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4편- 사여의족_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에서 삼매의 개발 부분. (2022년 07월 23일)

담마마-마까 2023. 4. 24. 09:44

https://youtu.be/XpbQp0su9bA

–4편- 사여의족 (2022년 07월 23일)

 

이번 시간에는 사신족, 사여의족이라고 하는 부분에 관계된 것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여의족이 뭐죠? 어떤 겁니까? 네 가지 신통 부분이죠!

네 가지 신통 부분은 경전 담마빠다 같은 경우에 보면 참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게 「지혜가 충만했을 때」에 대한 것은 법구경116번에 보면 상낏짜 장로에 대한 예로서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삼매에 들었는데 죽은 줄 알고 장작더미 위에서 몸을 태웠는데 몸이 하나도 안 타고 나중에 삼매에서 깨어났다 하는 그런 겁니다. 지혜가 충만했을 때 그렇게 되는 부분이고.

 

그다음에 「삼매」 부분은 꼰단냐 장로 이게 법구경111번에 있고, 사마와띠 같은 경우에는 21번 22번 이런 데 있습니다.

「공덕」 같은 경우에는 자띨라 장자에 대한 것이 416번에 있고,

그다음에 「결의」에 대한 것들은 쭐라빤따까 같은 경우 25번에 있고,

대표적인 게 이 「결의」 부분은 부처님이 천상에서 내려왔을 때 여섯 세계를 중생들한테 보여주신 그런 부분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몇 년 전에 호주에서 그런 적이 있습니다.

불교를 잘 아는 분도 아닌데, 이 거사님이 스님한테서 호흡하는 것을 배웠어요.

“다른 거 일체 신경쓰지 말고 코끝에 딱 집중해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것만 관찰해라” 하니까 그냥 그렇게 했어요. 절에 잘 가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남편이 명상에 든다고 방해하지 말아라고 해서 방에서 나왔는데 한시간 반이 지나도 나오질 않는 거라. 그래서 부인이 이상해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남편이 가만히 있는데 숨을 안 쉬고 있는 거라.

그래서 큰일났다 해가지고 우리말로 하면 119를 불렀어요. 119가 와가지고 그 심장 뭐라 그러죠? 심장재생기인가 뭐? 아, 심폐소생도 하고 뭐도 하고 했는데 그런데도 심장이 돌아오지를 않는 거라. 숨도 안 쉬고. 그래서 병원에 가가지고 의사들한테 보이니까 의사들도 당연히 뭐라 하겠어요? 죽었다고.

그런데 희한한 게 죽었기는 죽었는데, 아무런 기능을 못하거든요. 손도 꺽어버리면 꺽여져버리고, 부러뜨려버리면 부러져버리는 상태라.

 

그런데 죽은 사람하고 뭐가 다를까? 딱 하나 차이가 나는 것이 있습니다. (수행자 대답) 숨은 안 쉰다니까.

체온! 몸이 따뜻한 것은 아닌데, 삼매에 든 사람들은 체온이 서서히 떨어집니다. 그게 일주일을 간다고 합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체온이.

체온이 안 떨어지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면 금방 싸늘하게 식어버리거든요. 병원에서 그 난리까지 치뤘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체온이 안 떨어지는 거라.

그런데 마침 이 의사가 인도인인 거라. 인도인. 그래서 그 부인한테 물어봤어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습니까?” 하니까 “남편이 명상하러 들어간다고 들어갔는데 가보니까 이렇게 돼있더라” 자기도 뭔가 이상한 거라. 인도는 원래 명상이 많이 발달돼있으니까. 그래서 “그러면 그냥 가만히 놔둬보자” 놔둬보고, 사망선고 하고 하는 것은 그뒤에 해도 되는 거니까 가만히 놔둬 보자 해가지고 놔뒀다가, 정확하게 하루 지나고 나서 이 남편이 딱 깨어나는 거라.

그게 불과 한 삼년 전인가 그렇게 된 사건입니다.

 

그게 뭐로 가지고 가능한 거라구요? 아까 장작더미에 올렸는데도 타지 않았던 거하고 마찬가지로 「신통」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 신통은 어디서 온다구요? 「삼매」가 개발되지 않으면 신통은 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천안통, 천이통, 어쩌고 하는 것들을 개발할려고 하더라도 1선정 2선정부터 해가지고 4선정까지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걸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괜히 삼매에 들어보지도 않으면서 남의 미래를 점친다든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그냥 추측인 것뿐이지 정확한 것은 아닐 수밖에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자! 여러분도 좀 그래봤으면 좋겠죠? (예)

공부하라는 건 공부를 좀 해왔나? 공부 안 하면서 원하기만 하면 원해지나? 아까 바라밀 노래가 있든데,

 

삼매를 얻으려고 하면 여러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되는 게 있습니다.

그걸 갖추지 않고 삼매만 얻고자 한다? 그건 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뭘 갖추어야 될까? (수행자 대답) 그렇죠.

계를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것은 여러분들 오계 부분, 여기도 나중에 조금 더 발전이 되면 「삼귀의 삼창」만 하지 말고, 삼귀의 삼창 다음에 「오계」도 받아지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 대답 : 알겠습니다.)

원래는 오계는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라고 해가지고 "받아지닌다"는 뜻이거든요. 누군가가 줘가지고 그걸 자기가 복창을 하고 가슴에다가 새겨가지고 그렇게 된다는 그런 뜻인데, 스님이 없을 때는 뭐 어떡할 거라? 그냥 복창해야지 뭐. 스스로.

그렇게 해서 계는 반드시 지키도록 그렇게 해야 되고.

