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의도를 알아차리는 단계까지는 이르르자. (20230902)

담마마-마까 2023. 9. 2. 18:05

https://youtu.be/-sp1zl9JoQ8?si=P_173NkXetpmTxxJ

 

* 의도를 알아차리는 단계까지는 이르르자. (20230902)

 

수행들은 좀 어느 정도 지금 하고 있습니까?

(수행자 :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만? 가끔 얘기하는 거지만 결과가 안 나오는 '열심'은 '열심'이 아니게 되는 건 알죠? 결과가 나와야 됩니다.

 

오늘은 적어도 의도를 알아차리는 단계까지는 이르르자 하는 것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한 일주일 사이에 수행문답을 받은 것 중에 두 개가 마음에 좀 와닿는 것이 있어가지고 그 같은 것으로서 여러분들한테 법문을 이어가겠습니다.

 

미국에서 한 분이 전화가 왔는데, 그 전화 내용이 뭐냐면

마하시 방법으로 이렇게 쭉 수행하다 보니까 배가 부풀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관찰하다가 마음이 급하게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는 거라. 그러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계속 보고 따라가서 그게 사라지는 것을 보면 참 좋은데, 자꾸 수행 지도를 받으니까 “그거 가지마. 따라가지마! 그냥 배가 부풀고 꺼지고 하는 것만 계속 지속적으로 관찰해!” 이러니까 그게 마음에 탁 걸린 거라. 그런데 하다가 보니까 또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보여지는 거라. 그걸 억지로 다시 배가 부풀고 꺼지고 하는 곳으로 돌아오다 보니까 이게 뭔가 엇박자가 자꾸 나는 느낌이 드는 거라.

그래서 ‘아, 이거 수행을 이렇게 계속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해가지고 스님한테 전화를 한 분이 계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될까?

한번 주먹을 요렇게 한번 꽉 쥐어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힘이 들어가 있죠? 주먹을 쥐고 있으니까.

요걸 힘을 빼고 탁 한번 펴놔봐요.

어떤 게 편안해요? 놔버리는 게 편안합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방법에 대한 것도 뭔가 집착하는 것들이 딱 있으면 마음은 편안하게 대상을 관찰하지 못한다는 얘기라.

 

각각의 수행법들이 있습니다. 심념처 하는 사람들, 마하시 방법, 여러 방법들이 있는데 대부분 지금은 보면 어린 스님들이 수행지도를 하다 보니까, 그냥 테크닉만 자꾸 가르치는 거라. 자기 수행법에서의 테크닉만.

그래서 그 방법만 자꾸 고집을 하는데, 수행을 실제 하는 사람들은 각각의 수행법들이 그 현상에서 다 나타납니다. 마음에 대한 관찰도 해야 되는 거고, 법에 대한 관찰도 해야 되는 거고.

그런데 자꾸 마음을 '몸에 대한 관찰만 하라고, 자꾸 돌아오라'고 하니까 이게 걸려버리는 거라. 거기에서 수행이.

그분은 나이는 내가 여쭤보지는 안 해가지고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짐작컨대 아마 40대 50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얼마 전에 누가 전화가 왔는데, 수행이 참 잘되고 있어요.

잘 되고 있는데, 사띠를 하고 있을 때는 참 잘되는데, 그래서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수행을 하고 있는데, 사띠를 안 할 때는 한없이 게을러진다는 거라. 그래서 다시 수행할려는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데 일으키지 못하게 되는 게 문제라서 전화가 왔어요.

그분은 대충 나이가 20대 아니면 30대 초반 정도 됩니다.

 

두 사람은 어디에 걸렸을까? 뭔가 집착하는 게 있죠?

첫 번째 분은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형식들에 자꾸 걸립니다. '요 형식대로 해! 요 방법대로 따라가!' 하는데 자꾸 걸려가지고 수행에 진척이 없게 되는 거라.

뒤에 분은 게으름이 자꾸 일어나는 것지가 좋아해서 게을러 지는 거지 뭐 지가 좋아하지 않는데 게으름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게을러지니까 당연히 감각적으로 편해지고 싶은 거라. 그게 감각적인 욕망들이 일어나는 현상들이라.

 

그래서 그거 손을 움켜쥔 것을 탁 놔버리듯이 놔버리면 수행하는데 참 편해지는데 대부분 그러지를 잘 못합니다.

어떤 게 편할까? 어떤 게 다스리기 쉬워질까?

