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수행문답 - 마하테로 아짠 빤냐와로 삼장법사 스님 (20230730.담마와나선원 안거입재)

담마마-마까 2023. 8. 2. 12:14

https://youtu.be/jdaYBu98btk

* 수행 문답 (20230730. 담마와나 선원 안거입재 법회 후)

 

... 톳까틴 의식을 가서 주관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느낀 게 거기는 쉽게 말하면 자기들이 보시하는 게 없는데도 너무 좋아들 해. 우리 같은 그런 기쁨을 표현하는 정도가 아니고 남들이 공덕을 쌓고 좋은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꼭 자기가 행하는 것처럼 그렇게들 합니다.

그게 뭔가 하고 이렇게 보니까 성향 자체가 남의 일에 대해서 무관한 편이긴 한데, 상가에 공양 올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질투하는 것들이 없어요. 여기는 대부분 보면 누가 만약에 백 원을 했다 아니면 천 원을 했다 할 것 같으면 비교하는 습관들이 있는데, 거기는 그런 게 없어요. 자기는 못하더라도 아니면 남들이 천 원 할 동안에 자기는 십 원을 하더라도 자기가 천 원 하는 것처럼 기뻐해요. 그런 게 태국인들한테는 좀 부러운 점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질투의 유형들이 많이 있잖아. 분노의 유형 중에, 질투하는 거하고 또 뭐가 있죠? 시기 질투하는 거 또 인색한 것들, 후회하는 것도 들어가지고, 그다음에 또 분노하는 것도 있고, 그중에 질투하는 부분들이 쉽게 말하면 성냄이라고 하는 것들이 좀 적으면 질투하는 것들도 더불어서 많이 사라지고 그런 것들을 느꼈어요. 직접.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본인이 하는 공덕도 좋지만 남이 하는 공덕에 대해서도 기뻐하는 마음들을 가지면 성냄 부분들도 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왔습니다.

짧은 기간, 한 5일 동안 있다가 왔는데 소중한 것들을 좀 보고 이렇게 왔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며칠 묵으셨어요?)

5일. 아, 5일이 아니라 4일, 갈 때 비행기에서 하룻밤 보내고, 올 때 비행기에서 하루 보내고.

그게 어찌 보면 어른 스님들이 감당해야 될 몫이라. 그런 것들이 있으면 상좌나 제자들이 있는 데들은 가서 조금 챙겨주고 좀 다독거려주고 와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럽니다. 어떨 때는 올해는 좀 안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꼭 초청해. 안 갈 수도 없고.

 

................................ 4;00

 

자, 그건 그렇고, 뭐 질문할 거 있으면 질문들 해보세요.

 

수행자 질문 : 전에 다녔던 절에서는 테라와다 불교였거든요.

그런데 사마타 수행 먼저 하고 그다음에 어느 정도 단계가 오르면 위빳사나를 가르쳐준다고 하시는데요, 사마타 수행은 너무 어렵고 좀 저한테는 맞는 거 같지 않아서 그냥 위빳사나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 두 개 다 하기 싫은 게 아니고?

수행자 : 아닙니다.

스님 : 이치적으로 그렇잖아. 사마타는 하나만 알아보면 되는데, 위빳사나는 나타나는 족족 사띠해야 되는데 더 훨씬 어려운 거라.

그걸 어떤 걸 먼저 하고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고, 수행의 기본적인 원칙이라는 게 있어요. 사마타 수행을 하든지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지 원칙만 잘 지키면 괜찮아요. 특히 수행을 하다가 어떨 때는 내가 사마타 수행을 하겠다 해서 사마타 수행을 했다가 또 어떨 때는 위빳사나로 전환하기도 하고, 이렇게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스님 입장에서는 양쪽을 다 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배제할려고 하지 말고, 그걸 또 나눌려고도 하지 말고, 그러기 전에 그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돼요.

원칙이 뭐냐면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놓치면 안돼요.

대상을 놓치면 일단 수행은 거기서 스톱이 됩니다. 현재 지금 내가 일어나는 대상들을 놓치지 않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야 되는 거고, 하여튼 가만히 있으면 코끝이든지 뭐든지 변화하고 있는 거 움직이고 있는 것들 크게 크게 드러나는 것들은 반드시 사띠할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것들이 원칙이 첫 번째가 되어야 되는 거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우선 내 마음이 대상으로 다가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이 나한테 부딪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마음이 어떻게 돼야 되요?

고요하고 가볍고 그리고 부드러워져 있어야 됩니다.

고무공을 예를 들면 좀 말랑말랑한 고무공들은 이렇게 튕기면 적극적으로 통통통통 잘 튕겨가잖아. 그와 같이 마음이 아주 부드러워져 있어야 돼요. 그리고 가벼워져 있어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힘 안 들이고 갈 수가 있는 거지, 그렇게 우선 마음을 만드는 것들이 우선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먼저 찾을려고 하지 말고, 대상에 다가갈려고도 하지 말고 우선 마음을 먼저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는 것들이 우선이 돼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몸이 긴장돼있는 것들도 자꾸 풀려고 하고 마음이 어딘가 망상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어디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든지 할 거 같으면 일단 그것들 다 제거시켜야 돼요.

그거 다 제거시키고 나면 마음은 가만히 있는 법이 없거든. 그러면 뭔가를 찾아요. 마음이. 그 대상을 찾는 거라. 그렇게 먼저 마음을 만들어야 돼.

그게 두 번째 원칙이고.

 

세 번째 원칙은 그게 위빳사나로 전환할 경우를 대비해가지고 대상 자체를 오래도록 그 대상에 머물려고 하는 습관들을 가지면 안 돼요. 왜 그러냐면 대상은 어차피 어떤 경우든 변하기 때문에. 그게 단단한 것이든 무른 것이든 뭐든 간에 변하게끔 되는 것인데, 자꾸 오래 머무는 습관들을 가지면 수행하다 보면 자꾸 무기에 빠집니다.

그속에서 가만히 놀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자기는 수행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아니거든. 그래서 그렇게 하는 습관을 들이면 안 되고, 그냥 가볍게만 대상을 알아차리고 뻐져나와야 돼.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대상이 나타나면 또 다른 대상을 탁 보고 이런 식으로.

