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불기 2567년 담마와나선원 안거해제법회, 질의응답 법문 (231022)

담마마-마까 2023. 10. 23. 09:20

https://youtu.be/U6tp6rzaYpU?si=0jRAMO1wlkfSznrW

* 불기 2567년 담마와나선원 안거해제법회 (231022)

  (8:49 ~ 41:03)

 

담마와나 선원 오늘 해제죠?

보통 스님들은 해제하고 나면 지금 같은 경우에는 스승들을 찾아뵙습니다. 수행점검 받이야지. '나 이만큼 공부했다' 하는 걸 점검받는 건데, 부처님 당시 때는 다 부처님한테 갔겠죠?

수행점검을 해보겠습니다. 뭐로 점검을 할까?

전깃불이 들어와 있죠? 이 전깃불이 들어오면 뭐가 없어져요?

(수행자 대답 : 어둠이)

어둠이 없어지죠! 그건 동시에 들어오는 거죠, 동시에 되는 거죠? 하나는 불이 들어오고 밝아지고, 하나는 바로 사라져버리고.

 

수행에서 번뇌가 탁 끊어지는 걸 경험해 본 사람? 손들어봐요? 무슨 번뇌가 끊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수행자 : 그냥 다 없어지고...)

다 없어진다는 거는 어떤 게 없어진다는 거에요?

(수행자 : 일어나는 생각들이라든지, 망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없어지고, 고요한 마음들이...)

생각이나 망상이 없어지는 걸 번뇌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번뇌」는 쉽게 말하면 ‘내가 욕심부리는 것이 다신 안 일어나는구나’ 하고, 탁 그게 끊어지는 것, "탐 진 치 중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수행에서 수행이 잘되고 대상이 오롯해지면 망상이 당연히 안 일어나지고 고요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들은 그건 수행의 진행 상황인 거고, 그걸 가지고 번뇌가 떨어졌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수행을 잘하기는 했는데, 그것을 질문한 것은 아니었고,

 

또 다른 사람? 없어요?

(수행자 : 하나 있습니다. 더이상 시시비비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

그러면 상카루뻭카냐나에는 이르른 거라? 그 비슷하게는 갔어요? 어쨌든 수행은 잘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오늘부터 다시 그럼 결재에 들어가야 되겠네. 결과가 없으면 다시 들어가야지 뭐, 다른 수가 없잖아.

(수행자 : 성내는 것들이 조금씩 사라졌어요.)

그것도 하나의 결과일 수는 있습니다.

(수행자 : 동생이 집에서 잠을 자고 가는데 되게 화가 나게 했어요. 그런데 그거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그건 어쨌든 끊어진 건 아니라도, 그걸 제어할 능력은 생겼으니까 그것도 잘한 겁니다.

 

(수행자 : 요즘에 사업이 어렵고 문제가 계속 생겨가지고 고민이 많고 이런 두려움도 생기고 마음이 복잡했는데요, 그런데 그런 상태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모든 것은 육근으로 들어오는 것이 실재다, 그런 생각이 탁 들면서 그런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더라구요. 이 두려움이 개념이고 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이해가 생기면서 순간적으로 그런 두려움들이 사라지는 것들을...)

육근으로 들어오는 게 실재하는 거하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거하고 뭔 관계가 있나?

(수행자 : 아, 그러니까 이 두려움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으로 만든 것이라는 이해가 생겨났습니다.)
응. 실재하는 것을 보게 되니까.

(수행자 : 그리고 육근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고 내가 이런 느낌, 두려움, 괴로움, 이런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 두려움을 안 겪는, 바로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요. 어쨌든 수행은 실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하는 거니까 몸에서 일어나는 육근이나 오온 같은 것이 실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볼 정도가 될 것 같으면 변하는 성품들을 본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그게 수행대상이 된 것은 잘한 일이고, 그것들이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현상들도 그냥 그것도 관찰의 대상일 뿐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수행은 실재를 해야 되긴 하는데, 진짜 두려움이 사라질려면 실재를 가지고 수행을 하고 있는데도 두려움이 일어나지, 나중에는. 그래서 두려움이 다시 사라지는 과정들을 반드시 겪게 될 겁니다. 그때도 지금 같이 실재를 가지고 수행대상으로 삼으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지듯이, 실재를 가지고 수행을 하고 있는데도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들을 사라지게 할려면 그것들이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그냥 받아들여버리면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면 그때는 스님 말을 기억을 했다가 "그냥 평온하게 대상을 관찰하는 일밖엔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잘했습니다.

 

또?

(수행자 : 물욕이 상당히 많이 떨어진 것을...)

욕심이?

(수행자 : 예. 욕심 중에서도 물욕)
좀 완전히 떨어뜨려버리면 안 돼?

 

스님이 원하고 바라는 답은 "의지하는 것들을 좀 끊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

쉽게 말하면 (이) 스님한테 의지한다든지, 아니면 내 가족한테 의지한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저기) 스님을 의지한다든지, 하는 의지하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을 이번 안거기간 동안에 좀 끊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면 하는 게 스님의 바램이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 뜻대로 그게 안되면 탐진치가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설령 부처님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부처님을 의지했는데도 부처님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안 해주면 탐진치가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의지하는 것들을 잘 좀 떨어뜨렸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스님이 또 나중에라도 여러분들을 홀연히 떠나게 될 때 "잘가시오" 이렇게 해주면 참 좋잖아.

 

오늘은 안거해제하고 부처님을 뵈러가는 날이니까 경전에 나와있는 부처님 모습을 가지고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죠? 이제 여러분이 안거 끝나고 부처님을 뵈러 왔다고 쳐 봅시다. 저 (불상) 모습이었을까? 실제 부처님은? 실제 부처님은 맛지마 니까야 같은 경우에 보면 저런 모습이 아닌, 사슴의 정강이뼈같이 바짝 말라있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라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 성품이 드러나지는 게 아주 강인하게 뵈는 모습들도 있고, 또 평소 부처님이 하시는 게 소식하는 것들 그게 드러나지고, 그다음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들이 있고, 그래서 그냥 외형적으로 탁 봤을 때는 어느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모습인데 딱 수행자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모습이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경전에 기록이 돼있는데,

천신이 부처님한테 와서 그렇게 물어봅니다.

 

“고(苦)로부터 벗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하고 물어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괴로움에서 벗어날려면?

괴로움들은 참 많이 있죠?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있을뿐아니라 수행에서도 대상을 알아차리면 그게 괴로움인 걸 발견을 해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무상·고·무아는 한 몸인데 무상한 것을 관찰하면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따라나옵니다. 그래서 보통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수행이 배를 관찰하는 것들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것들인데, 그거는 변하는 성품들이죠. 그 변하는 성품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 변하는 것이 빠르게 변하면 괴로움을 느낄 거고, 그 대상들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에서 다시 정신적인 현상으로써 바뀌어나가게 되면 그것이 또 다른 괴로움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그런 괴로움이 수행에서도 숱하게 일어나지는데, 언제 그치게 될까?

일상생활에서의 괴로움들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해결을 하고, 수행에서는 언제 그치게 될까?

괴로움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천신이 물어보는 게 어떻게 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느냐는 거라.

어느 정도까지 괴로움을 경험을 해봤어요? 수행에서? 많이 해보죠? 그럴 겁니다.

 

크게 나누어 가지고는, 물질적인 현상이 변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오는 괴로움들이 첫 번째로 오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그다음에 정신적인 현상들이 변하는 것들이 더 빠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오는 괴로움들이 다음에 오는 괴로움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한번 더 괴로움이 오는 게 뭐냐면,

인제는 그걸 넘어서서 평온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데도 대상이 발견이 안됩니다.

뭘 대상으로 해야 될지를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분명히 사띠는 있는데. 그래서 거기서 보통 수행자들은 정신적인 방황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의도를 내가지고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면 분명히 그 대상들은 보이고 있고 또 그게 변하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데 지금 현전하는 것이 대상을 뭘로 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라. 어찌보면 사띠가 자동으로 잘 되고 있는데, 마음은 사띠는 있는데 대상을 못 찾아갖고 헤메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때 오는 괴로움은 굉장히 큽니다.

