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7청정에 이르는 길 6(행도지견청정) - (사)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담마마-마까 2023. 12. 16. 12:04

https://youtu.be/gtQZgYRbf6I?si=2ENRM7XA71y54IQ_

 

* 7청정에 이르는 길 6(행도지견청정)

 

반갑습니다. 오늘이 여섯 번째 시간이죠. 다음달이면 스님은 졸업을 합니다.

여러분도 졸업을 해야 되는데, 와서 조금 전에 5분 명상하던데 5분 명상하는 것으로 수행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죠? 집에서 다들 하고 있죠?

사실은 앞에 부분은 칠청정 중에서 지금 다섯 번까지는 언제든지 그냥 시중잡배 같이 떨어질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지닌 상태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오늘 하는 행도지견청정부터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본격적인 궤도에 들었다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와 과에 들은 첫 번째 수다원에 들어도 이 행도지견청정의 처음 부분부터 시작을 해야되고 그러고나서 쭉 밟아가겠죠. 그리고 열반을 체험해서 떨어질 번뇌들은 떨어지고 감춰질 번뇌들은 감춰지고 해서 거기에 도달을 하게 되고, 그러고나서 다시 또 다음 단계의 성인의 경지로 갈 때도 이 부분의 첫 번째 부분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끊임없이 빠르게 변하는 성질부터 다시 관찰을 해야만이 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도를 넘고 하나의 또 도와 과를 넘어가고, 그래서 마지막 아라한에 도달하고 나서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이 부분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스님이 울산 울주에 있죠. 여기 올려면 어떻게 오는지 알아요? 예. 승용차를 타고 오는데 몇번 국도를 지나서 또 다음의 거리가 있으면 무슨 국도를 지나고 국도가 또 다 다릅니다. 여러 국도를 지나가지고 그다음에 고속도로 올려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전까지 올 때는 여러 국도를 지나와야 되는데 고속도로에 탁 올리고 나면 여기 올 때까지는 한길밖에 없습니다. 그냥 이 길만 타면 됩니다.

 

행도지견청정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내가 고속도로에 내가 들어섰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그전까지는 수행을 할 때 처음에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기도 하고, 원인·결과를 살피기도 하고 이런 과정을 쭉 겪어왔는데 아마 모르긴해도 수행을 하다가 수행을 끝내고나서 일상생활을 도 하다가 다시 또 수행을 할려고 하면 대부분은 보면 다시 처음부터 들어가야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것부터 들어가진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르렀다 그러면 어디부터 시작을 할까?

어디부터 시작할 거 같애요? 어쨌든 수행을 해야 도와 과에 이르르고 그다음 도와 과에 이르를려면 또 수행을 해야 도와 과에 이르를 거 아니라?

행도지견청정에서 어디부터? (수행자 대답 : ---) 염각지?

염각지부터 할 거 같으면 수행할 맛이 나겠어?

빠르게 생멸하는 것이 보일 때부터 시작을 합니다. 시작하자마자 이 단계부터 들어가진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 ---) 그렇죠. 생멸지.

그래서 행도지견청정의 처음은 이 생멸지부터 시작이 되고, 도와 과에 이르러서도 수행을 할 때 처음 스타트 부분이 이 생멸지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프린트물에도 나와있지만 행도지견청정은 무슨 무슨지, 무슨지, 참 많죠? 보통 아홉 개, 열 개, 열한 개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거 다 통과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알고 보면, 경전상으로는 이렇게 많이 구분이 돼있는데, 실제로는 묶음들로서 보여집니다.

어떤 것은 내가 수다원에서는 만약에 괴멸지가 보였다, 그러면 아나함에서는 괴멸지가 아니고 또 다른 작용을 하는 것이 보이고, 괴멸지는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지나가버리게 되고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생멸지는 어쨌든 무상한 성품들을 보면서 시작을 하게 되는데, 마지막 도와 과에 들어가는 입구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한 성품을 관찰하게 됩니다. 고를 관찰해지는 것이 아니고 무아를 관찰해지는 것이 아니고, 무상한 성품을 보면서 고(苦)인줄을 알고 무상한 성품을 보면서 무아인 줄을 알게끔 됩니다.

