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말을 하고 듣는 것에 대해서 (20230520)

담마마-마까 2023. 5. 22. 20:48

https://youtu.be/Q_oNkIJ6S0U

* 말을 하고 듣는 것에 대해서 (20230520)

 

일요일 되면 스님이 자주 가는 절이 한군데 있어요. 전에 거기서 수행 지도도 좀 했고 그리고 일요일날 가서 공양도 좀 얻어먹고 그렇게 오는데, 저번주에 갔더니, 지금 뭐 초파일 준비하느라고 다들 바쁘지. 그런데 보살님이 오시더니 “스님, 두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하면서 얘기를 해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스님 왜 마스크 쓰십니까?” 그러시는 거라. “다른 분들은 마스크를 다 벗고 있는데 특별히 써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대요. 그래서 그때 그 얘기를 듣고 스님이 ‘앗차’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태국 같은 경우는 우리보다도 마스크를 일찍 벗었어요. 예전부터 쓰지를 않았는데, 그런데 지금까지도 스님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스님들을 찾아뵈러 가는 신도들은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가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분들 생각은 뭐냐면 "상가는 보호해야 된다"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조금이라도 스님들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 하는 그런 의미이지 다른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그 보살님 말씀을 내가 듣고 ‘아, 그래 그렇지. 한국에서는 상가를 보호할려는 생각은 별로 없지. 그러면 괜히 내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 예.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럼 마스크를 벗겠습니다.” 하고 마스크를 벗었는데,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얘기를 한 게 있어요.

 

“여기 절에 주지스님이 도박 때문에 뭐 어떻게 된 거 알고 계십니까?” 이러는 거라.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스님은 여기 오십니까? 스님이 여기 오시면 다른 사람들이 스님이 도박하는 것으로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스님이 염려되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굳이 그런 생각은 별로 안 해봤는데, 그리고 나는 도박이 어찌 생겼는지조차도 모르고 무슨 도박인지도 전혀 관심조차도 없는데, 왜 저런 생각을 하실까, 단지 나는 거기 가면 또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수행에 대한 걸 물어보면 답해주기도 하고, 또 스님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거기 가면 다른 절은 괜히 불편할 수도 있는데 거기는 그래도 내가 쭉 갔던 곳이기 때문에 스님이 그냥 여비 얻으러 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단순하게 재가자들 수행문답 좀 해주고 공양시간 되면 따로 스님 공양 차려갖고 공양 올리면 끝이다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가는데,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 없습니다. 단지 여기 수행자들이 있고 하니까 스님한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거 그냥 나는 답해주고 공양 차려주면 공양 먹고 가는 것뿐인데 다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얘기하니까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고 기분 나빠 하시는 거라.

(수행자 : 두 가지 다 실수를 하시는 게 있거든요.) 아냐. 아니야. 그건 아니고.

어쨌든 청정한 스님이 괜히 그런 거 오해할까 봐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내가 해명을 했는데도 그말을 안 들어준다고 기분 나빠 하시는 걸 보고 ‘말하는 것과 말을 듣는 것에 대한 것들이 참 중요하다’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다 쓸데없는 얘기들인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런 쓸데없는 얘기들은 참 많이 하고는 삽니다. 그중에서 그래도 스님이 그래도 귀담아 들어야 될 부분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나도 좀 바꿔야 될 건 바꾸어야 되겠다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한테 말하고 듣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말하는 것부터 먼저 얘기를 해볼게요.

왜 사람들은 말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할까? 무슨 얘기든 간에.

(수행자 대답 : 말을 해야 소통이 된다고 생각을 하니까요.)