대부분 거기서 포기를 하든지 아니면 그 앞에 단계로 가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오는 고요하고 평온하고 즐거운 느낌들에 취해서 살아가는 상태가 됩니다.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변하는 속도만 내가 따라가게 되면, 그것들로 오는 것은 변하고는 있지만 평온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 머물러서 ‘아, 이렇게 평온한데 이게 열반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앞 단계로 가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수행을 진행을 안 할려고 하면서 어떤 경우엔 평생 그렇게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한단계 넘어가면은 상카루뻭카냐나에서 한참 동안 머물게 될 때 거기서 오는 괴로움들은 굉장히 큽니다.

왜 그럴까? 왜 거기서 빨리 도와 과 쪽으로 넘어가지지를 못할까?

보통 상카루뻭카냐나 뒤에 몇단계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도와 과를 이루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도와 과를 이룰 때는 상카루뻭카냐나에서 바로 들어가집니다. 물론 그뒤에 고뜨라부까지는 경험들은 하겠지만 그거는 잠깐 하고 그쳐버리는 상태가 되고, 도와 과에 이르는 상태에서는 상카루뻭카냐나에서 바로 들어가지게 되는데, 너무 길어져버리는 거라 상카루뻭카에서.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평온하고 고요하고 어떤 자극에 대해서도 마음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것들인데, 왜 괴로울까?

자기는 해탈이나 열반을 바라는데 안되니까.

그것도 사실은 욕심이라. 해탈이라는 것도.

그런데 가만히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 과거전생을 여러분들은 잘 모르죠? 만약에 여러분들 과거전생에서 “'나는 부처가 될 것이야' 하고 서원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이생에서 상카루뻭카에서 도와 과에 이르러봐야 겨우 아라한 밖에 안돼. 그렇잖아? 새로운 부처, 미륵불 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도와 과에는 이를 수가 있는데, 아라한까지는 이를 수 있는데 부처는 안되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이 서원을 만약에 부처를 서원을 했다, 과거전생에서. 어디에서 머물게 될까? 도와 과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도와 과에 일단 들어가버리면 부처는 끝나, 안 돼. 그럼 어디에서 머물게 될까? 상카루뻭카냐나입니다.

과거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버리면 그게 힘들고 괴롭진 않는데 볼 능력이 없거든. 그럼 왜 이리 안될까? 하는 거라.

 

그래서 오늘 스님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찬다(chanda)'라고 하는 것, 희망을 가지고 하는 부분들을 신중히 해야 됩니다. 신중히.

"나는 보살이 될 것이야" "나는 부처를 이룰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작은 희망들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빨리 내가 수행에서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기를" 하고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사실은 나중에는 수행에서 장애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감각적인 것과 결합이 돼버리면 어떻게 되죠? '감각적인 욕망'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 '까마찬다'가 돼버립니다.

'찬다'라고 하는 것은 선한 마음에서도 일어나지고 불선한 마음에서도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런데 선한 마음에서 일으키는 것인데도 상당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찬다'일까?

보통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나는 부처를 이룰 것이야" 하는 것은 사실은 '찬다'가 아니라는 거라. 사실은 '찬다'가 아니고, 그냥 욕심입니다, 욕심!

이룰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소원을 빈다 해가지고 소망한다고 해가지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사여의족이라고 알죠? 선정삼매를 개발하는 것들인데, 보통 많이 쓰입니다.

거기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 뭘까? '찬다'입니다.

첫 번째로 찬다, 그게 있어야만이 둘째, 셋째, 넷째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금 선한 마음에서 일으키는 찬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 스님이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찬다'는 뭘까? 어떨 때 삼매에 들죠?

‘내가 삼매에 들어야지’ ‘선정을 경험하고 싶다’ 이런다 해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죠? 어떤 때 선정삼매에 들어요? 욕심 같은 것이 있으면 안 되지, 당연히.

선한 마음으로 그냥 계속 하나의 대상을 사띠를 계속 그냥 하게 되면, 그것으로 해서 발란스가 잘 맞아지고, 노력하는 힘과 집중하는 힘의 발란스가 잘 맞아지면서 어느 순간 삼매에 쑤욱 들어가집니다. 경험해봤죠?

 

그럼 '찬다'가 뭘까? 균형을 맞춰주는 겁니다. ! 쉽게 말하면.

노력이 지나치지 않는지, 아니면 하나의 대상에 몰입되는 힘들이 지나쳐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것들이 발란스가 깨지는 것이 아닌지? 잘 살펴보면서 그것을 조절해주는 능력이 바로 여기서는 '찬다'에 해당이 됩니다. 사띠는 당연히 있어야 되는 거고. 사띠가 강하면 빨리 들어가질 거고, 사띠가 약하면 더디게 들어가질 거고. 그 차이가 있는 것뿐이지.

어쨌든 여기서 사여의족에서 첫 번째 나오는 '찬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소망하는 것이 아니고 발란스를 잘 맞춰주는 것들을 얘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바라는 '해탈을 바라는 것, 열반을 경험하는 것' 그것도 ‘찬다’라고 그렇게 보통 얘기합니다. 그 '찬다'는 어떤 걸까? 다들 경험해보고 싶어하잖아? 닙바나를 경험해봐야만이 그 보는 맛이라도 느껴볼 거 아니냐는 거라.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열반을 바라는 사람들은 무상··무아라고 하는 3가지 특성,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져야만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지를 잘 조사를 해봅니다. 여러분 중에서 탐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진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게으름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수행에서 어떤 것이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하기 쉬운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거라.

만약에 성냄이 많은 사람이다, 성냄으로 인해서 무상한 성품을 보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게 빠른 길이라는 거라. 탐심이 없는데 탐심을 가지고 무상한 성품을 볼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더뎌. 그럼 성냄 가지고 해야 되는 거라.

 

삼법인이 드러날 수 있는 조건들을 갖다가 잘 조사해가지고 거기에 맞게끔 그 대상에다가, 그것이 일어날 때 그 대상에다가 마음을 딱 갖다두게 될 때, 그게 바로 "닙바나를 바라는 찬다"에 해당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무조건 서원을 세우듯이 아니면 희망하듯이, 아니면 그것을 의지하듯이, 해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찬다는 아니라는 뜻이라.

 

여러분 지금은 부처님 법을 그리고 수행에 대한 것들을 스님들을 통해서 질문받고 듣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스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의지하는 것도 '찬다'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그 스님들이 죽음을 맞는다든지 아니면 떠나버리면 어떻게 돼요?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찬다는 괴로움을 받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의존하는 대상들을 자꾸 끊어낼려고 해야만이 '바른 찬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법을 의지하고 부처님을 의지하고 스님들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들의 수행을 돕는 수단인 것이지 거기에 의지할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저 스님이 어떻게 되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것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실제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가만히 뜯어보면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지혜의 무슨 단계이든, 아니면 도와 과의 어떤 단계이든 간에 그냥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그대로 그냥 사띠하는 겁니다. 도와 과에 이르는 순간들에만 그 '도와 과'가, 해탈이면 '해탈'이 대상이 되는 것이지 그 외에 나머지는 전부' 여러분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단지 그 현상들로 인해서 괴로움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평온함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는 즐거움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들이 바뀌는 것뿐인 것이지, 그게 수행의 과정일 뿐이지, 결국에는 도와 과에 이르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이 여러분들이 의지해야 될 대상이고 관찰해야 될 대상이라는 거라. 그 외에 것들을 자꾸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보조적일 수는 있어도.

 

안거를 이제 마치고 났으니, 또 여기 있는 스님들은 또 좀 있으면 각자의 처소나 아니면 각자의 인연 닿는 곳으로 멀리 좀 떠나기도 할 겁니다. 그러면 돌아오고 나면 꼭 하는 얘기, 스님이 듣는 얘기가 있습니다.

“스님이 없으니까 수행이 안됩니다.” 그게 뭔 말이야, 그게?

왜 의지할 대상이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 되지 않고 스님들이 돼있느냐는 거라.

하물며 여러분들 가족이 의지할 대상이다? 그럼 여러분들 죽음을 막아줘? 가족은 여러분이 살아나가는데 행복하기 위한 그런 모임체인 것이지, 그것들이 여러분들의 수행을 대신 해주고 여러분들이 도와 과를 이루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거라.

