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칠각지_사띠각지·택법각지·정진각지 (2022년 09월 24일)
칠각지 부분입니다. 일곱 부분이죠. 그래서 프린트물 분량이 좀 많습니다.
한국에 칠각지 부분에 대한 걸 좀 상세하게 기술해 놓은 게 잘 없어요. 그래서 일부러 스님이, 조금 프린트양이 조금씩 많다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겁니다. 대략 보니까 칠각지만 한 120페이지 정도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거는 좀 보다 쉽게 이해하고 수행하라는 의미에서 붙여놓은 사족이니까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칠각지가 무슨 뜻이죠? 무슨 의미에요?
칠은 알 거고, 일곱 가지라는 것은. (수행자 대답 :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그렇죠.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데, 보통은 '깨달음의 구성요소'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잘못된 겁니다. 「깨달음」 하고 「칠각지」 하고는 다른 부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강을 건너서 여기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징검다리가 일곱 개 있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징검다리 건너가고 나서는 저쪽 부분에 가서는 이 징검다리가 필요 없죠? 그런데 건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을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굳이 한국말로 표현을 하면
"깨달음이나 지혜가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게 빨리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대표적인 게 「망갈라」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망갈라는 보통 한국에서는 행복경, 행복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축복이나 행복 그런 것으로, 축복이나 행복은 '이미 이른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망갈라라는 의미는 '이른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 '마음을 가지는 것', '어떻게 노력을 해야 되느냐 하는 것 ', 그걸 망갈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축복이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내가 얼마만큼 부단하게 노력해서 그것을 갖추어야 되느냐 하는 것, 이걸 갖추는 걸 '망갈라'라고 얘기합니다."
그걸 한글로 표현하기가 참 애매한 요소들입니다. 「사띠」가 그렇죠?
「망갈라」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 단어들은 번역을 안 합니다. 그냥 그대로 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요소들이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차가 있어야 된다, 그러면 차를 얻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해가지고 차를 얻는 과정들까지가 망갈라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차를 탁 얻고 나니까 나는 행복한 거라. 이게 망갈라의 의미가 되는 형태와 마찬가지로,
여기 「칠각지」 부분도 잘못 이해를 하면 깨달음을 이른 사람들한테는 이게 존재를 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건 아닙니다.
'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가지고 이런이런 과정들을 밟아야 된다' 하는 그런 의미로서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뭐가 있을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일곱 가지가 나열되어 있죠!
첫 번째가 뭡니까? 염각지-사띠삼보장가가 있고, 택법, 정진, 희각지, 경안각지, 정각지, 사각지 이렇게 일곱 가지입니다.
아까 강을 건널 때 일곱 징검다리가 있다고 했는데, 뛰어넘어가지고 갈 수 있을까요? 뭐 키 큰 사람들이나 아니면 점프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가능하겠지만, 수행에서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첫 번째 각지가 오랜 동안 해서 어느 정도 영글고 나서 두 번째 각지가 나타나게 되는 거고, 두 번째 각지가 영글어졌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각지하고 두 번째 각지가 같이 작용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익어져서 영글어져야 세 번째 각지가 일어나집니다. 그런 형태들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걸 보통 알기 쉽게 로켓에 많이 비유를 합니다.
로켓 추진체 1단 2단 3단 있죠. 가기 위해서는 1단이 떨어져나가야 그다음에 2단을 분리하기 위해서 준비가 되고, 그다음에 2단이 떨어지고, 그다음에 3단 4단 이런 식으로 가집니다. 그렇게 되는 거지, 한번에 1단에서 2단을 뛰어넘어서 3단으로 갈 수 있는 법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잘 될 경우에는 이렇게 단계적으로 착착 밟아가면 참 좋은데, 대부분은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해야 돼?
그냥 나는 사각지에서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만 있고 싶은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 1단부터 저 6단까지 다 할려니까 너무 힘들거든. 그래서 이걸 그냥 무시해버리고 7단만 탁 해가지고 항상 외부적인 자극이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극이든 그런데 반응하지 않고 항상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싶은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답이 있는 사람? 있어요? 답 없어요? 그러면 그거는 답이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1단계하고 2단계의 차이는,
1단계는 열심히 대상을 사띠하는 것들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 잘 무르익고 나면 ‘어, 손을 드는 것들은 들어올린다는 것은 신체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그래서 손을 들 때 신체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같은 것이 아니구나. 분리되어있구나’ 하고 아는 상태가 되면 그게 2단계는 어느 정도 들어선 겁니다.
