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7청정에 이르는 길 2(심청정) -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담마마-마까 2023. 12. 8. 11:49

https://youtu.be/XNixr75sYDA?si=z6Zm5kT5oHIgL8tU

 

* 7청정에 이르는 길 2(심청정)

 

오늘은 두 번째 시간, 심청정 부분입니다.

칠청정은 계·정·혜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랬죠! 그래서 계를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는 심청정으로 넘어갈 수가 없고, 심청정이 되지 않으면 혜청정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마음은 본래 청정합니까? 청정해요? 그런 것은 없죠! 그러면 계도 안 지켜도 되고 뭐, 마음을 청정히 하지 않으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어서 수다원부터 아라한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사마타(samatha)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 몰입을 하는 거죠? 그래서 선정을 얻기는 아주 쉽습니다. 아주 쉬운 거는 아니죠? 열심히 노력을 해야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은 사마타를 얻는 게 목적이 아니죠? 뭘 얻는 게 목적입니까?

(수행자 대답 : ---) 아니 그건 나중의 일이고.

마음의 청정을 얻어야 됩니다. 마음의 청정을 얻어야만이 지혜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의 청정은 뭘 의미하는 거라? 사마디(samādhi)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삼매에 들지 못하면 위빳사나 수행을 못한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죠! 우짜노? 삼매를 경험해 본 사람이 없을 건데. 아이러니죠 이게.

어쨌든 심청정이 돼야만이 견청정이 되고, 그다음 청정이 열리고 해서 혜청정으로 쭉 연결이 되는데 그렇다고 사마타 수행을 통해가지고 네 가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거는 또 안 되고, 그런데 심청정은 사마디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매에 들지 않으면 다음에 혜청정이 일어날 수가 없는데,

 

사마디(samādhi)는 어떤 걸 얘기합니까?

하나의 대상에 팍 몰입해가지고 그 대상에 폭 빠지는 걸 얘기하죠? 쉽게 말하면. 그래서 그 대상만이 오롯하게 존재를 하는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 잘하는 관세음보살을 한다고 칩시다. 그냥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쭉 하면 관세음보살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이죠? 어쨌든 명칭이라고 하는 관념입니다. 석가모니불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명칭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걸 대상으로 해가지고 하나의 그 대상에 오롯이 몰입해가지고 마음이 딱 거기에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서 그 묶여있는 상태가 좀 더 깊어지는 것, 또 더 깊어지는 것, 이런 식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 1선정, 2선정 쭉 진행이 돼나가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위빳사나(vipassanā)는 어떤 거죠?

관념적인 건 없죠? 수행 대상 자체가 다르죠! 실재하는 대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변하는 대상이 돼야만이 위빳사나 수행대상으로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변하는 걸 가지고 삼매에 들 수 있습니까? 그럼 우짜노? 삼매에 못들면 견청정이 안 이루어지는데 어짜노? 어떻게 해야 돼요? 빨리 답을 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자 대답 : ---)

나는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는데, 매순간 사띠 한다구요? 그거는 삼매에 들은 게 아니잖아. 매순간 사띠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삼매에 드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자 대답 : ---)

사띠 없는 상태에서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이란 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을 오롯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마디에 들 수도 없고 위빳사나 수행도 할 수 없고, 그거는 당연한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보통 여러분들 사마디에 들 때는 어떻게 해가지고 들어요? 변하지 않는 대상들이나 관념들을 가지고 하니까 대부분 앉아서들 사마디에 들죠? 걸어가면서 사마디에 드는 사람 있어요? 밥 먹으면서?

근데 위빳사나는 어찌 하노? 움직이는 대상을 가지고 해야 되는데. 걸어가면서도 해야 되고, 밥 먹으면서도 해야 되고, 또 호흡을 관찰하더라도 호흡 이놈이 변한단 말입니다.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그러면 사마디가 형성이 안 되는데. 사마디가 형성이 안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계·정·혜에서 혜로 넘어가지지 못합니다.

