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실참수행의 핵심, 37보리분법
... 그래서 37조도품도 그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똑같은 내용들이 들어있기는 한데 이름을 달리 한 것은 그 각각이 각각의 카테고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중요하다는 의미로서 얘기를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꼭 굳이 37보리분법 아니면 조도품에 대한 걸 다 알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37보리분법에서 꼭 필요한 부분들은 당연히 있습니다.
맨 처음에 사념처 나오죠! 하나로 줄이면 뭐가 돼요? 사띠죠! 염처입니다. sati!
그다음에 오력이나 이런 것에서는 뭐가 주가 됩니까? 위리야죠!
아까도 얘기했죠. 대반열반경에 그런 얘기를 했죠. "노력이 열반으로 이끈다" 하는데, 해탈로 나아가게 한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하기 때문에 노력이 해탈로 나아가는지를 알면 됩니다.
그리고 사띠가 어떻게 작용을 해야만이 해탈로 나아가는지를 알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그 부분에서 일곱 가지로 나누어지는 부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만 명확하게 이해하면 그 부분 전체를 어느 정도는 파악이 돼나가는데, 딱 하나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뭘까?
이거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부분을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이 안 돼.
로켓 발사하듯이 1단 분리 돼야만이 더 올라가져서 2단 분리가 되어지고 3단 분리가 되어지듯이, 칠각지 부분은 어떠한 경우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칠각지를 각지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명칭을 먼저 한번 볼게요.
보리분법이 맞아요, 조도법이 맞아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수행자 대답)
예. 법을 도와주는 건데, 각지라고 생각을 하면 보리분법이 맞습니다.
그런데 각지가 아니고 그것들이 깨달음을 돕는데 필수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조도품이 맞습니다. 어떤 게 맞을까요?
사실은 중요한 부분은 아닌데 아마 37보리분법이나 조도품을 하다가 보면 ‘이게 어떤 작용들을 하는가’ 하는 것들을 알면은 ‘아, 이 용어가 틀렸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스스로가 이해를 하게 될 겁니다.
보통 보면은 습관적으로 쓰거든요. '보디'를 따와서 '보리'라고 하고, '닙바나'를 따와서 '열반'이라고 하고, '보살'도 '보디삿타'에서 따와서 '보살'이라고 하고, 그러니까 음역해서 쓰는 경우들이 허다한데 부처님이 거기에 맞는 용어들을 쓸 때는 그것들은 분명하게 구분을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노력 부분도 위리야가 있고 띠띡카가 있고 또 다른 용어들이 있고 각각 다 다릅니다.
그런 부분들도 여러분들이 어차피 초기경전을 공부하고 빨리어를 공부해 나가면 조금씩 이해를 해나가기가 수월해질 겁니다.
여기서 하나 질문을 좀 드릴게요.
왜 수행할려고 그럽니까? (수행자 대답)
만족하고 즐기기 위해? 만족하고 즐길려면 수행을 꼭 안 해도 됩니다.
어째서 안 됩니까? (수행자 대답)
아? 저 말입니까? 그거는 본인이 판단을 해보시죠. (수행자 질문)
그건 나중에 수행문답 할 때 뒤에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수행을 꼭 해야 되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뭘 얻기 위해서? (수행자 대답)
윤회의 사슬은 어쨌든 죽음 이후가 되니까 만약에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하라고 할까? 하는 부분입니다. (수행자 대답)
그게 인제 오늘 서두 부분에 들어가는 프린트물에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봤을 때는 수행을 하는 목적은 해탈에 이르는 것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탈에 이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수행을 했는데 이생에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 어떤 이익이 있어서 내가 수행을 했을까? (수행자 대답)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태국에를 지금부터 한 35년 전에 갔었는데, 그때부터 쭉 있었는데 그때 들어가서 처음 느꼈던 의문이 그거였습니다. 왜 수행해야 할까? 하는 것.
실제 수행을 해보면 태국 스님들보다도 제가 더 훨씬 잘했어요. 더 열심히 앉아있었고 오래도록 앉아있었고 자세도 흐트러짐 없이 잘 견뎌나가고.
