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불기 2566년 4월 9일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 법문 – 유신견

담마마-마까 2023. 4. 10. 17:34

https://youtu.be/xvCfRz4OWDc

* 불기 2566년 4월 9일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 법문 – 유신견

(법문은 17:20초부터 시작됩니다.)

 

오랜만이죠? 오늘은 유신견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본인이 유신견이 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유신견이 사라졌다는 것은 예류과에 들었다는 건데, 예류과에 들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왜 이 얘기를 하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수행설명을 하면서 “스님, 제가 이러이러한데 수다원에 이르른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경우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할려고 그럽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수다원에 이르렀으면 본인이 수다원인지 압니다.

남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고. 단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아, 이제 당신은 수다원에 들었습니다.” 하고 얘기를 해주는 것뿐인데, 그리해도 그 사람은 무덤덤합니다. 그려려니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요.

그런데 가끔씩 “내가 이러한데 수다원에 들은 것이 맞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본인이 정확하게 수다원에 든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거든.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럴 때는 대부분이 보면 안 들어있다고 생각을 하시면 크게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유신견이라는 건데, 유신견이라는 게 뭐죠?

나라고 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거고, 여기 있는 스님 ‘빤냐와로 스님, 빤냐완따 스님’ 이것은 그냥 하나의 이름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에서 부모 역할 하죠? 엄마나 아빠나 이 역할을 할 겁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직장에 가면 부장이나 과장이나 하고 부르면서 그 역할들을 하게 될 겁니다. 집에서는 엄마 아빠 역할을 하게 되고 직장에서는 거기에 직급에 맞는 역할들을 충실하게 잘합니다.

 

쉽게 말하면 유신견이 없어진 사람들은 그 어떤 상황에 처해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 맞는 역할들을 그냥 할 뿐입니다. 달리 뭐 더 내세울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없는 체 한다든지 이런 것도 없고 그냥 자기 역할에 맞게끔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하고 똑같죠? 별다른 차이 나는 것은 없을 겁니다. 단지 엄마의 역할, 아빠의 역할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잘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수다원에 들어도 과거생의 인연 때문에 그 역할을 잘하는 분들이 있고 잘못하는 분들이 있는 것뿐인 것이지 수다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행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았을 때 그때 일어나지는 겁니다.

 

수행을 좀 해보신 분들은 아마 경험을 해봤을 건데 부처님 말씀이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알죠? 그 어떤 흠집이나 어떤 잘못을 잡을려고 하더라도 잡을 꺼리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고 누가 본인을 조종할려고 하더라도 조종당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 사람에게 칭찬을 하든 아니면 비난을 하든 그것에 전혀 흔들림 없이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

 

또 하나는 아까 처음에 얘기했듯이 자기가 어떤 상황에서 그 자리에 있든지 자기 일을 그냥 행하는 것뿐입니다. 단지 그것도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거기에 맞게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그냥 관찰하면서 그것들을 해내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게 유신견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들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불안하기도 하고 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또는 수행을 통해서 고통스러운 느낌들이 지속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그럽니다.

유신견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까지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유신견이 사라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뭐냐면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법이 없습니다. 화가 일어나더라도 말과 행동으로 그것이 드러나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본인에게 뭔가 질병이 오더라도 그냥 그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거기에 맞게끔 치료하면서 그냥 사는 것뿐입니다.

 

물론 유신견 가까이 도달한 사람들도 마음이 평온하고 감정에 끄달리지 않고 고요합니다. 어떠한 경우도 요동치는 마음이 잘 안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뭐냐면 그 자리에 맞는 역할들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좀 드러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마음이 뭐냐면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을까, 내가 유신견이 떨어졌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건 아직은 유신견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는 아직은 물론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하겠지만 조금 더 열심히 정진해야 된다는 마음을 반드시 내야됩니다.

 

유신견이라든지 수다원이라든지 불환과라든지 하는 타이틀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이르게 됐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마음의 상태가 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밖에 공기가 그리 차갑지는 않죠? 그런데 공기가 여러분들 살갗에 탁 부딪쳤을 때 느낌들 기억합니까? 아마 그걸 느껴보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 느낌이 좋다든지 싫다는 느낌이 일어났을 거 같으면 ‘아직은 내가 공부 좀 더해야 되겠구나’ 하고 판단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냥 그 공기가 닿는 느낌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직은 그래도 내가 수행 잘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하시면 됩니다.

 

그게 유신견이 사라지고 수다원에 이른 사람과 아닌 사람의 큰 차이점입니다.

 

방법만 잘 알면 도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수다원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 뒤에 아라한에 도달하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그것은 자기 수행만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 힘이 드는 부분인데, 인제 겨우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 도달해서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상태가 된 것, 그래서 다른 사람들 하고 더불어서 어떤 무리에 어떤 단체에 속하더라도 무리없이 조화롭게 잘 살아가는 상태에 도달한 것들은 크게 칭찬을 할만한 것들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살아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수다원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것들을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더 얘기할 게 있습니다.

본인이 지금 수행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여기 있는 스님들이 가르쳐주든 아니면 다른 스님들이 가르쳐주든 어떤 방법이든 그거는 관계없이 본인은 그래도 사띠는 놓치지 않고 할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스님 여기 왜 왔지?

그래도 사띠는 놓치지 않을려고 하죠?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그런데 한국 들어와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 중에 하나가 뭐냐면 “스님이 안 계시니까 수행이 잘 안됩디다.” 내가 수행을 시켜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한국에 없다고 수행이 안 된다?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아마 여러분들은 스님들한테 의문나는 것들을 질의응답을 통해서 시원하게 답변을 얻는 시간 보다도 스스로 해결해야 될 시간들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마만큼 스스로 여러분들이 경계들을 헤쳐나가야 되는 상황인데 뭐로 가지고 포인트를 잡으면 될까?

