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불기 2567년 붓다의 날_그 인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돼있는가 (20230603)

담마마-마까 2023. 6. 5. 20:53

https://youtu.be/l1_rYT1EDVg

* 불기 2567년 붓다의 날_그 인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돼있는가 (20230603)

 

오늘은 무슨 날이죠? (일동 : 붓다의 날입니다.)

붓다의 날, 부처님 오신 날인데 부처님한테는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드리지도 못하고 겨우 꽃이나 드리고, 먹을 수 있는 거는 전부 스님이 다 먹어버리고.

부처님께 경의를 표하는 방법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했듯이 꽃, 향, 초 이런 것들을 부처님께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예경에 속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부처님 살아 생전에 생일날, 오늘이 부처님 생일날이잖아요. 생일날이고 제삿날이고 성도날이고 그런 날이죠. 생일날 생일밥 밥을 먹을 때 뭘 받아먹었을까? 경전 기록엔 그런 게 없습니다. 부처님 생일을 특별히 차려드렸다든지 그런 것은 없는데, 특별하게 생일날이라고 차려드시지는 않았지만 뭐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성스럽게 공양물을 올리고 지금 스님한테 올리듯이 그렇게 공양물을 올리고, 그러고 나서 부처님 법문 듣고, 그러고 나서 또 수행하고, 또 계를 잘 지키고 이런 것이 일반적인 겁니다.

 

경에는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에게, 그러니까 부처님 생일이나 열반일이나 이럴 때 경의를 표하고 싶다면 꽃·향 등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도 올리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올리는 것도 좋은 것인데, ·향 등을 올리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가르침을 실천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불교는 세 가지로 나눠지죠?

배우는 것 하고, 실천하는 것하고, 도와 과에 이르는 것!

이 어느 것 하나가 빠지더라도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 하고는 멀어지게 됩니다. 열심히 배우고 많이 알기만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배우는 것은 아예 뒷전으로 해버리고, ‘나는 명상이나 수행만 한다’ 이렇게 해버려도 그것도 뒷전이 돼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가 같이 갖춰지고 나서 열심히 닦고 해서 그 가르침대로 도와 과에 이르는 성자들이 출현하게 될 때, 그때 "아! 인제 부처님 가르침이 전해졌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도 오늘 같은날 여러분들이 그냥 꽃 한송이를 올리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리고 나서 휙 그냥 도망가버리는 걸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인연이 안되는 분들은 부처님도 어떻게 제도를 못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단어 게송 중에 우빠까라고 하는 유행자에게 한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만큼 인연 짓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 인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돼있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하는 것들을 되새길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빨리어 게송 먼저 하겠습니다.

 

삽바비부 삽바위두하마스미 (Sabbābhibhū sabbavidūhamasmi)

삽베수 담메수 아누빨릿또 (sabbesu dhammesu anūpalitto)

삽반자호 딴학카예 위뭇또 (sabbañjaho taṇhakkhaye vimutto)

사양 아빈냐야 까뭇디세이양. (sayaṃ abhiññāya kamuddiseyyaṃ)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한글 해석은

 

나는 모든 것에 이겼다. 모든 것을 알았다.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버렸다. 갈애를 멸진해서 해탈에 이르렀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은 것으로, 누구를 스승으로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게송입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아당안지" 그렇게 해가지고 잘 알고 있는 구절하고 비슷합니다. 그거하고는 조금 많이 다르죠? 이게 원래 원문의 해석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49일 동안 보리수나무 주위에서 있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다섯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중에 만난 첫 번째 제자입니다. 첫 제자가 되지는 못했죠! 첫 제자가 될뻔했죠.

 

그런데 우빠까가 보통 가지고 있던 수행이 어떤 거냐면 쉽게 말하면 '숙명론' 같은 겁니다.