그런데 과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태국스님들 마음보다 내 마음이 온화했을까? 그렇지는 안 했던 것 같애요. 오히려 스님 마음은 그분들보다도 분노에 더 휩싸여 있었고 또 하고자 하는 욕심에 더 휩싸여 있었지 탐·진·치가 조금이라도 엷어진 상태에서 수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수행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그 태국스님들이 다 아라한이 돼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범부중생인 사람들이 있고, 또 조금 더 깨달음의 길에 다가선 사람들도 있고, 깨달은 사람들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분들은 한결같이 부처님과 같이 살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사는 길을 그대로 흉내라도 내면서 갈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냄이 일어나면 ‘아, 내가 성내는구나’ 하고 빨리 그것을 제어를 하고 다음 것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이익들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가고 있다 하는 뜻입니다.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스님 목소리가 들립니까? (수행자 대답)
아무 생각하지 말고 스님 목소리만 그냥 귀담아서 한번 들어보십시오. 어떤 효과들이 있을까? 그냥 일반적으로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효과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 그리고 정확하게 그것을 잘 기억을 해나가는 것! 그래서 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가슴에 탁 담아두게 되는 것! 그 짧은 시간이지만 그게 1분이라 하더라도 1분 동안 그런 작용을 했다 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스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탁 휩싸였다? 그리고 뭔가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 스님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 내용이 자기 것이 못 돼버리는 거라. 그리고 그 1분 동안은 틀림없이 자기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뭘 하거나 했을 때는 알아차림이 없었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는 잘 안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1분인데 수행을 하고 있을 때와 하고 있지 않을 때는 그마만큼 차이가 나게 됩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보면 보통 싯달타 태자의 탄생부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과거전생에 십바라밀을 쌓은 것부터 항상 먼저 얘기가 되고 나서 그다음에 이생에서 부처님의 일대기가 시작이 돼나갑니다.
쉽게 말하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선한 마음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져 있지 않으면 수행을 지속해나가지도 못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힘들다 하는 얘깁니다.
또 바라밀들을 쭉 돼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수행을 하면, "수행은 계단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한 계단 오르고 그다음에 또 한 단계가 있고, 그래서 그 단계를 넘어가는 데는 굉장히 힘이 든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얘깁니다. 어떨 때는 이걸 넘지 못하고 그냥 포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은 하고 싶은데, 그러면 수행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뭘까?
37보리분법을 배울려고 하는 것은 실제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든지, 아니면 좀 더 많은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만들기 위해서 수행을 할 거란 말입니다.
그걸 도와주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하는 겁니다.
바라밀은 수행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려주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바라밀이 완성이 돼야만이 수행에서 깨달음에 이르게는 해주지만, 그 바라밀이 수행의 단계를 박차서 다음 단계로 올려주는 데는 한계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보통 계를 잘 지킨다, 그러면 마음이 좀 더 자애로운 마음이 일어나지고, 또 선한 마음들이 더욱 더 지속적으로 일어나질 겁니다. 그래서 그게 수행하는 데는 도움을 주기는 합니다. 초기 단계지 나중에 한참 진행이 되고 나서는 그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단계 단계를 넘어가도록 하는 데는 그 단계에 맞는 것들이 틀림없이 필요로 하게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삼매, 알아차림이 사띠가 분명하게 잘 됐을 때 대상과 잘 일치를 시키고 있는데 아주 고요해지고 편안해집니다. 삼매에 탁 들고 싶은데 안 들어가집니다. 뭐가 부족해서 그럴까요? 숙달이 안 된 거죠!
많이 연습해가지고 탁 들어갈 때를 알면 탁 들어가지는데, 보통 겁이 나서 거기서 들어가지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면 잠자리에 들 때 마지막 숨을 쉬는 게 뭔지 아는 사람 있어요? 잠에서 깨어날 때 무슨 숨을 쉬는지 아는 사람 있어요?
평소에 그걸 안 하니까 삼매도 일단계 삼매에서 계속적으로 머물다가 그냥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만 경험하고 폭 들어가지지를 못하는 거라.
어쩌다 한번 폭 들어갔다? 들어가졌는데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탁 깨어나져버리는 거라. 또는 조그만한 자극인데도 쉽게 말하면 개미 기어가는 소리라도 그게 아주 크게 들려서 그게 자극이 되어서 탁 삼매가 깨어져버립니다. 안 그러고 싶은데. 거기서 조금 더 자유자재로 좀 있다가 그 삼매의 힘을 받아서 사띠의 힘을 키우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라.
그거는 왜 그럴까? 외부적인 자극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평상시 때 훈련이 안 되면 그냥 금방 반응을 해버립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와 같이 수행에는 수행을 도와주는 각각의 인자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평상시 때 잘 훈련들을 해나와야만이 수행을 해나가는데 조금 더 여법하게 진행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다시 돌아서 물어보겠습니다.
