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부처님이 결정해놓았던 「법을 설하는 자들의 조건」 (20230916)

담마마-마까 2023. 9. 17. 16:21

https://youtu.be/_SCvj8T9lM8?si=HEVFpEfDYqQMkglF

* 부처님이 결정해놓았던 「법을 설하는 자들의 조건」 (20230916)

 

저 뒤에 분은 오늘 처음 오시는 분 같은데?

(수행자 대답 : 오늘 처음 왔습니다.)

수행들은 좀 해봤어요?

 

아마 한국에서 스님 같이 사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은 모양이라.

테라와다 가사를 입고, 그냥 순수하게 테라와다 방식으로 사는 분들이 많지는 않은 모양이라. 대부분 테라와다 가사를 입어도 어떤 분들은 한국의식들이나 한국방식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있고, 그렇지 않고 살아도 재정문제를 관리를 하는 분들도 있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조금 섭섭하겠지만 스님이 재정에 조금 관여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내몰라라 하니까 조금 서운한 것도 있죠? 우짜겠노? "하지 말아라" 하는 거니까 안 해야 되는 거니까 여러분들도 그건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식적인 것도 마찬가집니다. 테라와다에서 안 하는 것들은 안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뭐 초파일 때 등이라도 하나 켜고 하면 재정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거 안 해도 살잖아? 그러면 됐지 뭐.

 

그래서 스님 같이 사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으니까 꼭 뭐가 있으면 스님한테 뭘 증명을 받을려고 그래요.

음, 얼마 전에도 누가 전화가 와서 “스님, 누가 스님 제자라고 그러는데, 아라한이라고 그러는데 스님이 인가를 해줬습니까?” 이러더라고.

그래서 “뭔 얘기야? 내가 아라한이라고 인가해주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아라한이면 지가 아라한인 줄 아는 거지 뭐. 그게 인가할 대상이냐?” 그렇게 하니까, 하여튼 그분은 스님 제자라고 하면서 아라한이라고 그런다고, 그게 누구냐고 하니까 기억을 떠올려보니까 딱 한번 우리 선원에 찾아온 적이 있어요. 법회 때 온 게 아니고, 그냥 누구하고 같이 찾아와가지고 몇가지 물어보고 해서 그냥 그거 답해주고 한 것밖에 없는데, 한 30분이나 머물렀을까? 그런데 스님 제자라고 하기에, 제자라는 게 꼭 오래 있어야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가지고 제자라고 하나?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어요.

 

아라한을 인가 받아야 되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 '빳짯땅 웨디땁보'니까 스스로 아는 거 아닙니까? )

그렇죠. 여러분들도 수행해보면 어느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체험해봤으면 알죠? 그거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다가 보면 '아, 내가 이 번뇌는 완전하게 나로부터 떠나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 번뇌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다시는 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이 또 잘 압니다.

그러다 보면 '아,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구나, 어쨌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또 알게 됩니다. 수행할 때는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수행이 끝나고나서 돌아보면서 인제 그런 부분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사리뿟따 존자도 아라한에 이르른 게 그런 과정이죠?

수다원에 들었다가 수다원에서 나오고 나서 수다원에서 일어났던 느낌들을 분명하게 관찰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본인에게 일어나지 않는 번뇌가 뭐가 있고, 떨어져나가고 없는 번뇌가 뭔가를 분명하게 압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아라한에 이르르게 됩니다.

물론 연세가 많이 들고 한 분들은 삼매에 드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는 삼매에 들었었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다시 그 삼매에 이르르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윗자야 존자도 그런 얘기를 했죠? 경에서.

사선정까지 다 통달하고 자유자재로 들고나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병이 들고나니까 안 들어가지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하니까 아픈 윗자야 곁에 부처님이 가서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느냐? 선정에 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네가 아라한이 되고 그 경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인데, 꼭 굳이 삼매에 다시 들어야 될 이유가 있느냐?” 하는 식으로 질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마만큼 병이 깊어진다든지 수행에 힘이 떨어지고 나면 선정에는 잘 못듭니다.