 

그대신에 도와 과에 들어서는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지금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떨어진 번뇌가 뭔지 하는 것이 대상이 되고, 그다음에 열반이라고 하는 것 쉽게 말하면 공(空)이라고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그 상태가 수행대상이 되기는 합니다.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러서는 수행대상이 바뀌지만 그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하는 성품들이 수행대상이다 하는 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여기 올 때는 거리는 고속도로가 훨씬 긴데 속도는 훨씬 빠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고속도로 전에 진입하는 길이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 여기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 반 이상을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마만큼 고속도로에 이르기 전에는 여러분들 수행해야 되는 것은 본궤도에 이르기 전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포기만 안하면 그냥 고속도로에는 결국은 진입을 합니다.

 

인제 수행을 해왔다고 치고 물어보겠습니다.

생멸하는 것들이 보여야 된다고 그랬죠? 본격적으로 궤도에 들어서면.

생멸하는 것이 어떻게 보일까?

예를 들어봅시다. 물질적인 현상이 생멸하는 것이 먼저 보인다고 했죠? 그리고나서 정신적인 현상이 생멸하는 것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현상이 호흡을 하면 들이쉬고 내쉬고 합니다. 그것도 생멸이죠? 들이쉬는 것도 생이고, 내쉬는 것도 멸이고, 그것도 생멸은 생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그 생멸은 분명하게 볼 수 있죠? 들이쉬는 것은 들이쉰다고 알아차릴 거고 내쉴 때는 내쉰다고 알아차릴 겁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빠른 속도로 생과 멸이 진행이 돼야 그것으로 인해서 힘들고 아, 도저히 수행 못하겠다 포기하겠다는 생각이 들까? 어느 정도 빠를 것 같애요?

낸시님은 알아요? (수행자 대답) 음, 그래요.

얼만큼 빠르던가요? (수행자 대답)

그러면 그것은 물질적인 현상의 생멸이고, (수행자 대답)

정신적으로? 물질적인 것은 안 일어나고? (수행자 대답) 그래요.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습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런데 어쨌든 일반적인 패턴은 물질적인 현상에 대해서 너무 빠르기 때문에 몸이 안정이 안됩니다. 몸이 안정이 안 되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서 그걸 안 할려고 춤을 추기도 하고 온갖 짓거리들을 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게 그치는 것이 보이는 것은 언제냐면 뭐냐면 정신적인 현상이 보여야 그게 그쳐집니다.

물질적인 현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 여러분들 늙고 병들고 죽는 거 여러분들 마음대로 안 되죠? 마찬가집니다. 물질적인 현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통제가 안 돼. 그러면 그냥 놔두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냥 포기해버리고 나면 그때 정신적으로 생멸하는 것들이 보이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정신적으로 생멸하는 것은 그거보다도 더 빠르네. 이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의 생멸을 경험을 해야만이 인제는 본격적으로 수행에 들어갔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올 거라?

나는 사띠를 안 하고 싶은데 계속 사띠가 되는데 어떡할 거라?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어떻게 빠져나와요?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걸 안 하고 그냥 일반적으로 이때까지 살아왔듯이 그냥 편안하게 좀 살았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마음이 편안해졌으면 좋겠는데 그게 지금은 안돼. 그걸 관찰 안 할라하더라도 저절로 그냥 되어져.

그럼 몸에서도 반응을 하고 마음에서도 반응을 하고 그렇게 되는 현상이 되는데, 그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어떻게 해야 멈출 거 같애요?

그렇게 변하는 것은 뭐가 변하는 거죠? 내 몸과 마음이 변하는 거죠!