 

만약에 사마타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잖아. 끊임없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잖아. 그런데 계속 들이쉬고 내쉰다고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의식적으로 자꾸 끊어야 돼. 들이쉬고 내쉬고가 끝난 거야. 끝나고 나서 다시 또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고.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고 마음을 먹어야만이, 그렇게 해서 계속 따라가야만이 대상이 변하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리고 대상에 안착을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이 세 가지 원칙은 수행하는데 항상 지켜야 됩니다.

이걸 지키지 않고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뭘 하더라도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나한테 안 맞다고 그렇게 판단을 하는 거라. 안 맞는 건 없어요. 내가 그걸 안 할려고 하는 것뿐이라. 수행하기 싫은 거지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되도록 사마타 수행을 같이 겸하는 것이 좋아요.

왜 그러냐면 어차피 위빳사나 수행은 선정을 어느 정도 경험을 해보아야만이 위빳사나 수행 맛을 봐. 그전에는 그냥 내가 억지로 하게끔 되는 거라. 억지로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고 수행이 힘들고 괴로운데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선정 경험을 하고 나서 하는 것이 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마타를 너무 등한시하지 말아요.

 

가장 좋은 거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사마타를 같이 겸하는 것이 가장 좋아요.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고 칩시다 이.

그럼 경행을 한다고 하고 쭉 이렇게 나아가잖아. 그냥 천천히 걸을려고 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그냥 걷고 나서 그다음에 갈 때는 아예 돌지 말고 뒤로 걸어가는 거라. 뒤로 걸면 사마타 수행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뒤로 할 땐 빨리 걸을 수가 없잖아.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하는데.

그런데 집중은 굉장히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뒤로 하면서 걷는 걸 집중을 하고 다시 또 앞으로 갈 때는 편안하게 또 하고, 그렇게 몇 번만 왔다갔다 하고 나면 사마타 수행 효과도 가지면서 위빳사나 수행효과도 가져오고.

 

좌선수행을 하더라도 호흡관찰 하더라도 느낌을 관찰하고 있다가도 느낌관찰이 어느 정도 잘 되고 있다 할 것 같으면 일단 스톱을 하라는 거라.

그리고 마음이 고요한 상태다 하고 판단이 되면, 고요하지 않으면 일단 다시 고요하게 만들어야 되는 거고, 고요해지고 나면 그냥 호흡만 관찰하라는 거라. 그럼 집중이 확 커지는 게 보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다시 또 집중하는 거고.

 

그렇게 스스로 자꾸 조절하는 능력이 생기면 어느 순간에 보면 대상이 탁 그속에 내가 탁 달라붙어갖고 그냥 같이 딱 움직이는 게 보여요. 대상이 있고 그걸 관찰하는 마음이 두 개가 따로 보이는데, 이게 딱 붙어가지고 가는 게 보인단 말이라.

그 상태가 뭐냐면 선정을 딱 경험하는 상태라. 그러고 나면 수행이 수월해집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조금 더 효과적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배제하지 말고 안 맞으니까 나는 위빳사나만 할란다, 위빳사나도 안 맞아.

 

수행자 : 그런데 사마타 수행하고 위빳사나 수행하고 방식이 약간 좀 다른 것 같아서요...

스님 : 그래서 내가 두 개를 설명해줬잖아.

수행자 : 사마타 같은 경우는 호흡에 집중하다가 어떤 망상이 떠오르면 순간 떠오른 걸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데, 위빳사나는 제가 책을 보니까 위빳사나는 호흡에 집중하다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지켜봐야 된다고...

스님 : 그럴 능력이 생기면 하고 안되면 그냥 무시하고 호흡을 하면 됩니다.

 

수행자 : 사마타나 위빳사나나 수행 방법은 똑같은 거 아닌가요.

스님 : 뭐 처음에는 다 똑같습니다. 억지로 어쨌든 대상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이는 거기 때문에 실제로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라. 실은.

명칭을 붙이든 뭘 하든 간에 어차피 내가 대상을 잡을라고 그냥 움켜쥐고 잡을라고 하게 되기 때문에 다 사마타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망상이 지배해가지고 나를 누를 정도가 아닐 것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그냥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 가지고 사마타 위빳사나 구분하지 말고,

어쨌든 대상에 계속적으로 그걸 사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야 뭘 하든지 할 거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대상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어요. 하나가 가장 수월한 방법이라는 거라. 여러 가지 하는 것보다는.

 

수행자 : 호흡에 집중할 때 코에 집중할 수도 있고 배에 집중할 수도 있는데

스님 : 그대신에 따라 왔다갔다 하지 말고, 이번에 한 시간 동안 배를 한다 할 것 같으면 배만 하고, 되든 안 되든. 그다음에 코끝이라 할 것 같으면 코끝을 딱 정해졌으면 그냥 정해진 대로 하면 되고, 그래서 어느 쪽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대신에 자기가 익힌 습관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습관이라는 것이 있어가지고 코끝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은 대부분은 사마타쪽으로 흐르기가 쉬워요.

그런데 배를 관찰하는 수행자들은 사마타 쪽으로 흐르는 것들을 스스로가 많이 방어가 됩니다. 그래서 찰나 삼매나 초선정 부분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적으로 대상들을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하는 힘들은 배가 훨씬 크긴 커요.

그런데 그거는 개인 차이인 거고, 코끝을 하든 배를 하든 처음에 할 때는 어떤 것이든 관계하지 말고.

 

................................ 15:15

 

수행자 질문 : 스님, 처음에 좌선을 할 때는 호흡이 들이쉬고 나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구요, 호흡이 들숨이 긴지 날숨이 긴지 그리고 짧은지를 압니다. 그게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이게 들숨 날숨이라는 것도 좀 없어지구요 그냥 계속해서 느낌만, 코끝에 있어서 느낌만 계속 반복적으로 숨이 보이는 거 같거든요.

스님 : 느낌이 어떻게 보이는데요?

수행자 : 스쳐가는 느낌이 계속 일어나요. 그 상태로 가면

스님 : 똑같애? 그 느낌이? 왔다갔다 하든지 뭐 이런 느낌도 없이 그냥 스치는 느낌만 계속 있어요?

