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7청정에 이르는 길 5(도비도지견청정) - (사)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담마마-마까 2023. 12. 14. 13:30

https://youtu.be/JigHJvCvx-k?feature=shared

 

* 7청정에 이르는 길 5(도비도지견청정)

 

자동적으로 수행이 돼나가면 참 좋은데, 자동적으로 안 돼나가는 상태입니다 아직은. 용을 써야 됩니다. 그래서 되게 힘이 듭니다. 수행하는 것 자체가.

이게 언제 바뀌느냐 하면 이 단계에 이르르면 바뀌게 됩니다.

사실은 별반 차이 나는 건 없이 똑같습니다. 몸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하는 것은 똑같은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좌선이 탁 끝나고 보니까 내 몸이 좀 등이 구부러져 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 했던 좌선 자세하고는 다르게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뭔가 불편한 게 있었으니까 용을 쓴 거라. 그래서 몸을 변형을 시키는 상태가 되는데, 이제는 재미가 있거든 수행이.

그 단계에 이르르면 몸이 변형이 없어. 그냥 꼿꼿하게 있었으면 꼿꼿하게 있는 상태로, 또는 한시간 두시간 좌선을 하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냥 한시간 두시간 그냥 언제 간지도 모르게 휙 지나가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고.

그런데 공부를 안 한 사람도 한시간 두시간은 휘익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뭘까?

그냥 시간을 휘익 보낸 거 하고 사띠하면서 보낸 거 하고는 차이가 나는데, 그게 뭐냐면 한두 시간 전에 포지션 취했던 것이 그대로 있는 상태일 거 같으면 한두 시간 휘익 지나간 것이 설혹 그것이 완전하게 전체를 다 사띠를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재미있는 상태에서 지나갔을 경우에는 몸이 안 바뀝니다. 그런데 재미가 없으면 몸이 바뀌게 되는 거라.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재미가 있으면 또 문제가 생겨버리는 거라.

재미가 없을 때는 용을 써야 되는데, 재미가 있으면 뭔가 자꾸 나타나거든. 뭔가가, 내 앞에서 뭔가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 나타나는 거라.

뭐가 대표적으로 나타날까?

그렇죠. 그것도 하나의 일종입니다. 대표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게 빛!

조금 전에도 망갈라경에 보면 천신이 빛을 확 비추면서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 또는 부처님이 설법할려고 탁 앉으면 그 빛이 온 사방 누리로 번져나갔다, 그런 것도 다 빛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한테 수행하는데 그런 빛이 나온다? 본인이 느끼고 또 다른 사람들도 느낀다, 그럼 굉장한 거죠? 그래서 보통 여기서 사람들이 ‘내가 뭐 깨달음에 이르렀나?’ 하고 착각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더이상 공부를 안 할려고 그래요. 그냥 그게 좋아.

그런데 수행은 뭐라고 그랬어요? 좋고 싫음으로부터 떠나야 되거든.

조금 전에 단계에서는 싫어하는 것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인제는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일어나는 거라 마음에서.

그러면 이 좋아하는 것들로부터도 떠나야만이 인제는 본격적인 수행의 단계에 들어간다고 생각이 될 건데,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새로운 현상들, 신비적인 체험들을 탁 하게 되면 대부분은 거기서 멈춥니다. 거의 100에 99.9는 그러니까 100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지도를 해주지 않으면 대부분은 거기서 본인이 수행을 중단을 해버립니다. 너무 좋거든. 마음에서 탐욕도 안 일어나고 성냄도 안 일어나고, 모든 걸 봐도 환희심이 확 나고, 그리고 대상을 알아차리면 대상이 자동으로 막 알아차려지고, 쉽게 말하면 벌떡벌떡 내 앞에서 드러나지듯이 드러나지거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바로 보이고, 그걸 관찰하자마자 즉시 사라져버리고, 그걸 관찰하자마자 즉시 사라지니까 너무 좋은 거라.

그래서 ‘아, 이게 열반이 아닌가?’ ‘이게 내가 아라한의 경지가 아닌가?’ 하고 착각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도비도지견청정의 단계는 아직 수다원에도 안 이른 단계죠!

