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6편- 칠각지_희각지·경안각지·정각지·평정각지 (2022년 10월 22일)

담마마-마까 2023. 4. 26. 09:45

https://youtu.be/R87KVqYw5ck

–6편- 칠각지_희각지·경안각지·정각지·평정각지 (2022년 10월 22일)

 

【희각지】

어떨 때 여러분들은 기쁩니까? 언제 가장 기뻐요?

보통 일상적으로 예를 들면, 누가 나에게 집을 한 채 사줬다, 그러면 많이 기쁘겠죠.

그런데 집을 사주면 기쁘기는 한데 또 그 안에 채워넣어야 될 거를 걱정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만약에 그 집이 있으면 나중에 자식들한테 재산상속 할 때 다툼이 있지 않을지, 그렇다고 집을 쪼가리를 낼 수도 없고 그런 것도 생길 수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재물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생기면 참 좋아는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어떨 때 기쁠까? 도의 경지에 올라버리면 기쁨이 없습니다.

그전에 기쁨이 있기는 합니다. 수행이 잘 될 때 열심히 사띠가 잘 되고 할 때 되게 기분이 좋습니다. 한시간을 앉아있었는데 언제 한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훌쩍 지나버렸는데 그렇다고 내가 사띠를 놓친 것도 아니거든. 대상을 놓치지 않았으니까.

대상을 안 놓쳤다는 것은 뭐로 가지고 알아요? 그렇죠. 호흡이면 호흡, 아니면 다른 대상이면 대상, 왔다갔다 하더라도 그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거든. 그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렸는데 그러는 사이에 잡생각이라든지 그러니까 망상 이런 것들이 없이 깨끗하게 그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경우. 그럴 때는 되게 기쁩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러도 내가 모를 정도가 됐다, 그러면 더없이 기쁘겠죠. 밖에 자극이나 이런 데 전혀 신경이 안 가고 대상에 몰입해가지고 있고 그것만 알아차렸으니까.

부처님 같이 폭우가 쏟아져도 모를 정도가 되면 더더욱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대상을 잘 알아차리는 것이 연속해서 계속 이어지면 기쁨은 어느 정도 일어나집니다. 그렇죠!

 

왜 그렇게 연속해서 한시간이나 한시간반 동안 계속 할 수 있을까?

한시간 동안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한시간 동안 하고 있는데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게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 대상이 오롯하게 한 대상이든 아니면 변하는 대상이든 그걸 놓치지 않고 있는 상태가 됐을 때, 그럴 때 보통 세속적으로 얘기하는 그런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쉽게 얘기를 하면 기쁨이 일어나는 각지가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앞에서 얘기했던 세 가지 사띠, 담마위짜야, 위리야 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다 일어나지 않으면 기쁨은 안 일어난다는 얘깁니다.

 

맨 처음 칠각지 할 때 그런 얘기를 했죠?

칠각지는 그 순서를 빼버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칠각지 자체가 깨달음은 아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징검다리와 같은 거죠.

 

그런데 이렇게 기쁨의 상태가 되고 나면 그 기쁨으로 인해서 더욱 더 수행할려고 합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다 보니까 분명하게 이게 몸의 현상이고 이게 마음의 현상이고 하는 것들을 구분을 하게끔 되는 거고. 그러니까 더욱 더 힘이 나서 다시 사띠하는 것들이 끊어짐이 없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각지가 1번부터 3번까지 연속해가지고 일어나가지고 네 번째까지 왔다가도 또다시 3번 2번 1번으로 순차적으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계속 이 기쁨이 일어나는 것들을 경험을 하게끔 해줍니다.

 

그런데 아까 집 한 채 얘기했죠. 그런데 누군가가 집 한채가 아니라 건물을 통째로 줬다, 그럼 기쁨이 두배가 되겠죠.

기쁨도 과연 그럴까? 이 기쁨각지가? 아니에요? 똑같애요? 다르겠죠!

기쁨각지도 그래서 종류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보통 경전에는 세분류로 나누기도 하고, 어떤 데는 네 분류로 나누기도 하고, 아니면 각각의 분류 중에서도 또 따로 나누기도 합니다.

 

수행을 했다고 치고, 처음에는 수행하다 보면 어떤 기쁨들이 있을까?

대상을 정확하게 잘 알아차리고 있으면 몸이 약간 떨립니다. 대부분이 보면. 뭐랄까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몸이 약간 이렇게(상체가 흔들거리면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몸이 그렇게 움직이는지를 잘 몰라요. 대상을 놓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잘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몸이 약간 움직이는 거라. 그런데 몸이 움직이다가도 그게 강도가 세지면 어떻게 돼요? 혹시 수행할 때 그런 사람 봤어요? 주체를 못할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그게 툭 끊어져버립니다.

