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번뇌의 메카니즘 (20230401)

담마마-마까 2023. 4. 1. 20:02

https://youtu.be/R_YrkCIIGZ4

* 번뇌의 메카니즘 (20230401)

 

원래 꽃나무들은 자기 때가 있어요. 자기 때가 있으니까 보기 싫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도 관념이야. 좋고 싫은 것들로부터 떠나야 되니까 되도록이면 꽃나무들은 자르지 마요.

 

오늘은 번뇌의 메카니즘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수행 잘하고 있죠? 사띠가 잘 될 때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망상이 툭 떠오른다든지 아니면 화가 확 치밀어오른다든지 이러면 그냥 사띠는 어디 갔는지 모르고 그냥 거기에 빠져버리기도 하고 그러면 또 ‘앗차’ 해가지고 사띠를 잡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망상하는 거나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들이 혹시 업()이 되지 않는가 해가지고 그게 좀 두렵습니다.” 하는 얘기를 하는 수행자가 있었어요.

 

지금 얘기하는 번뇌라고 하는 거는 보통 탐·진·치에서 오는 번뇌거든요. 그래서 보통 망상하는 것, 성냄이 일어나는 것, 감정이 일어나는 것, 그런 것들을 통상적으로 그냥 번뇌라고 하겠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망상하는 때도 있죠? 미래를 망상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망상이라는 번뇌는 언제 일어나는 겁니까? 지금 일어나는 겁니다. 그 포인트를 놓치면 안 됩니다.

모든 번뇌는 현재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단지 그게 과거나 미래하고 연결되면서 그 망상들이 증폭돼버리기는 합니다.

그게 증폭되어가지고 그게 나중에 잠재번뇌로서 뿌리 깊게 내려버리기도 하고, 그게 또 불현듯이 어떤 조건을 만나면 발아하듯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리하더라도 지금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망상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고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다 하는 것이라고 알면 됩니다.

그래서 「사띠」라고 하는 것이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앞에 꽃들 많이 피었죠? 그거 보고 어떤 생각이 들어요? “예쁘다” 하죠. “예쁘다” 하는 것도 감정입니다. 그건 언제 일어나는 거죠?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쁜 거는 뭔가 비교해서 예쁘다고 했을 거라는 겁니다.

뭐로 비교한 거죠? 모르죠!

산냐(saññā)라고 하는 것, 산냐의 세계는 여러분들이 참 알기가 힘듭니다. 그 개념들이 어느 것하고 비교해가지고 예쁘다고 하는 건지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건 누구 관할이라구요? 잠재번뇌는? 부처님의 관할이지 여러분들 관할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수행대상이 아닙니다. ‘뭘 가지고 예쁘다고 하지?’, ‘뭐하고 비교해서 예쁘다고 하지?’ 이걸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지금 일어나는 것! 번뇌는 언제 일어난다구요? 지금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 일어난 번뇌라고 하는 망상, 예쁘다고 하는 관념들을 사띠하면 됩니다. 그래서 ‘예쁘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러면 예쁘다고 하는 것이 다른 감정으로 증폭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잠재번뇌로 넘어가지지는 않게 됩니다.

 

번뇌가 확산되는 걸 막아주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띠」라고 하는 겁니다. 단지 지금 현재 일어났을 때 즉시 그것을 사띠를 해야 됩니다.

다리가 아프다, ‘아프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아프고 나서 ‘아,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버리면 이미 그것은 마음이 이미 감정에 빠져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잠재번뇌로서 넘어가버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싫다’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아프다’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잊어버리면 과거나 미래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본인은 나쁜 마음을 가졌으니까 ‘아, 이것이 번뇌가 업이 되는구나’ 하고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업이 되는 경우는 그렇게 의지를 가지고, 그런 충동들이 일어나고, 그런 신구의(身口意) 행위가 일어났을 때, 그게 업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번뇌 자체는 업이 되지는 않습니다.

수행할 때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아픔뿐 아니라 뭔가 망상이 일어난다, 그럼 ‘망상’ ‘망상’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그때 일어난 망상은 업이 아닙니다.

