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실참수행의 핵심, 37보리분법 중 사념처 수행
수행법 설명하는 게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기본적인 부분들이 이해가 안 되어있기 때문에 더더구나 힘듭니다. 그냥 교리적으로 설명을 하면 수행하고 관계없이 여러분들이 듣기는 편하긴 한데, 이걸 수행적으로 풀어낼려고 하면 37보리분법을 전부 다 재조합해야 됩니다. 실제로는.
프린트물 보면 「37보리분법 정리」라고 되어있죠!
그거는 37보리분법의 개략적인 설명입니다.
보통 일곱 개 항목으로 되어있죠? 일곱 개 항목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사념처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들어가집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걸 일곱 가지 부분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부분만 설명을 해나갈 거고 나머지 부분들은 프린트물로 대체 할테니까,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수행할 상황이나 그런 조건들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안 하겠어요? 그때 이 프린트물 다시 펴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또 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으로 스님이 설명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 정리 부분에도 설명했지만 37보리분법은 사실은 다 닦아야 되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다 안 닦고 어떤 것만 하더라도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반드시 정해져 있다 하는 겁니다.
그 길이 37보리분법 중에서 칠각지에 해당한다 하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프린트물로 대체가 되든 아니면 강의를 통해서 수행법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든 여러분들이 부족한 것이 과연 뭔가 하는 것들을 본인이 먼저 자꾸 캐치해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부족한 것들을 메꿀려고 해야만이 수행이 무르익게 됩니다. 그게 되지 않으면 이거는 그냥 글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글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실천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 스스로가 해야 된다는 걸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념처에 사띠의 기초가 되는 것은 4가지죠!
보통 신·수·심·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만 하지 부처님은 왜 이렇게 4개로 나눠놨을까?
수행의 대상은 뭡니까?
수행할 때 뭘 알아차려야 돼요?
왜 수행하는 거라?
몸, 한번 봅시다. 아침에도 몸을 씻었죠? 몸이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 항상 자꾸 씻고 할 겁니다. 그런데 몸이 깨끗한 것들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죠! 하루만 지나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몸이 더러워지게 돼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그걸 "부정(不淨)한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더러운 것이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하는 겁니다.
신념처, 몸을 대상으로 사띠를 하면 결코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소중하고 깨끗한 것이 아니구나, 참 더러운 것이구나(不淨) 하는 것들을 깨닫기가 쉽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수념처 하죠! 수념처는 왜 할까?
여러분들 보통 느낌, 어떤 느낌들을 가질려고 노력합니까? 좋은 느낌 가질려고 그러죠. 행복하고 좋고 기쁘고 하는 느낌들을 가질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느낌이 그런 겁니까? 변하죠! 무상하게 됩니다. 그걸 변한다는 걸 무상하다고 그럽니다.
어떤 느낌이든 그대로 있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변하게 돼있습니다. 한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법이 없습니다. 똑같은 즐거움이라고 하더라도 강도가 다르게 돼있고, 왜?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도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무상(無常)"한 성품을 알아차리기 쉬운 게 수념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택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이다, 그러면 무상한 게 조금 더 젊은 사람보다는 좀 깊이 와닿을 겁니다. 그러면은 수념처를 수행하는 것이 맞을 경우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심념처죠! 심념처는 어떤 겁니까?
심념처, 마음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죠! 그래서 결국에는 마음은 자꾸 바뀌니까 짜증나고 싫습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납니다. 변하니까! 가만히 좀 있으면 좋겠는데, 몸은 오히려 변하는 것이 천천히 되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은 그거하고는 다르게 그거보다도 훨씬 빠르게 빨리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가장 쉽습니다.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부처님은 "고(苦)"라고 얘기합니다. 실제 마음은 순식간에 찰나 간에 수십 번을 변합니다.
그다음에 법념처, 그렇게 빨리 변하기 때문에 마음이든 육체든 그게 불만족스럽고 내가 콘트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고 싶은데 그대로 있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내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거라. 그게 "무아(無我)"라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을 통해서 부정과 무상·고·무아를 알아차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이 4가지를 대상으로 사띠를 한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사띠하는 대상은 신·수·심·법이죠! 쉽게 말하면.
그걸 항목별로 신념처에는 열여섯 개로 나눠놔 놓고 뭘 나눠놓고 자꾸 이렇게 해놓습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다른 교재들을 참조해가지고 지식적으로 얻으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에서는 그게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신 수 심 법이지만 이 4가지는 뭘 해야 되는 대상이죠? 사띠해야 되는 대상입니다! 사띠만 잘되면 됩니다. 그게 신념처든 수념처든 심념처든 법념처든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코끝에 호흡이 있죠.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습니다.
한번 사띠 한번 해보십시오.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알아차릴 때 분명히 사띠를 하고 있는데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어떤 사람은 ‘내쉰다’고 알아차립니다. 신념처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들이쉴 때 보니까 ‘시원하고’ 어떤 사람은 내쉴 때 ‘텁텁하다’ 그러면 수념처를 하고 있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들이쉴 때 내가 마음이 평온한지 사띠가 있는지 알아차리고 내쉴 때 고요하고 평온하고 사띠가 있는지 알아차리고, 심념처 수행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심념처 수행을 할 때 다른 마음이 없는지도 더불어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 마음이 자꾸 달아나거든. 간단하게 들이쉬는 하나의 동작에도 거기에 붙잡혀있지 않고 망상이 들어오든지 하기 싫은 마음이 들든지 그럽니다. 그러면 당연히 들이쉬면서 들이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가 또 마음은 다른 마음들을 계속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게 법념처라고 그럽니다.