감각적인 거, 쉽게 말하면 게으름 부리는 거, 그거 좀 더 편하게 뭔가 수행하고 편하게 뭔가 할려고 하는 것들이 다스리기가 참 수월합니다. 그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들이라. 나이 든 사람들은 잘 안 그러죠? 뭔가 부지런히 움직일려고 하고 그러지 가만히 있는 성격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앞에 분은 여러 가지 형식들에 얽매여있고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보통 한 30대, 40대 넘어 돼가지고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가 있다, “이 방법대로 이 학원에 가서 공부해!”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거기에 탁 매여있기 때문에 되게 뭐라 합니다.

“어떤 형식에 따라서 살아야 되고 그래야만이 니가 잘된다!”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그 카테고리를 만들어 놔놓습니다. 만약에 학원을 빼먹었든지 한 자녀가 있다, 그러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놔줘버리고 나면 애가 좀 마음이 편해지면 다시 또 잘할 수도 있는데, 과연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마음은 사실은 그렇게 해야만이 편안해집니다. 나도 편안해지고 상대방도 편안해지고.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에 자꾸 매이다 보면 수행은 자꾸 뭔가를 움켜쥘려고 하게 됩니다.

대상도 보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내가 억지로 마음을 다가가서 사띠를 할려고 하고, 경행도 억지로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들을 하다 보니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점점 더 느려지게 되는 거라. 딱 매여져 있는 거라 형식들에.

 

그런데 사실은 끊기 힘든 거는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도 있고, 또 수행을 하다가 보면 탐·진·치가 일어날 때 탐진치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라고 하는 것에 딱 결합을 해가지고 '나'라고 하는 것에 딱 매여져 있어서 탐진치가 떨어지질 않는 거라.

그리고 사띠한다고 하는 것이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돼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절대 탐진치가 쉽게 사라지질 않습니다. 그러면 그걸 그냥 관찰하고 있는 거라. 성냄을 관찰하는 거라. 그러면 성냄은 자꾸 변하기는 하겠지만 성냄이 사라지지는 않고 있는 거라.

 

이런 4가지 종류들 집착하는 것들이 좀 없으면 참 수행이 편할 뿐 아니라 해탈에 이르르게 되는데, 그래서 부처님도 "다섯 가지 오온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버리면 해탈에 이르른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갈애로부터 벗어나야 해탈에 이르른다 하는 것이 아니고.

갈애는 여러분들이 그게 생겨나는지 어떤지도 잘 모릅니다. 실제로는.

 

그래서 수행은 갈애가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집착하는 것들이 대상이 됩니다. 집착하는 것들을 놓는 순간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수행도 잘될 뿐 아니라 업을 짓는 것들도 바른 방법으로 짓게 되고, 또는 아라한에 이르른 상태일 거 같으면 업을 짓지 않는 행위들을 하게끔 됩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참 그랬으면 좋겠는데, 잘 안되는 데는 여러 가지 문답을 통해서 보면 정해져 있습니다.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를 들면 막히면 그냥 거기서 헤매고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빨리 빠져나올 생각은 안 하고 대부분은 거기에 그냥 머물러서 내나 똑같은 방법으로 그냥 헤매고 있고, 똑같은 방법으로 게으름 부리고 있고, 생활패턴이 비슷하게 돌아가지게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수행에서 똑같은 데서 맴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뭔가에 집착하고 있다는 거라 자꾸. 그러면 명심해야 되는 것은

첫 번째 성급하게 굴지 말아라. 성급하게 굴지 말아라.

성급하게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갈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탐진치는 끼어들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는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그리고 그 선한 마음이 사띠를 일으키게끔 하는 작용들을 하게끔 해야 되는데,

성급하게 탁 이것으로부터 빠져나갈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거기에는 탐진치가 끼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성급하게 굴지말아라는 거라.

 

그러면 지금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탁 일단은 놔야 돼.

배를 계속적으로 관찰해야 된다, 관찰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냥 놔줘라는 거라.

놔주고, '몸이 편안한지, 마음이 고요하고 가벼운지' 그거 먼저 체크하고, 그거는 아주 쉽다는 거라. 그냥 편안하게 그냥 성급하게 굴지 말고 그냥 행위하고 하는 것들을 갖다가 그대로 그냥 관찰을 하라는 거라.

그러면 마음은 분명히 대상을 다시 찾게끔 됩니다.

 

게으름에 빠졌을 때도 , 내가 게으름에 빠졌네. 그래, 조금 쉬었으니 됐어 하고 마음을 먹고,

성급하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고 나서 , 이제 수행해야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나서,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관찰을 하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대상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게으름부렸으니까 ‘아우, 시간 또 다 보냈네. 빨리 다시 또 수행해야지’ 할 것 같으면 대상을 또 움켜쥐게 됩니다.