여러분들 재산? 좀 더 힘들지 않게 살기 위한 도구이고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수단인 것이지 그것이 여러분들이 의지할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는 거라.

 

부처님이나 스님들도 여러분들에게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그런 것들은 더더구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만큼 구하게 되고,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오는 이익들을 갖다가 누릴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여러분들을 옭아매는 속박하는 도구가 되지는 않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스님들이 얘기합니다. 어떤 수행을 하든지 수념처를 하든, 심념처를 하든, 법념처를 하든, 뭘 하든지 간에 그냥 대상에 대해서 사띠하는 것입니다.

사띠가 없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이 지금 이 몸을 받고 태어난 보람이 없어지는 거라. 죽은 시간이 돼버린다는 걸 잊지 않고, 대상에 대해서 사띠를 하고, 그리고 그 대상들은 사띠하면 반드시 변합니다. 그러면 붙잡지 말아라는 거라. 내버려두고, 또 다른 사띠 대상이 여러분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냥 사띠 하라는 거라.

그러면 여러 가지 단계들을 여러분들이 거쳐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들을 잘 이루어서 이생에 살아가면서도 항상 평온하고,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단계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https://youtu.be/QXTgm8q7aMA?si=qhkuAEovKmJGieyh

 

 

* 담마와나선원_수행자와 질의응답 시간 법문 (231022)

[아짠 빤냐와로 큰스님과 담마수카선원 떼짓사라 선원장스님이 함께한 질의응답]

 

우 떼짓사라 스님 법문 :

... 마음이 신심을 일으키고 선한 마음도 일으키고, 또 법을 많이 지켜봐야 되니까 또 아라한이 되겠다는 ... 사실 이 법의 자리만이 굳이 법의 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간에 버스를 타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음식을 먹든 모든 대상은 다 법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에서는 사회인이니까, 이미 우리는 사회인이니까 그런 마음들을 많이 놓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그때마다 알아차림을 한번 해보십시오. 지금 자리는 여기 지금 마음이 알아차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법을 보고 있는가? 마음에 물어보십시오. 마음은 어떠한가? 마음의 질이 좋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대상을 뚝 떼어서 마음이 함께 하고 있는가?

 

사실 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지혜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할 때는 알지 못하는 것인데 실제적인 거는 (좀 뒤에서라도?)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이 능숙하지 않다 그러면 지혜의 힘도 약하고 사띠의 힘도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대상도 자연스럽고 또 억지로 한다고 해서 그것은 지혜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일을 할 때는 사띠의 힘 그리고 법의 힘도 강하고 알아차림의 힘이 좋을 때는 그래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믿고 나는 늘 사띠가 힘이 좋다, 나는 지혜의 힘이 좋다, 그것을 믿는 순간에 우리는 그 믿음 속에 번뇌가 함께 하게 됩니다.

 

다만 지켜볼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알아차림으로!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 마음의 질이 어떤가? 어떤 대상을 보고 판단하지 않나? 또 싫어하는 대상이 있는가? 좋아하는 대상이 있는가? 그것은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고 어떻게 지켜보는가에 따라서 마음의 질이 달라집니다. 지혜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한다면 좋은 질이라고 볼 수 있고, 또 탐욕, 우리가 탐진치를 가지고 수행을 한다 그러면 탐진치의 역할밖에 안됩니다.

 

우리 수행자들의 몫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또 바르게 살기 위해서 또 지혜롭기 위해서 그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또 더 나아가서는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고통이라는 거, 탐심이라는 거, 성냄이라는 거, 또 어리석음이라는 거, 그것은 항상 옆에 있습니다. 마음 앞에 있고 마음을 잠시 옆에 두는 순간 그 번뇌는 항상 마음 안에 침투합니다. 그런데 침투할 때는 그것을 모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뒤에 알아차림을 통해서 그것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때 잠시 고통이라든가 번뇌라든가 그런 작용을 억제를 할 수 있죠. 그렇다고 해서 늘 번뇌가 작용을 하느냐는 거죠.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의 작용은 힘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 앞에서는 힘을 우리가 고양이 앞에서 쥐의 모습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번뇌는 항상 마음 앞에 또 마음 깊이 뿌리 깊은 곳에 잠재의식의 위에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혜가 있다고, 사띠가 있다고 해서 드러내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도 실제적인 거는 지혜가 그때그때 일을 하는 것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마음의 질이 좋아지고 또 보는 힘이 좋아지고 그리고 알아차림의 힘이 이어갈 때 그때 작용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그 지혜가 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단지 마음이 알아야 될 것은 지금 이런이런 상태죠. 이런 어떠한 대상에 부딪쳤을 때 그럴 때는 , 전에는 이럴 때 마음에 도사가 일어나고 번뇌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그것을 지켜보니까 이런 성질이 죽었구나알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들은 항상 변합니다. 대상에 따라서, 마음의 질에 따라서,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마음의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믿을 때도?) 늘 지켜보고 사띠와 사마디, 또 우리가 고무줄 같이 탄력을 이용해서 균형을 맞춰서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상이 보기 싫다고 한다 하더라도 대상은 있습니다. 중요한 거는 지금 이 순간, 어떠한 조건에 있어도 자신의 마음에 질을 지켜보는 겁니다. 알아차림이 있는지, 또 대상에 휘말려서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고 있는건지, 또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는지, 또 자신이 또 좋아하고 있는 것만 좋아하고 있는건지, 그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다른 마음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가지고 있어야 될 마음들은 바른 마음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바른 마음을 이어가고 자애를 마음안에 깊이 심어줘야 됩니다. 그러면은 싫어하는 존재도 싫어하는 대상 모두 역시 좋은 대상으로 될 거고, 마음도 역시 질이 좋아지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가르친다 하더라도 또 잊어버리면 또 생각을 안 하고 대상에 따라간다면 마음의 질은 역시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은 수행의 이익이 없고 마음의 이익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할 때는 후회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거고 후회한다 하더라도 그역시 그 마음이 ... 그때 마음을 다시 돌려주는 거니까 그때 알아차리고 지금 마음가짐이라든가 다시 돌려준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뭔가 나빠지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보는 대상에 따라, 마음이 일으키는 마음에 따라 마음의 질이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때그때 공덕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뭔가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마음을 일으키죠? 탐욕하는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탐욕이 뭡니까? 우리가 뭔가 성취하고 이루고자 하는, 또 뭔가 뜻하는 거를 마음에 뭔가 우리가 탐심을 냅니다. 이런 수행을 한다그러니까 일상적인 마음에서도 그런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한번 마음을 지켜보십시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에 도사가 있었는가? 알아차림을 이어가고 있는가? 스님은 그냥 법문만 할 뿐입니다.

재가자들이 할 일은 마음을 이해하는 부분이 재가자들이 할 일입니다. 스님이 이래라 저래라 한다 하더라도 몫은 우리 재가자들 몫입니다. 스님이 할 일은 거기까지고 또 재가자들이 할 일은 수행에 대한 목적, 또 목적 이것도 하나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법을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필요한 사띠라는 것도 하나의 개념이고 그 사띠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지혜 개발을 하는 겁니다.

과연 나에게는 어떤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견해를 만들려는 것이 이익인가, 사띠를 이어가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선한 마음을 마음안에 챙겨서 마음이 밖에 대상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이 이익인가, 또 아니면 탐욕으로 어떤 마음을 일으켜서 뭔가 이루겠다는 마음, 어떤 것이 이익일까요?

우리 지금 마음을 지켜볼 때는 그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법을 보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도 법의 자리고, 이 법회를 마쳐도 법의 자리이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잠을 자는 순간 또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도 모두 법의 자리입니다. 그 법의 자리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수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필요하고 또 신심이나 사띠, 지혜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현상 봤을 때는?) 어떤 대상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차 자가용이 말해주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이 말해주지 않습니다.

단지 대상이든 자연의 이치대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윤리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거기 끼어들지 않고 이해하는 마음을 사띠 알아차림으로 이어간다는 것이고 그것이 중요한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사띠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잊지 않고 수행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무엇을 알게 됐습니까? 마음에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법에 대한 조사도 하게 될 것이고 또 법에 대한 것도 볼 것이고, 그리고 밖의 대상은 단지 뭡니까? 단지 대상일 뿐입니다. 어떠한 것이라도 마음에 작용을 만들지 않습니다. 마음이 작용을 만들지 그 대상이 마음의 작용을 만들지 않습니다. 작용을 한다는게 번뇌가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이룰 수 있는 부분이 없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지혜 개발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을 지켜보고 또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부분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11:07>

 

-수행자 : 스님 이쯤에서 재가자들의 질문을 받아주심이 어떨까요?