그런데 본인은 아니라는 거라. 나는 인제 수행 다했다고 생각하는 거라. 자기가 다했다는데 수행 더 할 생각 있겠어요? 그럼 거기서부터 중단해버리는 거라. 계속 그것만 즐기고 그것만 찾게 되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한번 잘 돌아보십시요.

그러고 나서 자기가 바뀐 게 뭐가 있을까?

마음은 물론 바뀌었겠지. 저번 같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즐겁고 좋으니까. 마음은 괴로운데, 괴로운 것이 즐거운 것으로 바뀐 거 외에 다른 게 번뇌가 탁 떨어졌다는 걸 그 사실을 안다든지, 아니면 나는 인제 다시는 욕심이 안 일어난다고 분명하게 안다든지,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울려고 하는 것들도 없다든지 이런 것들이 탁 떨어진 것들을 경험을 했느냐는 거라.

 

그거는 경험 안 했으면서 신비적인 현상들은 많이 경험하는 거라. 그러니 더더욱 그쪽으로 자꾸 빠져버리는 거라.

빛 뿐아니라 기쁨도 일어나고 모든 것들을 봐도 마음이 요동치지도 않고 평온하기도 하고, 뭘 봐도 그냥 즐겁고 좋고,

그런데 탁 자기 자신을 한번 깨놓고 보라고. 그럴 때는. 뭐가 있죠?

미세하지만 본인은 잘 모르지만 자기가 그걸 즐기고 있는 거라. 미세한 욕구가 틀림없이 있게 되는 거라. 그 미세한 욕구만 있겠어요?

자기 자신을 드러낼려고 하는 마음도 더불어 있게 되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수행 끝나기 전에 한 시간 하기로 했는데 그런 경험 했다 그러면 그냥 쫒아옵니다. “스님, 스님..” 하면서. 왜? 내가 경험한 거 빨리 내가 말해야 되거든. 자의식이 강하니까 그걸 말을 해야 되겠는 거라. 그러니 수행시간이 필요 없어. 그냥 와서 말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스님이 “야, 그거 별거 아니니까 그냥 그대로 내버리고 그냥 빛이 있으면 빛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냥 사띠해” 그리 할 것 같으면 되게 기분 나빠가지고 그냥 싹 가버립니다. 조금 전에는 기분이 엄청 좋아서 왔다가 인제는 ‘에이, 스님은 몰라. 내가 이거 경험한 거 내가 경험한 거지 스님이 경험한 거 아니니까 뭐 인제는 얘기 안 해’ 이러면서 가버리는 거라.

 

그래서 참 수행 지도하기 참 힘든 경지가 이 경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말을 안 들어요. 그걸 수행스승들은 다들 경험하고 그걸 버렸기 때문에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데, 버리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는데 어떡할 거라? 그런데 무슨 말을 할 거라? 그런데다가.

그게 인제 도비도지견청정이라고 하는 단계입니다.

 

이해가 되죠? 그래도 그런 경험 하고 싶죠?

하! 그게 문제라니까. 그것도 지혜의 단계입니다.

지혜의 단계인데 지혜가 수다원에 이르른 상태입니까? 아니면 아라한이 된 상태입니까? 아니죠!

그런데 그런 현상들이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났는데 그거는 삼매에 들기는 참 좋습니다. 그 상태에서 딱 거기에 집중해버리면 삼매에는 듭니다. 그런데 지가 뭐 삼매에서 평생 살 거야? 그렇게 살 수 없잖아. 언젠가는 나와야 되는 거라. 깨어나오고 나면 그거는 사라져버리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마음은 기쁨은 좀 남아있겠지. 한 며칠, 어떨 때는 한 일주일, 한 달간은 되게 행복한 마음은 들어있겠지.

그런데 그거는 자기가 붙잡고 있으니까 그렇게 길게 끌어가는 거고, 그런데 그 경험을 그러면서 계속 또 하고 싶어하는 마음만 자꾸 생긴다는 거라.

 

삼매는 분명히 들었는데, 욕심은 보니까 그전하고 별반 차이 없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 그러면 그거로 인해서 삼매에 든 것도 깨달음하고는 관계없는 거라.

