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칠청정에 이르는 길 7(지견청정) - (사)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담마마-마까 2023. 12. 18. 13:30

https://youtu.be/aWdhLL17euw?si=AZDhWWPfkj4HF0PA

 

* 칠청정에 이르는 길 7(지견청정)

 

스님도 마찬가집니다.

뭐 수행에 대한 얘기를 한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지, 아니면 도와 과에 이를지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건 내가 신경써야 될 부분은 아닌 거고, 단지 나는 그러한 과정들을 가면서 의문나는 부분들에 대한 것들을 해소해주기 위해서 내 할 일만 할 뿐인 것이지 우짜겠노.

그래서 스님은 다른데 법문을 다니는 건 잘 안합니다.

테라와다 상가 선원에서 초청이 있으면 가서 하고, 지금은 거의 안 나가고 있는데 그래도 여기서 한 여러번 했죠? 대부분 황회장님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 뀌어가지고 와서 한 거지, 여러분들이 이거로 인해서 많이 달라질거라고 그런 기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스님이 개인적으로 이걸 하면 내가 유명해지겠지, 뭐 어떤 걸 바래가지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해줘야 될 시기가 됐으니까 그냥 하는 거지, 황회장님도 그렇게 마음 편하게 드십시오. (알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일화 하나 얘기를 해드릴게요.

여러분들도 잘 아는 웨살리에 질병이 창궐하고 가뭄이 들고 해가지고 곤란을 당했어요. 그래서 웨살리에서 성인이 우리 마을에 오면 그래도 뭔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부처님을 초청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탁 웨살리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을 하게 돼요. 그래서 가뭄이 해결이 됐어요. 그런데 그것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질병도 있고, 그보다도 중요한 거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저렇게 쉽게 말하면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니까 힘든 것들을 좀 안정시켜주고 좀 더 평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냐 하는 것도 부처님이 고려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라따나숫따라고 알죠? 보배경, 보배경을 아난다 존자에게 일러가지고 출가한 스님들에게 보배경을 읽도록 하라,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안정도 되고 또 질병도 그로인해가지고 물러날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라따나숫따를 한번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삼보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런 분이니까 하고 얘기를 하면 그걸 듣고 ‘아, 참 저런 분이 세상에 있었구나’ 해서 마음이 평온해지고 환희심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또 부처님이 가르친 담마라고 하는 것은 ‘아, 우리를 실질적으로 바꾸어주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얘기하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상가 스님들은 이러한 무리들이기 때문에 참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는 분들이다 하는 것들을 얘기함으로 인해가지고 사람들이 환희심을 일으키고 하는 것들이 주 테마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거기서 주목을 해서 좀 본 게 뭐냐면 보배경 중에 상가에 대한 부분이 일곱 차트로 나뉘어져 있어요. 일곱 차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다섯 가지가 수다원에 이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머지 두 개는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죠.

부처님이면 일곱 개 다 아라한이 된 얘기를 해야 되는데 왜 다섯 개나 되는 구절을 수다원에 대한 얘기를 했을까? 하는 얘깁니다.

그런데 수행 안 해본 사람이 수다원이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아라한이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를 모르면 이것도 뭐 말짱 꽝입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수다원에 이른 사람들은 적어도 더 나쁜 상태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스님이 법을 설하고, 또 우리 황회장님 같은 분들이 이런 법석을 마련하고 하는 이유는 그래도 여러분들이 지금보다도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 법을 설하더라도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못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법을 설할 이유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여러분들이 바른 법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바른 법을 듣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점점 더 나아가는 증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져야 됩니다. 꼭 수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조금 더 욕심부리고 성내고 하는 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없어지고, 또 부지런히 노력해서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또 기쁨이나 행복을 줄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있고, 이렇게 바뀌어나가게 될 때 법을 설하고 법석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아, 참 보람이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황회장님이 어찌 보면 좀 딱한데, 그게 안 보이니까 그러는 건데, 뭐 보이든 안보이든 냅두이소. 우짜겠노, 지 업인데.

단지 스님은 스님 해야 될 것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 지견청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칠청정 중에 지견청정이라는 단어가 몇번 들어갈까?

세 번 나오죠? 언제부터 나와요? 도비도지견청정, 그다음에 행도지견청정, 그리고 마지막이 지견청정.

