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망설임이 생기지 않는 길(apaṇṇakapaṭipada) (20230617)

담마마-마까 2023. 6. 18. 13:54

https://youtu.be/HiM-M2ClPig

* 망설임이 생기지 않는 길(apaṇṇakapaṭipada) (20230617)

 

오늘은 '아빤나까 빠띠빠다(apaṇṇakapaṭipada)'라고 해서 「망설임이 생기지 않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곧 결혼을 앞둔 분이 찾아왔어요. 와서 “스님, 제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이걸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여러분도 그런 일 많죠? 중요한 거 놔놔놓고 결정을 내리고 실천을 해야 되는데 ‘이거 과연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하고 고민하는 경우들이 있을 겁니다. 아마 그분도 그럴 거라. 뭐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데 본인 마음에 갈등이 자꾸 생기는 겁니다. 결혼은 혼자가 아니니까 아무래도 고민해야 될 것들이 많기는 하겠죠.

 

그래서 한번 물어봤어요.

“결혼할려고 하는 사람이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냐, 아니면 잘 듣는 편이냐?” 하니까, 사람은 묵직해가지고 말을 잘 듣는다고 그래요. 잘 듣고 그런다고.

사실은 그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보면 자기주장이 강하든지 자기말만 계속 할려고 하는데, 그분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라. 잘 들어준대요. 그래서 무슨 결정하고 할 때도 큰 문제가 아니면 “그래. 니 뜻대로 하자” 이렇게 해가지고 따르는 경우들이 많다고 그래요.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결정해야 될 것은 결정하고 고집을 부려야 될 것은 고집을 부려야 되는데 그것이 화합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잘못된 거라."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은 가족 간에도 화합을 위해서는 들어주는 힘들이 커야 됩니다. 듣는 힘이 크면은, 있는 그대로 자꾸 듣는 힘이 커지면은 자기의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고 또 그것들을 배려를 하게끔 됩니다.

 

그다음 두 번째 물어본 게 “술 잘먹냐?” 하니까, 안 그렇대.

쉽게 말하면 뭔가 판단을 하고 뭔가를 행해나갈 때 이성적으로 잘하는 건지 아니면 감정에 치우쳐가지고 막 화가 난다든지 아니면 술에 취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없어야 됩니다. 대부분은 보면 서로 마음이 상하는 것이 그런 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상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결혼하기 전이니까 남자분은 술 잘먹는 모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보여주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고 술을 절제할 줄 알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콘트롤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얘기거든.

 

그다음에 세 번째가 의견충돌이 있을 때 그걸 조정하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부분은 뭐 자기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고는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거든.

 

그래서 물어봤어요. “그런데 왜 망설이느냐?”

중요한 일을 놔놔놓고 마음이 계속 방황을 한다는 거라. 가야 될 길은 분명히 정해졌는데 그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경우들이 살아가면서 자주자주 생겨나갈 겁니다.

 

그게 '아빤나까 빠띠빠다(apaṇṇakapaṭipada)'라고 하는 「내가 나아가는 길에서 방황하지 않고 똑바로 망설임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길」이라는 제목으로 부처님이 설했던 4가지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4가지를 자꾸 갖출려고 하고 갖추고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길들을 갈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첫 번째가 그거는 여러분들이 아마 더 잘 알 부분인데, 계를 지키는 것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계는 지켜야 됩니다. 오늘 오계를 받았고, 또 언젠가는 팔계를 받고, 또 출가할 사람이 생기면 그거보다 더 많은 계를 받고 그렇게 하게 됩니다.

계를 지키는 습관을 가지지 않으면 또 그런 사소한 것들이라도 자꾸 그걸 허물고 어길려고 하는 것들이 자꾸 생겨나면은 계의 중요성을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어쩔 수 없이 계를 범해야 되는 것들이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내가 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참회하고 ‘아, 내가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것조차도 잃어버릴 것 같으면 계는 무용지물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계가 몇백개 되는 것도 아니고 다섯 개잖아.

그거는 반드시 지킬려고 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계를 어기는 순간에 번뇌는 일어납니다.

보통 번뇌가 일어나는 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악행에 의한 번뇌가 있고, 그다음에 망상에 의한 번뇌가 있고, 또 잠재돼있는 수면 아래에 있는 잠재돼있는 번뇌가 있고, 이 세 가지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악행에 의한 번뇌들은 대부분은 계를 어김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납니다.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위를 하고 하는 것들은 전부 계를 지키면 이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되는 건데, 그게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안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게 아까 번뇌 중에서 잠재돼있는 수면번뇌라고 하는 것들이 나중에 망상을 일으키게 돼고 망상으로 인해서 또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역할들을 하기는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내가 악행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번뇌들은 표면화돼서 드러나지는 것들은 가지지 않도록 해야만이 되는 것이지, 계를 어김으로 인해가지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악행은 자꾸 증식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계를 자꾸 지킬려고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고요해지고 하는 것들을 경험을 해야만이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그냥 꼿꼿하게 그 길을 갈 수 있게끔 됩니다.