'원인·결과'라고 하는 것은 없고, 내가 행한 행위들 내가 결과를 받아야 되고 하는 그런 거 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내가 받아야 되는 것은 내가 받게 되는 것이고, 안 받게 되는 것은 안 받게 되는 것이고, 이런 숙명론적인 것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조금 회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낙담해서 걷다가 부처님을 만났는데 저쪽에서 걸어오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인제 깨달음에 이른지 두 달이 채 안 되었으니까 얼마나 그 모습이 보기가 좋았겠어요.

한눈에 탁 봐도 ‘아, 저분은 범상치 않은 분이다’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막칼라가 가지고 있던 사상인 숙명론이라고 하는 것은 "스승 없이는 어떤 누구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하는 그런 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있던 우빠까가 ’아, 누구한테 배워서 저랬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부처님한테 여쭤봅니다.

“아! 당신 모습이 참 빛이 나고 좋습니다.” 나는 우울해있고 낙담에 빠져있는데 당신 모습을 닮고 싶다는 뜻이라. 그래서 “당신 스승이 누구입니까?” 하고 여쭤본 거라. 중요한 거는 '저분의 모습이 저러면은 저분을 가르치는 스승은 얼마나 위대할까?' 하는 생각에 잡혀 있었던 거죠.

 

그런데 부처님이 조금 전에 얘기한 게 '스스로 깨달았지 누구 스승으로 섬긴 분이 없다' 하고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우빠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저분이 뛰어난 분이라고 하더라도 스승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데, 나는 스승 없이 깨달았다 하니까 저건 가짜다 하고 판단을 내리는 거라.

그렇게 본인이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나 생각들에 딱 매여있으면 설혹 그것이 사실을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귀에 안 들어와지는 겁니다.

어찌 보면 참 대단한 말씀을 하신 건데 그걸 여러분들이라도 이해를 제대로 해서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에 이겼다」고 하는 것은

스님이 수행을 가르치면서 "오온을 자꾸 분해해봐라" 하는 그런 얘기를 자꾸 합니다.

"이것은 몸의 현상이고 이것은 마음의 현상이고. 그리고 마음의 현상도 수···식이 연달아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분리된 듯이 하면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그 우두머리가 틀림없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돼나가는 상태가 되도록 자꾸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수행하면서 오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까?

오온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직은 이기지 못한 겁니다.

수행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분명하게 아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또 아는 겁니다.

그것들에 빗대어서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그것들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몸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고, 일어나는 느낌들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고 여러 가지 망상들을 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뭔가 내가 인식한 것들이 맞다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이분법적으로 자꾸 갈라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느낌 하나만 예를 들더라도, 일어난 느낌들이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없다는 거라. 일어난 느낌들은 그냥 지가 할 일 다하고 나면 저절로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몸이 태어났으면 늙고 병들고 나서 죽음을 맞이해야 됩니다. 그건 정해진 이치입니다.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법을 분명하게 자꾸 알지 못하면 법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됩니다.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면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거는 왜 그럴까? 그것들을 원하는 욕구가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그냥 보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렸습니다.

이거에 대해서 욕심부리는 게 있었어요? 주고 나면 별 생각 안 하죠? 오늘 스님 맛있게 드시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양물을 올렸을 겁니다. 그렇게 올리고 나면 이거에 대한 집착은 없어야 됩니다.

"갈망의 소멸이 집착의 소멸로 이끈다" 하고 얘기합니다.

드리고 나면 이거에 대한, 이 물질에 대한 원하는 것들은 없습니다. 그게 없으면 그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없는 거라. 그런데 간혹 갈망에 대한 집착이 완전하게 끊어지지 못하면 이것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분명히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렸는데 본인은 드리고 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님이 내거 맛있게 먹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한다든지, 아니면 공양물 중에 “스님 요거 드십시오” 그거 나중에 보면 자기가 공양물 올린 걸 자꾸 이렇게.

갈망의 소멸이 집착의 소멸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런 집착하는 것이 없어지면 당연히 원인짓는 것들이 없어집니다.