 

또 하나는 감각적인 대상,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적인 대상들은 되도록이면 피해야 됩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대상들도 되도록이면 안 접할려고 자꾸 만들어야 되지, 쉽게 얘기하면 세상 시끄러운 짓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번잡하게 하고 이런 것들은 하지 말도록 마음이 고요하게 되고 안정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삼매를 개발하든지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또 사마디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되는 것들은, 아까 얘기했던 바라밀, 바라밀들을 성취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대승에서는 육바라밀이라고 그러는데, 테라와다에서는 십바라밀이거든. 십바라밀을 낮은 계층부터 해가지고 중간 계층, 최상위 계층 해가지고 그걸 세 등분으로 나누니까 삼십바라밀이 됩니다. 삼십바라밀이 되는데, 어쨌든 그런 바라밀들을 자꾸 성취할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하나씩 하나씩 성취를 해나가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또 다른 것들은 다 어느 정도 구비가 됐는데, 수행하다가 자꾸 그부분에 걸려가지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할 때 가만히 그걸 뜯어보면 대부분은 보면 어떤 바라밀이 부족해가지고 그걸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특히 결정심 바라밀 같은 경우에,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사마디 부분에서도 일선정에서 이선정으로 넘어갈 때 결정심을 내지 않으면 넘어가지지를 못합니다. 이선정 삼선정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런 바라밀들은 여러분들이 자꾸 숙지해놨다가 조금씩 조금씩 성취를 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십바라밀(Dasa pāramī) : 보시(dāna), 지계(sīla), 출리(nekkhamma), 지혜(paññā), 정진(viriya), 인욕(khanti), 진실(sacca), 결정(adhiṭṭhāna), 자애(metta), 평정(upekkha)]

 

꼭 이런 것은, 이 세 가지 부분은 삼매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해놔 놓으면 편합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욕 안 먹고 쉽게 말하면 마음이 선한 쪽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 나쁜 쪽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아니고, 살다 보면은 ‘아, 참 내가 잘 살고 있다’ 하는 마음이 들고 그럴 것 같으면 좀 더 편하게 수행하는 조건이 갖추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꼭 필요한 것이 뭐냐면, 사마디를 닦기에 적당한 장소들이 돼야 됩니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고,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고, 지금 당장 급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것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

사마디는 어쨌든 그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마만큼의 시간은 적어도 확보가 되어야 되고, 그마만한 장소들은 반드시 확보가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돼요?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전을 뒤져보면.

 

삼매에 들었는데 결정심을 뭐라고 탁 하느냐면, 우기니까 매일 같이 비가 오니까 "나는 비가 오면 삼매에서 깨어나겠다" 하고 결정을 하고 결의를 하고 탁 삼매에 들었는데, 때마침 비가 계속 안 와버렸어요. 그럼 이 사람은 깨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결정심에서 나중에 다섯 가지 자재 부분에 얘기하겠지만, 딱 결정하고 들어가면 그 부분에서만 깨어나지는 것이지 다른 부분에서 깨어나지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됐겠어요? 나중에 삼개월 뒤엔가 비가 왔는데 그때까지 안 죽고 있었어요. 그런데 깨어나자마자 어떻게 되겠어요? 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분이 만약에 도와 과를 이루어가지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해탈을 해버리겠지만, 그냥 삼매만 개발을 한 상태에서 도와 과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했다고 할 것 같으면 어찌 보면 개죽음이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결정심을 낼 때도 그런 것들을 잘 고려해가지고 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할 거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은 두 부분으로 나눠가지고 프린트물이 나가 있습니다.

 

사마타(samatha) 수행에서의 사마디(samādhi)-삼매의 개발 부분과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에서의 사마디(samādhi) 개발 부분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사마디는 이디 영역에 속해요? 사마타에 속해요, 위빳사나에 속해요? (수행자 대답 : 사마타) 사마타?

사마타는 어떤 거라고 그랬어요?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는 거죠!

위빳사나는 어떤 거라고? (수행자 대답 : 일어나는 대상에) 실재하는 것들, 여러 가지 대상들입니다. 느낌도 있고, 우리 맨 처음에 첫 시간에 배웠던 4가지 있죠. 법에 대한 것도 있고, 몸에 대한 것도 있고, 마음에 대한 것도 있고, 뭐가 생길지 어떻게 알아서? 그럼 생겨나는 대로 그걸 족족이 사띠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 사마디에 들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은 마음청정, 그러니까 사마디 부분은 1선정에서만 그치도록 합니다. 그뒤에 개발하는 것은 전부 사마타로 전환해가지고 그 선정을 개발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초선정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사마디의 힘이 작용을 합니다.

왜 그럴까? 사마디의 힘이 작용을 한다는 것은 뭐 때문에 그래요?

사마디를 개발하려면 다섯 가지가 개발되어야 돼죠! 뭡니까?

(수행자 대답 : 통찰지, 확신, 위리야, 사마디, 사띠) 그거는 오력이고.

오력은 당연히 저번 시간까지 다했으니까 오력은 다 자재할 거라고 보고 지금 얘길하는 겁니다.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 이 다섯 가지 힘이 자꾸 강해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사실은 앞에 두 개하고 뒤에 두 개는 하나의 묶음 같이 이렇게 나옵니다.

 

이 다섯 가지가 많이 강해져가지고 즉시즉시 대상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들이 1선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위딱까, 위짜라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뒤에 위딱까, 위짜라라고 하는 의식이 없는 상태가 돼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마타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됩니다.