물론 말을 해야만이 소통이 됩니다. 그래서 그 말을 잘 듣는 것이 경전에는 "깨달음에 가기 위한 첫 번째 단추다" 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소통하기 위해서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필요한 말들은 해야 되겠죠. 필요한 말들은 해야 되는데 쓸데없는 잡담들은 너무나 많다는 거라. 특히 스님 같은 경우에는 어디 다른데 법문을 가더라도 절대 일찍 안 갑니다. 그리고 마치고 나면 법문만 하고 나면 뒤에 무슨 일정이 남아있든 간에 관계없이 그냥 바로 돌아와버립니다. 경험을 해봐서 압니다. 일찍가면 수행에 대한 거나 법에 대한 질문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질문들이 많습니다. 마치고 나도 괜히 자기들 얘기하는데 있으면 불편해해. 그래서 그런 것들은 아예 미연에 피할려고 법회시간에 일찍 도착하더라도 일찍 안 들어갑니다. 차에 내내 기다리고 있다가 땡 하면 촉 들어가는 형태를 취합니다. 마치자마자 또 바로 나와버리고 그리하는데, 참 어찌 보면 법을 듣는 사람들도 말하는 걸 저렇게 좋아하는데 일반인들은 참 말하는 거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마음에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감정이 소용돌이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건 굉장한 스트레스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스트레스들을 계속 받고 있기 때문에 그걸 어떤 식으로든 해소할려고 그럽니다. 그리고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뭔가 자꾸 어색하다고 생각들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괜히 쓸데없는 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라. 왜 그럴까? 감정이 소용돌이 치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어색한 마음이 안 듭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게 어색하다고 느끼고 있는 거라.

 

그래서 참 말하는 것들도 필요한 부분이긴 한데 대부분은 쓸데없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났다 하더라도 오늘 날씨가 더우면 “아, 오늘 많이 덥네요” 이렇게 얘기를 하면, 그러면 상대방에서도 “아, 예. 좀 덥습니다.” 뭐 이렇게 하겠죠. 사실은 그거 의미없는 말들입니다. 덥다 해가지고 본인이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실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그냥 얘기를 하는 것들이라. 왜 그러냐면 둘이 있으면 어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그걸 갖다가 스트레스 받는 것들을 해소하렬고 자꾸 한다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오늘 덥네요” 하는데 한쪽에서는 아무말도 안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내가 말을 걸었는데 대답을 안 해주면 기분나빠할 거라.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아까 비유들었던 그 보살님도 아마 자기말을 안 들어주는 것같이 보이니까 화가 났던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그건 어찌 보면 달리 생각해보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을 차려가지고 왔는데 나는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먹을 게 없어. 그래서 나는 못 먹으니까 당신도 채식주의자 아니면 당신도 먹지마 하고 얘기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꼭 상대방이 그걸 대답해야 될 의무도 없는데 대답을 강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말을 할 때 여러분들이 반드시 체크해야 되는 항목들이 있습니다.

일단 어떤 경우든지 말을 할 때는 그걸 정확하게 진실된 것들을 얘기를 해야 되는 것들은 틀림없는데 그걸 진지하게 얘기를 해야 됩니다. 자신의 가슴에서 ‘아, 이 이야기는 꼭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딱 들었을 때 그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 때 사람들이 놓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꼭 말을 해야 되는 것이지만 그 말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또는 그런 말을 했을 때 반응을 안 해주면 내가 또 악감정에 물들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을 자꾸 간과를 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뭔가 말을 해야 될 때, 특히나 도반들 간에도 마찬가집니다.

그게 말을 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말을 할 때의 마음가짐이 자애를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게 아무리 진실된 말이고 진지한 말이고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지금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라.

선한 마음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말을 할 거 같으면 반드시 뭔가 답이 들어와야 만족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을 들어줘야 되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됩니다.

 

진리를 전할 때도 부처님이 사람의 성향에 맞게끔 거기에 맞는 법을 설하였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점차적으로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데, 아무리 수행법에 대한 걸 애기하더라도 수행에 대한 걸 바로 얘기해가지고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부처님이 그걸 먼저 얘길 안 하셨거든.

그런데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말을,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자애를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말을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애를 지닌 채,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자애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 말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내가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말을 듣고 고요하고 평온하고 행복한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말은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돼버립니다.

아까 누가 얘기했죠? 말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말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자애를 지닌 채,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말을 안 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말은 어떠한 경우든지 탐··치입니다.

