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슬프다는 감정은 악한 감정이다. (20220917)

담마마-마까 2022. 10. 19. 15:59

https://youtu.be/NCzvGA4YsBQ

* 슬프다는 감정은 악한 감정이다. (20220917)

(7:58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오랫만에 누군가한테 전화가 왔어요. 그러면서 전화번호가 안 바뀌어가지고 다행이라면서 전화를 하는데 그냥 전화하자마자 막 울어. 뭔 말인지를 못 알아들을 정도로 막 우는데 대충 추측해보니까 자기하고 가장 친한 사람이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그렇게 아마 울은 것 같애. 여러 가지 얘기들을, 뭐 어떻게 돌아가셨고 뭐 어떻고 하는 얘기를 쭉 하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애요. 그래서 그냥 그 얘기만 들어주고 나니 조금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는지 차분하게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 스님이 그렇게 얘기를 한 게 있습니다.

 

"슬프다는 감정을 가지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지만 슬프다는 감정도 악감정입니다. 죽은 사람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다른 사람 다른 조건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악감정을 가지게 되면 그 과보는 내가 받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받는 것은 아니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주변에 그런 일이 닥치면 특히 가족들이 돌아가시거나 하면 많이 슬퍼들 합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 머릿속에 딱 기억을 해두십시요.

"슬프다는 감정은 악감정이고 그 과보는 내가 받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악한 것들을 지었으니까 악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그거는 잊어버리지 말도록 해야 됩니다.

 

하긴 뭐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도 아난다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도 슬퍼가지고 구석에 가서 울고, 대놓고 울고, 하늘 보고 꺼이꺼이 하고 이런 스님들도 많았습니다. 재가자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데 그중에서 평온함을 유지한 사람들도 있었죠? 누구죠? 아라한들이죠.

아라한들은 평온함을 유지하면서 "아, 저렇게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도 무상한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저렇게 열반에 드시는구나." 하고 그걸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고 나면 어떻게 할까? 울 일이 없죠! 슬프다는 감정은 어떤 것들이에요? 내가 그걸 수용, 용납을 못하기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슬퍼서 우는 거라.

 

그렇게 아라한들은 무상한 성품을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부처님도 저렇게 무상한 성품의 속성에 따라서 열반에 드셨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다음에 해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깟사빠존자로부터 해가지고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되고, 사람들을 어떻게 맞아야 되고 하면서 잘하고, 이렇게 훌륭한 부처님 가르침을 오래도록 후세에 전하도록 해야 되겠다 해서 결집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아라한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 불교를 접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아라한들이 아닌 분들이 계셨으면 지금보다 또 다른 불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슬프다는 감정은 악감정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악한 일도 짓고 선한 일도 짓고 하죠? 살아가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악한 것들을 짓는 것들이 과보로써 드러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건 굉장히 위험합니다.

단순하게 예를 들면, 화가 나서 죽겠는데 마음에서 꼭 눌러 참아가지고 내가 삼켜버리면 별문제는 없어지는데, 화가 나고 죽겠는 걸 밖으로 표출해버리면 누구에게 나쁜 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다툼이 있다든지 그러면 다른 결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슬플 때는 슬픔을 가지지 말아라는 것이 아니고, 그걸 잘 이용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데 좋은 방편으로 삼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기대하는 만큼 되지 않고, 또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가질 수 없게 되고 이렇게 되면 마음에서는 일단은 싫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싫은 것이 탁 일어나면 그것에 따라서 마음에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생겨납니다. 싫으니까 멀리하려고 하고, 싫으니까 분노하게 되는 거고, 싫으니까 뭔가 또 다른 것들을 움켜쥘려고 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싫으니까 내가 슬픔이 일어나는 겁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슬프다는 것은 성냄의 일종으로 분노입니다.

분노하기 때문에 슬픔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좋고 싫은 느낌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면 좋은 것들은 움켜쥘려고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좋고 싫은 것이 일어나면 일단은 수행대상에서 딱 스톱을 하고 좋고 싫은 마음을 먼저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걸 다스리기 전에는, 어떤 경우든지 수행대상에서 좋고 싫은 마음들이 일어난 상태에서 관찰을 하게 되면 왜곡되게 됩니다.

 

조금 전 같이 분노가 일어나서 슬프다는 감정에 빠지기도 하는 거고 또 다른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감각적인 욕망 부분도 좋고 싫음으로 인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탐욕, 분노 그다음에 게으름 같은 것도 좋고 싫음으로부터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항상 좋고 싫은 것들로부터 떠난 상태에서 수행대상을 관찰해야만이 수행이 잘 돼나가지는 것이지, 좋고 싫음이 있는 상태에서 수행을 해나가면 안됩니다.

 

싫다는 마음은 기대하는 것이 어긋났을 때 일어나는 바이러스입니다.

그랬을 때 일어나는 마음들은 보통 크게 말해서 도사(dosa)라고 하는 분노입니다. 그 분노는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잇사(issā)라고 하는 질투, 그것은 뭐냐면 싫기 때문에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을 못보겠고 행복한 꼴을 못보기 때문에 싫은 마음들이 일어나서 그것들에 대해서 질투를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밋차리야(micchariya)라고 해서 보통 인색함이라고 그러는데, 인색한 겁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할 때 내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라. 나눠주면 어떻게 해요? 아쉬워합니다. 내 것을 뺏겼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아쉬워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바르게 잘 작용해가지고 바르게 크게 좋게 쓰여지면은 내가 기뻐해야 되는 것인데 오히려 나는 그걸 아쉬워하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아비담마에서 얘기하는 싫다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후회하는 것, 꾹꿋짜(kukkucca)라 해가지고 자기가 옛날에 했던 것들에 대해서 후회하게 되는 것들, '아, 내가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고 후회하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보통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얘기하는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아비담마에는 분류가 돼있지 않은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분노의 일종입니다.