물론 2선정에 들었다가 나오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하고, 3선정에 들었다가 나오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하고, 4선정에 들었다가 나오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하고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데, 지속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경우에는 초선정까지만 해당이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 열반하실 때 몇선정에서 열반했어요? (수행자 대답 : 4선정) 4선정? 누가 그래요? 1선정부터 4선정까지 갔다가 다시 쭉 내려오고, 초선정 들고나서 어쨌든 마지막에는 열반에 들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사마타 수행으로 집중하는 힘과 삼매를 개발할 것인지, 위빳사나 수행으로 개발할 것인지 하는 것은 여러분들 선택입니다.

스님이 추천하고 싶은 것은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 아니면 병행해라!"

이거는 서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끌어주는 것이 그냥 하나만 지속적으로 쭉 해나갔을 때 일어나는 위험부담이나 또는 그 속도보다도 훨씬 빠르다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이면 두 가지를 다 같이 알아가지고 조금 조금씩이라도 하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낫지 않을까 하고 스님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사마타만 하라는 사람도 있고, 순수하게 위빳사나만 하라는 사람도 있고, 그렇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이걸 다 병행을 합니다. 병행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먼저 사마타 수행부분입니다.

사마타(samatha) 수행에서의 사마디(samādhi) 개발 부분.

 

사마타 종류는 40가지가 되죠!

그럼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화두라고 하는 것은 이 40가지 영역에는 속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불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뒤에 조사 스님들이 만든 거죠! 그렇긴 하더라도 어쨌든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몰입시켜 주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오는 부작용들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도 조금 문제시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런 식으로 조사스님들이나 이런 것들까지 다 사마타의 영역에 속하게 될 것 같으면 음악을 들으면서 몰입하는 것, 춤으로 몰입하는 것, 이런 것까지도 다 사마타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그런 현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는 관념적인 것들도 사마타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데, 순수하게 불교적인 사마타는 40가지 종류만 해당이 된다 하는 겁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게 부작용이 없는 것들이 뭐가 있느냐면 자애명상, 그다음에 부처님에 대해서 숙고하고 회상하는 것, 아눗사띠라고 그럽니다. 이런 것들은 거의 부작용이 없습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그 수행주제를 줍니다.

그래서 여기서 적어놓은 것은 자애부분에 해당되는 걸 예비명상으로서 적어놓았습니다. 꼭 이게 답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작용이 없는 것을 적어놓았기 때문에 누구나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자애명상 해보신 분? 해봤어요? 어떻든가요? (수행자 대답) 지속적이지는 않고? (예) 해보니까 좋긴 좋든가요? (예) 뭐가 좋든가요? (수행자 대답) 음, 편안하고 고요하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자애명상을 하면서 얻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것들은 내가 행복하듯이 다른 사람도 좀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이기적인 부분이 조금씩 제거가 돼나갑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떡 한쪼가리 생기면 나도 많이 배고파서 이 떡 한쪼가리 먹어도 배가 아직 고플 것 같은데도 옆에 누가 있으면 반 딱 쪼개가지고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진짜 행복하기를 바랍니까? (예!)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겠어요?

돈 많이 생기면 행복할까? 아니면 내내 가정 가사노동이나 아니면 돈 버는 거 걱정 안 하고 내내 그냥 부처님 말씀만 듣고 가만히 있으면 참 행복하겠어요?

행복한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들이 한번 떠올려봐요.

‘내가 행복하기를’ 하면서도 행복한 것이 어떤 건지를 모른다면 그거는 공염불이 돼버리는 거라. 진짜 감각적인 것을 벗어난 상태에서 진짜 행복한 것이 어떤 건지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닥 그렇게 많지 않죠. 대부분은 보면 감각적인 것으로 인해서 행복했던 것이고 그걸 벗어나면은 별로 그렇게 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미지화 한번 잘 해보십시오.

 

가장 친한 친구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다 집에 가 인제. 친구 하나도 없이 뭘 하겠노? 가장 친한 친구한테 속에 있는 말 다 뱉어내도 그게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고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 그럴 것 같으면 맘껏 말할 수 있잖아. 그리고 그 친구한테는 어떤 모습으로든지 화장 안 하고 가든지 슬리퍼를 신고 가든지 뭘 하든지 만나서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거잖아. 그러면 그 친구하고 얘기할 때, 그 친구를 탁 떠올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 그게 행복하다는 거라.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그런 조건들을 따지지 않고 내가 뭔가를 했을 때 그것들을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을 행복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게 부모님이 될 수가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스님들도 될 수가 있고, 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을 한번 떠올리면서 내가 어떤 것들을 하더라도 그분들은 다 받아준다 생각하고, 그래서 내가 ‘아, 내가 진짜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도 그렇게 하면 마음이 충만되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거라.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하는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하는 것은 어떤 역할들을 하느냐면,

여기 물컵이 있습니다. 물을 계속 따르잖아요. ‘내가 행복하기를’ 하면서 하면서 물을 따르면 이 물컵에서 물이 넘치겠죠. 그러면 이 물이 다른 데다가 번져나가는 겁니다. 그와 같은 겁니다. 여기가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데 번져나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우리 남편이 행복했으면’ ‘우리 부모님이 행복했으면’ 지가 행복하지 않은데 그게 가능하겠어요? 가능하지 않은 게 그게 사무량심이라는 겁니다. 흘러넘쳐 가지고 다른데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것이 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내가 행복한 행동들을 하고 행복한 말들을 합니다. 행위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항상 본인은 싱글벙글 싱글벙글하게 됩니다.

