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무상에 대한 이해 (20230715)

담마마-마까 2023. 7. 16. 14:32

https://youtu.be/CzhkibCzkgI

* 무상에 대한 이해 (20230715)

 

어째 다들 비들 뚫고 왔네.

지금 태국 같은 경우에는 안거 전날까지 보통 하는 게 '톳 팝바' 라고 해가지고 하는 행사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사원마다 대부분이 다들 하는데, 그게 뭐냐면 여러분들 안거 때, 스님들한테 우안거 목욕가사 올리죠? 올해는 우리 선원에서는 누가 마헤시 수한이가 지가 만들끼라고 막 그래쌌든데, 만들란가 모르겠다.

그래서 목욕가사를 올리는데, '톳 팝바' 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그런 가사를 스님들한테 올리는 그런 행사입니다. 그래서 태국 종교행사들 중에서도 그것이 참 중요한 행사 중에 하나입니다. 뭐 가사만 올리겠어요? 스님들한테 공양도 올리고 또 법문도 듣고 또 절 안에서는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막 놀기도 하고 그날 하루는 떠들썩하게 보냅니다.

스님도 이번에 태국 들어가서 '톳 팝바'를 좀 하기로 그렇게 했습니다.

안거 전전날에 돌아오도록 그렇게 돼있습니다. 다음주에 주말 돼서 가서 한 6일 정도 있다가 그렇게 올 겁니다.

우리도 안거날 당일날 목욕가사 탁 올리는 것보다 인원이 좀 많으면 '팝바'라고 하는 의식들을 좀 해봤으면 하는 생각도 있는데 그건 스님 생각이고, 언젠간 또 되겠지.

 

오늘은 "무상에 대한 이해"라는 이름으로 법문을 좀 하겠습니다.

수행문답을 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왜 그렇게 무상한 걸 자꾸 관찰할려고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몰라. 왜 그래?

(수행자 대답 : 그나마 무상한 게 보기가 가장 쉬울거 같아서요...)

보여?

(수행자 대답 : 아니요. 그래도 무아, 고 보다는 변한다는 것 자체를 보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런데 변하는 게 보일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내가 게으름 부리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길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해서 아닌 것은 안 하고, 해야 될 것은 하고"

이런 게 확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수행을 시작을 해서,

어느 정도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아, 이게 물질적인 현상이구나,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하는 것이 구분이 가능해지고,

그리고 돌아보고 나면 원인·결과에 대해서 또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런 상태를 조금 지나고 나야

이 무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탁 형성되고,

그러고 나면 무상한 것이 보이는데...

 

쉽게 말하면 숨을 관찰하고 있으면 들이쉬는데 그냥 불러온다고 관찰해지는 것이 아니고 불러올 때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들이 계속 보여야 돼. 쉽게 말하면 지금 소멸하는 것이 보이고 나면 그다음에 다시 또 소멸하는 것이 보여지면 앞에 소멸하는 것들은 잊어버리는 상태가 되어야 돼. 그래서 끊임없이 배가 하나 불러오는데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들이 보일 정도가 돼야 이게 무상한 것이 보이는데...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걸 놓쳐버리고, 앉으면 무조건 무상한 것부터 먼저 볼라고 그래. ‘이게 왜 안 변하지’

와가지고 “스님, 나는 왜 수행이 안 되지요?” 그럽니다.

수행이 안 되는 게 아닌데, 뭐 하러 그렇게 미리 자꾸 그걸 볼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거는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건데, 오히려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것들을 깨어가면서도 그걸 할려고들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보통 평온한 것들은 한 여섯 단계로 보통 나누어집니다.

가장 쉬운 게 여러분들은 어떤 걸까?

일상생활에서 일이 잘되어나갈 때! 그래서 그냥 뭘 하든지 그냥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고 할 때 그때 마음상태들이 평온한 상태입니다.

그게 가장 첫 번째 봐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보통 보면 누가 나를 칭찬하든 누가 나를 비난하든 개의치 않고 그냥 ‘응, 그래. 그건 네 일이고 나는 내 할 일 한다’ 하면서 이렇게 쭉 해나가는 그런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그 상태들을 먼저 만들어야 됩니다.

그게 어느 정도 좀 성숙되어지고 익숙해지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지, 보통 팔난(八難)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그래서 그 팔난에 대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들을 만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누가 나를 칭찬하든, 내가 돈이 많이 벌어지든 아니면 건강을 잃든 뭘 하든 관계없이 그냥 나는 내 할 일만 하고 ‘어차피 생길 일이니까, 그리고 이것도 변해갈 거니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편안하게 그냥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그러고 나서 이루어지는 평온한 것들이 뭐냐하면,

나쁜 생각이 탁 일어났는데 ‘어! 이러면 안돼’ 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어! 내가 자애를 안 가져서 그렇구나’ 하고 자애를 가질려고 하고, 남에 대해서 비난하고 인색할려고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나면, 하고 나면 소용이 없고 탁 정신 차려서 ‘어! 이게 아니야!’ ‘내가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베풀려고 자꾸 노력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상태의 마음도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입니다.