본인이 그걸 빨리 알아야 되는데 ‘아, 내가 아직 성인의 경지에 근처에도 아직 못갔다’ 하는 것을 빨리 깨닫고 그냥 놔버리고 수행을 계속 지속해버리면 되는데,

왜 그러냐 하면 지금의 상태에서는 지속을 할 것 같으면 금방금방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그냥 보입니다. 무상한 성품이 그대로 보이고, 그리고 불만족스러운 게 그대로 보이고, 그리고 나라고 내세울만한 건덕지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는데, 그래서 계속 조금만 더하면 인제는 진짜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질건데 그걸 못하는 거라.

참 낭패라. 여기에 이르르면.

 

한번 봅시다.

조금 전에 천신도 광명을 확 비추면서 왔다고 그랬죠? 부처님도 광명을 비추고, 본인 자신도 수행을 잘하면 마음이 기쁨의 상태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광명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러면은 지금 현재는 대상을 잘 알아차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을 하고 있으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걷고 있으면 걷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분명하게 내가 집착할 만한 것이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도비도지견청정이라고 적혀있죠?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있죠? 이걸 여러분 눈앞에다가 싸악 요렇게 보여줬다고 쳐봅시다. 과연 몇글자나 읽을 수 있을까요? 몇 글자 읽겠어요?

아마 이건 어려우니까, 차 지나가면서 간판을 이렇게 쭉 빠른 차 속도에서 쭉 읽었다고 해봅시다. 차가 느리면 그 글자가 다 보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인지를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차가 빠르면 글자가 띄엄띄엄 읽히게 되고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모릅니다.

수행이 잘돼서 기쁨의 상태에 이를 것 같으면 뒤에 경우에 해당이 되는 거라.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스님이 법문을 하죠? 여러분들 중에 만약에 도비도지견청정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 그럼 스님 말은 그냥 무상한 성품으로 들리지 이게 무슨 모양이나 색깔, 아니면 무슨 뜻이라고 듣지를 못하게끔 되는 거라.

사실은 그렇게 이 단계를 거쳐야만이 그다음에는 의미들이 다가와지게 되는데, 이걸 못하는 거라.

왜 그럴까? 의미가 없는 말들로만 계속적으로 보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진다는 거라.

앞에 걸 붙잡고 있으니까 그 뒤에 것이 안 보이게 되는 거고, 앞에 걸 붙잡고 있으니까 그게 의미가 나에게 탁 와서 닿으면서 그게 속박 구속이 돼가지고 그걸 의미들을 알게끔 되는 상태인데도, 본인은 의미를 자꾸 알려고 하는 거라.

 

그리고 자꾸 개발을 할려고 그럽니다.

글쓰는 사람도 그걸 누가 말하는 걸 그대로 빨리 적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같이 자꾸 그렇게 연습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그걸 다 적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본인이 그렇게 될려고 하는 거라. 물론 그렇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다 적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노? 요즘 그냥 녹음기 하나 탁 틀어놓으면 되는데.

지가 해야 될 거는 그걸 다 적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단계에서는 이렇다 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일어나는 대상만 사띠하면 돼. 그래서 빠르게 변하고 있으면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러면은 다시 처음 단계로 넘어가야 됩니다.

아, 이거는 정신적인 현상이고 이거는 육체적인 현상이고, 정신적인 현상도 그거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들을 사띠하는 마음이 또 더불어 일어나지고 하는 것들로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야 돼. 그렇게 다시 단계를 밟아가야 돼.

쉽게 말하면 지혜의 단계 처음부터 다시 또 쭈욱 밟아 올라갔다가 그다음에 또 탁 막힙니다. 그럼 다시 또 내려놔 놔놓고 다시 처음부터 또 해야 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렇게 단계를 밟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거라.

그래서 나중에는 앞에 단계는 필요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거라.

 

언제 그렇게 될까?

앞에 단계 필요 없이 그냥 지금 대상을 보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만 보이게 되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상태에서 그렇게 될까?

그게 수다원이라는 거라.

수다원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걸 못 넘어가니까 계속 거기만 붙잡혀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설혹 수행하다가 뭔가 새로운 거 신비적인 체험들을 탁 했다, 그거 별거 아니야. 누구든지 다 경험하는 거기 때문에 그냥 내려놔버리라는 거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하고 내려놔버리고,

그럴 때는 이미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돼있습니다. 기쁨이 일어나면 막 몸을 흔들고 난리가 납니다. 자기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럽니다. 누가 했어 그러면? 누가 옆에서 밀어줬어? 자기가 했는데도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얘기해.