그러면 사띠가 무르익어가지고 영글어야만이 2단계가 탁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그게 안 될 때는 어떻게 할까? 2단계로 바로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막 생각을 굴려가지고 ‘어, 그래. 이거는 손을 드는 거는 신체적인 현상이지’ ‘든다고 아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지’ 이해는 하죠? 이해는 하는데 실제 그것이 수행에서 구분이 되어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잘 안 될 때 이걸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사띠를 아무리 해도 잘 안된단 말이라. 자연스럽게 해서 자동적으로 돼야 2단계로 넘어가지는데, 그거는 안 되는데 간혹 수행하다가 2단계가 될 때가 있습니다. 사띠가 안 무르익었는데도 이게 구분이 되어진다고.
배를 보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불러오는데 ‘어!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으로 구분이 되어진다’
그리고 배가 불러오는 걸 관찰하고 있었는데 뭔 소리가 들리는데, 전혀 마음이 거기에 안 가고 여기에만 있고, 그거는 어렴풋이 그냥 뭔소리인지도 모르게끔 하고 있다, 그것도 택법각지에는 해당이 들어갑니다.
가끔씩 그렇게 될 때들이 있습니다. 아직 사띠가 완전하지도 않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과연 일곱 단계중에서 어느까지가 가능할까?
또는 수행이 잘 안되는데 ‘나는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거야’ 하면서 정진각지를 강하게 낸단 말이라. 그래서 ‘절대 내가 이 한시간 동안 다리를 풀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노력하겠다’ 하는 마음을 강하게 내요.
그런데 실제로는 몸은 꼿꼿하게 있는데, 마음은 천방지축이고 사띠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되고 이렇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력이 없다고는 말은 못합니다. 노력은 하고 있는 거라. 그것도 노력의 일종에 들어갑니다.
과연 그 노력하는 마음이 처음에 했던 마음하고, 그다음에 지속되는 마음하고, 마지막에 그것을 받쳐주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남아있어가지고, 처음 마음이 백이면 중간에도 백이고 끝날 때도 백이 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될진 몰라도, 어쨌든 노력은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노력까지는 어느 정도 된다고 칩시다. 그래서 택법하고 노력까지는 어느 정도는 사띠가 잘 되는 안되든 간에 용을 써가지고는 병행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면,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가르칠 때 처음부터 수행을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계율에 대한 걸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설명이 되고 나서 계율을 잘지키는 걸 보고 잘 지키는 것이 좀 무르익어갔을 때, 그때 인제 수행에 대한 설명을 해줍니다.
그런데 현대 같이 바쁜 세상에 그거 다 무르익기를 기다릴 수가 없는 상황인 거라. 그래서 그냥 바로 수행을 그냥 바로 시킵니다. 그런데 하다가 보니까 계율을 어기기도 하고 그러거든.
그런데도 수행이 무르익으면 무르익을수록 어떻게 돼요? 계율을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이고 지켜나가게끔 됩니다. 어찌 보면 두 가지를 같이 병행하게 되는 거죠.
계(戒)와 정(定)을 병행해서 어느 정도는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혜(慧)까지 병행을 할 수 있을까? 안 되죠!
혜는 어떤 거라요? 자기가 경험한 것으로 해서 무르익었을 때 탁 튀어오르는 게 혜의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칠각지 부분에서도 정진각지는 어쨌든 사띠각지든 택법각지든 이걸 버무려갖고 억지로라도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뒤부터는 전부 경험으로 인해서 툭툭 튀어져나오는 것들이라는 거라. 기쁨이라든지 아니면 평안함이라든지 아니면 삼매에 빠진다든지, 이것은 자기가 체험해보지 않으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거라.
