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7청정에 이르는 길 4(도의청정) - (사)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담마마-마까 2023. 12. 12. 13:30

https://youtu.be/F6EMf3KaiQ8?feature=shared

 

* 7청정에 이르는 길 4(도의청정) - 의심을 극복하는 단계의 청정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적어도 오늘 설명한 원인·결과까지는 알아야만이 잘 죽을 수가 있거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의식이 뭔지는, 무엇이 들숨에서 숨이 탁 끊어지는지, 날숨에서 숨이 끊어지는지 그 원인을 탁 알고 호흡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결과를 보면서 탁 숨이 의식이 끊어졌을 때, 그래서 원인·결과를 보게 되면 그다음은 당연히 그것으로 인해서 그 결과가 원인이 돼서 또 다른 결과들이, 다른 생이나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하는 것도 여러분들에게는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까 그 스님 예를 들어서 죄송하지만 돌아가신 스님한테 누가 안 됐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됐던 이유는 뭐냐 하면 그거는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서 어느 정도 습이 배어야만이 원인·결과를 이해를 하고 그것들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해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데 죽기 직전에 다음생에 천국에 보내줄게 할 것 같으면 탁 개종해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것도 오늘 얘기하는 의심의 일종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한번 여쭤봅시다.

호흡 관찰할 때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이 구분이 가능했어요?

한 사람? 손들어봐요.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럼 오늘 설명은 맹탕 아무 소용이 없는 거네?

이 단계들은 공부를 안 해오면 설명을 이해를 못합니다.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아, 어떡할까? 그냥 집에 갈까?

 

여기 도의청정이라고 돼있습니다. 도의청정(度疑淸淨).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수다원에서는 의심이 끊어지죠?

그 의심하고 이 의심하고 같은 의심일까?

도의(度疑)니까 '의심을 극복한다'는 뜻이지, 의심을 완전히 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의심을 완전히 끊어버렸을 거 같으면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의심을 안 한다 할 것 같으면 이미 그사람은 수다원에 이르른 상태이고, 수다원은 여기서 적어도 한두 단계 더 나아가야 만이 수다원에 이를 수가 있는 거고,

여기서 말하는 도의청정은 '작은 수다원'이라고 해서 '소예류과에 이르르게 된다'는 얘기는 합니다. 그거는 경전에는 없고, 아비담마에는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렇게는 돼있는데 그거는 큰 의미는 없습니다. 큰 의미는 없는 거고,

 

단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나 부처님 법에 대한 확신들은 들어서 계속적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되게끔은 되고, 단지 원인·결과를 알아차리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적어도 나쁜 행위들은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나쁜 행위로 인해서 나쁜 결과를 받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발등 찍는 일은 안 하거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보면 ‘잘살고 있네’ 하는 정도 그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만약에 이 사람이 이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지옥에 안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아직 멀었다는 거죠.

 

그래서 의심을 극복하는 단계의 청정을 도의청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간단하게 한번 설명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떤 의심들이 있을까?

부처님이 얘기한 법이 진리라고 확신합니까? 뭐로 가지고 확신해요?

(수행자 대답 : ---)

의심이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 그거는 내가 얘기할 부분은 아닌 것 같고,

부처님 말씀에 대해서 의심이 든다는 것은, 이렇게 바꾸어서 얘기해봅시다.

'지구는 둥글다' 의심하는 사람 있어요? 그건 왜 그래요? 그거는 확인이 된 거죠.

그런데 '부처님 말씀이 진리다' 하는 것들은 스스로 확인이 안 되면 어떠한 경우든지, ‘왜 저사람들은 저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도 벌도 안 받고 잘 빠져나가고 그러고 이럴까?’ 이렇게 의심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도의청정에 이르르면 그런 상태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이미 경험을 통했고 그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린 부분이 없다는 것을 갖다가 내가 이미 확신이 든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 이르지는 않게끔 됩니다.

 

또 하나 더, 다음생은 있습니까? 윤회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거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러면 과거생이 있느냐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가 그걸 보면, 전생을 보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믿을 거 아니라.