 

송천님 좀 실망이 됩니까? (수행자 대답 : ···)

그래도 죽음 직전에도 연세가 80 넘어 된 분들도 죽음 직전에도 삼매를 경험하고 또 아라한에 바로 이르기도 하고 그렇게 특수한 경우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얘기하는 거는 일반적인 것,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래서 너무 삼매에 매달릴려고는 하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수행을 해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르는 것은 사성제와 삼법인을 분명하게 보고 그것들로 인해서 번뇌가 끊어지는 것들을 통찰하기 때문에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 꼭 선정에 자유자재가 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부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선정을 닦는 분들도 선정에서 나오고 나서 자기가 어떤 상태에 도달했고 어떤 번뇌가 끊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듯이 일반적인 수행자들도 그 수행의 경지에 이르르면 내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잘 압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은 "내가 수다원이다, 내가 아라한이다" 그것이 공포되는 순간 그사람은 수다원이 아니고, 그사람은 아라한이 아니게끔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미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는 유신견이 떨어져 나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물론 큰 스승들께서는 “아, 인제 네가 수다원에는 이르른 모양이다” 하고 얘기는 해주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그분 얘기인 것뿐이고 실제 도달한 것은 본인입니다.

본인이면 본인이 그 상태에서 번뇌들이 떨어져 나간 것을 분명하게 알게끔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번뇌가 떨어졌으면 설혹 “네가 수다원에 이르렀구나” 하고 얘기를 하고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해라”하는 말을 들어도 본인 입으로 “나는 수다원이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있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굳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는데 아라한을 찾을 이유가 있나요?

근데 뭔가 의지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아라한을 찾겠죠.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아직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것을 찾는 순간 거기에 매달려버리게 되는 거라. 거기에 매달리면 그사람이 실제 아라한인지 아닌지를 갖다가 자꾸 대조해볼려고 하고 또 만약에 대조한 것과 맞다고 할 것 같으면 그사람에 대해서 맹신하게 되는 거고 만약에 대조해본 것이 아니다 싶을 경우에는 그걸 또 불신하게 되는 거고, 그러면서 부처님 가르침마저도 인제 불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스님 생각에는 굳이 누가 아라한이고 누가 수다원이고 그거 알려고 안 해도 충분하다 하는 겁니다.

왜?

수다원이 되고 아라한이 되는 것은 본인이 도달했으니 본인의 몫인 거고, 수행하는 것도 본인 몫인 것이지 다른 사람이 수다원이 되고 아라한이 되고 하는 것은 하등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라.

 

물론 그런 부분은 여러분들이 잘 가려야 됩니다.

저분이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는 도달한 것 같은데, 가르치는 것들이나 말하는 것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것을 따라서는 안되는 겁니다.

 

경에서도 부처님이 분명하게 "설법하는 자들의 특색", 또 설법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지녀야 되는, 그러니까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그런 규칙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자신의 의견이나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서는 안된다하는 겁니다.

간혹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자신이 수행을 잘 가르치는 스승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끔 설법을 하는 사람이다 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경우들, 이것도 안된다 하는 겁니다.

수행을 가르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맞을 수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안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잘 지도하는 것은 사실은 부처님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리불 존자도 수행을 잘못 지도하는 경우들이 허다하게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스승들이 완벽하게 수행을 잘 지도한다? 그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경험하는 것들이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 것들을 다 경험해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런 경험들이 다른 것들로 유추해봤을 때 ‘이럴 것이다’ 하고 예측을 해서 그에 맞게끔 지도를 할 수는 있습니다.

수행 방법도 틀리고 나아가는 과정들도 틀리기 때문에 꼭 다 수행을 잘 지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처님 가르침을 잘 설명한다? 수다원에 이르고 아라한에 이르러도 법문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꼭 그것이 예측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다음에 대부분 테라와다 스님들이 잘 빠지는 함정인데, 다른 사람들이 존경해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출가자이기 때문에 재가자인 여러분들과 틀리다, 또는 나는 이마만큼 열심히 수행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런 생각들을 많이 가집니다. 그것을 가지는 것은 개인 문제인데, 법문을 할 때 그런 생각이 묻어나버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존경을 받는 것은 존경받기를 바래서 존경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존경할 대상이 됐을 때 존경을 받게끔 되는 것이지.