경안으로 넘어가져 버렸으면 참 좋은데, 대부분이 기쁨각지에서 기쁨의 강도만 조금 세지다가 탁 끝나버리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스님이 옛날에 수행할 때 경험을 해보면 기쁨의 각지가 일어나면 그게 멈추지를 잘 않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그만두고 싶은데 이게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면 좋겠는데, 알아차리고 있는데도 기쁨이 멈추지를 않아. 그래서 이게 경안으로 보통 못 넘어가고 끝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 기쁨의 각지가 일어날 정도가 되면 스승도 터치를 안 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오만 잔소리를 다 듣고 하는데 기쁨의 각지부터는 자기가 스스로 해나가야 돼. 사실은. 단지 스승한테 체크를 받으면서 어느정도 상태인가만 자기가 스스로 확인을 하는 작업은 해야 되겠지만, 스승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제는 안 합니다. 그냥 “잘하고 있으니까 잘 넘겨” 하는 얘기만 듣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각지 부분이 앞에 각지하고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대부분 칠각지를 나눌 때 기쁨각지를 주변으로 해가지고 앞에 세 개, 뒤에 세 개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기쁨각지를 앞에 세 개 억지로 대상을 붙들고 달려들 듯이 하는 그 영역에 속하기도 하고, 또 그 뒤에 자동적으로 사띠가 되면서 편안하게 넘어가지는 그 후반부에 속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이 부분을 참 잘 넘기면 수행에서는 금방 진도가 팍 올라가는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언제 가능할까? 그게. 이걸 뛰어넘을 때는 언제 가능할까? 언제일 거 같애요?

생멸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생멸이 없는 게 있습니까? 무조건 태어났으면 죽어야 되는 거고, 일어났으면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거 거부할려고 그러죠. 안 죽을려고 그러고 안 뺏길려고 그러고 그게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생멸지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생멸지에 이르렀다, 생멸지가 어느 정도 능숙해졌다 할 것 같으면, 인제는 그 뒤부터는 사띠도 거의 대부분이 보면 자동으로 되어집니다. 안 하고 싶어도 사띠가 되어집니다.

 

그러면 다른 말로 돌릴 것 같으면 기쁨이라고 하는 각지는, 일반적으로 앞에 조그맣게 일어나는 기쁨들은 그건 기쁨의 영역에 속하지 않게끔 됩니다.

쉽게 말하면 아까 얘기했듯이 집 한채 주면 막 좋아하고 그러다가 건물 한 채 주고 하면 더 좋아하고 하는 그거와 마찬가지로, 그걸 보통 빠못자(pāmojj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삐띠(pīti)라고 안 하고 빠못자(pāmojja)라고 명칭을 따로 붙여놓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희열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든 생멸을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겼다가도 사라지게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건물을 주든 집을 주든 나는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건물을 줬으면 그거에 맞게끔 더 유용하게 쓰면 되는 거고, 집이면 집에 맞게끔 그것을 내가 유용하게 잘 사용을 하면 되는 거거든. 그래서 어떤 것을 주더라도 관계없이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항상 만족감을 느끼고 항상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을 잔잔하게 가지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는 그것은 앞에 얘기하는 '희열' 부분이 아니라, 인제는 만족함으로 해서 오는 '기쁨'의 종류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이 뒤에 부분이 사실은 더 큽니다. 그리고 더 넓습니다.

 

그걸 어떻게 비교가 되느냐면

앞의 두 가지 부분에서 기쁨이 왔을 때는 몸이 떨리기는 하는데 몸이 잔잔한 데서 오는 기쁨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걸 주체를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되는데, 그래서 기쁘기는 기쁜데 뭔가 뭐랄까 좀 껄끄럽고 속된 말로 세속적인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기쁨입니다. 수행에서.

 

그런데 뒤의 부분에서는 어떤 것이든 생멸의 현상들을 보기 때문에 동일하게 봅니다.

만약에 집을 예로 들것 같으면 집에서 오늘 일이든 내일 일이든 그속에서 내내 그런 기쁨들이 항상 존재를 하게 됩니다. 어떤 조건이든지 간에.

반을 떼가지고 누군가가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불편하고 하는 것들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반을 남한테 준 것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게 되지 준 것에 대해서 아쉬워한다든지 하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조건이 바뀌더라도 기쁨은 항상 마음속에서 계속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게 점점 더 깊어가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게 한마디로 얘기하면 대상에 대해서 붙잡고 있느냐, 붙잡지 않고 그냥 놔버린 상태에서 대상을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가지고 탁 끝나버릴 경우에는 아직도 그 기쁘다는 현상에 붙잡혀있는 상태라.

그걸 탁 놔버리고 나면 몸이 조용하게 탁 가라앉아버릴 건데, 그걸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걸 못하기 때문에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수행할 때 대상이 일어나면 물론 그 대상을 분명하게 사띠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끔씩은 대상을 사띠하고 나서 가슴에서 느껴지는 것도 자꾸 관찰하라"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이게 칠각지를 하다가 보면 기쁨의 각지 부분에서는 굉장히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볍고 하지 않으면 뭔가 그 기쁨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내가 뭔가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아주 솜털같이 가볍고 부드러운 상태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기쁨이 일어나더라도 그 기쁨을 내가 집착함이 없이 하고 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가슴을 관찰하는 것이 수행에서는 참 많이 도움을 받습니다.