그러면 만약에 남편이 있으면 그 모습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계속 볼거 같으면 그 사람도 점점 더 안 좋은 거보다는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럴 때 ‘아이고, 우리 신랑도 행복했으면’ 하고 할 것 같으면 그 마음이 신랑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렇게 넓혀가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좀 있으면 백중이죠? 스님은 전혀 그런 거 안 하니까 백중이 있다는 것만 알지, 백중날 스님은 놉니다. 그냥 우리 선원에서 띵가띵가 혼자서 수행하고 노는데, 백중날 뭐하죠? 돌아가신 부모님들 좋은 데로 좀 천도 됐으면 하고 바랄 겁니다.

부모님한테 내가 천도 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어떻게 전해질까? 전해질 수 있을까? (수행자 대답 : 없을 거 같애요.) 없어요? 없을 거 같애요? 그럼 뭐 하러 해? (수행자 대답) 그런데 왜 지금 다 하고 있어?

(수행자 질문)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가능하기는 하죠. 그런데 그거는 집착하는 부분하고 행복해지는 거 하고 또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는, 쉽게 말하면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에서 자(慈), 비(悲), 희(喜) 부분하고 사(捨) 부분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세 가지(慈悲喜) 부분들은 내가 뭔가를 간절히 원했을 때 그것들이 되는 형태들을 띠는 것이고, () 부분은 조금 전에 같이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고요하게 함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평온해지고 하면서 밖에 대상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이든 그것에 대해서 끄달림 없이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들로 인해서 길러지는 것이 우뻭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차원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거는 나쁜 부분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하는 부분 전통적인 것도 꼭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배척할 필요가 없는 게 여러분들이 돌아가신 분들이 어디에 태어났는지 모르잖아. 그건 스님도 모릅니다. 그거는 부처님만 알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아라한들도 모릅니다.

그럼 만약에 돌아가신 분이 나쁜 세계에 태어났으면 어떻게 할래요? 특히 나쁜 세계 중에서 뻬따(peta)라고 하는 것, 지옥 말고. 지옥은 내가 먹는 먹이가 다릅니다. 아귀계, 아귀계는 뭐가 먹이라요? 아귀계는 생전의 가족들이 주는 마음이 먹이입니다.

‘니가 행복하기를’ 하고 아귀(peta)한테 얘기할 것 같으면 그 마음을 먹이로 해서 그 사람이 먹고 살 수가 있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러니까 아귀계에 태어난 사람들한테는 이런 백중을 하면서 그분들한테 내가 공덕을 회향을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빨리어 게송에도 분명하게 그렇게 나옵니다.

"아귀계에 태어난 나와 관계된 조상들이 행복하기를."

"아귀계에 있는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빨리 그 몸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하는 두 가지 게송을 딱 합니다.

나머지 육도윤회에 있는 거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뭘 해도 먹이가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는 백중 하는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나빠갖고 쓸데없다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대신에 백중에 임했을 때는 마음을 가질 때 항상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모든 나의 부모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천도된다는 생각은 가지지는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빨리 본인이 어떤 상태에 있다는 걸 자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각을 하고 ‘아, 내가 이 몸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언젠가는 그 부분으로부터 해방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백중에 임하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어쨌든 행복하기를 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점점 확대해나가는 것이 여러분들이 사마디를 개발하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괴로움이 없기를부터 해가지고 몸의 괴로움이 없기를’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하는 부분도 그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해나가면 됩니다.

이 4문구는 빨리어에서 딱 정해져 있습니다. 이 4개를 동시에 같이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무슨 욕구가 있을까? ‘내가 행복하기를’ 할 경우에는 어떤 욕구가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게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사마디를 할 경우에는 몸도 가라앉아야 되고 마음도 가라앉아야만이 뭔 대상에다가 몰입을 할 거 아니라? 그래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수 있도록, 완전하게 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해서 가장 단순한 대상에다가 마음을 몰입을 해가지고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들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41페이지 한번 보십시오.

아, 그리고 그 얘기를 안 했네. 그렇게 자애수행을 하고 나서는 가라앉고 나서는 뭘 해야 돼요? 가만히 놔둬버릴 것 같으면 잠들어버리게 됩니다. 안 그러면 망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라앉고 나면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호흡에다가 마음을 두도록 해야 됩니다. 호흡 한번 보십시오.

코끝 있죠? 코끝하고 윗입술 사이, 인중이라고 그럽니까? 윗입술 그 사이를 통해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까? (예)

그럼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될 것,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들은 배제하라. 사마타 수행에서는 절대 그거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위빳사나로 전환돼버립니다. 그래서 아나빠나사띠라고 하는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이 위빳사나에도 있고 사마타 수행에도 있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느낌은 변하죠? 그렇게 변하고 하는 것들은 위빳사나로 빠져버립니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그냥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립니다. 그대신에 그 호흡을 딱 인중이면 인중에다 마음을 두고 그 호흡이 끝까지 들이쉬고 그다음에 끝까지 내쉬는 것을 다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꼭 바이올린이 있으면 바이올린은 가만히 두고 현을 쫘악 그었다가 쫘악 올리고 하는 것, 그대로 알아차려야만이 이게 튀지를 않습니다. 현이.

그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호흡을 따라가면 돼요, 안 돼요?

어떤 사람은 호흡을 따라가가지고 횡격막이 부풀어오르고 배가 불러오고 이게 뭐 머릿속으로 이게 돌고,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그거 그렇게 하면 아예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자마자 바로 상기됩니다. 그래서 상기 안 되고 자연스러운 호흡, 일부러 길게 하고 의식적으로 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쉬는 호흡들을 가지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계속적으로, 마음이 지금 고요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거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아까 호주 얘기했죠? 호주 그분이 바로 그렇게 해가지고 삼매에 바로 들은 겁니다.

