되게 편하거든요)

 

그럼요. 그것도 마찬가집니다. 쉬는 거기 때문에 관계없습니다. 단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일단은 몸이 먼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야만이 마음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피곤하고 할 것 같으면 아무리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더라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본인이 스스로 판단해가지고 몸이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몸부터 먼저 만들어야 됩니다. 긴장된 거라든지 이런 것들을 먼저 완화시키고 나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안하고 계속적으로 할 것 같으면 힘이 많이 듭니다.

 

(수행자 질문 : 죽은 다음에 만약에 천신으로 태어난다고 했을 때, 그때 감각적인 욕망에 휩싸이지 않고 수행할 수 있으려면은..)

 

없습니다. 그건 염두에 두지 마십시요. 그냥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감각적인 욕망들을 줄이고 수행하려면 수행하지, 천신으로 가가지고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수행자 질문 : 예를 들어서 염오의 상태에 들어가면 수행자가 나와도 어떤 때는 이 수행상태에서 굉장히 마음이 청정하고 그런 것 같은데 나와가지고 대상에 부딪칠 때는 제가 생각했던 만큼 청정하지 않다는 게 금방 나타난단 말이에요. 그런데 염오 정도의 수준에 간 사람이면 밖에 나와도 뭐든 생에 대해서, 오욕락에 대해서, 인생 전체에 대해서 어떤 수행에서 느꼈던 그 순간적인 염오감들이 그대로 지속돼서..)

 

당연합니다. 그걸 수행에서 체험해가지고 확고해지는 것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되는 것이지 수행 따로 일상생활 따로 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수행자 : 그런데 그 수준이 있으니까 단계가 있잖아요. 그 깊이에 따라서 깊이가 얕은 사람은 그래도 좀 흔들릴 거고 깊이가 좀 깊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염오의 상태가 이미 됐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흔들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니고, 그다음에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것들만 보이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염오가 아닌 걸 염오라고 착각을 할 거 같으면 그럴 수가 있는데 염오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럴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이제 끝내야 될 거 같습니다. 스님께 삼배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