 

오온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맛보는 것, 냄새맡는 것, 육근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여러분들은 뭐가 생겨납니까?

느낌이라든지 감정 같은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라도 평온한 상태가 유지가 돼있다고 만약에 할 것 같으면,

설혹 맛없는 것을 먹어도 그걸 ‘맛없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냥 ‘먹는다’고만 아는 것이지, ‘맛본다’고.

 

아주 향기롭지 않은 냄새를 맡는다고 하더라도 향기롭지 않다고 싫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좋고 싫은 느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향기를 맡는다고 냄새맡는다고만 인식을 하게 된다고 해봅시다.

그럼 마음은 굉장히 평온할 겁니다.

 

자극들에 대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가 돼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꾸준하게 수행을 하면서 보면 본다고, 맛보면 맛본다고 그렇게만 인식을 자꾸 하게 되면 결국에는 어떤 것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가 돼나간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것에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이 집착함이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칭찬하든 아니면 흉을 보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소리들린다고만 인식하게 됩니다.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쭉 이어지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갈망들은 없게 돼버립니다.

 

갈망들이 끊어지니까 집착하는 것도 끊어지게 되고, 그 집착하는 것이 끊어지니까 당연히 내가 다시 윤회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존재에 대한 것들이 더 이상 업을 쌓지 않게 되는 거라.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은 수행을 하면서 분명하게 그 상태에 도달했다는 거라.

그 "모든 것에 이겼다"고 하는 것은 누구하고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도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얘깁니다.

 

왜 자꾸 자극에 대해서 좋고 싫은 반응들을 자꾸 하게 됩니까?

본인 자신에게 자꾸 지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항상 있는 그대로를 자꾸 알아차려라는 거라. 보면 본다고 들리면 들린다고만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나가라는 거라.

그게 본인 자신에게도 이기는 거고, 외부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이기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다시 윤회할 수 있는 원인들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항상 스스로에게 이길 수 있는 그런 자들이 자꾸 되도록 해야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감정하고 싸워서 여러분들이 이겨야 됩니다. 감정에 져버리면 우울함에 빠지게 되고 아니면 화를 내게 되고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본인 스스로를 컨트롤 못하고 그 감정에 싸워 이기지 못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모든 일을 알았다"고 하는 것들은,

잘못 이해하면 “나는 여러분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 여러분 과거가 뭔지, 어떤 생활을 살았는지, 다 알고 있어” 하고 하는 거와 같습니다.

자이나교 교주가 그랬다고 합니다. “내가 걸어가든지 서있든지 밥을 먹든지 뭘 하든지 간에 세상 모든 것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다 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단칼에 그걸 탁 자릅니다. “그건 틀렸어.” 내가 거기에 마음을 기울일 때에만 그것을 알 수가 있어요.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몰라.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스님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한참 신통이 개발되고 할 때 텔레파시를 그사람에게 맞추면 그사람 소리가 들려요. 텔레파시를 그사람에게 맞추면 그사람이 보여요. 뭘 하고 있는 것이. 잠깐 보이는 것이 아니고 계속 그게 보여요. 그런데 그사람을 생각 안하고 그사람에게 텔레파시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그것이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돼버려요.

 

부처님이 얘기하는 것,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런 상황에 빠졌을까’ 하고 숙고를 해보니까 그 원인·결과가 분명하게 보인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겁니다. 아이를 탁 보면 울고 있으면 애가 왜 우는지를 분명하게 봅니다. 배가 고파서 우는 건지 어디가 아파서 우는 건지. 그건 많이 숙련돼야 그게 보여집니다. 그런데 애가 울지 않는데 애가 배가 고픈지 뭐하는지 안다? 그거는 잘 모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그와 같다는 거라. 모든 인간들이 어떠한 생을 살아왔고 어떠한 결과들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그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그사람을 알 수 있다는 거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자네에게 내가 어떤 법문을 해야만이 자네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스님은 몰라. 그런데 부처님은 안다는 거라.