쉽게 말하면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선한 행위를 할 때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먼저 것보다도 조금 더 진보된 마음의 상태입니다.

어쨌든 가만히 두면 마음은 나쁜 쪽으로 기울어지기가 쉽기 때문에 탁 방어를 하고 적극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애를 가지든 붓다눗사띠를 하든 아니면 바라밀들을 쌓든지 뭘 하든지 이런 식으로 자꾸 마음을 변경해나가고 실천해나가는 상태가 되도록.

 

그다음에 그게 어느 정도 좀 되고 나면,

인제 여러분 같은 경우에 해당이 될 겁니다.

수행이나 부처님 가르침 진리에 대해서 보고 듣고 할 때 일어나는 마음들.

통상적으로는 그거는 특정한 장소나 때가 되어야만이 그것을 들을 수 있고 내가 또 마음을 기울여야만 할 수 있는 일부러 찾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배우고 듣고 하면서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해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 정도가 돼야만이 아, 그래도 무상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를 하는 상태가 되는데, 요 부분을 싹 다 빼먹어버립니다. 보통 빼먹어버리고 무조건 수행 가르쳐달라 해서 수행하면 먼저 무상한 것이 먼저 보여야 되는 거라. 이렇게 자꾸 접근할려고 하니까 수행이 억지로 하게 됩니다.

물론 무상한 걸 보기는 봐야 됩니다. 관찰을 하고 그것을 자꾸 체험해 나가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게 처음부터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이게 어느 정도 앞에 세 부분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 네 번째가 수행을 통해가지고 평온한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평온한 상태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해보면 알죠? 처음에 대상을 알아차릴 때 어떻게 알아차려져요? 배가 불러오는데 끊임없이 그게 사라지는 것이 보여요? 안 보여요!

그냥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고, 꺼지면 꺼진다고 압니다. 걸어가면 왼발 오른발 알고, 겨우 그 정도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거라. 그걸 먼저 해야 되지, 그것이 안 된 상태에서 그 상태에서 무상한 것을 볼려고 한다? 그거는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대상하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빨리 움직일 수 있을 상태가 돼있을 때,

그다음에 인제 ‘어?’ 배가 불러오는데 뭔가 조금 이상하거든. 좀 다르게 느껴지는 거라. 이쪽에서 ‘뽈록’ 하고, 요쪽에서 또 ‘뽈록’ 하기도 하고, 하나의 ‘불러옴’인데.

그래서 이렇게 조금 다르게 불러와진다고 하는 것이 느껴지고, 또 좀 있으면 불러와지는 것이 뭔가 좀 전기 자극같이 ‘드르르르르르’ 하면서 이렇게 불러와지는 느낌이 들고, 이런 식으로 자꾸 발전돼나가면서 무상한 것이 보여야 되는 것이지, 그냥 처음부터 보여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할 때는 무조건 스님이 무상·고·무아를 보라고 하더라’ 그거 먼저 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고 나면, 어쨌든 수행이 진행되어나가면서도 평온한 상태가 유지도 되어나가야 되거든.

그게 뭐냐면 수행하면서 배가 불러오는 것도 조금씩 변하는 것이 보이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그럴 때도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있습니다.

 

앞에 맨처음에 할 때 일상생활에서 평온하고 고요한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계속할 때는 마음은 어떤 경우든지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있는 상태가 되어야 되는 거라. 마음에, 대상을 마음에 기울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돼야만이 변하는 것이 더 빨리 변하는 것이 보이고, 그러면서 무상한 것뿐 아니라 고도 보이고 무아도 보이고 하는 거라.

 

고(苦)가 보인다고 하는 것은 변하는 것으로 인해서 두려운 생각이 들게 되고,

 

그 두려운 것들이 나중에는 꼭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기 스님 바리때 있죠? 뚜껑을 요걸 탁 뒤비틀면 안에 있는 물건이 싹 쏟아집니다. 그런데 이게 비어있으면 어떻게 돼요? 탁 쏟아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라. 그래서 ‘아무것도 없네’ 하는 것이 보이는 거라. 그게 무아(無我)의 상태라는 거라.

그럴려면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돼. 집착하고 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봐야만이 무아가 보이는 거지, 뭔가를 붙잡고 있으면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생기는 거라.

 

그렇게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면서 무상 고 무아가 보이면,

인제는 , 이게 이런 마음의 상태가 평온하고 고요한게 이게 열반인가 하고 어렴풋이 이해를 하게끔 상태에 이르고 그러면서 도와과 쪽으로 흘러가게끔 됩니다.

 

그게 기본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의 보통 여섯 단계로 나누어지는 순서들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들을 밟지 않고 무조건 그냥 무상한 것을 갖다가 볼려고 한다, 그러면 그건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무상한 걸 먼저 체험하려 하지 말고 이해부터 할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무상한 거 이해하는 거 어떤 게 가장 좋아요?

가장 좋은 거는 우리 선원에 오면 만날 꽃이 피었다가 집니다.