내가 어쩌지 못하고 지가 지 스스로 변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면 되는데 대부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거기서 오는 작용들이 뭐냐하면 그것으로부터 싫어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무서움들이 생기고 이런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물에 탁 빠졌다, 바다에 배타고 왔는데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졌어요. 그러면 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무조건 헤엄쳐가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 혼자서 그 넓은 바다를 혼자서 헤엄쳐가는 것은 사실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부분은 뗏목을 잡든지 뭘 잡든지 몸이 뜰 수 있는 것들을 의지해가지고 천천히 이동해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물에 빠졌는데 조금 헤엄치다 뭐가 잡히기에 잡고 헤엄을 쳤어요. 동동 뜨는 거니까. 그런데 분명히 그 뜨는 것을 잡아가지고 내가 살기는 살았는데 그 뜨는 게 만약에 썩어가지고 구더기가 나오는 뭐 만약에 돼지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거 버려버려야 돼? ‘아우 싫어’하면서? 버리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거에요? 그냥 그거 붙잡고 가야 돼요. 어쨌든지. 싫기는 싫지만 그냥 그거 안고 가야된다는 거라.

수행을 하다가 두려움이 일어나고 싫어지는 마음이 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걸 가지고 다시 또 수행을 하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바다를 어쨌든 건너가지고 왔어요. 그러고 나면 그 싫어하고 두렵고 벗어나고 싶은 그 썩은 돼지는 어떻게 해야 돼요?

다시는 안 쳐다보겠죠? 다시는 안 쳐다보고 그걸 누가 어떻게 하든지 그건 관심 밖이 돼버립니다. 그럼 나는 내 갈 길을 그냥 걸어가버리면 됩니다.

 

지금 얘기한 단계가 행도지견청정이라고 하는 단계입니다.

고속도로에 차가 들어서고 나면 자기가 빠져나갈 곳이든지 아니면 자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냥 가는 수밖엔 없습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멈출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바다에 빠졌을 때도 내가 싫은 것들이지만, 내가 여기로부터 윤회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한다고 해서 이 몸과 마음을 제외해놓고 나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싫어도 그냥 그거를 가지고 수행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탁 육지에 발을 디뎠으면 한숨이 훅 나겠죠.

그 싫은 것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되고 내가 살았으니까.

그게 뭘까?

내가 지나온 길을 갖다가 돌아보게 되는 거라. ‘아, 그래’ 그 싫던 것도 나에게는 고마운 존재가 되는 거고, 내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발버둥치는 노력들도 아, 내가 잘한 일이 되는 거고, 그래서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냥 감사한 마음이 딱 들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거기로부터 벗어나버리게 되면 여러분들 마음은 어떤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외부적인 자극이 오는 것이든, 아니면 몸에서 일어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그것에 관계없이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어제 누가 우리 선원에 한사람이 왔어요.

우리 선원 뒤쪽에 보면 보일러실이 있습니다. 보이러실이 요렇게 길어요. 여름에는 바람이 많이 통하고 해가지고 선원으로 바람이 들어가게 그쪽 문을 열어놓거든. 그런데 뱀이라는 놈이 거기가 서늘하니까 거기 쏙 들어와서 지내는 거라. 갈 때마다 가끔 보여요. 그래서 어제 온 사람한테 “인제는 뒤에 보이러실 문은 닫아야 된다” 그렇게 얘길하니까, “왜요 스님?” “뱀이 거기가 따뜻하니까 살려고 들어오기 때문에 해꼬지 당할 수 있으니까 문을 닫아야 된다” 하니까 뭐라고 반응하는지 알아요?

(수행자 대답)

그게 아니고, 잡을려고도 안 하고 문을 닫을려고 생각조차도 안 하는 거라. 겁이 나는 거라. 겁이 나니까 문 닫을려고 하다가 뱀이 탁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거라.

그런데 저기 촌에 살다가 보면 뱀은 흔하게 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우들이 있죠? 깜짝깜짝 놀래는 것, 누가 옆에서 그냥 “악” 소리만 질러도 깜짝 놀래는 것.