수행할 때 뭐가 최고 많이 일어나요? 그렇죠. 망상이죠!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게 번뇌 망상입니다. 수행이 아직 덜 된 사람들은 통증이 많이 일어나고 이런다고 하지만 그건 표피뿐이고 머릿속엔 끊임없이 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길이 잘하고 있다 아니다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번뇌·망상이 줄어들었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판단하면 됩니다.

 

망상하는 것 없이 그냥 그대로 본인이 하고 있는 일들을 해나가고 있을 때 수행을 잘 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다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거기에 사띠가 있다, 분명하게 그것을 기억을 한다 할 것 같으면 더 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들이 순식간에 변화된다든지, 아니면 그것들이 아주 불만족스럽게 보인다든지, 그것들 어디에도 혼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고 인연지어져가지고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든지 이렇게 되면 더 잘하는 겁니다.

 

세 가지 포인트를 얘기했습니다.

혼자 수행할 때 망상이 일어나는지 아닌지, 망상이 얼마만큼 내 수행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자꾸 체크를 해보십시오.

 

안 일어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많이 일어나는 사람들은

자애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을 하든지 아니면 여러분들 잘하는 염불을 한다든지 그것에 몰입해가지고 그것만 쭉 할 수 있게 될 때 그럴 때는 망상들이 잘 안 일어납니다. 어쨌든 길을 들여야 됩니다.

망상이 안 일어날 수 있는 구조들을 만들어야만이 망상이 안 일어나지, 그냥 앉아서 수행을 하면 대부분은 망상에 점령돼버립니다. 그래서 망상이 적은 구조로 자꾸 가도록 노력을 해야 되고,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든지 집중수행을 하든지 대상 자체를 놓치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망상이 없으면 망상이 또 적으면 마음은 다른 데로 달아날려고 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데다 마음이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다른 데로 달아날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빨리 마음을 지금 하고 있는 데로 되돌려야 됩니다. 안 돌아오면 강제로라도 명칭을 붙여서라도 잡아와야 됩니다. 배가 불러오면 배가 불러온다고 명칭을 붙이면서 알아차리더라도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마음을 거기에 갖다 붙여야 됩니다.

 

그런데 사띠가 예리해지고 좀 더 높아지면은 강해지면은 명칭 없이도 그것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행위를 하고 있든지 그 대상에서 사띠가 떠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일단 이 두 단계만 되더라도 수행은 잘 무르익어 가집니다.

 

사띠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붙어있을 것 같으면 틀림없이 그 대상은 빠르게 변합니다. 그 대상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 마음대로 지 역할대로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것들이 틀림없이 보이게 됩니다.

 

이 세 가지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항상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현재 내가 무슨 경험을 했다, 아니면 선정에 들었다, 그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것들이 틀리고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도 필요한 부분들이겠지만 거기에 함몰되고 빠져버려 놔놓으면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생명이 붙어있는 한은 살아가야 됩니다. 살아가는데 내가 선정에 든 경험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수행 잘 했을 때 무슨 현상들이 일어난 걸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때의 경험일 뿐이고 그것은 그 순간에 일어난 단지 찰나 간에 일이 될 뿐입니다. 지금 현재는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만이 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 밑에서 아니면 어떤 수행 방법을 통하더라도 수행해나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유신견 얘기를 했습니다.

평상시에 유신견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방법들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어떤 것들이 좀 있을까? 사띠해야 되는 건 틀림없죠! 어떤 경우든지 사띠는 해야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사띠하는 것들을 자꾸 놓쳐버리면 당연히 유신견은 생겨납니다.

 

첫 번째,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되도록이면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누가 무슨 의견을 내든 아니면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그걸 받아들이기만 자꾸 해보십시오. 자기 의견을 자꾸 낼려고 하지 말고.

어차피 여러분들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내 의견이든 그 사람 의견이든 불완전한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옳고, “내가 경험을 많이 했으니까 이것이 옳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진행 상황에 따라서 그것은 바뀌기도 하고 조건 따라서 바뀌기도 할 뿐입니다. 그러면은 누군가가 얘기할 것 같으면 일단 먼저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가치판단을 되도록이면 안 하는 습관을 자꾸 가지도록 하십시오. 그럴려면 정치를 안 해야 되는데, 정치를 하다 보면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됩니다.

 

두 번째,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이런 의견을 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될까 하는 것들. 남에 대한 배려들이 자꾸 커져야만이 나의 견해가 작아지게 됩니다.

 

세 번째가,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는 자애를 지니고 하라.

자애를 지니지 않은 채 어떠한 말도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겠다 하고 굳게 다짐을 해보십시오.

자애를 지니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고통받지 않고 내가 행복하듯이 남들도 그러길 바라는 겁니다. 진정으로. 어떤 생명도 살아갈 권리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내 마음대로 나의 입장에서 (뜻을 벌리면) 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하고 행동할 때 자애를 지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참관을 할 때 상대방의 이로운 부분들이 드러나지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평상시 생활할 때 조금씩 유신견이 약해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놔두어버리면 마음은 더욱더 단단해집니다. 내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 나의 견해라고 하는 것들로 더욱 더 단단해져 버려서 나중에는 이게 부수기 힘들어져버립니다.

 

그중에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중에서 꼭 하나는 기억을 해주어야 됩니다.

자애를 지닌 채 말하고 행동하라. 그렇지 않으면 꼼짝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적어도 그렇게만 살아가면 수행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아직은 여러분들은 내일 보다는 젊죠? 젊었을 때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 됩니다. 점점 나이가 들면 더 힘들어지는 게 수행입니다. 오늘 수행하도록 해야지 자꾸 미룰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사띠하는 습관들을 잊지 않도록 생활화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