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수행을 무르익게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기 가장 좋은 수단_사여의족 (20230415)

담마마-마까 2023. 4. 16. 13:15

https://youtu.be/I73yN7g6-j8

* 수행을 무르익게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기 가장 좋은 수단_사여의족 (20230415)

 

손 한번 들어봐봐요. 한번 내려봐봐요.

눈 한번 감았다가 눈을 살포시 한번 떠봐봐요.

그런데 오늘은 모르는 분들이 많아 가지고 이 법문이 맞을지는 모르겠네.

손을 들었을 때 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죠? 손을 내릴 때 내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눈을 감고 뜰 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 의도는 다 다르죠! 들 때의 의도는 들 때 일어난 것뿐인 것이고 그것은 끝나버렸고, 내릴 때는 내릴 때의 의도가 일어나서 손을 내리게 되는 거고.

 

살아있으면 의도는 항상 있습니까? 왜 있게 되죠? 의도는 왜 있게 되요?

(수행자 대답 : 팟사가 일어나면 웨다나가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되니까)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생존욕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고자 하는 충동, 충동이 항상 우리한테는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는 항상 있게 되는데, 그런데 의도를 발견하기 힘들죠!

 

그럼 언제 발견하기 쉬울까?

예를 들면 ‘좌선해야지’ 하고 마음을 탁 먹었다, 그래서 앉아서 열심히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의도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찰나 간에 사라져버리고 또 다른 의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합니다.

그런데 수행은 한 시간을 정했으면 한 시간 동안 계속 해야 되는데, 의도가 계속적으로 일어나야만이 이걸 사띠를 할 수 있을 건데, 의도가 일어나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그냥 관습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만 보이게 되는 거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보입니다. 일어날 때 뭔가 다른 움직임이 있고 뭔가 다른 변화되는 것들이 보이고 할 거 같으면 계속적으로 그걸 사띠를 하게 됩니다.

그 차이점이 뭘까?

 

의도에는 반드시 있어야 되는 4가지들이 있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의욕이라고 하는 찬다(chanda)라고 하는 부분이 해당이 되는 겁니다.

뭔가 할려고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예를 들면 여러분들은 수행할려는 의욕이 있어야 되겠죠? 애들은 어떻게 해요? 놀려는 의욕이 있어야만이 놀게끔 됩니다. 계속적으로.

그런데 의욕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죠!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의욕이 있어야지만이 의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서 사띠를 해나갈 건데, 그 의욕을 좋은 쪽으로만 바꾸어주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될까?

마음이 항상 자애를 지니고 있어야 됩니다. 자애를 지니고 있으면 의욕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띠해나가는 의지들은 계속적으로 일어나지게 됩니다.

 

쩨따나(cetanā)가 업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업이 되지 않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냥 습관적으로 눈을 깜빡이는 거라든지, 또는 숨을 쉬는 거라든지, 생명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업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되도록이면 악업보다는 선업을 짓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려면 마음에서 자애를 지니지 않은 채는 어떠한 것도 행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선한 의지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 의지들로 인해서 수행해나갈 때 사띠가 지속되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 의지를 조금 잘 볼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때 의도가 잘 보여요?

한번 네가 얘기해 봐. 발을 들을 때 들고자 하는 의도가 보일 때는 언제 보여지는 거야?

(수행자 대답 : 마음이 고요할 때 그런 거 같습니다.)

당연히 마음이 고요해야 되는 거고, 그거는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자애의 마음을 지닌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벼워져 있는 상태가 되는 거고, 그거는 자애의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거고.

보통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의도가 잘 안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다 보면 그 의도가 보이는 게 가끔 있습니다, 처음에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럴 때가 언제냐면 뭔가 그 대상을 끝까지 한번 봤을 때, 숨을 만약에 들이쉰다, 그럼 들이쉬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다 봤다, 그러고 나서 숨이 끝나는 게 보이고 나서 숨이 사라지는 게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한번은 봤거든. 그 성취감들이 있어야만이 그다음에는 의도가 보여지게 됩니다.

 

수행도 그렇습니다.

뭔가 자기가 수행을 하면서 뭔가 얻는 것들이 있어야만이 계속적으로 수행할려는 의지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의지들이 의도로서 보여지게 되는 겁니다.

단순하게 그냥 수행을 할 때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것만 자꾸 볼려고 하지 말고, 조금 마음을 강하게 한번 내보십시오.

 

의지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집중하는 것! 그걸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결정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어느 정도 수행이 진행되고 한 사람들은 수행들어 갈 때 처음에 딱 결정심을 냅니다. "나는 이 한시간 동안 절대 움직이지 않고 좌선수행 하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한시간 동안은 경행을 해서 마치겠다." 그런 결정심이 있어야만이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의지는 강해지게 돼있는 겁니다.