수행자 : 네. 스치는 느낌만 계속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치는 느낌이 계속 새롭게 보입니다. 보여지면서

스님 : 변하는 것은 보이는 거네요?

 

수행자 : 네. 순간순간이 다 다르게 보여지는데요, 그러면 이게 들숨인지 날숨인지 구분을 좀 안 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해도 관계없습니까?

스님 : 관계없습니다. 근데 명칭의 단계에서 실재하는 것들로서 관찰이 전환됐다는 얘기거든요. 그전에는 억지로 따라간 거고, 그러다가 명칭을 안 붙이더라도 자연스럽게 지수화풍 중에 어느 것들이 보인다는 거거든요. 그게 스치는 움직임으로 인해가지고. 그러면 그렇게 보면 돼요. 그렇게 보이는 것이 어쨌든 조금씩 변화하는 것으로서 보이는 거잖아? 그럼 그대로 그냥 보면 돼요.

 

수행자 : 그런데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님 : 알 필요 없어요. 단지 그게 들이쉬는 숨이든 내쉬는 숨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 단지 그냥 거기서 스치는 느낌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돼요. 그러다 보면 조금 더 진행이 되면 다른 현상들이 틀림없이 일어나요. 들이쉬는 숨이 스치는 것만이 아니라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따갑게 느껴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변화되는 현상들이 있고, 그것들이 멈추는 것들이 보이고 이렇게 해요. 그러고 나면 인제 들숨 날숨이 명확하게 보여지는 거라.

 

그러기 전이기 때문에 그냥 지금은 그냥 그대로 편안한 상태 그대로 그냥 따라가기만 하고, 그대신에 변하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라.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자동으로 그냥 오토매틱화 될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럴 때는 딱 멈추고 호흡은 계속하고 있지만, 알아차리는 사띠는 멈추고 나서 마음을 한번 관찰해보라고. 마음을 관찰해보면 마음이 아주 가벼워져 있는 느낌이 있는지

수행자 : 마음에서요?

스님 : 그렇지. 그것만 보고 아주 가벼워진 상태면 다시 또 호흡으로 따라가고

만약에 안 됐을 때는 마음을 먼저 고요하고 가벼운 상태로 먼저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 그거만 해주면 오토매틱화 하는 것은 방어를 해주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 해나가면 됩니다.

 

수행자 : 마음을 갖다가 거기서 좀 빠져서 마음을 좀 전반적으로 보고, 다시 또 돌아가고 그런 식으로

스님 : 지금의 상태에서는 마음을 관찰하기가 아주 수월해져요. 그러니까 가볍게 마음의 상태만 관찰하고 나서 마음의 상태가 바르다 할 것 같으면 다시 또 호흡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그렇게 해봐요. 짧은 찰나지만 그거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번 해주면, 그냥 하면 돼요.

지금은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죠? 수행이? 앉아서 수행하고 있으면?

수행자 : 좌선은 그냥 자연스럽습니다.

스님 : 그러면 계속해요.

 

수행자 : 경행도 자연스럽구요. 그런데 경행할 때 저는 좀 천천히 하는 편인데,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하얀 빛이 떠요. 경행할 때도.

스님 : 경행하는 이유가 뭔데 자꾸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라 했는데.

수행자 : 그게 저는 움직임을 알면서 경행을 한다고 하고 있거든요. 다리를 움직임 하고 의도에 집중을 해서 경행을 했는데 저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냥 빛이 뜨거든요.

스님 : 천천히 하니까 그렇지. 그게 지금은 경행의 효과를 전혀 못 보고 그냥 집중하는 것으로만 계속 끌려가버리니까, 나중에 뼈마디 다 보겠다. 그러다가. 그러지마. 경행 그렇게 천천히 할 필요 없어.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냥 평상시대로 오히려 조금 빠르게 해도 관계없어요.

떨어지는 힘을 뒷받쳐주고 노력의 힘들을 배가시켜주게 하기 위해서 지금 경행을 보조적인 역할로 하고 있는 거거든요.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그런데 그걸 천천히 해버리면 그 효과가 전혀 없어져버린다고. 그러니까 계속하면서 다리 상태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보이는 거라. 그러지마.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하다가 경행을 하면 내 몸의 뼈마디가 몇 개까지 붙어있는 것이 다 보인다 하고, 지가 그렇게 하면서 그걸 좋다고 그걸 하고 있어요. 바보 같은 짓이라. 그러지마. 그거는 좌선에서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좌선에서 그렇게 해. 경행은 경행이라.

 

수행은 어떤 경우든지 집중하는 힘과 노력의 힘이 균형이 맞아야만이 수행이 원활하게 잘 돼. 그런데 집중하는 힘은 좌선에서 가져올 수가 있고 올 가능성이 크고, 노력의 힘은 경행에서 가져오는 거거든.

노력하는 것은 대상이 많이 바뀌어야만이 노력의 힘들이 같이 배가가 되는 건데, 대상이 그렇게 단순해져버리면 안 되는 거라. 이해됐어요?

수행자 : 아, 대상이 바뀌어야 되고 간결해야 되는

스님 : 그래서 경행할 때는 경행뿐 아니라 멈추는 것도 있고 도는 것도 있고 다시 또 서가지고 (배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들이 같이 겸해지도록 만들어놓은 이유가 그런 이유들이라.

 

수행자 : 그러면 경행을 할 때는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것이 좋은가요?

스님 : (끄덕끄덕)

수행자 : 그러니까 떨어져서 소리라든가 이런 것까지 다?

스님 : 경행하면서 소리는 왜 듣는데?

경행하면서는 소리 듣고 관찰하고 하면 안 돼. 그냥 발 일정한 지점 발바닥의 한 점이든 아니면 앞에 부분이든 거기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그냥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됩니다.

다른 건 다 닫아. 보고 듣고 하는 건 다 닫고, 마음은 오로지 거기에 집중해가지고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돼. 됐어요?

수행자 : 알겠습니다. 발에 일어나는 느낌에, 알겠습니다.

스님 : 빠르게 해. 천천히 하지 말고.

