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안주, 고요함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과 그걸 타파하는 방식(20231021)

담마마-마까 2023. 10. 22. 14:53

https://youtu.be/wPuHt2R95oQ?si=C1V5SEWegVV-jGTy

* 안주, 고요함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과 그걸 타파하는 방식(20231021)

 

오늘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수행문답 한 사람 중에서 좀 안주(安住)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대한 얘기를 먼저 조금 하겠습니다.

수행이 잘 되어나가고 하면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대상들이.

그래서 사라지는 것들만 계속 보이고, 이렇게 해서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그냥 거기에 안주할려고 그럽니다. ‘꼭 도와 과에 이르러야 되느냐?’ ‘열반을 체험해야 되느냐?’ 그런 생각을 잘 안 일으키고 거기에 자꾸 묶여버리게 되면서, ‘어, 지금 내가 평온한가?’ 알아차리고 평온하면 계속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고.

 

그러다 보니까 대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이 빠른 속도지만 이미 평온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냥 ‘어, 사라짐만 있네’ 하고 알아차려버리게 됩니다.

이러면서 이제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사라지는 게 눈으로 봤을 때도 뭔가 대상이 사라지고, 식사할 때 맛을 느낄 때도 사라짐만 계속 볼려고 하기 때문에, 앞에 ‘사라짐’과 뒤에 ‘사라짐’이 분명히 다른데도 본인은 자꾸 ‘사라짐’만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데 처음엔 두려움도 일어나다가도 그것도 인제 무덤덤해지면서 그냥 사라짐만 계속 보이니까 그냥 그것만 계속 보고 있는 거라. ‘사라짐, 사라짐...’ 하면서.

 

왜 이렇게 될까?

물론 뭐 게으름부리는 마음이 살짝 일어나기도 하고, 성냄이 살짝 일어나게도 되지만 그게 표면상으로 드러나지지는 않습니다. 수행도 아주 지금 잘되고 있는 상태라. 그게 성질에 관해서 '마음의 성질'에 속고 있는 거라. '묶을려고 하는 성질' 때문에.

하나로 묶을려고 그럽니다 마음은.

내가 지금 사라짐을 사띠를 해서 인식한 것들도 하나로써 묶을려고 그럽니다. 조금 전에 사라짐과 그뒤에 사라진 것이 "분명히 다른 사라짐"인데도, 그 다른 사라짐을 그대로 그냥 이것도 ‘사라짐’, 이것도 ‘사라짐’이라고 인식을 해야 되는데, "똑같은 사라짐으로써" 묶어버리게 되는 거라.

 

예를 들면 사람을 이렇게 봅니다.

‘남자네’ ‘여자네’ ‘똑같은 남자네’ ‘똑같은 여자네’ 이렇게 인식을 한다는 거라. 이 남자와 이 남자가 틀리고, 이 여자하고 이 여자가 다른데 이걸 하나로써 묶어버리는 거라.

하나로 묶어버린다는 거는 집착입니다.

런데 왜 이렇게 이런 집착이 생길까? 수행이 잘되고 있는데.

라고 하는 것이, 개념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게 「나」라고 하는 개념이 나타났다고 인식을 못해요.

? 사라짐은 계속 보이기 때문에.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고 열반과 진배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서는 되게 조심을 해야 됩니다.

묶을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거는 분리시켜줘야 됩니다.

맛을 볼 때 사라짐이 있었다, 그러면 그 사라짐만 알아차려야 됩니다. 조금 전에 맛을 볼 때 사라지는 것이 보이고 나서 그다음 뒤에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따로 다시 다른 사라짐이라고 인식을 하면서 앞에 거는 아예 잊어버려야 됩니다. 계속적으로 사라지는 것만 있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러면서 사띠를 자꾸 강화시켜 줄려고 해야 되지, 계속 사라짐만 계속 있다고 하면서 한묶음으로 자꾸 묶을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마음에 속아버리면 그렇게 돼버립니다. 마음은 하나로 자꾸 묶을려고 그럽니다.

보며는 '아름답다' '예쁘다' '남자다' '여자다' 그건 「개념」이지, 「나」라고 하는 것이 딱 성립되면서 개념으로 자꾸 만들어지는 것들이지 '아름답다' '예쁘다'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는.