왜 수행해야 할까? 왜 수행을 해야 할까?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 나와있습니다. 그거 하나가 뭐냐는 거라? (수행자 대답)
마음의 청정도 맞습니다. 선한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기 위한 것들!
경전 곳곳에 그런 것이 있죠? 밥을 먹을 때도 수행을 하고 심지어 똥을 쌀 때도 수행을 하고 머리를 한번 만질 때도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을 하면 적어도 선한 마음을 유지를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시간 동안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어를 해준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평상시 때 수행을 쭉 해나오면은 본인에게도 설혹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에게는 많은 이익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해보신 분들은 아마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잘 안 돼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다가도 다시 또 퇴보하고, 또다시 좀 할려고 하다 보면 또 퇴보하고, 계속적으로 반복을 하다가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러다가 그만 끝나버립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들한테 오면 그런 얘기를 하겠죠. “그럴 때는 집중 수행을 좀 해라. 그래서 힘을 좀 길러라” 하고 얘기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길러 보니까 조금 더 오래가는 것뿐이라. 퇴보하는 게 전에는 하루 지나서 다시 또 돌아갔으면 인제는 한 일주일 간다고 칩시다. 퇴보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거라. 다시 또 퇴보한다는 거라. 안 하고 싶은데.
설혹 내가 이생에서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선한 마음 지속적으로 일으키면서 잘 살아갈려고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거라.
뭐가 부족해서 그럴까? 뭐가 부족해서 그래요? (수행자 대답)
신심이 다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신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단계가 되고 나면 그때는 퇴보를 안 하겠죠.
그런 확신으로 바뀔 때까지는 적어도 대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단계가 돼있어야만이 확신으로 바뀌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오로지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고 탁 확신으로 자리잡게 될 때 그때야만이 퇴보를 안 하게는 됩니다. 그래서 신심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37조도품의 가장 핵심이 뭘까? 사띠죠!
사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좌지우지를 하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수행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퇴보하지 않는 단계로 넘어갈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띠에는 힘들의 차이가 있죠! 힘들의 차이가 틀림없이 존재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면서 한시간을 앉아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망상 때문에 아니면 또 다른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10분도 못 앉아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띠의 힘을 길러주기 위한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번째 먼저 대상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대상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띠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7보리분법에 맨 처음에 나온 게 그 대상에 대한 4가지 부분입니다. 적어도 수행을 할려면 사띠를 할려면 대상이 뭔지를 알아야만이 그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거 아니라!
그다음에 대상이 뭔지를 알아차리고 나면 그다음에 필요한 것들이 틀림없이 존재를 합니다. 그것들을 끊임없이 쫓아가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금방금방 변화되기 때문에, 금방금방 달아날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그걸 붙잡을려고 해도 안 되고 그걸 밀쳐낼려고 해도 안 되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사띠를 해야 되는데, 힘이 없으면 그게 안 되는 거라. 그래서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각각의 수행처에 가면 일부러 딱 정해놓고 그걸 하도록 강요를 합니다.
마하시에 간다, 한시간 좌선을 했으면 한시간 경행을 하도록 합니다. 딱 균형을 맞추도록 합니다.
또 어떤 곳에 갈 거 같으면 좌선시간 경행시간을 딱 정해놔놓고 그 패턴대로 쭉 하도록 합니다. 설혹 그게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하게 그렇게 적용을 합니다.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면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일부러 다 각각의 규정을 만들어서 그것에 따라 하도록 그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이 두 가지입니다.
대상을 사띠하는 것, 그리고 그 사띠하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힘이 본인에게 생기도록 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까 「마하빠리닙바나숫따」 부분을 명상 시간에 하고 있던데, 그 부분을 잠깐 좀 얘기를 하겠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특성이 있습니다.
"스왁카토, 바가와따 담모, 산딧티꼬, 아깔리꼬,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땅 윈뉴히띠"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는 여러분들 아시죠? 법을 설하는데 부처님은 차별없이 모든 것을 펼쳐놔 보여준 겁니다. 펼쳐놔 준 건데 그것들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면,
산딧티꼬라고 하는 것,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됩니다.
지금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로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어디에다 사띠를 해야 될까요? 귀에다 해야 되겠죠! 그러면 귀에다가 사띠를 정확하게 한 사람들은 스님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안 보입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스님이 보이잖아. 그마만큼 마음은 귀에 있다가도 눈으로 가고 또 생각으로도 가고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은 스스로 체험될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스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까 분명히 보고 있고 또 다른 자극들을 하고 있을 것인데 그것은 아예 나에게 나타나지지 않고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소리밖에 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게 스스로 체험되는 1단계가 됩니다.
