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감정이 소용돌이 칠 때 감정을 잠재우고 끊어내야 되는 이유와 방법 (20221119)

담마마-마까 2022. 11. 21. 13:26

https://youtu.be/dF1ahYJJtqs

* 감정이 소용돌이 칠 때 감정을 잠재우고 끊어내야 되는 이유와 방법 (20221119)

 

오늘은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아시는 분 두 분이 “스님! 공양 한번 올리겠습니다. 수행하는 것도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공양올리겠습니다.” 그래서 “그럽시다.” 한 다음에 공양청을 갔어요.

그런데 그날 공양을 하면서 내내 뭔가를 말을 하는 거라. 공양이 끝나고 나서 장소까지 옮겨가면서 어디 차 마시는데 가서 얘기를 하자는 거라. 도저히 나는 피곤하고 시간도 안 되기 때문에 가겠다 하고 그러고 왔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 거 좋아할까요?

그런데 공양하면서 얘기하는 것에 수행에 관한 거는 거의 없어. 그냥 주변 얘기들 내내 얘기하고 첫마디가 “스님! 오늘 많이 춥지요?” 뭐 그거부터 해가지고, 그럼 추우면 어떡할 거야? 그건 내가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따뜻하게 입고 나가는 것뿐인데.

그래서 한참 얘기할 때 얼굴을 그냥 빤히 봤어. 계속 보고 있으니까 말을 안 하고 밥 먹는데 집중하더라고. 그러더니 얼마 못 가. 다시 또 뭔가를 말을 하는 거라.

 

그분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사람들은 뭔가를 계속 말을 할려고 그럽니다.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뭔가로 인해서 표출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된다는 거라. 그래서 뭔가를 말을 자꾸 할려고 그럽니다. 그게 쓸데없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말을 할려고 그럽니다.

 

말을 안 하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할까? 요즘 보면 사람들 앉아서 가만히 있는걸 못 봅니다. 뭔가 합니다. 까똑 까똑 까똑, 뭐라고 그래요? 페이스북이라고 그러나? 그리고 유튜브 이렇게 보고, 그거 안 하면 뭔가 좀 불안한 모양이라. 스님은 일체 카톡인지 페이스북인지 이런 거 자체를 안 하니까 그런 거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계속합니다.

그래서 문자 보내고, 어떨 때는 스님한테도 카톡이 없으니까 그냥 일반 문자로 문자 보냅니다. 그러면 스님이 내내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한참 있다가 어떨 때는 답변을 하는 때도 있는데, 답변 할려고 보면 문자가 와있는데 앞에 보낸 문자가 지워질 정도로 거기에 '스님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면 스님 어디 바쁜 일 있습니까? 왜 문자를 안 하십니까?' 하는 얘기가 쭉 적혀져 있어요. 그사이 한 시간 두 시간을 문자를 보내고 나서 답장을 바로 안 해주면 불안해가지고 뭔가를 또 보내야 되는 거라.

 

계속적으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문자를 보냈으면 반드시 답장을 받아야 되는 모양이라. 문자로.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가족 중에 누군가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그러면 '나는 다이어트 하고 있으니까 너희들도 먹지마' 이렇게 하면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이치에 안 맞죠? 그거는.

 

그런데 그 얘기는 뭐냐면 반드시 답장이 와야 된다 하는 그거는 어떤 얘기냐면,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을 때에는 특히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 그다음에 부지런히 뭔가를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속에는 반드시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이 "나하고 동등하다, 나는 더 우수하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열등하다" 세 가지 만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거기에 또아리를 틀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문자 보냈는데 왜 너는 답장을 안 하느냐는 거라. 내가 뭔가를 말을 하면 나만 말을 해야 되는 게 아니고 너도 반드시 뭔가를 말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감정이 소용돌이 칠 때는 감정을 잠재워야 되는데, 거기에다가 감정에다 를 더 자꾸 덧씌워가지고 더 증폭을 시키는 거라.

 

우리 선원에 보면 「그대는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가?」 라고 적어놨습니다. 내가 여러분들한테 물어봅니다.

그럼 자네한테 「그대는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가?」 하고 물어봤어요. 뭐라고 답을 할 거라?

(수행자 대답 : 알아차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알아차리는데?

(수행자 대답 :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이라고 지칭했으니까 너겠지. "너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했을 때 "나는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알아차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럴 거 같으면 이미 그건 틀려버린거라. 그 속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러면 너는 누가 알아차리고 있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 거라, 스님한테. 너의 마음이 알아차리고 있는지 아니면 그때그때의 사띠가 뭔가를 알아차리는 건지, 아니면 너의 느낌을 그걸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건지, 뭘 알아차리고 있느냐, 누가 알아차리고 있느냐 부터 먼저 물어봐야 되는 것이 맞는 거라.

그냥 단순하게 '나는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알아차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럴 거 같으면 이미 거기에는 내가 말을 했을 때 너도 거기에 개념을 씌워가지고 「나」라고 하는 데다가 개념을 씌워가지고 답을 하고 있는 거라.

 

개념을 씌우지 않고 그냥 "그대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하고 물어봤는데 나라고 하는 것을 대상으로 해가지고 네가 답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이미 틀려버린거라.