사리뿟따 존자도 이사람이 어떻게 수행을 하고 어떤 수행방법으로 하는 것이 적당할까 하는 것이 틀리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나가면서 막히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러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부처님의 말씀을 자꾸 찾아서 참조를 해야 됩니다.

이럴 때는, 부처님이 어떻게 지도를 했을까? 하는 것이 나와 있는 것이 경입니다. 경을 참조를 해가지고 그걸 돌파해나가야지, 자기 생각되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대로, 또는 어떤 스님에게 가서 조언을 구한다? 어떤 때는 맞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답이 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뿐이라.

그래서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경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한가지,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수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것도 안 됩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뭔가를 하려 한다면 단호하게 불굴의 정신으로 행하라."

조임이 없다고 돼있는데,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게으름이라는 겁니다.

"게으르게 수행하는 것으로서는 더러움만 늘어날 뿐이다."

할려면 완전히 집중해가지고 수행을 하라는 거라. 그냥 대충대충 수행해가지고는 그거는 더러움만 늘어날 뿐이라는 거라. 대충대충 하면 마음속에서는 온갖 망상 피우게 되는 거고, 그거 다 더러움입니다. 대충대충 수행하면 그냥 그시간 흘려보냅니다.

 

왜 아까운 시간을 갖다가 그냥 내보냅니까? 여러분들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한정없이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결과가 나오도록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 구절에는 보면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에게는 담마가 드러난다." 하고 나옵니다.

열심히 수행할 때만이 담마가 여러분들에게 드러나진다는 얘깁니다.

그 담마를 분명하게 보면은 다시는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인제는 정상적으로 여러분들이 걸어가야 될 길들을 걸어가게끔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어떻게 수행해야만이 깨달음에 이를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분명하게 설해놨다는 겁니다. 그것대로 따라가도록 열심히 노력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마음이 결코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하는 세 번째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이 동요하도록 자꾸 두면 안 됩니다.

마음이 동요하는 것은 그건 전부 번뇌입니다. 마음이 들뜨든지 아니면 마음이 침울하든지, 마음이 자꾸 들떠가지고 동요해가지고 마음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게 되면 그거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동요하지 않도록, ··치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확신이 어느 정도 들고 나면은 그다음엔 뭐하죠?

대부분은 계를 잘 지킬려고 합니다. 계가 소중한 것들을 알기 때문에 그런다는 거라.

계를 어느 정도 지키고 나면 뭐하죠?

이때 그다음에는 여러분들과 같이 베푸는 것들을 자꾸 할려고 하게 됩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다른 존재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푸는 것들을 자꾸 하게 됩니다.

베푸는 것을 하기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마음이 부처님 가르침을 자신에서 다른 사람으로 자꾸 실천하는 행위들을 해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다음에는 보통 넘어가는 것이 자···사를 실천합니다.

항상 내 가족들이 행복하기를,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항상 기쁜 일들이 많기를, 이런 자비희사를 자꾸 실천하게끔 됩니다.

그렇게 자비희사를 실천하면 어떻게 되죠?

거기에 집중을 하게 됩니다. 마음은 점점 더 집중하는데에 더 몰입을 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베푸는 것을 하든 계를 지키든, 아니면 자비희사를 행하든 그걸 행할 때 깊이가 달라지게 됩니다. 집중하는 힘이 자꾸 차이가 나기 때문에!

똑같이 자애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집중하는 힘이 크면 자애의 힘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 힘으로 집중하는 힘이 커지니까 당연히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도 분명해지고 더 많아지고, 그리고 그것들이 무상··무아의 성품으로 보여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보통 이런 과정들을 겪는 것이 일반적인 겁니다.

마음이 동요하지 않도록만 자꾸 하고, 탐진치를 억제해서 선한 방향으로만 자꾸 유도를 하게 되면, 여러분들도 부처님이 말한 거와 같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번뇌를 제거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부처님이 얘기하셨던 것이 "모든 집착을 버렸다"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 죽어도 후회는 없습니까? 후회 없어요? 후회 있습니까?