이 뒤에 부분을 다 설명 안 해도 가장 편안하게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그냥 명칭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그대로 그냥 그것만 따라가면은 삼매로 쭈우욱 들어가버립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죠! 여러분들이 하기에도 오히려 수월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참 좋겠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안돼요. 머리 복잡하거든. 그래서 그렇게 잘 안됩니다.

 

그래서 밑에 「집중력의 육성」이라고 하는 것들이 필요한 부분으로서 존재를 합니다.

만약에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렸으면 삼매로 착 들어가기 전에 뭐가 먼저 생겨날까?

되게 기쁩니다. 본인이! 디게 기뻐요! 아, 그냥 기뻐가지고 너무 좋아! 그래서 여기서 사람들이 잘못하는 부분이 딱 생겨납니다. 기쁘면 어떻게 돼요?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들떠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기쁘다’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대상을 그렇게 알아차리면 반드시 기쁘다는 것이 일어나야 됩니다. 마음이 기뻐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 일어나면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거라.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

처음부터 다시, 내가 몸이 긴장되어 있는게 없는지 한번 살펴보고, 마음도 좀 편안한지 살펴보고 나서 다시 호흡으로 들어가든,지 안 그러면 자애수행을 하고 호흡으로 들어가든지 이런 식으로 해야 돼. 다시 재조정을 해야 되는 것이지,

기쁘다는 것은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은 한 5분 정도 지나면 보통 나타나야 됩니다. 그 이상 가도 별 반응이 없다 그러면 딱 스톱! 다시 처음부터! 그렇게 돌아가야 됩니다.

 

여기서 인제 조심해야 될 부분이 그런 기쁨의 현상이 일어났을 때 접촉점을 어디에 둘 것이냐?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이냐? 기쁘다는 것에 절대 두면 안 됩니다.

아까 기쁨과 행복이 쌍을 이룬다고 했죠? 이게 일어났으면 그다음에 요게 탁 일어나져야 정상인데 기쁨에 마음을 두는 순간 요건 안 일어나집니다. 그리고 기쁨도 탁 사그라들어 버립니다. 지금 대상이고 대상을 끊임없이 따라가기는 했거든요. 그게 뭐라요?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 대상이 끊임없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따라가는 것이 '위딱까, 위짜라'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데 요때 조심해야 되는 것이 기쁨으로 따라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호흡으로 그대로 다시 돌아와야 되는 거라.

호흡으로 그대로 돌아오게 됐을 때 기쁨의 현상들이 ‘뭔가 조잡하다’는 마음이 들게 되면서 '즐거움'으로 탁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 기쁨이 좋은 상태가 될 것 같으면 계속 그냥 기쁨에 머물게 되든지 기쁨이 사라져버리는 거라.

 

선정을 개발하는데도 마찬가집니다. 1선정 아니면 2선정 그게 좋으면 어떻게 돼요? 거기에 계속 머뭅니다. ‘아, 이게 뭐가 문제가 많다’, ‘이거 아니다’ 하는 마음이 들어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는 거라.

'기쁨'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 딱 기쁨이 일어나자마자 ‘아, 내가 수행 잘하고 있네’ 하는 마음만 내고 기쁨을 놔줘버리고 그냥 호흡으로 다시 돌아와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뭔가 조금 조금씩 바뀝니다. 그 기쁨의 강도도 다르고, 기쁨의 형태들도 분명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냥 ‘그렇네’ 하고만 알고 놔줘버리고 다시 호흡으로 계속 돌아와야 됩니다.

여기서 참 조심을 해야 되는 게 이 강도가 세지면 세질수록 사람들이 거기에 그냥 사로잡히는 거라. 그러다가 나중에는 몸을 주체를 못합니다. 수행을 하면.

“스님, 수행하고 있는데 내 몸이 마음대로 안 되고 지맘대로 막 몸이 움직입니다.” 기쁨에 사로잡히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자꾸 변하는 것들이 보이고 할 거 같으면 그냥 놔줘버리고 호흡에 계속 돌아와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들이 별 거 아니네’ 그것들이 기쁨이 일어났는데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하지가 않는 거라. 그래서 ‘아, 이건 아니다’ 하는 마음이 들어야만이 그다음에는 '즐거움'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즐거움'도 마찬가집니다. 즐거운 것도 고요하고 평온하고 아주 좋은데, 그래서 밖에 대상들이든 안에 대상들이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크게 마음이 개의치 않고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됐는데, 요것도 각각의 형태로서 바뀌어져나가는 거라.

 

그래서 ‘이것도 아니다’ 싶을 때 그것조차도 버릴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하나의 대상에 그냥 계속 몰입하는 형태만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에깍가따'라고 그럽니다. 호흡이면 호흡에 마음을 계속적으로 몰입할려고 합니다. 몰입을 하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그냥 청정한 상태가 딱 되는 거라. 그것이 4선정까지 올라간 상태가 되는 거라.

쉽죠!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안 되니까 문제가 되는 거라.

 

사마타 수행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나타나는 것이 '니밋따(nimitta)'라고 하는 것입니다.

뭔가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데 그 현상들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든 처음에는 전부 놓아버려야 됩니다. 놓지를 못하면 거기서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빛이 보이든 부처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든 어떤 것이 나타나도 놔줘버리고, 빛이 나타나더라도 놔줘버리고, 뭔가 뭉게구름이 앞에서 보인다고 하더라도 놔줘버리고.