그런데 망상을 가지고 내가 뭔가 자꾸 생각을 굴려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업이 돼버립니다. 의도가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전에 망상이 일어난다? 아니면 생각을 한다? 이것 자체는 산냐의 영역이지만 그것 자체는 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물론 ‘산냐를 행업(행온)에 속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아비담마에서만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스님이 생각할 때는 산냐(saññā)는 상온에 속합니다.

쉽게 말하면 신구의로 인해서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는 탐 진 치라고 하는 그런 번뇌들은 상온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난다고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화가 일어나는 건 탐·진·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거 자체는 업이 되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단지 그게 작용을 하는 것들, 의지력이 형성돼버리면 그거는 업이 돼버립니다.

화가 일어난다고 알아차리면 업이 되기 전에는 그 화가 싹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도 화가 계속 일어나있는 상태다 그러면 그거는 이미 업이 된 상태가 돼버립니다.

의업이 의도가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증폭이 안되는 이유가 그렇게라도 알아차릴려고 사띠할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증폭이 안 되는 것뿐이지, 증폭이 돼버리면 그것은 잠재번뇌로서 쌓여버립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나의 사띠가 약해가지고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구나’ 하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물론 사띠가 약하기 때문에 그것이 빨리 사라지지 않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은 탐·진·치라고 하는 것이 일어났을 때 그것들이 신구의라고 하는 것으로서 작용을 해버리기 때문에 이미 업으로서 작용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잠재번뇌들이 자꾸 많아지면 나중에는 죽음의 순간에 의업만이 작용을 하게 되는데, 다른 감각기관들은 다 사라져버리고,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겁니다.

스님도 지금 눈이라고 하는 것, 청각은 계속적으로 쇠약해져가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아예 안 보이고 더불어서 왼쪽도 점점 더 안 좋아집니다. 그래서 귀국하고 나서 안경알을 다시 또 맞췄어요. 안 맞아가지고.

이런 것들이 점점 더 쇠약해져가듯이,

죽음의 순간들에 가면은 다른 것들은 다 정지를 해버리고 의업만이 딱 작동을 합니다. 그때 잠재돼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걸 다스리기가 굉장히 힘들어져버립니다.

 

의식에서 자신이 했던 행위들이나 아니면 뭔가가 나타나는 것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생이 마지막 순간에 좌우되게 되는 그런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업을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재된 번뇌로 넘어간 것은 이미 업이 된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 잠재된 번뇌로서 내려가기 전에 일차적으로 위에서 생겨났을 때 그것들을 분명하게 사띠하는 훈련들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가볍게 사띠하더라도 망상이 일어났다 그러면 ‘망상이 일어났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사띠의 힘이 약하더라도 그것들이 사라질 수 있게끔 자꾸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망상이 이어나간다, 그럴 것 같으면 , 내가 또 산냐의 작용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내가 받아들이고 있구나 하고 판단하면 됩니다.

 

일차적인 화살은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든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든 어쩔 수 없이 받아야 됩니다. 눈이 있으면 뭔가 보이는 대상이 있을 거 같으면 보이게끔 돼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보인다’ 하고 알아차리면 거기서 끝나버리는데 그것을 개념화시켜버린다는 거라. ‘꽃이다’, ‘예쁘다’, ‘지저분하다’ 이렇게 개념화시켜버리니까 이미 이차적인 화살을 받은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러면 다시 또 삼차적으로 또 받게 되는 거라. 이차를 받으면 다시 또 삼차를 받는 거는 그냥 자동화되다시피 합니다. 지저분하다 싶으면 잘라버리고 치워야 되는 거고, 예쁘다 싶으면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꺽을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일차적인 화살을 받을 때 그것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릴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야 되는 거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겁니다. 생각하면 ‘생각한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지, 그것을 넘어서 버릴 것 같으면 이차 삼차적으로 화살을 받고 그것이 잠재적으로 이미 번뇌로서 작동을 해서 그것이 또 뿌리가 돼버린다는 거라.

뿌리가 되면 언젠가는 그것은 다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그 번뇌는 점점 더 증폭되어져버립니다.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면 됩니다.