사라지는 것에 딱 집착이 생겨버리면 거기에 라고 하는 것이 딱 붙어버립니다. 그러면은 한 덩어리로 자꾸 묶을려고 그럽니다.

오취온으로부터 벗어놔놔놓고 다시 오온을 분명하게 분석해서 알아차리고 있다가, 다시 오취온으로 도로 돌아가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런 분들이 혹시 있으면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묶을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마음은 어떤 경우든지 하나로 자꾸 묶을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묶여놔 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할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스님 같은 경우에는 밥을 공양을 할 때 비벼가지고 다른 것을 다 섞어가지고 먹는 걸 즐겨 합니다. 그래서 다른 걸 섞지 않고 따로따로 먹는 것들을 지금은 안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안 그렇죠? 따로따로 먹습니다. 따로따로 먹어야만이 그맛을 정확하게 이해를 합니다.

수행이 많이 진척되면 섞어놔두더라도 그속에도 다 짠맛이 있고 신맛이 있고 다 있습니다. 그냥 그것을 그대로 느껴야 됩니다. 짜면 ‘짜다’고, 그게 사라지고 나서 신맛이 있으면 ‘신맛이 있다’고 분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섞어놔놓으면 그냥 ‘맛있다, 맛없다’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가지고 자꾸 인지를 하게 됩니다. 마음은 그게 본질이라는 거라. 그게 싫으니까 대부분은 따로 분리해서 먹는 거라.

 

그게 마음의 본질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먼저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본질 따라서 자꾸 따라가다 보면 항상 대상들을 하나로 자꾸 묶을려고 한다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자꾸 분리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분석하고 이해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분석하고 이해할려고 할 것 같으면 자꾸 내가 가지는 것들이 없이 자꾸 사라진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냥 ‘예쁘다’ 하면 되는데, 저게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렇게 뜯어보려다 보면 그 예쁜 사람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분석을 안 할려고 그러는 거라. 이해할려고 안 하는 거라. 그냥 내 눈에 보이는 게 예쁘면 ‘예쁘다’고 자꾸 인식할려고 하는 거라.

그런데 사물은 빠르게 변하고 있으면 그걸 있는 그대로만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걸 앞에 것과 뒤에 것이 다르다는 것을 분석을 하게 되고 그걸 바르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마음의 흐름이 또 쫓아가다 보니까 분석하고 이해 안 하고 그냥 뭉뚱그려버릴려고 하는 거라.

 

마음의 본질 두 번째가 바로 분석하고 이해할려고 안 하는 성질 때문이라는 거라.

그러면서 본인은 지금 현재에 자꾸 만족을 하는 거라. 그래서 그냥 지금 평온하고 좋기 때문에 그냥 이게 탐진치도 안 일어나고 좋으니까 그냥 이대로 계속 그렇게만 수행을 할려고 자꾸 하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 행복하다’ ‘, 지금이 좋다이건 감정적인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감정이 없으면 못산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좋다, 나쁘다’ 이렇게 판단을 해야만이 내가 그다음 단계로 대응을 하게끔 되는데, 그걸 하지마라고 하니까 ‘어, 그럼 내가 어떻게 살아?’ 이런 마음이 들어버리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수행을 할 때 자꾸 마음에는 본인은 고요하다고 하면서 탐·진·치 그중에서 치심의 작용들이 자꾸 개입을 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도 치심(痴心)의 작용 때문이라는 거라.

 

그게 수행의 마지막일 것 같으면 거기에 만족을 해도 돼요. 그런데 마지막이 아닌데도 거기서 만족하고 그냥 계속적으로 그 상태만 즐길려고 한다는 거라. 감정이 없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분석하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는 하지 않도록 자꾸 마음을 다독거려야 됩니다.

지금 대상에 자꾸 만족할려고 한다 생각하면은, 그리고 지금의 상태에 자꾸 만족을 할려고 한다 생각할 것 같으면 , 내가 또 어리석음이라는 감정이 일어나는구나하고 자꾸 판단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라고 하는 착각을 자꾸 소중히 할려고 합니다.

지금의 상태? 누구의 상태인데? '자기 자신의 지금의 상태'라는 거라. 그걸 자꾸 소중히 할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그 상태에 자꾸 머물게 되는 거라.