 

그런데 수행은 여러분들 왜 합니까? 왜 수행을 합니까?

해탈에 이르기 위한 거죠!

그래서 부처님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정진해야 됩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수행 안 해도 됩니까? 그건 아니죠!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가는게 자동적으로 되어나갑니다. 굳이 내가 수행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내고 또 뭐가 되겠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의지는 선과 악을 초월한 상태가 돼버립니다.

 

아까 처음에 얘기할 때 눈을 감았다가 탁 떠보라고 그랬죠.

일반적으로는 눈을 떴을 때 충동이 탁 일어나면 뭔가 보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분들은 그냥 보여집니다. ‘보여진다’고 그렇게 알아차리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요? 그 의지가 의도가 ‘스님이네’ ‘꽃이네’ 하고 보입니다. 그 차이가 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와야메테와 뿌리소 야와탓사나 팟다" 라고 해가지고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수행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기대한 것들을 얻을 때까지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기대하는 것들은 해탈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사소한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하게 그냥 내가 성냄이 많으니까 성냄을 다스리기 위해서, 마음이 자꾸 요동치고 하니까 평온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 이렇게 정해버리게 되면 그 이상은 하지 않을려고 하게 됩니다. 그게 끝이면 그만두어도 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하는 것들을 항상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때까지는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정진 해야 된다 하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의지가 바르게 쓰여질 수 있습니다.

 

그 의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계속적으로 부추기지 않으면 게으름 피우게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의지나 의도라고 하는 것은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찰나 간에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계속적으로 내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띠하는 것이 지금 현재 이 순간만 할려고 해야 됩니다.

! 내가 수행에서 뭐가 있었다하고 회상할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수행에서는. 그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순간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가끔씩 수행하는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 용을 쓸려고 그러고, 잘하고 있으면 잘하는 것에 대해서 집착할려고 그럽니다. 그게 지난 시간에 자꾸 매인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지금을 놓치게 됩니다. 지금은 어쨌든 착칵착칵 시간은 계속적으로 지나가게 돼있는 겁니다. 그것들을 그대로 사띠할려고 하지 않고 다른 걸 자꾸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할려는 의지는 자꾸 강화시켜 줄려고 해야 되고, 매일매일 찰나찰나 간에 새로운 생활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 찰나찰나를 살려고 해야지 다른 것들을 자꾸 할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안 하니까 대부분은 지금 현재를 놓쳐버리고 자꾸 과거나 미래쪽으로 가서 헤매게 되는 거라.

 

그러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지난해하고 올해하고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뭔가가 변화가 있을 거라. 한달 전과 지금은 또 다른 변화가 있다는 거라. 느리더라도 결과는 나오게 돼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수행을 하고 있으면 결과는 반드시 나옵니다. 수행이 잘됐든 못됐든 간에. 그래서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계속적으로 과거나 미래쪽으로 가다가보면 마음은 점점 더 게을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일어나면은 대부분은 대상을 피할려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통증이 일어났다, 그럼 지금 현재는 통증이 관찰대상이 되고 사띠해야 될 대상인데 이걸 피할려고 하는 거라. 그냥 나는 호흡을 관찰하는 거라. 그거는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게으름피우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 가벼워져 있고 마음이 부드러워져 있으면 통증이 관찰대상이란 걸 압니다. 어떤 것이든 일어난 것은 지금 강하게 일어난 것들은 지금 내가 사띠해야 될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을 놔놓고 그걸 피하는 거라.

들이쉬면 힘드니까 그 괴로움을 피할려고 내쉬듯이, 자꾸 괴로움을 피할려고 그러는 거라. 대상을 회피해가지고는 정확하게 그 의지·의도를 알아차리기가 힘들다는 얘깁니다. 피하지 말고 그냥 편안한 상태에서 그걸 사띠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괴로움을 피할려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은 망상에 빠집니다.

자꾸 마음이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게 됩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세속적으로 얘기하면 지금 내가 당뇨가 있으니까 살을 좀 빼고 싶고 뭘 하고 싶고 운동도 하고 싶고,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됩니까? 실제로 해야 됩니다. 운동을 해야되고 살을 빼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을 해야 되는데 노력은 안 하고 자꾸 망상만 부리고 있는 거라.

머릿속에서 망상이 일어나면 수행은 일단은 스톱 돼버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래서 주의해야 되는 것이 수행을 하면서 게으름 피우는 것과 망상하는 것들을 주의해야 됩니다.

그것만 조심하면 수행은 체계적으로 자꾸 흘러가게 됩니다.

 

만약에 수행이 진척이 조금 더디다 하는 사람들은 안전장치를 자꾸 생각을 해내도록 해야 됩니다.