 

행사지가 되면 어떻게 될까? 괜찮을 거 같애요? 무덤덤해질 것 같애요?

그럼.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어떠한 것에도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유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응은 항상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거라. 거기에 따라서 나오는 마음은 고요할 수밖에 없는 거라.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 스님이 법문 할 때는 왜 ‘와아’ 이렇게 좀 안 하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사람들을 탁 끌어들일 수 있게끔 좀 이렇게 안 하고 그냥 얘기하듯이 그냥 이렇게 얘기합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안되는 걸 어떡하라고? 안 되는 걸.

선동적인 것들을 할려고 하면 내가 거기에 힘이 들어가버리게 되는 게 있는데 힘이 안 들어가는 걸 어떡하라는 얘기야?

또 그런 얘기를 합니다. 누가 뭐 다퉜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누가 이 견해 때문에 그러니까 사마타를 하고 나서 위빳사나를 해야 된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이, 너는 사마타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어. 위빳사나만 해야 돼. 싸우고 있는 거라.

“그럼 스님 어떤 게 맞습니까?”

“니한테는 요게 맞고, 니한테는 요게 맞다.” 얘기하거든.

그런데 두 사람한테는 답이 될 수가 없는 거라. 두 사람은 똑같이 나는 이게 맞다고 그러고, 나는 요게 맞다고 그러는데 니것도 맞도 니것도 맞다고 그러니까 말이 안돼잖아.

 

왜 그렇게 될까?

그사람이 무슨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은 그사람 몫이지 내몫이 아니라는 거라. 나는 어떤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럼 이사람이 얘기하면 이사람이 맞는 거고, 이사람이 틀리게 얘기하면 이사람이 틀리게 얘기하게 되는 거고, 그것밖에 없는 거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는 거라.

그게 마지막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라고 하는 행사지입니다.

여기에는 행도지견청정에는 아홉 가지, 열 가지, 열한 가지로 구분을 해놓았는데, 실제로는 보면 크게 세 무더기 정도 밖에는 안되는 거라.

 

쉽죠? 금방 그리 다가갈 수 있겠죠? 그런데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쉬울 거 같으면 누구든지 수행할 것 같으면 금방 뭐 도와 과에 다 이르렀지.

그래서 미얀마 같은 경우에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아라한이 출현할 수 없는 시대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럼 아라한이 출현할 수 없으면 어디까지 출현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상카루뻭카냐나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주 낮춰가지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왜 마지노선을 상카루뻭카냐나라고 했을까?

행도지견청정이 사실은 마지막은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뒤에 지견청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단계들은 또 두어 단계, 어떤 단계에서는 빠리깜마부터 해가지고 아눌로마까지 다 포함시켜 놔놓으면 4단계로 나누는 데도 있고 그렇습니다, 경전상에는.

그런데 그거는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찰나 간에 아니면 두세찰나 간에 끝나버리는 거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고나면 바로 도와 과에 진입을 하게 되기 때문에 최후 보루까지 잡고 있어야 되는 게 상카루뻭카냐나라는 거라.

 

또 하나의 이유가 뭐냐면, 다른 수행의 단계에서는 그단계까지 올라가더라도 금방 툭 떨어져버리면 그냥 아무 수행 안 하는 사람하고 똑같은 단계에 들어가버립니다.

여기 행도지견청정의 단계들도 있지만 그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자 질문 : ---)

예.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인데

상카라(saṅkhāra) 우뻭카(upekkhā)를 합쳐놓은 겁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죠. "몸과 마음이 오온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평온하게 되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다른 단계들 만약에 괴멸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괴멸지에서 수행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그러면은 그냥 수행 그만두어 버립니다.

그럼 어디부터 해야 되요? 다시 또 처음부터 해야 돼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것부터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상카루뻭카냐나는 조금 다릅니다.