. 그래요.

 

 

Q. 수행자 질문 : 스님 질문할 게 있습니다.

사실은 저는 수행을 처음 하는 수행자입니다. 초보 수행자인데 수행을 좌선이든 경행이든 하면 자꾸 편안함으로 들어갈려고 합니다. 경험해 본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거를 편안한게 좋아가지고 편안하고 싶네그러면서 편안함을 찾을려고 수행을 하는듯한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편안함, 고요함 이게 분명히 어떤 과정일텐데 아직까지 어리니까 그걸 넘어서야 된다고는 스님들께 많이 듣고 알고는 있지만 그걸 넘어서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그걸 어떤 식으로 마음에 편안함·고요함이 왔을 때 , 이걸 넘어서야지’ ‘, 이걸 지나쳐야해이런 걸 어떻게 수행하는 도중에 과정 중에서 끌고나갈 수 있을까요?

A. 떼짓사라 스님 답변 : 먼저 아까 말씀하신 것같이 원하는 마음이 거기에 관여를 하잖아요.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돼요. 그 고요함이라는 것이 참 좋기는 한데 그 고요함을 원한다고 해서 고요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탐심이 들어가게 됩니다. 고요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마디가 있고 위빳사나가 주가 되지 않습니까? 사실 위빳사나와 사마타는 그 두 가지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빳사나 속에서도 사마타가 있고, 사마타 속에서도 위빳사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두 가지로 분류를 해놓은 건데 첫째는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고요함 속으로 머물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수행의 목적은 고요함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혜가 나기 위한 목적입니다. 고요함은 내가 괴로울 때 또 아니면 마음을 차분하게 할 때 선정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러한 것을 하고 싶을 때 그때는 고요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하는 목적보다 지혜로서 그리고 그런 것도 원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먼저 보셔야 됩니다. , 지금 어떠한 고요함을 내가 성취를 할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는지, 또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그런 부분이 있는지 보면 되겠죠. 그런 부분들 수행부분들이 있겠죠.

그런데 진짜 실제적인 고요함 보다는 그 고요함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분 또 지금 알아차림을 이어가면서 느끼고 들리고 모든 것을 알아차리면서 그것에 대해서 동요하지 않고 보여지는 거 들려지는 거 먹는 거에 대한 그것도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가, 그 마음을 지켜보셔야 됩니다. 아는 마음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탐심이 있는가를 조사해봅니다. 탐심으로 수행을 하는가, 어떠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는가, 지혜가 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자 하는가, 또 선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는가 그런 것을 조사를 해야 됩니다.

그럴 때는 고요함만 너무 찾을려고 그러면 탐심으로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든가 또 말하는 거 또 보여지는 거를 인식을 하는 거를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하는데 자꾸 자신이 수행했던 방법하고 수행의 목적하고 달라집니다. 그래서 고요함 보다는 지혜를 써주기 위해서 그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고요하면, 수행을 한다 그러면 탐심이 들어가고 또 거기 머물려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혜 수행을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

 

-빤냐와로 큰스님 : 답이 됐습니까?

-수행자 : . 제가 스님 말씀 다는 이해는 못하지만 결국에는 사띠로서 내가 지금 탐심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지, 알아차려라는 그런 내용인 것 같습니다. 알아차려야지만이 거기에서 머물지 않겠죠. 그리고 지혜를, 실재를 바라볼 수 있는 위빳사나 쪽으로 갈 수 있게...

A. 빤냐와로 큰스님 : 자꾸 고요함에 머물려고 하면 대상을 많이 늘려주십시오. 수행대상을, 좌선에서도 수행대상을 호흡에만 가져가지 말고 보는 대상을 사띠하고, 호흡도 들이쉬고 내쉬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앉음’ ‘닿음이라고 하는 닿음 포인트를 늘려준다든지 대상 포인트를 자꾸 늘려줄려고 하고, 그리고 좌선만 하지 말고 반드시 경행을 같이 하고, 경행을 할 땐 좀 빠르게 하고, 포인트가 늘어나야만이 고요함에 머물지를 않습니다. 지금은 수행 초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이 괴로워요. 그러니 자꾸 마음이 편안함을 찾아버리면 수행 못하게 됩니다. 대상을 자꾸 늘려줘야 됩니다.

 

 

Q. 수행자 질문 : 저는 두달전쯤에 빤냐와로 스님께 인터뷰한 것의 연장선상으로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두달 전쯤에 호흡하는 것이 힘들어가지고 그것에 관련해서 인터뷰를 드렸는데 혹시 약간이라도 기억나실까요?

A. 빤냐와로 큰스님 : . 말해보십시요.

-수행자 : 스님께서 저에게 다른 쪽 수행법들을 해보는게 좋다고 추천을 해주셔서 그다음에 고엥까 수행하는 곳에 가가지고 10일 동안 수행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어느 정도 약간 해결이 돼가지고 그냥 호흡하는 거 불편한 거 이런 거는 그냥 그저 느낌이라고 감각이라고만 관찰을 해가지고 약간 해결을 해가지고,

그다음엔 파욱 수행쪽 가서 이거를 내가 수행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잘할 수가 있나 확인해보려고 가서 수행을 해봤습니다. 그러니까 며칠 동안은 잘 되더라구요. 호흡하는 것도 불편함도 많이 사라지고 이완도 잘돼가지고 수행도 아주 편안하게 되고, 그런데 며칠 뒤에 갑자기 상기증이 나타났어요.

그래가지고 이제는 호흡에 불편한 건 없어졌는데 상기증 때문에 좀 수행하는게 다시 좀 불편해졌습니다. 다시 집에 온 뒤에 상기증이 수행할 때마다 계속 머리 아프고 지금도 앉아서 숨을 볼려고 하면 1~2분 정도 안에 바로 머리 아픈 것이 생겨나고 그럽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해야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빤냐와로 큰스님 : 머리아픈 게 파욱에서였으니까 거기가서 물어봐야지.

지금 본인은 느낌 수행들이 맞다는 얘기거든요. 수행을 하더라도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갖다가 자꾸 관찰할려고 하고 그럴 때가 호흡이 자연스럽다는 얘기라요. ()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그냥 명칭을 붙여서 불러오고 꺼짐을 관찰하는 것보다 불러올 때 어떤 느낌인지 꺼질 때 어떤 느낌인지 하는 것을 보통 관찰하고 하는 것이 고엥까의 방법이라고. () 그럼 그 느낌을 관찰하고 할 때는 호흡은 어쨌든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는 얘기거든. 그렇기 때문에 상기가 안 일어나져.

파욱의 방법은 호흡을 강하게 하든지 아니면 호흡에 코끝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관찰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호흡이 안되고 인위적으로 자꾸 하게 되는 거라. 길게 돼버린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상기가 일어나는 현상들이기 때문에 본인은 파욱의 방법이 지금 현재는 잘 안 맞다는 얘기라.

그러면 버려! 지금 안 맞을 때는!

수행의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나중에 결과는 똑같이 일어나지게 될 거 같으면 안 맞는 방법은 지금은 버리라는 거라. 나중에는 그게 맞을 수가 있으니까. 그러면 차라리 고엥까의 방법대로 편안하게 호흡하면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라는 거라. 답이 정해져 있는데 왜 자꾸 물어봐?

-수행자 :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부터는 다시 호두마을에 가서 한 10일 정도 수행을 해볼려고 하거든요. 일단은 스님께서 여러 수행법 한번 해보라고 하셔가지고 일단 가서 해보려구요.

 

-빤냐와로 큰스님 : 가서 해봐.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그런데 결국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파욱이든 고엥까든 마하시든 어디든지 간에 호흡은 자연스러워야 돼야 돼. 자연스러운 호흡이 안 되면 그건 수행이 어그러진다고. 그것만 명심을 하고 가서 지도를 받도록 해요. 또 여러 가지 수행법은 젊으니까 익혀놓는 게 좋아요.