만약에 가슴을 관찰하는 것들이 익숙해져왔으면 기쁨이 한참 일어나가지고 주체를 못할 때 그때 가슴을 관찰했으면 아마 집착하는 부분을 탁 떨어뜨리고 몸과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형태가 되는 거라.

 

쉽게 예를 들면 기쁨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 부분에 있습니다.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몸의 기쁨과 마음의 기쁨.

몸이 기쁜 것은 뭡니까?

대상을 잘 관찰함으로 인해서 막 기뻐갖고 몸이 막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몸이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죠? 마음이 관여가 돼야 됩니다.

어떤 마음들이 관여가 될까, 거기에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야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대상의 움직임이든지, 대상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든지, 이런 것들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이 일어났으면 그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따라다니는 것도 틀림없이 있어야 될 겁니다.

그래서 몸이 기쁨의 현상을 맞이하는 데는 하나만 존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라고 하는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해야만이 몸이 기쁨의 현상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심장은 어떨까? 심장, 이 가슴도 마찬가지로 몸의 종류에는 해당은 됩니다. 그런데 의식을 여기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탁 관찰하면 금방 이게 날뛰다가도 탁 가라앉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금방 탁 가라앉습니다.

쉽게 말하면 느낌도 필요 없고, 그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의도도 필요 없고, 그리고 여기서 어떤 작용들이 일어나는지 그것도 필요 없는 상태라. 그냥 인식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쁨은 인식을 분명하게 하는 것들만 연속해주면 마음의 기쁨들은 이 몸의 기쁨들을 통제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몸의 기쁨이 있고 마음의 기쁨이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기쁨이 일어날 때는 어떤 게 먼저 일어나질까? 마음입니다.

마음의 기쁨이 일어나지 않으면 몸의 기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걸 사람들이 자꾸 착각을 하기 때문에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몸은 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인식하는 것들이 있지 않으면 몸은 어떠한 경우든지 지 마음대로 못 움직입니다.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아! 이게 마음의 기쁨이구나! 이게 몸의 기쁨이구나!’ 하는 걸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게 구분이 가능해지면 ‘몸의 기쁨이 일어나지고 나서 마음의 기쁨도 일어나는구나’ 하는 걸 아는데, 그걸 예리하게 보지를 못하니까 “내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콘트롤이 안 됩니다.” 콘트롤이 안 되는 건 지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자꾸 착각을 하느냐는 거라.

 

기쁨이 깨달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런데 칠각지 자체는 깨달음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게 나중에 다 조화롭게 일어나지고 능숙해지고 나서 그다음에 깨달음의 단계로 넘어가지는 거지, 그래서 아까 뭐라 그랬어요?

기쁨의 각지는 어떤 지혜에서 가능하다고 그랬어요? 얘기했는데 까먹어버렸나? 생멸지입니다. 생멸지만 되도 기쁨의 각지는 이미 개발된 상태가 된다고.

그런데 생멸지가 깨달음입니까? 아직 깨달음으로 갈 때는 한참 멀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좋아가지고 그냥 거기에서 머문다? 그것같이 어리석은 게 없는 거라.

 

수행을 하다가 수행이 잘 될 때는 그래서 또 조심해야 될 것이 이렇게 생기는 겁니다.

지금 여기 기쁨부터 해가지고 경안 다 마찬가집니다. 이것도 수행에서는 장애요소로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이 일어날 때 마음이 먼저인지 몸이 먼저인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 기쁨의 각지 다음으로 그것보다도 더 평안하고 고요한 경안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말은 참 쉬운데 잘 안 되겠죠? 그런데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의 각지는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이 그냥 오롯하게 그 대상을 편안하게 그냥 사띠를 하면 금방 택법부터 해가지고 기쁨까지는 넘어가집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끔 할 수가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들이 문제가 뭐냐면, 먼저 대상에 마음을 다가갈려고 그럽니다.

수행을 그렇게 하면 오래 못할 뿐 아니라 금방 지쳐버리고 수행하기가 싫어져버립니다.

대상이 나한테 다가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여러분들 연애해가지고 결혼했죠? 연애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그 사람한테 다가가면 그 사람은 도망가버립니다. (수행자 질문) 나는 안 해봤죠.

누가 나를 좋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싫어하지만 않을 거 같으면 그냥 오래 가집니다.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마음은 수행에서는 안 일어나지는 거라.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동안에는.