 

그럼 어느 만큼 사마디가 형성이 돼야 될까?

이게 관건입니다.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러면 내가 사마타 수행을 해가지고 삼매 맛을 보고 나서 삼매에서 탁 나오자마자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안 되겠나? 그렇게 할 수가 있겠죠.

그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죠! 왜?

무상·고·무아를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지혜가 일어나지는데, 무상·고·무아는 어떤 성질입니까? 변하는 성질입니다. 불만족스럽다는 거라. 불만족스러운 거는 만족이 있어야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을 거 아니라?

그다음에 '자아가 있는 거'라는 개념의 반대인 게 '나라고 하는 것들이 고정된 실체라는 것이 없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건데,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죠. 그게 쉽게 말하면 지맘대로 변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거는 쉽게 말하면 사마타 상태에서는 알 수있는 방법이 없죠? 사마타는 하나에 팍 몰입돼가지고 묶여있는 거니까! 그러면 무상·고·무아를 알아야만이 도와 과에 이르르는데 그럴려면 사마타(사마디) 상태에서 나와야만이 무상·고·무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공양 올릴 때 가장 공덕이 많은 상태가 어떤 상태일 거 같애요?

부처님이나 아라한들한테 공양을 올리면 가장 공덕이 많기는 하겠죠. 그런데 그런 예류과부터 아라한까지 그런 도와 과에 이르지 않아도 저 사람한테 내가 밥 한 그릇 보시하면 나한테 공덕이 참 많이 오겠다 할 때는 어떨 때일 것 같아요?

삼매에 들었다가 탁 나온 사람에게 보시하는 경우들이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인의 경지를 제외하고.

그마만큼 사마디라고 하는 것이 결코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출가한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사마타 수행도 병행을 합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해서 삼매의 체험을 어느 정도 해보고 나서 다시 위빳사나로 돌아오는 경우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게 각 스승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초선정에 이르고나서 그냥 위빳사나로 바로 전환해가지고 위빳사나 수행을 쭉 해라" 하는 스승도 있고, 또 어떤 스승들은 "사선정까지 경험을 다 해봐라. 그러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본격적으로 전환해라." 하는 경우들도 있고 그거는 스승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아마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정확하게 위빳사나 수행에 들려면 초선정을 경험하고 나서 가능하다", "사선정을 경험하고 나서 가능하다" 이렇게 갈리는 것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사선정까지 다 경험해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지금 여러분들 정신상태로는 평생해도 안됩니다.

왜? 사마타 선정에 들려면 다섯 가지 장애라는 것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선정에 들 방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났는데 그 장애들을 극복을 해가지고 넘어서지 않으면 정확하게 위빳사나 수행을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거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장애 없이 수행할 수 있어요?

온갖 망상 다 부릴 거고, 온갖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성질 다 내고 있을 거고, 그게 없어야만이 가능한데, 그거 없애는 게 쉬운 것이 아닐거라는 거라. 그래서 계가 중요하다는 거라.

계를 잘 지켜서 마음이 어느 정도 선한 쪽으로 자꾸 움직이도록 만들어두지 않으면 언제든지 요밑에 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올라온다는 거라. 그래서 계는 잘 지켜야 됩니다. 어쨌든.

분별해서 하려고 하지 말고, ‘나는 술을 조금만 먹을란다’ 그런 거 없습니다 이! 지킬려면 무조건 오계는 정확하게 다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사선정까지 다하고 할려면 아마 그냥 출가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거라. 재가자로서는 해가지고는 참 힘이 드는 부분이다 하고 스님은 개인적으로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초선정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를 수 있을 거 같거든.