수행자 : 알겠습니다.

................................ 22:25

수행자 질문 : 스님, 실내가 아니고 바깥에서도 닫아요?

스님 : 닫아요. 위험한 곳이 아니면. 위험한 곳이면 경행하지 말고.

그러니까 괜히 산보, 집에 어디 공원에 산책하면서 경행한다, 그거 바보 같은 짓이라. 경행은 좌우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곳에서, 위험한 곳이 아니고, 어디 피해를 입히는 곳도 아닌 곳에서 왔다갔다 해야 되는 것이지, 뺑 돌아가면서 산길 가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그거는 걷는 거 그냥 아는 것뿐이라. 걷는 운동이지 그거는 경행이 아니라. 착각하면 안돼.

................................ 23:07

수행자 질문 : 스님, 경행할 때 눈감고 하면 안 됩니까?

스님 : 아까 얘기했지만 딱 정해진 데서는 눈감고 해도 돼. 그거는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아까 같이 뒤로 걸어라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경행을 자꾸 엉뚱한 것만 할려고 그렇게 하는데, 하지마. 그러지마.

집중하는 힘들만 자꾸 키우면 안 돼.

 

................................ 23:38

 

수행자 질문 : 혼자 지내면서 아침저녁으로 법문을 듣거나 명상을 하고 있는데, 지금 회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지내다 보니까 법문도 공부하고 수행도 하고 있지만 수행을 하고 출근을 해도 내 마음속에 화가 나고 제가 여러 가지 자기견해에 갇혀있다 라는, 자기 견해에 갇혀있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느껴져서,

환경을 좀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동체에 학교라는 곳을 같이 지내는 것이 더 수행에 도움이 되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공동체 학교라는 곳을 가봤습니다.

그곳은 한 백명 정도가 같이 공유주택을 지어서 지내는 곳인데, 제가 몇 달 경험을 해보니까 굉장히 선한 사람들이고, 규칙은 불교의 오계나 팔계라고 얘기하지 않지만 그곳의 규칙이 거의 불교의 계율과 같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애의 에너지를 보내는 그런 좋은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좋다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그래서 나 혼자 수행을 하면서 나의 견해에 계속 빠지는 것보다는 그곳에 있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분들은 불교 스님이나 이런 분들 모셔서 강연을 듣기도 하고 신부님을 모셔서 강연을 듣기도 하고 이런 일들은 있지만 불교수행 공동체는 아닙니다.

 

그런 곳이기에 제가 평생 수행을 해서 저는 조금이라도 깨달음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지금 현재로서는 그 공동체 학교와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이 저한테는 불교수행을 열심히 하는데 오히려 에너지를 주지만,

그곳의 문화라든가 질서의 기준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래도 공동체 활동도 해야 되고 하다가 보면 불교수행 시간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

이게 불교수행이 아니어도 그것도 불자답게 사는 어떤 수행인데 내가 너무 높은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힘듭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아니면 선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서 하는 것이 불교공동체가 아니라도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 : 하... 여러 사람들 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하고 같이 수행하고 하는 것이 더 훨씬 좋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거고,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일부러 사람들이 집중수행을 갈 이유가 없이 집에서 법당 만들어가지고 지 혼자서 하면 되겠지. 근데 그건 잘 안 되거든.

그래서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단지 문제가 뭐냐면 지금 가고 있는 곳이 불교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공동체를 하는 것이고 해탈하고는 관계없는 곳이잖아.

앞에 거는 문제가 안 돼. 종교를 어떤 것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지, 부처님 자신도 수행하고 깨달음에 이르는데 그건 전혀 의문의 대상이 되지를 않았거든. 그래서 그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나아가는 지향하는 방향이 뭐냐 하는 것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지금 명상을 하고 있는 그룹이 두 그룹이라. 하나는 전통적인 수행방법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거고, 하나는 요즘에 만들어지고 있는 MBSR인가 그 방법이고. 그런데 명상효과는 훨씬 이 후자가 빨라. 현대화했고 또 바로바로 접할 수 있는 방법들을 택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안 할려고 하는 경향들이 강해져요. 여기에서는. 그리고 여기의 애초의 목적은 윤회로부터 탈출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런데 전통적인 수행방법은 (---) 이 윤회로부터 탈출하는 게 목표란 말이라.

그래서 더디더라도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이 있고, 요 방법을 택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공동체는 아무래도 이 방법보다는 요 방법일 거라. 아마.

그래서 지금 현재는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너무 거기에만 빠져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은 전혀 없어져버려요. 그것만 보충을 해주면 이것도 충분히 훌륭한 방법에 들어가진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권하고 싶은 거는 너무 깊게 개입해가지고 활동을 하면서 내가 무슨 거기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가지고 실질적인 일을 진행해나가고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지 말고, 그냥 그속에서 좋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충분한 좋은 에너지를 받고 그리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데까지만 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의 얘기들을 보면 첫마디에 딱 얘기하는 것이 혼자서 하면 개념 관념적인 것들이나 나라고 하는 것들이 강하기 때문에 하기 힘든 스타일이라.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이런 그룹을 지어서 하는 곳에 가서 해야 만이 좋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거는 충분히 가능하거든. 그 대신에 너무 깊게는 하지 말아라.

그러면은 충분히 삶도 좀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래서 너무 불교적이다 아니다 따지지 말고, 그리고 그게 지금 당장은 해탈을 목표로 하는 것이냐 아니냐 그것도 따지지 말고 그냥 같이 어울려서 명상하고 좋은 에너지 받는다 생각하고 하면 됩니다.

 

수행자 : 그 공동체는 명상을 하고 하는 것도 아닌데

스님 : 하고 있지 않은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왜 그러냐면 본인이 지금 현재 스타일로부터는 탈출을 해야 되거든. 그런데 본인 스스로는 못해. 그럼 거기서 그 영향을 받았으면은 쉽게 말하면 성격개조를 해야 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방법이 어떤 것이든 그거는 관계없다.

“하느님” 하더라도 그냥 “하느님” 해주면 돼. 그거 뭐 중요한 게 아니라.