그 의도나 의지가 일어나게끔 하는 것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아까 처음에 얘기했듯이 마음이 선한 마음이 일어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평상시에 그냥 자애를 계속적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게 가장 좋은 안전장치입니다.

자애가 계속 일어나게끔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수행에서 대상은 놓친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그래도 선한 쪽으로 움직이게끔 됩니다. 남들에게 심한 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욕심을 가진다든지 이런 마음들보다는 남에게 베풀려고 하게 되고 좀 더 친절하게 할려는 마음들이 더욱 더 생겨나게끔 하면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안전장치는 자애라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애를 계속적으로 하면 마음이 어느 순간에 순간적으로 선한쪽으로 탁 기울었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때가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는 것들이 느껴집니다.

그럴 때 한번 대상을 보십시오. 그러면 대상이 굉장히 잘 보입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면 언제든지 의지는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들을 알아차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고,

그래서 대상이 있는 그대로 자꾸 드러나지게 되는 현상들이 일어나지는 겁니다. 그럴려면 마음은 항상 자애가 습관이 되도록 해서 그 자애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질 때 대상은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아까 첫 번째, 의지를 일으키는 첫 번째가 의욕(chanda)이라고 그랬죠!

그 의욕이 나쁜 쪽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자애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의욕 부분입니다.

의욕이 일어나면 마음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마음이 게으름부리고 하는 것들이 자꾸 일어나지 않게끔 할려고 합니다. 그러면은 수행은 더욱더 하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의지를 일으키는 두 번째 위리야(vīriya) 부분입니다.

평상시 때 선한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알 거 같으면 선한 일을 더욱더 할려고 합니다. 악한 생각 일으키면 또는 악한 마음을 일으킬 것 같으면 상대방이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먼저 다친다는 걸 알 것 같으면 악한 생각이나 악한 말을 안 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게 위리야입니다.

 

위리야가 일어났을 때는 더욱 더 노력하게 되면 그 대상들이 변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위리야가 일어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그냥 단순하게 보입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마음은 거기에 가 있는데 그거 이상은 발전이 안 됩니다.

찬다와 위리야가 일어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더욱더 노력할려는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사띠도 더불어 강해지게 됩니다. 그럼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게 똑같은 숨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변화하는 것들이 보여나가집니다.

 

그 변화가 보이는 것들이 위망사(vīmaṁsā)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은 수행은 이 변화가 보여야만이 수행이 인제는 점점 무르익어가게끔 됩니다. 수행하는 것은 무상·고·무아를 분명하게 보기 위한 것들이라고 얘기를 많이들 합니다.

그런데 무상한 것은, 그리고 불만족스러운 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 따라 일어나고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이라고 아는 것은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안 되면 강제적으로라도 변화를 볼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 수행이 한단계 진보하게끔 됩니다.

 

가끔 스님이 “손바닥을 이렇게 (바닥에) 딱 대고 있다가 손을 한번 떼봐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손을 내릴 때의 느낌하고 손을 올릴 때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죠? 변하는 이 차이를 아는 겁니다.

자꾸 해봐야 됩니다. 뭉뚱그려서 일어나는 차이지만 그 차이를 알아야만이 변화한다는 걸,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똑같은 것이 아닌데 내가 그것을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대부분 대상을 붙잡고 밀쳐내고 하는 것은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대상은 안 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하더라도 내가 조정해가지고 변하도록 만들게끔 됩니다. 있는 그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 차이를 자꾸 알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게 지혜가 일어나는 단계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변화가 보이는 것이 더욱더 명확해지도록 자꾸 해야 되고, 차례가 분명해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인식하는 것들은 마음은 하나의 대상만 알아차립니다.

 

그것이 네 번째, 찟따(citta) 부분입니다.

수·상·행·식 마음이 4개가 일어납니다. 어떤 것이 수(受)인지, 어떤 것이 상(想)인지, 어떤 것이 행(行)인지, 어떤 것이 식(識)인지 구분이 지금은 안 될 겁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뚜렷하면 이게 구분되진다는 겁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변화가 보이는 거라.

그러면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마음들은 없어지게 됩니다.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사여의지라고 얘기하는 이 4가지 부분은 신통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수행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못 돼버리면 이것은 그냥 잘못된 신통력을 개발하기 위한 것으로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잘만 이용하면 항상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해탈하기 전에는 일어나는 생존욕구라고 하는 충동하는 움직이는 것들 이 의지·의도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기 가장 좋은 수단이 이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의도를 자꾸 알아차릴려고 할 때 수행은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그것이 안 되면 적어도 마음에서 선한 마음이 자꾸 일어나도록 자애를 지니도록 하라. 그것조차도 안 되면 그냥 아무것도 행하지 마라.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아라. 왜? 나쁜 업을 쌓게 되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