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육근을 수행대상으로_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20240324)

담마마-마까 2024. 3. 25. 09:20

https://youtu.be/NH2TGxLWGCM?si=XjBH9EdSs3XcjaEM

 

* 육근을 수행대상으로_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20240324)

 

편하게 앉으십시요.

공부 좀 많이 했습니까?

대부분 한국 수행자들은 -소리 들리죠?- 마음먹기에 따라서 수행이 잘될 때도 있고 못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공부 좀 해보자하고 마음을 먹으면 대상이 잘 관찰되다가 어떨 때는 잘 관찰이 안 되어지고, 또 관찰이 잘 되어지다 보면 그것을 또 계속 좀 하고 싶다하는 마음도 생기기도 하고, 안될 때는 장애 먼저 좀 벗어났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가지기도 하고 그럴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수행이 잘되고 못되고 이렇게 굴곡이 지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이 마음먹는 대로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제대로 될까? 있는 그대로 관찰이 되어질까?

잘된다고 하고 있지만 어쩌면은 중요한 것은 다 놓치고 관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분하고 태국분들하고 차이가 뭐냐면, 물론 한국은 수행 여건이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좀 먹어야만이 수행을 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그런데 태국 같은 데는 그렇지는 않거든.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까운데 가서 하든지, 그리고 수행지도 받고 싶으면 큰스님들한테 언제든지 가서 받을 수가 있고 그러니까 크게 힘들이지 않고 수행들을 해요. 물론 그런 환경적인 차이도 있지만 수행을 대하는 마음 자체가 틀립니다. 두 나라를 보면.

 

우리는 그냥 뿌리 뽑듯이 그냥 확 달려들기도 하고, 그런데 저기 사람들은 수행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뭘 알고 모르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냥 지금 수행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 오히려 그런 마음이 진도가 빨리 나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번에도 보니까 그런 재가자들을 몇명 좀 봤어요. 그래서 수행을 지도를 하면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를 그대로 그냥 흡수를 해요. 그래서 , 참 재미가 있다하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랬는데, 조금은 차이는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수행에서 중요한 포인트들은 자꾸 놓치고 있는 거 같아가지고 그것을 오늘은 짚어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당시 때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법을 듣기만 해도 금방 수다원에 이르르고 깨달음에 이르르고 그렇게 하는 것들이 경전 곳곳에 많이 보입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사리뿟따존자와 목갈라나존자가 앗사지존자를 만나가지고 들은 법이 뭐였죠?

"우리 스승은 원인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래서 원인이 소멸하면 결과도 소멸해서 사라진다"하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거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어요? 안돼? 십이연기 다 배웠다며?

모든 법들은 다음에 일어나는 법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인데, 실제로는 간단한 부분이거든. 그래서 원인이 사라지고 나면 당연히 결과도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거라.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으니까.

 

그런데 두 분 같은 경우에는, 물론 그때 사회적인 분위기들도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영혼불멸 사상이나 아니면 유일신 사상이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팽배해가지고 종교적으로 좀 꽉 차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그게 머릿속에 뒤죽박죽이 돼서 그것이 맞는가하는 걸 탐구하다가 지칠 정도가 될 겁니다.

영혼이 상주하는 건지 그냥 뭐 특별하게 존재하는 진아라고 하는 게 있는 건지, 그렇게 계속 그것만 가지고 있다가 앗사지 존자의 이 말을 듣고 나면 획기적인 말로 다가와지는 겁니다.

그 얘기는 뭐라?

 

''하고는 관계없이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는 거라. 일어났으면 사라지는데 그거 연결고리만 있다는 것뿐이지. 그래서 그 한마디에 , 영혼이나 불멸이나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연속하는 것뿐이구나하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물론 그런 종교적인 분위기도 있었지만, 부처님 당시 때나 그 얼마 후에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보면 그런 연기(緣起)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안 될까?