스님도 어느 교회가서 강연해달라 해가지고 간 적이 있는데, 그런데 그날따라 조금 내가 일찍 도착이 됐어요. 어느 정도 스님은 딱 그 시간에 도착하거든. 보통 보면. 잡담하기 싫어가지고 가면 괜히 차 준다 하고 하면 그것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딱 시간되면 가가지고 탁 그냥 그 자리에 바로 서가지고 끝나면 바로 오는 편이고. 그날은 한 5분 정도 좀 일찍 도착이 돼가지고 보니까 한참 설교 중이라. 그래서 단상 앞에 가놓으니까 끝나고 나서 “하느님” 하는데 나도 “하느님” 붙여줘야 될 거 아니가. 어쩔 수 없이 그냥 “하느님” 하고 같이 해주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 31:25

 

수행자 질문 : 네...

스님 : 편안하게 하면 됩니다.

수행자 질문 : 네. 스님께 여쭌 적은 많이 없지만 그때마다 족쇄를 풀어주시는 것처럼 해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까 법문 중에 "지금 시대는 결심으로 도과에 이르는 시대가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것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스님 : 사리불이나 목련존자 같은 경우에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에 대한 명확한 이치를 알고 있었어요. 쉽게 말하면. 그 정도로 과거생부터 해가지고 쌓아 온 공덕들이나 수행들이 그걸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정도가 돼있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본인이 그런 서원들도 세웠지만.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미 삼마사나냐나(sammasana ñāṇa. 思惟智)에 도착한 상태에서 출발을 해요? 그건 아니잖아.

수행자 : 일어나면 더러운 것 보통은 둑카와 기쁨, 여여함 등의 균형을 주로 맞추려고 자꾸 하는데...

스님 : 어쨌든 그 정도의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시대에서는 쉽게 말하면 밑바탕에서 부터 시작을 한다고 봐야되는 것이고, 그러고 얼마만큼 과거생부터 공덕을 많이 쌓아가지고 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밑바탕부터 출발을 하는 상태일 것 같으면, 지금 이생에서 만약 내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서원을 세워가지고 다음 생에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기를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거라. 스님이 아까 얘기한 것은.

 

쉽게 말하면 수행의 풍토가 돼있는 환경조건에서 그 시기에 난 사람들하고, 전혀 그런 거하고 관계없이 그냥 물질적인 것에 풍족돼있는 세계에 태어난 우리들 하고는 이미 정신세계에서는 이미 차이가 나 있잖아. 나 있기 때문에 이사람들은 과거생에 서원이든 어쨌든 뭔 수를 쓰더라도 그렇게 해가지고 그시대에 태어나가지고 금방 부처님 말씀만 듣고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데, 예를 들어볼게요.

지금 스님이 “아, 참 무상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가지고 무상을 체험할 수 있어요? 지금? 못하잖아.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다원에 이르고 한 분들은 “참 무상하다” 하고 할 것 같으면 무상을 체험을 하는 거라. 그 정도의 정신상태가 돼있었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아까 스님이 극단적으로라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서원을 세워가지고 내가 지금 뭘 하겠다 하고 바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씩 한발씩 걸어가듯이 지금 눈앞에 있는 대상들을 분명히 사띠하면서 가는 것이, 그러고 나서 수행 끝나고 나서 아, 내가 얼마만큼 결과들이 드러나는가 하는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수행의 진척에는 오히려 훨씬 더 빠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 얘기를 하는 거라.

수행자 : 무슨 얘기인지 잘 알았습니다.

 

스님 : 그래서 일부 미얀마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의 시대는 법을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든지 아니면 조그만한 수행의 시간을 조금 들여가지고 해탈에 이른다든지 이런 시기는 이미 끝났다."

스님도 사실은 그말에 동의를 합니다. 죽기살기로 해도 겨우 한발짝 떼기가 힘들어. 지금 시대는 그래요.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들은 물질적인 거를 가지지 못하게 돼있어요. 그렇게 살려고 진짜 노력하는데도 물질적인 거 하나 없으면 한발짝도 내가 못 나가. 어디 법문 오라 해도 못 가는 거라. 그런 시대에요. 그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만이 가능한 시대인 것은 틀림없어요. 그런데도 그속에서 아라한이 태어나고 그속에서 수다원이 태어나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열심히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아마 그사람들은 과거생에 태어났으면 금방 그정도의 노력일 거 같으면 금방 깨달음에 이를 거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 하는 방법이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방법일 수밖에 없고.

그런데 어떡하나? 방법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을 다 통합하더라도 다 그런 수준의 방법밖엔 없는데. 단박에 탁 말씀만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방법들이 없는 걸 어떡하나.

그냥 죽을동살동 하는 것 밖엔 없어요. 그 수밖엔 없어요. 그래서 뭐랄까 ‘이 한 몸 안 태어난셈 치고 나는 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한발짝 떼기도 힘들어.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수행자 : 하나만 좀 더 여쭙겠습니다. 여쭈어볼 것이 좀 부분이긴 한데,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위인들이라 할까요, 여기가 왜 비어있지? 라는 그런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스님 : 그게 무슨 소리야?

수행자 : 심장 부근 자리가 보통은 수행자들이 굉장히 강하거나 굉장히 강하게 솟구치는 힘이 있거나 아니면 그냥 약하거나 나선형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 거기가 비어있는 분들은 어떤 분들인지?

스님 : 그걸 볼 수 있어요?

수행자 : 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가까운 분 중에도 있고 근데 지나치려고 해도 계속 생각이 나고

스님 : 그런데 왜 그걸 볼려고 하는데?

수행자 : 그래서 예전에 그걸 버렸습니다. 실은. 십년 전에 그걸, 저의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버렸는데, 이렇게 되면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데,

도과를 거쳐거면서 물질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아라한이 되도 완전히 토대가 사라지지는 않잖습니까? 그런데 그 도과를 거쳐가면서 그것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옅어져가는지 하는 것을

스님 : 그거는 본인의 생각이고, 아라한이 됐든 아니면 범부중생이 됐든 물질적인 토대는 똑같습니다. 물질적인 토대는 똑같기 때문에 그게 변화돼가지고 쉽게 말하면 도과에 오른 사람들도 그 자체가 변화된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정신적인 부분만 변하는 것일 뿐이지 물질적인 부분은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그건 단언을 하고 그렇게 보면 본인이 보는 사람마다의 가슴의 형태나 아니면 그 조건들 중에 다르다는 것은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일 뿐이야. 그건 주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거거든. 물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럴 것 같으면 그거는 수행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라. 그리고 그것이 본인 판단에 그것이 맞다고 확신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걸 왜 하느냐는 거라. 내 말은.