지견청정이 왜 세 번이나 나올까?

앞에 4가지는 어쨌든 지나오는 과정 중에 있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나쁜 일을 했다, 그러면 나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쁜 결과를 받았다, 그럴 것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그걸 안 할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선한 말을 해서 친절하게 뭔가 이끌어줬는데 그사람이 고맙다고 하더라. 마음이 뿌듯해. 선한 일을 하니까 이것도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뿌듯해지는구나.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 선한 일을 잘 할려고 하게 됩니다.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지견청정의 영역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은 인제는 나쁜 거 안 할려고 그래. 선하고 좋은 일만 자꾸 할려고 하는 거라.

그렇게 굳어져버렸다, 그러면 애초부터 그런 인연을 안 지을려고 그럽니다.

 

우리 황회장님이 가끔씩 법회 전에 한 이십분 전에 와갖고 스님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 좀 할 수 있습니까? 안 가거든. 왜 그러겠어요?

그게 법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수행에 대한 얘기들이 아니고 그냥 일상적인 얘기들이기 때문에 그거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잡담에 해당이 됩니다. 잡담하면서 내가 시간을 뺏길 이유가 없는 거라. 그래서 여기뿐 아니라 어디에 가더라도 일체 그런 것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법회 전에 뭘 어떻게 하고, 끝나고 나서 어떻게 차라도 한잔 하고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딱 할 일만 하면 그냥 자리를 떠버리거든.

 

여러분들도 아마 살아가다 보면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스님 같이 그렇게 되라는 것이 아니고 아닌 것은 아닌 거라. 그럼 그거 안 해야 돼. 그러면 마음은 그쪽으로 아예 움직여지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 자체를 만들지를 안 합니다.

술자리가 있다, 조금만 가서 먹으면 안 취하도록 조금만 먹으면 되겠지, 그게 지맘대로 되나? 아예 술자리를 안 가는 게 맞는 거지.

그게 행도지견청정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래서 아예 도의 길로 가는 길로만 그냥 쭉 간다는 얘깁니다. 쉽게 여러분들 생활에서 표현하면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만 하지 선하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는 건 아예 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마지막 지견청정은 뭘까?

그러한 과정들을 아닌 것은 아닌 거라고 구분을 하게 되고, 긴(맞는) 것은 긴 거로 구분하게 되고, 그래서 긴 거 쪽으로만 습관이 되어서 계속적으로 가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말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겠지.

그래서 지견청정이라는 단어가 세 군데나 들어갔는데, 그러면 여기 말하는 마지막 지견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도와 과의 부분을 얘기할 거란 말입니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이니까.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지견청정하고, 아까 도비도에서 말하는 지견, 행도에서 말하는 지견청정에서의 그 지견하고는 어떻게 차이가 날까? 어떤 차이가 나요?

수행을 해보면 아마 이해를 하실 겁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그 대상 자체가 변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냥 그 대상 그거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물론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장애들도 일어나겠지만 그것들도 차례차례로 극복을 해내고, 이리 하면 결국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게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냥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냥 놔둬버리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다시 돌아본다든지 이런 것도 없습니다. 왜?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기 바쁜데 그걸 언제 하고 있어?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러면 현재 일어나는 마음을 갖다가 그냥 그대로 그냥 사띠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지견청정에 이른 성인들도 그와 같고 도비도지견청정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도 그와 같습니다. 똑같습니다.

단지 차이가 도비도지견청정이나 아니면 행도지견청정에서의 사띠하고 있는 수행자는 계속 하기가 힘이 드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선한 일만 자꾸 할려고 하더라도 나쁜 마음 안 일어날 수 있나? 일어나진다는 거라. 또 그냥 선한 것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똑같이 선한 걸 계속할 수 있나? 어떨 때는 좀 많이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작게 하기도 하고,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일정하게 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런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지견청정이라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행도지견청정에 중간 후반부에 보면

상카라-우뻭카-냐나(saṅkhāra-upekkhā-ñāṇ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

고요하고 평온하다고 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대상에 사띠를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상태가 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마음은 곧 아라한의 마음과 동일하다는 거라. ‘아, 아라한은 이런 분이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내가 지견청정의 단계에 못이르고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카루뻭카냐나에만 머물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아라한과 같은 생활을 해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걸 이해를 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칠청정 부분에서 앞에 4개 부분은 쉽게 얘기하면 그것을 지견청정에 가기 위한 단계를 밟아왔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이상적인 불교도를 뭐로 잡았을까?