똑같이 사띠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또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들이쉬고 내쉬고만 나는 알아차리겠다’ 그러면 사마디 수행을 하게 됩니다. 다른 거는 일체 무시해버리고.
그런데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어떨 때는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어떨 때는 움직임으로 알아차리고 이렇게 되면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되는 겁니다.
굳이 위빳사나 수행인지 사마타 수행인지 구분할 이유가 전혀 없고, 또 굳이 신 수 심 법 나눠가지고 ‘나는 이 수행만 하겠다’ 그럴 이유도 없다는 거라.
실제로는 그 수행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수념처 하고 있다,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리겠다, 느낌은 몸이 없이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마음이 없이 그 느낌을 알 수 있습니까? 그 느낌은 변하지 않습니까? 그속에 신·수·심·법이 다 있는데!
그래서 이걸 자꾸 나누고 하는 것은 경전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수행을 가르칠 때 이 사람은 이 수행법이 좀 더 맞다 싶어서 그 수행법을 가르치는 것뿐인 것이지, 그렇게 맹목적으로 나눠놓은 것뿐이지, 실제로는 사띠를 얼마만큼 열심히 잘 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입니다.
얼마만큼 해야 될까? 사띠를.
사띠가 뭐죠? 사띠가 무슨 뜻이죠?
조금 전에 5분 명상할 때 맨 첫마디가 뭐였어요?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로 가는 길이다." 압빠마다(appamāda) 입니다. 방일하지 않는다(不放逸)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뭘까? (수행자 대답 : 사띠를 놓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렇죠. 사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띠 없이 어떻게 방일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띠를 빼고 해탈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알고, 아무리 내가 지식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또는 아무리 부처님에 대해서 신심이 높다고 하더라도 해탈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거라.
스님이 태국에 있을 때, 지금은 다들 돌아가신 큰스님들이지만 그 큰스님들이 반복해서 하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제발 네가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거기에 머무르지 말아라”라는 겁니다. 네가 완전하게 아라한에 이르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때 만족하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도 만족하지 말아라는 거라.
스님도 그 과정을 쭈욱 겪어왔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얻은 칭호가 담마다로(dhammadharo) 라는 것입니다. '법을 지닌 자'라는 뜻입니다. 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그걸 남한테 자유롭게 풀이해서 설명하는데 막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줍니다.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나는 담마다로가 아니었어요. 경전을 풀이를 하고 하는 것은 잘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내가 법을 지닌 상태는 아니었다는 거라. 내가 수행을 통해서 딱 그 법이 이 마음속에 들어와가지고 바뀌지 않는 상태가 돼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다른 것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어야 되는데 계속 또 공부를 할려고 그러는 거라. 삼장 시험도 칠려고 그러고 또 뭣도 할려고 그러고 자꾸 하는 거라. 법을 지니고 있는데 왜 그게 필요해? 그러니까 칭호를 자꾸 더 얻게 되는 거라. 이거 얻었다가, 아짜리야(acariya) 이름을 얻었다가, 뭘 얻었다가 하면서 자꾸 더 얻게 되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법은 법을 수행하고 체험한 자는 그 법이 그 사람을 보호해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탐진치가 일어난다는 거라. 뭔가 자꾸 뭔가를 할려고 하고, 뭔가 될려고 하고, 그거는 불선한 마음 아닌가? 탐진치에 해당이 되는데! 탐진치가 일어나 있는 상태인데 그거는 법이 그 사람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 테라와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가면 처음부터 삼귀의와 오계를 스님한테서 받아 지닙니다. 스님이 일러주면 그대로 따라 하고,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고, 그다음 오계를 지키도록 하고 나서, 그다음에 마음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그러고 나서 수행 법문이 들어가집니다.
그런데 여기 오면 처음에 감정이 막 흥분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찬불가부터 하죠. 그리고 청법가 입니까? 청법가 할 때도 막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음이 들떠 있는데 이걸 바로 법문 해가지고 저게 들어가겠나 하는 거라. 그런데 금방 가라앉죠, 여러분들은? 그게 틀리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고,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은 이런데 올 거 같으면 법을 설하기가 참 까다로운 부분들이 많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압빠마다 얘기를 하다가 괜히 빠졌는데,
빨리 단어들을 보면 "사띠(sati)가 기본이 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하는 거라. 그런데 그 사띠는 여러분들 단어 검색 다 해봤으니까 나오죠! ‘기억한다’는 의미도 있고 아니면 ‘알아차린다’는 의미도 있고 ‘마음챙긴다’는 의미도 있고, 뭐 여러 가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뭘까? 사띠가. 다시 정정하겠습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사람의 알아차림의 힘과,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거기에서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사람의 힘과, 힘이 같을까?
