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7편- 팔지성도(Ariya Aṭṭhaṅgika Magga) (2022년 11월 26일)

담마마-마까 2023. 4. 27. 09:52

https://youtu.be/anpdOom-EII

–7편- 팔지성도(Ariya Aṭṭhaṅgika Magga) (2022년 11월 26일)

 

"아리야 앗타 앙가 막가(Ariya Aṭṭha aṅga Magga)" 입니다. 그걸 글자 그대로 하면 "팔지성도"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편의상 "팔정도"라고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팔정도"라고 부르겠습니다.

가지(aṅga) 라는 뜻이죠? 여덟 가지 가지인데, 저기 사다리 타기 해보신 분 있죠? 요길로 가든지 요길로 가든지 어쨌든 결국에는 하나의 길로 빠지도록 만드는 사다리 길과 마찬가지로 팔정도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칠각지는 순서가 있고 그걸 건너뛸 수가 없는데,

팔정도는 그거 하고는 다르게 어느 것 하나를 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다 같이 하게끔 되고 그래서 하나로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팔정도 마크들이 어떻게 돼있죠? 수레바퀴 같이 돼있죠! 굴러가듯이 이렇게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팔정도를 다 알면 좋지만 그중에 하나라도 하면 나머지 것들을 같이 하는 형태들을 띠게끔 되고 또 그로 인해가지고 한바퀴 돌고 나면 조금 더 속도가 나게끔 돼서 조금 더 빠르게 돌게끔 되고, 그래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더욱더 해탈로 가는 데는 가속도가 붙게 되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게 이 팔정도다 하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론상으로는 팔정도 가지를 다 잘 아는데 이걸 수행으로 접목하는 것이 조금 힘든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였죠? (수행자 대답)

정견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다른 것들을 해내는 데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정견이 어느 정도 완숙단계에 이르르게 되면 해탈로 이르게 됩니다. 그런 사이클을 띠고 있는 게 이 정견입니다.

 

보통 경전에는 정견을 뭐라고 그래요? (수행자 대답)

네. 바르게 본다는 의미인데, 뭘 바르게 봐요? (수행자 대답)

네. 사성제에 대해서. 사성제는 뭘 어떻게 보기에 바르게 보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그래. 그렇다 치자. 또 뭐가 있어요? 뭘 바르게 봐야 되요, 또?

원인·결과에 대한 것들을 바르게 봐야 됩니다.

크게 봤을 때는 원인·결과에 대한 것들이 바른 견해에 속하고, 또 사성제의 진리를 꿰뚫어 보게 하는 것들이 바른 견해에 속합니다.

 

여기서 물어보겠습니다.

수행을 하고 있다, 성냄이 탁 일어났어요. 바른 견해를 통해가지고 사성제를 확립할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해봐라! 성냄이 탁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걸 확립해요?

성냄은 뭣 때문에 일어나는 거라요? (수행자 대답)

네. 자신의 탐욕 때문에. 또? (수행자 대답)

그렇죠. 뭔가 생각을 많이 했는데 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안 돼가지고, 그런 것들은 어쨌든 다 망상의 영역에 속하겠지? 그런데 망상하고 성냄하고는 수행에서는 다르죠!

 

수행에서 성냄이 일어났어요.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다. 다리에 통증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괴로운 것들이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 성냄이 일어나죠!

왜 성냄이 일어날까? 아프니까, 아픈 건 자기 것도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아, 그냥 수행 좀 하도록 놔두지 왜 다리가 이리 아프노’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수행하다가 아픔이 일어났으면 아픔을 관찰해야 될 거 아니라?

아픔을 관찰하니까 아픔이 또 어떻게 바뀌든가요?

아픔은 실재하는 겁니까? 아니면 관념적인 겁니까?

아, 여기서 이 얘기하기 전에 정견 견해라고 하는 것은,

수행에서는 실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바른 견해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견해가 없는 것들이 바른 견해에 속하게 됩니다.

그것은 먼저 얘기하고, 통증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관찰하니까 어떻게 돼요?

 

통증이 어떤 식으로 오든가요? 쑤시는 것으로 오든가요? 아니면 딱딱한 것으로 오든가요? 아니면 뭔가 꽉 누르듯이 오든가요? 그것은 실재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관념적인 겁니다. 그래서 통증이 있으면 ‘통증’ ‘통증’ 하든지 ‘아픔’ ‘아픔’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들을 관찰하는 데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면 이 아픔이 어떤 아픔인지를 먼저 보라는 거라. 그러면 이게 뭔가 쑤시는 듯이 온다, 그러면 쑤시는 것은 한번 일어나는 것은 아니죠? 여러번 쑤시는 것이 일어나고 그 강도도 틀림없이 다르게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점점점 강해지기도 할 거고, 어떨 때는 그것이 잠깐 사라지기도 할 거고, 어떨 때는 그 강도가 아주 지속되는 것이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만약에 그 통증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것 같으면 그 통증이 분명히 사라지는 것들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뭘 보게 될까? 통증으로 인해서 , 이것이 괴로움이구나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적어도 바른 견해를 지닌 수행자라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봐야 맞는 거죠! 정견을 여러분들이 수행에서 수행이 가능해야 될 거 아니라!

 

그런데 안 되는 이유들은 왜 안될까? 하다가 다른 것과 뭔가 결합을 합니다, 통증이. 「나」라고 하는 것과 결합이 되든지, 아니면 망상하고 결합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 통증 자체가 또 다른 뭔가 게으름 피울려고 하는 무지와 결합이 되든지 그렇게 되게 됩니다.

