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수행에서 나타나는 장애들 관찰해야 될지, 무시해야 될지 (20230506)

담마마-마까 2023. 5. 6. 23:32

https://youtu.be/T8KPaupFKGw

* 수행에서 나타나는 장애들 관찰해야 될지, 무시해야 될지 (20230506)

 

오늘 비온다고 오지마라들 했는데 많이 왔네요.

오늘은 간단하게 얘기를 하겠습니다.

"문제로부터 도망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경전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나 사빠또 마노 니와라예" 라고 돼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닫아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게송입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장애들에 부딪칩니다.

통증이 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장애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보통 수행하시는 분들이 그런 장애들을 무시해버리고 호흡이면 호흡, 아니면 경행이면 경행을 하는 경우들을 흔하게 봅니다.

 

사회적으로 비유하면 아마 그럴 겁니다. 누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을 평생 안 볼려고 그럽니다. 안 보고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하고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어쩌다가 만약에 그 사람하고 탁 부딪쳤다? 그러면 어떻게 되게 되지? 안 볼려고 했는데? 그러면 옛날에 화나는 일이 있었으면 그 사람을 우연찮게 마주치는 것만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 화를 낸다고 하게 되는 거죠.

 

다른 비유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억지로 그걸 안 하려고 하는 경우들을 흔하게 봅니다. 그런 습관들이 수행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들을 봅니다.

사실은 장애들도 하나의 수행 대상인데, 대상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장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걸 그냥 피해버리고 호흡 같은 이런 대상을 사띠할려고 하는 경우들을 흔하게 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사띠를 해도 무방하기는 합니다.

사띠가 어느 정도는 형성이 돼있는 사람들은 잘 해나갑니다. 그러면 그건 금방 사라져버리고 영향을 안 미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럼 뭐 이게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도 모르게 지나가 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지도할 때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할 거 같으면 "그냥 무시하라. 무시하고 수행대상에, 그 대상에 마음을 두고 사띠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게 클 경우엔 어떻게 할까?

아까 사회적인 비유를 들었듯이 진짜 보기 싫은 사람이라든지 이런 사람들, 당분간은 안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거라. 통증이 있는데 통증을 관찰하지 않고, 그게 조그만한 통증일 거 같으면 무시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 통증이 강하다 할 것 같으면, 무시한다는 얘기는 이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 다리를 편다든지 하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리고 그 통증을 그냥 놔둬버리고 배를 관찰한다?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마음을 닫아버린다'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에는 "그런 것으로부터 마음을 닫아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닫을 수 있으면 육근을 모두 닫아버리는 것이 가장 좋죠! 그럴 수 있으면 한번 그렇게 해봐요. 보기 싫은 사람, 듣기 싫은 소리,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살 수 있으면 그건 식물인간이지 그냥 일반적인 의식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사람은 아닐 거라.

 

그런데 수행에서 나타나는 장애들을 그냥 무시를 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언제 무시를 해야 될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강하지 않을 때! 그럴 땐 무시를 해야 됩니다.

왜 그럴까? 왜 강하지 않을 때는 무시를 해도 된다고 그럴까?

수행이 잘될 때는 잘 되는 반사작용으로 반드시 장애들이, 이런저런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으로 해서 내가 지금 현재 주된 대상에 사띠하고 있는 것들을 방해할려고 하는 것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띠가 지금 잘되고 있는데 꼭 그런 게 나타나서 헷갈리는 수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걸 관찰해야 될지 아니면 무시를 해야 될지 이런 경우들, 기준점이 있습니다.

마음이 악한 마음이 생겨나버리면 어떠한 경우든지 일단은 그것은 차단해야 됩니다.

 

저번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띠를 하고 있는데 화는 계속 일어난다, 그러면 사띠를 하고 있는데 화가 일어날 것 같으면 이미 악한 마음이 계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화를 관찰한다고 그게 관찰이 되어질까? 제대로 안 되어집니다.

일단 마음이 선한 마음이 먼저 되고 나서 그 화를 관찰하든지 아니면 다른 대상을 관찰하든지 해야 되는 것이지,

악한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는 악한 마음이 주대상이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화 아니면 성냄 아니면 욕심, 게으른 것, 이런 것들이 주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사띠가 매우 강하다 할 것 같으면 가볍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라도 그냥 그거 사띠하면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나마노 샹야따 따마가땅" 그렇게 나옵니다.

"마음을 강하게 키운 사람들, 쉽게 말하면 사띠의 힘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에게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어떠한 마음도 사띠할 대상이지 그걸 무시할 대상은 되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조그만 것도 그냥 사띠해버리면 사라져버리는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사띠가 강할 때는 사띠의 힘으로 인해서 마음이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방어를 해줍니다. 그래서 설혹 내가 화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화를 관찰하면 그 화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닫아서 그냥 무시하고 배를 관찰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그 화를 관찰하면 끝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사띠가 강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사띠의 대상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려면 적어도 사띠가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되든지, 어떠한 외부적인 대상이나 내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될 때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아직은 거기까지 이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점을 잡는 것이 적어도 마음이 악에 물든다면 그 대상에는 마음을 닫아버려야 됩니다.