그런데 소리가 인식될 때 어떤 식으로 인식되어질까요?
어떤 사람들은 귀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가 가슴에서 새겨지면서 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스님이 말하는 이 자리 이 까지 마음이 가야만이 소리가 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게 맞을까? 스스로 담마에 대해서 체험이 되어지는 사람들은?
외부로 향해 있어가지고는 일단 안 되겠죠! 그러면 스님이 말하고 있는 이 자리에 내 마음이 거기에 뺏겨 있어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럼 가장 일차적인 것은, 소리는 파동으로서 나한테 들리는 겁니다. 그러면 귀에서 뭔가가 들리는 소리가 나야 됩니다. 그래서 이게 ‘아’인지 ‘어’인지 하는 소리가 분명하게 인식이 되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계속되어져 나가다가 어느 순간에 귀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들리는 겁니다. 그 소리가 ‘웅웅’하고 울리기도 하고 아니면 뭔가 족집게로 톡톡 찌르는 느낌으로도 들고 어떤 때는 후벼파는 느낌으로도 들고.
왜 이렇게 바뀔까요? 똑같이 체험되어지는 건데, 왜 이렇게 바뀌어져 나갈까요?
여기(귀) 있을 때도 사띠가 있었고, 여기(가슴) 있을 때도 사띠가 있는데.
어떤 게 여러분들 가슴에 많이 남아요? 가슴에 ‘찡’하고 맺힐 때가 훨씬 오래가죠! 귀에서 들리는 것보다는. 본인이 수행을 하면서 그것을 스스로 자꾸 체험을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사띠가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강해져있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파악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법의 특성 여섯 가지 중에서 첫 번째가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냥 내가 경전 상에서 내용들을 확인해가지고 ‘아, 이것은 사성제지’ ‘이것은 삼법인이지’ ‘이것은 팔정도지’ 이런 아는 것은 알음알이인 것이고, 그 알음알이가 여러분들을 해탈로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그 알음알이가 여러분들을 좀 더 선한 마음을 지니고 생활하도록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법의 특성 첫 번째가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수행을 해야만이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법의 특성 두 번째가 아깔리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실제 수행을 해보면 시간의 의미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특히 인제 수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좌선을 해보면 언제 한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사띠는 놓치지 않는 것 같거든.
또 어떤 경우는 내가 분명히 이 정도의 경지에는 도달했는데 그다음은 경전상으로는 분명히 이 단계인데, 이 단계를 지나야 그다음 단계인데, 이게 한참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확 돌파를 하듯이 돌파를 해버리는 거라.
그걸 보통 여러분들이 수행의 열여섯 단계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한번에 쭉 치고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남들은 한참 시간이 걸려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데 본인은 그러지 않고 그대로 그냥 넘어가집니다.
수행에서 그런 경험을 해보면 대부분 사람은 더욱더 수행시간을 늘리고 수행을 할려고 하게 됩니다. 수행의 이로움들을 체험을 했기 때문에!
법이 시간하고 관계없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올해는 여러분들이 스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수행을 조금 해봐야 됩니다. 이왕 할 거 같으면 수행의 이익을 얻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아, 내가 그길로 쭉 가도 무리가 없겠구나, 이 길로 쭉 가더라도 틀림없이 나는 깨달음에 이르겠구나’ 하는 확신들은 들 수 있도록은 돼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에히빳시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검증이 가능해야 된다는 겁니다.
태국 같은 경우에는 각 단계를 검증하는 것들이 아주 면밀하게 돼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수행자가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고 굳건하게 앉아 있는데 흐트러짐이 없이 고요해 보인다, 과연 삼매에 들었을까 안 들었을까? 본인은 삼매가 자유자재가 되지 않으면 본인은 잘 모릅니다. 대상은 분명하기 때문에. 대상은 분명해서 고요하게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삼매인지 아닌지를 본인은 그때는 모르는 거라.
그래서 검증을 해봅니다. 아주 가느다란 아지랑이 같은 깃털 같은 걸 가지고 코를 살살살살 후벼본다든지, 후비면 대부분 사람들은 재채기를 하는데 재채기를 안 하거든. 손을 요만큼 들어올려놔 봅니다. 그리고 놔버려 봅니다. 안 내려와요.