오히려 그 당시 사람들보다 십이연기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을 건데, 그 당시에는 십이연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손을 한번 탁 들어봐봐요. 이게 거울이라고 칩시다이.

거울에 내 얼굴 딱 비췄어. 그리고 내가 얼굴을 이렇게 치우면 거울에는 얼굴이 안 비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요렇게 돌아오면 거울 속에 내 얼굴이 탁 비칩니다.

뭐 느낀 거 있어요?

거울은 나를 비추기 위한 거울이든 다른 걸 비추기 위한 거울이든 거울은 거울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맞죠? 그걸 거울의 '고유한 감성물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스님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귀는 귀의 고유한 역할들을 하고 있습니다. 스님 소리가 있든 없든 간에. 그런데 스님 소리가 아니고 누군가 저기서 탁 소리를 치면 그 소리가 또 들리게 됩니다. ‘귀의 감성물질이 있는데 어떤 때는 들리고 어떤 때는 왜 안 들릴까?

 

다시 한번 해볼게요. 스님이 ''를 해볼테니까 ''를 그대로 한번 소리를 귀로써 한번 들어보십시요.

!”

'' 들리는 순서를 알아챈 사람 있어요? 없죠? 그러면 다시 해보겠습니다.

스님이 ', , '를 할게요. 순차적으로 얘기하는데 '' 할 때는 귀로써 듣고, '' 할 때는 호흡을 관찰하고, ''를 할 때는 다시 귀로써 한번 들어보십시요. ''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 시작합니다이.

!”

!”

!”

''가 안 들리는 사람 있어요? 아무도 없어? 그럼 오늘 법문 여기서 끝.

''가 안 들려야 되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수행도 꼭 마찬가지 연기와 똑같습니다.

사실은 그걸 현대적으로 풀이해 놓은 거뿐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귀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귀가 있고 소리가 있고 그것이 접촉이 되면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소리 들릴 때 그냥 소리만 탁 들리는 게 아니죠?

들리고 나서 그다음엔 어떻게 돼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를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하고 나면 어떻게 해요?

더 듣고 싶다든지 더 듣기 싫다든지 그렇게 될 거고,

아니면 마음이 예리하게 깨어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기도 할 거고.

그건 들리고 나서의 상황은 조금씩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그거는 이해가 되죠?

 

그러면 그 소리가 들렸을 때 어떤 작용들이 있었을까?

어떻게 해서 조금 전에 스님이 ''라고 했는데 ''라고 인식했을까?

어떻게 인식했어요?

뭔가 이것은 ''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라고 인식을 했겠죠!

그러면 소리가 탁 접촉하고 나서 ''라고 알 때까지는 그냥 바로 ''라고 알 수는 없지 않을까?

뭔가 여러 과정들이 틀림없이 있을 건데 그걸 놓치고 있다는 거라.

 

그래요. 그건 놓쳤다고 칩시다. 그건 아비담마를 보든지 아니면 실제 경험을 통해서든지 여러분들이 경험해야 되는 겁니다.

뭔가가 접촉되고 나서 그것들이 부딪치고 나서 그걸 저장할 때까지 어떤 인식과정들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경험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망상이 없으면 가능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면.

뭘 할려고 한다든지 용을 쓸려고 하지말고 그냥 그대로 들을려고만 자꾸 노력하면 그 소리의 과정들을 이해를 합니다.

그까지 몰랐다고 칩시다. 그까지는 봐주겠어요.

 

그러면 ''라고 들었다. ''라고 듣고 나선 여러분이 어떻게 해요?

''가 얼마나 짧을까?

여기서 대부분 수행자들이 착각을 합니다.

느낌들이 분명히 일어났는데 그 느낌들이 오래도록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보면 아주 짧은 찰나거든. 그거는 이미 일어나고 사라지고 없는 상태인데 나는 계속 아픔을 느끼는 거라.

 

계속 그 ''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 거라. 왜 그럴까?