그럴 때는 빨리 탁 놔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것부터 천천히 다시 또 하면 됩니다. 그럼 또 막히면 다시 또 내려가고.

 

그래서 수행이 진척이 잘 없을 때가 앞에 도의청정의 단계에서는 힘들어갖고 포기를 해버리고, 도비도지견청정에서는 이게 내가 가는 길이 맞기는 맞는데 너무 좋으니까 고마 거기서 막혀버리고, 이 두 개 단계만 탁 잘 넘기면 수행은 일사천리로 지나가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우짜겠노? 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 뭐. 그럴 때는.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옛날 부처님 당시 때 많은 제자들을 두고 있던 스님이 한분 있었어요. 그중 한 제자가 아라한에 이르렀거든. 그래서 아라한에 이른 제자가 어느날 자기를 이렇게 수행의 완성에 이르게끔 해준 스승을 생각하면서 스승을 탁 보니까 스승은 아직 아라한이 아니고 수다원에도 못 이르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야, 이대로 뒀다가는 저 양반 나이가 많이 먹었으니까 곧 진짜 열반에 들겠다 싶어가지고 찾아갑니다.

그래서 스승님한테 인사를 하고, 아무리 아라한이 됐다고 하더라도 스승은 스승이고, 법랍이 높은 분들은 법랍이 높은 분한테 반드시 인사를 드려야 됩니다. 그게 불가의 법칙인데, 어쨌든 삼배드리고 스승님을 칭찬합니다.

스승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수행을 완성했습니다. 스승님 잘하시는 거 있죠?

뭐? 하니까

스승님 변신하는 거 참 잘하신다 아닙니까? 한번 그거 변신 한번 보고 싶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런 수행이 잘 돼가지고 여러 가지 신비적인 현상들이 일어날 때는 몸이 지혼자 스스로 뜨기도 하고 또 몸이 스스로 변하고자 할 것 같으면 변해지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변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한 거라. 그럼 사자 한번 봅시다.

사자? 하면 착 바뀌거든. 원숭이 하면 원숭이로 착 바껴. 잘 하시는 거라. 고양이 하니까 고양이로 착 바뀌는데, 이 제자가 갑자기 있다가 지가 호랑이로 팍 바뀌어가지고 그 앞에 고양이 앞에 팍 나타나는 거라. 어찌 되겠어 고양이가?

깜짝 놀래가지고 다시 사람 모습으로 바뀌는 거라.

그렇죠. 깨져버리니까. 삼매의 힘이나 그다음에 집중하는 힘들이 깨져버리면 제자리로 다시 돌아와버립니다.

 

그래서 제자가 스승한테 얘기합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성인이 놀라는 법은 없거든. 수다원 조차도 놀라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왜 이리 놀라십니까?

그때사 이 스승은 육십년 동안 그 경지를 즐기고 있었는데 머리가 띵 합니다. 아, 내가 아라한이 된 게 아니구나. 두려움이 있으면 놀라게 되는 거라. 그 두려움조차도 극복을 못했는데 내가 육십년 동안 이걸 즐기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그때사 번쩍 정신이 듭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한테 무릎 끓고 삼배드리면서 내가 성인에 이르지 못했다 하면서 모든 거 놔놔놓고 산에 들어가서 수행하고 하루만에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그게 불교 경전에 나와있습니다.

 

설혹 여러분들은 육십 년간 그거 즐길 건 아니죠? 육십년 더 살 사람들이 있나? 없나? 갈 때 언제 갈지는 여러분들이 모르잖아. 그런데 수다원에만 이르르면 내가 언제 갈지는 압니다. 지가 언제 갈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라. 갑작스럽게 죽을 건지 아니면 수명이 다 해갖고 백살에 죽을 건지 그거는 알면 대비하기가 수월하잖아.

여러분들 좋아하는 돈 모아가지고 유산들도 잘 분배해가지고 다툼이 없도록 만들어야 될 거고,

 

적어도 그런 상태가 되도록은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인의 경지가 중요한 것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르고 나면 인제는 다른 도리가 없거든. 그길로만 쭉 가게 됩니다.

그런데 도비도지견청정은 이거는 내가 해탈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길이다, 이거는 아니다 하는 것은 아는데, 안 하는데 어떡할 거야? 자기가.