그런 단계를 거치면 그 단계를 인정을 해주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그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검증을 할까? 내가 이 수행을 계속 해야 될지 아닐지 하는 걸 어떤 식으로 검증을 해야 될까? 어떻게 검증해야 돼요? 스님한테 와서 만날 문답하면서 검증을 해야 될까요? 스님이 여러분들 곁에 없는데.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검증할 수 있도록은 돼야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얘기해보겠습니다. 수행의 시간을 따로 정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본인이 ‘아, 오늘은 화를 몇 번 냈다’ ‘아, 오늘은 누구하고 조금 안 좋고 언짢은 일들이 있었다’ 하는 걸 자꾸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수행을 해보니까 그 빈도가 자꾸 줄어든다, 그러면 계속 수행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똑같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에 진척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사띠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 ‘나는 사띠하고 있어’
사띠는 선심소죠! 선한 마음이죠! 그러면 사띠를 하고 있으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 있을 거 같으면 화가 일어나야 될까요? 이걸 착각을 해버리면 안되는 겁니다.
사띠를 무조건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게 사띠라고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사띠입니다.
그러면 선하지 않고 탐진치에 해당이 되는 것이 얼마만큼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자꾸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외부적인 자극이 있을 때! 대부분 나이든 분들이나 혼자 있을 때는 탐진치가 거의 안 일어납니다. 대부분은 외부적인 자극이 있을 때 탐진치들은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외부적인 자극이 있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수행하면서 그걸 자꾸 체크를 해보면 아, 내가 그래도 수행이 조금 늘었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건 누가 하는 거에요? 본인이 하는 겁니다.
스님한테 와서 문답을 받더라도 그거 이상을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다음에 오빠나이꼬 라고 그렇게 합니다. 관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수행은 그리고 법을 듣고 법을 알도록 하는 것은 관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나이가 많다고, 아니면 성별이 다르다고, 아니면 어떤 장애를 안고 있다고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법을 알려고 하는 마음을 기울였느냐, 안 기울였느냐. 내가 수행을 해야만이 그래도 이 어려운 삶들을 갖다가 돌파해나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느냐 안 기울이느냐. 기울이지 않으면 그건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법의 특성은 여기에다가 빳짯땅 윈뉴히띠- 현자들이 칭찬하는 것, 현자들은 좀 더 깨달음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좀 더 쉽게 해탈에 이르도록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사람들은 “이 길을 해라” 다시는 미끄러지지 않는 삶에 이미 올라선 사람들은 “이 길만이 길이다” 하고 자꾸 이끌어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 법의 특성은 그와 같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 아무리 교학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법문을 많이 듣고 아무리 내가 뭔가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내가 체험되어지고 그것이 수행되어지지 않으면 부처님 법은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특히 여기 계신 분들은 교학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부분들을 많이 갖춘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해버리면 이번 인생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법을 만난 의미가 퇴색해져 버립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죠.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한번 해보십시오.
자기가 그것을 사띠할 수 있을 만큼만 들이쉬고 내쉬고 해보십시오.
됐습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은 알겠습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들이쉬는 걸 알아차리고 내쉬는 걸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들이쉴 때 시원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내쉴 때 텁텁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들이쉬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쭉 따라가고 내쉴 때 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쭉 따라가면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게 내가 마음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니까 들이쉬어지는구나 하고 알게 되고 내쉴 때도 내쉬는구나 하고 마음을 내야만이 내쉬는 걸 내가 알아차리는구나 하고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사이에 잡념이 든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놓쳐버렸을 경우에는 그것은 제외를 합니다. 각각의 성향에 따라서 알아차리는 사띠하는 방법들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4념처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걸 따라야 될까?
어떤 사람들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계속 들이쉬고 내쉬고만 알게 됩니까? 들이쉴 때 ‘어, 시원하네’ 내쉴 때 ‘텁텁하네’ 하고 아는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아, 이게 숨이 좀 앞에 들이쉬는 것과 지금 들이쉬는 게 숨이 차이가 있구나’ 분명히 구분해서 아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수행을 할 때 착각하는 부분들이 이 부분들입니다.
나는 심념처 수행을 하니까 심념처 수행만 하겠다, 나는 수념처 수행을 하니까 수념처 수행만 하겠다, 그래서 각각의 수행처에 가면 그 방법만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것만 해가지고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각각의 방법으로 사띠가 되어지고 있는데 나머지 세 개는 놓쳐버리라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어떨 때 그렇게 알아차려지게 될까?