그래서 대상이 편안하게 다가와질 때는 ‘음, 뭐지?’ 하고 그냥 알아차리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그렇게 다가와지는 것들은 새롭게 보여지고 또 색다른 경험들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금방 그것들을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따라가게끔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먼저 대상에 다가갈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무슨 수행 할 거냐? 심념처 할거냐? 신념처 할거냐? 수념처 할거냐? 그거 자꾸 따질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무슨 방법을 배웠든 그 방법은 그건 테크닉이기 때문에 그냥 그거는 그대로 놔주고,

먼저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자꾸 되도록, 만약에 내가 호흡을 대상으로 할려고 할 것 같으면 호흡이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으로 호흡으로 탁 갈 거 같으면 호흡을 자연스럽게 내가 탁 알아차려지고 그대로 따라갈 수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무시해버리고 호흡으로 바로 들어가버리면 호흡을 내가 인위적으로 조작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거는 아주 나쁜 방법이고 오래 못합니다.

 

깨달음에 이른 부처님이나 아라한들도 죽음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사띠를 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갈려고 하는 불제자들도 당연히 사띠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힘들지 않게끔 사띠하는 방법들을 터득해야만이 오래도록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처음에 수행을 하면 되게 힘듭니다. 되게 힘듭니다.

조금 전에 기쁨 각지, 1번 2번까지 일어날 때까지는 되게 힘듭니다. 기쁨이 1번 2번도 힘듭니다. 막 고통스럽고 억지로 따라가야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걸 딱 넘어서서 기쁨이 쫘악 온몸에 퍼지듯이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로서 쫘악 기쁨이 일어나지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사띠는 그리 힘들지 않고, 그냥 사는 거니까 살아있는 동안에는 무조건 해야 되는 것으로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의식이 바뀌어버립니다.

 

그게 기쁨각지인데, 개발하는 방법에 대한 거 쭈욱 적어놨습니다. 한번씩 읽어보시면 됩니다.

부처님 공덕을 거듭해서 사띠하는 것, 그다음에 가르침을 아눗사띠 하는 것, 상가에 대한 아눗사띠 이렇게 쭈욱 적어놓았습니다. 그것들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만약에 사띠를 못하고 잘 안된다, 그러면 수보리 존자가 금방 깨달음에 이르렀던 게 어떤 방법인지 아세요?

뭐로 가지고 막 기쁨을 일으켰을까? 여러분들 「금강경」에 '수보리야 어쩌고 저쩌고' 하잖아요. 그 수보리 존자가 금방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도 이 부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 끊임없이 사띠하는 것.

부처님 십대명호 있죠.

아라항 했다, 아라항이 무슨 뜻이지? 한번 생각해봤어요? 뭐에요? (수행자 대답)

그거는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고. 아라한이 있고, 부처님의 십대명호가 각각 다르지 않습니까?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뿌리사 담마사라티, 삿타데와마눗사낭, (붓도, 바가와) 그런 식으로 부처님 십대명호가 다 따로 있습니다.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 하는 것처럼 그 나름대로의 명호들의 이름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그건 부처님을 일컫는 별칭이긴 하지만, (수행자 질문)

그럼요. 그 열가지를 붙일 때는 따로 그것에 맞는 사유를 해야 됩니다.

 

'아라항' 할 것 같으면 – ‘아, 번뇌가 사라지신 분, 번뇌가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번 생각을 해보는 거라.

그래서 번뇌가 사라진 상태에서 예를 들면 ‘내가 화를 안 내고 우리 자식놈과 얘기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내가 마음이 편할까? 자식이 뭘 하든 그냥 가르칠려고 하지 않고 편안하게 진짜 자애로운 마음으로 말을 할 수 있고 선한 마음을 끊임없이 내면서 대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도 하나의 번뇌 중에 하나입니다. 화를 낸다는 것도.

그럼 그게 탁 사라지니까 너무 좋거든.

그러면 그런 번뇌들이 전부 다 사라져버렸다, 「나」라고 하는 걸 내세우지도 않고 그냥 사라진 상태, 번뇌가 클리어 되는 상태, ‘이야!’ 부처님을 생각해도 그것만 해도 ‘이야, 진짜 위대한 분이다’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나게 되는 거라.

 

인터넷 뒤져보면 스님이 자료를 만들어놔가지고 공개해놓은 게 있었습니다.

「여래 십호」 해가지고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거 한번 쫘악 읽어보면 여래뿐 아니라 붓다눗사띠, 담마눗사띠, 상가눗사띠 전부다 공개돼있을 겁니다.

보면 어떤 식으로 아눗사띠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면 마음에 기쁨이 확 일어나집니다.

(수행자 질문)

나는 그거는 잘 모릅니다. 그게 자료로서 나간 것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법문 해가지고 동영상으로 나간 것이 있고 그럴 겁니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공개됐는지 나는 전혀 몰라요. 나는 어쨌든 하고 나서 줘버리고 나면 나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데, 사람들은 그것들이 있으니까 그것 가지고 책을 만들어가지고 “스님 이거 만들었습니다” 하고 갖다주기도 하고 하겠죠. 내가 그 사람들한테 그 자료를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있으니까 그렇게 한번 해보시면,

 

기쁨각지를 일으키기 가장 좋은 게 붓다눗사띠 부분입니다.