 

그다음에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말씀했다고 설법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부처님이 뭘 말했고 뭘 말하지 않은 것들을 대부분은 압니다. 그런데 수행부분에 들어가면 참 애매해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경에서 자꾸 가져와가지고 이렇다 하고 얘기를 해주기는 하는데 경에 없는 것들이 수행에서는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고 자신의 의견이라고" 당당하게 얘기를 해야 되는 것이지 "부처님이 말했다" 하고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들을 부처님이 다 말씀했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간혹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은 부처님이 제자들한테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들이 더 훨씬 많습니다. 또한 그속에도 지금 여러분들이 수행에서 다 적용해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말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부처님의 말을 왜곡시키지 말아라. 왜곡되는 순간 그것은 불교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어떤 법을 설하더라도 그 법에는 깨달음을 향하는 길이 나와야되지, 깨달음으로 향하지 않고 그냥 교훈적인 애기들만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이게 "법을 설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되는 마음"이고, 그리고 부처님이 엄격하게 결정해놓았던 법을 설했던(설하는) 자들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런 조건을 갖추었을 때 법을 설하는 자격들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허다하다 보니까 자꾸 이 원칙들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 설하는 것, 자기 자신이 가르치는 수행방법, 또 수행문답만이 바른 것이다" 하고 얘기들을 자꾸 하게끔 됩니다.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자기 것만이 바를 것 같으면 이때까지 2600년 동안 해온,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지금 또 가르치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되는 거라?

아주 위험한 사고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되도록이면 수행방법도 여러 가지들을 익혀놓는 것이 좋고,

그래야 내가 익숙하게 하지 않는 수행방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사띠를 놓치지 않게끔 됩니다.

수행이 무르익는 것은 사띠를 놓치지 않게끔 될 때 저절로 대상들은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 드러나지는 대상들을 집착함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수행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고 무르익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띠가 자꾸 끊어지는 것은 본인의 방법만 자꾸 할려다 보니까 다른 것이 나타나면 그냥 그것을 무시를 해버리는 거고, 그 찰나 순간에 사띠는 끊어져버리는 거라.

삼매에 드는 것도 찰나 간에 끊어져버리게 되고, 사띠에서 번뇌들이 끊어지는 것도 사띠가 찰나 간에 끊어져버리면 그것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 여기 울주에 와서도 수행을 하겠지만 다른 데서도 또 수행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이 되면 찾아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방법들이 맞다,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진단을 해준다, 아니면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것들을 알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들이 어떤 스승이 좋은지, 어떤 스승이 좋지 않은지를 잘 모르잖아.

그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됩니다. 살아가는 모습을.

출가자이면 출가자답게 살아가는지, 재가자이면 재가자답게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놓아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하는 것들을 잘 보면 됩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 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사실은 판별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그래서 "수다원이다, 아라한이다" 하는 것을 내가 구분하는 것은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게 스리랑카에서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전에 일인데, 스승과 제자가 몇십년간 같이 수행을 쭉 했는데 제자가 스승에게 물어봅니다.

“스님, 아라한이 있으면 아라한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스승이 아라한이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은 그걸 못 알아봅니다. 옆에 자기 스승이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아라한인 줄 모르고 그냥 사는 거라. 아라한이 특별난 것이 없기 때문에.