 

특히 많이 나타나는 것이, 호흡을 관찰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요 코앞에서 뭔가 뭉게구름이 자꾸 피어납니다. 그러면서 이게 자꾸 커지고 색깔도 자꾸 변하고 합니다. 그거 신기하니까 그거 따라가는 거라. 그러다 보면 하늘에서 뭉게구름이 막 있으니까 그게 또 보였다가, 지가 그 하늘에 뭉게구름을 타고 또 다닙니다. 별짓을 다합니다. 그래놔 놓고 “내가 어디 지옥에도 갔다왔다” “어디 갔다 왔다”

다 의미 없는 거라. 그리고 진짜배기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안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니밋따가 나타나면, 이러한 뭔가 수행이 잘 돼서 나타나는 것을 '니밋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니밋따가 나타났을 때는 무조건 놔버리고 호흡에만 돌아오도록 해야 됩니다.

 

호흡에만 계속적으로 하다가 보면, 그다음에는 이 대상이 아주 투명하게 탁 보입니다. 아까 코끝에서 색깔이 있던 것이 색깔이 하나도 없이 그냥 투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면서 이게 점점 더 확장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될까?

호흡보다는 변하지 않고 투명한 상태에서 그대로 있을 거 같으면 요게 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것도 그냥 놓아버리고 호흡을 하면 됩니다.

 

조금 전에 투명한 니밋따가 대상이 된다 그랬죠. 니밋따가 탁 대상이 되면 인제 호흡은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죠. 그럼 이게 대상이 됩니다.

그럼 이게 대상이 될 거 같으면 뭐가 있을까?

다섯 가지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는 다 존재를 하는데 이것들의 힘이 점점 강해집니다.

사실은 사마디가 인제부터 시작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이게 점점 강해지는 게 보입니다.

 

점점 강해지면서 이 대상은 그대로 있는데 이 다섯 가지를 내가 구별할 수 있는 거라.

조금 전에 명상할 때 종 “똥” 쳤죠? 종 “똥” 쳤을 때 “땅” 치는 것이 위딱까에 해당이 됩니다.

종치고 나면 어떻게 돼요? “우우우웅” 울리죠. 그게 위짜라에 해당이 됩니다.

구분이 되어진다는 거라.

만약에 지금 목이 많이 마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물 먹어야 되겠죠. 탁 물을 보면 기쁘죠!

그런데 먹기 전에는 내가 물을 먹은 것은 아니죠? 그래서 물을 탁 들어가지고 먹었어요. 그러니까 시원하고 편안해지고, 이게 수카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삐띠하고 수카는 차이가 납니다. 근본적으로.

 

그런데 물을 먹고 나도 어떻게 돼요? 좀 시간이 지나면 또 목이 마릅니다. 종소리가 울렸지만, 종소리가 울림이 있었지만, 그거는 시간이 지나면 딱 사라져버립니다.

이건 다 불완전한 것들이라는 거라. 수행하다 보면 위딱까, 위짜라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삐띠, 수카가 불완전하다는 걸 압니다.

그것을 어느 시점에서 버리느냐에 따라서 선정의 단계들은 구분이 되어진다는 거라.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오늘 어쨌든 집에 가거든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먼저 자애수행을 하든지, 그런데 대부분 자애수행을 하는 것이 편합니다.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보통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부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십대명호에 대해서 공부를 실제적으로는 안 했을 겁니다. 그러면은 그것들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은 사실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건 되도록 배우기 전에는 안 하는 것이 좋고, 그냥 자애수행을 먼저 한 5분이라도 하고 나서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지면 호흡에다가 계속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르긴 해도 삼매 근처까지는 그래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 편안하고 고요하다’ 할 것 같으면, 그런 체험이라도 했을 거 같으면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할려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대략적으로 사마타 수행에서 하는 방법들을 얘기들을 했습니다.

 

자! 뒤에 부분은 다 여기에서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읽어보십시요. 쉽게 써놓았으니까 그렇게 어려운 부분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단지 그렇게 했을 때 오선지가 구별이 되고 이렇게 하는데, 다섯 가지가 자재하는 부분까지 갔을 때는 여기서는 주의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47페이지 한번 보십시오.

 

「선의 다섯 자재」 돼있습니다.

첫 번째가 인전자재.

인전자재라는 건 아마 여러분들이 뭔지를 잘 모를 건데, 쉽게 말하면 사띠를 자유롭게 전환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호흡에서 니밋따로, 니밋따에서 뭐로, 이렇게 자유롭게 자재하는 상태가 되는 것들, 이게 가능해야 됩니다. 이게 가능하지 않으면 나중에 삼매에 들었을 때 대상을 놓쳐버립니다.

하나 얘기할 게 사마타 수행에서 삼매에 들었는데 대상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꾸 사마타 수행에서 삼매에 들면 아무런 것도 없이 그냥 공만 있고 아주 평화롭게 있는 것으로 압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상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죠? 다섯 가지도 있었습니다.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도 있었고, 그것말고도 우뻭카도 있고 참 많이 있습니다. 그걸 자유롭게 전환할 수 있지 못하면 삼매 아무리 처음에 초선에 든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 발전을 못하는 거라.

그래서 사띠를 전환하는 것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꾸 위빳사나 수행을 병행을 하라 하는 이유는 뭐냐면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게 해요? 사띠가 대상이 자꾸 전환이 되고 바뀌죠. 이게 큰 게 생겨나면 여기에다가 사띠를 두고, 요게 생겨나면 요기에다가 사띠를 둡니다. 거기서 훈련이 돼야만이 사마타 수행을 해서 사마디에 들더라도 사띠를 전환시킬 수가 있는 거라.

 

그다음에 성찰자재라고 하는 것.