붓다눗사띠 부분을 자주자주 해주시면 사띠부터 해가지고 택법각지 정진각지까지 힘들게 하지 않아도 기쁨각지는 어느 정도는 끌어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대신에 그게 어디까지 갈까? 아눗사띠는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선정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거는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수관(修觀)이 아니고 수념(隨念)입니다.

그거는 1선정까지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행정이라고 해서 선정에 들어가기 직전 단계, 그걸 마하시 스님 같은 경우에는 찰나삼매 찰나정이라고 그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리했든 저리했든 어쨌든 간에 선정과 다름없는 상태에 도달을 하게 됩니다.

선정 한번 개발해봐야 안 됩니까? 그런데 그거 좋아하면 안 됩니다.

실제로는 수행을 해보면 선정의 초입단계까지만 하더라도 충분한, 필요충분한 조건이 되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예. 1선정까지.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은 1선정이 끝입니다. 1선정 직전까지만 해도 끝입니다. 실제로는.

그래서 선정을 개발해서 4선정까지 다 개발하고 팔선정 하고 그다음에 구선정까지 해도 좋겠지만, 나는 하나도 경험 안 했는데 내가 수다원이 됐다, 아니면 아라한이 됐다, 그게 더 중요하다는 거라.

선정에 들어도 어차피 수다원부터 들어가려고 될 것 같으면 선정에서 나와야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너무 선정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말고, 그렇다고 해서 그걸 터부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그 힘이 있어야만이 사띠 힘들이 병행되게끔 됩니다.

그래서 아눗사띠들을 자꾸 할 수 있는 방편들을 자꾸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 부분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어가지고 이건 여러분들한테 좀 잘 설명을 해야 될 부분입니다.

 

깔라마경 아시죠?

깔라마경 보면 '소문에 좌우되지 말고, 전승된 것이라고 해서 좌우되지 말고' 하는 것들을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성전에 쓰여져있다 해가지고 그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하는 부분 하나하고,

존경하는 사문이라고 했는데, 사마나, 스님의 말이라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부분은 여러분들이 잘못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깔라마경을 설할 때는 그 지역이 께사붓다라고 하는 지역인데,

그때는 그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단지 불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떤 것이 옳은 길이고 어떤 것이 옳지 않은 길인지 하는 것을 부처님한테 여쭤보는 것일 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교단이 성립도 안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거기에 직접 들어가서 토착화돼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어렴풋하게 부처님이 있다는 것만 아는 상태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성전, 성전의 권위 부분은 달리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는 어떤 경우든지 존재를 합니다.

예를 들면 뒤에 후대에서도 만약에 삼장 전체를 우리는 결집해서 이것을 인정한다 하고 탁 정해지고 나면 누구도 그것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테라와다라면.

나는 이거는 아비담마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니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하고 탁 배척한다, 그러면 테라와다에서는 너는 그럼 테라와다 아니야! 하고 선언을 해버리게 됩니다.

특히 출가한 스님일 거 같으면 상가에서 배척당해버리게 됩니다.

부파가 자꾸 나눠진 게 그런 이유들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깔라마경 여기에서 말하는 성전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의 성전을 얘기하는 것이지, 불교의 삼장의 권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걸 오해해버리면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 속에 있는 것은 진리이고, 그것들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여러분들은 확고하게 믿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내가 존경하는 사마나라고 해서 그걸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마나라고 하는 것은 출가한 신흥종교들의 출가사문들을 얘기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법을 설할 때도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빼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게 훈련이 안 되면 법을 설하지 못하게끔 합니다. 한국에서는 아무나 그냥 말하지만 어떤 경우든지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못하게 합니다.

 

상카루뻭카냐나에 수행이 이르렀고 삼장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가지고 그걸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나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이 돼야만이 법을 설하게끔 하는 것이지, 그래서 스승 밑에서 10년 이상 되지 않으면 못합니다.

10년 동안 계속적으로 훈련이 돼가지고 수행이나 경전해석이나 이런 것들이 돼야만이 “너 그럼 인제 법을 설해” 하고 법을 설하게끔 하지, 그래서 아짜리야 자격을 주기 전에는 어떤 경우든지 못하게끔 합니다.

 

그게 테라와다 전통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스승이라고 하는 출가한 스님들은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일반 스님들을 대할 때 부처님 보듯이 대합니다. 실제 부처님이라서 부처님 보듯이 하는 게 아니고, 이 스님이 부처님 가르침을 나한테 다시 또 얘기해주기 때문에 부처님 같이 본다는 거라.

그런데 그걸 안 믿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라.

깔라마경 여기서 내가 존경하는 스님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 출가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면, 계부터 해가지고 쭉 아눗사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에 상가에 대해서 아눗사띠 한다, 여러분 상가는 어떤 걸 아눗사띠 할 거라?

저 스님 보니까 진짜 부처님 같이 잘 살고 있는지 봐야 될 거 아니라.

법을 설하는 것이 틀림없이 똑같은지를 또 봐야 될 거 아니라.

또 실천하는 것도 틀림없이 부처님과 같이 똑같이 하고 있는지를 봐야 될 거 아니라.