그 대신에 통증 자체는 분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하고는 결합을 안하겠죠! 탐욕하고 성냄하고는 분명히 다른 영역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결합을 안 하는데, 다른 것들하고는 결합을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결합하는 것들을 끊어줘야만이 이 통증을 분명히 수행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 이게 괴로움이구나’, ‘이게 괴로움의 원인이구나,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졌을 때 ,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까 이렇게 평온하고 개운할 수가 없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고, 그걸 하기 위해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을 때 가능했구나 하는 걸 알게끔 되는 겁니다.

수행에서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서 사성제의 진리가 드러나야만이 그게 바른 견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성제가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어떤 경우든지 부처님이 말한 바른 견해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게끔 됩니다.

마찬가지로 상깝빠, 바른 사유라고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조금 조금씩 설명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어느 정도 해본 사람들은 그것들이 통증이면 통증을 그렇게 관찰하고, 아니면 성냄이 있으면 성냄을 관찰하고, 아니면 게으름이 있으면 게으름을 관찰하고, 아니면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들 의심이 있으면 의심을, 그다음에 게으름 피우는 마음이 있으면 게으름 피우는 마음, 이런 것들을 사성제로서 관찰해서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들을 보고 다시 마음이 주대상으로 돌아오든지, 호흡이든지 그렇게 해나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정도 수행이 조금 가능해야 됩니다.

 

그러면 수행을 잘 안 해본 사람들이나 아니면 수행 초보자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떤 마음들을 가지는 것이 나을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은 테라와다 스님이죠? 여러분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거는 대승불교죠? 어떤 게 더 수승합니까? 수승한 것이 없습니까? 왜 말들을 못해? (수행자 대답 : 테라와다 불교가 수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잘못된 견해입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가지는 것은 아까 얘기했죠?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중도하고 연결되기도 하고, 견해가 없는 것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자기가 테라와다가 수승하다고 하더라도, 그게 테라와다가 수승한 것하고 다른 종교가 열등하다고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비교를 하는 순간에 그럼 다른 것들에 대해서 업신여기게끔 되고 멸시를 하게끔 됩니다.

마음이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악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바른 견해의 영역에 속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팔정도라고 하는 것의 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삼마의 영역에 속합니다. 삼마라고 하는 것은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돼야 되는 것이지,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그 가지고 있는 견해가 어떤 견해이든 간에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것이 최고다, 내 것이 맞다, 이것도 바른 견해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거라.

실제 수행을 해보면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본인 스스로는 어떤 것에도 걸리질 않게 됩니다.

 

조금 전에 앉아서 찬불가도 듣고 또 삼귀의도 하고 그럽니다.

테라와다적으로 할 것 같으면 이건 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내가 만약에 견해를 잘 지닌 자라고 할 것 같으면 “어, 그거 아니야! 감성을 건드리는 것은 수행에 도움이 안 돼! 그럼 찬불가 하지마! 삼귀의 삼창하는 것으로서 그쳐서는 안 돼! 오계를 받아 지녀!” 이렇게 얘기해야 되는 거라. 아마 다른 스님들 테라와다 스님들을 초청하면 어디든지 삼귀의 오계를 하게끔 됩니다. 그게 바른 방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스님이 만약에 그렇게 선한 의도로서 얘기했다고 치자.

그럼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을 지닐까? 때로는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 그래? 우리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러면 아무리 좋은 법문을 하더라도 그것이 귀에 안 들어옵니다.

 

견해를 지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이해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되듯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도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바른 견해의 영역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할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팔정도에서.

대표적으로 세 가지죠! 말을 바른말 하는 것, 바르게 행동하는 것 행위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바른 생활 생계를 가지는 것!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바른 것들이 돼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바르게 생각하는 것 바른 사유하는 것!

 

바른 사유 부분은 수행에서 얼마든지 관찰이 되어나가집니다.

그런데 그 앞에 세 가지(정어 정업 정명) 수행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회상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 오늘 내가 나쁜말 하지 않았는가? 내가 이러이러한 말을 했는데 이게 이익이 있는 것이고 또 유익한 것들이고, 실제 그걸 말할 때에 말한 것인가?’ 이런 것들을 회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건 수행에서 얼마든지 가능하겠죠.

그런데 회상하는 것으로 수행의 전부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거, 사띠를 지니면서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띠를 지니면서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것들을 안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수행력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수행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띠뿐 아니라 집중력이 같이 결합이 될 때 수행은 깊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있을 때 집중이 되는 것이지, 그리고 하나의 대상을 관찰할 때 집중이 되는 것이지, 움직이면서 집중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계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아, 이게 남을 해치지도 않고, 거짓말하지도 않고, 그런 생활이다’ 하는 것들은 본인이 해보면서 ‘아, 이것은 내가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것이고’ 하는 것들을 그대로 자기가 직업으로 가지고 생활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선한 마음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꼭 수행하고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이 세 가지(정어 정업 정명) 부분은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생활을 하면서 계속 습관을 잘 들여야 되고 갖추어나가야만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걸 잘 갖추어졌을 때 마음은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되고, 그리고 남들에 대한 배려들이 있게 되고, 그러면서 수행을 하면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사띠를 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질 수 있는다는 거라.