그런데 잘못하는 사람들은 보는 것을 눈을 감아버리고, 들리는 것을 귀를 막아버립니다. 문제해결이 됩니까? 그거는 증폭시키는 것하고 똑 마찬가지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집중수행처에 가면 수행이 잘 되는 것같이 보이죠? 육근을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서 계속 살 수 있으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또는 사띠의 힘이 많이 강해져가지고 아, 나는 그냥 집중수행 해서 평생을 살아야 되겠다, 아니면 출가해서 살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다시 사회로 돌아와야 될 경우에는 조금 있으면 금방 또 원상회복이 돼버립니다.

 

대상은 회피해야 될 것도 아니고 대상을 붙잡아야 될 것도 아닙니다.

대상은 있는 그대로 일차적인 상태에서 그것을 사띠해야만이 그 대상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단순한 예로 아까도 얘기했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다른 육근의 기능 중에 다섯 개는 다 문이 닫혀버립니다.

의식이라는 식온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재를 합니다.

단순한 예로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해가지고 여러분들 머리가 안 굴러가집니까? 머리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없는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안 들리는데 소리가 없는데도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본인은 그것을 뭔가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하면서 환청 같은 착각을 새로운 신통력이라고 착각을 또 합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통력은 그런 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런 잡다한 산냐가 없어진 상태에서 일어나게끔 되는 것이지, 잡다한 것들 생각들이나 여러 가지 관념들이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혹 수행 중에 망상이 일어난다 해서 망상을 터부시하고 무시해서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 ‘망상’하면서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냥 그걸 내둬버리고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관찰한다? 그러면 그런 성향들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왜? 망상이 일어났으면 의업은 의도는 다시 또 작동을 합니다. 그래서 잠재적인 번뇌로서 더욱더 단단해지는 역할들을 합니다.

 

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감을 다 제어를 하더라도 의식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은 잠재적인 번뇌로서 넘어가진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사띠의 역할은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도 있지만, 그 대상이 업이 되는 것들을 방어하고 막아주고 하는 역할들까지를 같이 하게끔 됩니다.

단지 그냥 가볍게 그 대상만 알아차린다? 그것이 사띠다? 하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경전에는 문지기로서 비유를 했는데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저게 수상한 사람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고 못들어오게끔 막아주는 것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고 ‘어, 저게 나쁜 사람이고 수상한 사람이네’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고 그냥 성안으로 보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띠의 역할은 그와 같습니다. 앞을 지키는 것 알아차리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선별하고 걸러내는 역할까지 해야만이 잠재적인 번뇌로서 넘어가지지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눈과 귀가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것들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일어났을 때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도 의식이 제멋대로 흘러가고 망상을 하고 하는 것들로서 바뀌어나가고 하는 것들을 막아줄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러한 의식의 흐름인 망상은 지금 현재 일어납니다. 다행스럽게도.

만약에 과거나 미래에 일어난 것이면 그것은 사띠의 영역에 속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망상도 지금 현재 일어납니다.

 

조금 전에 계를 받아지녔죠?

습관들을 선한 마음들이 자꾸 작용하는 상태로서 만들어주면 자동적으로 그러한 망상들이 사띠가 되게 됩니다.

‘어! 망상이 일어났네’ 하고 망상이 나쁜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번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서 스톱할려는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난다는 거라. 그럴 때 그 망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화가 일어났네’ 하고 알아차리면 그 화는 나에게 이로운 것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수행에는 진척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화가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볼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띠도 더욱 강해질 뿐 아니라 그 화내는 것도 확 사라지게 된다는 거라.

 

선한 마음을 일으킬려고 자꾸 노력하는 것으로 인해서 나쁜 것들이나 이롭지 못한 것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사띠하는 역할까지도 같이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냥 단순히 그 대상만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작용들을 자꾸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를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오계는 지켜지게 됩니다.

또한 오계를 지키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서 사띠하기가 더욱더 수월해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번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번뇌는 알아차릴 사띠할 대상인 것이지 그것들이 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업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의지력하고 결합을 해야만이 가능한 겁니다.