상가 아눗사띠라고 하는 것은 상가 전체를 스님들에 대해서 수념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적으로 눈으로 보는 상가의 일원 스님들을 대상으로 아눗사띠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이런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경우든지 불법승 삼보는 삼위일체다! 똑 카톨릭 교리 같죠?

삼위일체입니다. 동일하게 봐야 됩니다.

 

자! 끝내고, 120페이지 한번 보십시오. 그 중간 밑에 부분에 보면

"삐띠에는 행복·기쁨·만족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다."

그냥 기쁨만 있어가지고는 그거는 정확하게 삐띠 부분에 해당이 되지 않고 희열부분에 해당이 돼버립니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삐띠를 하면 몸과 마음이 가볍고 기민해지고 이런 기능들이 있다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 다섯 가지 장애가 발현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수행을 해서 기쁨이 일어났으면 감각적인 욕망이 없어. 쉽게 얘기하면 밥을 공양을 한다, 그러면 사띠를 하면서 공양을 할 거 아니라. 그럴 거 같으면 적당한 상태에서 딱 끝냅니다. 그냥 목마를 때 갈증만 살짝 축여가지고 갈증만 해소하듯이 배고프다는 느낌만 해소한다는 느낌으로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먹으니까 배부른 느낌은 일으키지 않고 밥 먹는 걸 딱 중단하는 상태가 됩니다.

감각적인 욕망부터 해가지고 다섯 가지 장애들이 안 일어나는 상태가 되면 밥을 먹을 때도 내가 기쁨을 느끼면서 밥을 먹게 됩니다. 그냥 배부르고 맛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이면 먹으면서도 그런 기쁨들을 누리면서 밥을 먹을 수가 있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기쁨의 각지가 여러분들한테 일어나느냐 아니냐 하는 것들은 '일상생활에서 다섯 가지 장애가 없이 내가 뭔가를 하고 있느냐 아니냐'로 판별을 하면 거의 맞다고 보시면 됩니다.

 

【경안각지】

기쁨이 아주 강해진 상태에서 그것들을 잘 넘어갔다, 그러면 그다음 상태는 경안각지 부분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버리는 상태인데, 행복감이나 그런 것들은 그대로 존재를 하는 것들이 됩니다.

 

태국에 있을 때 우리 스승님이 걷는 것을 보면 발이 땅에 안 닿는 것같이 보여요. 분명히 걸어가는데 스르르르 그냥 구름 위를 걷듯이, 분명히 닿는데 안 닿고 어떻게 걷겠어? 분명히 닿는데 안 닿는 것처럼 걷는 것같이 보여요.

경주니까 경주 요 옆에 선무도 하는 데 있죠? 아, 불국사.

거기 어느 정도 잘 수련된 스님들 걷는 거 혹시 본 적 있어요? 아주 경쾌하게 사뿐사뿐사뿐 걷습니다.

경안각지에 이르르면 걷는 것도 아주 스므스하게 걸어가집니다. 아주 가볍게 걸어가집니다.

 

그런데 경안하고 삐띠-기쁨 하고 차이가 뭘까?

만약에 수행을 한다, 기쁨의 각지가 일어났으면 눈이 번쩍 떠집니다. 아무리 닫으려고 해도 눈이 안 닫깁니다. 좋아 죽겠는데 어떻게 눈이 닫길 거라?

그런데 경안각지에서는 지금 부처님 같이 눈이 닫힌 것도 아니고 뜬 것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상태가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내가 닫을려면 닫고 뜰려면 뜨고.

그리고 경안각지에 이르르면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그 경안 각지에서 머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나서 7일간씩 49일간 머물렀다 그러죠. 7일간씩 어떻게 머물렀을까? 만약에 서있는 상태에서 7일간 머물른다, 여러분들 가능해요? 경안각지에서는 가능합니다. 앉아 좌선한 상태에서 일주일간 머문다? 경안각지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게 삐띠하고 이 빳삿디 하고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삐띠에서 그냥 머물 건가? 그게 아니라는 거라. 그거보다 훨씬 크고 더 유익한 것들이, 이 빳삿디 뿐아니라 그다음에 사마디까지 해가지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다 놓쳐버릴려고 하느냐는 거라.

수행에서도 이런데 여러분들 집에서는 그냥 조그만한 기쁜 것 그것 가지고 뭐 애달파 하고 서러워하고 좋아하고 이러지 마. 그거 아마 별거 없을 거라. 지나고 나면 또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거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라.

 

수행에서 어느 정도 각지가 열려야만이 그거는 자기 것이 되는데, 자기 것이 되고 다시 수행을 안 하고 있더라도 다시 언젠가는 하면 바로 그 상태로 넘어가질 수가 있는 데 그 좋은 걸 놔놓고 너무 애달파들 하지는 마십시오.

 

경안각지 빳삿디 부분, 그대신에 고요해집니다.