수행력에 따라서 물질적인 현상이 바뀐다 할 것 같으면 그게 도움이 되고 그거는 실증할 수 있는 것이지만은 그게 아닌데 왜 그걸 하느냐는 거라.

 

수행자 : 그렇다면 요렇게 한번, 물질은 분명히 다릅니다. 사람마다 정말 다르고 너무나도 위축돼가지고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제 나름대로 그런 분들을, 그러니까 제가 말할 수 없다는 특징이라고 할까요. 그런 분들의 유형은 보통 사람들은 다 개성이 결합이 돼있는데, 거기에 물질에 개성이 들어가게 돼있는데

스님 : 물질에 왜 개성이 들어가?

수행자 : 그러니까 그 사람의 어떤 정신성?

스님 : 자꾸 그런 식으로 곡해하지마. 물질은 물질인 거고, 정신은 정신인 거지

수행자 : 물론 분류돼있지만 봤을 때 보통 사람들이 그게 같이

스님 : 아닙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그렇게 결합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쉽게 말하면 이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계속 존재를 해야 되는 거고, 변화가 되지 않아야 되는 거고, 그런데 그사람들도 어쨌든 물질도 바뀌어나가고 정신도 바뀌어나간단 말이라.

결합이 된다고 하는 것은 상주하는 거와 마찬가지라.

그런데 그건 불교적으로 전혀 그거하고 관계없는 거라. 변하는 것이지, 상주하지 않는 것이지,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어? 그거는 극히 개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스님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은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실재적인 것들을 알아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수행에 도움이 안 돼.

수행자 : 예. 저도 오래전에 내려놓은 것들인데 여쭤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없어서

 

스님 : 그런데 사실은 놓기가 힘드는 것은 틀림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안 지닌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거기 때문에, 그런데 내려놔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정신이 파괴돼. 그건 단언할 수 있거든.

지금 단언할 수 있는 게 정신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좋은 마음들을 가질 수 있는데 나중에는 계속적으로 사악한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게 나중에는 나 같이 되는 거고, 그러다가 몸이라고 하는 것까지 고장을 일으키게 돼요. 그거는 스님이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그거는 빨리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 : 지금은 그냥 안을 보듯 밖을 그냥 무상하게 그렇게 알아라는 거지요?

스님 : 그렇지. 고정돼있는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아, 지금은 요렇게 보이네’ 하고, 그러고 나서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 43:25

 

수행자 질문 : 스님, 절박함을 잊지 않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님 : 그럼 어떻게 할까? 그러면.

아, 절박한 것! 주변에 누가 병들어 아픈 사람들이나 죽은 사람들 본 적이 있어요?

수행자 : 있죠.

스님 : 있어요? 본인 일이라곤 생각을 안 해봤죠?

수행자 : 해봤어요.

스님 : 잠깐이지 그게 가슴에 확

수행자 : 예. 항상 유지되지는 않아요.

스님 : 나에게 와닿고 그러진 않죠?

수행자 : 깊이 와닿은 적도 있는데 제가 (---) 때문에, 그런데 그 상태를 벗어나면

스님 : 그러니까 다시 또 돌아와져버리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생로병사를 주변에 있는 걸 접해도 절박하게 와닿지를 않는데, 그게 계속 지속되질 않는데 뭐를 갖고 절박함을 일으킬까? 본인이.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당장 아픈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수행 안 하더라도 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데 뭘로 가지고 일으킬까? 일으킬 대상이 뭐가 있어요? 별로 없죠!

그런데 왜 절박함을 일으킬려고 해? 지금 나이에?

수행자 : 제가 절박함을 경험했던 때가 그것이 유지되지는 않았더라도 분명히

스님 : 안 돼요. 유지가 안 돼요.

수행자 : 그때 절박할 때가 편하고 좋았었거든요, 저한테는

편안하게 되니까, 미묘하게 좋았던 것 같아요. 제가 게으름 부리고 하니까, 진짜 절박했을 때는 죽었다 생각하고 죽든 말든 죽기 살기로 하니까, 그래서 그 생각에 편안해지면 잊어버려지니까 아, 그것을 계속 유지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 좋겠다 하는 좀 막연한 생각을

스님 : 몸 관리를 하고 하는 것은 절박함을 일으켜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자기가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약속한 것은 자기가 지켜나가야 되면서 유지해 나가야 되는 것이고, 스님이 얘기하는 절박함은 빨리 내가 깨달음에 이르러야 된다는 그것들을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수행자 : 그것도

 

스님 : 그런 것들은 지금 현재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거는 쉽게 말하면 지금 현재 이생에서 사람 몸을 받았을 빨리 해탈에 이르러야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그거는 지금 본인한테 일으켜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럼 차라리 그걸 일으켜야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을 선한 마음이 자꾸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훨씬 낫다는 거라.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자꾸 일어나도록 만들어가지고 그 선한 마음이 일어날 거 같으면 어차피 나는 수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러면 수행을 하면서 자꾸 변하는 것들이 보이면 그때 인제 절박한 것들이 드러나지는 것이지 지금 외부적인 것으로 가지고 젊은 사람들이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얘깁니다.

차라리 그렇게 절박한 마음을 경구 하나를 통해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오히려 나중엔 절박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이 되게 됩니다.

 

스님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얘기고, 그다음에 만약에 몸에 지병이 있어가지고 그걸 관리를 잘 안 하면 몸이 많이 나빠진다든지 아니면 병이 난다든지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그거는 본인이 철두철미하게 관리해야 됩니다.

그거는 만약에 일정한 시간 동안에 뭔가를 해야 되고 뭔가를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본인이 마음을 먹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해야 되는 것이지 그건 절박한 부분하고 관계가 없다는 거라.