다른 거는 떨어질 때는 금방 툭 떨어져버리는데, 상카루뻭카냐나에서는 금방 떨어지지를 않네. 떨어지기는 떨어집니다. 그런데 아주 서서히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년에 걸쳐서, 어떤 사람들은 몇달에 걸쳐서.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일단은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르게 되면 기본적으로 감추어지는 번뇌들은 틀림없이 생깁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성내고 욕심부리고 게으름부리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아직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감추어져서 밖으로 표출되지를 않아. 성도 안 내고 욕심도 안 부려. 물론 마음으로는 ‘저거 내거였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지만 그걸 밖으로 표출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르면 떨어지는 번뇌가 있고, 떨어지는 번뇌가 있는 반면에 감추어지는 번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밖으로 드러나지지 않으니까 다 떨어진 것처럼 보여집니다. 수다원에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불환과에도 다 떨어진 것처럼 보여집니다. 본인도 그렇게 알고 있고 밖에 있는 외부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냐나도 그와 진배없는 상태가 됩니다.

떨어진 것은 크게 없는데 전부 감추어져버리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아라한과 같은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라한도 밥을 먹고 똥을 싸듯이 그사람도 똥을 싸고 밥을 먹는데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러도, 그런데 차이가 뭘까?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도와 과에 이르른 사람들은 열반을 체험했는데, 상카루뻭카냐나는 아직 열반을 체험을 못했거든.

열반을 체험을 못했으면 뭐가 대상이라고 그랬어요? 몸과 마음이 대상이 됩니다. 몸과 마음이 수행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 질문 : ---)

나는 지금 이해를 잘 못했는데, 몸이 있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지 몸이 몸 지스스로를 알아차리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럼 몸에서 마음으로 전향하기 전에 이미 몸에서는 마음이 있게 돼있는 거라. 그대신에 관찰대상이 몸이라는 것뿐이지 그것은 마음이 관찰하게 되는 거고, 그러다가 마음을 관찰하게 될 때는 마음이 마음을 관찰하게 되고, 몸은 관찰 대상이 되지 않는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이게 이쪽으로 전향되고 안되고 하는 것은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게 됩니다.

마음이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만 쭉 이어지면 좋겠지만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떨어지면 다시 몸을 관찰하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을 체험을 하지 못하면 대상은 몸과 마음이 될 수밖엔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대상이면 어떻게 될까? 몸과 마음이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어요?

결국에는 여러분들 같이 또 여기에 있는 스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겁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변하는 성질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열반은 그렇지 않죠? 변하지 않는 건데, 단지 차이는 어떤 거라?

변하지 않는 거지만 내가 지금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이 몸과 마음이 아니고 열반이 되었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몸과 마음을 관찰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집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뭔가를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하게 떨어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열반이 대상이 됐을 때는 그 집착하는 것이 완전히 탁 떨어져야만이 열반이 대상이 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는 성인이 되기 전에 마지막 관문이 실제적으로는 상카루뻭카냐나인데, 상키루뻭카냐나는 어떠한 경우든지 떨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거라. 물론 천천히 떨어지지만.

그래서 그냥 뭐랄까 수행을 아주 안 했던 사람처럼 다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현상으로까지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죠. 도와 과에 이르르면 어디부터 시작한다구요?

생멸지부터 시작을 합니다. 앞에 것이 필요가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도와 과에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 죽음을 맞고 다시 윤회해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다음생에서 다시 수행을 시작하더라도 생멸지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생멸지부터 시작할 때는 이 지금 행도지견청정에서 말하는 아홉 개부터 열한 개의 단계를 금방 쭈욱 올라가집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두려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을 다시 되짚어보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고, 그 지혜가 각각 다를 뿐인 것이지 두드러지는 것들이 그거라는 것이지 괴멸지가 없이 포환지로 넘어가지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나는 관찰대상이 괴멸지가 아니고 포환지가 돼있다는 이번 타임에는 포환지가 돼있다는 거 그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 더 여쭤보겠습니다.

행도지견청정 다음에는 뭐죠? 지견청정이죠!

앞에 '행도'가 붙고 안 붙고 차이죠. 뭔 차이일까?