이건 줄은 아는데 지가 그걸 안 하고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아닌 것은 안 해. 안 하기는 안 해. 그렇죠, 긴 것도 안 하고 그냥 머물러 좋아서 즐기고 있는 상태라는 거라.

 

스님 가사 항상 이거 입고 있죠? 벌써 이 가사를 입은 지가 36년이나 지났습니다.

그전에는 몇년간 한국가사를 입고 있다가 태국으로 출가를 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는 이 가사를 입고 그때는 처음에는 억지로 그냥 입고 있었어. 그 불편한 게 아니고 스승님도 이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스승님한테 맞아 죽을까봐가지고 그냥 억지로 입었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는 그다음부터는 이 옷 입은 것에 대해서는 불평을 안 해. 되게 불편하고 하는 것은 그거는 내가 감수해야 되는 것인데,

그리고 그뒤로는 그런 의식조차도 다른 것은 안 합니다.  그전에는 아, 한국불교 이거 뭔가 문제가 많다. 이거 좀 바꿔볼려고 뭐 만날 죽은 사람들 49재나 해쌌고 이러니까 죽고나면 다음 의식이 바로 가는데 49재가 뭔 필요가 있노 해가지고 그거 안 할려고 하고, 의식을 갖다가 안 하는 대신에 다른 방편을 썼었거든. 내용을 갖다가 쉽게 말하면 한국의 49재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그 의식을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의식으로서 바꿔줬거든.

그런데 내용은 바뀌었지만 그게 사실은 맞기는 맞는데 49재라는 의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거라.

그런데 도비도지견청정에 이르르게 되면 그거조차도 필요없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아닌 것은 아예 안 하는 거라. 아예 안 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가끔 스님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테라와다불교를 참 많이 공부하고 특히 출가자 중에서 그런 분들 중에 그길을 오롯이 가는 사람이 드물다는 거라.

왜 그럴까?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그런 거라. 이 경지에 이르르게 되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길이 아닌 것은 안 따릅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적인 것들에 젖어있는 것, 설혹 내가 굶어 죽어도 그건 안 하는 거라.

 

(수행자 질문 : ---)

아니요. 지혜 지(智)자 입니다. 이거는 빤냐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미 이 상태는 지혜의 단계의 4번째 단계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이미 지혜의 단계에 들은 겁니다.

 

그래서 스님 바램은 그런 거는 있습니다.

바르게 배웠으면 바르게 살아라는 거라.

출가자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분 재가자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어긋나게 자꾸 살아간다?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그거는 이미 이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얘기라.

반성 좀 해요!

 

그래서 이 단계를 잘 넘기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현상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경전에는 열 가지로 구분을 해놨는데 뭐 그거는 사람마다 조금씩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그 어떤 단계이든 미세한 욕구는 있게끔 되는 거라.

그걸 좋아하는 마음이 항상 존재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런 마음이 있게 되면 항상 사띠를 하더라도 미세하게 떨림이 있게 됩니다.

대상이 분명히 사라지는 게 보이는데도 그냥 휙 사라지는 게 아니고 올챙이 사라지듯이 이렇게 사라지는 거라.

 

마찬가집니다. 몸도 항상 꼿꼿하게 있지 못하고 편하고자 하게 됩니다.

마음은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지만, 변하는 것이 보이고 불만족스럽게 보이지만 그냥 거기서 머뭅니다. 더 이상 나아갈려고 하질 않습니다. 빠르면 얼마나 빠르겠어? 엄청 계속 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것 못보는 거라.

그래서 자꾸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몸이 변하고 있는 것만 자꾸 보려고 하는 거라.

몸이 변하는 것이 보이고 나야 그게 아무리 봐도 몸이 변하는 것이 안 보이는 상태가 되고 나야 마음이 변하는 것이 보이는데 요놈이 요걸 넘어가지를 못하는 거라.

 

수행해 본 사람들은 경험해봤을 겁니다.

수행을 잘하고 있는데 분명히 내가 숨을 쉬고는 있는데 너무 미세해져가지고, 사띠는 분명히 있는데, 숨을 몰라. 그런데 사띠는 분명히 있거든.

그러면 여기서 빨리 마음으로 전환을 해야 되는데 요걸 전환을 못하고 그냥 거기에 있는 거야. 아주 미세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그냥 그거 좋아하는 거라.