 

수행자 : 만약에 제가 몸이 아파서 빨리 낫고 싶다는 절박한 그런 수준이 아니라요, 예를 들면 제가 되게 젊고 건강해보이지만 제가 걷지도 못하고 숨도 못 쉬고 이럴 만큼에 오랫동안 아픔이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큰 고통이 있었고 그리고 그거를 나름대로 수행을 통해서 많이 벗어났고, 그런데 지금 일으킬 수 있는 절박함이라는 거는 저도 아직 체험이 완성에 이르지 못했지만 제 과거를 돌아봤을 때,

예를 들면 이런 감각들이 굉장히 거칠고 보통 이런 생각들이 많고 하다 보니까 제가 뭘 먹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거친 감각에 거의 폭력 상태로 당하고 살았는지 모르다가 한꺼번에 이렇게 몰아치면 괴로운 것이 온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저기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 특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시끄러운 곳에서 거의 갈리다시피 살아가는데 그런 걸 보면 너무 아프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걸 좀 더 쉬게 해줄 수 있는, 더 그것들이 커지기 전에 쉬게 해주는 능력을 갖고 싶다

스님 : 누구? 다른 사람을?

수행자 : 저부터 쉬어야 되지만 다른 사람도 좀 모르잖아요, 자기가 갈리고 있는지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있고 그런

스님 : 그래. 그거는 이해가 가는데 본인이 그 상태에 이르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면은 그 사람들은 그걸 따라오게 돼있습니다. 내가 그걸 일부러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그러면 오히려 본인을 관리를 잘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고,

수행자 : 그냥 저의 몸과 마음을 잘 케어해나가면 저절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라는

스님 : 음. 그렇게 마음을 잡아야 되는 것이지,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본인이 과거에 아팠던 경험들은 그건 과거일 뿐인 것이고 지금은 현재 잘 생활해나가고 잘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하곤 관계없이 살아가지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럼 지금 현재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자꾸 만들도록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는 거라. 그래서 선한 마음들을 자꾸 지속적으로 일으키도록 하고, 안되면 항상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잖아. "자애를 지니지 않은 채로 말조차도 하지 말아라. 행동하지도 말아라." 본인이 자꾸 그걸 일단 실천해나가면서 그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지게 될 거 같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행복해지거든. 그러면 수행을 더 열심히 할려고 하면서 절박함을 일으킬 수가 있는 거라.

수행자 : 이걸 일으킬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스님 : 저절로. 빠르게 변하는 걸 보면은 절박함이 저절로 일어나게 돼있어요. 빨리 내가 끝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돼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래서 절박함이라고 하는 것은 체험을 통해가지고 일으켜야 되는 것이지 외부적인 조건들로서, 나이든 사람들은 일으킬 수가 있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 51:40

 

수행자 질문 : 스님, 한 시팅 내에서

스님 : 시팅이 뭐에요?

수행자 : 좌선.

좌선에서요 좌선을 시작할 때에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한 시간을 하고 있으면 한 시간 동안에 변화가 굉장히 심한 것을 말씀드릴려고 하는데, 처음에는 금방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마음이 아는 마음이 계속 쫓아가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계속 빨리 일어나다가 어느 순간에 그게 굉장히 고요해지면서 호흡이 일어나고 끝나는 사이에 마음이 막 요동치는 거를 느끼고 탁 끝나고 또 시작하고 탁 끝나고 이렇게 되다가 맨 마지막에는 그 고요함도 없어져가지고 나중에는 들숨날숨이 알긴 아는데 거의 변화가 없듯이 그냥 진동상태만 아주 미세한 진동상태만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스님 : 그때는 거의 호흡이 없어요?

수행자 : 호흡은 있어요. 알고 있어요.

스님 : 호흡은 있는데 느끼는 것만 진동상태라는 거지.

 

수행자 : 예. 그러니까 처음에는 들숨날숨이 좀 명확하다가 나중에는 들숨날숨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해지고 떨림이 더 강한데, 그 떨림은 이상하게도 온몸으로 느껴져요. 그게 가슴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고

스님 : 상카라.

수행자 : 그게 온 몸으로 느껴지면서 그렇다고 느낌이 좌선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데 어떤 때는 굉장히 고통이 없던 고통이 나타나기도 하고

스님 : 그걸 붙잡을려고 하진 않았어요?

수행자 : 아닙니다. 알고 그건 바로 오는데, 빨리 지나가지만 그것도 마치 떨림과 같은, 제 느낌에 같은 속도로 고통이 바로 그 움직임이 그렇게 변하는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굉장히 가볍고 그런 것조차 없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매번 할 때마다 그런 변화가 있고 일정치 않은 거라서, 지금 저는 수행이 지나가면은 뭔가 이렇게 일정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고

스님 : 아니야. 지금 오온이 분해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어져요.

힘들어지고 그 분해되는 것들이 뭔지를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냥 그거 하는데도 식은땀이 일어날 정도가 되거든요.

 

수행자 : 그래서 저는 수행이 후퇴하고 있나?

스님 :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냥 그대로 보면 돼요.

그대로 보고 어떨 땐 가끔씩 그게 너무 강하면 그걸 더 열심히 알아차릴려고 하거든. 그게 붙잡는 거거든. 그러면 그게 어딘가로 가. 어딘가로 가요.

수행자 : 한 번은 요 거의 뭐 예외적으로 일어난 건데 한 45분쯤 됐는데 참을 수가 없이 그 순간적으로 힘들어서 제가 일어났어요.

스님 : 하지마. 그런 건 하지마. 그럼 거기서 끝나버리니까. 그냥 그대로 봐. 지금은 힘드는 건 틀림없는데 그래도 그냥 알아차려야 돼. 그걸 편안하게 알아차릴려고 하더라도 편안해지지는 않는 상태이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은 그게 분해가 돼야만이 그게 개별적으로 다 따로 보여. 그러니까 아까 내가 이거는 상카라라고 얘기하는 이유가 그게 분해돼 보이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 힘들어도 계속 참고 해. 그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그게 한곳으로 모이고 아무리 붙잡아 볼려고 해도 튀어다니는 것이 보이고 하는 것들로 자꾸 발전돼나가는 거라.