 

그래서 팔정도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앞에 세 가지는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생활 속에서 잘 갖추어나가고 습관들여야 되는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는 수행을 통해서 그것들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만이 팔정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까 정견에 대한 얘기를 하듯이 수행을 통해서 그것들이 바른 견해가 딱 서지 않으면 자꾸 분리를 하게 됩니다.

사성제하고 팔정도를 분리하게 되고, 중도도 분리하게 되고, 삼법인도 분리를 하게끔 되고. 사실은 수행에서 삼법인이 그대로 드러나야 되고, 사성제가 그대로 드러나야 됩니다. 그리고 팔정도 중에서 어느 것들을 내가 지금 하고 있고 그것들이 어떤 다른 팔정도하고 결합돼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수행에서는 실제로는 이것들이 그냥 어울려져가지고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자꾸 그걸 분리를 한다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수행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이라 할 것 같으면 이렇게 자꾸 분리하는 것들을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차라리 그 부분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사성제가 뭔지 팔정도가 뭔지 몰라도 관계없습니다.

그 수행에서 바르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노력이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띠가 있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세 가지만 일단 갖추어지고 나면 나머지 것들은 다 따라오게 됩니다.

팔정도가 그런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여기 프린트물에 나갔듯이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의 순서」라고 그렇게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꼭 이게 맞는 순서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순서에서는 정견 부분을 맨 마지막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왜 그러냐면 수행 부분에서는 정견을 확립하는 것이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런데 시작부분은 수행에서는 그걸 잡아서 정견을 바로 세우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끝으로 돌려놨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말한 팔정도의 순서들을 그대로 밟아나가는 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정견부터 해가지고 정사유로 쭉 나오는 순서대로 해나가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하고 판단을 하시면 될 겁니다.

 

한번 봅시다. 팔정도의 순서 첫 번째,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의 순서」 

첫 번째, 마음에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생활한다.

두 번째, 망상을 멈추기 위해 현실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관찰한다.

세 번째,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해서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돼있습니다.

 

보통 탐·진·치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탐진치는 어떤 경우든지 지혼자서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결합을 합니다. 결합을 하면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유사한 것들이 반드시 다시 또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이게 탐심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참 힘들고, ‘이게 성냄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도 참 힘듭니다. 힘들다는 것은 그걸 몰아내가지고 완전히 사라져가지고 다시 탐심이 안 일어나게끔 만드는 것이 참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탐·진·치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계위에서도 수다원 이상이 돼야 만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수다원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들을 먼저 잘 이해할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 반대되는 것들을 자꾸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수행에서는 바른 방법에 해당이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탐심이 안 일어나려고 할 것 같으면 뭘 많이 하면 될까? 쉽게 말하면 욕심부리는 것들을 안 할려면? 자꾸 줘버리면 돼. 자꾸 줘버리면 돼.

진심이 성냄이 안 일어나게 하려면 뭐가 우선 돼야 될까? 자애를 자꾸 방출하면 됩니다.

어리석음은 수행에서는 게으름과 같습니다. 게을러지는 성품이 안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렇죠. 자꾸 뭔가를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것도 바른 방법으로 바른 것들을.

그래서 수행초기에는 탐·진·치가 안 일어나게끔 하는 것보다는 반대되는 것들이 마음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게끔 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수행처에서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전에 예비수행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바로 그냥 대상을 호흡이면 호흡 이런 걸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만들고 나서 자애수행을 먼저 하는 겁니다. 자애를 자꾸 일으키도록 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자애를 계속적으로 일으키도록 합니다.

그리고 수행을 일단 하면 딱 규칙을 정해놓습니다. ‘한시간 좌선하고 한시간 경행한다.’ 못 견디고 힘들어도 무조건 그 시간을 채우라고 그럽니다. 그 시간을 못 채우는 것은 몸이 그것을 견디지 못할 상태도 물론 있겠지만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 게으름이 일어나서, 싫은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 시간을 채우도록 노력하도록 만들어주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수행초기 때는 한시간 좌선했다 그러면 한시간 경행을 하도록 합니다. 그걸 안 하면 되게 뭐라 합니다. “왜 너는 좌선만 해?” 아니면 “너는 왜 경행만 해?” 하고 나무랍니다. 왜? 이게 보조를 맞춰야 되기 때문에. 집중하는 힘과 노력하는 힘이 같이 어울려서 일어나도록 만들어줘야 되는데 하나만 할 것 같으면 하나쪽으로 치우쳐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의 수행처에 보면 탐·진·치가 일어나는 걸 먼저 관찰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규칙을 딱 정해놓습니다. 그리고 수행하기 전에 예비수행을 먼저 하게끔 합니다. 반대되는 걸 일으켜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거라.

 

수행의 기본은 사띠죠! 사띠는 선한 마음입니까? 그러면 자애의 마음도 선한 마음입니까? 부처님을 회상하는 거는? 그럼 선한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들어주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하든지 아니면 자애수행을 하든지 거기에 사띠가 없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죠! 어떤 것이든 바르게 사띠가 있어야만이 그게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속해나갈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그것에 집중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속해나갈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수행은 사띠와 위리야와 사마디가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게 잘 조화롭게 이루어질 거 같으면 수행은 지속적으로 지속해나갈 거고 그게 안 되면 항상 삐그러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이 대상이 많이 나타나고 또 환희심이 일어나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는 거 이런 걸 바라는 것보다는, 하나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계속 볼 수 있는 힘들이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라. 그리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로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끊어짐 없이 쭉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이 세 가지만 잘 이해를 할 거 같으면 이걸 스스로 조절을 하면 됩니다.