탐, 진, 치에 매달려가지고 그걸 쫓아가는 것과 진배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거라. 지금은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은 잘 안 일어나지만 아윗자(avijjā)라고 하는 어리석음(痴心)이라고 하는 무명(無明)은 끊임없이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자꾸 개입이 되면 아윗자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지금의 상태'라고 하는 것도 '본인의 상태'라는 거라. 행복한 상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는데 고요한 상태, 왜 그 상태에 자꾸 머물려고 하느냐는 거라.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까지 도달했다고 해가지고 괴로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라. 아직 완전하게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대상을 통해서 괴로움들은 반드시 일어나야 됩니다. 지금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열반과 진배없는 상태이지만, 또다시 괴로운 상태가 일어나야 되는데 못 일어나게끔 막고 있는 거라.

 

이게 보통 사람들이 지금의 상태에, 고요함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이고 그걸 타파하는 방식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인식하는 것을 한묶음으로 자꾸 묶을려고 한다는 것을 자꾸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그 한묶음으로 묶을려고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수행은 다시 한단계 넘어가집니다.

고요함에 자꾸 머물려고 하지 말고, 사라지는 것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해가지고 거기에 자꾸 머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요것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질의응답]

Q. 수행자 질문 : 스님, 아까 하신 말씀 중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저기 잔디밭에 두더지가 굴을 파고 땅을 뒤집어놓았는데 저 상태를 볼 때에 마음을 어떻게 일으켜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득 세 가지 형태가 떠오르는데, 첫째로는 그냥 잔디밭이 파헤쳐져 있구나, 두 번째로는 두더지가 잔디밭을 파헤쳐놨구나, 세 번째로는 두더지가 잔디밭을 해쳐놓으니 잡아야 되겠다, 이러한 세 가지 형태로 문득 떠오르는데,

그러면 우리가 묶이지 않으려면 첫 번째 그냥 파헤쳐 있는 것만 마음을 일으키고 그다음 단계로는 진행을 시키지 말아야 되는 겁니까?

 

A. 스님 답변 : 이렇게 보십시오.

파헤쳐놓은 부분이 앞으로 경행대를 놔야 될 부분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반듯해야만 경행대를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첫 번째고,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아무리 두더지가 잔디밭을 파헤친다 하더라도 두더지가 잔디를 파헤쳐버리면 잔디는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잔디는 죽이지 않아야 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렇다고 두더지도 죽이지 말아야 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인데, 두더지가 꼭 저기가 아니라도 다른 데 가서 땅굴을 팔 수가 있거든.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만 만들어주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저기에다가 독한 약을 붓는다든지 두더지를 죽인다든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죠.

 

그러면 파헤쳐놨으면 살살살살 밟아주면 두더지는 그걸 피해서 또 갑니다. 그래서 잔디도 죽이지 않고 두더지도 좋고, 그다음날 되면 아니지 반나절만 되면 또 또 팝니다. 그러면 또 밟아주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지금은 한 3일 지났는데 두더지가 거길 안 파요. 쉽게 말하면 다른 데 가서 판다는 얘기라.

그러면 잔디도 죽이지 않고 두더지도 죽이지 않고 경행대 놓을 자리도 그대로 다져지게 되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렇게 돼야 그게 정상적인 것이지 그걸 다르게 판단해가지고 빨리 그걸 해결할려고 한다든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라. 아마 저걸 스님이 밟아준 것만 해도 2~30번은 넘어 될 겁니다. 계속적으로 하면 됩니다.

 

-수행자 : 저의 생각은 원인을 만든 것이 두더지니까 두더지가 팠다는 성냄이 일어나는 것이...

-스님 : 그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수행자 : 그래서 '성냄'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냥 땅이 파헤쳐졌구나 이 정도로만 인식하고 말아야 되는가 하고...

-스님 : 놔버리면 그러면 잔디는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잔디가 살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걸 밟아줘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고 놔둔다는 것도 그것도 '어리석음'이라는 겁니다.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떠들고 있는데 수행을 하니까 스승이 가서 “얘들아, 수행하니까 조용히 해라” 또 좀 있으면 계속 떠들거든. 한참 떠들도록 놔두었다가 좀 있다 가서 또 똑같은 말을 하는 거라. 한 열 번을 얘기하는데 똑같은 톤으로 아이들한테 나무라는 마음도 없고, 그리고 딱 본인이 해야 될 말만 하지 거기에다가 다른 살을 붙이는 것도 없고, 딱 그것만 합니다.