그래서 대부분은 보면 기쁨까지는 어느 정도는 가능해. 그런데 그 뒤부터는 영 다른 차원이 돼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은 수행할 때 어느 정도 수행을 해나가면서 ‘아, 진짜 수행이 잘 돼나간다’ 하고 기쁘는 상태가 되기도 하고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버리면 수행은 다시 원상태로 퇴보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상태를 딱 지나버리고 나면 그뒤부터는 거의 대부분은 자동적으로 이 단계가 끝나고나면 그다음 각지가 일어나지고, 그다음 각지가 일어나고 나면 또 그다음 각지가 일어나지고 하는 것들이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어나갈 때 그러는 방법들인데,
수행을 해보면 실제로는 첫 번째 각지에서 두 번째 각지로 넘어갔을 때 억지로 두 번째 각지를 하고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첫 번째 각지인 사띠가 안되면 두 번째 각지는 오래 못갑니다. 그거는 이해는 하기는 하는데 자기 것이 되지는 못하는 거라.
어린 아이들이 숟가락질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으면 떨어뜨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수행한다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쉬운 것은 아닌데, 많이 닦고 부단히 닦고 죽을 만큼 해야만이 겨우 한단계 뛰어넘었구나 하는 것을 이해를 하게끔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떡하나?
이 칠각지라는 것 자체가 깨달음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그랬잖아.
해탈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이걸 다 통과를 해도 아직 내가 아라한에 이르렀다 확신을 못하는 거라.
아라한에 이르는 것은 둘째치고 수다원에 이르는 것도 확신을 못해.
그런데 이걸 한단계 한단계씩 해서 다 뛰어넘지 않으면 해탈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뭘 어떻게 할 거라? 이걸 다 뛰어넘을 자신 있어요?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법문을 하다가 등이 너무 아픈 거라. 연세가 많기도 하고 하겠지만 아난다한테 “이 뒤에 법문은 아난다 네가 좀 해라. 나는 좀 쉬어야 되겠다”고 하면서 옆구리를 대고 눕습니다.
되도록이면 법문하는 걸 부처님 자신이 못하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을 시켜서 법문은 하게끔 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아난다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곱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그 요소들을 좀 읊어달라.” 하고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사띠삼보장가부터 쭉 읊어줍니다.
그런데 읊는 중간에 부처님이 탁 중지를 시킵니다.
어디서 중지를 시켰을까? 예? 여기 경전모임들 아닌가?
삐띠! 기쁨이 일어나는 데서 탁 부처님이 중지를 시킵니다.
실제적으로 이 칠각지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은 이걸 뛰어넘었지만은, 이미 뛰어넘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려가지고 요런 상태 요런 상태들을 끄집어낼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사띠면 내가 대상에 대해서 사띠를 하고, 택법각지면 분명하게 원인·결과에 대해서 알아차림하고, 이런 식으로 부처님이 아난다가 얘기할 때 밟아나갑니다. 그러다가 기쁨 부분에 탁 오니까 마음이 너무 기쁜 거라.
그래서 기쁨 부분에서 탁 멈추게 하고는 부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법문을 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칠각지를 하면 얻어지는 이익들이 참 많은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보통 몸의 질병들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다스려나가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속에 있는 질병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통증이라든지 아니면 속에 있는 위장장애라든지 이런 것들은 거의 다스려져나갑니다.
물론 뼈가 부러진 거 붙여주고 뭐 이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역할들을 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칠각지를 좀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칠각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사띠각지】
첫 번째 사띠죠! 사띠 어떻게 해야 될까?
무조건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려 나가야 됩니다.
어떤 대상이죠? 네 가지 대상 신·수·심·법입니다.
맨 첫 시간에 배웠던 것들입니다. 이 네 가지 대상에 대해서는 놓치면 안 돼!
지금 여러분들한테 뭐가 일어났어요?
몸이 안 움직이니까 몸에 대해서 관찰할 건 없죠! 그런데 호흡이 있으면 호흡은 관찰하는 게 가능하겠지.
그런데 여러분들한테 여러 가지 싫은 느낌이 일어났다, 그러면은 싫은 느낌을 관찰해야 되는 거라.
