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담마수카 선원 개원법회_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 법문 (20231015)

담마마-마까 2023. 10. 16. 22:30

* 담마수카 선원 개원법회_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 법문 (20231015)

https://youtu.be/icEvJQTiryQ

 

담마수카 잖아요. 테라와다 사원이 하나 또 건립이 됐는데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재가자들이 다 크게 보시한 사람은 크게 보시하고, 적게 보시한 사람은 적게 보시하고 해가지고 사원이 건립된 겁니다. 그래서 재가자들한테 이런 사원을 건립하도록 도와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함을 표합니다.

 

아나타삔디까가 정사를 건립하고 나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런 사원을 만들어 보시를 하는 사람은 장래에 걸쳐 계속 덕을 쌓게 되느니라. 이런 사원이 있는 한, 그곳에서 스님들이 계속 수행을 하는 한, 신자들이 그곳에서 불교를 배우는 한, 훨씬 덕이 많이 쌓이게 되느니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사원이 존재를 하면 거기에서 공덕 쌓는 일은 더 많아지겠죠?

그리고 당연히 스님이 거주를 해야 되고, 스님이 수행을 지도를 하고, 또 법을 전하고, 그 법을 듣는 사람들이 있도록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돼야만이 사원이 제기능을 하게 되게 됩니다.

 

담마수카가 처음 형성되고 나서 아직은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는 못할 겁니다.

아마 둘째, 넷째주 토요일날 법회를 보는 것으로 되어있죠? 그래서 당분간은 시간이 조금 안되더라도 억지로라도 내가지고 그때는 와가지고 법회에 참석을 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고 스님도 법을 설하는 게 아직은 어설플 겁니다. 수행 지도하는 것도 아직은 어설플 거고. 그래도 지속적으로 이 담마수카가 존재를 하고 또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고 또 바른 법을 듣는 자리가 될려고 할 거 같으면 법회는 계속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협조를 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을 가져봅니다. 그래야 크든 작든 보시한 사람들의 공덕이 자꾸자꾸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아나타삔디까가 그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나고 나서 다시 부처님한테 와서 한 얘기가 있습니다.

나에게 기쁨은 기원정사가 있다는 것과 그것에 비구들과 함께 부처님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이 계속 전해져야만이 그 사원이 존재를 하게끔 됩니다.

그리고 이 담마수카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어렵게 어렵게 만들어졌습니다. 만들어진 만큼 여러분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담마수카가 지속되어서 법이 잘 전해질수 있도록 해주시길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빨리어 게송 하나 읽어드릴테니까 한번 따라서 해보십시오.

'빠야따 빠니(payata pāṇi)' (빠야따 빠니!)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보시로 인해서 손을 씻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보통 물로 가지고 손을 씻죠? 그런데 이 빨리어 게송은 '보시한 것으로 인해서 손을 씻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그냥 손을 씻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번뇌 없이 한다"는 뜻입니다.

 

스님이 그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보시를 행할 때는 행하기 전에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는 순간순간에는 사띠를 하면서 기쁨을 느끼도록 하고, 보시를 행하고 나서는 ‘아, 내가 참 보시를 잘했다’ 하는 생각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하라.”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그 어디도 보시 전이든, 보시할 때든, 보시 후든 탐·진·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보시로 인해서 손을 깨끗이 씻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보시를 하고, 그리고 그것을 회상하고 할 때는 탐··치가 없이 행하도록 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보시를 하도록 자꾸 습관화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 때만이 그것이 보시 공덕이 생겨나게끔 되게 됩니다.

 

또 하나, 이 빨리어 게송에서 항상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보시를 행할 때 기쁨만 가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고, 보통 우리 붓다의길따라 선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보시를 하고 나서 ‘스님이 저걸 사용을 하나?’ ‘내거 많이 좀 잡수시나?’ 이러고 자꾸 살피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어떻게 돼요? 그건 자기 자신이 보시한 물품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마음이 생겨남과 동시에 그 이후부터는 보시공덕이 더 이상 없어져버립니다. 보시할 때는 공덕이 있었지만 공덕이 지속적으로 돼야 되는데 요걸 못하게 돼버립니다.