사띠의 힘은 다릅니다. 두 개 다 사띠는 맞기는 맞는데 사띠의 힘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띠의 힘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사띠의 힘이 약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사띠가 아니라고는 얘기 못합니다. 왜? 사띠를 하고 있을 동안에는 뭐가 된다? 불선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나는 대상들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든, 느낌이 변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든, 그것은 차후 문제인 거고, 그것은 사띠의 힘의 차이인 것일 뿐이지 사띠가 다른 사띠는 아니라는 거라. 단지 힘의 차이는 틀림없이 존재를 한다는 거라.
힘이 있어야만이 수행을 계속해나갈 건데 힘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하다가 금방 지쳐버리든지 아니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그만두어버립니다. 좀 팍 처음부터 끌어올려가지고 하면 좋겠는데 그게 참 잘 안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사념처를 수행할 때 신·수·심·법이라는 순서로서 법을 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잘 안 변하는 물질적인 현상들부터 먼저 관찰하라는 거라. 그게 돼야 그다음 단계를 하기가 수월해진다는 거라.
그렇지만 처음부터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해가지고 안되는 법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받쳐주는 힘이라든지 그것을 보호해주는 힘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들도 태어날 때 각자 다르게 태어났고 성장하는 것도 각자 다르게 성장했듯이, 과거전생들은 여러분들이 어떤 조건에 있었는지는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님은 그래도 과거에 공덕을 좀 많이 쌓았는지 사회생활을 안 해보고 출가를 했어요. 나는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왜 그럴까? 때가 덜 묻었거든. 사회에 대한 때가 덜 묻은 거라.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도 없고 다른 여러 가지 가족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경 쓸 것들이 적다는 거라.
수행할 때 그런 것들이 적으면 참 수행하기에는 좀 수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미 때가 많이 묻었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단점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큰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걸 언제 스님이 느꼈느냐면 수행이 너무 안 돼. 앉아만 있으면 한시간을 넘기고 나면 다리가 아파 죽겠어. 근근이 한시간반 두시간 이렇게 하기는 하는데 일어날 때 끙끙거리고 일어나는 거라. 그리고 경행을 해야 되는데 경행도 잘 안돼. 다리가 그렇게 아팠던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면 대충하고 또 앉습니다. 그럼 앉아있기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내내 잘 앉아있는데 용만 쓰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가지고 삼일 동안 아예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먹고 다리를 한번도 펴지도 않고 내가 있겠다 하는 마음으로 딱 묶었어요. 몸을 묶어라 해가지고. 그래서 삼일을 견뎌봤거든요. 참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삼일 딱 지나고 나니까 그때 탁 얻어지는 이익이 뭐냐면, 물론 다리를 조복 받고 하는 그런 거하고는 전혀 관계없고, 조복 안 됩니다. 3일 동안 그렇게 해도. 좀 더 편해지기는 하겠죠. 그런데 몸을 조복 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잘못된 거라.
몸은 다스려나가야 되는 것이지 조복 받을 대상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3일 딱 지나고 나서 스님이 탁 알았던 게 뭐냐면 어려운 때일수록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진다는 거라.
힘들어 죽겠고, 다리는 떨어져 나가는 것 같고, 감각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온몸의 뼈마디 뼈마디 살갗이란 살갗은 다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지만은, 나중에 지나니까 그게 보이더라는 거라. 그전에는 볼려고 해도 안 보이는데 그게 알아차려지는 거라.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행이 재미있어지는 거라.
그래서 거기서 탁 느낀 게 수행은 나중에 수행이 끝나고 나서 그 수행이 잘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판단은 "수행할 때 즐거웠느냐, 괴로웠느냐" 하는 거라.
수행 끝나고 나서 ‘아, 참 내가 수행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어야 되는데, ‘힘들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부터 먼저 해야 된다"는 거라.
선지식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바른 스승도 만나야 되고, 바른 법도 들어야 되고, 자기 스스로 수행도 해야 되고, 그리하는데 다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마지막 네 번째가 바른 마음가짐이어야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수행을 하느냐?
보통은 보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한 것들을 얻을려고 합니다. 스트레스 많으니까 스트레스 좀 없앴으면, 나는 욕심이 많으니까 욕심 안 부리기 위해서, 그래서 그걸 정신의학적으로도 많이 이용을 하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가짐을 그렇게 해가지고는 수행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거는 어렴풋이 달성할지 몰라도 다른 조건 만나면 똑같은 현상들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가져야 됩니다. 내가 이생에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마음을 가져야만이 수행은 무르익어갈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 부분은 항상 여러분들이 유념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두 번째 교재 보십시오. 「사념처 수행의 시작」
사띠빳타나라고 하는 겁니다. 사띠빳타나의 원래의 의미는 사띠의 기초가 되는 그러한 뜻입니다.
맨 처음에 「수행의 세 가지 원칙」 해놓았습니다.
한번 중간에 부분에 1번 2번 3번 한번 읽어볼까요?
수행의 세 가지 원칙 :
1. 슬로우 모션 2. 실황 생중계 3. 감각의 변화를 사띠
예. 그게 첫 번째, 수행의 세 가지 원칙에 해당이 됩니다.
천천히! 왜 그럴까? 왜 천천히 하라고 그럴까?