그 의지력은 라고 하는 것들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번뇌라고 하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비담마에서 처럼 ‘행온에 들어간다’ 하고 생각하지 말고 상온에 들어간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상카라(saṅkhāra)라고 하는 것들은 행온을 모든 현상들이라고 얘기들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의지력 · 충동이라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충동으로 될 경우에는 그 번뇌가 업이 돼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탐·진·치가 행해지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업이 돼버립니다. 화가 일어난다, 화가 일어나는 것은 상온에 속하는데 그것들이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버리면 이미 그것은 업이 돼버린다는 거라.

 

수행대상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상태가 돼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 설혹 탐·진·치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할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는 좋은 것이 일어나면은 선한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을 좋아해서도 안 된다는 거라. 좋은 것들이 일어나면 좋은 것들이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라는 거라. 사띠하라는 거라.

 

그것이 상카라의 충동적인 의지력으로서 작동을 하기 전에 좋고 싫은 것들로서 배척해버렸을 때는 그것 자체의 번뇌는 상온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 수행이 잘 되면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도 번뇌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고, 안 될 때 일어나는 것들도 번뇌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것 자체는 업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알아차릴 사띠할 대상이라고 분명히 판단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놓쳐버리는 순간에 번뇌는 잠재번뇌로서 이차 삼차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의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 때 거기서 스톱을 하게 됩니다.

 

번뇌의 메카니즘은 번뇌 자체로는 현재 일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좋고 싫음을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탐··치가 같이 일어나버리면 그것은 좋고 싫음으로 바뀌어버리는 거라.

이미 그때는 그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 번뇌에 잠식돼버렸거나, 그러면은 그다음에 삼차적으로 행위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마음에서 그것을 생각으로서 망상을 굴리든지 하게 됩니다.

수행에서는 거기까지 넘어가면 이미 틀린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빨리 빠져나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망상이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그 망상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성냄이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성냄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망상과 성냄은 현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은 그래서 찰나찰나 간에 사띠를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찰나를 놓쳐버리면 수행은 꼬여버리고 얽혀버리게 됩니다.

본인이 그렇게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수행을 하고 있는데 수행이 잘 될 때는 수행이 잘 되다가 망상이 일어나서 그것들로 인해서 수행이 힘들다, 호흡이 대상이 되듯이 망상이 처음 일어났을 때 그것을 즉각적으로 사띠해야 되는 것이지, 그 망상도 수행의 대상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걸 피하거나 움켜쥘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게 번뇌의 메카니즘 입니다.

 

번뇌는 드러난 번뇌가 있고 잠재돼있는 번뇌가 있는데 잠재돼있는 번뇌를 알려고,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만날 말하는 무의식그거 수행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드러난 번뇌들을 즉각즉각 자꾸 알아차릴 때 여러분들은 수행이 무르익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할 때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계를 잘 지켜야 됩니다.

계를 지켜나갈 때 선한 마음들이 더욱더 일어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띠하는 마음들이 점점 더 생겨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번뇌의 메카니즘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스님, 간단하게 질문 좀 하겠습니다. 산냐에서의 ‘좋다 싫다’ 하는 마음과

스님 : ‘좋다 싫다’는 산냐가 아닙니다.

수행자 : 상카라 입니까?

스님 : 예. 이미 충동으로서 작용을 했기 때문에, 쩨따나에 속합니다.

수행자 질문 : 웨다나에서의 ‘좋다 싫다’의 느낌은

스님 : 그거는 느낌일 뿐입니다.

수행자 : 느낌도 마음 아닙니까?

스님 :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이 아니고, 느낌 자체는 괴롭고 즐겁고 하는 느낌입니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알아야 되는 거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알아야 되는 것이지 ‘좋다 싫다’의 느낌으로 돼버려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 : 이쪽에는 좋다 싫다고, 웨다나에서는 괴롭다 아니면 즐겁다

스님 : 예. 괴롭고 즐거운 느낌입니다. 그래서 수행 대상은 괴롭고 즐거운 느낌이지 좋다는 것은 그것은 개념인 것뿐인 것이지 느낌 자체는 좋고 싫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 고양이 밥을 주지만 고양이한테는 그게 밥이 되지만 인간에게는 그게 밥이 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건 개념일 뿐입니다.

됐습니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