''는 이미 없어요. 과학자들이 소리가 1초에 340미터를 간답니다.

그럼 이미 나를 통과했을 때는 아주 짧은 찰나였고 나머지는 이미 저만큼 가고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나는 계속 ''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뭐가 있기에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라고 인식하는 걸 1초 동안에 했다고 치자. 그럼 1초에 340미터를 가는데 나는 차지하는 공간은 1미터도 안 돼. 그럼 339미터는 ''가 아니고 ''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망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망상하고 있다는 거를 알면 이미 그거는 놓쳐버리고(놓아버리고) 다른 걸 관찰을 했어야 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는 거라.

 

인식하는 과정도 적어도 여러 과정들을 겪어서 ''라고 인식을 하게 되고,

''라고 인식하고 나서도 아주 짧은 찰나에 지나고 나서, 다른 인식과정들이 참 많이 일어나야 되는데 못 일어나고 있다는 거라.

뭔가를 알기는 알았는데 앞뒤를 다, 그냥 지금 현재 있지 않고 그냥 놓쳐버리고 살고 있다는, 수행을 하고 있다는 얘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고 있습니다.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가 대부분 3.34초 걸린다고 합니다. 3.34초 동안 얼마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많은 거라?

조금 전에 사리뿟따 존자 같이 앞에 원인은 뒤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앞에 거는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가 됩니다. 다시는 나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결과도 다시 원인이 되어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고 그거는 사라져버립니다.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지,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아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입니다.

 

육근을 통하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여러분들은 힘이 듭니다 지금은.

부처님 당시 때는 육근을 통하지 않고도 연기법으로 충분히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안·····의라고 하는 여섯 가지를 통해서 그 성품들이 끊임없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성품이라는 것들, 그리고 그속에는, 그속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은 괴로운 느낌도 있고 즐거운 느낌도 있고 무덤덤한 느낌도 있는데, 그것까진 여러분들이 알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 느낌들이 있다는 것, 그 느낌들이 변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느낌들도 실제로는 보면 업하고 관계가 굉장히 많이 있는데, 어쨌든 그 느낌들도 변하고 있다는 것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원인·결과인 거뿐이지 어떤 ''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입니다.

이 세 가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안·····의라고 하는 여섯 가지를 통하지 않고는 지금은 알 방법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어떻게 하라고 그래요?

"보면 보인다 하고 알아차려라. 들리면 들린다 하고만 알아차려라."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착각합니다. 들리는 게 계속 들리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보이는 게 계속 보이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계속 보이면 무상을 어떻게 알 거라?

보이는 거는 찰나밖에 안 보이는 겁니다.

들리는 것도 찰나밖에 안 들리는 겁니다.

이미 그거는 지나가버렸고 다른 것들이 들리고 보이는 건데, 계속적으로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수행은 힘을 좀 빼고 한번 해보십시요.

너무 수행 대상에 자꾸 다가갈려고 하지 말고 편안하게 그냥 변하는 성품만 본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우리의 인식 과정은 각자는 각자의 역할들을 합니다.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들을 때 인식하는 것도 오온으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된장국과 같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된장국에는 뭐가 들어가죠? 된장이 들어가고 두부가 들어가고 뭐가 들어가고 뭐가 들어가고 할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어서 됩니까? 물이 있어야 될 거 아니라? 두부는 두부인 것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두부가 될려면 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다음에 양파가 들어갔으면 양파도 익을려고 할 것 같으면 물이 있어야 되고, 양파의 역할이나 두부의 역할이 드러나지게 하는 것은 물이 가능한 겁니다.

 

···식에 식()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물과 같은 겁니다.

모든 것들은 그 고유의 기능을 알도록 하는 것들을 역할을 해주는 것이 식()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같이 어울려져서 같이 일어나지고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인식하는 것은 그와 같다고 이해를 하면 조금 더 수월할 겁니다.