이 상태에 이르르면 그걸 볼 수가 있습니다. 굉장한 거죠!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 상태에서는 다는 보지 못하는데 마지막 의식이 끊어지는 상태가 뭔지는 분명하게 압니다. 그 전생에. 그게 차차 거슬러 올라가면서 처음 의식이 생기면서 이생이 시작됐을 단계의 결과가 원인이 뭔지를 되짚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과거가 있는가, 미래가 있는가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지는 상태까지 이르른다 하는 그런 뜻이 됩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그런 분들은 보면 여러분들이 잘하고 있는 제사의식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 그럴까? 영혼이라는 것은 상주불멸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의미가 없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누가 우리 아들 딸 잘되게 해주는 절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대표적으로 갓바위 같은데 가서 막 기도하고 그러는데 그것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아니까 차라리 그것보다 아들 딸한테 열심히 더 잘해주는 것들로 택하게 됩니다.

그런 생활로 바뀌어나가게는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심이라는 것은 보통 세 가지, 원인·결과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경전에는 설해져 있습니다.

 

첫 번째가 조건에 인해서 발생하는 것

여러분들 잘 아는 12연기 잘 알죠! 무명으로 인해서 뭐가 생기고, 뭐가 생기고 이렇게 쭉 하는 것,

그거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그러면 하나 여쭤봅시다.

아라한들은 원인·결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원인을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수행자 대답 : ---)

왜? (수행자 대답 : 오취온이 ---)

오취온? 그래요. 그렇게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원인이 없으면 어떻게 아라한이라는 결과가 일어났을까?

그거 원인이 있어야 되잖아.

(수행자 대답 : ---)

그럼 원인 결과는 있다는 얘기네?

그럼 아라한도 원인·결과를 받으면 죽음 이후에는 그 결과가 원인이 되어서 또 다른 생을 받을 수도 있겠네 그러면?

(수행자 대답 : ---)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회장님이 이 정도의 논리밖에 안되는데, 여러분들은 12연기의 논리가 과연 어떨까?

 

원인·결과를 설명한 게 12연기인데, 아라한은 원인·결과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과가 익을 때가 다 되면 저절로 툭 떨어집니다. 그 떨어진 게 아라한이라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뿐인 것이지 어떤 원인, 직접적인 원인이 있어가지고 사과가 떨어진 결과가 되듯이 아라한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원인·결과하고는 무관하게 쉽게 말하면 계속 성취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성취 과정에서 결과물로서 아라한이라는 것이, 아라한 도와 과라는 결과가 일어나게끔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건데,

쉽게 말하면 그렇게 아라한이 되어서 여러분하고 똑같은 오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활을 해나갑니다.

단지 12연기를 거꾸로 돌려보면 집착하는 것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갈애하는 것이 없어져 버리게 되고, 갈애할 것이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태어날 것이 없어져버린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하면 집착하는 부분이 없으면 다음생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져버리게 되는 상태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원인·결과로서의 첫 번째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죠? 집착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죠! 그러면 어떠한 경우든지 다음생을 또 받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업에 의해서 발생하는 원인·결과인데

수바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까 우리 황회장님 얘기처럼

“저 놈은 나쁜 짓 진짜 많이 했는데 왜 저렇게 잘먹고 잘살까?” 하고 부처님한테 여쭈어봤어요.

부처님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수행자 대답 : ---)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업을 얘기한 것은 맞습니다.

(수행자 대답 : ---) 그게 정답에 가깝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대답한 것이 원인 결과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업으로서!

업은 누가 짓죠? 본인이 짓는 거고 본인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닙니다.

그 얘기를 쭉 4종류로서 얘기를 합니다.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친족이고 하면서 하는 얘기가, "짓는 자도 본인이고 받는 자도 본인이고, 업은 자기가 다음생에도 그것의 영향으로서 가게끔 되는 것이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업이라고 하는 것은 복잡하죠?

쉽게 말하면 원인을 짓는 것이 하나일 거 같으면 문제가 간단할 거라.