(수행자 대답 : 알아차림을 쉽게 하기 위해서)
아, 쉽게 하기 위해서? 그것도 맞습니다. 알아차림을 쉽게 하기 위해서 천천히 하라고 그럽니다. 천천히 할수록 알아차릴 수 있는 조건이 더 커지겠죠!
그것도 있는데, 가장 큰 이유가 뭐냐 하면 여러분들 지금 스님 목소리 들리죠? (예) 또 스님 보입니까? (예) 왜 두 가지 합니까? 두 가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럼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데, 어떨 때는 두 가지가 다 되는데 어떨 때는 책을 열심히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누가 불러도 모릅니다. 그때는 왜 소리가 안 들릴까? 눈은 분명히 그걸 보고 있었는데, 똑같은 조건인데, 왜 그럴까?
마음은 찰나 간에는 하나밖에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한순간에는 하나밖에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나밖에 하질 못합니다. 단지 빠르기 때문에 마음이 워낙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걸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냥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하는 것처럼 해가지고는 다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대표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경행을 하라고 그러면 여기서 저만큼 가가지고 저 앞에 벽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벽에 부딪치지를 않습니다. 대부분은 가다가 딱 멈춥니다. 그리고 돌아섭니다. 왜 그랬을까? 걸어가고 있으면서. 걸어가면서 발을 들어가지고 옮기는데 생각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거라. 벽에 부딪친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하나씩 하는 훈련을 할려면 사실은 걸어가는 걸 이렇게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 초보자들한테 뒤로 걸어가도록 합니다. 발을 뒤로 떼라고 그럽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걸어가더라도 눈을 감고 걸어가라고 그럽니다. 실제로 눈을 감고 걸어가 보면 부딪친다는 위험은 있고 두려움은 있지만 부딪치든 말든 내가 죽는 것은 아니거든. 그럼 그걸 그냥 없애버리고 나면 아주 집중이 잘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턱 뭐가 부딪치면 그럼 ‘부딪친다’고 알아차립니다. 그럼 ‘발을 돌려야 되겠다’ 하고 알아차리고 돌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야! 이거 수행 진짜 잘되네’ 이럽니다. 마음이 두 가지를 안 하고 한 가지만 계속하면 집중이 진짜 잘된다는 거라.
그리고 사띠도 당연히 잘되게 돼있다는 거라. 집중의 힘에 따라서 사띠의 힘도 같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처음에 수행할 때는 무조건 천천히! 무조건 천천히!
이 수행할 때 기본 원칙 세 가지는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
이걸 잊어버리는 순간 수행은 사띠를 거기서 안 하고 다른 걸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화가 일어났는데 화를 알아차린다고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가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딱 무시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그래서 처음에는 슬로우 모션, 천천히!
밥을 하나 먹든 걸어가든 그렇지 않으면 앉아서 좌선을 하든 뭐든지 천천히. 천천히 좌선할 때 앉고 천천히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천천히 밥을 먹게 되고 천천히 걸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 움직임에 따라서 마음이 거기에 머물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실황 생중계! 그렇게 돼있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지, 일어나지 않는 다른 것들을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사띠의 대상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지금 딱 이 순간입니다. 지나고 난 것은 아예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골이 들어갔고 지나간 것을 되뇌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후회가 일어나죠? 그럼 후회가 사띠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뭔가를 해야 될 때는 지금 하고 있는 것! 지금 하고 있는 게 만약에 걸어가고 있으면 걸음걸이에다가 마음을 집중해야 되는 것이고, 지금 만약에 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밥을 먹는데 집중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를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두 가지를 하면 안됩니다. 밥을 먹으면서 TV를 본다든지, 걸어가면서 휴대폰 통화한다든지, 이건 금물입니다. 왜? 두 개를 할 것 같으면 아직은 천천히 해야 되는 단계인데 그것들을 분명하게 지금 현재에 머물러서 알아차리고 사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감각의 변화를 사띠하라.
지금 알아차리더라도 여러분들이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느낌입니다. 움직이는 것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거고, 일어나는 것들도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어있는 사람의 차이는 딱 느낌으로 나눠집니다. 여러분들이 적어도 사띠를 하고 있을 때는 살아있기 때문에 느낌으로 그것을 알려고 해야 됩니다.
계속 첫 페이지 가지고 할 수는 없으니까 두 번째 페이지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조심해야 되는 것, 두 번째 페이지 「수행하는 사람이 지켜야 하는 규칙」
「수행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
계를 지켜야 됩니다. 계를 안 지킨다 하더라도 수행을 하면 당연히 계가 지켜져야 됩니다.
계는 여러분들에게는 기본적인 오계입니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아라.
정해져 있는 것들은, 계율은 지켜라.
자신의 마음과 생활방식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은 하지 말아라. 그걸 피하라는 거라.
계를 자꾸 달리 생각하면 안됩니다.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들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모기라도 죽일려고 한다? 죽이려고 하는 마음 없이 의도 없이 어떻게 죽일 수 있어요? 죽일려고 하는 것은 불선한 겁니다. 그러면 죽이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거는 좋아하고 싫어함에 끄달려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술을 먹지 말아야 되는 거라. “안 취하면 안 되냐” 안 취해도 기분 좋아지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감정적인 것, 그다음에 쾌락에 젖어있는 것, 이런 것들은 극구 피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계부터 먼저 지키고, 그다음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다음에 수행 대상을 찾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가장 정확한 방향이고 빠른 길입니다.