어차피 수행은 나중에는 하나의 현상을 볼 것 같으면 그속에 지수화풍이 다 들어있고, 그다음에 4가지 수행법이 다 들어있어요. 수념처도 있고 심념처도 있고 다 드러나기 때문에 나중에는 대상을 놓치지 않을려면 이런 수행법들을 다 알고 있으면 대상을 놓치지 않는 상태가 돼. 그러기 위해서는 젊었을 때는 여러 수행법들을 다 해보는 것이 좋으니까 하도록 해봐. 해보고 자연스럽게만 하면 경험하는 것이 좋아.

지금 현재는 어쨌든 호흡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지금은 고엥까의 수념처가 조금 맞다는 얘기라. 그래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 방법으로 쭉 해와도 별 무리는 없어요.

 

-수행자 :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약간 문제가 수행처도 수행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지 그래도 수행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다른 수행처들은 마땅한 데가 좀 없고 파욱 쪽만 그래도 저를 받아주는 데가 있어가지고 그래서 그런 부분 때문에 애매하더라구요. 그래가지고 제가 만약 제가 파욱, 다른 수행방법을 해야 되긴 하는데 지금 그거를 되도록이면 그 방식을 빨리 해결하고 파욱으로 가는 게 지금 제 현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이어가지고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런데 왜 수행을 꼭 수행처에 가서만 한다고 생각해? 집에서 안 돼?

-수행자 : 저 집에서 쫒겨나가지고 지금 수행처에 있어야 되는 그런...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럼 집에서 쫒겨났으면 다른 데서 방을 얻어가지고 있든지 그래가지고 수행을 하든지 해야지, 꼭 수행처에 가야 된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게 되면 집에서 쫒겨나가지고 갈데가 없어서 수행처에 가는 것밖에 더 돼?

-수행자 : 알겠습니다.

-빤냐와로 큰스님 : 자꾸 수행을 수행처에 가서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돼. 일상생활에서 수행이 안되면 수행처에 가서는 잠깐은 될지 몰라도 돌아오면 의미가 없어져 버려. 그것도 하나의 병이니까 병은 고쳐 이.

-수행자 : 알겠습니다.

 

 

Q. 수행자 질문 : 저는 보여지는 것들을 관찰을 할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면 크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떤 소리나 보이는 것들이 통으로 보여지는 느낌, 소리라든지 이런 것이 예전에는 저쪽에서 소리가 났네라고 하면 (지금은) 귀에서 소리가 나는 느낌, 휴대폰 같은걸 보면 휴대폰이 보여지기 보다는 '시야가 통으로 보여지는 느낌'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고, 어쩔 때는 마치 '카메라가 시선을 따라가는 것처럼 알아서 어떤 자기가 봐야 될 것들을 딱 딱 보는 느낌', 이런 두 가지 현상을 크게 겪는데 어떤 게 좀 더 바람직한 현상인지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궁금해서 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A. 떼짓사라 스님 : 어제 스님이 밴드에다가 짤막하게 글을 올렸는데, 사람 소리, 떠드는 소리, 새소리 관념이라고 짤막하게 글을 올려놨는데, 한 분의 수행자님께서 '소리는 지혜이고 새소리는 관념이 아닌가요?' 하고 물음표를 달아가지고 댓글을 달아놨더라구요.

소리라는 것은 밖의 대상입니다. 마음 안에 대상이 아니라 밖의 대상입니다. 그 밖의 대상이었을 때는 마음에 이렇든 저렇든 간에 그 소리는 똑같습니다. 휴대폰을 보든 안 보든 간에 벨소리가 날 때 그걸 보더라도 그 벨소리는 똑같죠? 안 봐도 벨소리는 똑같습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것, 마음이 아는 것은 휴대폰이 아니라 소리라고 인식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알고 문구를 보게 되면 또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럼 또 좋아하는 사람들은 문구가 좋아하는 마음들이 일어날 것이고, 다 관념들입니다. 개념들입니다.

이게 실재적인 거는 소리와 대상의 모습이 글귀라든가 그런 게 실재가 아니라는 거죠. 들려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것을 듣고 또 보여지고 할 때 마음이 알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마음이, 어떤 변화가 있는가? 사실 이 마음이라는 것이 장소가 없습니다. 동서남북 이 안에 장소가 없습니다. 마음이 보는 겁니다. ‘저쪽에서 들린다, 저쪽에서 들린다근데 저쪽에서도 들리고 이쪽에서도 들려도 마음이 그걸 알게 됩니다.

그 작용은 만약에 새소리가 동쪽에서 들렸어요, 오른쪽에서. 오른쪽에서 들렸는데 오른쪽에서 들렸다고 얘기 안 하더라도 그걸 알고 있죠. ‘오른쪽에서 동쪽에서 들렸다, 오른쪽에서 들렸다, 또는 왼쪽 방향에서 들리고 있다마음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는 마음 중에 하나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일하고 하는 마음을 알고 있는 마음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뭐가 보여지는 것도 실제적으로는 관념입니다. 밖의 대상입니다. 마음 안에 대상이 아니라 밖의 대상입니다. 그래가지고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또 무덤덤한 것 그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볼 필요는 없고 그것을 보고 알면 됩니다. 마음이 알면서 벨소리가 나면 , 이것은 누구한테 오는구나. 받아야겠지아니면 문자 소리, 새소리, 차소리 그렇게 알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엇을 알든 알면서 하는가,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알면서 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특정하게 이름붙이기 보다는 아는 마음이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짧게 하겠습니다. <28:50>

 

-빤냐와로 큰스님 : (떼짓사라 스님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지 자꾸 딴 소리 하지 말고. 질문이 그게 아니었잖아.

(수행자에게) 다시 질문 해봐요.

 

Q. 수행자 질문 : , . 보이는 마음을 볼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그러다보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통으로 보이는 때'가 있고 또 '대상이 일어나는 대로 그렇게 저절로 알아지는 때'가 있고 그런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게 좀 더 바람직한 현상인지,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하는 것을...

-빤냐와로 큰스님 : (떼짓사라 스님에게) 그걸 얘기해 줘야지.

A. 떼짓사라 스님 : 대상을 알아차리는 부분이 중요한 겁니다. 통으로 보는 것도 중요한데 그게 대상이라고 알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 때 그런 앎이 있을 때 그러면 됩니다.

-수행자 : 통으로 보여지는...

-떼짓사라 스님 : . 통으로 보여지는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고 실제적인 거 대상이라고 알아질 때 그때 알 때 그때가 중요한 겁니다.

 

-빤냐와로 큰스님 : 어떻게 통으로 보여진다는 겁니까?

-수행자 :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소리가 어떤 소리, 어떤 소리이렇게 구별이 되지 않고 그냥 귀에서 나는 소리로 들리고, ‘저쪽에서 나는 소리뭐 이렇게 구분되지 않고 그냥 귀에서 소리가 난다이렇게 느껴지고, 어떤 보이는 것들도 휴대폰 코드뭐 이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각이 통으로 이렇게 보여지고, 마찬가지로 이것도 그냥 눈으로 보여지는 거지 저기가 있다, 여기가 있다이런 것들은 안 느껴지고

-빤냐와로 큰스님 : 그때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마음이 편안해요?

-수행자 : 그때마다 다른 거 같습니다. 통으로 보는 게 마음이 좀 더 생각할 게 없어서 편안한 거 같습니다.

-빤냐와로 큰스님 : 그게 답입니다. 그게 답이에요.

자신의 생각이나 개념이 개입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그냥 통으로 보여집니다.

들리면 들린다고 되는 것이지 누구의 소리인지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그런 거 전혀 몰라야 됩니다. 그게 "통으로 보여진다"는 의미거든. 그게 맞는 겁니다.

 

-수행자 : 그렇게 통으로 보여질 때는 어떤 글을 읽거나 하면 글이 좀 잘 안 읽혀서 일상생활하는데 지장이 좀...

-빤냐와로 큰스님 :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거는 일반적으로 생활할 때는 그 방법으로 쓰면 안되는데, 지금은 힘이 약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보이면 보여진다고만 알고 그 내용을 기억을 못해도 관계는 없어요. 단지 힘이 나중에 생기고 집중력이 생기고 사띠 힘이 생기면 그것이 뚜렷해져요. 지금은 그정도 수준이니까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지금 수행 잘하고 있는 겁니다. 됐어요?