왜곡된 대상은 그것은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명심해야 되는 것은 성급하게 굴지 말아라.

 

그다음에 두 번째 명심해야 되는 것이 그리해도 잘 안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거기서 그냥 포기를 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뭐냐면 충분한 인내심이 있도록 해야 됩니다.

대부분 성급하게 안 하고 천천히 그냥 마음을 먹고 했는데도 탈출을 못하는 것들은 보면, 거기서 인내심을 가지고 그냥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맞아’ 하면서 계속적으로 몸과 마음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들을 편안하게 해줘가지고 그것이 5분이 되든 10분이 되든, 오히려 1시간이 됐든 그냥 그것만 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을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게 해주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그리하다가도 자애수행도 하면서 자애를 하면서 편안하게 좀 만들어 주고.

그래서 충분히 인내심을 가지고 그냥 그렇게 해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대상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급하게 굴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은 바르게 내가 사띠를 해나갈 수 있는 조건이 반드시 만들어진다는 걸 명심을 해야 됩니다.

 

다른 수행자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에서 걸림이 있고, 진척이 없을 때는 항상 이 부분에서 걸립니다.

뭔가 본인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는데 집착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게으름을 부리고 있든지, 아니면 관찰을 하고 있는데도 ''라고 하는 것이 자꾸 개입이 된다든지.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분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성급하게 굴지 말고 수행대상을 자꾸 찾을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수행대상은 내가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은 드러나집니다.

그러면 그냥 그거 사띠하게 됩니다.

사띠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대상이 변하는 것들이 보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그거 알아차리고 있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는 아주 강할 때는 의도가 보여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상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초입에 얘기하듯이 의도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수행이 무르익을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을 끊임없이 사띠만 하고 있다 해가지고 수행이 무르익지는 않습니다.

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빠르게 변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대상을 알아차리고는 있는데 변해나가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아직 사띠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사띠가 약한 데는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이 약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띠를 하고 있는데 연속해서 하지 못하든지,

그런 원인이라서 그 변하고 있는 것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거라.

뭐가 원인인지를 본인이 판단을 해야 됩니다.

한번 사띠 하고 나서 사띠하는 힘을 약하게 해버리면, 그거 그냥 변하는 것들이 안보이고 그냥 그대상만 알아차리고 있는 겁니다.

배가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고, 꺼지면 꺼진다고 알고.

왜 그렇게 편안하게 해? 수행을?

 

또는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오는 것을 지속적으로 그냥 관찰을 하면 되는데 편안하게, 마음이 거기 안 가있고 다른데 갔다가 왔다가 갔다왔다 하는 거라.

집중하지 못하는 거라. 그 짧은 찰나를.

그러니 움직이는 것은 보이고 배가 불러오는 것은 보이는데, 실제로는 관념적으로 보고 있는 거라. 실제로 다 그걸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대상에 포커스를 맞췄으면 그 대상이 불러오는 것이면 불러오는 시작부터 해가지고 불러오는 것이 끝날 때까지는 거기다가 집중을 해야 되는 거라. 어떤 것에도 마음이 다가가지고 벗어나서는 안 되는 거라.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자꾸 잊어먹는 거라. 집중하는 힘이 약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띠를 하고 있을 때 그냥 건성으로 자꾸 하게 되는 거라.

왜 사띠를 하고 있는 건지를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무상··무아라고 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가든지 아니면 요가 수행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 위빳사나 수행의 범주에 들지는 않는다는 거라.

변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수행을 할 땐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자꾸 사띠를 놓치지 않을려고 해야만이 집중수행 하면서 한시간이든 두시간이든 좌선하고 경행하고 할 때 그걸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지,

일상에서 다 놓쳐버리고 그게 습관이 돼있는데 좌선할 때 거기에 집중이 되고 거기다가 포커스를 맞출 수가 있겠어요?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이 변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때 인제는 마음이 앞서는 것들이 보여지게 되는 거라.

호흡이라고 하는 것이 불러오는 것이 원인이라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원인이라서 배가 다시 꺼지는 결과가 생깁니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사이클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만 보더라도 마음은 배가 불러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그것들을 사띠하게 되는 거라.

마음은 두 가지가 연속하게 되고 육체적인 것도 두 가지가 연속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띠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게 될 때 마음이 먼저 앞서는 것들이 보여진다는 거라.