이거는 다시 조사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아, 내가 무엇이 생겼나? 삐띠가 생겼나? 수카가 생겼나? 아니면 삐띠 중에서 어떤 것들이 사라졌나? 하는 걸 다시 재조사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야만이 재조사가 가능해야만이 요걸 버릴 수가 있는 거라. ‘아, 이게 불완전하네’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재조사 할 수 있는 것들이 돼야만이 요게 불완전하다고 해서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입정자재.

이거는 성취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밑에 주정자재 하고 차이가 뭐냐면, 주정자재는 결정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삼매에 한시간 동안 들겠다 할 것 같으면 딱 한시간 지나면 딱 깨어납니다. 그게 결정심입니다. 그래서 바라밀을 많이 닦아라 하는 것이 결정심이 여기에서 좌우를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입정자재, 성취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 내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삼매에서 1선정인지 2선정인지 3선정인지, 내가 뭔가를 성취했는데 성취한 것이 뭔지를 모르면 그게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라.

 

주정자재. 결정하는 것들입니다. 결정심

 

그다음에 출정자재.

이거는 삼매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것도 공부를 해야 됩니다. 언제 벗어날지, 내가 ‘스승이 나를 부르면 깨어나겠다’ 다른 소리는 안 들리는데 스승소리만 들립니다.

 

이걸 다섯 가지 자재라고 합니다.

삼매에서 이 다섯 가지가 자재가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초선정에서 바로 이선정으로 넘어간다? 꿈입니다. 꿈!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다섯 가지 자재가 가능해야만이 그다음 선정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걸 완전하게 습득해가지고 이게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내가 마음대로 선정에 들었다 나왔다 하고, 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면, 그리고 내가 지금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른지를 모를 것 같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삼매가 어느 정도 되면 본인 스스로 확인을 해봐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 자재가 있는지 없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거는 삼매가 아니라!

쉽게 말하면 그냥 지 혼자서 만든 세계에서 게으름 부리다가, 그냥 고요한 상태에 있다가 그냥 나오는 그걸 어떤 면에서는 "무기에 빠졌다"고 그럽니다.

사마디는 어떤 경우든지 대상이 또렷해야 됩니다.

사마디 일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으로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대상은 더욱더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뭔가 대상 없이 시간을 보냈다? 최대한 빨리 깨어나서 다시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정도 하고,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에서의 사마디(samādhi) 개발 부분 보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근행정 하고 안지정」이라고 있습니다.

사마디 수행을 하면 마음이 사마디에 완전하게 닮은 상태에 도달하는 것하고, 그다음에 사마디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하고.

닮은 것하고 그 상태에 도달한 것하고의 차이가 뭘까?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거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선정을 하면 개발되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그랬죠! 위딱까 위짜라부터 해가지고 다섯 가지, 그게 얼마나 세느냐, 안 세느냐를 가지고 판별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사마디 가까이 와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삼매에 들었는지는 이 강도가 굉장히 강해야만이 사마디에 든 상태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약하면 약할수록 아직은 삼매에 들기 직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뭐가 대상이죠? 지금 나타나는 것이 대상입니다.

호흡이면 호흡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쉰다, 실재하는 게 뭡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아니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입니다. 들이쉴 때 시원한 느낌, 내쉴 때 텁텁한 느낌.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이게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시원한 게 똑같지는 않죠? 똑같지 않으면 똑같지 않은 대로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리고 시원한 게 들이쉴 때 한꺼번에 슈욱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고 뭔가 끊어지는 것같이 보일 것 같으면 그거 끊어지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저기 멀리 개미들이 기어가는 모습들이 있다고 칩시다.

멀리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보이겠어요? 아예 안 보였다가, 조금 더 가까이 가면 그게 뭔 줄 같이 보일 겁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가까이 가면 그게 뭔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다음에 더 가까이 가면 개미가 각각 떨어져가지고 줄을 지어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보입니다.

더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개미가 움직이는 모습까지도 보입니다. 더 가까이 가면 개미가 움직이는 모습뿐 아니라 왼발 디디는지 오른발 디디는지까지도 알게 됩니다. 더 가까이 가면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뿐 아니라 디딜 때 소리까지도 들립니다. 실제 그렇게 됩니다.

 

대상이 다 다르죠? 다르면 다른대로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다섯 가지 요소가 여기서도 힘에 따라서 내가 보는 것이 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약하면 약한 대로 보고, 강하면 강한 대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결코 사마디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상이 그대로 그냥 이어집니다.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걸 뭐라고 그래요?

그걸 마하시 스님은 찰나삼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찰나 찰나간에 사마디가 형성되는 것이 그대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상태!

이거는 어떤 상태가 될까? 초선정입니다.

초선정이 바로 대상이 있고,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대상에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는 상태에서 마음이 기뻐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게 되고, 그다음에 하나의 대상에 몰입을 하게 되고.

 

그런데 2선정에서는 어떻게 돼요? 위딱까 위짜라는 없어져버리죠! 마음의 영역만 남아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뭐가 대상이라고 그랬어요?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이지 마음만 가지고 수행하는 법은 없습니다.

착각을 하면 심념처 수행하는 사람들은 마음만 가지고 수행을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마음은 지 혼자서 생깁니까? 몸으로 인해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만 관찰한다?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어느 사념처를 하더라도 그속에는 신수심법이 다 존재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 마음청정은 초선정 1선정에서 종을 땡 칩니다.

그러고 나서는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해나가는데 다섯 가지 요소들은 점점 개발이 되어집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까 개미를 바라보는 것처럼 점점 더 강도가 세집니다. 다섯 가지 요소들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삼매를 개발하는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삼매수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또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냥 순수하게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수다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그것들은 다섯 가지 자재는 있는데, 다섯 가지 요소들은 있는데 그것들이 아직 완전하게 개발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점점 더 그것들이 개발되어지면 아주 강해지고 뚜렷해집니다.

