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푸사띠(phusati) (20230318)

담마마-마까 2023. 3. 19. 12:36

https://youtu.be/XNQ5juEuk8g

* 푸사띠(phusati) (20230318)

 

오늘은 푸사띠(phusati)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푸사띠는 일반적으로 '만지다, 접촉하다'는 그런 뜻으로 쓰여집니다.

빨리어 용어는 부처님이 구분해서 많이 씁니다.

접촉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뭐가 있죠? 빨리어 용어? (수행자 : 팟사) 예.

팟사(phassa)가 있죠. 팟사는? (수행자 : 감각적인 접촉) 예.

감각적인 접촉인데, 그것은 선인지 악인지 결과를 낳는지 아닌지 그거하고는 관계는 없죠?

 

그거와 다르게 푸사띠(phusati)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낳고 나쁜 업을 받을 때' 통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게 문맥에 따라서 푸사띠가 어느 문장에 쓰이느냐에 따라서 해석하는 게 다양하게 많이 쓰여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무엇과 관련이 있다'고 할 때도 푸사띠를 씁니다. 수행자는 뭐하고 관련이 있죠? 수행하는 거하고 관련이 있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와 관련이 있고, 부모님들은 자식과 관계가 있고, '관계있고 관련이 있다'고 할 때도 이 푸사띠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대립한다, 부딪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 앞에 들어올 때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하고 붙여놨거든. 착용 안 하면 어떻게 돼요? 전에는 코로나가 심할 때는 출입을 못하겠죠? 반드시 그런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마스크를 써야만이 거기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럴 때도 이 푸사띠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거는 그런 것보다는 '뭔가의 결과가 나온다'고 할 때 푸사띠를 씁니다. 만약에 여기 있는 사리가 굉장히 귀중하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누군가 여기다가 "만지지 마세요" 적어놓을 거라. 만지면 어떤 결과가 있는 거죠? 도둑질한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행위 자체가 위반이라고 생각들을 해서 거기에 대한 결과들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지 못하게 밀쳐낸다든지 결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푸사띠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결과들을 낳기 때문에 업으로서 연결이 되게끔 됩니다. 보통 이 푸사띠라는 용어를 쓸 때는 '나쁜 작용들을 하게 될 때' 이러한 용어들을 많이 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참 전인데 교단에서 누군가를 좀 지원해줄 필요성이 있어가지고 천만원을 지원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원해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는 것을 하느냐고 얘기를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원해줄 때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지원해준 것이고 또 지원해줄 때는 그것으로 인해서 그분이, 정확하게 얘기해서 상가 스님이 좀 더 편안하게 법을 전하고 그리고 좀 더 편안하게 거주처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원을 해준 것이지 나에게 뭔가 돌아온다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러지는 않는단 말이라.

그런데 그걸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쓸데없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언젠가는 그 스님도 떠날 것이다, 아니면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접촉한다, 만진다'는 의미로 쓸 때 푸사띠라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이번에 스리랑카에 갔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인력송출하는 부서에서 왔더라고. “스님 한번 뵙고 싶습니다” 하면서 왔길래 만났어요. 그분이 담당하는 게 스리랑카 사람들을 한국으로, 그 인력수출이라 그럽니까? 그런 것들을 담당하는 그런 부서에 있는 분입니다. “스님, 인력을 스리랑카 사람들이 힘들고 하니까 가서 돈 좀 벌 수 있게끔 허가서를 하나 좀 써왔으니까 거기에 사인을 좀 해주십시오” 하고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그거는 인력은, 노동관계로서 비자를 받아야 되는 것이지 종교관계로서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닌 거 같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종교비자들인데 종교비자는 한국에 와서 수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출가한 스님들이 한국에 와서 전법을 할 경우에 종교비자를 내주기 위해서 내 사인이 필요한데, 단순히 근로자로서 이렇게 오는 경우에는 그거는 내 소관이 아니고 노동부 소관인 것 같습니다. 그쪽에 문의를 해보십시오.

이러니까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그냥 사인만 해주면 될 건데 뭘 그렇게 일일이 따지느냐고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분은 기분이 안 좋게 해가지고 갔어. 나는 기분 나쁘라고 한 얘기는 아닌데.

어떤 결과들을 낳았을까? 그분한테?