A라는 나쁜 짓을 했으면 B라는 나쁜 결과가 탁 나타나면 아주 간단한데 요놈이 그렇지가 않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소리가 들립니까?

소리들리면 어떤 원인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귀가 있어야 되고, 그리고 스님 목소리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또 뭐가 있어야 되죠? 그전에 이 소리가 진공상태로서 뭐든지 뭐든지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서 여러분한테 갈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될 거 아니라? 그리고 여러분이 그걸 들을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야 됩니다.

원인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입니다. 의도가 있고, 그리고나서 그걸 들을려고 하는 의식이 있어야 되고, 원인이 이렇게 여러 가지가 합쳐져야 되는데, 그중에 하나라도 탁 어긋나버리면 듣는 것은 생겨나지를 않는 상태가 됩니다. 결과가 안 나타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법을 설하지 않을려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너무 어렵다는 거라. 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하게 선행적으로 이렇게 되든지 그런 것이 아니고 다차원적이라는 거라. 다차원적으로 이렇게 작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설명해봐야 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해서 법을 설하지 않을려고 한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수바가 그렇게 질문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명예롭게 살아가고, 똑같은 일을 했는데 왜 그렇게 됩니까?”

다차원이 아니고 그냥 일차원적으로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될 수가 없는데, 아니라는 거라. 원인이 아주 다양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결과들이 또 다르게 나타난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해서 여러분 여기에 앉아있으니까 다리가 아파 통증이 일어났어요.

그럼 통증이라는 원인이 있으면 마음은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아, 이거 통증이 없었으면’ 하는 싫어하는 마음이 탁 일어나요. 그러면 그게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통증이 일어났는데 ‘통증은 당연히 일어나는 거지’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통증으로 인해서 오히려 평온한 마음이 탁 일어납니다.

결과가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평온한 마음이 일어나고, 결과도 이렇게 달라지게 된다는 거라.

원인도 많고 결과도 각각 달라지는데 그 통증이 없어진 건 아니잖아.

 

그러면 어쨌든 자기가 짓는 행위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이 아까 처음에 얘기했죠. 그거는 자기 거라고 했거든. 자기가 지은 거니까 자기가 받아야 되는 거라. 언제 나타날지는 모르는데 단지 그게 결과가 지금 나타날지 아니면 그다음에 나타날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그거는 자기가 받아야 된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그래서 그런 대답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이생에 여러분들이 예쁘다 아니면 명예가 높다 그것은 과거전생에서 한 건지, 아니면 이생에서 한 건지 여러분도 모르죠? 그마만큼 업이라는 것은 복잡한 부분이라는 거라.

그대신에 지금 현재 결과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분명히 나타나 있단 말이라. 아름답든지, 못생겼다든지, 명예가 있든지, 뭘 하든지 결과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이게 또 원인이 돼서 또 다른 결과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 결과는 과거생이든 아니면 현재생이든 뭔가 원인을 지었으니까 이 결과가 나타났을 거 아니라?

그럼 원인·결과는 분명한 건데 그걸 알 것 같으면 감히 함부로 내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 그런 원인을 짓는다? 그건 생각 할 수가 없는 거라.

이게 업의 법칙으로서의 원인·결과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세 번째가 여러분들한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찰나 생이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찰나생으로서 발생하는 원인·결과입니다.

오늘 설명할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수행 많이 했다고 그랬죠?

배가 불러와지죠. 불러와지는 것은 육체적인 현상이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거라.

그거는 구분이 가능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잡생각도 일어나고 망상들도 일어나고 통증들도 일어나고 하는데 빨리 그것을 떨쳐버리고, 어쨌든 계속 집중해서 관찰을 했다고 칩시다.

장애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그래서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육체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됐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죠?

 

육체적인 현상이 똑같습니까? 다르죠!