집중하는 힘이 좀 과하게 된다, 그럴 것 같으면 대부분은 보면 대상이 변하는 것들이 잘 안 보입니다. 또는 노력하는 힘들이 많이 과하게 된다 그럴 것 같으면 호흡이든 뭐든 자꾸 들뜨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스스로 조절을 하게 됩니다. ‘아, 지금 노력이 과했구나’, ‘집중하는 힘이 과했구나’ 그러면은 반대되는 것을 조금 더 강화시켜주면 됩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사띠를 하면 수행은 정상궤도로 다시 돌아오게끔 됩니다.

 

특히 언제 그렇게 되냐면 새로운 대상이 나타났을 때! 수행하고 있는데 뭔가 빛이 보였다, 아니면 기쁨이 확 일어났다, 아니면 수행하고 있는데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탁 일어났다, 이렇게 새로운 대상이 탁 일어났을 때 보면 이 세 가지가 균형이 탁 깨져있습니다.

그러면 빨리 그 상태를 본인이 알아야 됩니다.

내가 지금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에 몰입하고 있다는 거라. ‘어, 몰입하고 있구나’ 몰입하고 있는데 무상하게 변하는 것들이 안 보인다? 그러면 일단은 스톱을 해야 됩니다. 스톱하고 다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나서 대상이 일어나는 것들을 다시 봐야 됩니다.

그렇게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야 되는 것이지 그냥 거기서 그대로 몰입을 하고 그대로 따라가 버릴 것 같으면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무르익지 않게끔 돼나간다는 겁니다.

 

팔정도는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상에서 그것들이 드러나져야만이 된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두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 정견에 대한 얘기들을 조금 하다가 말았습니다.

정견에 대해서 사띠하는 요점을 간단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수행대상에서 사성제가 드러났다,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그 대상이 변하는 것들이 보이든지 아니면 그 대상이 너무나 빨리 변해가지고 ‘아, 이것은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이 보이든지, 아니면 그 대상이 내거라는 생각이 없이 그냥 불만족스럽게 보이든지 이렇게 보여야 됩니다.

바른 견해가 생긴다고 하는 것은 무상 고 무아가 그 대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바른 견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특히 오해하는 부분들 중에 하나가 삼매에 들것 같으면 그 삼매속에서 아무 대상이 없이 그냥 오롯하게 그 대상만 보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무상·고·무아가 드러나지 않고. 그런데 그거는 착각입니다. 그거는 바른 견해의 영역에 속하지 못합니다. 바른 견해가 섰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특성들이 그대로 드러나야 됩니다.

삼매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삼매에서도 그 대상이 보이든지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그 대상만 오롯이 그냥 보인다, 사띠를 하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냥 게으름 피우고 있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안 그러면 그 대상을 딱 붙잡고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세가지 특성들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 바른 견해다 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 왜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야 될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집착함이 없이 놓아버려야만이 그 특성들이 드러나집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를 지닌다고 하는 것은, 수행에서 바른 견해가 어느 정도 확립됐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고, 어떤 것도 견해를 가지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게 바른 견해라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바른 견해 다음에는 바른 사유, 쉽게 얘기하면 바른 생각들입니다.

망상하는 것 그것도 사유의 영역에 속합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되죠? 망상하는 걸 관찰해서 그 망상이 사라지는 걸 분명히 보고 주대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망상을 한다는 것은 탐·진·치가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수행에서는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돼야만이 수행이 지속됩니다. 그럼 빨리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말 같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생각이 일어난다든지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

 

그래서 대부분 처음에 수행하는 사람들은 망상이 일어났다 그러면은 그냥 무시하라, 그냥 커지기 전에 무시해버리고 그냥 놔버리고 주대상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고 자애를 일으켜라 하고 얘기합니다.

망상이 일어났으면 쉽게 말해서 생각이 일어났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그 망상이 또 다른 거하고 결합을 하게 됩니다. ‘어제 뭘 먹었다’ 뭘 먹었다 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뭘 먹었으면 ‘그게 맛있었지’ 하고 탐심하고 결합해버립니다. 그러면 ‘또 먹고 싶네’ 하고 자아하고 또 결합을 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럼 그동안에는 계속적으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수행은 이미 중단이 돼버린 상태라.

 

그래서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계속 발전하기 전에 처음 초기단계에서 뭔가 생각이 일어났다 할 것 같으면 ‘음, 생각이 일어났네’ 하고 그냥 놔버려야 됩니다. 일어난 것조차도 모르면 안 돼! 그거는 해야 돼! 일어났으면 ‘어, 일어났네’ 하고 나서 그냥 놔버려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다시 그냥 호흡으로 돌아와버리면 돼. 그러면 크게 발전하지는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수행이 어느 정도 좀 해나가는 사람들은 그 생각이 일어나는 걸 관찰할려고 합니다. 관찰해서 분명하게 이게 변하는 상태가 보이는 상태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관계가 없는데 안 보이는데도 그것을 계속 따라갑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내가 지금 사띠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불선한 마음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사띠하고 있다고.

“왜 그렇게 화가 나있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수행자들은 “스님 저는 사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계속 화난 상태 그대로 유지가 돼나가고 있습니다. 뻔히 보이는데, 사띠를 안 하고 있는데, 그런데 본인은 사띠를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거라. 불선한 마음을 그대로 관찰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참 어리석은 겁니다.