물어볼 때도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봐야 되는 것이 맞는 것이고, 그러면 답을 할 때도 "순간순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알아차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고 얘기를 해야 되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말을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실재하는 거하고는 관계없이 개념화돼버린다는 거라.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개념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감정이 들어가고, 라고 하는 것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거기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나를 강화시켜주는 것이고 오히려 감정들을 더 소용돌이 치게끔 만들어주는 것밖에는 없다는 거라.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그런 쓸데없는 말이라도 해야 좀 스트레스가 풀리지 안 그러고 스님같이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우리는 속이 터져 죽을 겁니다" 이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속이 터져 죽는지 안 죽는지는 그렇게 살아봐 보면 아는데. 그런데 스님은 아직 속이 안 터졌는데.

 

그래서 말을 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되고, 말을 들을 때도 그런 것들이 쓸데없는 얘기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끊을 줄 알아야 됩니다.

끊을 줄 모르면 나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버립니다.

그러한 감정에 나도 휘말려 들어가서 나도 마찬가지로 그 감정에 따라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인제 그만해!” 하고 말을 하기에는 좀 힘이 든다 할 것 같으면, 스님같이 눈만 가만히 보라고. 그러고 나서 뭔가를 하고 있으면, 공양을 하고 있으면 공양하고 나서 얘기합시다하든지.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해가면서 그것들을 멈출 수 있는 노력들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같이 휘말려 들어가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자애를 지닌 채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생각하라.

자애를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기의 개념이나 자기의 주관으로 상대방에게 말을 하거나 행동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되도록이면 그런 자리는 안 만드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스님도 누가 공양청이 있다고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안 갈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수행에 대해서 질문할 게 있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나갔다가, 수행에 대한 질문은 요만큼도 받아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그냥 공양만 하고 그 사람들에게 뭔가 법을 전해주지도 못하고 그냥 온 경우가 됩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말을 할 때 거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방향으로 얘기를 하고,

말을 들을 때도 자신의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듣기만 하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은 것이, 말을 할 때 대부분 감정에 휩싸이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중구난방으로 합니다. 그냥 감정에 따라서 탐진치에 따라서 그냥 말을 하게끔 됩니다.

본인의 말을 할 때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든 논리적인 것들을 반드시 정립을 해야 되고 요구를 해야 됩니다.

 

두 번째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남을 험담할 때든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을 할 때든 대부분은 그냥 들은 얘기 그것으로 얘기를 하지 자신이 그것들을 체험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증거가 있어서 그것들을 얘기하는 경우들이 드뭅니다. 본인은 반드시 그런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면 말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말하는 것에서 주관적인지 감정적인지 감상에 빠져서 얘기하는지를 잘 체크해야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어떤 것이든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이비설신의를 통해가지고 색성향미촉법이 접하더라도 자신의 범위 내에서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체의 인식 범위 내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밥을 먹더라도 내가 먹는 밥의 느낌과 개가 먹는 밥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똑같다고 자꾸 인식을 합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내가 말하는 것들이 주관적일 때는 그것이 맞다고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특히 감정에 쌓였을 때나, 아니면 감상적으로 빠졌을 때는 더 하게 됩니다. 그런 주관적인 것이. 그런 것들을 잘 체크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안 빠질려면 말을 할 때는 항상 내가 자애를 지닌 채 말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체크를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도 자애를 지닌 채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체크해서 톤다운 시키든지, 다른 방법으로 유도를 하든지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뭔가를 서로 대화를 했으면 그것이 도움이 되어야 될 거 아니라. 아, 행복한 마음이 많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내가 선한 일들을 많이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굳어지든지, 아니면 수행하는데 뭔가 도움이 되든지 돼야 되는 것이지, 도움이 되지 않고 그냥 그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들이 뭐 해가지고 하는 말일 거 같으면 그건 안 하는 것이 낫다는 거라. 일주일 내내 말을 안 하고 살아도 심장이 터져서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편안합니다.

 

생각이 멈추는 것들이 수행에는 최고 좋은 방법입니다.

얼마만큼 망상이 많이 일어나고 얼마만큼 생각이 많이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수행의 깊이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망상하고 생각하는 것은 없어져버립니다. 단지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들만 사띠하는 것밖에 안 남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이게 지금 얘기하는 것이 꼭 필요한 건지를 자꾸 체크해보라는 거라. 지금 필요한 건지.

그게 아무리 사적인 얘기라고 하더라도 그게 지금 당장 그것이 필요한 건지. 가족들하고 얘기할 때는 대부분 앞으로 미래에 대해서 얘기하기 바쁩니다. 그런데 미래는 지금 눈앞에 있는 다음 순간도 내가 보장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인데, 그 먼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할 거라? 차라리 그래도 미래에 대한 계획 세우고 하는 것은 조금 낫다고 치자.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지난 얘기들 아니면 쓸데없는 일들을 가지고 대부분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라. 그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고 내가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서 사띠하는 것인데 그걸 자꾸 놓친다는 거라. 말을 하면서, 말을 들으면서.

 

차라리 들을 때는 지금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 경우에는 그냥 사띠를 하라는 거라.

듣는 것으로서 사띠를 하라는 거라.

귀에다가 마음을 기울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마음을 기울이든지,

그것조차도 정 안될 거 같으면 말은 들리든 안 들리든 괘념치 말고 그냥 호흡을 사띠하면 됩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가지고 말을 하면서 자꾸 망상을 많이 하고 생각이 많아지고 하는 것들을 자꾸 피할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생각의 정도에 따라서 수행의 정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되도록이면 말을 많이 하는 습관들을 가지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현재 현재를 자꾸 사띠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3년 3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