또는 마음에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럼 싫어하는 마음을 관찰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게 점점 강도가 세진다, 그러면 그 강도가 세지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관찰해야 되는 거라. (법)
신·수·심·법 중에서 어떤 것이 여러분들 관찰 대상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뭐로 가지고 표현해요? 지금 현재 뭐가 나타나느냐!
지금 현재 뭐가 탁 일어났느냐는 거라. 그 일어난 것들이 사띠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가만히 앉아서 법문도 안 듣고 수행하고 있을 것 같으면 일어나기 쉬운 게 몸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몸 중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대상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뭐가 있어요? 호흡이니까 호흡을 관찰하는 거죠.
그런데 호흡을 관찰하다가 막 망상이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망상에 대해서 관찰해야 됩니다. 그럼 법에 대한 관찰이 되는 거라.
뭔가를 움직이면서 뭘 잡고 한다,
아니면 지금 같이 스님 법문을 듣고 있다, 그러면 뭐가 대상이 되어야 돼요? 소리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느낌이 여러분들의 관찰 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배가 아니고 또는 망상이나 생각들이 아니고, 그걸 기억할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소리 들리는 것에 마음을 집중해서 사띠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해야 되는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딱 이 4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것을 사띠하는데 어떻게 사띠하느냐는 거라.
소리 들린다 했죠? 소리 들릴 때 어떻게 관찰해야 돼요? 소리 들리는 것은 뭘 통해서 들어옵니까? 귀를 통해서 들어오죠. 눈이나 코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없습니다, 소리는. 눈이나 코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귀에다 두어야 됩니다. 마음을 말하고 있는 스님한테 둘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마음이 밖을 향해버립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의 몸과 마음입니다. 밖에 있는 스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마음을 자꾸 밖에다 둘려고 할 것 같으면 자꾸 망상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얼마만큼 떨어져서 하든 그거는 관심이 없어야 되는 거라. 들리는 것만 관찰해야 됩니다. 그러면 마음을 귀에다 두어야 됩니다. 귀에 두면서 ‘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사띠가 조금 강한 사람들은 ‘들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면 그 소리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집중하는 힘이나 사띠하는 힘이 약하면 어떻게 돼요? 그 소리 들리는 게 완전하게 다 들리질 않습니다.
또는 그 들리는 것에 「나」라고 하는 것이 딱 개입이 되면서 내 나름대로 그걸 듣게 되는 거라.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을 하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A라고 얘기했는데도 듣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B나 C나 D로 이해를하게끔 되는 거라. 그럼 B, C, D는 사띠 안 한 겁니까?
사띠는 했기는 했는데, 사띠가 연속하지 않은 거죠.
사띠가 연속하지 않았으니까 자꾸 끊어지고 자기가 그 중간에 자기 생각이나 여러 가지들이 들어가게 되니까 분명하게 이해하지도 못하게 되는 거라.
그럼 사띠가 되기 위해서는 뭘 해야 돼요?
경전에 항상 보면 '사띠 삼빠자나'라고 나옵니다.
'사띠'하고 '삼빠자나'는 쌍으로 일어나야만이 정확하게 사띠가 이어지게끔 되는 거라.
마음을 그렇게 먹지 않으면 안 돼요. 스님이 만약에 여기서 삼십분 법문을 한다.
‘그 삼십분 동안은 오롯이 그 삼십분 동안은 완전히 다 듣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처음부터 해서 중간, 마지막까지 완전하게 다 듣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이 삼십분이 다 안 들린다는 거라.
강하게 딱 마음을 내가지고 연속해가지고 이걸 전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겠다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사띠는 이어지게 됩니다!!!
그게 이어지는 게 '삼빠자나'와 같이 되기 때문에 삼빠자나를 '완전한 이해'라고 보통 번역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완전한 이해, 완전한 앎이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냥 사띠만 있을 거 같으면 그냥 자꾸 끊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 대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기울여가지고 알아차리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걸 붙잡을려고는 하지 말고.