1번 2번 3번 4번 방법으로 크게 나눠가지고 그렇게 알아차려지는 것은 어떨 때 그렇게 알아차려지게 될까? (수행자 대답)
그렇죠. 대상에 끄달려들어가면 숨을 자꾸 인위적으로 조절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집니다.
그러면 대상을 사띠하는 게 먼저가 되어야 됩니까? 아니면 알아차리는 건 어쨌든 마음이 알아차리는 거니까, 마음을 가만히 둬가지고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게 우선입니까? (수행자 대답)
그게 우선이 돼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이 먼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가만히 두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요? 큰 것 따라 움직인다고 그랬거든! 경전을 여러분들 많이 읽어봤잖아.
그것 따라 가면 그것들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되는 건데, 나는 그렇게 안 하고 자꾸 인위적으로 대상을 먼저 찾는 거라. 그래서 수행은 절대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먼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되도록 만들고 나서, 그러고 나서 대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사띠를 하면 됩니다.
그게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오늘 지나면 한달 뒤에나 여러분들을 뵙게 되는데, 먼저 숙제를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하루 중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있는 그대로입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
우스개 소리 같지만 어느 정도 수행에 대해서 숙달된 스님도 처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시간이 하루에 1분도 못됐습니다. 진짜 어려운 겁니다. 경전에도 그런 게 있죠. 마음이 번뇌에 싸이지 않고 고요한 상태에 있으면 내가 걸어가겠다 했는데 한발짝도 떼지 못했다는 것이 경전에도 나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한 것은 것은 참 힘이 듭니다. 포기해야 될 건 포기를 좀 해야 됩니다. 포기를 하지 않으면 절대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소리 들리죠? 소리 들으려면 포기해야 될 거는 뭐를 포기해야 돼요? 생각하고 보고 하는 것은 포기해야 됩니다. 안 되면 강제적으로라도 눈을 감아야 됩니다. 그래야 소리가 오롯이 들린다는 겁니다.
담마빠다 여러분들이 읽어봤을 거니까 뽓틸라 스님의 일화를 잘 알겁니다. 뽓틸라 스님 수행을 가르칠 때 어떻게 가르쳤었어요? 오소리 굴에 데리고 가서 “이 오소리를 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일곱 살짜리 아라한이. 여러분들 잘 알죠! “다른 구멍은 다 막고 한 구멍만 보고 알아차리면 된다.” 그런데 다른 구멍을 막아버렸으면 오소리란 놈은 빨리 도망칠려고 그 한구멍 남아 있는 곳으로 빨리 빠져나올 거라. 내가 빨리 움직여서 그걸 잡지 않으면 오소리를 놓쳐버리는 거라.
사띠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여러분들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면 나머지 것들은 포기를 하십시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을 포기를 하고, 보면 보인다, 본다 하고만 알아차릴려고 하고, 들리면 들린다 하고만 알아차려야 되지 무슨 소리라고 알아차리면 이미 생각이 들어가버립니다. 그러면 듣는 거하고 생각이 같이 짬뽕이 돼버립니다.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올리면 들어올린다고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내려놓는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거 같으면 배가 물러오면 불러온다고 알아차려야 되고, 꺼지면 꺼진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외에 나머지 것들은 전부다 문을 닫아야 됩니다. 강제적으로라도 그렇게 했을 때 적어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가능성이 훨씬 높아집니다.
그런 시간을 한달 동안 한번 가져보십시오.
조금씩 변화가 있을 겁니다. 하나를 알아차렸을 때 내가 얼마나 산만하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들이 드러나집니다. 대부분 그리 안 할려고 그럽니다. 대부분은 두 개 세 개를 같이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강제적으로라도 반드시 하나만 하도록 해야 됩니다.
물론 하나만 하면 아직은 사띠의 힘이 크지 않기 때문에 자꾸 놓치게 되고 또 생각들이 끼어들게 됩니다. 탐·진·치가 또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 하더라도 다시 스톱 하고 나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고 나서 하나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 훈련들을 한번 지속해서 다음 시간에 왔을 때 그렇게 했을 때 어떤 현상들이 있었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몇분들한테 질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숙제를 내주면 또 안 올 수가 있네. 그리해도 수행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한테 교리를 가르칠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은 수행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자! 「왜 수행하는 것인가」 하는 부분의 첫머리에 보면 이 사념처경을 설한 곳이 깜마사담마 라고 하는 꾸루국에 있는 곳에서 했습니다. 왜 하필 여기서 했을까? 이 중요한 것을. 왜 그리 했을까요? (수행자 대답)
문헌을 다 뒤져봐도 정확하게 거기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추측컨데 거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 황회장님 말마따나 어느 정도 사띠하는 힘들이 있었고, 또 경제적으로 풍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렇게 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바빠 죽겠는데 수행하라면 할 수 있을까?