지금은 그 불선한 마음을 관찰해서 사라지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데도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거라. 계속적으로! 증폭시키면서!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자꾸 속이게 됩니다.

 

바른 사유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만드는 것이 바른 사유입니다.

또 하나 더, 바른 사유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 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 바르게 겨냥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들입니다. 지금 일어난 것이 호흡이면 호흡에 마음이 가있어야 되고, 그렇지 않고 호흡이 아니라 뭔가 느낌이 있으면 느낌에 가있어야 되는 거고, 또 그렇지 않으면 뭔가 지금 마음이 대상이 될 것 같으면 마음에 가있어야 되는 거고,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났을 거 같으면 현상에 가있어야 되는 거고, 이게 지금 어떤 대상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바른 사유입니다.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까? 느낌이 일어날 때 몸도 같이 일어나는걸 볼 수 있습니까? 못 본다는 거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코를 통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합니다. 그러면 들이쉴 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내쉴 때 ‘내쉰다’고 알아차립니다.

어떤 사람은 들이쉬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들이쉴 때 시원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들이쉴 때 ‘마음’이 편안한지 고요한지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것들이 동일하지 않고 뭔가 변하고 있는 ‘현상’들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이 가지를 한번에 다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내가 지금 바르게 겨냥이 돼서 바른 사유를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일어난 대상이 신수심법 중에서 뭔지는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몸이면 몸, 마음이면 마음, 마음 중에서도 어떤 건지를 분명하게 사띠 해야만이 바른 사유를 하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선한 생각만 일으키면 되지 않느냐 하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바른 사유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분명하게 그 대상들을 봤을 때 그 대상을 통해 해탈의 길로 이끌어져나가야 될 거 아니라!

 

아까 정견과 마찬가지로 정사유도 마찬가지로 해탈의 길로 이끌어주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끌어주지 못할 거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 대상을 통해가지고 그렇게 내가 느끼면 느낌이 일어나는 것들을 통해가지고 느낌이 빠르게 변하기도 하고, 느낌이 사라지는 것만 보이기도 하고, 그 느낌이 너무나 빨라서 두려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 느낌이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려 가지고 마음이 또 다른 대상을 찾기도 하고, 그것이 또 느낌으로 변해가지고 그것이 또 빠르게 변하든 느리게 변하든 마음은 고요한 상태에 머물르기도 하고, 이렇게 바뀌어나간다는 거라.

그게 지혜가 하나씩 하나씩 단계를 밟아서 올라가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전에 그런 얘기를 했죠? 멀리서 보면 새끼줄 같은 건데 좀 더 가까이서 보게 되면 새끼줄이 꼬인 게 보이게 되고, 좀 더 가까이서 보게 될 것 같으면 그 꼬인 새끼줄이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 보이게 되고,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게 되면 그것이 새끼줄이 아니고 개미가 떼를 지어가지고 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좀 더 가까이서 보면 그 개미 하나에 발이 몇 개 있고 무슨 발을 디디고 있는 것까지 다 보이게 된다는 거라.

느낌도 쭉 이런 과정들을 겪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바른 사유를 해서 바르게 대상에 겨냥을 했기 때문에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그 느낌들이 나를 지혜의 단계를 밟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해준다는 거라.

그게 바른 사유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바른 사유를 하면 일단은 마음이 어떻게 돼요?

청정해지겠죠! 깨끗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가벼워져야 됩니다. 마음이 어떤 경우든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가벼워져서 떨어져있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그렇게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은 바른 사유를 지속적으로 자꾸 일으키도록 해서 선한 마음이 일어날려고 할 것 같으면 딱 세 가지만 하면 됩니다.

 

보시, 많이 베풀어라.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냥 막 퍼줘. 막 퍼줘! (수행자 질문)

왜? 스님도 법으로서 여러분들한테 그냥 막 퍼주는데! 여러분들이 좋은 말로서 선한 마음을 일으켜가지고 자꾸 퍼주면 그게 보시입니다. 보시가 물질적인 거, 경전들 다 알고 있잖아요? 보시가 정신적인 보시가 더 수승한 것이고, 법에 대한 보시가 훨씬 더 수승한 것이고 하는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물질적인 것들만 생각을 해? 물질은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마음이 빠져나오고 나면 그 육체는 썩은 나무토막과 같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니다. 물질적인 보시는 그와 같습니다.

 

물질적인 것을 보시할 때 정신적인 것들이 결합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래서 반드시 세 가지가 결합되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주기 전에 준다고 생각하면 기쁘죠? 기쁜 마음을 자꾸 일으키게 되는 거고.

줄 때 주는 것을 행위를 그대로 알아차리면 사띠가 계속 연속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지속하게 되는 거고.

주고 나서 ‘아, 내가 잘했다’ 하는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쁨과 사띠와 행복이 결합 될 때, 이것은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그게 결합될 때 그 물질적인 보시는 더욱더 수승해진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물질적인 보시 아무리 베풀어봐야 “빔비사라왕 너는 받을 게 아무것도 없다” 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냥 주는 것은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물질에 어떻게 내가 마음을 싣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돌아오는 것들이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풀어라.

 

그다음에 두 번째,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자애 없이는 행하지 말아라.