뭐에요? 가장 이상적인 불교도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까? 한번 얘기해봐요. 그렇게만 살아도 그게 이생에서 잘 사는 겁니다. 어떤 삶일까?

(수행자 대답 : ---)

음, 4가지?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 쉽게 얘기하면 수행에서 뭔가 탁 발견했다, 새로운 걸 알았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엄마야, 이게 뭐야’ 하고 자랑할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 게 안 생겼을 건데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이 생겨나는 걸' 자기 스스로 만들도록 돼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4가지 노력」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걸 부처님은 바란 게 아니라. 그렇게 어려운 거 말고.

(수행자 대답 : ---) 예? 자각? 뭔 자각?

(수행자 대답 : ---) 부처님은 그렇게 거창한 걸 얘기 안 했어요.

 

쉽게 얘기하면 지가 나쁜 일 저질렀으면 나쁜 결과 받고, 좋은 일 저질렀으면 좋은 결과 받는다는 거 가슴 깊이 새기는 거라.

그래서 ‘아, 나 이제 이거 안 할래’ 그런 마음을 강하게 가지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게 도의 문을 여는 첫 단계다" 하고 얘기합니다.

설혹 도의 문을 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잘사는 사람이 되는 거라.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겁니다.

물론 경전에는 그걸 하기 위해서 열 가지 바라밀을 행해야 되고, 삼보를 믿어야 되고, 어쩌고 저쩌고 부언설명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분해해 보면 결국에는 업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자기가 인식해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분명히 구분해서 하고 안 하고 하는 것들을 분명히 구분해서 그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게 부처님이 말한 "가장 이상적인 재가자의 생활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건 해야 된다는 거라. 수행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적어도 갖춰야만이 그래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래도 좀 웃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아까 웨살리 얘기를 했죠. 수다원은 그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얘기했죠. 그러면 업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그대로 할려고 했는데 그래도 나쁜 짓 할 때도 있고 그렇단 말이라.

그럼 안 하게 될 때는 언제가 될까?

그래서 적어도 그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 상태는? 그래도 경전에는 여러분들 읽어봐서 잘 알죠? 수다원이 되면 적어도 사악처에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죠.

 

사악처는 둘째치고라도 지금 마음이 나쁜 것으로 인해서 막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떨어지지는 않는 상태가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느 정도까지 이르러야 될까? 어디까지 해야 될까?

업에 대한 것들을 잘 이해를 해서 그게 사실은 굳어져야 됩니다.

그게 굳어져가지고 웬만한 자극이 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자꾸 되도록 훈련해야 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깨달음의 길은 점진적인 계단과 같은 거지 한 번에 퍽 뛰어오르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처음부터 얘기했듯이, 그 계단계단을 갖다가 건너 뛸 수도 없는 거고 거꾸로 뒤집을 수도 없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냥 조금 실수했으면 ‘아, 그래 이번에는 이미 실수했으니까 다음에는 하지 말아야지’ 자꾸 마음을 먹고 안 하게 되게 돼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이번 주에는 그런 잘못된 것들을 한 것들이 한 열번 했다고 할 것 같으면 다음 주에는 한 일곱 번으로 줄어들게 되고, 이러면서 그게 점점 줄어들면서 안 하는 방향으로 그게 딱 못이 박혀지도록 돼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이게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면 수행에서는 어떻게 될까? 수행에서는 얼마만큼 해야 될까?

아까 얘기했지만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에는 일단 이르러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하게 해야 되겠죠.

물론 때로는 사마디에 들 때도 있을 거고, 그렇지 않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대상을 무조건 알아차리면서 놓칠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 점점 따라가면서 속도가 놓치지 않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는 때도 있을 거고, 그런 상태가 쭉 진행이 돼나갈 겁니다.

 

그런데 언제 그러면 본인이 ‘아, 나는 더이상 인제는 밑으로 안 떨어져’ 하고 알게 될까?