어쨌든 그것도 똑같은 푸사띠가 작용을 한 거죠. 그런데 그분은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소식이 들어왔는데 해임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괜한 것 때문에 내가 그런데 말려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그와 같은 행위를 했을 때는 그거는 어디로 돌아갈까? 그 행위의 결과는?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태양이 있으면 뭔가 이 종이를 태우고자 할 때 그 돋보기 같은 걸 통해가지고 굴절시켜가지고 거기에다가 투과를 시켜가지고 이 종이를 태웁니다. 이 종이는 분명히 타는데, 이 태양으로 인해가지고, 그런데 이 굴절시키는 이 렌즈는 전혀 영향을 안 받는 거라. 햇빛만 없어지면 그냥 그대로 보여집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한 행위들이 참 많을 겁니다. 그런데 그 행위들이 전혀 그런 선과 악에 물들지 않고 관계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한 행위라고 할 것 같으면 그 결과는 누가 받게 될까? 자신이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어? 내가 왜 이런 결과를 받아야 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 선한 마음을 내어서 수행을 할 것 같으면 그 결과는 수행이 잘 진척이 될 겁니다. 그런데 수행을 할 때 성냄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이 대상을 보고 말 것이야!’, 아니면 ‘내가 삼매에 들고 말 것이야!’ 하는 악한 마음이 일어나서 그 대상을 본다든지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수행이 잘 안될 뿐 아니라 왜곡되게 됩니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거는 자신이 그대로 받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게 악한 사람이다 할 것 같으면 내가 뭔가를 접촉하고 만졌을 경우에 그거하고 관계가 됐을 때는 그 결과는 나에게 다 안 돌아올 수가 있는데, 그게 선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잘못 생각해서 한 행위다 할 것 같으면 그 결과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그런 게 아마 있을 겁니다. 똑같이 화를 내는데 엄마가 아이를 나무라기 위해서 화를 내는 것하고 또는 내가 뭔가 욕심이 생겨가지고 화를 내는 거하고는 화의 강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결과들도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강도를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한 결과는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가끔씩 특히 스님들이 재가인들을 가르칠 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에 대해서는 나쁜 마음을 품지 말아라”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면 출가한 스님들은 아직은 다 무르익지는 않았을지는 몰라도 부처님과 같이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에게는 사회에 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지 악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는 얘깁니다. 그런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한테 나쁘게 말을 한다든지 나쁘게 행동을 하게 될 것 같으면 거기서 오는 결과들은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 큰스님들은 그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을 부처님과 같이 대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감히 부처님이라 할 것 같으면 부처님한테 인력송출 해주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부처님이 얘기하는데도 수긍하지 못하고 화를 낼 수가 있을까? 그러지는 못한다는 거라. 같은 출가 스님을 도와주는 일들에 대해서 결정을 해서 그렇게 도와주는 일을 가지고 그렇게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게는 못한다는 거라.

그게 인제 푸사띠(phusati)라고 하는 용어가 쓰여지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푸사띠라는 용어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같은 사람들끼리 같은 사람들끼리 무언가를 행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마 비슷할 겁니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친구가 되지 자신하고 안 맞는 사람들을 가까이 둘려고 하질 않습니다. 정직하게 얘기하면 수행을 하고 있지만 이생에서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적다는 뜻입니다. 그냥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하고, 또는 선정삼매를 경험하고 그럴 목적으로들 한다는 거라.

그런데 수행하는 목적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살아있을 동안에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선한 행위들을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생에서 태어난 만큼 사람으로 태어난 만큼 이생에서 내가 해탈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그 목적을 까먹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맞는다고 스스로 판단해가지고 그 방법으로 자꾸 할려고 하고 다른 방법들을 자꾸 밀쳐버리고 터부시해버리기도 합니다.

뭔가 만지고 접촉을 하는 것이 푸사띠가 자꾸 되어버리면 그 결과는 자신이 스스로 받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에 진척도 없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계속하다 보면 수행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게 되고 그걸 비난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끼리끼리 만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수행도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본인에게 지금 현재는 이것이 맞다고 해가지고 그 방법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나가야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또는 자신이 지금 어느 정도 도와 과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중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완전한 해탈에 완전하게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수행은 항상 긴장되고 왜곡되게 됩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해야 되고,

여러분들 주위에도 자꾸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자꾸 모이고, 그리고 나한테 일어나는 것들이 자꾸 안 좋은 결과들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자신을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거라.

 

나쁜 결과 나쁜 업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자꾸 내가 뭔가를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돌아봐야 됩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두 가지!