그게 사띠가 무르익게 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마치고 나서 저녁 드시러 갑니까? 술 드시러 가시는 분도 있죠. 만날 법회 마치고 나면 술 잡수러 가고 이런 패턴만 계속 가지면 결국은 그 패턴 쪽으로만 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고 나서 배고프니까 밥을 먹기는 해야 되겠고, 다른 사람들이 술 먹으니까 그 자리는 참석을 해야 되겠고, 그리하더라도 ‘나는 사띠를 가지고 그 자리에 있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가능합니다.
그 자리에 참석을 하면서도 나는 밥 먹을 때 밥을 먹으면서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고. 그 자리에 앉아서 내가 술을 먹으면 정신이 흐리멍텅해질 거 같으니까 아예 술을 안 먹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그냥 끝까지 듣고 있고, 그럴 것 같으면 가능합니다. 그런 상태가 된 사람들은 저녁에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자리에 참석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가지 말아야 됩니다.
사띠가 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자리들은 피해야 됩니다.
그걸 경전에서는 "사띠가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사띠가 없는 사람들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친하게 지내지 말아라 하는 것은 적을 만들고 담을 쌓아라 하는 얘기가 아니고, 그리하면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하더라도 나는 그 자리에서 사띠를 하면서 마음을 지켜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사띠의 대상은 뭐라고 그랬죠? 신수심법이라고 했습니다.
요거 하나라도 놓치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4종류의 사띠가 있는 곳에 칠각지가 이루어진다." 칠각지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4종류의 신수심법이라고 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사띠를 하면 칠각지는 저절로 일어나진다는 거라.
사념처 어떠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아라.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것이든 놓치지 않고 사띠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쉬울 것 같지는 않죠? 그런데 어떡하나? 첫 번째 단계가 어느 정도 돼야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지는 게 자연스러워지는데 이거 놓쳐버리면 안 되는데 어떡할 거라! 어려워진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이 4가지를 놓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사띠할 때 좀 깊이 들어갈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걸어간다 그러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이렇게만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 누가 모르나? 왼발이면 왼발인 줄 알고, 오른발이면 오른발인 줄 아는데. 그런데 사띠가 그렇게 약해가지고 뭐 되겠어요? 물론 잡념 생기는 것은 조금 덜해지기도 하고 실수하는 것들은 조금 줄어들고는 하겠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왼발인 줄 알고, 오른발인 줄 알고 하는 것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른다? 그거는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그거는 수행 안 하는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라. 쉽게 얘기하면.
그러면 좀더 깊게 들어가야 된다는 거라. 왼발이면 왼발인 줄 알 거 같으면, 왼발이 처음부터 들어올려지는 것하고, 나아가는 것하고, 내려놓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되는 거라. 오른발이 들어올려지고, 나아가고, 내려놓으면 그것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러면 왼발이 들어올려질 때 오른발은 알아야 돼요, 몰라야 돼요? 전혀 몰라야 됩니다! 왜? 현재 지금 머물르기 때문에!
그러면 깊게 들어가면 오롯이 지금 현재는 발이 들어올려지는 것만 있고, 나아가는 것만 있고, 내려놓는 것만 있는 거라. 오른발이 어떻게 포지션을 가지고 있고 힘이 어느 쪽으롤 기울어져 있고 그걸 왜 신경 쓰는데? 뒤뚱뒤뚱 안 할려고? 좀 뒤뚱거리면 어때요? 그런데 깊이 들어가면 뒤뚱거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깊게 들어가야 됩니다.
시작하고 진행되고 끝나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다 알려고 깊게 들어가져야 되는 것이지, 깊게 들어가지지 않으면 사띠는 안 커집니다. 맨날 그 자리에서 왔다갔다만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수행하는 것이 재미없어지고 싫어지게 되고, 나태와 게으름 쪽으로 자꾸 빠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왼발 나아갈려고 하는데 갈려는 마음이 없으면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절대 발 한발짝도 못 움직입니다. 마음이 앞서가지고 몸이 움직여지는 것이지 몸 지 혼자서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서 가는 게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는 거라.
또 좀 더 깊게 들어가면 가고자 할 때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나서, 가고 나서, 발을 들어올릴 때도 ‘들어올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나서 발이 들어올려지고, 발을 들어올리는데도 중간중간에 다 다 끊어지면서 ‘그 중간중간에 다 의도들이 있구나’ 하는 걸 압니다. 그러면서 그 중간중간에 다 멈추는 부분이 눈에 보여집니다.