조금 전에 불러왔던 배하고 그뒤에 불러왔던 배하고는 또 다르는데,

지금 하나의 불러오는 현상도 육체적인 현상도 그냥 불러와지는 것이 아니고 볼록볼록볼록 불러와지기도 할 거고, 톡톡 튀듯이 불러와지기도 할 거고, 쉽게 말하면 끊임없이 변해가는 모습이 생길 거란 말이라.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로 그 변해가는 것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마음이 사띠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관찰할 때 불러오는데 ‘어, 볼록거리네’ ‘멈추네’ ‘요쪽이 약간 통증이 있네’ 이러면서 계속적으로 따라가게 된다는 거라.

 

그정도의 상태에 이르면 굉장히 빠르겠죠.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 보여지게 됩니다.

보여지면 어떻게 될까?

앞에 내가 알아차린 것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거 신경을 쓸까?

전혀 신경 쓸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거 따라가기 바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거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는 것만 해도 벅찰 정도가 되는데, 앞에 거 기억 할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정신적인 현상이 하나의 일어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계속적으로 그렇게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됐다고 칩시다. 그정도까지는 공부를 해왔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정도로 봤으면 그다음에 보이는 게 뭘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여기 온 사람들 누가 가라 해서 온 사람 있어요? 여러분이 원해서 왔죠? 여러분이 마음을 내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갈려는 마음이라고 하는 의도가 앞서야만이 여러분이 걸음을 옮길 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배가 하나 불러오는 것도, 배가 불러와지는 것들이 그냥 불러와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고자 하는 뭔가가 있든지 아니면 그것들을 관찰하는 마음에서 뭔가 그걸 관찰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그걸 관찰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시체와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지금 앉아있죠? 앉아있는 것은 앉아있을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꼿꼿하게 앉아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의도가 없으면 그냥 축 쳐져버립니다. 등을 댈 수밖에 없다는 거라. 항상 어떤 것이든 의도가 먼저 있어야만이 행위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끔 된다는 얘깁니다.

 

발을 예로 들어 봅시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이렇게 관찰하라고 그랬습니다.

발을 들려는 의도가 없으면 발을 들 수가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발을 들려는 의도가 원인이 돼서 발을 드는 결과가 생깁니다. 발이 들리는 결과로 인해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띠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 결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발이 들리는 것이 원인이 되는 거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결과로써 나타나게 되는 거라.

마찬가지로 나아갈 때도 나아갈려는 의도가 원인이 되고 발이 나아가는 결과가 되고, 발이 나아가는 육체적인 현상이 원인이 돼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결과로써 일어나고, 원인·결과 원인·결과일 뿐입니다. 숨을 쉬는 것도 마찬가지고 발을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행위에는 살아있을 경우에는 원인·결과입니다.

그 원인은 항상 의도가 앞서게끔 된다는 얘깁니다.

 

수행에서 이걸 발견을 해야 됩니다.

이걸 발견해야만이 이제는 의도를 짓는 것들을 나쁜 것들을 안하게끔 되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 ---)

그것보다도 사띠가 약하든지 아니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냥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습관지어진 대로 그냥 쭉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배가 불러왔으면 꺼지게 돼있는 거고, 들이쉬었으면 내쉬게끔 돼있습니다. 발을 올렸으면 내려놓게 돼있다는 거라. 그냥 그게 뭔 대수냐 해가지고 그걸 그냥 습관적으로 그냥 따라해버린다는 거라.

습관은 또 다른 업을 만들어내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습관짓는 것들을 의도를 알아차리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나쁜 마음들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을 때 적어도 의도가 먼저 일어나서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들이 이루어지는 것들이 보여야만이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선한 마음으로 죽는다는 거라.

그래야 다음생이 선한 마음으로 죽었으니까 그게 원인이 돼서 결과로써 받는 생이 좋은 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적어도 여기까지는 해야 될 거 아니라? 여기까지가 습관이 되고 쭉 수행을 해야만이 죽을 때 그래도 잘 죽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도의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그냥 생각해서 의심을 "난 부처님에 대해서 믿고, 삼보에 대해서 믿고, 업에 대해서도 믿고, 그 가르침 따르는 스님들도 믿고, 다 믿는다" 이렇게 해가지고 될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자기 자신이 직접 체험해가지고 여러분들 생활 자체가 바뀌어져 있어야만이 도의청정에 이르는 상태가 된다는 거라.