말할 때도 자애의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말을 해야 남들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고, 남들에 대해서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게 됩니다. 행동할 때도 꼭 마찬가지고 생각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자애를 지닌 채 신·구·의를 행하라는 거라. 자애를 지니지 않으면 일단은 스톱! 말하는 것도 스톱! 행동하는 것도 스톱! 하고 자애를 먼저 가지라는 거라. 가지고 나서 말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연민심을 가진 채 신·구·의를 행하는 것.

자애와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소중하듯이 살아있는 생명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똑같이 평등하게 볼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들도 고통받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 세 가지 하기 쉽죠! 보시, 자애, 연민심!!!

그렇게만 하면 적어도 여러분들이 바른 사유를 끊임없이 개발하도록 하게 되는 겁니다. 할 수 있죠?

 

그다음에 말 부분(정어)에 대한 거는 경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스님이 굳이 얘기 안 해도 네 가지 말에 대한 거, 그것에 대해서 부차적인 설명 다 여러분들이 알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지적하고 싶은 거, 오늘 여러분들 만나서 맨 처음 인사가 뭐였어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거 다 쓸데없는 말이라는 거라.

그마만큼 여러분들이 쓸데없는 말을 일상적으로 그냥 하고 있다는 거라. 뭔가 불안하고 뭔가 말을 해야 된다는 거라. 안 하면 어때? 말을 안 하면? 그냥 눈빛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데도 자꾸 그렇게 쓸데없는 말들을 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주의해야 되는 것이 그 쓸데없는 말, 여러분들이 거짓말 안 하고 남을 험담하고 이런 말들은 잘 안 할 거라고 보고, 가장 안 되는 것이 쓸데없는 말들입니다.

 

이렇게 한번 판단해보십시오.

그거 말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여러분들이나 그 사람에게 얼마만큼 이익이 있느냐? 얼마만큼 도움이 되느냐? 그리고 그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느냐는 거라.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거는 그 말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아니면 그사람이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갈 수 있느냐는 거라. 그게 안 되면 하지 말아라는 거라.

바른말이라고 해도 부처님은 사람과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법을 설하게끔 되는데, 하물며 쓸데없는 말인데 그런 기준을 가지지 않고 그냥 말을 한다? 그거는 시간낭비라는 거라. 그게 자꾸 습관이 되면 뭔가 말을 안 하면 불안한 사람이 자꾸 돼버리는 거라.

말 안 하고 일주일 있어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한번 경험을 해보십시오. 진짜 행복합니다. 오롯이 나에게 시간을 투자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있게 됩니다. 그것도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그래서 말이나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행동하는 것(정업).

행동하는 거는 중요한 것은 뭐냐면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없이 행동 안 하면 됩니다.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사띠 없이 행하는 것들은 일단은 중단을 해버려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그게 자꾸 습관이거든.

무수한 과거부터 지어온 습관들이 참 많은데도 이생에서까지 그렇게 똑같은 습관을 들여야 되느냐는 거라.

행동하는 것들을 사띠없이 안 하는 습관을 들여야만이 적어도 여러분들이 죽음의 순간에 의식이라도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사띠하면서 죽을 수가 있습니다.

스님이 말하는 거 함부로 그냥 새겨듣지 말고 사띠가 있는 상태에서 행하도록 자꾸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바른 생활(정명), 이것은 직업이나 생계를 뜻합니다. '사는 일'

간단합니다. 이걸 함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오계를 어기는 것인지 아닌지만 판단하면 됩니다. 오계 뭐 뭐 있죠? (수행자 대답) 그렇죠. 어쨌든 이게 해치는 일인지, 아니면 남을 속이는 일인지 오계 부분을 어기지 않는 상황일 거 같으면 그 생활 계속해도 됩니다. 그런데 오계를 어기는 부분이다 할 것 같으면 하면 안 됩니다.

그다음에 생계 부분에서 두 번째 중요한 게 뭐냐면 그걸 함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계속 들뜨고 불안한 상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또 중요한 판단기준 중에 하나입니다. 마음이 안정돼야만이 수행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안정되고 오계를 어기지 않는 거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여러분들이 그 일을 충실하게 해나가면 됩니다.

 

그다음에 노력(정정진) 부분입니다.

어떤 노력을 해야 될까? 감각적인 욕망 그거는 일어나지 않게끔 잘 해야 되고, 그다음에 성냄은, 또는 게을러지는 거는, 막 들뜨는 거는, 그다음에 뭔가 법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는 것은, 적어도 바른 노력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바른 노력은 반드시 거기에는 이걸 몰아내기 위해서 그것들에 집중하게 되고 그것들이 뭔지를 분명하게 사띠를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금방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성냄이 일어났을 때와 게으름이 일어났을 때, 아니면 들뜸이 일어났을 때 결합하는 요소들은 다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이것들이 일어났을 때 이것들이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사띠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사띠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바른 노력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될 때 ‘아, 내가 참 잘했구나’ 하는 바르게 노력했구나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수행에서 이런 장애들이 일어나게 됐을 때 그것들을 분명하게 봐서 사라지는 것들을 보지 못하면 바른 노력은 키워지는 것이 힘듭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에게 닥친 장애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선한 마음으로 돌파해가지고 그걸 넘기지 못하면 계속적으로 꺽여버리게 됩니다. 바른 노력은 계속 습관화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노력은 수행에서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왜 바른 노력을 해야 될까? 여러분들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행복해지기 위한 겁니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바른 노력이 아니다 하는 것으로서 결론내도 무방합니다.

가끔씩 그럽니다. “스님, 얼만큼 노력을 해야 됩니까?” 얼만큼 노력해야 될까?