그거는 감정으로 인해가지고 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목탁조차도 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감성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법을 설할 때 청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가지고 막 말을 높였다가 낮췄다가 이러면서 사람을 끌여들이는 그런 법문하는 거 봤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치에 지배당해서 말을 하는 습관들을 가지면 자꾸 잡담은 많아집니다.

특히 무지라고 하는 어리석음에 지배당하면 그것에 따라서 본인이 사고하고 망상하고 말을 하게끔 됩니다. 또 성냄이 일어나면 거기에다가 말을 얹어가지고 하게 되고, 욕심이 일어나면 거기에 얹어가지고 말을 하게 됩니다. 그게 아무리 미사여구라고 하더라도 본인은 압니다. 내가 욕심부리면서 말을 하는 건지 성내면서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아무런 의미없는 말들을 뱉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 본인은 탐진치에 계속 물들게 되는 거라. 그렇게 말하는데 상대방은 탐진치에 물이 안 듭니까? 영향을 미치게끔 됩니다. 상대방의 감정도 자신에게 옮아오듯이 나의 감정도 상대방에 옮아간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더불어서 좀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게 이 사회인데 왜 자꾸 서로를 갖다가 악한 것으로서 자꾸 만들어 나갈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거는 죄악이라는 거라. 말을 하는 거 자체가 죄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얘깁니다.

 

말을 할 때는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여덟 가지로 얘기를 합니다.

첫 번째, 논리적인가.

두 번째, 확인돼가지고 증거가 있는 것들을 얘기하는가.

세 번째, 주관이나 감정을 섞어서 얘기하는 것인가 아닌가.

네 번째, 자신과 상대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얘긴가 아닌가.

다섯 번째, 새로운 앎을 제시해주는 것인가 아닌가.

여섯 번째, 이야기를 함으로 인해서 본인과 상대방이 불안해지는 것이 아닌가.

일곱 번째, 단지 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얘긴가 아닌가.

여덟 번째, 꼭 지금 해야 되는 말인가 아닌가.

이 여덟 가지를 반드시 잘 따져봐라 하고 얘기합니다.

 

반대적인 것이다 할 거 같으면 그건 얘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예를 들어서 본인이 확인되고 증거가 있는 거라고 할 거 같으면 얘기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히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 이런 거 가지고 그걸 얘기를 한다? 그건 아니라는 얘기라.

요즘은 반드시 팩트 체크 하라고 그러죠? “팩트 체크 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른 기삿거리나 바른말이 되지 못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떠나가지고 본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말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본인이 본인의 견해들을 자꾸 확립을 하게 되고 본인의 감정이 자꾸 탐·진·치에 물들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왜 이야기 하느냐는 거라. 아무리 그게 맞는 얘기라고 하더라도 어떠한 경우든지 본인 생각대로 얘길 하고 본인의 감정대로 얘기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이미 틀렸다는 거라.

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말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형성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신뢰가 형성이 되지 않는 말은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이런 것들을 체크를 하고 나서, 얘기를 할 때 "이런 것들은 얘기를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안정되도록 하는 얘기는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사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얘기는 하라 하는 겁니다.

감정을 제어하는 말들은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활성되는 얘기는 하라 라고 하는데, 그거는 뭐냐면 마음이 지금 대상에 분명하게 사띠가 생길 수 있는 얘기들을 하라는 겁니다.

악한 것들을 없애기 위한 얘기들은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건 당연히 도움이 됩니다.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특히나 여러분들은 수행자입니다.

그러면 수행자간에 하는 얘기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것들을 잘 적용을 해야 됩니다.

법에 대한 얘기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산란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특히 경전공부 하는 사람들은 경전공부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산란해진다, 아니면 수행하는 것은 점점 더 멀리하게 된다, 그 공부를 왜 하느냐는 거라. 안 그러면 방법이 틀렸던가.