그것도 마찬가집니다. 꾸준하게 노력해가지고 수행이 오르락 내리락 하게끔 됩니다. 잘 될 때도 있고 못 될 때도 있고 그래서 한번 수행하면 그냥 두려움이 일어나는 단계까지 가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또 대상 놓치면 다시 처음부터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단계부터 다시 또 밟아가기도 하고, 그래서 그 기간이 점점 더 짧아지는 것도 경험하고, 무수하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속적으로 해나가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탁 보입니다. 뭐가 보일까?

', 이거는 그냥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태'

 

쉽게 설명을 하면 일본은 110볼트 쓰죠. 우리나라는 220볼트 쓰죠. 그럼 일본제품을 우리나라에 가져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답타를 하나 끼워야만이 그걸 쓸 수가 있습니다. 아답타를 딱 끼우면 그 제품을 쓸 수 있지, 그 아답타를 조그만한 아답타지만 그걸 끼우기 전에는 이거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답타를 끼우기 전에는 언제든지 밑으로 떨어질 수가 있고, 죽고 나서 사악처에 떨어질 수도 있고, 별의별 것들을 다 경험할 수가 있는데, 아답타를 끼우는 순간에 인제는 이걸 사용을 하듯이 그냥 그길을 쭉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아, 인제는 나는 사악처 하고는 관계 없어’ 하고 알게 됩니다.

 

그 조그만 아답타가 수행에서는 뭐로서 보일까?

대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도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서 환희심도 일어나고 했어요.

그런 상태가 지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수행을 하고 있는데,

그다음에는 너무나 싫습니다. 왜 그럴까?

사띠는 계속 되고 있는데 계속 변하니까 이거는 안 하고 싶은데, 왜 그래요?

여러분들은 항상 젊어지고 싶죠? 병 안 들고 싶고 안 죽고 싶다는 거라. 그러고 싶은데 이거는 그게 아닌 거라.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늙을 수밖에 없고 병들 수밖에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치이듯이, 아무리 이걸 내가 안 변하는 것으로서 그냥 항상 있는 것으로서 있고 싶은데, 실제적인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너무나 싫은 거라. 너무나 싫어서 마음이 이때까지 그것으로 인해서 집착하고 했던 것들을 탁 놔버립니다. ‘아, 인제 더 이상 안 살고 싶어, 안 하고 싶어’ 탁 놔버립니다.

 

그전에 물질적인 현상도 떨어져나갔고 정신적인 현상 지금 생각하는 것도 대상을 탁 놔버리면 뭐가 남아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공(空)하고는 틀립니다. 그 공은 더 그뒤 이후에, 수다원이 될 때는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아무것도 없는 그냥 딱 끊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사띠는 분명히 있는데, 사띠는 있는데 아무것도 없이 뭐가 탁 끊어지는 게 보입니다. 아주 짧은 찰나인데.

이게 이런 경험들을 좀 길게 하든지 아니면 여러번 할 수 있으면 참 좋은데 이놈의 도와 과라고 하는 게 자기생에서 딱 그거 하나밖에 안 와. 더 이상 오지를 안 해. 과는 나중에 되씹어 볼 수도 있고 하는데 도는 딱 그 한 찰나밖에 안 와. 딱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러고나면 마음이 다시 다른 걸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아무것도 없이 딱 집착하는 것이 없이 끊어지는 상태이면 뭔가 떨어지는 것이 보이거든. 뭔가 떨어지는 게 보여요.

그게 뭐겠어요? 이미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이나 이런 건 아예 없어.

그런데 이때까지 내가 가져왔던 견해들 , 이거 참 쓸데없는 거였다하는 게 탁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무것에도 견해에 사로잡히는 것이 없이 그게 툭 떨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사실은 견해가 떨어지면 아, 내가 이 길로 가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 그런 의심도 그런 것들도 아예 생겨나지 않습니다. 견해가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 의심 자체는 아예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태에서도 자기는 그냥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얘기하는 탐·진·치라고 하는 거하고는 관계없이, 쉽게 말하면 사고작용, 사고작용이 매이는 것이 없이 그냥 붙잡히는 것 없이 그냥 탁 떨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게 수다원입니다.

 

쉽죠!

(수행자 질문 : ---) 견해가 끊어진다는 것보단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렇게 수다원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속에 몸담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천상 신이 된 것도 아니고 무색계 형체 없는 존재가 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거보다도 더 좋은 성인의 경지에 탁 도달했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그속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는 상태에 딱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딱 얽매여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맞고 저거는 틀리다는 이분법으로 보게 되는 것이지, 어떤 것이든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가끔씩 그런 걸 봅니다. 스승들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만 해! 이게 수행이 진짜야! 다른 거 틀렸어!”