-수행자 : . 알겠습니다.

 

 

Q. 수행자 질문 : 스님, 저기 경우는 수행을 별로 안 했는데 그렇게 통으로 보여지는 거는 굉장히 빠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A. 빤냐와로 큰스님 : 빠른 겁니다. 그래서 내가, (떼짓사라)스님이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서 다시 물어보라는 거라. 그게 수행을 잘하는 겁니다.

잘하고 있어요. 그거는 그렇게 하면 되요.

 

 

Q. 수행자 질문 : 고요와 평온함에서 생각이 탁탁 끊어질 때가 있는데...

A. 빤냐와로 큰스님 : 생각이 끊어진다고요?

-수행자 : , 생각, 번뇌 망상 이게 그냥 탁 끊어지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빤냐와로 큰스님 : 끊어진다는 거는 어떤 의미에요?

-수행자 : 거기서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진행을 안 하고 집중을 하는...

-빤냐와로 큰스님 : 그것이 사라져버리고 곧 다른 대상이 나타났다는 거지?

-수행자 : 다른 대상도 안 보여요.

-빤냐와로 큰스님 : 안 보이고? 그럼 뭐해요? 그때의 마음이?

-수행자 : 고요하고 평화롭다 하는 마음이 살짝 들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거조차도 안 들 때도 있고, 그럴 때는 밤을 꼬박 새워요, 거의.

-빤냐와로 큰스님 : 새우면서 뭐하는데?

-수행자 : 제가 이 생각이 끊어졌구나 하고, 이 마음의 동요가 끊어졌구나, 딱딱 끊어지는 느낌을 받거든요.

-빤냐와로 큰스님 : 그거는 잘한 건데, 그 뒤를 뭐했느냐는 거라. 지금 묻고 있는 게.

 

-수행자 : , 고요함에 평온함에 제가 스스로 그거를 즐기고 있더라구요. 나중에 보니까, 이러다가 나중에 아무 생각도 없이 어떤 무기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어떨 때는 그 마음이 좋아서 자꾸 그렇게 할려고 하고, 그러다가 한순간 내가 여기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해요.

-빤냐와로 큰스님 : 생각이 끊어지는 건 좋았는데, 그 뒤를 자꾸 물어보는 게 대부분 그 뒤에 사람들이 하는 것이 그냥 즐기게 되는 거라. 평온함을 즐겨버리게 되기 때문에 수행에 진척이 없어져버려요. 그러면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하다가 번뇌가 떨어지듯이 생각이 탁 끊어지는 게 보여요. 탁 끊어지고나면 그다음엔 빨리 사띠를 호흡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경행을 하든지 해가지고 주대상을 찾아야 되는데 안 찾아버리는 거라. 그러면 그냥 무기 같이 고요한 상태를,

고요한 상태는 알아, 알기는 아는데 얼마나 흘렀는지 지금의 마음의 상태가 어떻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그거는 시간 낭비라.

그러지 말고 탁 생각이 끊어지고 나면 빨리 주대상으로 돌아와야 생각이 끊어진 다음에 또 반복해서 안 일어나지는 거라.

그런데 그러지 않고 생각이 끊어지는데도 다시 또 고요한 상태를 즐기고 있을 거 같으면 또 조금 있으면 생각이 또 일어나지게 되요. 비슷한 패턴으로. 그러면 안 돼. 끊어지면 주대상으로 돌아가져야 되는 거라. 의도적으로라도 주대상으로 돌아가져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리 안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생각이 딱 끊어지면 끊어진 게 어떻게 해서 끊어졌지?’ 하는 것을 돌아보라고. 그러면 생각이 끊어지는 패턴들이 보인다고. 그러면 그 패턴들을 한번 되씹어보고나서 다시 주대상으로 돌아올려고 하고 돌아오고.

그 두 가지 중에 하나의 방법을 택해야지, 지금 같이 그냥 고요함을 즐겨버리면 안 되는 거라. 그게 보통 수행을 잘하고 있는데, 사띠도 강한데도 수행이 진척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패턴을 많이 보입니다. 그것만 조심하면 됩니다.

 

-수행자 : 그러면 그렇게 하다가 제 스스로가 보면 참 많이 가라앉아 있고 참 많이 평온해져 있다, 거기에서 제가 스님 말씀대로 대상을 다시 돌리는 그런 거를 못하고 , 계속 이렇게 가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데...

-빤냐와로 큰스님 : 그거는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게 대상이 변하지 않고 있는데 그러면 당연히 두려움이 생기지. 사띠는 있는데 대상이 안 변하는데, 지가 즐기고 있으면서도, 그러면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그건 잘못된 방법에서 이미 출발을 했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일어나든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든, 어떤 사람은 그냥 뛰쳐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러지 말고 처음부터 방법을 다르게 택하라는 거라.

주대상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걸 다시 빳짜웩카나 하라는 거라. 다시 되돌아보라는 거라. 끊어진 것들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분명하게 그걸 자꾸 인식할려고 해야 돼. 그렇게 해가지고 주대상으로 돌아가든지 그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이, 그다음에는 이 고요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또 있어요. 그것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지금은 그걸 모르는 거라.

고요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요? 마음이 요동을 안 치고 있는데도 변하는 게 보여야 되는데 안 보이잖아 지금. 그걸 못하는 거라. 그걸. 그래서 빨리 그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택하든지 해야지,

그리고 지금은 그 고요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몸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깨달음의 단계에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 두려움이 일어나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거는 잘못된 방법이기 때문에 아예 그런 걸 하면 안 된다는 거라. 됐어요?

-수행자 : 그럴 때마다 바로 대상으로 들어가라고 그랬잖아요?

-빤냐와로 큰스님 : 두 가지 중에 하나. 빳짜웩카나 하고 나서 주대상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바로 주대상으로 돌아가든지. 그럴 때만이 주대상이 변하는 것이 오롯하게 보입니다. 이미 마음은 고요한 상태로 돼있기 때문에. 빨리빨리 잡아라는 거라.

 

이거는 (떼짓사라)스님이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또 다른 사람?

 

 

Q. 수행자 질문 : 저는 복부의 움직임을 볼 때 부품’ ‘꺼짐이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보고 있는데, 부푼다고 할 때도 명칭은 부품, 부품하고 있는데, 딱딱한 움직임, 뻣뻣함, 방향도 다 다르게 느껴지고 그런 부분을 다 알고 하는데, 명칭은 다 똑같이 붙이는데 제가 느껴지는 건 다 달라서 명칭을 떼면 약간 산란해지고 대상이 잘 안 느껴지고 명칭을 붙이면 제가 느끼는 거하고 명칭이 달라서 요럴 땐 어떻게 해야 될지 질문을 드립니다.

A. 빤냐와로 큰스님 : 그 명칭을 바꿔야지. 명칭을 떼면 안 되는 상태니까 명칭은 붙여야 되겠고 명칭은 실재하는 거하고 괴리감이 생기면 실재하는 것과 맞는 명칭을 붙이라는 거라.

-수행자 : 그러면 속도가 제가 느끼는 거랑 명칭 붙이는 게 잘 안맞아서...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러면 안돼. 그러면 상기가 돼서 안돼.

-수행자 :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럴 때는 명칭을 붙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를 잠깐 보더라도 속도는 항상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진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명칭이 그 실재하는 일어나는 대상하고 안맞을 거 같으면 그 명칭을 떼고 실재하는 대상을 깊이 있게 자꾸 볼려고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뚜렷하게 볼려고. 그대신에 호흡은 자연스럽게 해야 되고.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 실재하는 대상에 딱 맞는 명칭을 개발해가지고 붙이라는 거라.

-수행자 : 그렇게 하다가 그런 경우엔 대상을 다른 데로 자꾸 마음이 옮겨붙게 되는 게 생겨서...

-빤냐와로 큰스님 : 그게 괴리가 생기니까 다른 데로 가는 거라. 명칭을 붙이는 이유가 주대상에 마음을 붙여놓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끔 지금은 해줘야 돼. 그렇지 않으면 자꾸 망상이든지 아니면 들리는 대상이든지 이런 데로 자꾸 마음이 휩쓸려버린다고. 그거는 좋은 방법은 아니라요.