수행자 : 그런데 그런 현상들이 말하자면 일정하지가 않고 좌선 때마다 그게 힘듭니다.

스님 :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수행자 : 그래서 이거 후퇴하고 있는 건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어떤 때는 텅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도 느끼고

스님 : 갖가지가 다 드러나집니다. 나중에 수행하고 나서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다시 또 보일 때가 있을 거라요. 그럴 것 같으면 그게 분명하게 보여져요. 선후도 보여지고 관계들도 보여지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지나가는 과정이겠거니 하고 생각을 하고 그냥 대상만 놓치지 않을려고만 하면 돼.

그리고 한시간 했으면 한시간 채워 무조건. 채우고 그러면 그쪽에서는 (---) 돼있어요. 그런데 그게 오래는 갑니다. 몇 달 정도는 틀림없이 갈 거라. 그리해도 그거 견디고 넘어가요.

 

나중에는 짠디님과 같은 체험들을 여러분들도 틀림없이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오온이 분해되는 과정들을 겪을 때는 힘이 들게 됩니다. 힘이 들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서 사이사이 중간중간에 생존욕구들이 분명히 일어나는 것도 보여지고 하거든. 그것들이 보여져야만이 서로 물리는 관계들을 알게 돼요. 그래서 어느 것 하나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로서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힘들 때는 힘든 과정들을 겪고 나야만이 그다음 단계 편안한 게 오는구나 하고 마음을 먹어버리고 쉽게 그냥 그 대상에 다가갈려고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그게 보통은 보면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좋은 것들 빛이라든지 뭐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틀림없이 요런 과정들이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걸 다 겪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과정을 짚고 넘어간다 하는 마음을 먹고 그냥 따라가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는 안돼. 그 과정을 겪고 나면 인제는 수행이 내가 사띠를 안 하고 싶은데도 사띠를 안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거든.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그냥 한번 해보십시오.

 

................................ 58:50

 

수행자 질문 : 제가 아직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퇴근하고 나면 굉장히 힘들어서 앉아있는 것조차도 힘들거든요. 그러면 벽에 기대어서 하기도 하고, (---) 어떤 날은 그것도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누워서 해도 되나요?

스님 : 관계 없습니다. 자지만 않으면 돼요.

누워가지고 잘 하지 말아라는 이유가 누워서 하면 금방 잠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건데, 누웠을 땐 반드시 손을 배 위에다 올려놓고 해요. 아니면 코를 할 것 같으면 코 앞에다 손을 살짝 대가지고 손끝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보도록 그렇게 해요. 해야만 잠에 잘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만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설혹 잠이 들면 또 어때? 그렇게 해가지고 잠에 폭 떨어지면 오히려 푹 잘 수가 있는데.

그런데 육체적으로 많이 피로하고 할 때는 몸을 쉬어줘야 되는 것이지 수행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 59:50

 

수행자 질문 : 경장 관련해서 질문이 있는데요, 아낫따락카나 숫따 라든지 경장 도처에 나와있는 정형구 중에 부처님께서 오온을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이든 밖이든' 쭉 하시는 그 정형구가 있잖습니까.

그중에서 올라리까(oḷārika)와 수쿠마(sukhuma) - '거칠고 미세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루빠는 거칠고 미세한 것이 뭔지 아비담마를 찾아보니까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그 외에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가 거칠고 미세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저희가 수행을 할 때 그런 것은 직접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인지

스님 : 체험해봐요. 요 상태(오온이 분해되는 상태)가 되면 나중에 경험하게 됩니다.

 

수행자 : 두 번째로 제가 궁금한 것은 루빠가 수쿠마 할 때 산냐도 수쿠마 한가요?

스님 : 다시 얘기해봐요.

수행자 : 물질이 미세한 물질을 경험할 때 동시에 나타나는 산냐도 미세한 종류인 것인지

스님 :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수행자 : 그렇진 않습니까.

스님 : 예. 그거는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들은 따로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들이 꼭 여기가 미세하다 해서 여기까지 미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됐습니까?

 

................................ 1:01:26

 

수행자 질문 : 좌선 중에 호흡을 관찰했는데 보통은 미세하고 길어져요. 미세하고 길어지는데 그날은 집중이 좀 잘됐어요. 호흡이 자꾸 치고 들어오는데 그게 들숨만 계속 느껴지는데 편안하게 잘 됐어요. 따라갈수록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중에는 제가 두려웠어요. 관념적인 생각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들어오면 나가야 되는데 들어오기만 하니까 그런 의심이 생기니까 이게 사라지게 됐거든요.

스님 : 나가니까 들어왔겠지.

수행자 : 제가 마음이 두 가지를 못 봐서 그런 건지, 그랬을 때 어떤 포인트를 봐야 되는지

스님 : 그냥 보이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게 빠르든, 쉽게 말하면 들어오는 일어나는 것만 보이든지 그거는 그냥 그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보기만 하면 돼요.

그대신에 마음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되도록 해야지, 그게 두려워버리면 현상이 깨져버리는 거라.

수행자 : 처음에는 편안했는데 속도가 빨라지니까 제가

스님 : 그냥 그대로 편안하게, 괜찮아요. 괜찮은데 단지 내가 그것을 캐치를 못 한 것뿐이지, 왜 그러냐 하면 나갔기 때문에 다시 들어온 것이거든요.

수행자 : 그런데 그것이 안 느껴지니까 의식만을 마음에 두고 하는 것이

스님 : 아니, 그러지 마요. 사띠는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놓치는 부분들이 틀림없이 있는데, 수행의 상태에서는 그건 놓쳤다고 하는 것보다는 그 상태가 안 보이고 다른 상태가 보이는 것들이 일어나져요. 그건 어쩔 수가 없어. 그러면 나는 느끼기에는 그냥 들이쉬는 것만 계속 들이쉬는 것처럼 보여요. 그 대신에 그렇게 보이면 보통 두려워져 버리는 거라. 계속 이렇게 빨라지니까 어, 이러다가 잘못될 게 아닌가 해가지고. 육체는 가만히 있는데 육체가 잘못될 거는 없어요. 그냥 그대로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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