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2023년 붓다의길따라 선원 우안거 입재 법문_함께 기뻐하는 마음(20230805)

담마마-마까 2023. 8. 6. 14:26

https://youtu.be/ODoC-81qPCc

* 2023년 붓다의길따라 선원 우안거 입재 법문_함께 기뻐하는 마음(20230805)

 

목욕가사를 이때까지는 만날 태국이나 이런 데서 구입을 해와가지고 목욕가사를 보시를 하고 했는데 이번에는 제주도에...

(수행자 : 마헤시님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마헤시 하고? 착한 일 했네.

(빤냐왐사 스님 : 메이드 인 코리아 입니까?)

그렇지 만들었어. 한국에서.

(수행자 : 목욕가사가 스님들 입는 가사하고 비슷합니까?)

조의가 없어요. 아랫가사인데, 우리 아랫가사는 보통 끊어져 있거든. 조각조각 붙여야 되는데, 그래서 5조 가사가 보통 아랫가사인데 이렇게 다섯 조각으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통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목욕가사하고 일반 아랫가사 하고는 좀 차이가 납니다.

아랫가사는 평상시 때 입을 수 있고 일년내내 입을 수 있는데 목욕가사는 안거 때만 입을 수가 있습니다. 반드시 안거 때는 목욕가사를 지참하고 안거에 들어가야 계율을 위반하지 않게끔 됩니다.

 

어쨌든 직접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마움을 먼저 표합니다.

좀 더 욕심내면 나중에 까티나 때 만들라나? 너무 어렵겠지? 그거는?

전에 태종사에 있을 때 한번 만들어보니까 너무 어렵더라고. 가사 만드는 박음질 형식이라고 해야 되나? 그게 일반 한국 가사 만드는 방식하고는 달라요. 그래가지고 많이 어렵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해보니까 그다음부터는 다시는 안 만들어준대. 돈도 훨씬 많이 들고, 만드는 사람도 그다음부터는 안 만들어줄라고 그래.

그렇게 했는데, 정착이 될려면 가사는 만드는 것들이 상용화되면 좋기는 합니다. 스님이 너무 많은 거 바라지는 않을게요.

그래서 안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통 스님들이 이런 공양물을 받을 때 보통 하는 게 아누모다나(anumodanā, 공덕회향)라고 하는 걸 합니다. 나중에 끝마치고 나면 “삽비띠요~~~” 하면서 게송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이 여러분들이 쌓은 공덕들이 계속적으로 이어져서 이생에서 항상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 그리고 다음생에도 그게 이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면서

"이러한 공덕들이 다른이들에게도 같이 회향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는 그런 게송을 합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들 중에 가족들이 있을 수가 있고, 또 먼 친척들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럴 겁니다. 그런 분 중에서 이 회향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태어나신 뻬따천에 뻬따(peta)가 된, 아귀계에 태어나신 분들은, 그러고 나서 여러분들이 “사-두” 하면서 하는 음성을 듣고 공양을 회향받는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출가하고 나면 스님들이 가장 먼저 외워야 되는 게 이 "아누모다나"부터 먼저 외웁니다. 그걸 못 외우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마만큼 누군가 공덕을 쌓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같이 감사하고 기뻐해주도록 하는 마음들을 먼저 가져야만이 "출가자의 맨 첫 번째 덕목을 갖췄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슬프게도 처음에 스님이 계를 받고 나서 빨리어가 낯설잖아. 그런데 빨리어를 배우기도 전이니까, 태국어도 못해가지고 힘들어 죽겠는데 빨리어 그걸 외울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못 외우면 그걸 외울 때까지 장로스님이 거기서 계속 지키고 하거든. 그 게송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많이 있는데 나중에 그걸 외우고 나니까 그다음부터는 공양을 받을 때는 내가 진짜 기쁜 마음이 가슴속에서 샘솟아가지고, 내가 그 게송 할 줄 아니까, 기쁜 마음이 일어나가지고 기쁘게 ‘공덕 참 잘 쌓았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게송을 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왜 출가한 스님들에게 출가를 하자 마자 계율 항목부터 외워야 되는 게 아니고 이 아누모다나부터 외워야 되는지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은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감사를 해야 되겠지만, 출가한 스님들은 그런 재가자들한테 삼보를 믿고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공덕을 쌓는 재가자들한테 감사를 하게 되는 마음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누군가 쌓은 공덕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들을 자꾸 습관화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사실은 질투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질투(issā)는 그냥 여러분들이 간단하게 생각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들만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그걸 두 가지로 이렇게 나눕니다.

"아툼깡사나"라 해가지고 "앗따 깡 사나"가 합해진 건데, "나 자신을 먼저 훌륭하게 생각하고 나 자신을 먼저 칭찬하는 버릇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보면 그 습관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거라도 자기 자신이 한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점수를 잘 멕인다고 해야 되나? 뭐 그런 습관입니다.

요즘 학생들 간에 그런 것들을 많이 하죠? 봤을 때는 똑같이 생겼는데 “내가 더 예뻐” 이렇게 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그걸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칭찬하고 하는 버릇들을 보통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빠리왐바나" 라고 해가지고 상대방이 한 것에 대해서 “뭐 그거 별거 아니야” 하고 치부하는 것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 뭐 돈 많으니 그거 할 수 있겠지” 뭐 이렇게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보통 "잇사(issā)"라고 하는 질투의 행위들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실은 그런 것들을 없애기에 가장 좋은 것들이 뭐냐 하면 이런 행사들이 있고 할 때 내가 공덕을 쌓든 아니면 적게 쌓든 그것에 관계없이 진짜 마음으로 우러나가지고 기뻐해주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 그 공덕들은 여러분들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죠?