 

출가자 입장에서 참 많이 보는 게, 출가하고 나서 굉장히 후회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수행은 수행대로 진척이 없고, 그리고 괜히 출가생활할 동안에 사회하고는 동떨어지니까 뭔가 좀 소외당하는 그런 것도 있고, 자꾸 뒤처지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돌아갈 걸 자꾸 생각을 하는 거라.

내가 이마만큼 했으면 요즘말로 할 것 같으면 경력단절이 돼버리게 되는데 나중에 이걸 어떻게 메꾸나 하는 생각을 가지니까 번뇌망상들은 더 강해지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계를 지키는 것들에 대해서 자꾸 등한시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떨 때는 반드시 참가해야 되는 빠띠목카를 보름에 한번씩 하는데도 참가를 안 해. 그분이 안 오면 다른 스님들이 빠띠목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중단해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아니면 데리러 가야됩니다. 그런데 데리러 가보면 “어, 깜빡했다”고 그럽니다.

그게 뭐냐면 망상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지금 저지르지 말아야 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조건이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오는 청량감이나 행복감들을 경험을 해야만이 여러분들이 어떤 것들을 결정하고 할 때 망설이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반드시 해야 되는 것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여러분들 스님 법문 많이 듣죠? 꼭 스님 법문이 아니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되지 않고 전하는 분들의 가르침은 자꾸 들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두 번째 다문(多聞)입니다.

테라와다의 조건 열 가지 중에서 하나가 또 이 다문(多聞)입니다.

많이 들어야 됩니다. 많이 들어야만이 그것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생기고 몸과 마음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반응하게 됩니다. 혹시 그런 거 봤어요? 테라와다 불자들이 스님이 이리 가면 일부러 옆으로 피해줍니다. 스님이 재가 여자분 하고 접촉하고 하는 것들이 금지돼있기 때문에 본인들은 이미 그것들을 많이 들어서 알고 있거든. 그래서 자동적으로 피해주고 또 "그 스님들이 테라와다 불교를 지키는 기둥이다"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항상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니까 합장을 하게끔 되는 거라.

 

법을 많이 듣고 그것들이 몸에 배여야만이 그다음 행위들이 일어날 수 있게끔 됩니다. ‘그냥 수행만 하면 되지 하고생각을 하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수행도 많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수행만 할 것 같으면 왜곡되게 되고 한곳으로만 치우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 수행법만 따를려고 하고 다른 것들은 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교학적인 것들도 자꾸 등한시하게끔 되고, 그런데 그사람의 수행 진척이나 아니면 성격들은 자꾸 모가 나게 되는 거라.

그렇게 진행돼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도 삶을 살아가는데 그 삶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되지 않게 전하는 것들은 어떤 것이든 많이 들을려고 해야 됩니다. 많이 듣는 것들이 여러분들한테는 또 중요한 부분의 하나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정진 부분입니다.노력하는 것들.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앞에 두 개는 어느 정도는 하고 있는데 이 정진 부분에서는 대부분 막히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죽을만큼 해야 됩니다. 죽을만큼.

 

우리 선원에도 그런 분이 한분 있어요. 편안하게 수행을 하고 생활하다가도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있어요. 부처님 당시 때도 띳사 비구니라고 하는 분이 그런 상태였어요. 갑작스럽게 그렇게 발작이 일어나고 그렇게 합니다.

어제도 누가 전화가 와가지고 그러대요.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지고 발작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수행을 쉬어야 됩니까?” 이러더라고.

그런데 잘못 착각하는 경우가, 그렇게 해가지고 쉬어버릴 것 같으면 될 것 같이 생각하지만, 몸은 편해지고 그것들을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나중에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어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럴 때는 앉아서 좌선을 하지 말고 경행을 하라.

경행을 하더라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보통 여섯 단계 정도씩을 관찰할 수 있게끔 아주 천천히 경행을 하라. 발작이 일어나더라도 관계없이 그냥 어쨌든 경행을 하라. 여섯 단계를 자꾸 구분할려고 하라."