그런데 안 지키는데 어떡할 거라? 그리해도 수행은 해야 되겠다 하면 수행은 하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 당연히 계는 지켜지게 됩니다.
수행을 하고 있는데도 계가 안 지켜진다? 수행 안 하고 있는 겁니다.
수행을 하고 있는데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고 탐진치가 잘 안 일어나는 상태가 되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적으로 욕심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다시 돌아보아야 됩니다.
아, 내가 계부터 어기는 것이 아닌가?
또 마음이 탐·진·치에 계속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걸 돌아봐야만이 수행을 할 때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계정혜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자꾸 무시해버리면 수행은 진척이 없습니다. 일정부분에 가다가 딱 막혀버립니다. 더 이상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아무리 바라밀을 다 쌓아가지고 그걸 받쳐줄 힘이 있다 하더라도 이게 안 되면 못 올라가진다는 거라.
조금 전에 스님이 오자마자 화장실을 갔다 왔습니다. 스님들 계율은 여러분들하고 같이 그냥 다섯 가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가짓수가 많습니다.
스님들의 계율은 쉽게 말하면 다섯 문을 지키는 계,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문을 지키는 계가 하나가 있고.
그다음에 자구를 의지하는 계가 있습니다. 자구라고 하는 것은 가사, 먹는 것, 그러니까 입는 옷 하나입니다. 먹는 것, 그다음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 그다음에 약품을 의지해야 되는 것 그런 것을 "자구에 의지한다" 하고 그럽니다. 그 외에 것은 의지하지마라 그럽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생활 속에서의 계율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되돌아보는 계가 있습니다. 내가 밥을 먹을 때 수행하기 위해서 밥을 먹었는지, 쉽게 말하면 배고픈 느낌만 제거할려고 해야 되는데 배부르다는 느낌을 일으킨 것이 아닌지 그런 것을 되돌아보는 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나누면 4가지인데, 생활 속의 계 중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조금 전에 화장실 갈 때 번뜩 그 생각이 들더라고. 우리 선원의 화장실일 거 같으면 위에 가사를 벗고 화장실에 들어가야 됩니다. 계율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이 위에 가사를 못 입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또 계율 하나가 생활 계율에 보면 위에 벗은 몸을 여자들한테 드러내지마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걸 나는 지켜야 될까? 벗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화장실 갈 때 어떻게 해야 되요? 여기서. 가사를 벗고 들어가라 하는 거는 뭡니까? 대소변을 볼 때 여기에 튀지 말아라고 하는 겁니다. 여자들에게 벗은 몸을 드러내지마라는 것은 어떤 겁니까? 내가 성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떤 걸 지켜야 돼? 두 번째 걸 지켜야 됩니다.
그마만큼 출가한 스님들은 가려야 될 것도 많고 지켜야 될 것도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어깁니다. 그런데도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한차례씩 꼭 압바나 마낫따(abbhāna mānatta)라고 하는 의식들을 행합니다.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것들이 있는 것들을 참회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날 저녁에는 반드시 내가 오늘 그래도 잘 계를 지켰는지 한번 잘 되돌아볼려고 해야 됩니다. 계를 잘 지켰다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때 딱 수행을 하면 사띠하는 것이 잘 되는 것들을 분명히 느낍니다. 그래서 계의 이익을 분명히 여러분들이 알게 될 때 수행하는 맛이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수행법」에 대한 겁니다.
「경행 수행법」 되어있습니다.
기본적인 원칙부터 얘기할게요. 경행은 말(馬)이 이렇게 옆을 못 보도록 (양쪽 눈 바깥쪽이 가려지게) 씌워둔다고 생각하고, 여러분들도 그와 같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자기가 시선이 향하는 곳이 자기 키 정도의 앞에 위치에 향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딱 그 한점에 고정한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한발 떼면 한발 앞으로 가서 머물고, 움직이면 움직인만큼 그만큼 간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만 딱 고정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리하고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할 때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알아차려라는 거라. 들었으면 ‘들어올렸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내려놓으면 ‘내려놓았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들어올리면서 들어올렸다고 모를 것 같으면 즉시 중단해야 됩니다.
즉시 중단하고 다시 고요하게 만들고 나서 발을 천천히 한번 들어보십시오.
자! 한번 해볼까요? 손바닥 한번 땅에 대보십시오. 요만큼 띄우고, 요만큼 내리고, 한번 해보십시오. 천천히 그걸 알아차리면서.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천천히 한번 알아차려보십시오.
다시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어떻게 알아차렸어요?
어떤 사람은 ‘들어올린다’고 알아차리고 어떤 사람은 ‘내려놓는다’고 알아차리고.
어떤 사람은 ‘어, 가벼워지네’, ‘무거워지네’ 하고 알아차리고.
또 어떤 사람은 들어올릴 때 ‘어, 손바닥이 뒤가 먼저 들리네’, ‘앞이 들리네’
전혀 관계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차려지는 만큼 알면 됩니다. 사띠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여기서 생깁니다.