경전공부를 하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어서 즉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수행하는 것이든 바라밀을 쌓는 것이든 그런 실천하는 발판이 되기 위해서 경전을 공부를 하는 것이지, 단순히 그냥 지식적인 것을 많이 얻어서 마음만 자꾸 자기 견해가 강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것들을 자꾸 차단을 하고 틀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마음의 안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마음이 즉시 지금 일어나는 대상에 사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그런 것은 또한 지금 생겨나는 탐·진·치라고 하는 악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거라.

 

수행자들 간에는 항상 이걸 경계를 해야 됩니다.

대화를 하고 할 때는 마음이 안정되도록 하는 것인지 아닌지.

··치라는 것들을 없애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

마음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에 사띠를 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자꾸 체크를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꾸 자애를 지니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스스로 마음이 자꾸 말을 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안정되고 ‘아, 내가 지금 빨리 부처님 말씀 따라 실천해서 도와 과에 이르르겠다’ 하는 마음이 들 수 있는 말들을 자꾸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말을 듣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했느냐면 "빠라토 고사 빳자야" 라고 나옵니다.

"진리에 눈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잘 듣는 것이 첫 번째 원인이 된다"

지혜를 얻고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법을 배워야 되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법들을 들어야 됩니다. 그것이 원인이 돼서 수행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 스스로 그냥 공부를 해가지고 스스로 뭔가를 한다? 그것은 첫 단추부터 끼워지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저 사람이 진짜 진리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잘 들을 수 있게끔 말을 해줘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상가의 덕목 중에 '수와쪼짜' 라고 하는 것이 있죠? "잘 듣도록 해준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할 때는 듣는 사람이 그걸 잘 들을 수 있도록 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법을 설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갖춰졌을 때 그사람은 부처님이 설하는 법을 근기에 맞게끔 설하는 것들이 잘 듣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문제가 뭐냐면 가끔씩 스님도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듣고, 나는 법문을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요렇게' 이해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왜 그럴까? 나는 A를 얘기했는데 듣는 사람은 그걸 B로써 이해를 하게끔 되는 거라.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게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A를 얘기한 거라. 그 얘기는 말하는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이 잘못 듣고 있다는 거라.

 

두 가지 이유입니다. 왜 그렇게 잘못 듣는지.

만약에 여러분들이 테라와다를 배우지 않는 사람일 거 같으면 테라와다 스님이 하는 얘기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감정을 잘 이끌어가지고 거기에 푹 빠지도록 해줘야 되는데 그런 것도 하나도 없거든.

여러분들이 그사람 말을 있는 그대로 다 들을려고 할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이야기에 마음이 들지 않는 항목이 요만큼이라도 있어선 안 되는 거라. 상대방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은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한테 맞는 거,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게끔 됩니다. 그러면 말을 들을려고 하는 자세가 아예 안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윤회를 안 믿는 사람한테 아무리 윤회에 대해서 얘기해줘봐야 그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안 들립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든지 선입견이 있으면 상대방의 말을 거부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맞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거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그리고 수행을 하면 할수록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엷어지고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도의 첫 번째 문에 들어가면 이것이 다 타파돼버리고 없어져버리게 되는 건데, 본인은 남의 말을 들을 때 이걸 딱 가지고 듣게 되는 거라. 이런 두 가지가 있으니까 당연히 A라고 얘기하는 것들을 B로 듣게 되는 거라.

 

혹시 여러분들도 남의 말을 듣고 자신이 자꾸 곡해하는 버릇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들을 자꾸 체크를 해봐야 되는 거라.

진정으로 그사람 말을 들을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내 생각을 딱 가지고 그걸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것들을 자꾸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거부하게 될 거 같으면 뭔가 자꾸 반격을 할려고 하게 됩니다.

왜 본인이 스스로 자꾸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본인이 스스로 악을 만들어나가느냐는 거라. 아예 안 들어버리지, 차라리.

그래서 남의 얘기를 잘 들을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개념화된 것들이 없는지 하는 것들을 잘 살펴봐야 되고, 상대방을 자꾸 이해할려고 하는 버릇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다음에 잘 듣는 것에 대한 얘기입니다.