(수행자 대답 : ---) 그렇죠.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관찰할 때는 오온을 관찰하죠?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오온을 관찰하는데 실제로는 그 집착하고 있는 대상 오취온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배가 불러오고 꺼진다, 불러온다고 관찰하는데 온 마음을 여기다가 두 않으면 불러오는 거 알아차려요? 못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각각의 선원에서는 방법을 다르게들 합니다.

어떤 데는 마음을 갖다 붙이기 위해서 명칭을 써라 하고, 불러오면 ‘불러옴’하고 알아차려라 하고.

어떤 경우에는 불러올 때 ‘무슨 마음인가?’하고 그 마음을 보라고 합니다.

어쨌든 명칭하고 마찬가지로 마음을 거기다가 갖다 붙이라는 얘깁니다.

'행도'가 붙으면 자연스럽지는 못하더라도 억지로라도 그것들을 해나가는 단계들을 거칠 수밖에는 없다는 거라.

억지로 하니까 어떻게 돼요? 물론 힘들기는 힘드는데 전부 업이 돼버리는 거라. 여러분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뭐든지 간에 전부 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도를 보통 세 단계로 나눠놨습니다.

'물라 막가(mūla-magga)'라고 해가지고 그냥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되는 도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근본적인 도를 갖췄는지 한번 물어볼까요?

선한 일을 했다면 선한 결과가 있다는 거 믿습니까?

“나는 그런데 왜 요모양 요꼴이야” 이러고 있잖아. “나는 잘산다고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왜 이래?” 그리 안 할 자신 있어요?

쉽게 말하면 물라막가라고 하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해서 바르게 믿음을 가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선한 일을 했는데 선한 결과를 못 얻을까?

그게 아니고 선한 일을 할 때는 선한 마음을 내야 되는데, 선한 마음을 안 내고 엉뚱한 마음을 낸다는 거라.

 

여러분들 잘하는 거 있죠? 절에 가서 기도할 때 ‘우리 아들 잘되게 해주세요’ 그거는 욕심 아니야? 욕심부리면서 기도를 해가지고, 선한 보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가 과연 선한 것이 이루어질까?

그런데 지가 잘못했다고 생각은 안 하고 ‘나는 왜 보시 이렇게 했는데 우리 아들은 의대 떨어졌어?’ 이러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가져야 되는 것은 그런 거 없이 ‘아, 내가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다’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한 행위들을 하고 하면 악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백프로 철썩같이 믿게 되는 거라.

이걸 물라막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기본적으로 일단은 도와 과에 이르게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게 갖추어져야 되는 거라.

 

그게 갖추어지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여러분들이 뭔 일을 하고 할 때 노력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노력한 결실들을 더 많이 얻게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집중을 해야 됩니다. 그것만 해야 되지 요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그래서는 안되는 거라. 마찬가지로 그 대상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사띠들도 있어야 되는 거고.

그래서 노력과 집중과 사띠가 있게 되는 것 이게 보통 여러분들이 수행한다 하는 것들입니다. 그 세 가지가 작용을 하면서 지금까지 쭉 해왔던 진행과정들을 겪어나가게 돼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이 단계까지는 도의 세 단계에는 들지만 '예비단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라.(pubbabhaga-magga)

 

'근본적인 도의 단계'가 있고 '예비단계'가 있고, 그러고 나서 '도의 단계' 입니다.

그래서 '아리야 막가(ariya-magga)'라고 하는 진짜배기 도에 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적인 게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이루어진다는 거라.

 

그런데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기본적인 것들과 예비적인 단계의 도를 거칠려고 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의 관찰대상이 되는 오온은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업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말 조심해야 되고, 행동 조심해야 되고, 마음 쓰는 것도 조심해야 되는 것이지, 나쁜 결과들은 쉽게 드러나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게 마음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한 일들은 잘 안 드러나집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도 마찬가집니다. 당장 결과가 드러나기를 바라게 되기 때문에 선한 결과가 안 드러나지는 거라.