탐·진·치뿐 아니라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서 그것들로 인해서 적어도 지속적으로 몇초간이라도 그것이 지속된다고 할 것 같으면 일단 그것으로부터 마음을 닫아버려야 됩니다.

 

경전에 그렇게 나옵니다. "야타야또짜 빠빠까노 따또따또 마노 니와라예"

"마음이 악에 물이 든다면 그때는 그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닫아도 된다" 하는 뜻입니다.

성냄이 계속 일어나는데도 그 성냄을 대상으로 관찰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통증이 계속 일어나는데 통증이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미 통증으로 인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냄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통증이 주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부터는 마음을 닫아야 됩니다. 그마만큼 사띠가 아직 강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문제로부터 피한다고 해가지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직은 사띠가 강하지도 않은데 그 문제를 직시한다? 직시해야 될 때가 있고 직시하지 말아야 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자칫 착각을 하면 사람들이 탐 진 치 자체를 나는 사띠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탐·진·치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하면 즉시 사라져야 됩니다.

왜? 사띠는 탐·진·치하고 반대적인 선한 마음이기 때문에!

그러면 아직은 탐··치가 강해서 선한 마음이 그것을 누르지를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계속적으로 관찰할 대상으로 삼느냐는 거라.

 

여러분은 평소에 습관을 들일 때 잘 들여야 됩니다.

수행도 그것을 사띠 할 대상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을 잘 구분해야 되듯이, 평소에 습관들도 여러분들이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방법들을 자꾸 택해나가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지금 수행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한쪽 옆에서는 텔레비전을 본다고 해봅시다. 어떻게 해야 될까? 텔레비전에 자꾸 마음이 뺏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텔레비전 꺼!” 하고 얘기해야 될까? 그런데 그 사람은 계속 보고 싶어 하는데? 그 사람 마음을 상하게 다치게 해야 될까? 여러분 혼자라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텔레비전 꺼!” 하고 얘기해줄 수가 있겠지. “나 수행 좀 해야 돼” 하고.

 

그런데 마음이 강한 사람 사띠가 강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틀어놔두더라도 관계없이 수행을 합니다. 그 대상을 마음에다가 사띠를 해서 호흡이면 호흡 느낌이면 느낌을 그냥 관찰합니다. 그러면 그 소리는 안 들립니다.

그런데 사띠가 강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게 너무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저것으로 인해서 화가 확 일어납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돼요? 꺼야 됩니다. 끄지 않고 계속 수행한다? 계속적으로 방해를 받는 거라. 혼자일 때는 그게 가능해.

 

그런데 여러 사람이 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거라?

여러 사람들 중에서 사띠가 강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라 할 것 같으면 저건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띠가 강한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사띠가 강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누군가 지도자가 와서 “그 텔레비전 좀 끄면 안 될까?” 하고 얘기를 해줄 수가 있다는 거라. 단지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꼭 그것을 봐야 되는지 하는 것들을 확인을 하고 얘기를 하겠죠.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계를 지킨다. 그런데 오늘 회사에서 술 먹을 일이 생겼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돼? 그 회식 자리에 가지 말아야 돼요?

사띠가 강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가도 무방합니다.

가더라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조언들도 해줄 수가 있고 그러면서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오계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하고, 그대신에 다른 음료수를 먹는다든지 그 자리에 그대로 참석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강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자리에 가면 회사 사람들이 “그냥 먹어” 할 것 같으면 그냥 먹을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그 자리에 안 가는 것이 낫다는 거라.

문제는 계를 지킬 수 있는 사띠가 돼있는지 아닌지를 판단을 먼저 해야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계는 지켜야 됩니다. 설혹 그 자리에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계는 지킬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일상 생활에서 습관이 되어야만 마음이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집니다.

 

또 하나 더, 자애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라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안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자애의 마음을 항상 지녀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면 가장 좋겠죠. 사띠가 그마만큼 강하기 때문에. 그러면 자애의 마음을 혹시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항상 여러분들 마음에는 탐·진·치가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러면 일단 스톱을 해야 됩니다. 생명을 다툴만큼 지금 꼭 해야 되는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대부분 그런 경우들은 없습니다. 한 템포 쉰다고 해가지고 크게 뭐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차라리 한 템포를 쉬고 자애를 가지고 나서 말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자꾸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악으로 물든다면 일단은 그 마음의 문은 닫아라.

그리고 스스로 반성해봐야 됩니다. ‘아, 내가 아직 사띠가 강하지 못하구나’

그것이 평소 습관으로 인한 것인지 또는 내가 수행하는 시간이 부족한 것인지 하는 것을 스스로 자꾸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문제로부터 자꾸 도망칠려고 하지 말고, '문제 자체는 내가 사띠할 대상이다'하고 자꾸 판단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자꾸 판단을 해야 됩니다.

수행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사띠의 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은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수행을 하는 습관들을 가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