잘 말하는 것들은 얘기를 했으니까, 인제는 잘 듣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목록만 얘기를 할게요.

잘 듣는 것은 첫 번째, 들을 때는 거절감정을 갖지 않고 들을 것.

부처님 당시 때 수행하다가 부처님 법을 듣고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듣는 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될까? 그게 부처님이 법을 설하든 제자가 법을 설하든 아니면 누군가가 법에 대해서 얘기를 하더라도 할 때 그 법을 그냥 그대로 듣습니다. 그게 어떤 법이든 간에 그냥 듣습니다. 내용이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걸 들을 때는 듣는 것에만 집중을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스님의 소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만약에 새가 지저귀고 있으면 새소리도 있습니다. 또 앰프가 있으니까 앰프 소리도 있습니다. 들을 때 거절감정을 갖지 않고 그 소리를 들을 거 같으면 그 소리만 들리게 됩니다. 다른 소리는 일절 안 들립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거절감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이 그 소리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 소리에다가 탁 집중을 하면 그 소리만 들리게 됩니다. 그 소리가 안 들릴 땐 어떻게 하죠? 그때 일어나는 자기의 마음을 관찰합니다. 그러다가 그 소리가 들리면 거기에 또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게 첫 번째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내용이 뭔지 하는 거 그걸 기억하는 단계가 아닙니다. 그냥 그 소리만 들립니다.

 

두 번째 일어나는 지혜라는 것은, 그 소리가 들리면 그것들이 들리고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저사람이 분명히 얘기하고 있는데 듣고 있는 것은 나라는 겁니다. 들리는 것은 나의 몸을 통해서 쉽게 말하면 귀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이라는 거라. 저사람 마음도 아니고 내 마음이라는 거라.

그래서 듣는 것과 듣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소리가 들리면 분명히 그걸 구분을 합니다. 어떻게 구분이 되어질까? 똑같이 들리지 않으니까 구분이 되어지는 거라.

"가, 나, 다, 라" 할 것 같으면 ‘가’가 일어나고 나서 그걸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나’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아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고,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아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는 조금 전에 ‘가’라고 하는 것을 아는 마음은 이미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마음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가, 나, 다, 라"는 다른 부분입니다. 다른 마음입니다. 그리고 "가, 나, 다, 라"도 다른 물질적인 현상입니다.

 

법을 들으면서 그걸 분명하게 보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아, ‘가’가 일어나는 마음이 분명히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나고, 내가 조절하는 것이 아니고 지 스스로 대상이 있으면 그것을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대상이 새로 생겨나면 그걸 또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저절로 지혼자서 그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서 법을 들으면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은 이렇게 법을 들으면서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가 상대방이 하는 말들에 대해서 거절하는 감정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듣는 것으로서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상대방의 얘기를 들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듣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납득이 돼야 되고 실천할 수 있는 근거가 돼야 됩니다.

납득을 할려면 그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저 사람이 지금 무엇 때문에 저런 얘기를 했을까’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보면 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그것들에 대해서 납득이 됐으면 아, 그건 자신이 몸으로서 아니면 마음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라.

 

법을 듣는 것은 그리고 말을 듣는 것은 그사람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뢰를 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 말을 있는 그대로 자꾸 들을려고 하는 것으로서 시작이 돼나갑니다.

 

이와 같이 말을 듣는 것도 말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어찌 보면 말을 듣는 것이 말을 하는 것보다도 훨씬 중요합니다.

말을 할 때는 내가 계속 사고를 해야 되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말을 들을 때는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도와 과에 이르는 단초가 되고 도와 과에 이를 수 있게끔 됩니다. 그마만큼 듣는 것은 굉장히 소중한 겁니다.

 

그것이 꼭 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상대방이 얘기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내가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저사람이 얘기해준다’ 하고 생각하고 들어보라는 거라.

내용이 중요하고 또는 그사람 말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를 하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말을 듣는 것은 깨달음의 단초가 된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도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것은 인간사회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 또 그것들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성장시켜주고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