 

불교의 보시는 일회성이 아닙니다. 그 결과라고 하는 것은.

두고두고 발생하는 게 보시의 공덕입니다. 이 사원도 사원이 존재하는 한은 내가 보시한 것으로 이 사원이 존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생겨난 공덕들은 나도 더불어서 나누어 가지게끔 됩니다. 그런데 손을 깨끗이 씻지 못하니까, 집착하는 것이 있으니까, 자꾸 본인의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끔 됩니다.

 

이 빨리어 게송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두 번째가, '보시하고 나서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보시하고 나면 ‘땡’하고 끝났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법회를 하든, 수행지도를 하든, 뭘 하든지 간에 잘되고 있으면 ‘아, 참 그것으로 인해서 기쁘다’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만이 그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지 ‘이건 내가 보시한 것이니까’ 하면서 그 스님에게 맡겨두지 않고 그리고 그 사원에 맡겨두지 않고 자꾸 와서 간섭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테라와다 사원은 어떠한 경우든지 스님이 거주를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그 스님이 경제적인 부분은 관여를 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법회를 보고 수행을 지도하고 하는 것은 그 스님의 관할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걸 방해하는 행위가 돼버려서는 어떤 경우든 안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들도 보시한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일절 가지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단지 보시한 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기쁜 마음이 자꾸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더 큰 공덕이 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또하나, 보시를 할 때 보통 마음속으로 '상갓사 데마' 하고 보시를 하죠!

「마하왁가」에 「찌와라 품」이라고 있습니다. 「가사 품」에 보면 어느 스님에게 누군가가 보시할 때 그 스님이 일러줘가지고 그 재가자가 "상갓사 데마" 하고 나서 보시를 했다 하는 구절이 나와있습니다 경전에.

그래서 그 뒤로는 거의 대부분 스님이 강제적으로라도 “따라하십시오” 해가지고 "상갓사 데마"를 하도록 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상가에 보시합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시를 하라”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개개인 스님에게 보시를 했죠? 여기 있는 스님도 개인의 스님입니다. 떼짓사라 스님에게 보시를 해가지고 이 사원이 건립됐지만 누구에게 보시한 겁니까? 상가에 보시한 겁니다. 개인의 스님에게 하지만 ‘나는 상가에 보시합니다.’ 하면서 보시를 하면 됩니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보시를 하든지 그 보시는 상가에 보시를 하는 것이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상가에 보시한 것은 상가 소유이지 여러분 소유가 아닙니다. 그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하나 더 빨리어 게송을 따라서 해보십시요.

'따당가 쁘라하나(tadaṅga prahāna)' (따당가 쁘라하나!)

그게 뭐냐면, '숨기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수행해서 수다원에 이르신 분 있어요? 없어?

(없습니다. 없을 것 같습니다.)

본인이 수다원이 아니면 모르잖아?

수다원이 되면 떨어져 나가는 번뇌들이 몇 개 있죠? 보통 크게 세 개로 나뉘어가지고 얘기를 합니다. 보통 아라한에 이를 때까지 번뇌들이 열 개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나머지 일곱 개는 뭘까? 그대로 존재를 하기는 하죠?

'따당가 쁘라하나' 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나머지 일곱 개는 숨겨져버린다'는 뜻입니다. 일정한 위치에 도달을 하고나면 떨어져나가는 건 떨어져나가버리지만 나머지 것은 숨어서 드러나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럽니다. 성질을 바라락 냈다,

저 스님이 수다원에 이르렀다더만 왜 성질을 낼까? , 그렇지. 아직 수다원은 성질이 떨어진 것은 아니니까 성질을 낼 수가 있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건 틀린 겁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속에 성질은 일어날 수 있을진 몰라도 이게 밖으로 표출이 되지를 않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지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숨겨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수행하면서 뭐가 떨어져 나가고 뭐가 숨겨져 있습니까?