왜? 멈추는 것들이 있는 것들을 알기 때문에!

 

육체적인 현상도 불러왔으면 멈춰야만이 다시 꺼지게끔 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도 불러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멈춰야만이 다시 사라지는 것들 꺼지는 것들을 관찰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마음이 쭉 일어나는 법이 없고, 지속적으로 육체적인 현상이 쭉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멈추는 것이 보일 때 그 잠깐 사이에 의도가 먼저 일어나는 게 보이는 거라.

간단하게 예를 들면, 큰 무더기로 보면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에 여기 온 결과가 생긴다는 거라.

오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절대 여기 안 옵니다. 오고 싶은 의도라고 하는 원인이 여러분들이 여기 온게 된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거라.

 

그래서 원인·결과에 대해서 자꾸 보게 될 거 같으면 의도가 보여진다는 거라.

여기까지가 돼야만이 적어도 여러분들은 수행이 무르익은 상태라는 거라.

집착하는 것들이 어디에도 없게끔 되는 거라.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때는

이미 육체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거기서는 이미 집착하는 것들이 떨어진 상태라는 거라.

단지 일어난 마음을 관찰하는 것밖에는 없는 거라.

 

그런데 일어나는 마음도 보니까 지속적으로 하나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속적으로 생멸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보여지면 점점 더 집착하는 대상들은 없어지게끔 됩니다.

그때 마음들을 보면은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는 거라.

왜? 붙잡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손을 탁 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이 인제는 재미가 있어집니다.

 

수행을 지속적으로 할려면 적어도 거기까지는 이를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안거 기간에는 되도록 운신하는 폭들을 줄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사띠하는 습관을 자꾸 들이도록 하고, 집중수행을 해서 좌선·경행하는 시간을 자꾸 늘리도록 그렇게 해서, 적어도 의도가 앞선다는 사실을 빨리 발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 수행문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오늘 법문에 대해서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수행을 계속 하다보니까 사실 빠라마타를 봐야 되는데 빤냐띠로 대상을 자꾸 보게 되기 때문에 집착이 자꾸 생긴다는 것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요. 예를 들면 스님께서 항상 말씀을 하시는데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또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이것을 전부 빤냐띠로 알게 되는데, 언어적인 분별이 있게 되고, 실제로는 빠라마타는 움직임이라고 저는 생각이 되는데, 그래서 그런 것을 언어적인 유희에 거기 갇혀버리면 실재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러오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그러한 ‘형태적인 변화를 보는 것보다는 실제적인 움직임을 봐야되지 않나’ 하는... 이렇게 모든 것이 ‘들어올림’도 움직임이고, ‘나아감’도 움직임이고, ‘내려놓음’도 움직임이기 때문에 의도에 의지해서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그러한 현상으로 계속 해야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스님 대답 : 예.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지만 움직임뿐 아니라 사대요소는 빠르게 변해나갑니다.

초보자가 과연 거기에 마음을 둘 수 있을까? 못 둡니다.

그래서 다른 수행처들에는 "처음 수행할 때는 무조건 명칭을 붙이라" 하는 이유가 뭐냐면 마음을 일단 잡아놔야만이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마음을 잡아놔야만이 그다음에 실제적으로 빠라마타가 일어나는 것들이 보여지기 때문에, 대부분 "처음엔 무조건 명칭을 붙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수행이 잘 진행되는 사람들은 명칭이 떨어지는 상태가 언제냐면 그 대상들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면 명칭은 자동적으로 떨어져버립니다. 명칭을 붙일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럴 때는 그냥 실재하는 것들을 그대로 그냥 관찰하게 됩니다.

명칭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그 내용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쑤시는 것이 있으면 쑤신다고 알아차리고, 따가운 것이 있으면 따가운 것이 있다고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럴 때는 명칭 없이 그냥 아는 것이 실제적으로는 그게 위빳사나 수행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대부분 명칭을 붙이라 하는 이유가 마음을 일단 붙잡아두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그 과정 없이 바로 할 경우에는 여러분들 마음은 굉장히 산만합니다. 그게 잘 안되기 때문에 명칭을 붙이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거는 위빳사나 수행하고는 관계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다가오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나갈 때 명칭 없이 있는 그대로 대상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는 그 대상들이 변하는 것이 보일 때입니다.

그럼 그때사 ‘아, 내가 인제사 실제적인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구나’ 하고 판단을 하시면 됩니다.

그전에는 되도록이면 마음을 갖다 붙이십시오.

그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