그걸 다 볼려고 하니까 너무 힘든 거라.
그래서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수행이 참 힘들다’ 하는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쉽네’ 하고 마음 먹을 거 같으면 그건 나태하고 게으름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띠를 할 때는 깊이 있게 자꾸 들어가야 됩니다. 깊이 있게.
적어도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사띠 삼보장가는 어느정도 이해를 하게끔 되고, 그러고 나서는 더욱더 계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게 무르익어져야 됩니다.
언제까지 무르익어질까? 지금은 억지로 하고 있잖아 사띠를.
그런데 사띠가 그렇게 용을 안 써도 사띠가 되어나갈 때! 그래서 사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딱 될 때까지는 그렇게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사띠가 자연스럽게 무르익어지는 상태가 될 때까지는 계속적으로 그렇게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 다른 거는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데 사띠 하나만큼은 제대로 하라는 거라. 그것만 할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른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사띠하는 것들을 자꾸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자연스럽게 사띠가 일어나지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택법각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원인·결과를 알 수가 있게 되는 거라.
택법각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집니다.
내가 택법각지를 알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나가 집니다.
택법(擇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기 쉬운 부분이 뭐냐면, 법을 선택한다는 그런 뜻이죠? 뭘 선택해요, 법을?
담마위짜야, '담마'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뭘 얘기합니까? 가르침이 있든 없든 간에 그냥 법칙입니다. 자연스러운 법칙. 태어났으면 죽게 돼있는 거고, 숨을 들이쉬었으면 내쉬게 돼있는 거고, 여름이 지나고 나면 가을이 오는 거고, 이게 담마입니다. 자연스러운 법칙입니다.
그걸 자연스러운 법칙이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위짜야' 한다는 거라.
‘여름이 지났으니까 가을이 왔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게 택법입니다.
뭘 선택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원인 결과로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
아까도 얘기했죠? 마음이 움직일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 몸이 움직인다는 것, 원인 결과입니다. 그런데 원인 결과를 알기는 아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원인 결과를 알기는 아는데 내 옆에 가만히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랍니다.
왜? 무상한 걸 싫어하게 되는 거라. 변하는 걸 싫어한다는 거라. 행복이 왔으면 행복이 가만히 내 옆에 있어주기를 바랍니다. 돈이 생겼으면 돈이 그냥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무상의 법칙을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은
원인·결과를 아는 것도 물론 포함이 되지만, 그것이 변한다고 해가지고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도 택법각지에 해당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에서 어느 정도 무상하다는 성품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 택법각지는 무르익어간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르익지 않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나라는 것을 내세우게 되고, 그리고 변하지 않고 좋은 것은 내 옆에 있고 나쁜 것은 없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가 무르익어지면 어떻게 될까?
남하고 다투는 것이 많이 없어지겠죠! 거의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 남하고 다투는 것은 뭐 때문에 다퉈요? 견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너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든지. 그런데 싫어한다는 마음이 일어난 것도 무상한 성품인 거고, 견해도 무상한 성품입니다. 그것이 영원하고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다툽니다.
견해를 가지지 않고, 완전하게 가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견해를 가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래, 내가 그거는 이해하겠다’ 하고 받아들이면서 그걸 다시 ‘왜 그럴까?’ 하고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너 틀렸어!” “너 이렇게 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택법각지가 되면 그렇게 마음을 기울여가지고 뭘 해야 될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그냥 편안하게 대상들이 보여집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때부터 수행은 약간 재미가 있어지려고 그럽니다.
【정진각지】
그게 재미가 있어지면은 그다음에 어떻게 할려고 그래요? 더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게 됩니다.
정진각지로 넘어가지면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서 스톱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정진각지까지 넘어가면 용을 쓰든 아니면 자연스럽게 노력하는 마음이 있든 수행이 잘 되거든.
대상이 원인·결과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몸과 마음에 대해서 구분이 가능하고, 즉각즉각 알아차려지고, 즉각즉각 변하는 것이 보여지고, 집착할만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잘 돼나갑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무상이 깨달음입니까? 아닌데도 사람들은 여기서 착각을 하는 거라.