그건 아직 견해가 안 떨어진 겁니다.

그리고 “나 열반 체험했어! 나 해탈에 이르렀어! 나 경험했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그것도 거기에 매여있는 상태라.

그럼 아직 수다원에도 이르지 않았다는 얘기라.

어떠한 경우든지 수다원에 도달한 사람은 열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다 견해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이미 그게 탁 떨어져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언급할 가치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황희정승 같이 “니 얘기도 맞고 니 얘기도 맞고 다 맞다”는 거라.

왜? 조건따라 이거는 바뀌는 거기 때문에. 그러면 적어도 황희정승은 이 견해든 저 견해든 어떤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라.

 

그래서 그런 상태에 탁 이르르면 본인이 스스로 압니다.

‘아,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구나’ 도에 이르고 나서 과는 시간을 두지를 않거든. 바로 즉시에 그냥 일어나집니다.

차이가 뭘까? 도와 과의 차이가?

그렇죠. 여러번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한두번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나중에 다시 빳짜웩카나를 하면서 다시 과는 다시 또 떠올릴 수 있고 합니다.

차이가 뭘까?

도는 떨어지는 번뇌가 뭔지는 분명하게 아는 상태입니다.

왜?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이 딱 식이든 뭐든 다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그것으로 인해서 식(識)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떨어지는 것이 보이거든. 그 짧은 찰나에.

그런데 과는 안심이 돼요.

떨어지는 게 보이고 나면 ‘어이구야! 나 이제 다시는 악처에 안 떨어지겠구나’ 그리고 ‘나한테서 내마음에서는 나쁜 마음이 인제는 더이상 안 일어나겠구나’

이런 결과물들이 보이는 게 과라는 거라. 떨어지면 그게 보인다는 거라.

그래서 도와 과는 순차적으로 이지만 같이 일어나는 것이, 그래서 하나로 그냥 묶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수다원 도에 이르른 사람이 따로 있고, 수다원 과에 이르른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그거는 경전에서나 분류가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는 한묶음이라.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칩시다. 어떤 특징이 있을까?

성인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그리고 인제는 행도지견까지 다 이르렀어. 그래서 계속 도의 길만 가면 돼.

게으름 부릴 마음이 생길까? 절대 안 생깁니다. 그래서 게으름 부리고자 하는 마음은 아예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이미 내 마음에는 선한 마음만 계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가지고 욕심이 안 생기고 성질이 안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거는 마음속에만 있는 잠깐 비치는 것뿐이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결과로서 드러나질 때 그게 업이 되는 것이지 마음속에 있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다 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딱 느껴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 악한 말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를 비난하는 것들이 가능할까? 못하겠죠!

불교에서 중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뭐가 있을까?

(수행자 대답 : ---)

그렇죠. 그런 것들은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됩니다. 소소한 것은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죄를 저지를 수 있는 조건은 애초부터 사라져버립니다.

 

가끔씩 그런 걸 볼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세미나를 많이 참석들을 해보고 했는데 세미나에 가보면, 윤회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업에 대한 것을 부정하는 것, 이런 것을 참 많이 봅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저 사람들은 저것만 부정할까?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2500년 이어오면서 온 성인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백프로 그사람들은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미 밖으로 표출이 돼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불교에서 말하는 아주 중죄에 해당이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말을 하고 할 때는 굉장히 신중해야 됩니다.

 

그래도 지금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참 어렵기 때문에 이런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도와 과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돼야 되는 거고, 그리고 조금 더 내 생활방식이 내 마음이 바뀌는 쪽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그냥 세속적인 것에서 머물러 있을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특징들이 많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감출 수가 없다 하는 뜻입니다.

아까 얘기했죠. 수다원은 탐심과 진심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만하고 하는 것, ‘아, 내가 최고다’ 하는 그런 마음도 일어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본인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냅니다. “나 이거 참 잘못했어. 나 좀 참회하고 싶어.” 해가지고 참회를 하고.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정직한 사람만이 깨달음에 이를 조건을 갖추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본인의 상태를 드러내지 않고 본인의 잘못에 대해서 덮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해도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수다원은 아직은 탐심과 진심이나 자만이나 이런 것들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거는 어떤 걸까?