조금 욕심부리는 것이 떨어져 나갔어요? 아니면 집착하는 것들 중에 어떤 게 떨어져나갔어요? 어떤 것이든 하나라도 떨어져나가면 다른 것들은 잘 드러나질 않습니다. 숨겨져 버립니다.

불교의 좋은 것, 수행이 좋은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걸 할 수 있는 곳이 어딥니까? 바로 이 사원입니다. 법을 듣고 수행을 실천하는 곳이 바로 이 테라와다 사원이라는 뜻입니다.

떨어져나가는 것이 더 많으면 많을수록 숨겨지는 것은 적어져버립니다. 나중에는 아예 다 떨어져나가버리고 숨길 것도 뭐 할 것도 없이 아예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선원을 보시를 해서 이 선원이 새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탐·진·치가 아직 있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숨겨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보시를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가 드러나도록 하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할 때도 탐진치가 드러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끔씩 선원에서 의견이 안맞아서 다툼을 있을 때도 있고, 또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는 때도 있고, 그런 것들을 봅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스님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 저럴까?’

‘탐진치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이 선원에 오는데 왜 저걸 자꾸 드러내게 될까?’

뭔가 행동 하나하나 할 때, 보시 하나하나 할 때, 바라밀을 쌓을 때,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이 드러나지 않게끔 하는 습관들을 아직 가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선원에서는 여러분들은 반드시 탐진치를 숨겨야 됩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떨어져나가야 되겠지만 숨겨서, 여기 와서는 탐진치를 없이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들로 가지고 탐진치를 자꾸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 주석하는 스님이 사람이 없다고 법회를 안 볼 수도 있고, 또는 언젠가처럼 삼개월만에 짐싸고 도망갈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인제는 그래서는 안되겠죠? 그래서 경고를 하는 겁니다.

짐싸서 도망갈 때도 탐진치가 일어났기 때문에 짐싸고 도망가는 거고, 법회를 보지 않을 때도 탐진치가 일어났기 때문에 게으름이 일어나서 법회를 못보는 겁니다. 핑계대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스님이 처음 법문을 할 때 태국에서 하신 큰스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2시간을 법문을 하라고 그럽니다. 첫 법문에. 무슨 하나의 주제에서 벗어나면 금방 제재를 하고 “다시 주제에 맞게끔 해라.” 처음 법문하는 사람이 뭘 어떻게 할 거라? 2시간을. 삼십분 지나고 한시간 지나면 사람들이 자꾸 빠져나가요. 나중에는 없어요. 그런데도 스님은 꾸벅꾸벅 조불면서도 그만하려고 그러면 법문 계속하라는 거라.

“아무도 없는데요?” 하니까 그때 큰스님께서 하신 얘깁니다.

“너는 네 눈에는 천신은 보이지 않느냐?”

“네가 법을 설하는 것은 인간과 천신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지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느냐”는 거라.

출가한 스님은 천신보다도 높다는 거라.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 2시간을 겨우겨우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뒤부터는 법을 설할 때 사람이 적고 많고 관계없이 어디서든 그냥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라.

 

여기 있는 주석하는 스님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이 없어도 온라인으로라도 해라는 거라. 법을 설하는 것들을 자꾸 습관화돼야만이 본인이 부족한 것들을 알고 본인이 공부를 하게끔 됩니다. 그리고 선원에서 수행해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 단계에까지 도달하는 자가 나타나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이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할 때는 그 상태에까지는 도달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윤회하는 것이 지긋지긋하면 그래도 적어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은 만들고 태어나야 될 거 아니라.

재가자들은 해야 될 것은 그겁니다.

바른 법을 듣고 바르게 수행을 해서 다시는 밑으로 후퇴하지 않은 상태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자꾸 돼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스님이 수행을 지도하고 법을 가르친 보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선원이 바르게 자리를 잡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스님도 노력을 해야 되고, 여러분들도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