노력이 돼나가면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내가 인제 조금만 더 해나가면 되겠다 하는 자신감들도 생기고, 그리고 나를 내세우는 것들도 없어지고, 무상한 성품들도 이해를 하게끔 되고 하니까, 계속 수행을 해나가긴 해나가는데 진척이 없어지는 거라.
그래서 늪에 빠진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칠각지의 첫 번째 늪에 빠지는 것이 여기서 딱 빠집니다.
그뒤부터는 수행의 진척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본인 생각에는 수행이 엄청 잘되는 것처럼 이해를 하게 됩니다. 잘되고는 있죠. 분명히 구분이 가능하고 잘 돼나가고 있고 다 사띠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칠각지가 깨달음이다, 아니다? 아닙니다!
착각을 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지나가는 징검다리인 것이지 이것들이 깨달음하고 니꼬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직 정진각지 뒤에 남아있는 게 4개나 더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 여기서 여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여기에 허우적거리면 대부분 스승들은, 스님도 그렇게 당했습니다.
아주 혹독하게 교육을 시킵니다. 조그만한 실수도 조그만한 것도 용납을 안 합니다.
쉽게 말하면 탁발을 가는데 이렇게 쭉 걸어간단 말입니다. 분명히 사띠를 하면서 내가 저쪽도 보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가고 있는데 앞에서 뭐라 합니다. “어딜 보느냐!” 걸어가면서는 걸어가면서 분명히 사띠를 하기도 벅찬데 왜 딴데 보느냐는 거라. 나는 딴데 볼 때 분명히 사띠를 했는데! 그런데 그게 필요한 거라? 걸어갈 때?
사실은 필요 없는 건데도, 사띠를 했기는 했는데 필요 없는 것들을 하고 있는 거라. 조그만한 실수도 용납을 안 할려고 그럽니다.
스님이 가사(대가사)를 이렇게 입었죠! 이게 만약에 어느 순간에 이렇게 하다가 보면 내려오는 수가 있습니다. 왜 그걸 못 알아차리느냐는 거라. 이거 별 거 아닙니다. 다시 또 올리면 됩니다. 그런데 이게 큰 천이기 때문에 이게 잘 내려와요.
그런데 되게 뭐라 합니다. 사띠가 끊어지지 않고는 있는데, 왜 이 사소한 것 하나도 내려오는 것들을 빠르게 알아차려가지고 바로 잡지를 못했느냐는 거라. 내려오기 전에 잡지 못했느냐는 거라.
그래서 정진각지에서 수행이 자꾸 멈추는 사람들은, 대상을 자꾸 알아차려지기는 하는데 삼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또는 신통력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또는 도와 과에 이르지도 못하는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 그러면 그거는 스승한테 가야 됩니다.
아주 따끔하게 혼나가지고 지속적으로 옆에서 관찰을 해야만이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기가 수월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안 갈려고 그럽니다 스승한테.
재밌거든, 지금 수행이. 자기 딴에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느 정도 기쁨도 일어나고 행복도 일어나지고 평안하고 고요한 상태도 경험되어지고 이럽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흘려버리면서도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거라.
이게 오늘 칠각지 중에 세 각지를 대략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사띠하라!!!
대상 자체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변해가는 것들을 볼려고 노력을 하라.
그렇게 해야만이 택법도 일어나지고 정진각지도 일어나지게 됩니다.
정진각지가 일어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판도가 달라집니다.
그냥 사띠만, 무조건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해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지속적으로 자꾸 그렇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띠를 하면 아까 병 같은 것도 어느 정도 고쳐진다고 얘기했지만, 가장 좋은 이익은 탐·진·치가 없어집니다. 탐진치 없이 그래도 평온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탐·진·치가 일어나면 얼마나 싫고 끈적거리는지 압니까? 그냥 좋죠? 맛있는 거 있으면 맛있게 먹고 ‘음, 배불러’ ‘아이 좋아’ 그렇게만 살면 안 됩니다. 그 위험성을 ‘아, 진짜 이것이 싫은 거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게끔 자꾸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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