슬퍼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들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슬픈 거라. 그거는 자기 자신에게 분노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슬픔으로 바뀌는 것들이라.

 

수행에서 참 많이 경계해야 될 것들이 이런 부분들입니다.

보통 수행에서 수행대상을 알아차리면서 뭔가 대상이 잘 관찰이 안 될 때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냅니다.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그것이 지속되면 그만 수행을 포기를 해버리게 되는 거라.

또는 수행이 잘 돼나갈 때는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는 거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니까 자기가 그것들을 조종을 할려고 합니다. 자기의 의도대로 그 대상을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수행에서는 적입니다.

 

수행이 잘 안 돼나갈 때는 내가 왜 수행이 잘 안 돼나가는가 하는 것들을 체크를 해야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를 일으키면 안됩니다.

분노를 일으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되고 그것은 슬픔의 일종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또 수행을 포기하게 되는 거고, 그게 습관이 될 거 같으면 수행 하자마자 인제는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 인해서 게으름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간만 떼우고 지나가게 되는 거라.

게으름 부리고 슬프다는 것들, 싫어하는 것들, 분노하는 것들 전부 다 악감정들입니다. 그것들이 일어나버리면 일단은 수행은 스톱 돼버린다는 거라.

 

수행이 잘돼나갈 때도 문제가 되지만 수행이 잘 안 돼나갈 때도 이렇게 자꾸 문제가 돼버립니다. 잘 돼나갈 때는 내가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부분이 없는지를 잘 살펴야 되는 거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내가 자꾸 집착하게 되는 거고, 기쁨이 일어나면 기쁨이 일어나는 대로, 선정에 들었으면 고요하고 즐거운 것들을 자꾸 집착할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것도 경계를 해야 되지만, 수행이 잘 안 돼나갈 때는 안 돼나가는 원인들을 잘 살펴야 되지 그것들을 방치해둬버린 채 수행을 그냥 할 거 같으면 그건 그냥 수행이 아니라 한가롭게 즐기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대상은 분명해야 되는 것이고 대상은 변해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대상이 분명할려면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막아야만이 대상이 분명해집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선한 사고 선한 마음의 작용이지 악한 마음의 작용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슬프다는 감정이 일어났을 때는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됩니다. '아, 이것은 악한 감정이다.' 악한 감정이 일어나면 그 과보를 받게 됩니다. 수행에서 수행을 포기하고 그냥 수행을 시간 때우기 용으로 아니면 뭔가를 성취할 목적으로 수행을 자꾸 변질시키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마음을 항상 그렇게 먼저 먹도록 해야 됩니다.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기쁨이나 슬픔에 자꾸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마다 "이것은 악한 감정이다" 하고 먼저 정신을 번쩍 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내 마음에서 뭐가 일어났는지를 볼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아, 내가 뭔가 대상을 싫어하는구나'

'뭔가 내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났구나'

'뭔가 그래서 내 마음에서 슬프다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지, 그것들을 그냥 방치해버려서는 안됩니다.

 

악감정이라고 분명히 마음에서 딱 경고를 하고 나면 마음은 조금 안정이 돼버립니다.

그럴 때 자신의 마음을 보면 그러한 마음들이 분노하는 마음들이나 싫어하는 마음들이나 하는 여러 가지 마음들이 분명하게 보여야 됩니다.

그럼 그것들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싸악 바뀌어나가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사르르 사라지게 되든지. 아니면 또다른 감정으로 바뀌어나가는 것들이 보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라한들이 현상을 관찰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분명히 보는 겁니다.

무상하지 않을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여기서 생존해있을 수가 없고 무상하지 않을 거 같으면 여러분들이 숨을 쉴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늙고 병들고 그 사람도 그래서 죽음을 맞이한 것뿐입니다.

그와 같이 나도 늙고 병들고 죽게 돼있습니다.

 

모든 현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나갑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도 찰나찰나 마다 변해가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그런 감정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슬픔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겁니다.

 

스님한테 전화했던 분도 슬픔에 휩싸여서 10분 20분 동안 계속적으로 그 슬픔에 휩싸여서 자기도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고 이 얘기를 하는 거라. 그게 이익될 게 뭐가 있겠느냐는 거라.

자신은 무상하다는 것들을 빨리 수행에서 체험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름 다 지났죠? 여름에 덥다는 건 누구든지 압니다.

그러면 여름에 더울 때 그 더운 걸 가지고 더운 하늘에다가 짜증을 부립니까? 그러지 않죠? 더우면 스스로 덥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조금 덜 덥게 하기 위해서 에어컨을 틀든지 아니면 그늘 밑에 가든지 스스로 조절을 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더운 하늘을 보고 그것을 탓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무상한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왜 그 죽은 모습을 보고 슬픔을 일으켜야 되느냐는 거라.

 

머리에서 항상 그 생각을 하십시요.

"슬프다는 감정은 악감정이다. 그 악감정의 과보는 내가 받는 것이지 다른 누가 받는 것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무상한 성품을 빨리 이해하고 그것들을 체험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