 

지금 내가 수행을 하고 있든 그렇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든 그거 하고는 관계없이 자신의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자꾸 돌려서 나아갈려고 하고 있는 작용들을 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이 조금 더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도 모레가 좀 더 선한 사람이 자꾸 되어나가고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체크를 해보라는 거라.

 

두 번째는 그래서 자기 자신이 한 말이나 행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자신에게만 유용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반쪽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문답하러 왔을 때 스님이 항상 마음속으로 아니면 약하게 말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수키 혼뚜" 라고 하는 게송입니다.

항상 "행복이 항상 하시길 바랍니다." " 항상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하는 그런 게송입니다. 저뿐 아니라 일반 스님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자애를 형성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스님 입장에서는 은사스님을 떠올리는 것이 자애의 형성이 가장 잘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와서 인사를 하러 왔을 때는 항상 나는 그 사람을 보면서 스승님을 떠올립니다. 스승님을 떠올리고 스승님이 앞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스승님이 인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걸 떠올리면서 "수키 혼뚜"라는 게송을 합니다.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다른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좀 더 수행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게 출가자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두 가지는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자꾸 움직이는데 조금 더 많은 시간들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행위들을 하고 있는가?

적어도 그 두 가지만 갖춰질 것 같으면 여러분들 옆에는 푸사띠라는 용어가 붙을 재력이 생기질 않습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가 만약에 중죄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자신도 모르게 중죄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만큼 난처한 경우도 없다는 거라.

 

자신이 선한 방향으로 더욱더 마음을 움직이고 증장시키고 있는가 하는 걸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우리 이쪽 화단 쪽에도 꽃들이 피면서 꽃을 감고 올라가는 덩쿨들도 있습니다. 우리 여기에는 나팔꽃 같은 게 대표적인데, 나팔꽃은 없는데 그대신에 콩과식물이 저기 앞에 있습니다. 그게 스님은 그게 가을되가지고 완전히 열매가 맺기 전까지는 그걸 안 자르거든, 놔둡니다. 물론 덩쿨을 타고 올라가면서 일부는 그 기존에 있는 식물을 망치기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죽일 정도는 아니라. 그래서 그냥 놔둬버립니다.

기둥이 단단하게 서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타고 올라가는 덩쿨은 그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적으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선심소가 딱 세워져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은 선한 방향으로 계속 퍼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선한 것들이 되는 조건에는 경전에는 보통 네 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 올바른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는다. 내가 한 행위들에 대해서 비판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의 견해가 있기 때문에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신경 쓸 거 같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이성을 갖추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라. 오히려 잘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기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하고 간다?

같은 도반들이나 아니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그래 잘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증장시키는데 노력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직접적으로 자기에게 피해가 가는 가족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누구 말을 들어야 될까? 선한 마음을 가지고 딱 중심이 박혀서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는 쪽으로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일을 했을 경우에는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그다음에 세 번째가 후회하지 않는다.

자기가 한 행위는 후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고 또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자기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선한 행위를 했으니까 당연히 선한 결과를 받는 조건이 생깁니다. 좋은 결과들이.

주위에서 나는 선한 일들을 하는데 왜 자꾸 나쁜 결과가 나오느냐? 선한 것도 했지만 나쁜 것이 그마만큼 더 많기 때문에 나쁜 결과들을 받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한번 선한 행위를 했다 해가지고 모든 것들을 다 선한 결과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은 자꾸 계속적으로 선한 쪽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자꾸 작용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쉬고 있을 거 같으면 나쁜 쪽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는 부처님 명호를 외우든지 아니면 자애경을 하든지, 자애수행을 하든지 해서 마음이 자꾸 선한 선심소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줘야 됩니다.

 

그렇게 해나가면 적어도 여러분들이 푸사띠라고 하는 조건에 빠지지는 않고 나쁜 결과나 나쁜 업으로 빠지지 않고 좀 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나갈 거고,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은 어떠한 순간에도 사띠를 놓치지 않는 것!

지금 당장 선정에 도달했다, 지금 당장 평온한 마음이 됐다, 지금 당장 기쁨이 많이 일어났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일시적인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경험으로 밖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것보다는 차리리 사띠하는 시간이 훨씬 많이 늘어나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선한 쪽으로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그럼 반드시 그거에 대한 결과들은 따라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띠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자꾸 하는 것이 수행하는 자들이 갖추어야 될 조건이다 하는 걸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