 

 

Q. 수행자 질문 : 스님, 저런 경우에 명칭이 없이 그냥 있는 느낌으로 바라보게 될 때 느낌들이 강해지면서 배가 부품과 꺼짐은 없어지게 되거든요.

A. 빤냐와로 큰스님 : 당연히 느낌이 있으면 부품 꺼짐이 없지. 부품, 꺼짐그거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을 때는 느낌들이 없고, 느낌이 있을 때는 움직임이 없어.

-수행자 : 그거는...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럼. 그러면 그 느낌을 그냥 관찰하면 돼. 느낌에 맞는 명칭을 붙여주든지, 마음이 자꾸 산란하고 벗어날 거 같으면, 명칭 없이도 그냥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나갈 수 있을 거 같으면 그냥 그대로 관찰하면 돼요.

 

 

Q. 수행자 질문 : 스님, 아까 지나 법우님이 고요함이라고 그랬잖아요. 저는 처음에는 일어남 사라짐을 보다가 계속 사라지고 어느 순간에는 고요해지는 거는 있는데 그 고요해짐이 완전 고요함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일어남이 아주 미세해졌다는 그런 것이 있어서 그 안에서...

A. 빤냐와로 큰스님 : 떨림은 있어요? 그속에?

-수행자 : . 떨림이 계속 있는데 어느 순간에는 몸은 일어나지 않고 몸에 그전에 있던 모든 알갱이들이 각 몸 전체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조용해지는데 이 마음이 그때 아주 미세해서 이게 마음인가 아닌가 할 정도로 그러다가 그렇게 고요한, 완전 고요는 못 느꼈어요. 아무것도 없다 하는 이런 고요가 아니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생각하는 것조차 그냥 뭔가를 내가 봐야되겠다 이런 생각도 없어지는...

-빤냐와로 큰스님 : 잘 따라오는 거라 지금은. 진행상황이 진행방향이 바르게 가고 있어요. 그대신에 지금 몸에서 마음으로 옮겨갔잖아. 마음으로 옮겨간 상태에서 마음조차도 몸 같이 떨림이 있으면 안 돼.

-수행자 : . 그 떨림이 있다가 어느 순간에는 두 개다 아주 고요해서 뭔가 생각해봐야 되나 이런 의문이...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요.

-수행자 : . 그럴 때 그런 마음의 상태가 일분 일분 지나가다가 또 생각이 올라오면 생각이 올라오는 게 보여요. 얼른 끊어지고 또 어떨 때는 이미지인데 이미지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마치 그 이미지와 말이 합한 거 같은데 아주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그렇게 별똥 떨어지듯이 휙 휙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 내가 이렇게 고요한 상태인데 또 이렇게 생각이 올라오나?’

-빤냐와로 큰스님 : 마음은 끊임없이 생멸합니다.

 

-수행자 : 알겠습니다. 제가 그후에 스님 법문을 한번 봤더니, 또 조금 아까 법문에서 얘기하신 찬다(chanda) 있잖아요. 어떤 서원을 세워서 내가 도와 과를 봐야 되겠다, 닙바나라는 것을이런 생각도 한순간 해봤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그 찬다라는 것이 그런 바램이 아니라 그런 관계에서 어떤 균형을 잃고 마음을 잃지 않고 그 현상을 그대로 봐야되는 거구나 이런 거를 느끼는데,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스톱되고 생각하기 싫고 뭔가를 만들기도 싫고 이런 순간이 오다가 그 순간이 오래 계속되지는 않고 다시 생각이나 상이 다시 올라오면서 다시 제자리에 가서 다시 호흡을 관찰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호흡이 그러고나서 느낀 점이 그런 현상적인 거고, 제가 아까 말씀드린 그런 거를 겪고 난 다음에는 시시비비 따지고 이런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아요.

-빤냐와로 큰스님 : 시간이 길지는 않죠, 그게?

-수행자 : 길지는 않아요.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러면 됐어요. 그러고 나면 다시 또 몸과 마음으로 돌아가는 거는 맞아요. 다시 밑에서 다시 올라가야 되요. 그건 잘했어요.

잘했는데, 그대신에 그게 속도가 빨라질 거라, 진행속도가, 거기까지 올라가는 게.

그런 게 계속 반복되야 되는 거니까, 지금은 틀린 건 전혀 없어요.

몸의 현상이 끝나고 나야 마음의 현상이 일어나는 거고, 마음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들이 빠르게 변해야만이 이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라. 그런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다시 흩어지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버려야 되는 거라.

그 과정을 그냥 반복을 하면 되는 거라.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사이에 몸의 현상에는 틀림없이 아까 같은 삐띠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질 거고, 고요함도 일어나질 거고, 그거는 몸의 현상이지 그거는 그냥 냅둬버리고 그다음엔 마음의 현상을 보면 되는 거라.

-수행자 : 예전에는 제가 그게 좀 기쁘고 그래서 , 내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구나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빤냐와로 큰스님 : 그냥 지나쳐요. 지나치고.

-수행자 : 지나치게 되더라구요.

-빤냐와로 큰스님 : 그렇게 하면 되요.

 

 

Q.수행자 질문 : 경행을 할 때 처음에는 발의 느낌, 아니 발로 떨어지는 느낌들을 계속 변화하는 것을 계속 보는 경우도 있구요, 그리고 또 한번은 다른 경우는 의도를 볼려고 하면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생기고 그 나아가고자 하는 몸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이런 식으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의도를 보려고 할 때는 발의 느낌은 보이지 않고 그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움직이는 몸만 보이고...

A. 빤냐와로 큰스님 : 서 있을 때는 의도가 보일 수 있는데 그건 억지로 본 거고, 의도는 보여질 때가 되면 보여집니다.

-수행자 : , 그러면 그거는 그냥 마음, 생각입니까?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럼. 그냥 나둬. 나중에는 멈추는 게 보이고 나야 의도가 보이기 때문에, 아직 뭔가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게, 캐치가 되기 전까지는 의도를 볼려고 하지 마요.

 

 

Q. 수행자 질문 : 스님, 앞에 두 분하고 똑같은 맥락인데요, 그 연장선상에서 되돌아보면 고요함과 평안함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띠는 아주 강한 사띠, 사띠가 분명한데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에서 고요함과 평안함이 있습니다. 내가 좌선하면서 , 내가 알아차림이 있다그리고 내 몸과 마음 밖에 다 알아차림이 됩니다. 아주 분명한 알아차림, ‘, 나는 지금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어, 사띠하고 있어알면서 고요함과 평안함이 있습니다. 이게 계속 갑니다.

이렇게 계속 갑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이거를 알아차림만 계속 유지하면서 있어야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의도를 내서 조사를 한다든지 이걸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걸 계속 유지시켜야 됩니까?

A. 빤냐와로 큰스님 : 아니요. 그냥 그정도로 유지를 하는데, 하나만 여쭤볼게요. 만약에 그렇게 고요하고 평온함이 있는 상태에서 만약에 누군가 옆에 와가지고 귀에다 하고 고함을 질렀다, 안 놀랄 자신 있어요?

-수행자 : . 있습니다. 누가 밖에 있는 것이 다 알아차려집니다. 안에서도 알아차려지고...

-빤냐와로 큰스님 : 밖에 있는 것이 알아차려진다고?

-수행자 : .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러면 안 되요.

 

-수행자 : 밖에서, 예를 들어서 지금 수행하고 있다면 현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수행하고 있으면 고요함과 평안함이 너무 좋습니다. 너무 좋고,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는 생각들은 다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제가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갑니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서도 밖에 있는 새소리나 있다는 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러니까, 그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잘못돼 있다는 거라. 그거는 지금 고요하고 평화로움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아니고 그걸 즐기고 있는 거라. 그거는 수행 아니라. 그거는 그리 수행하면 안돼.

빨리 그러면 고요하고 평온함에서 호흡으로 돌아오든지 해버려야지 그걸 즐기고 있으면 안돼. 밖에서 누가 소리를 치든지 아니면 쉽게 말하면 간지럼을 하더라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사띠가 있는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있는 상태에서 끊어짐이 없으면 그걸 몰라야 되는 거라. 그런데 지금은 알고 있잖아. 그러면 그거는 즐기고 있는거라.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거는 수행 큰일 나. 그러면.