쉽게 얘기하겠습니다. 죽을동 살동!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노력의 힘이 아직 약하다는 뜻입니다. 사띠하는 것도 죽을동 살동 해야 되는 거고, 일상생활에도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그리고 그 문제를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죽을동 살동 해야 되는 것이지 대충 해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른 노력을 하면 할수록 여러분들은 점점 더 생활이 안정돼가지고 마음은 행복해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바른 사띠(정념).

사띠하면 분명히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야 된다고 했죠?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분명하게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야 되는 거고, 그리고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 딱 일어나는 것들만 알아차리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스님 보면서 귀에 소리 들린다? 바른 사띠 안하고 있는 겁니다. 스님을 분명히 보고 있는데도 소리만 들린다? 사띠를 잘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님만 보인다, 귀에는 소리는 안 들린다, 그것도 사띠를 잘하고 있는 겁니다!

사띠를 하고 있는 것은 지금 현재 하나의 대상에만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지속해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몸이면 몸, 느낌이면 느낌, 마음이면 마음, 법이면 법, 이것들을 개별적으로 다 하나씩 하나씩 알아차려나가는 것들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 하나만 수행의 포인트로 잡아서는 안됩니다.

나는 심념처만 할거야, 나는 수념처만 할 거야, 나는 마하시 스타일만 할 거야, 신념처만 할 거야, 절대 수행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수행 대상에는 네 가지가 다 어울려서 일어나게 돼있고 그 네 가지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지 못하면 수행을 지속해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37조도품도 맨 처음에 사념처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알도록 하시면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에 바른 집중 삼매(정정) 이런 것들입니다.

집중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기 하얀 종이를 가지고 볼록렌즈를 가지고 햇볕을 비춰가지고 요걸 구멍이 뚫리도록 이게 타도록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렌즈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 눈은 어디에 가 있어야 돼요? 여기에, 종이에 딱 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눈과 볼록렌즈 두 개가 분명하게 하나의 대상에 고정되어 있어야만이 이게 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삼매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타는 것은 분명히 이게 바뀌고 있습니다. 변하고 있습니다. 변하는 게 보여야 됩니다. 내가 사띠를 하면서 마음이 대상에 딱 고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지혜가 이 속에서 자꾸자꾸 일어나면서 그 지혜가 점점 더 다른 지혜로서 바뀌어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볼록렌즈라고 하는 것은 삼매라고 하는 것이 분명히 이 대상을 향해서 분명히 딱 고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매와 지혜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이걸 태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 쉽게 말해서 종이를 태우게 하기 위해서는 삼매에 지혜가 결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하나의 대상에 그냥 고정돼가지고 가만히 머물러 있다? 지혜도 없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거라.

뭔가 그 대상 자체에서 변하는 성품들이 보여야 되고, 그 대상들에서 타는 것들이 보여야 되는 것들과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집중하는 것들을 잘못 이해하면 안됩니다.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을 하고 있지만 그 대상에서는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그대로 보여야 됩니다.

 

부처님이 웃닷짜 라마뿟따와 알랄라 깔라마 이 두 분도 삼매에 들어서 삼매를 개발한 분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공부를 했는데 이분하고 부처님하고 차이점이 딱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 사람들은 집중해서 삼매에는 드는데 이걸 지혜로서 연결시키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지혜로서 연결을 시켰기 때문에 이 대상이 삼매 속에서 변하는 것들이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딱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마음 한끗 차이인데 한사람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한사람은 또 윤회의 세계에 돌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대상에 몰입해서 삼매에 든다고 하더라도 대상이 없어진다든지 아니면 대상이 고정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빨리 거기에서 깨어나야 됩니다. 외도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도록 도와준 삼매는 지혜하고 결합되어야 되는 것이지 지혜를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변하고 있지 않는 걸 갖다가 그냥 오롯하게 나는 그걸 봤다, 아 그래서 나는 어느 대상에 대해서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으니까 나는 아라한이 됐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있든지 그 집중을 하고 있으면 거기에는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거고, 그속에는 사띠가 분명히 있어야 되는 거고, 거기에는 지혜가 분명히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조건이 맞지 않고 어느 것 하나라도 없는 상태다, 집중이다 그러면 그것은 잘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판단하시면 됩니다.

 

이게 팔정도의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설명한 것이

처음에, 마음을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생활한다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가 일어난다, 그러면 일단은 멈추라는 거라. 멈추고 대신 마음이 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먼저 돼야 됩니다.

 

이렇게 한번 보십시오.

오늘부터 팔정도 수행하겠다, 그러면 평소에 자기가 가장 잘 안되는 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남 비난하는 거 안 하고 싶은데 만날 뭐만 하면 부정적으로 보고 자꾸 표현한다 그러면 그걸 목표로 잡아보십시오. 아니면 내가 뭐만 하면 조그만 반응에도 금방 화가 난다, 그러면 성내는 걸 포인트로 잡아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자기가 가장 잘 안되는 걸 포인트로 잡아보십시오. 그런데 그게 위험한 것들이 돼야 됩니다. 그것들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안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기고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들, 가장 위험한 것들을 먼저 타겟을 딱 잡아보십시오.