또는 누군가가 아파서 아니면 누군가가 돌아가셔가지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스트레스 받아 죽겠는데 사띠하라면 사띠할 수 있겠어요? 처음에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물론 그것들도 다 수행의 대상이 되어야 되겠지만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연세들이 어떻게 됐어요? 70 넘은 사람? 수행 포기하십시오. 안 됩니다. 왜 그럴까? 체력이 못 따라줍니다. 체력이 못 받쳐줍니다. 그래서 앞으로 횡회장님 수행 안 해도 뭐라 하지마. 몸이 못 받쳐줍니다. (수행자 질문)
선한 마음만 계속 일으키도록 하십시오. 깨달음을 이룰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생활에 쪼달려가지고 하는 사람들도 안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생활이 좀 안정돼있고 체력적으로도 뒷받침이 돼야만이 가능해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행의 단계에서 한단계 올라갈 때 힘이 없으면 못 올라가집니다. 특히 나이가 많이 들면 체력이 받침이 안 돼.
70이 안 된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지금이라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해탈에 이른다? 그거는 버려버리십시오.
꾸루국에서 이 법을 설했던 이유가 거기에서 설해야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이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얘기한 37조도품에 나왔던 대반열반경, 왜 그 하도 많은 사람들 다 제껴놔 놓고 아난다와 비구스님들 한테만 그 37조도품을 설했을까? 여러분들은 들어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 따라오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거기에 맞는 사람들이 있을 때 부처님은 거기에 맞는 법을 설한 겁니다.
제발 여러분들은 체력과 정신적으로 안정이 돼있을 때 지금이 가장 수행하기 좋을 때다 하고 판단들을 하고 수행할려는 마음을 자꾸 일으켜라는 겁니다.
그런데 좋은 점을 본인이 체험을 하게 되면, 그걸 '법을 체험했다' 그럽니다. 체험하면 본인 스스로가 자꾸 하게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법이라고 하는 특성은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가 체험해보지 않으면 법은 여러분들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아무리 경전을 달달달달 외우고 있더라도 그 법은 여러분들 것이 아니고 남의 것입니다. 남의 소를 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부처님 것이지 여러분들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할 때는 그것이 여러분들이 체험해서 여러분들 것이 되라고 하는 것들이지, 그냥 부처님 법이라고 해가지고 그것들을 두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얻어지는 이익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게 대념처경의 처음에 나오는 서두 부분인데 실제로 본인이 아, 이 상태인가 아닌가 하는 걸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걸 하기 전에, 에까야노 막고 라고 하는 부분이 맨 처음에 나옵니다.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죠.
어떤 게 유일하다는 뜻이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라는 얘길 하는 겁니까? 왜 이리 편협됐어요? 다른 걸 해가지고는 그럼 깨달음에 이를 수 없어요? 지극히 테라와다, 옛날부터, 지금이 아닙니다. 옛날 장로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대념처경의 4가지 염처 부분에 다른 것들이 포함이 되기는 합니다. 포함이 되기는 하더라도, 그게 아니라도 충분히 깨달은 사람들이 부처님 당시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난다가 포지션이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누워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빠따짜라 같은 경우에도 부처님 법을 듣다가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것들이 있는데 왜 굳이 대념처경 만이 에까야노 막고 가 되느냐는 거라. 그거는 잘못 보고 있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그걸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로서 봐야 되느냐, 아니면 문맥으로 봤을 때 여기에도 2페이지에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1번에 보면 「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왜 수행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먼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서' 라고 합니다.」 그렇게 적어놨죠.
「희로애락과 죽음이 있는 중생들의 삶에서 번뇌를 없애서 '청정하게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즉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몇 개가 계속 나옵니다.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기 위해서, 괴로움과 근심의 소멸을 위해서...」 이렇게 여러 가지가 쭉 나옵니다.
그럼 여기서 에까야노 막고라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할까?
수행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야만이 쉽게 말하면 청정을 획득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스트레스 없이 살고, 도와 과에 정신적으로 이르른다는 뜻입니다. 다른 길로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문은 닫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것이 수행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자 질문)
그게 사념처가 됐든 칠각지가 됐든 37조도품이 됐든 그것은 각각의 주석서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한 수행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사띠하는 것!. 그것이 있을 때 그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 수행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지 다른 길로서 청정을 획득하고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 도와 과에 이르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생에서 조금 더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항상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다른 길이 없다는 거라.