 

아직 전화가 오진 않았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런 경우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대부분은 그 발작 단계를 일어나고 있는데도 경행을 하면서 그걸 극복을 해내는 것들을 많이 봤어요.

 

부처님 당시 때의 이 띳사 비구니도 아마 그랬던 모양이라. 그렇게 갑작스럽게 발작이 일어나고 하면 대부분 비구니 스님들이 “아, 좀 쉬어. 너무 열심히 하다가 보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니까 좀 쉬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말 듣고 그냥 좀 쉬었다가 또 용맹정진하고 그러다가 또 발작이 일어나고 이렇게 계속, 그럼 또 쉬고 이렇게 하는 패턴을 했는데,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 나이도 계속 들고 늙었기 때문에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연세 들어서 산을 올라가는 것은 굉장히 힘든데도 그냥 ‘왼발, 오른발’ 하면서 꾸준히 걸어갑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서 그렇게 마음을 정합니다.

‘이 발작이 이기든지, 내가 이기든지!’

쉽게 말하면 ‘발작이라고 하는 번뇌가 이기든지 내가 이기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할 거다’ 하면서 마음을 먹고 거기에서 산꼭대기에서 정진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아라한에 도달을 해요.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 돼야 되는 것이지, 조그마한 것을 성취했다고 해가지고, 수행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도 잘 관찰된다? 그거 잘 관찰되는데 그럼 어떡할 건데요?

그게 본인에게 어떤 변화를 주고 있는지를 자꾸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이 안 일어나고, 게으름이 안 일어나느냐는 거라. 감각적인 욕망이 안 일어나고 어떤 대상이 오더라도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지느냐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더 열심히 해야 되는 거라.

 

대상을 잘 관찰한다 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무상 고 무아의 성품으로 바뀌어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돼야 만이 가능한데, 그냥 대충 수행하다가 말아버립니다. 또는 '한시간 좌선하고 한시간 경행한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좌선이 잘 되나가면 한시간이 지나도 그냥 계속 더하면 되는데 ‘어, 나는 경행해야 돼’ 하면서 털어버리고 일어나버리는 거라.

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먹었으면 그 목표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는 멈추지 말아야 됩니다.

그게 세 번째 부분입니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이 앞에 두 번째 것들이 받쳐주지 않고 노력하는 힘들이 떨어질 때 그렇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노력이라고 하는 것들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지혜 부분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하는 것들을 가지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지혜가 일어난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한 욕구, 더 살려고 하는 욕구, 그리고 어떤 물건들이나 어떤 것들 인연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도 해야 될 때는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법들을 가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 4가지는 부처님이 얘기한 '아빤나까 빠띠빠다(apaṇṇakapaṭipada)'라 해서 "망설임이 생기지 않는 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도 살아가면서 뭔가 결정을 해야 되고 망설이지 않고 길을 가야 될 때는 항상 이 4가지를 자꾸 돌아보도록 해야 됩니다. 뭐가 부족해서 내가 지금 망설이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판단해서 그걸 자꾸 채우도록 하고, 이 4가지가 기준이 되도록 해서 나아가면은 선택한 길이 여러분들의 정도가 됩니다. 그 길을 더욱더 열심히 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른길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Q 수행자 질문 : 스님, 중도라고 하는데 중도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중도하고 같은지 ... (잘 안들림)

 

A 스님 대답 :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쪽이 저쪽으로 치우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걸리지 않는 상태가 중도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수행자 : 스님 법문에 화살이나 가야금 튕기는 소리에 대해서 비교하는 것이, 그런 것이 중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스님 : 마찬가집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는 거잖아. 쉽게 말하면 그 상태에서 가장 소리가 잘 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만들어주는 거라.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그래야만 소리가 가장 잘 날 수 있게끔 되는 거라.

지금 내가 여기에서 가장 뭔가 그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사띠하고 있을 경우들이라는 거라. 그 사띠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갖다가 알아차리고 있다는 얘기라. 그게 중도라는 거라.

고행을 하더라도 고행 속에서 중도가 있는 거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안락한 삶 속에서도 중도가 있는 거라.

 

수행자 : 고행에도 중도가 있습니까?

스님 : 그럼요. 고행이라도 고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수행자 : 고행은 벗어나라 했는데요...

 

스님 :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자꾸 형식적인 것을 얘기하지 말고, 아무리 고행을 하더라도 쉽게 말하면 한시간 좌선을 하는데 나는 두시간은 도저히 못한다, 그런데 두시간 동안 앉아가지고 있는데 아픔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있다, 그러면 그거는 고행 속에서도 중도를 하고 있는 거라.

수행자 : 예. 잘 알겠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