 

그래서 다른 거는 일단 다 놓친다고 치고 그거 만약에 성냄이 있다, 오늘만큼은 이 성냄은 반드시 내가 알아차려서 일어나지 않게끔 한다, 딱 일어나자마자 멈추겠다 하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됩니다, 가장 위험한 것부터 먼저 멈출려고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어! 성냄이네’ 하고 알아차리고, 이걸 멈출 방법은 아직은 없기 때문에 그냥 다른 거 하라는 거라. 성냄이 사람으로 인해가지고 성냄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사람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이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거라. 성냄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먼저 멈출 수 있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리고 뒤에 생각해도 돼.

 

그다음에 그런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이 확대될 수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그것들이 생각을 일으키게끔 하는 것으로 바뀌지 않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성내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저사람이 뭔 말을 해서 내가 성이 탁 났다, 그게 성냄으로 끝나면 좋은데 요게 자꾸 발전을 하는 거라. ‘니가 옛날에 뭐 어쨌는데 왜 내한테 말을 하느냐’ 망상이 자꾸 확대되게 되는 거라. 그럼 성냄은 더욱 더 증폭되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망상이 결합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성냄은 성냄으로 그냥 그쳐야 되는데 망상이나 자아로 자꾸 결합이 됩니다. 그래서 망상이 결합되지 않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서 평상시 때는 어떻게 해야 되요?

자꾸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도록 온화한 생각을 자꾸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일어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생각이 자꾸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뭘 보더라도 나쁜 게 보이는 게 아니고 좋은 것이 자꾸 보이도록 만들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는 분명합니다. 부정적인 게 자꾸 눈에 뜨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삶은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으로 보여집니다. 좋은 삶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장 경계 해야 되는 것이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사고가 자꾸 일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욕구로부터 멀어지는 사고를 실천한다. 자비희사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지하는 오계의 이익을 반조한다. 오계를 지키면서 ‘아, 내가 계를 지키니까 참 좋구나’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자비희사에 근거해서 행동을 해본다.

 

이게 쉽게 말하면 일상생활에서 하는 바른사유, 바른언어, 바른행위, 바른생활 네 가지입니다.

평상시 때 이것들이 자꾸 훈련되도록 만들어야 만이 수행을 하더라도 잘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안 하더라도 이 네 가지가 돼나가면 적어도 팔정도를 수행을 통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실천하고 있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게 어느 정도 되고나면

망상을 정지하고 현실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관찰한다.

쓸데없는 망상을 삼가하고,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는 멈추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라 하는 것입니다.

밑에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입증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지 더러워지는지, 인격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도움이 되지 않는지 잘 조사해라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은 여기에서 한치도 어긋나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도 점점 더 악한 마음이 들고 악한 사람이 돼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잘못 배우고 있다는 겁니다. 점점 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쪽으로 마음이 움직여져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실행편에

악사고와 악행을 멈추고 선사고와 선행을 하도록 노력한다.

삼마와야마 바른 노력, 그렇게 되도록 억지로라도 혀를 깨물어서라도 막아야 됩니다. 악한 생각이 일어난다, 혀를 탁 깨물어서라도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끔 막아야 됩니다. 선한 것들이 일어나면 더 자꾸 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바른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바른 노력에 들어갑니다.

 

그다음에 정보는 접하는 대로 그대로 두고 사띠한다.

분석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내가 일으키는 반응으로서 여러분들 수행의 척도가 결정이 됩니다.

어떠한 정보를 접하든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거기에 대해서 바르게 반응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반응하는 것들이 기쁘고 슬프고 좋고 나쁘고 하는 폭이 자꾸 생겨버리면은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접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띠를 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사띠 할 것 같으면 있는 그대로만 그냥 알아차립니다.

말하고 있다, 그러면 ‘소리 들린다’고만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저사람이 나쁜말을 하고 있다고 알아차려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은 들리는 것으로만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들리고 보고 맛보고 하는 것들만 육감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지 나머지 ‘아름답네, 맛있네, 싫은 소리네’ 이렇게 들리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보는 여러분들한테 접할 때는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됩니다. 들리고 보고 맛보게끔 돼있습니다. 그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것을 사띠라고 하는 것이지, 대상에 대해서 좋고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사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다음에, 집중력을 키운다.

사띠가 되면 그다음에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그 사띠가 이어지도록 포커스를 거기에 딱 맞춰가지고 집중하는 힘들을 키워야 됩니다.

집중하는 힘을 키울려고 하면 가장 좋은 거는 손가락 두 개를 눈감고 이렇게 맞춰보라는 겁니다. 붙였다 뗐다, 붙였다 뗐다 하는 것,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손을 바닥에 대가지고 들어올렸다가 내려놓고, 들어올렸다가 내려놓고, 그리고 움직임을 봐도 되고, 느낌을 봐도 되고 아무데나 자기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만 하나만 딱 하면 됩니다. 그렇게 계속할 거 같으면 집중력은 커집니다.

집중력은 사띠의 힘이 커지면 집중하는 힘들도 커지게 되고, 집중하는 힘이 커지면은 사띠의 힘도 커지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해서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여기에서 스님이 바른 견해 부분을 적어놓았습니다.

바른 견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대상은 고정된, 변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알게 되는 거고,

그다음에 라고 하는 것이 착각이었다고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견해 속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무아가 드러나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해는 시작점이자 마지막 종착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게 사이클을 이루듯이 계속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팔정도를 그냥 일상 생활에서만 활용을 할려고 하지 말고, 수행에서 이 팔정도가 자꾸 드러나지게 될 때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말한 팔정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오늘은 여기를 끝으로 37보리분법에 대한 설명은 전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