경안각지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의 경안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 몸의 경안이 일어나집니다. 그걸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거는 삼매 부분에서 삐띠 다음에 수카로 넘어가지고,

(수행자 질문)

칠각지 부분에서 빳삿디 부분에서는 고요함도 있고 행복감도 있고 기쁨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상에 대해서 치우침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 사람들이, 다음주 토요일이 되면 우리 선원에 까티나 가사 한다고 사람들이 몇사람이 와가지고 플랭카드를 걸었어요. 플랭카드를 탁 걸었는데, 그 사람들은 좋아가지고 걸겠죠. 그런데 그냥 걸면 될 건데, 플랭카드 글씨 많이 가리는 것도 아니던데 글씨가 가려진다고 나뭇가지를 탁 꺽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거 왜 그냥 좀 글자가 가려지면 어때서 그걸 나뭇가지를 왜 꺽어?” 그러니까 “보기 싫잖아요” 이러는 거라.

기쁨의 상태에서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빳삿디에서는 절대 그걸 안 꺽습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평정한 마음을 가지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감이 있을 것 같으면 그건 무생물이라고 해도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정에서는 그게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삐띠 다음에 수카가 나오고 수카 다음에 다시 사각지로 넘어가지고 그렇게는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수행의 상태에서는 행복감이라고 하는 것은 갖다 붙이기 나름입니다. 삐띠에 붙일 수도 있고 빳삿디에 붙일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됐습니까?

그냥 다 읽어보십시오 이.

 

【정각지】

그다음에 정각지, 정각지는 뭡니까?

그냥 나를 잊어버리는 상태. 그냥 폭 몰입해가지고 삼매에 드는 상태.

136페이지에 보면 「선정은 어떻게 하여 만드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면

「선정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까지 깨달은 사람은 마지막에 상수멸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있어요, 없어요? 순수 위빳사나만 했다, 없습니다!

(수행자 질문)

전혀, 전혀. 그거는 사선정까지 다 가능해야 완벽하게 되고 선정의 다섯 가지 자재가 가능해야만이 그다음에 상수멸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상수멸이 끝은 아니거든.

순수하게 위빳사나 수행만을 할 것 같으면 이론적으로 볼 것 같으면 상수멸 경험을 안 해보고 수다원부터 아라한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순수하게 위빳사나만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은 보면, 대부분이 아니고 거의 백프로입니다. 하다가 보면 선정을 경험하게끔 됩니다. 그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 사띠의 힘은 선정의 힘과 비례합니다. 나중에는 사띠가 강해지게 됩니다. 선정에 안 들어도.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가 없이 사띠가 삼빠자나와 연결돼가지고 지속적으로 쭉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수행은 사띠와 삼빠자나가 결합돼가지고 두 개가 다 같이 발현될 때 수행은 완벽하게 호흡이 딱 맞아져 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면 당연히 선정 삼매에 드는 힘도 강해지고, 그 힘이 커지면 다시 사띠의 힘도 강해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삼매들을 다들 경험을 하게끔 됩니다. 실제로.

 

그래서 사마타 수행이 좋다, 위빳사나 수행이 좋다, 다 그것은 글자에서나 가능한 거지 실제 수행에서는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젊었을 때 출가한 스님이다, 그러면 삼매를 더 경험을 해보고 아주 자재롭게 될 때까지 하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하는 것이 통상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누가 그렇게 할 사람이 어딨어요?

그러니까 보통 그냥 위빳사나로 바로 합니다.

그래서 나는 수념처 하겠다, 심념처 하겠다 그것도 별 의미없는 겁니다. 나중에 수행하다 보면 사념처는 다같이 다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리고 하다가 보면 사마타 수행도 같이 하게끔 됩니다.

 

특히 자기가 수행에서 속에 있는 지병들 심장병이라든지 아니면 속병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치유되는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더더욱 사마타 수행의 중요성을 알게끔 됩니다.

그게 빳삿디의 힘 때문에 가능합니다.

몸 안에 속에 있는 질병들이 치료되는 것들은 빳사디가 많이 무르익으면 빳삿디는 고요함을 같이 겸하고 있고 대상에 대해서 안정이 돼있기 때문에 그러면 사마디 쪽으로 넘어가기가 굉장히 수월해지게 됩니다.

 

여러분들 만약에 수행을 하다가 굉장히 피곤하죠. 그러면 어떻게 해요? 잡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거라. 잠이라는 사마타 수행을. 그러고 나면 좀 개운하죠.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대상이 자꾸 변하는 것들을 보면 어떨 때는 좀 피곤합니다. 그러면 좀 쉬어야 되겠다, 정신적으로 쉬어야 되겠다든지 할 경우에는 사마타 수행을 합니다. 그냥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관찰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쉬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러면 마음이 깨어나지고 몸도 깨어나지게 됩니다. 서로 병행을 합니다.

그래서 몸의 치료되는 것도 치료되는 것이지만, 수행을 지속적으로 오래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사마타 수행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그걸 하는 방법들을 알아야 됩니다.