 

어차피 오온은 동시에 일어나서 동시에 사라진다고 할 거 같으면 그냥 그건 내버려두라는 얘깁니다. 수행이 잘될 때는 그걸 가지고 수행의 대상을 삼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이 많이 깊지 않으면 여러분들 ·····의라고 하는 것들로 가지고 수행대상을 잡으라는 얘깁니다.

 

조금 더 편안하게 수행을 해보도록 하십시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생각을 그렇게 해보십시요.

어떤 경우든지 찰나 이상 머무는 것이 없습니다. 금방금방 사라집니다.

 

스님이 사고 나면서도 그걸 경험을 했습니다. 전에 옛날에 스리랑카에 있을 때도 그런 경험을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이 하나씩 하나씩 일어나는 것이 누가 옆에서 탁탁 쳐주듯이 하나가 일어나고 꺼지고 나면 그다음에 또 일어나지는 거라.

그래서 "팽이돌기와 같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팽이를 탁 쳐주지 않으면 팽이는 꺼져버립니다. 꺼질 때 정도 되면 또 누가 탁 팽이를 쳐줘.

식이 일어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그것들을 인식할 때는 그와 같은 식들이 참 많이 일어나집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냥 다른 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나면,

마음은 그것들이 계속 있도록 바라는 마음이 틀림없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것들도 조심을 해야 되는 겁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고,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나서 그것들이 변하는 성품들이 유지가 되도록 하는 것들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지 않으면 스톱!

수행 지금 잘못하고 있다하고 생각을 하고 스톱을 하고, 다시 고요하고 편안하게 하고 나서, 수행 대상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찰나 간에 그러한 현상들을 보면 , 부처님 당시 때의 제자들도 이렇게 원인·결과로써 알았구나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지금은 그것보다도 여러분들은 더 훨씬 힘듭니다.

단지 그냥 원인·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속성들을 알아야 되는데, 어떡하노?

경전에는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요소들을 완전하게 아는 것은 부처님이나 부처가 되기 위한 보살들만 가능한 얘기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다르다는 것은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깨달음에 다가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왜 깨달아야 될까?

왜 수행합니까?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려고? 물론 그것이 정답입니다. 벗어나면 좋겠죠. 그런데 못벗어나면 어떡할 건데? 그냥 다음 생을 바라고 다음을 바라고 살거라? 그건 너무 안이하잖아?

이생에서라도 빨리 깨달음에 이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됩니다.

 

편안하게 수행을 할려고 하지 말고, '죽음이 바로,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하는 그런 강박관념을 가지고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망상이 있을 때는 그런 급한 마음이 일어나야만이 망상이 덜 일어나고 안 일어나집니다.

망상이 없으면 그게 보입니다. 당장 죽을 상황인데 망상이 일어날 여유가 있어요?

망상은 일어날 여유가 없어도 생존욕구는 일어납니다. 그거라도 일어나서 , 이게 내가 살려고 하는 생존욕구였구나하는 것들을 아는 것만 해도 큰 발전이라는 겁니다.

 

물론 생존욕구가 있어가지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바르게 대처하지는 못하는 것은 있습니다. 그럴려면 여러분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집착하는 것들을 자꾸 내려놓도록 해야 됩니다. 뭘 그리 아둥바둥 살려고 해? 뭘 그리 욕심내고 뭘 그리 화내가면서 뭘 그리 남을 헐뜯어가면서 살려고 해?

 

무상한 성품에는 그 어떤 것도 해당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누누히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무상하다고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것들은 무상한 대상이 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화가 잠시 일어나더라도 , 내가 또 부처님 말씀 까먹었네하고 바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수행에서 또 내가 붙잡고 있고 내가 뭔가를 달려들듯이 하고 있으면 , 내가 또 마음으로서 욕심부리고 있네하고 마음을 다시 편안하게 시작을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수행들을 조금 더 열심히 하도록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육근에 대한 것들을 얘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