 

그것에 따라서 다섯 가지 요소는 있는데도 수다원에 이르기도 하고, 그래서 거기서 떨어지는 것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뭔가 탁 끊어지는 것들이 생깁니다.

사마타 수행에서 사마디에 들었을 때는 끊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겠어요? 번뇌들은 잠재해있게 됩니다. 떨어지는 게 없는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뭔가 탁 끊어지는 게 보입니다. 어떤 것이 보이느냐에 따라서 수다원부터 해가지고 불환과, 아라한까지 쭉 구분이 되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야, 이 법이 진짜 맞다’ ‘나는 이거 계속 하면은 아라한이 되겠다’ ‘해탈에 이르르겠다’ 하는 분명한 확신이 딱 들 때 '예비수다원'에 딱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확신이 딱 들어서 수행을 더 열심히 해나가면 뭔가 뚝 떨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게 의심 먼저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다시는 이것들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 거라.

여러분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부처님 배반 안 할 자신 있어요? 없죠! 수다원에 이른 사람들은 배반 안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가르치길 거짓말하지 마라, 담마에 대해서 확신이 들고나면 수다원에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거짓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이루었던 성자들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듭니다.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것, 그리고 내가 지은 행위에 따라서 내가 결과를 받는다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딱 대못을 박듯이 딱 박혀버립니다. 그게 의심이 탁 떨어졌을 때 생겨나게 됩니다.

 

의심이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뭐가 떨어질까? ‘다른 거 인제 필요 없어. 삼귀의 오계 하는 거, 상강 사라낭 갓차미를 상가에 귀의합니다를 하든 스님들한테 귀의합니다 하든 그게 뭔 의미가 있어’ 그게 계금취입니다.

계금취라고 하는 것은 꼭 불교 외에 다른 것들을 갖다가 멀리 한다는 것이 아니고, 개념적인 것 아무 수행하고 내가 살아가는데 의미가 없는 것들을 더 이상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누가 스님이라고 해도 ‘그래 니맘대로 해’ 상가라고 해도 ‘응 니맘대로 해’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리고 분명하게 변하는 것들을 봐왔거든. 개미가 기어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고, 그 발소리도 들었고, 그러면은 ‘아, 이거는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따라 일어났다가 조건따라 사라지는 것뿐이구나.’ 왜? 그다음 것들을 봤으면 앞에 것들은 분명히 사라져버린 상태거든.

그래서 라고 하는 견해를 가지는 것들에 대해서 탁 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자기주장 하고 하는 것들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 그거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수용하고 포용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게 인제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쉽게 말하면 사마타 수행에서 사마디를 개발했을 때와 위빳사나 수행에서 사마디를 개발했을 때는 차이가 납니다.

뭔가 분명히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떨어져나가는 것이 생겨납니다.

 

번뇌를 잠재워가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끔 만드는 데도 참 좋은 효과들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거라. 많은 도움을 주고 그걸 활용을 할 수는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나중에 의식이 깨어나서 위빳사나로 전환을 해야 된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선정 좋아하지 말아라는 거라. 초선정만 해도 돼. 2선정 3선정 4선정? 사선정 넘어서 사무색계? 사무색계는 실제로는 4선에 다 해당이 됩니다. 4선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그거 좋아할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뭔가를 떨쳐내버리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필요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집에 있는 것도 자꾸 좀 비우고, 버려야 될 것은 좀 버리고, 자꾸 버리는 연습들도 좀 하고, 신랑을 버리면 안 됩니다 이.

어쨌든 끊어내야 될 것들은 반드시 이생에서 끊어낸다 생각을 하고 수행을 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여기서 끝낼게요. 이게 쉽게 말하면 사마디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하는 것들하고 위빳사나 수행으로 하는 것들입니다.

이게 선정이 자유롭게 돼야만이 아까 뭐가 자유롭게 된다고?

네 가지 여의족 성취하는 것. 남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들, 소리 들을 수 있는 능력들, 이런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삼매를 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여의족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진도를 오력 다음에 이 사마디 부분으로 해놓았던 것이 부처님이 설한 경전의 37조도품 목록에 따라서 이렇게 하는 것들입니다.

 

사여의족이 되고 나면 그다음엔 어떻게 된다고?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수다원부터 해가지고 쭉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르게 되고, 사마타 수행에서는 1선정부터 4선정까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사실은 「깨달음」의 부분은 복사를 해왔는데 그냥 여러분들한테 나눠줄게요. 이게 이 부분인데 필요한 부분들은 이걸 복사해가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네가지 수행대상 사념처부터 해가지고 지금까지가 수행적인 대략적인 개관입니다.

그렇게만 따라오면 적어도 수다원에 이르고 아라한에 이르고, 선정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번으로 종 땡 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 되죠? 반복해야 되죠!

그래서 37조도품 이거 다음에는 칠각지가 나옵니다.

칠각지는 뭐다? 이것들이 반복되기는 하는데, 계속적으로 반복할 수 있는 법을 설명을 해놓은 겁니다.

 

칠각지 부분은 일곱 개이기 때문에 프린트물 양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8월달에 쉰다고 해가지고 쉬고, 그러면 9월 10월 11월 스님이 할 수 있는 건 딱 세 번 남았습니다. (수행자 질문 : 12월에는...) 예. 태국에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세 번 남았기 때문에 칠각지 부분을 두 번 나눠서 하고, 팔정도 부분을 한번 하고 그렇게 해서 개관적으로라도 37조도품에 대해서 수행 부분에 대한 것들은 마치도록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자! 고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