삼매 경험도 너무 터부시하지 마시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간단하게 그것들의 좋은 점만 이해를 할 정도가 되야지, 여러분들 나이일 거 같으면, 나는 사선정까지 다 해보고 팔선정까지 다 해보고 하겠다? 꿈 깨! 알겠죠.

 

이게 오력의 균형이 맞으면 사마디 삼보장가는 일어나게 됩니다.

균형 맞추는 거, 오력에 대한 거는 첫째 시간인가 둘째 시간인가 했죠?

믿음과 지혜가 발란스를 맞춰야 되고, 노력과 삼매가 균형을 맞춰야 되고, 그걸 사띠들이 끌어올려 준다는 것.

그 균형이 맞으면 균형이 맞는 것이 분명히 탁 보여야 됩니다. 그냥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믿음을 내더라도 지혜가 있는 믿음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지혜가 배제된 상태에서 믿음을 할 거 같으면 맹신으로 빠져버립니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사마디가 큰 역할들을 해줍니다.

 

그 부분을 하는 것들에 대해서 1번 2번 해가지고 정진부분은 계율을 지킨다, 그다음에 충분함을 안다, 육근을 방호한다, 이런 걸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선정에 들어가는 몸의 상태를 만든다, 그다음에 오계로부터 마음을 맑게 한다, 그다음에 그러고 나서 선정에 들어가고 나오고 나서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가지고 하는 것들을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선정삼매의 구성요소에 대한 것도, 이걸 다 적을려고 하다가 도저히 너무 많아가지고 이 부분은 그냥 약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열한 가지 부분을 한번 참고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평정각지】

그리고 나서는 평정각지 우뻭카 부분입니다.

처음에 수행할 때 최종목표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 우뻭카 상태에 도달하는 것!

누가 나에게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그거하고는 상관없이 마음은 항상 우뻭카 상태가 되는 것.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도 어떤 조건에서든 일어나는 것들이 우뻭카 상태, 그래서 안팎으로 어떤 상태가 되어도 마음이 우뻭카 상태가 되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의 맨처음 목표들입니다. 대부분.

 

여기에 도달해가지고 여기가 무르익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법을 설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수행자 질문)

아까 얘기했잖아요. 그거는 사마타 수행에서 얘기하는 거고,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지금 위빳사나 수행부분을 설명을 한 겁니다.

지금 쭉 오다가 보면은 경안각지에서 우뻭카로 넘어가집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자꾸 우뻭카는 삼매를 개발해야만이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초선 직전까지만 끝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거기서도 충분히 칠각지가 개발되어진다는 겁니다. 우뻭카가 개발되어집니다.

 

상카루뻭카냐나를 행사지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어떤 조건에서도 우뻭카 상태가 되는 지혜가 개발되어야만이 쉽게 말하면 그냥 이 세상에서 인제는 편안하게 살게 되고 설혹 그 직전에 바로 죽어도 적어도 인간으로는 태어난다.

아까 황회장님이 얘기했지만 인간 이하로 태어날 가능성은 제로(0) 상태입니다.

그 정도는 돼야 안 되겠어요?

그래서 수행의 일차적인 목표를 보통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는 것으로 잡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마만큼 칠각지를 다 일곱 개 다 개발했는데, 겨우 아직은 수다원의 입구에도 아직은 못 들어간 상태라는 거라.

아직 디스카운트도 안 되는 상태라.

그런데 이거 없이 수다원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마만큼 이 칠각지는 수행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고 도와 과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라.

그런데 상카루뻭카냐나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바로 고뜨라뷰-종성에 도달하고 바로 수다원에 들어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르익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우뻭카 이것 자체도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내 좋은 것뿐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면 그걸 버려버리고 칠각지를 두루두루 자꾸 닦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뻭카 부분에 들어가면 인제는 평생 죽을 때까지 사띠 안 할려고 해도 사띠 안 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띠가 자동적으로 되긴 되는데 그게 얼마만큼 나를 도와 과로 끌어주느냐 하는 것은 습성에 달려 있습니다.

게으름 부리는 습성이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거고, 좀 금방 싫증을 낸다든지 아니면 죽음에 대해서 급박하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빨리 좀 도달할 거고.

그런 습성들에 따라서 조금 시간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어쨌든 우뻭카 상태를 경험했다, 칠각지가 완전히 개발된 상태다, 그래서 칠각지가 아래위로 자꾸 왔다리 갔다리 하게끔 된다, 그러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도와 과에는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르면, 이생에서 도와 과에 이르렀으면 언젠가는 몇 번의 생을 반복하든지 어쨌든 간에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거고, 이생에서 못 이뤘으면 다음생에서 또.

그래서 우뻭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니까 그 부분은 찬찬히 잘 읽어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은 "마음속에서 항상 청정한 상태가 돼있으면 그 사람은 아라한과 다름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칠각지」 부분이고, 다음 시간에는 「팔정도」 부분에 대한 걸 간단하게 설명하고 다음달에 강의는 모두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간이 짧기는 했는데 어쨌든 칠각지는 여기서 끝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