세 가지가 떨어지고 나면 일곱 가지는 감추어져 버린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감추어져 버린다는 것은 그게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게 탐심이 일어나더라도 ‘아, 저거 예쁜데’ 거기서 끝나버린다는 거지, 그 예쁜 걸 자기가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이 얘기를 하는 것으로 인해서 아까 황회장님 같이 ‘어휴, 쎄가 빠지게 해봐야 사람 바뀌지도 않고’

마음속에는 성질이 나더라도 그 성질이 ‘그래, 뭐 그거는 지가 알아서 할 일이지’ 밖으로 그 성질이 드러나서 다른 사람한테 하소연한다든지 이런 게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황회장님이 아직 수다원에 안 이르렀다는 거라.

 

그게 나머지 일곱 가지 뭐 무색계 선정에 들고 싶다든지 뭐 어쩌든지 하는 일곱 가지는 덮혀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게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보면 일래과나 불환과나 아라한과나 진배없이 동일하게 생활을 해나갑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누구 볼 때는 보고, 다 그렇게는 합니다. 일반 생활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한 예류과는 꼭 수행하지 않아도 도달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꼭 수행하지 않더라도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법 따라만 잘 살아가게 되면 도달이 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사실은 예류과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수행을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러냐하면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했거든.

 

"이 지구상에서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참 많은데 그 모든 사람들이 4가지 성인의 단계를 밟지 않고 된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네 부류의 성인들은 다 누구든지 팔정도를 따라서 된 자이지 그거 외에 다르게 된 자는 없다."

또 한편으로 다른 경전에는 보면

"누구든지 불교를 믿든 보시를 많이 했든, 뭘 했든 간에 누구든지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종교하고도 관계 없이."

그런데 다른 경전에는

"불교에서만이 오로지 네 부류의 성인이 가능하다"

종합해보면 어떻게 돼요?

"불교로 인해서만 성인이 가능하다."

다른 외도수행 아니면 다른 것들로 인해서 성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얘기와도 같습니다.

 

불교가 다른 거 하고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딱 이 성인의 부분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거는 다 다른 종교에서도 가능하고, 그러한 경지들이 있습니다.

4가지 선정수행 단계 뭐 불교에만 있습니까? 다른 데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전환시켜 줄 수 있는 거는 부처님 수행밖에 없다는 거라. 전환을 시켜줘양만이 성인이 가능하다는 거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러분들 법문 듣기 좋아해가지고 내내 법문만 듣고 살 수는 없죠. 집에 가야 됩니다. 가서 밥도 해야 되고 빨래도 해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합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르는 것은 오로지 불교의 수행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수다원은 그중에서도 특이하게, 물론 수행을 통해서 수다원에 이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기는 한데, 간혹 그거 없이도 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이 들면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수념 법수념 이라고 하는 것들이 따로 존재를 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경에도 그런 게 나오죠?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수다원에 이르른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얼마만큼 믿음을 가져야 될까? 딴 거 안 쳐다보는 정도가 되어야 됩니다. 전혀 내 사전에서 이것은 내가 가는 길에 조언으로 삼을 가치도 없고 들여다 볼 것이 못된다 하는 것들이 확신이 들어서 그냥 부처님 가르침 대로만 살아가게 될 때, 그리고 항상 돌아보게 됩니다.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하는 가르침에 맞는가 안 맞는가’ 자꾸 돌아보게 될 때, 그러면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더 확고하게 되고, 그리고 법에 대한 것, 상가에 대한 것들이 믿음이 확고하게 되면 그사람은 예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것도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쉽게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는 거라.

 

수다원은 그정도로 하고, 그런데 그뒤에 일래과부터는 수행 없이는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백프로.

 

그래서 오로지, 아까 얘기했죠.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른 상태에서 수다원에 이르르게 되고, 상카루뻭카냐나에 다시 또 돌아가서 그 상태에서 수다원을 통해서 바로 다시 일래과에 이르르고, 불환과에 이르르고 아라한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래서 상카루뻭카냐나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언제 갑자기 여러분들 앞에 탁 다가올지 모릅니다.