스님이 들어올릴 때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했는데 ‘어떤 느낌일까?’ 하고 볼려고 그럽니다. 손바닥을 들어올릴 때 어떤 느낌이 있었는가?
그렇게 보면 보여집니까?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의식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떨 때는 가벼워지고 어떨 때는 무거워지고. 무겁고 가볍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그것을 느낌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왜 그걸 느낌을 알려고 하는데요?
수행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가장 편안하고 고요하게 나는 그냥 들어올려 질 때 들어올려지는 것만 알 거야! 알아진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게 가장 맞는 방법입니다.
남들은 걸어갈 때 여기에서 저만큼 2분이 걸린다, 그런데 나는 걷다가 보니까 2분이 아니라 1분밖에 안 걸린다, 1분만에 가면 됩니다. 왜 나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2분동안 걸어갈려고 하는데요?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알아차려지는 것만 알려고 해야 되지, 그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경행을 할 때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
일직선으로 왔다갔다 해야 됩니다. 이리 갔다가, 방이니까 저쪽으로 갔다가 뺑뺑이를 돈다, 안 됩니다! 산만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대상이 단순해지면 단순해질수록 알아차리기가 쉬워집니다.
또한 수행은 천천히 하면서 그것을 발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이게 왔다갔다 하는 것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힘들어집니다.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그마만큼 망상이 끼어들 가능성이 더 커져버립니다.
어느 정도 수행하면 「다섯 가지 장애」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망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수행은 일단 중단해야 됩니다. 장애이기 때문에! 그건 장애는 고쳐야 됩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 다른 것은 일체 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소리가 들리더라도 처음에는 전부 무시하십시오. 내가 보는 것은 딱 자기 키 정도의 앞부분에 고정해서 그대로 천천히 걸어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대신에 경행을 할 때 딱 서거든, 가장 좋은 것은 서가지고 배에다 손을 한번 딱 올려보십시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죠?
대상에 사띠를 일치시켜주기 위한 겁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보인다, 그럼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까지 한번 알아차려 보십시오. 손을 댔으면 당연히 조금 더 알아차리기가 쉽겠죠? 불러오고 꺼지고 합니다. 그럼 손을 살포시 내리고 발을 한번 움직여보십시오. 그러면 훨씬 ‘왼발’ ‘오른발’ 할 때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수행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라는 겁니다. 대상을 인위적으로 만들지도 말아야 되는 거고, 붙잡지도 말아야 되는 거고, 밀쳐내서도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대상은 일어나지게 돼있는 겁니다. 그 일어난 대상들을 사띠할 수 있도록 마음이 갖추어지도록 마음이 준비를 해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음, 그래. 이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알아차려진다. 아, 그러면 내가 한번 걸어볼까?’ 하는 마음을 내고 나서 걸어보라는 거라.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은 상태와 차이를 분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비유하면 됩니다.
아이를 업었을 때 자고 있는 아이와 깨어있는 아이는 무게가 다릅니다. 어떤 게 무겁죠? 자고 있는 아이가 훨씬 무겁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가벼워져있지 않으면 대상을 내가 붙잡든지 밀쳐낼려고 합니다. 그래서 발을(경행을) 하더라도 그냥 일반적으로 걸으면 될 건데 ‘천 천 히’ 합니다. 붙잡으니까!
물론 들어올려지는 건 알아차립니다. 내려놓는 건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마음이 거기에 붙잡혀 있어가지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볍고 그리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리고 마음이 깨끗해지고 선한 마음의 자리에 있어야만이 수행이 스타트가 된다 하는 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경행 수행법」 전부 다 넘어가겠습니다.
「입선 수행법」도 읽어보면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그다음에 「좌선 수행법」
수행에서 좌선수행이 어찌 보면 더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루 중에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고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느냐 하고 체크를 한번 해보십시오. 있어요?
다만 30분이라도 일어나지 않고 앉아있을 시간이 있으면 이걸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걸 하면 안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 나이들이 조금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딱 정해놓으십시오. "요 시간 만큼은 좌선수행 하겠다!" "앉아서 사띠하겠다!" 하고 딱 마음을 굳게 먹여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걸 바꾸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아, 이번에 숙제를 줬는데 숙제 체크를 안 했다. 넘어갈게요.
숙제 또 내줍니다 이. 다음주 되면 또 줄어들겠지. 줄어들어도 할 수 없어.
숙제는 내줍니다. "앉아서 좌선했을 때 알아차릴 때 사띠하고 있을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는가?"
틀림없이 고요한 상태에서 앉아서 관찰하고 있으면 현상들이 틀림없이 일어납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그거는 정확하게 여러분들이 한번 체크를 하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앉아있으면 왜 호흡을 관찰하라고 할까?
관찰할 거 많은데, 많잖아 앉아있으면! 왜 호흡을 관찰하라 그래요?
(수행자 대답 : 호흡이 거치니까 관찰하기가 좀 쉽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있습니다.
(수행자 대답 : 멈추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계속적으로 내가 알아차리든 안 알아차리든 계속적으로 그건 하거든. 그건 죽을 때까지 어쨌든 호흡은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계속 움직이는 대상들'이 수행의 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한국은 안 그렇죠? 안 움직이는 걸 대상으로 하죠!