-수행자 :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인지를 하고 있으면...

-빤냐와로 큰스님 : 전혀 몰라야 돼.

-수행자 : 시간이 흐른다는 걸...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수행대상 사띠가 있을 경우에는 그런 것들이 없어야 돼. 내 몸과 마음 밖에 것들은 아예 없어. 그런데 지금은 알잖아. 그러면 즐기는 거라. 사띠가 있으면서 즐기는 것은 무서운 거라. 그럼 빨리 그 사띠를 주대상으로, 변하는 대상으로 돌아와야 돼.

-수행자 : 그럼 하면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몰라야 된다는 거죠?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럼요. 얼마가 흘렀는지도 몰라야 되는 거고, 단지 습관적으로 이 정도 되면 일어나지고 하는 거는 습관지어진 것이지 그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Q. 수행자 질문 : 스님, 예를 들어서 그런 정도의 집중삼매라는 것이 본삼매일 때는 정말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소리 이런 것들을 인지를 못하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우리가 경전에 마음은 초선정 같은 경우에는 뭔가 니밋따 같은 그런 것들을 느끼고 물론 그게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A. 빤냐와로 큰스님 : 초선정에는 니밋따가 없습니다.

-수행자 : , 그런가요?

-빤냐와로 큰스님 : 그거 지나고 나야 있습니다.

-수행자 : 그런데 니밋따라고 말해지는 현상들을 느끼기는 하거든요, 그게 오래 지속이 안 되어서 그렇지. 그러면 그럴 때는 그거는 흔히 말하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니밋따를 보는 건가요?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럼요. 니밋따가 대상이 될 거 같으면 그리 하는데, 그 니밋따를 대상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냥 대상이 있는걸 알고 빨리 돌아와야 돼. 안 그러면 그 대상 그런 니밋따의 대상을 즐기게 돼.

-수행자 : 그러면 뭔가 소리가 바깥 소리가 들리고 있으면서 하는 거는 이런 게 초선정 상태에서는 그런 걸...

-빤냐와로 큰스님 : 없어요. 그런 건.

-수행자 : , 초선정 상태에서는 그게 없어야 되는 겁니까?

-빤냐와로 큰스님 : 그전에 이미 니밋따 상태에 이를 때는 그 밖의 경계들이 어렴풋하게 보이고 들리고 하거든요. 그러면서 지금 본인이 일어난 니밋따 주대상에다가 마음이 가있는 상태가 돼요. 그럴 때는 이걸 즐기게 되는 거라.

그러면 이걸 빨리 놔버려야 되는 것이지, 이게 오롯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이것은 놔버려야 돼. 그게 정답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도 마찬가지고 위빳사나 수행을 해도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그와 꼭 마찬가지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즐기고 있는 상태라. 이걸 놔야 된다는 거라. 놔야 수행이 되지 그거 있는 상태에서는 안 됩니다.

 

 

Q. 수행자 질문 : 스님, 돌아온다는 것은 어떻게 돌아온다는 겁니까?

A.빤냐와로 큰스님 : 주대상으로 돌아와버리면 돼. 사띠를 사띠의 대상이 고요함과 즐거움이 아니고 그냥 호흡이 돼버리면 되는 거라. 안 그러면 일어나서 경행을 하든지. 그렇게 돼야 되는 거지.

 

Q. 수행자 질문 : 그걸 현상으로만 보고 다시 돌아와야 된다는...

A. 빤냐와로 큰스님 : 그럼요. 어떠한 경우든지 삐띠가 일어나든 아니면 여러 가지 빛이 일어나든 뭐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지 간에 , 일어났네하고 그냥 돌아와버려야 돼. 그게 빨리 돌아오면 돌아올수록 수행은 진보가 돼. 그거 즐기면 그거는 시간 낭비라.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것이 살포시 그냥 일어났다가 바로 통과돼버려요. 수행을 하다보면. 짠디님이 지금 그런 상태를 겪었거든. 그래서 그거는 하지마! 하지마. 그게 정답이라. 됐어요?

-수행자 : 그래도 ...

-빤냐와로 큰스님 : 그걸 자꾸 즐기고 있고 거기 자꾸 머물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뭐하러 그걸 할라고 그래? 그것으로 인해서 욕심이 없어졌어? 아니면 해탈에 조금이라도 다가갔어? 왜 그걸 할려고 하고 있어? 자꾸.

-수행자 : 좋아서요.

-빤냐와로 큰스님 : 좋은 건 집에 가서 좋은 것들 많잖아. 그거 해, 차라리 그럴 바에는.

수행은 수행을 해야 됩니다.

수행은 수행이 되도록 해야 되지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만 따라해가지고는 안됩니다. 수행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떠나야만이 수행이 되지, 알겠어요?

-수행자 일동 : !

 

 

Q. 수행자 질문 : 경전에 부처님께서 어떤 사람이 톱으로 내 팔을 싹둑싹둑 자른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궁금한 것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다가 어느 정도 단계가 돼야 정말 누가 내 팔을 잘라도 그사람한테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그런 단계인지...

A. 빤냐와로 큰스님 : 불환과!

됐어요? 그전에는 화가 일어나집니다.

-수행자 : 제가 생각했을 때는 화라는 게요 외부대상에 대한 원하는 마음 즉 저기에 나의 팔을 자르는 사람이 있다라는 생각해서 나는 성냄, 그때 일어나는 육체적인 감각·괴로움·느낌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일어나는 성냄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고 해서 외부 대상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생각하고 화를 내는 거는...

-빤냐와로 큰스님 : 그게 아니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어쨌든 다 성냄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걸 다 성냄의 영역으로 봐야 되는 것이지 화를 밖으로 표출되는 것만 성냄이라 해서는, 그거는 불환과가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수행자들도 성 안냅니다. 그래서 그런 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들로부터 완전히 떠날려고 할 것 같으면 불환과에 이르지 않으면 힘들어요.

 

-수행자 : 저의 질문을 다시 바꿔보면요 저는 빠빤짜 상카(papañca-saṅkhā)에 대한 질문인 거고, 빠빤짜 상카에 대해서 좋고 싫음이 언제 떨어져 나가는지 그게 알고 싶습니다.

느낌에 대해서 다 성냄인 거는 맞지만 빠빤짜 상카 같은 것이 일어났을 때 그 대상에 질질 끌려다닌다고 화나지 않습니까? 그거는 어느 정도가 돼야지 그 번뇌가 좀 떨어져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빤냐와로 큰스님 : 대상에 대해서 끌려다니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기 전에는 다 끌려다닙니다.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를 것 같으면 별로 대상에 대해서 끌려다니지는 않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성냄이 없는 것은 아니고 밖으로 표출이 안되는 것뿐인 거지 싫어하는 마음은 일어나지는 거고. 그렇게 보면 됩니다.

 

 

Q. 수행자 질문 : 아까 평온함이랑 수행하다가 생각이 일어나는 대상이 줄어서 평온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그때도 그러면 평온함이 좋아’ ‘좋아그렇게 명칭을 붙여도 되는 걸까요? ‘좋아함’ ‘좋아함’ ‘좋음’ ‘좋음

A. 빤냐와로 큰스님 : 수행 하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라고. 좋아하면서 좋아함’ ‘좋아함하면 뭐할 건데?

-수행자 : 원래 대상으로 돌아오기 전에 명칭을 붙이고 돌아와야 되는지, 아니면...

-빤냐와로 큰스님 : 시간 낭비니까 지금은 그냥 바로 돌아가.

 

 

--- 빤냐와로 큰스님 : ? (떼짓사라)스님한테 여쭤보고 싶은 사람?

앞으로는 우리 떼짓사라 스님도 수행 지도를 좀 하고 이래야 되는데, 아직은 핵심을 잘 못집는 것들이 있어요. 그거는 스님이 점차 고쳐질 겁니다. 고쳐지고, 그리고 또 스님도 수행을 빨리 해가지고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어야 되는 거고, 서로 노력해야 되는 거니까 그 부분들은 여러분들이 이해를 좀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시간되면 스님한테 가서 수행도 좀 하고 지도도 받고 이렇게, 알겠죠?

-수행자 일동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