2시간이 지났는데도 내 똑같은 패턴으로 얘기를 하고, 애들은 똑같은 패턴으로 또 떠들고, 그래도 누구하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제지하는 것도 없고, 그게 바로 수행하는 자들이 몫이라는 거라.

 

-수행자 : 원인을 따지지 말고 내가 할 일만 생각해서 하면 된다 이 말씀입니까?

-스님 : 수행을 하다 보면, 아니면 경을 공부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그걸 분석할 때가 아닌데, 분석을 할려고 자꾸 그럽니다.

그런데 그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분석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집니다 수행에서는. 그렇게 판단을 해야 되지 그걸 자꾸 분석할려고 하면 문제는 오히려 꼬여버린다는 겁니다.

됐습니까? (예)

 

Q. 수행자 질문 :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스님 말씀 따라서 보면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끝나야 되는데 ‘저건 왜 저럴까, 내 같으면 저리 안 하겠다, 저래가지고 무슨 덕을 보느냐’ 이렇게 자꾸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그렇게 좋지는,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닙니까?

A. 스님 답변 : 그거 왜 하는데?

-수행자 : 그렇게 생각이 든다 아닙니까?

-스님 : 하지 말아라니까 그렇게.

-수행자 : 그래서 저는 그걸 상카라의 일어남이라고 회상을 해봤는데예, 그게 맞는가 모르겠습니다.

-스님 : 전혀 그거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수행자 : 상카라가 아니면 그러면 뭡니까?

-스님 : 그거는 그냥 탐진치가 일어난 겁니다.

-수행자 : 잡념입니까?

-스님 : 예.

-수행자 : 그러면 그거는 전혀 하면 안 되네요?

-스님 : 다른 것, 내 몸과 밖의 일은 내 관할 밖입니다.

그사람이 뭘하든 그거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내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 다른 것들을 관여하다 보면 수행은 자꾸 뒷전으로 두게 됩니다.

-수행자 : 그거는 수행할 때는 아닌데요?

-스님 : 일반적일 때도 수행을 하는 겁니다. 일상적인 걸.

그래서 자꾸 스승들이 스님들한테 얘기하는 걸, "절 가꾸고 절 늘리고 불사하고 하는데 자꾸 마음을 뺏기지 말아라" 그럽니다. 그럼 수행 못한다는 거라. 그건 밖의 일이라는 거라.

-수행자 : 그럼 누군가는 해야 되는데 아무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스님 : 누군가가 답답하면 하겠지.

-수행자 : 그럼 답답하면 하면 됩니까? 저는 답답한데요?

-스님 : 그건 수행하는 스님들이 해야 될 몫이 아니라는 거라.

 

Q. 수행자 질문 : 스님, 아까 사라짐, 사라짐을 구별해서 인식을 하라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러면 사라짐에 빠지지 말고 사라짐의 흐름들을 쭉 따라가라는 말씀입니까? 사라짐이 하나 사라지면 새로운 사라짐을 따라가고...

A. 스님 답변 : 그냥 사라지는 게 빠르게 변하고 있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을, 똑바르게 변하는 것을 그걸 인식하고 그냥 놔버려야 됩니다. 그것에 집착을 해버리면 그냥 똑같은 사라짐으로 보여버립니다.

-수행자 : 아무것도 없는 상태?

-스님 : 예.

 

Q. 수행자 질문 : 전에 누구하고 이야기하니까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하나 떠먹고, 하나 떠먹고 이런 얘기를 하던데예 그게 무슨 얘긴가 했드만, 일단 알아놓고 일단 알고 그만두어버리고, 알고 그만두어버리고 그런 뜻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예?

A. 스님 답변 : 어떠한 경우든지 빠르게 변할 때는 마음이 붙잡혀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지금 현재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감촉이 사라지는 건지, 아니면 생각이 사라지는건지, 아니면 느낌이 사라지는 건지, 몸이 사라지는 건지, 뭐가 사라지는 건지 다 다를 건데, 그냥 사라짐이라고 자꾸 인식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뭉뚱그려버린다는 얘깁니다.

자,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