 

나쁜 짓 안 하고 살 자신 있어요?

조그만한 거짓말도 안 하고, 또는 조그만한 나쁜 짓도 안 하고 살 자신 있느냐는 거라.

도의청정에 이르러야 되는 거라.

그럼 적어도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는 있다는 거라.

“화 좀 안 내고 살았으면 좋겠다” 말로만 하지 말고 도의청정에 이르러라는 거라. 그러면 화가 일어날 때는 화가 일어날려고 하는 마음이 앞선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고나서 화내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을 결과로서 보인다는 거라.

 

그러면 의도에서 이미 차단을 시켜버리고 화를 안 일으키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여기에 이르렀을 때는 '쭐라소따빤나'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소예류과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소예류과에 이르렀다는 것은 적어도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고 거듭해서 계속적으로 확신이 들기 때문에 수행을 지속적으로 계속 해나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르게 됐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의심이 완전히 제거가 된 상태라든지 이런 상태에 이르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수행을 해나가면서 적어도 거기까지는 이르를 수 있도록 해야됩니다.

 

한번 그렇게 해보십시요. 옛날에 스리랑카에 그런 일이 있다고 붓다왕사라고 하는 책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의도가 일어나는 걸 보고 나는 걷겠다.” 하고 했는데 못 보더라는 거라. 저 스님이 분명히 걷겠다고 했는데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거라. 그마만큼 의도가 일어나는 것을 즉시 알아차린다는 것은 힘든다는 뜻입니다.

지속적으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와가지고 적어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 어디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이 그냥 일어나는 대로 그게 물질적인 현상이면 물질적인 현상으로서 알아차리고, 정신적인 현상이면 정신적인 현상으로서 알아차리고, 그대로 놔버리고 지금 현재에 머물러 있어야만이 의도가 보여진다는 거라.

 

그래서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보이고, 멈추고 나서는 마음의 의도가 일어나야만이 뭔가 다른 현상들이 생기는 것을 갖다가 보게 됐을 때 의도가 보여지는 것이지, 그냥 아무것도 안한 상태에서 의도를 본다?

명칭으로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있으면 ‘가고자함’ 하고 의도내고 발을 탁 들고, ‘먹고자함’ 하고 나서 숟가락으로 들고 이렇게는 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진짜배기가 아니라는 거라.

의도는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보이고,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고 지금 현재 딱 그 찰나만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것들이 멈추는 것이 보일 때 그다음 다른 의도가 일어나는 것들이 보여진다는 거라.

 

안되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강제로라도 해야 됩니다. 강제로라도.

그래서 지금은 걸을 때 만약에 ‘발을 들고자함’ 하고 나서 발을 들도록 하고, ‘나아가고자함’ 하고 의도를 내고 나서 나아가고, ‘내리고자함’ 하고 의도를 내고 나서는 내리고, 그다음 디디고 싶다 할 것 같으면 ‘디디고자함’ 하고 의도를 내고나서 디디고, 이렇게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의도를 관찰하고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지금의 여러분들 일상생활로서는 어림도 없다는 거라.

아주 천천히!

 

그런데 의도를 관찰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는데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천천히 걷는다? 그럼 머리 아파집니다.

왜? 실제로 내가 그렇게 걷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든지, 일부러 호흡을 천천히 한다든지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상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도가 보이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 가장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서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 그것밖에 안 되는 걸 어떻게 할 거라?

그대신에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하다 보면 점점 걸음이 느려지게 되고, 걸으면서 의도가 보여지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은 적어도 여기까지는 이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뒤에는 딴 길로 안 샙니다. 딴 거 안 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이 수행만 지속적으로 해나가면 내가 도와 과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그냥 그길만 하게끔 됩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그대로 그냥 관찰이 되기 때문에.

알겠습니까?

공부를 좀 자꾸 시키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르러야 됩니다.

그래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고 또 다음을 바랄 수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 그리고 지금 생에서 적어도 잘 사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