 

경전에 보면 띳사 비구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우루벨라 깟사빠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두 분의 차이가 뭐냐면 "남이 쌓는 공덕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느냐 아니냐"의 그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완전히 딴 길을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우루웰라 깟사빠는 오백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죠? 부처님에게 귀의하기 전에. 그리고 풍족하게 잘 배화(拜火) 외도(外道)로서 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가하고 나서도 그 제자들을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도 계속 구름처럼 모이게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도 마찬가지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공양물이 끊임없이 들어왔다고 그러죠. 그래서 우루웰라 깟사빠 같은 경우에는 탁발하러 나갈 거 같으면 똑같은 길을 가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거기 사람이 없어가지고 탁발을 못하고 왔는데 우루웰라 깟사빠가 갈 타이밍이 되면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다는 거라. 나와가지고 공양물을 올리고, 그런 얘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와 반면에 띳사 비구라고 하는 분은 그거하고는 정반대입니다.

탁발하러 사람들이 왔다가 띳사 비구가 갈 타이밍이 되면 공양물이 다 떨어져버리고 사람들이 가버리고 없어요.

이 차이가 뭐냐면 다른 사람들이 잘하는 행위들에 대해서 ‘아, 참 잘했어’ 하는 마음을 냈느냐 안 냈느냐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띳사 비구는 오백생 동안 진짜 힘든 다른 삶을 살았고, 또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으로 인해서 출가를 하게 되고 그러고 나서 아라한이 됐지만, 결국에는 그 공덕이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에 아라한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굶주렸다고 그럽니다.

그마만큼 공덕을 쌓는 것들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들을 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를 가져오게끔 됩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차이가 날까?

똑같은 자리에 있어도 한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기뻐하는 마음이 흘러나오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또 그것이 흘러나오고 이럴까? 왜 그럴 거 같애요?

다 똑같이 그 사람들은 삼보에 대한 믿음도 있고 또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 만큼 (지혜)도 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무디따(muditā)라고 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들을 평등하게 본다는 거라.

나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도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완전한 그분이 뭔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아, 얼마나 잘한 일이냐’ 하는 마음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런데 평등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자기 자신이 조금이라도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거 같으면 그런 마음이 안 일어나. 실제로 뜯어보면은 별로 자기 자신도 그렇게 우월한 것도 없어. 똑같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 존재일 뿐이고 무상한 존재일 뿐인 건데 꼭 자기 것들을 찾게 되는 거라.

 

수행을 통해가지고 무상한 성품들을 뼛속 깊이 체험을 한 사람들은 당연히 가슴속에서 무디따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이 쌓은 공덕이지만 자기 공덕이 되는 거라. 그리고 남이 어떻게 행을 하더라도 선한 일을 하게 될 거 같으면 그 바라밀들에 대해서 칭찬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은 특히 오늘 같이 안거를 시작하는 날이면 많이 좁고 불편할 겁니다. 자리들이. 그리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있어가지고 이런 자리가 있었고, 그리고 내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 또 다른 사람들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가 하는 마음들을 일으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내가 회향할 수 있게 될 때 돌아가신 분들이나 다음생에 또 그것이 영향을 미치게끔 됩니다.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인색함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개가 딱 결합을 하게 된다 그러면 보통은 이게 강화됩니다.

죽음의 순간에 이 업이 작용을 하게 되면 그분은 좋은데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선한 일들을 많이 하고 큰 공덕을 많이 쌓았다고 하더라도 인색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마음들이 깊어지면은 죽음의 순간에 이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누군가가 쌓는 공덕에 대해서 항상 기뻐하는 마음들을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스님이 한번 그거를 찾아봤어요.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경전에서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들을 찾아봤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고 호흡이 많이 가빠진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호흡을 편안하게 해야 되는데 호흡이 편안하게 안 되는 거라.

그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성향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자꾸 다리를 전다든지 아니면 멀리 못 걷는다든지 이런 식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이게 정신적인 병이지만 이 육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깁니다. 호흡이나 걸음걸이라든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래서 한번 찾아보니까 근디스트로피라고 하는 병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 병이 지금 인색하고 질투하는 성향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것하고 비슷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육이 자주 단단해지고 경련이 자주 일어나지게 되는 것이 일차적인 단계이고, 그리고 조금 더 진행이 되면 호흡이 자꾸 불안정해지고 가빠진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안 하고 자꾸 쪼그라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심장박동수가 굉장히 빨라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점점 더 걷는 것들이 힘들어지니까 휠체어를 타게 되고 호흡도 그렇고 심장도 계속 나빠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누워지내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병이 처음에는 아주 적었었는데 계속적으로 그렇게 발전해나가서 결국에는 누워서 생활을 하면서 그것도 정상적으로 호흡이나 심장이 작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자꾸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꼭 마찬가집니다.

남이 짓는 공덕들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 없이 질투하는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면 그런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들을 띠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자주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이생을 살면서 조금 더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또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이지 마음이 자꾸 쪼그라드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조그만 거 하나가 이렇게 인생을 180도 바꿔놓게 됩니다. 삶도 바꿔놓고 다음생들도 또 바꿔놓게 됩니다.

 

항상 본인이 공덕 쌓는 것도 좋은데 남들이 쌓는 공덕에 대해서 진정으로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들을 자꾸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법문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