 

쉽게 얘기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흥분되든지 침체해져 있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밖에 대상이든 안에 대상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가볍고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누가 나를 칭찬한다, 누가 나를 욕을 한다, 그건 지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

그냥 나는 칭찬이든 욕이든 그냥 소리로서 그냥 듣는 것뿐이라.

그 상태를 계속 유지를 해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잘살려고 하더라도 이걸 해야 되는 거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도 이걸 해야만이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일단 단추를 끼운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면 수다원하고 일래하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까도 얘기했는데 별로 차이가 없다고 그랬죠. 감추어질 거 감추어졌고, 알아야 될 거 다 아는데 그런데 왜 일래에서는 수행이 아니면 안될까? 왜 그래요?

(수행자 대답 : 탐과 진을 엷게 한다거나 끊는다고 하는 것은 수행방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그거입니다. 그거! 와 똑똑하네.

수다원에서 끊어지는 번뇌들은 뭐였죠? 탐·진·치하고는 관계없죠! 전혀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번뇌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탐·진·치입니다. 살아가면서.

그럼 탐··치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지가 부단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이걸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아니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래과부터 해가지고 불환과까지 쭉 두 단계로 나눠놓은 것은 그게 점점 더 엷어지면서 없어지는 단계까지 두 단계로 상정을 해놓은 겁니다.

 

탐심이 엷어진 거하고 끊어진 거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겠죠? 많이 납니다.

그래서 일래과하고 불환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래과하고 수다원과도 천양지차입니다. 실제로는 번뇌가 별로 그사람에게 영향을 안 미치는데도 있는 거하고 없는 거하고는 차이가 납니다.

쉽게 설명하면 잠자는데 편안하게 잠을 자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잠을 자고 있는데 꿈을 막 꾸면서 잠을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어나고 상태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본인이 꿈을 꿨는지 기억을 못해요 대부분은. 그런데 몸은 피곤해. 그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행을 통할 거 같으면 적어도 잠을 잘 때 꿈이라고는 관계없이 그냥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가 편안하게 깨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실래요? 어떻게 하면 될까?

잠잘 때 마지막 숨을 쉬는 것이 뭐로 숨을 쉬다가 잠에 탁 드는지를 알고 잠에 들면 그사람은 편안하게 잡니다. 아주 편안하게 잡니다.

그러면 깨어날 때 처음에는 무슨 숨을 쉬면서 깨어나는지, 들이쉬면서 깨어나는지 내쉬면서 깨어나는지 처음에는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하다가 보면 편안한 것이 점점 더 강해지면 깨어날 때 천천히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아니고 '' 깨어나집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는지 내쉬는지 조차도 알게끔 됩니다.

그런 자가 됐다 그러면 그사람은 일래과에 이르른 거라.

쉽죠? 일래과 이르기.

 

(수행자 질문 : ---)

잡생각 하니까 그런 거지. 사고가 끊어져야 됩니다. 사고가 끊어진 상태에서 되도록이면, 사고가 끊어져도 안 되는 것이 뭐냐면 여러분들 대부분 저녁 먹죠?

저녁 먹으면 그거는 99.99프로는 안된다고 보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온 신경을 마음을 갖다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데 해도 이게 언제 잠이 드는지를 알아차리기 힘드는데 소화하는데 마음이 반쯤 가있다, 아니면 단 1프로라도 가있다? 그럼 안 될 수밖에 없는 거라.

소화하는데 몇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애요? (수행자 대답 : 4시간 정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스님의 경험으로 얘기하는데 8시간입니다.

8시간 동안은 내가 백프로 거기에다가 마음을 쏟을라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소화하는 기능에 마음이 일정 부분이 뺏긴다는 거라. 특히 그걸 알 수 있는 게 삼매에 들려고 할 때 그럴 때는 안 돼요. 그리고 삼매에 들더라도 어설프게 들고 내가 원하는데 깨어나고 원하는 조건에 인해서 깨어나고 하는 것들이 안 돼.

그래서 먹는 것이 참 중요한 부분인데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경제활동을 해야 된다니까 저녁을 먹기는 하겠지만 되도록이면 줄이라는 거라. 수행할려면 줄이라는 거라.

 

경전을 한번 다 보십시요. 깨달음에 이르른 시간들이 다 언제인지. 밤이나 새벽입니다. 한낮에 뭘 한다? 거의 없다는 거라. 물론 가끔은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같이 저녁에 자기 전이니까 그래도 점심 먹고 나서 여덟 시간이 안 지난 상태라. 눕는 상태에서 완전히 눕지도 않고 아라한에 이르른 상태가 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위장활동이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백프로 마음을 대상에다가 둘 수 있을 때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거라.