 

여기 불이 있죠. 요쪽 요쪽 요쪽 요쪽, 오늘 요 선한 일을 했고, 내일 저거 했고, 모레 저거 했고, 4개를 했다, 이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기가 밝아만 있으면 되지, 요게(전등) 보이질 않는 거라. 이게 언젠가는 다른 불이 꺼졌을 때 이게 확 드러나지는 건데 그걸 자꾸 없는 것으로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취온을 가지고 싫으나 좋으나 죽어서 구더기 나오는 돼지를 안고 건너가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씩은 실수를 하기도 하고 악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빨리 돌아오는 것이 가장 좋은 겁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 죽은 구더기 나는 돼지를 버려버리는 상태가 되면 이제는 업을 짓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게 바로 행도지견청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제는 여러분들이 ‘내가 앞당겨서 내가 가는 길’에 해서 의심하는 것은 없어졌습니다. 해보니까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거든. 그러면 이길 그냥 가야됩니다.

경전 열심히 공부한다 해가지고 그것가지고 내 성질이 고쳐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겁니다.

아무리 돈을 열심히 번다 해가지고 그것으로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거라. 그러면 그거는 내가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거라.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 되는 거고, 거기에 대한 집착은 버려버려야 되는 것인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그냥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는 거라.

 

그런데 그 관찰할 대상은 집착하는 대상이라.

죽고 싶은 놈 없고, 이맘이 항상 다음생에도 상주불멸하길 바라게 돼있고,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라.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그게 오취온이라고 하는 거라.

그런데 그걸 가지고 대상을 가지고 공부하는 수밖엔 없다는 거라.

그러다가 이제는 ‘아, 나에게서 다시는...’, 아니 그거는 아직 멀었고, '태어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까지는 아직 멀었고,

‘아, 이런 것은 더 이상 안 일어나는구나’ 하는 걸 본인이 알게 되는 때가 있을 겁니다. 그게 언젤까?

 

예를 들어봅시다. 남이 뭔가를 얘기하면 계속 부정적으로 마음이 자꾸 일어나지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습관들이 있었다, 그건 언제 끊어질까?

이제는 나에게는 누가 얘기할 거 같으면 그냥 있는 그대로 들리면서 그사람을 위해서 진짜 그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말이 튀어나오는 때가 언제가 될까?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이미 떨어진 상태가 됩니다. 좋고 싫어하는 마음이 딱 떨어져버렸을 때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르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에 대해서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안 일어난다는 거라. 그렇다고 떨어진 것은 아닌데 그게 밖으로 안 일어난다는 거라. 없는 거와 진배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미얀마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듯이 행사지까지는 이르러야 됩니다. 행사지에 이르고 나서 미얀마 스님이 얘기하듯이 과연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라한은 없다” 하는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한번 보십시요.

일부 미얀마 스님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말도 일리가 있는 게 하도 여러분들이 원하는 게 많아서 그래요.

 

뭐가 원하는 게 많아서 행사지에서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질까?

(수행자 대답 : ---) 그렇지. 그런 마음들이 생기면 안 되는 거라.

지금 해야 되는 것은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띠하는 것밖에는 없는데, 수행이 잘되면 ‘어, 내가 열반에 이르르겠는데’ 하는 확신이 딱 듭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에 뭐라 하냐면 ‘내가 아라한이 되고싶다’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여러분들 흔히 하듯이 ‘성불하기를’ 하는 마음이 탁 들어버리는 거라. 그런데 어떡하냐? 그런 마음이 들면 그사람은 이생에서는 행사지 이상은 안돼.

왜 그럴까? 대승에서도 그렇게 얘기하죠? 부처가 가는 길과 보살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우리 태국 뿐아니라 미얀마 스리랑카에서 수행을 하다가 행사지에 탁 이르르고 나면 스승들이 몇명 딱 와가지고 물어봅니다.