 

물론 경전에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소식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밥을 아주 적게, 천신하고의 대화에서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실제로 부처님이(불상들을 보면) 풍만해보이시죠? 그런데 경전상에서는 보면 부처님이 굉장히 야위었어요. 야위었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그렇게 잘생긴 얼굴, 몸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외모에서 풍기는 것이 굉장히 강건하게 생겼다고 그럽니다. 그런 건 외모적인 건데, 식사는 아주 소식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저거 먹고 어떻게 하루를 견딜까?’ 할 정도로 소식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스님도 점점 지나다 보니까 식사량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게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똑같이 밥먹고 생활하고 하는 거기 때문에 사실은 구분하기가 힘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스승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니가 좀 현명하면 아라한을 알아볼 것이고, 니가 어리석을 것 같으면 아라한이 옆에 있어도 아라한을 모르느니라.” 하고 대답합니다.

그리해도 이 제자가 못 알아듣는 거라. 실제 옆에 있는 스승이 아라한인데도.

그마만큼 아라한을 여러분들이 알아본다는 것은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영역들이 아니라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단지 본인이 해야 할 것은 본인이 하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사람들은 깨달음에 이르기 전이면 무언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선원에 자꾸 의지하게 되고 스님한테 문답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스님을 자꾸 개인으로 보면 안됩니다.

상가(Saṅgha)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상가의 일원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조금 전에도 했죠? "상강 사라낭 갓차미" "상가에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그런데 '아짠 빤냐와로 스님에게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이러지는 않았죠?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습니다. "상가에 의지하겠습니다. 부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담마를 의지하겠습니다"는 하는데, '사리뿟따 존자를 의지하여서 나아가겠습니다'는 안했습니다. 그리고 '목갈라나 존자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이런 적은 없다는 거라.

왜? 부처님도 상가의 일원이고, 사리뿟따 존자나 목갈라나 존자도 상가의 일원이듯이 스님도 상가의 일원입니다. 그래서 상가의 한 스님으로서 여러분들에게 법을 전하는 것이고 그리고 수행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상가의 일원이라고 하더라도 엄격하게 통제가 됩니다.

뭐로 통제가 될까? 담마(Dhamma)와 위나야(Vinaya)!

계율적인 것과 부처님 법에 맞는지 하는 것들로써 엄격하게 통제된 상가만이 해당이 되는 겁니다.

담마와 위나야가 성립되지 않는 상가는 상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어겨가면서 법을 설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부처님 법에 어긋나게 살아가면서 법을 설한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상가는 법과 율에 통제를 받게 돼있기 때문에 그 통제를 받고 있는 상가는 여러분들이 의지할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의 스님을 보더라도 상가(Saṅgha)를 보듯이 항상 대해야 됩니다.

그래서 의지할 대상인 상가의 스님에게 법을 듣고 또 수행의 가르침을 받고 그러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통제를 받고 있는 상가는 어떠한 경우든지, 더구나 그분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법을 전해줄 능력이 되면 법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 ()과 율()의 통제를 받고 있는 개인의 상가이기 때문에!

개개인이라고 하는 상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법의 통제 아래에 있을 때는 설혹 그것이 성인의 경지인 수다원 이상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줍니다.

 

그래서 태국 같은 경우에는 테라담마 10가지를 갖추었을 때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그런 칭호를 주고. 미얀마 같은 경우에는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게 되면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줍니다.

그 두 경지들은 아직은 수다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들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그사람은 상가에서의 통제의 영역인 법과 율의 통제를 받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법에 어긋나고 율에 어긋나고 하는 것은 하지 않게끔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법을 실천하고 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법을 따라서 살아가야 되는 분들에게 법을 설한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아라한이냐 아니냐? 수다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영역 밖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질문한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그분이 살아가는 게 계율도 자꾸 어겨쌌고 하는데 아라한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스님이 좀 제재를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러더라고.

그런데 그걸 나는 관심 밖인데 그걸 뭘 어떻게 제재를 내릴까?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은 의지해야 될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만이 법이 여러분들을 떠나지 않게끔 됩니다.

설혹 수행을 하다가 중단하는 한이 있더라도 법이 여러분들 가슴속에 있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그것은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을 떠나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수행의 경지에서 일정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면 그것 자체, 부처님 가르침 자체를 버려버리게 됩니다.

 

항상 여러분들이 법의 가까이에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지, 남의 수행이 얼마만큼 이르렀다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하는 것들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