 

(수행자 질문 : ---)

그렇다고 여러분들한테 저녁 먹지마 하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조건이, 여러분들 수행을 할 때 집중수행의 필요성이 그래서 있는 겁니다. 집중수행을 할 때는 먹지마. 먹지 말고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래 되고 나면 불환과에 이르르죠.

그때는 탐욕과 성냄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수다원이 됐을 때 어떤 번뇌가 끊어진다는 것은 도의 상태에서 탁 압니다. 그거는 지가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 그걸 안 것이 아니고, 나중에 빳짜웩카나라고 해가지고 그걸 돌아보는 상태는 자동적으로 됩니다.

왜? 위빳사나가 좋은 게 뭐냐면 지금 현재의 대상을 항상 알아차리는 거거든.

그러면 도와 과에 이르르고 나면 그것을 돌아보는 마음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사마디는 그게 안 됩니다. 그게 차이가 굉장히 큰 차이가 나는데 돌아보는 상태가 딱 되면 돌아볼 때 ‘아, 이게 도에서 끊어졌구나, 남아있는 게 뭐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죠. 반조할 때.

사실은 지가 도에 이르렀을 때는 그게 끊어졌는지 어떤지는 모르는데 사실은 그때 끊어져.

 

그다음에 그러고 나면 아라한에 이르르게 됩니다.

아라한에 이르르고 나면 나머지 다섯 개가 떨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수다원에 이를 때는 탐·진·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뭐가 떨어져요? 자신의 견해, 견해가 떨어진다고.

그다음에 일래과 불환과는 탐, 진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러면 탐·진·치에서 무명이 남죠? 무명은 언제 떨어질까? 아라한일 때. 그게 쉽게 말하면 마나(māna)니 하는 것들이 다 그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것들이 이렇게 구분해보게 됩니다.

탐심, 진심이 떨어졌느냐 아니면 치심이 떨어졌느냐 에 따라서 그사람이 지금 어느 정도의 수행단계에 이르렀다는 게 구분이 되어간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아라한이 되면 좋죠? (예) 안 돼봤으면서 알아요?

그런데 그걸 목표로 하기는 해야 되는데 수행은 꼭 아라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때까지 쭉 설명한 것은 지혜에서 시작해서 지혜로 끝납니다. 얼마만큼 내가 지혜롭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수행의 정도를 측정을 하게 됩니다.

 

그럼 일반인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어떨까?

좀 더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기의 생각 고집 안 하면 그래도 뭐 수다원에 버금가는 생활을 해나가게 될 거고,

욕심 안부리고 성질 안내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불환과까지는 이르르는 상태에 도달할 거고,

진짜 게으름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을 해서 내가 해야 될 것들을 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아라한에 버금가는 생활들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삶이 곧 성인의 경지와 연결돼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이 성인의 종자입니다.

여러분이 성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태어나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고, 꼭 성인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성인에 버금가는 생활들을 얼마든지 이생에서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신도 부러워하지 말고 범천계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됩니다.

실제로 일래과부터는 여러분하고 별개입니다. 여러분하고는 별개입니다.

수다원에 이르러서 순차적으로 올라가가지고 아라한까지 이르르는 사람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수다원에 이르고나서 한참 시간이 걸려서 일래과에, 아니면 다음생에서 일래과에 이르른다, 여러분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이 됩니다. 불환과는 더더구나 여러분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왜? 존재하지도 않는 범천이라는 세계에서 아라한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여러분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표로 해야 되는 것은 수다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수다원은 뭐로 했어요? 수행을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려고 하는 사람도 수행할 때 마음은 내팽겨쳐버리고 대상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하지마. 그거는 안 하는 것보다도 못해. 차라리 그 시간에 선한 마음 더 일으켜라는 거라. 차라리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면서 선한 마음 일으키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거라.

마음이 왜곡돼 있는 상태에서 대상을 보면 대상을 지가 조작하게 돼있는 거지,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나? 못한다는 거라.

 

테크닉적인 것만 자꾸 할라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되는 거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하라는 거라.

 

그게 바로 이 지견청정에서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