“너 어떡할 거야? 계속 수행할 거야? 아니면 법문하고 포교할 거야?” 하고 물어봅니다. 뭐 할 거야?

수행하고 하겠다는 사람은 그냥 수행하도록 하고, 만약에 법문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단계에 이르도록 이끌어주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겠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하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갈래길이 탁 갈려지면 이 두 사람의 다음의 상태는 결정돼버린다는 거라.

 

물론 사람들을 가르치고 포교하는데 뜻을 두는 사람들이 수행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하지만 이생에서는 좀 힘들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왜 그럴까? 행사지 다음에는 딱 한끝 차이로 도와 과에 드는 것하고 안 드는 것인데, 너무 불쌍하거든 이 사람들이. 저놈을 조금만 하면 내가 끌어다 줄 수 있겠는데 하는마음이 들고, 조금만 끌어줄려고 자꾸 하는 거라.

마음에 이미 원하는 것들이 자꾸 생겨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저사람을 끌어주기 전에는 행사지 다음으로는 못 넘어가지는 거라.

 

그런데 계속 수행할려고 하는 사람들은 인제는 걸릴 것이 없습니다.

이미 나는 계속 수행을 하면 도와 과에 이르르고 아라한에 이르르고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일부러 내가 ‘내가 성불하기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얘기를 안 합니다. 그러면 그냥 그냥 수행을 해나가버리기 때문에 빨리 도달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우리 태국에서도 스승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행사지에 도달하더라도 네가 일단 수다원에 이르기 전에는 법을 설할려고 하지 말아라."

수다원에 이르르고 나면 그다음에는 결정이 돼버리거든. 언젠가는 아라한까지 도달한다는 것이 결정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극구 말립니다.

처음에 아마 스님도 한 십년 이내에 일겁니다. 삼장도 어느 정도 통과가 되고 달달달 외우게 되고, 수행도 무르익어가지고 잘되서 테라담마 열 가지들도 완벽하게 되고 이런 상태가 되니까 스승님이 와서 물어봅니다.

“너 한국 갈려고 그러지?”

“예. 한국 가서 사람들 좀 지도하고 그러고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뭐라는지 알아요?

“너는 거기 가자마자 이생에서는 수다원 이상은 못간다.”

나는 아라한과 진배없는데 지금. 똑같이 아라한과 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그런 마음이 들고 하는데 왜 저렇게 얘기할까?

 

그래서 여러분들도 괜히 쓸데없이 서원 세우지마요. 그 서원이 여러분들 발목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테라와다 국민들은 서원을 세웁니다.

‘다음생에서는 천신으로 태어나기를’ ‘내가 보시한 이 공덕으로 천신으로 태어나기를’ ‘내가 빨리 수다원에 이르기를’ 어떤 경우에는 진짜 ‘부처님이 되기를’ 합니다.

부처님은 다음 세상 미륵불이 나올 때나 가능한 건데 그런 어처구니 없는 서원들을 세운다는 거라. ‘성불하기를’ 하는 그런 얘기를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거라.

그게 발목을 잡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워낙 원하는 것들이 많아가지고, 그래서 이생에서는 그것들이 조건이 돼서 상카루뻭카냐나 이상에 가지를 잘 못한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상카루뻭카냐나까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노력으로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죽으나 사나 그냥 내 몸과 마음이 수행대상이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잘될 때도 못될 때도 그냥 ‘그럴 때도 있지’ 하고 생각하고 그냥 대상에 사띠를 놓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어떤 것에도 평온하고 고요하고 가벼운 마음들이 돼있는 상태가 돼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들이 결정을 하면 됩니다.

‘아, 내가 수다원에 이를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들은 그때 듭니다. 그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안 듭니다. 알겠죠!

 

다음에는 성인의 경지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한 지견청정 부분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지견청정에 들어가게 되면 각각의 단계의 성인의 경지에서는 수행주제가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중점으로 해서, 하기야 해줘도 알겠나?

어쨌든 그렇게 해가지고 올해의 칠청정 부분은 전부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