빨리 몸의 무상·고·무아에서 마음의 무상·고·무아로 바뀌어져야 되는데, 몸이 빨리 변하겠어, 마음이 빨리 변하겠어요? 훨씬 빨리 변하거든.

그러면 훨씬 많은 걸 내가 알아차리게 되고 집착하는 것이 더 없어지게 되는데 그걸 못하고 그냥 앞에서 머무르게 되는 거라.

그게 이 경지를 탈출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됩니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하고 목갈라나 존자하고의 얘기에서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사마디가 깨달음은 아니다. 지혜도 깨달음이 아니다."

 

이것도 지금 도비도지견청정도 지혜의 단계입니다.

이것도 깨달음이 아닌데 쉽게 말하면 수다원 이상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그런데 왜 여기서 내가 붙잡고 있어야 되느냐는 거라.

수다원에 이르르게 들어가게 되면 분명하게 떨어지는 번뇌를 인식합니다 본인이. 본인이 분명하게 그걸 인식을 합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아닌 것은 아예 안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더이상 그것은 그런 형식이나 이런데 얽매이지 않음을 분명하게 본인이 압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거는 관심이 없거든. 누가 뭐 얘기하더라도 관심이 없으면 그게 안 들려요.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내세울려고 하는 생각조차도 안 일어나는 거라.

“스님, 아라한입니까? ” 그게 내하고 뭔 관계있는데? 나는 오로지 수행하는 것뿐인데, 아라한이 된 사람도 수행을 해나가는 거고 아라한이 아닌 성인들 중에서도 다들 수행을 해나가고, 성인이 되지 않은 사람도 수행을 해나가는 것은 똑 마찬가진데, 그게 지금 내가 뭐가 중요한데? 그거는 여러분들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라는 거라.

누가 나를 좀 알아봤으면, 안 알아보면 어때서? 그냥 나는 내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뿐인데.

그리고 본인에게는 탐욕이나 성냄이나 이런 것들이 있기는 있더라도 안 일어나는 상태라는 거라. 전혀 영향을 못 미쳐, 없는 거하고 마찬가지의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 상태까지는 만들어야 되는데 그전에 이 도비도에서 탁 막혀버린다? 그걸 즐기고 있다? 그럼 뭐 하러 살았어? 여기에 머물러도 육도윤회를 하는 것은 똑 마찬가진데. 그러면 차라리 보시나 많이 하고 공덕이나 많이 쌓지. 차라리 그거 할 거 같으면 빨리 그래도 사악처로부터는 벗어날 거 아니라?

 

수행은 그냥 단순하게 성냄을 좀 벗어날려고, 내가 좀 행복해질려고, 그럴려고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일단 시작을 했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이 길로 쭉 가면 해탈에 이르른다 하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딱 그런 확신이 들어서 벗어나지지를 않게 됩니다.

그런데 뭐 그렇다고 재가생활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오롯이 도의 길을 가게 되는 거라.

도전해 볼만 하죠? 한번 열심히 해보십시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것이 만약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그러면 ‘그래, 아직은 내가 좀 힘든 단계이지’ 하고 마음을 먹고 그냥 그냥, 그냥 하라는 거라.

안 되면 ‘음, 이게 배가 불러오는 거네’ 그거 물질적인 그것부터 관찰하는 거라. ‘불러오네’ 하고 알면 ‘음, 그렇네’ 하고 알면 돼. 꺼지면 ‘어, 꺼지네’ 하고 알면 되는 거라. 그러다보면 불러올 때 ‘불러온 걸 아는 건 뭐였지? 어, 마음이네, 마음하고 불러오는 현상하고는 다른 거네’ 이런 식으로 자꾸 알아나가면 돼.

힘들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거라.

 

그리고 수행이 잘 돼나가서 이색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그것도 힘든 거하고 꼭 마찬가지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럴 때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거라.

그래서 지금 1단계부터 지금 4단계까지는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게 됩니다. 점점 시간은 줄어들고 나중에 수다원에 탁 이르르게 되면 앞에 거는 필요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생멸하는 것만 보이게 됩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생멸하는 것만 보이게 됩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를 수 있도록, 그러면 그 단계는 이미 도비도의 단계는 넘어서는 단계가 됩니다.

그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