후회가 없으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부처님은 모든 것을 버려버렸다는데.

부처님은 언제 죽어도 관계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부처님은 법을 설하신 겁니다.

 

그래서 "보다야 담망 데세시(bodhāya dhammaṁ desesi)" 그럽니다.

부처님은 여러분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했다는 것입니다.

괜히 법을,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라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 죽음이 온다고 할 것 같으면 아쉽거나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직 할 일을 끝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죽음이 언제 여러분들 곁에 다가올지는 누가 압니까? 그런데 왜 빨리 공부할려는 생각들을 일으키지 않느냐는 거라.

 

그런데 수행해본 사람들은 알 겁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존재욕구는 점점 엷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태가 되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는 상태가 돼나갑니다.

단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뿐입니다.

법을 설할 때가 되면 법을 설하는 것이고, 병을 고칠 때가 되면 병을 고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수행의 완성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한 것들이지, 내가 좀 더 살려고 좀 더 건강해질려고, 이런 생각으로 하는 것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살아가면서 점점 더 그렇게 돼나가야 됩니다.

존재욕구는 점점 더 엷어져야 되는 것이지, 더 건강해지고 더 오래살려고 자꾸 노력한다고 하면 그건 점점 더 역으로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부처님은 "해탈에 이르렀다."

당연히 그렇게 하니까 해탈에 이르게 된 겁니다.

해탈에 이르면 여러분들도 참 좋겠죠. 뭐가 맨 처음에 돼야 됩니까?

 

무상··무아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걸 지혜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무상·고·무아를 모르고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무상·고·무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걸까?

예를 들어봅시다.

무아를 안다고 하면 나를 내세우는 법이 없어야 됩니다.

어떤 것도, 어떤 의견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무상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야 되는 거고. 어떻게 돼나가더라도 단지 나는 그것을 그때 상황에 맞게끔 최선을 다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것들에 대해서 소유할려고 하고 집착하려고 하는 것들은 없어야 됩니다.

어떻게 살아가더라도 여러분들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더 살려고 하고 만족스럽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의 삶에.

 

고를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나는 행복해져야 됩니다.

나는 평온한 상태 평정한 상태의 마음이 돼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조건이 닥쳐오더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만들어야 됩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았다고 하면서 이러한 상태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직은 분명하게 무상 고 무아를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해탈에 이를려면 여러분들도 분명하게 무상 고 무아를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위숫디, 청정한 상태" 마음이 청정해라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팔계 받았죠? 팔계를 지키라는 겁니다.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해지고 행위들이 청정해질 수가 있습니다. 조건이 어떤 조건이 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유지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선정을 통해서 청정해지든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청정해지든 대상을 보면 보는 그대로 가볍고 있는 그대로 자꾸 보게 되면은 마음은 청정해집니다.

 

그다음에 "산띠, 적정 상태" 동요하지 않는 상태 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주위에서 어떤 일이 탁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에 동요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아마 힘들 겁니다. 동요하지 않아야만이 그 일을 잘 처리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마음에서는 항상 멧따 까루나 라고 하는, 자비심이 충족되고 충만되도록 자꾸 만들어라는 겁니다.

대자대비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대자대비가 항상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항상 채워지도록 일상적으로 노력을 하고 그것들이 행위들이나 말로서 표출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는 겁니다.

 

이게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어서 스승이 없고, 나는 이 법을 의지해서 법을 설하겠다 하고, 법을 스승으로 삼아서 법을 설하겠다고 하면서 마지막에 한 얘기입니다.

스스로를 이겼고 하는 여러 가지 게송들은 여러분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고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오늘은 붓다의 날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셨고 깨달음에 이르셨고 열반에 드신 뜻깊은 날입니다. 그런 날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자꾸 수행해서 내가 부처님과 같은 제자가 되는 상황이 되도록 더욱 더 노력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