경전을 아무리 배운다고 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 밖에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에까야노 막고에 대한 것들을 각각의 학자들이나 또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방법들이 해석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 그것은 수행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만이 이 방법으로 이것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3페이지에 보면 두 번째 단락에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에까야노-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선택사항은 없습니다. 번뇌를 없애고 청정하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수행하는 길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고 스님이 분명히 적어놓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길을 따라갈려고 해야지 공부를 하는 목적, 또는 해탈에 이르는 목적, 또는 좀 더 평온하게 살기 위한 목적, 그 모든 것들은 수행을 통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가끔씩 그런 얘기들 하죠.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법수행과 신수행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신수행은 수행을 통하는 것이고, 법수행은 경전공부를 열심히 해도 수다원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맞습니까?
그걸 착각을 해버리면 안 됩니다.
법은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실천된 법은 수행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단지 부처님 법을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서 수다원에 이르는 것뿐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아, 부처님 말씀이 맞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수다원에 이르는 것, 그런 방법들이 있을 수가 있지만, 수행을 통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게 37보리분법에서도 사념처가 가장 먼저 나오는 거고, 사띠의 대상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게 나오는 거고, 그다음에 나오는 것들이 그러면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힘이 어떤 것을 작용을 해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력들이 필요한 것이고 오근이 필요한 것이고, 그러니까 근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지만이 힘이 생기는 거니까. 그래서 어떤 것이 균형이 맞아야 된다는 것들이 그다음에 설명을 해놓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어느 정도 하다가 보면은 틀림없이 망상들도 생겨나고 또 각각의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그럼 그 장애들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설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면 칠각지 부분에 들어가집니다. 사띠가 되면 그다음에는 법에 대한 조사가 분명히 들어가지고 하는 이 진행 과정들을 그래서 설명들을 쭉 해놓은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따라서 깨달음의 단계들도 구분을 해놓게 됩니다.
이걸 통틀어가지고 팔정도에 들어간다, 팔정도가 완성이 된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 37조도품입니다.
그래서 황회장님 얘기는 뭔 얘기인지는 내가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다르다는 생각은 틀림없이 해야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수행 방법에 대한 얘기들을 설명을 안 해주면 사띠를 하지 않습니다. 할 방법을 모릅니다. 그런데 미얀마나 태국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계속적으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왔고 수행하는 것들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특별히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어느 정도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수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뭘 대상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들은 숙지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마 그런 얘기를 했을 거고, 물론 수행이 좀 더 많이 진척되고 나면 단계들을 자꾸 세분화 시켜줍니다. 그것은 조금 더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나면 그렇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띠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대상을 가지고 수행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마 조금 더 순리적일 겁니다.
한국인들은 자꾸 그걸 따질려고 그럽니다. 이게 부처님 말씀의 어디에 해당이 되는지, 아니면 이것이 어디에 연결되는지를 자꾸 알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의미없이 보여져버립니다. 그럴 동안에 이미 그 사람은 마음에서 자꾸 자신을 드러낼려고 하고 또 증오심이 자꾸 일어나고 있는데 사띠를 안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의미가 없는 건데 자꾸 그걸 따질려고 한다 하기 때문에 “그냥 수행하면 된다” 하고 얘길하는 것뿐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겁니다.
저도 그런 얘기를 처음에 가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잘하고 있거든. 그런데 그 스님들이 저보고 비웃어요. 폼은 자기들보다도 훨씬 열심히 잘하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에는 탐진치가 들끓고 있기 때문에 비웃는 거라.
그런데 그걸 한국 사람들은 자꾸 착각을 하는 거라. 어떤 것이 먼저여야 되는 것을 잊어버리고 따질려고 자꾸 한다는 거라.
그걸 조금 이해를 하고 그 사람들 입장을 들어보면은 ‘수행이 답이구나’ 하는 것들이 아마 드러나질 거라고 봅니다.
자! 지금 몇시나 됐습니까? 예. 오늘은 이거 부분은 여러분들이 봤을 때 크게 무리가 되는 부분은 아닙니다. "수행을 하면 이런 이익이 있다" 하는 걸 설명을 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서 한번 쭉 읽어보면 됩니다. 이건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으로 수행에 대한 것들을 프린트를 하면서 여러분들하고 직접 물어보고 답하고 할 겁니다. 그래서 공부들을 이걸 가지고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하고 끊임없이 자꾸 싸워서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주시길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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