그런데 부처님 수행법은 어떠한 경우든지 움직이는 게 대상입니다.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어떤 경우든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참 여러분들한테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이런 것들입니다.
어쨌든 각설하고, 움직이는 것이 호흡이기 때문에 호흡에다가 자꾸 마음을 두도록 노력을 해보십시오. 여기 자세히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설명들을 쭉 해놓았습니다, 좌선수행을.
그래서 아까 기본적인 삼원칙 얘기했죠!
앉을 때 천~천~히 앉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앉고, 그리고 몸도 편안하게 돼있는지를 한번 잘 관찰하고,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됐는지를 한번 관찰하고, 그러고 나서 마음이 호흡쪽으로 탁 가보면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러면 이미 마음은 고요한 상태가 된 겁니다. 그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 호흡이기 때문에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더라도, 그것들을 여러분들이 움직임으로 알아도 느낌으로 아는 겁 됩니다. 사대요소를 알더라도 느낌으로 아는 겁니다. 그 느낌들을 각자에 맞게끔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다가 만약에 망상이 일어났다,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전부 무시하십시오.
‘에이, 또 수행 방해하는 마구니가 일어났네, 쓸데 없는 거 일어났네’ 하고 딱 놔주어버리고 그냥 호흡 하십시오. 조금 더 진행이 되면 그게 대상이 될 수도 있고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호흡을 하면서 알아차리는 것들이 내가 ‘아, 이렇게 변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알면 됩니다. 적어도 거기에 마음을 붙이고만 있으면 수행 잘하는 겁니다.
30분 동안 편안한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호흡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사띠는 본인의 능력에 따라서 알아차리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대상이 달라집니다, 호흡도. 그러면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렸으면 나중에 보고해야 되죠!
왜 보고를 하라 그러느냐면, 호흡을 알아차리면 현상들을 나중에 체크를 해보고 얘기를 하라고 하느냐면,
사띠(sati)에는 뭐가 따라야 됩니까? 삼빠자나(sampajāna)가 따라야 됩니다.
삼빠자나라고 하는 것은 끊어짐 없이 계속적으로 사띠가 이어졌을 때, 그것들을 완전하게 아는 상태를 삼빠자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띠라고 얘기했을 때는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삼빠자나가 같이 따라붙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경에는 사띠라는 글자가 먼저 나오고 삼빠자나가 나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하나만 있고, 어떨 때는 삼빠자나 먼저 나오고 사띠가 뒤에 나오기도 하고, 경에서는 각자가 다릅니다.
그런데 수행에서는 똑같습니다. 사띠가 돼야만이 삼빠자나가 가능합니다.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띠가 연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삼빠자나라고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그럼 삼빠자나가 됐으면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게 됩니다. ‘어, 내가 수행할 때 이게 일어났지’ 그럼 그거 보고하면 됩니다. 그것이 분명히 인식되고 기억했기 때문에 한달 뒤에도 그것을 떠올리면 그것들을 얘기할 수가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만 되면 적어도 여러분들은 사띠의 힘은 굉장히 커져 있습니다. 수행의 기본적인 메카니즘을 분명히 이해를 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숙제를 해와야 됩니다. (예)
(수행자 : 그때의 수행을 지속적으로 방일하지 말라는 자체가 삼빠자나와 사띠가 그러니까 사띠가 삼빠자나 상태로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속되고 흘러가고 있다, 이걸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방일하지 않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마음이 되고 이런 것이...)
그렇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사띠와 삼빠자나가 계속 이어지면 죽음의 순간에 어떻게 될까?
지 죽는 줄을 압니다. 호흡이 끊어지는 줄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면 적어도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겠죠! 왜 그럴까? 선한 마음이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결과로서 반드시 선한 마음이 일어난 것들을 따르게 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띠만 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여러분들이 인간으로는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을 거 아니라? 다음생에서.
그런데 이생에서 끝내도록 하십시오. 이생에서! 계속적으로 하면 끝내집니다.
그다음에 6페이지, 「명칭을 하는 것으로 향상의 정도가 결정된다」 하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명칭을 왜 붙이라고 하느냐면 어느 정도 수행하는 사람들은 명칭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자꾸 마음이 달아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무조건 붙잡아 와야 됩니다.
붙잡아 올 수 있는 방법은 명칭밖에 없습니다. 명칭도 분명하게 거기에 맞는 명칭을 붙여야 되는 것인데, 붙이든 어쨌든 간에 탐진치가 아닌 명칭일 거 같으면 그냥 우선 붙이십시오. 붙여가지고 자꾸 그것들을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냥 쭉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다리가 아플 때나 가려움이 나타났을 때, 뭐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을 때 명칭 붙이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밑에 「망상이 생겼을 때의 능숙한 대처법」 8페이지에 있습니다.
망상이 왜 생기죠? 사띠 안 해서 생깁니다. 사띠 안 하니까 망상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대상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냥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망상이 강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죠? 잘 안 돌아와지죠! 계속적으로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띠하는 것을 바꾸어야 됩니다.
호흡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선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망상은 불선한 마음이죠? 그럼 선한 마음이 뭐가 있어요? (수행자 대답 : 사띠) 사띠도 물론 선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띠로 바로 돌아오기가 힘이 약하기 때문에 안 돌아와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것!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그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수행자 : 그것도 중독돼버리면 그것만 계속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할 수 없지 뭐. 지 인연이지.