피었다 지는 걸 보라는 거라. ‘피었으면 당연히 지는 거구나’ 하고 보면 아, 저거는 자기 역할대로 그냥 피었다가 지는 거구나, 무상한 거구나 하고 그냥 알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피었다가 지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는 거라. 지고 나면 어떤 사람은 그게 더러우니까 빨리 치워버릴려고 그러고, 피어있으니까 예쁘니까 그걸 꺽을라고 하는 거라. 그런데 그런 마음이 안 생기고 피는 거는 피는 대로 그냥 두는 거고, 지면 지는 대로 그냥 두는 거라.

자연에서 얻는 무상한 것들을 이해하는 것들은 지혜를 여는 단초가 됩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이해하기 쉬운 게 뭐가 있어요?

여기 스님이 육십 중반으로 인제 가고 있는데 많이들 늙었죠? 지금도 이렇게 주민등록증을 보면 그게 아마 사십대 때 찍었던 사진일 거 같애. 탱글탱글 해. 그런데 지금 보면 쭈글쭈글쭈글 하거든. 자기 모습이 변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자기 모습이 변하고 자기 몸이 늙어가는 것들을 보고 하면서 ‘아, 참 세월에 장사 없구나, 참 변하는구나’ 변하면 변하는 대로 그걸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라. 그러면 거기에서 자기가 최선을 다할려고 하는 방법이 생긴다는 거라.

앞으로 좀 더 써야된다 할 것 같으면 고칠려고 하게 되는 거고.

 

또 무상한 걸 이해하기 좋은 것이 주변에는 또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 돌아가신 분들이라든지, 아니면 주변에 갑작스럽게 이렇게 만났는데 확연하게 변한 모습을 본다든지. 그러면 그걸 그냥 밀쳐낼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일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 나도 언젠간 저렇게 죽겠지’ ‘나도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구나’ 길잃은 노인을 볼 거 같으면 ‘아이고, 나도 언제 저렇게 치매걸려가지고 집을 못찾게 될지도 모르는구나’ 자기 스스로 그걸 돌아보면서 무상한 걸 갖다가 이해를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돌아보면은 우리가 무상한 것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자꾸 부정할려고 하고 밀쳐낼려고 하지 말고,

 

무상한 걸 이해하는 것이 뭐라고 그랬어요?

지혜의 단초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행하기 위한 의욕이 생기는 것들입니다.

수행할려는 마음들을 자꾸 그런데서 일으켜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멀리 할려고 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라.

아까 평온하고 고요한 것들도 단계가 있다고 했듯이, 그렇게 받아들이지를 않으면 수행에서도 무상한게 잘 안 보여집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들을 관찰하는 것이 익숙해질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것은 단계를 밟아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무상한 성품들은 자꾸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삼법인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생겨날 때까지는 그 단계를 계속 반복해야 됩니다.

수행하다가 또 무상한 것이 가끔 보였다가도 또 안 보입니다. 그러면 또 일상생활에서 무상한 걸 자꾸 이해할려고 하고 받아들일려고 하고, 그것도 수행에서 있는 그대로 그냥 지금 내가 사띠가 약하고 또 무상한 것이 안 보이면 그냥 사띠 하라는 거라. 대상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러면서 자꾸 몸과 마음이 분리가 되고 이러는 과정을 거치면서 무상한 것이 보이게 되는 거라.

 

무상한 것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 될까, 수행에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는데 배가 불러오는 것이 보인다, 그 배가 불러오는 것이 보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배가 불러오는 것은 다른 물질적인 현상입니다.

이게 구분이 탁 돼야 됩니다.

그게 만약에 구분이 안 되면 배가 꺼지고 있는데도 자기 마음은 배가 불러온다고 그렇게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게 구분이 돼야만이 조금이라도 핀트가 어긋나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라.

 

그러면 마음이 얼마나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야만이 가능하겠어요?

그래서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구분이 돼야만이 가능한 거고,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보여야 되는 거라.

정신적인 현상도 배가 불러오는 것이 보이는 것이 그냥 한번 보이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사라지는 것들만 계속적으로 보이도록 되는 거라.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은 잘 안 보이는데 계속 사라지면서 파괴되는 것들이라. 그런데 사라지는 게 사라짐만 계속 보이지, 앞에 사라지는 것이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사라짐만 내 앞에서 눈앞에서만 보이는 거라. 정신적인 현상이 계속 사라지는 것만 보이도록 돼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세 단계를 거쳐갑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분명히 보여야 되고,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보여야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정신적인 현상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이게 구분이 된 상태에서 분명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끊임없이 돼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게 보이고 나면,

그 현상들이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는데 빠르게 바뀌는 것이 보여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게 , 이게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내가 체험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완전하게 이해를 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럴려면 수행을 오래도록 해서 익어져야만이 가능한 거지, 그냥 앉으면 무조건 무상한 것이, “스님, 왜 안보입니까?” 내가 어쩌라고, 그걸. 내가 그걸 갖다가 보이도록 앞에다가 드러내줄까, 어쩔까?

여러분도 마음을 조급하게 가지지마.

무상은 먼저 이해를 해야만이 무상을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해하지 않는 상태에서 체험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여섯 단계를 잘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머지 않아서 빨리 도와 과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