그거라도 해가지고 망상을 떨어뜨리고 힘을 약화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망상이 일어났을 때 기본적인 방법은 우선 어떤 대상이든 선한 마음을 일으키라는 거라. 부처님 하든 아니면 자애수행을 하든 뭘 하든지 간에 선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고 나서 그다음에 대상으로 돌아오도록, 호흡이면 호흡 걸어가면 걸어가는 것, 그렇게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와선 수행법」
와선 수행법 왜 할까? 대부분 와선하라고 그러면 잡니다. 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면 꿀잠을 잡니다. 그렇게라도 하십시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잘 때 들숨으로 잠이 들었을까? 날숨으로 잠이 들었을까?
모르죠! 한번 해보십시오, 와선할 때.
"깨어날 때 들숨으로 깨어날까, 날숨으로 깨어날까?"
다를 것 같죠? 딱 정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뭐로 잠이 들고 뭐로 깨어나는지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그대신에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잠잘 때 만약에 들숨이면 깨어날 때는 날숨이다. 잠잘 때 만약에 날숨이면 깨어날 때는 들숨이다." 그런데 잠들 때는 들숨이든 날숨이든 딱 하나만 정해져 있습니다. 깨어날 때도 들숨 날숨 중에 딱 하나만 정해져 있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시험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럴려면 가장 편한 상태에서 와선을 해야 됩니다.
몸 전체의 긴장을 전부 다 풀어주고 배에다가 손을 딱 올리고, 누워서 하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이 가장 쉽게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숨을, 그때는 명칭을 안 붙여도 됩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다가 어떨 때는 잠드는 줄 모르고 잠이 들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데 예리해질 거 같으면 그 순간에 딱 필름이 끊기듯이 끊겨지는 것들을 경험을 합니다. 한번 경험을 해봐야 됩니다.
그리 안 하더라도 적어도 와선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러면 굉장히 개운합니다. 잘 때 꿈을 꾼다든지 이런 거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이 편하게 잡니다. 단, 몇분 아니면 한시간을 자더라도 꿀잠을 잔 듯이 깨어나집니다. 굉장히 효과 있기 때문에, 그래서 행·주·좌·와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은 수행을 어떤 것에도 한정해놓지 않았습니다. 앉아서만 수행할 거 같으면,
경전에 앉아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많을까, 아니면 서서 수행하다가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상태에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많을까? 어떤 게 많을 거 같애요?
앉아서? 땡! 경전 곳곳에 보면 물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닫고, 뭐 할 때 보고 깨닫고, 앉는 것 외에 다른 것에서 깨닫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왜 앉아가지고 확률이 적은 그걸 할려고 그래? 그거 하지 마라. 그것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집중력이 향상 될려면 밥 먹는 것을 사띠하라. 그게 10페이지.
그다음에 스트레스 없게 하기 위해서 사띠하라. 11페이지.
그다음에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들을 다, 모든 동작들을 다 사띠하라. 그게 13페이지입니다.
그다음에 15페이지, 조금 전에 경행은 집중수행할 때 좌선, 경행할 때였고,
지금은 일상에서 일상적으로 걸을 때 경행하는 그것도 사띠하라.
그다음에 16페이지, 일어날 때와 취침할 때 그것도 사띠하라.
그다음에 17페이지, 싫은 것들이 일어났을 때 순식간에 없애는 수행응용법, 사띠하라.
그다음에 19페이지 보면, 맨 위에 부분에 보면 「죽어있는 상태에서 탈출하여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지금까지 긴 시간 죽어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살아있도록 하십시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사띠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19페이지에, 「그렇게 수행하다 보니까 틀림없이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난다.」 뭐 뭐죠? 다섯 가지 장애?
(수행자 대답 : 감각적인 욕망, 악의, 혼침·졸음, 들뜸·후회, 의심)
그 다섯 가지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그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법은 다음에 오력 부분에 다섯 가지 힘이라고 돼있죠? 21페이지. 다음 시간에 「오력」 부분 할 때 그게 언급이 되어나갑니다. 이걸 극복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37조도품에 오력 말고 또 뭐가 있죠? (수행자 대답 : 오근이 있죠.)
오근하고 오력의 차이점이 뭐죠? (수행자 대답 : 힘과 기능을 얘기합니다.)
음, 힘과 기능? 쉽게 말하면 다섯 가지를 짬뽕을 해가지고 시소 같이 요거 하나 태우고 여기에는 뭘 태워야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그걸 태워가지고 서로 균형이 맞도록 하는 것들이 「오력」이라고 보면 됩니다.
「오근」은 각각의 특징들 기능들을 분명하게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는 분리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시소가 균형이 잘 맞아야만이 이 다섯 가지 장애는 사라집니다.
(수행자 : 다섯 가지를 잘 맞추도록 기능을 하는 것도 사띠다?)
그럼요. 사띠를 하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깨달음을 이르기 전이든 깨달음을 이르고 나서든 사띠가 없는 상태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사띠는 있습니다. 나머지 오력 중에서 4가지는 반드시 균형을 맞춰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장애들을 극복을 해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음 시간에 두 번째 시간 가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8~2022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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