 

초선정은 어떤 상태입니까? 여기 경전 문구를 그대로 가져왔는데,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의 가라앉음으로 인해서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이 집중된 상태가 되어 욕구들로부터 벗어나고 불선법들로부터 벗어나서, 일으킨 생각이 있고 지속적인 고찰이 있어 멀리 벗어남에서 생긴 기쁨과 행복으로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문다."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게 관념적인 대상이든 아니면 실재하는 대상이든 간에 그 대상에 오롯하게 마음이 딱 가있어가지고 그게 변하는 거면 변하는 대로 그대로 쭉 마음이 따라가게 되고, 안 변하면 안 변하는 대로 계속적으로 사띠가 일어나서 그것들을 관찰하고 있는 상태가 되면 그속에는 욕구 욕심이라고 하는 부분도 없을 거고, 그 대상에 대해서 오롯하게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서는 되게 좋거든. 그래서 기쁨과 행복 같은 것들이 일어나는 상태가 쭉 연결되는 거라.

그 상태를 초선이라고 하는데, 초선은 하기 쉽겠죠 그러니까. 어쨌든 어떤 대상이든지 그 대상에 마음을 딱 갖다 붙여가지고 그것들을 그대로 그냥 사띠만 쭉 지속적으로 하면 됩니다.

 

! 한번 해봅시다.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십시요.

코끝에다 손을 한번 대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쉴 때 들이쉼하고 알아차리고 내쉴 때 내쉼하고만 알아차립니다.

느낌도 알려고 하지 말고 생각을 일으킬 필요도 없이, 이거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 여러 가지 망상들도 떠올리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코끝에다가 딱 손을 대고 들이쉬면 들이쉼하고 알아차리고 끝나고 나면 숨이 내쉬어지면 내쉼하고 알아차리고, 한 열 번만 반복해보십시요.

들이쉼’ ‘내쉼’ ‘들이쉼’ ‘내쉼계속 한번 반복해보십시요.

 

됩니까? 뭐 삼매에 들어버렸나? 말들이 없노.

(수행자 대답 : ---)

아, 그것도 그걸 번호를 세고 있었구나. 이미 망상을 하고 있다는 얘기라. 세고 있다는 것은.

그런데 어떤 사람은 ‘들이쉼’ ‘내쉼’하고 알아차리고 있을 때 스님이 열 번이 되기 전에 “됩니까?” 하고 물어봤을 때 안 들리는 사람들이 혹시 있었습니까? 있었어요?

있었으면 그사람은 초선정에 든 겁니다. 쉽죠? 초선정!

왜 그럴까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는데 한번은 안되고 조금 어느 정도는 지속되는 상태가 쭉 연결됐을 때 소리도 안 들리고 내가 뭐 다른 거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딱 단순하게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할 것 같으면 그걸 뭐라고 그럴까요?

다섯 장애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닌데, 그 순간에는 다섯 장애가 없죠? 의심하는 게 있었어요? 아니면 내가 게으름 부릴려고 하는 게 있었어요? 아니면 욕심부리는 게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고 하나도 없었거든.

 

어느 정도 일정한 시간 동안에 그게 쭉 이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삼매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카니까 사마디(khaṇika samādhi)'라고 얘기합니다. '찰나삼매', '순간삼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 더 짚어봅시다.

어쨌든 찰나삼매도 삼매의 종류에는 듭니다. 근접삼매의 일종이니까.

삼매에 들었는데 삼매에 들은 걸 체험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이걸 무상·고·무아로 관찰할 수가 있는 거라.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쉬는 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데, 처음에는 숨을 들이쉴 때 , 시원한 느낌이 있네내쉴 때 텁텁한 느낌이 있네두 가지는 다른 느낌이죠? 두 개의 느낌이 다른 거를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러면서 또 숨을 들이쉬는데 그냥 쭉 들이쉬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앞에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쉼하고 알아차린 거 하고 뒤에 들이쉴 때 들이쉼하고 알아차린 거 하고 똑같은 게 아니다 하는 걸 알았다, 그러면 조금 더 진행이 돼나가고 있는 거라.

쉽게 말하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 들이쉬는 것과 내쉬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변하고 있다는 무상한 성품들을 실재하는 것들을 본 겁니다.

완전한 건 아니지만 ‘아, 이게 다르네’ 하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런데 만약에 조금 더 나아갔으면 어떻게 될까?

들이쉬는데 들이쉬는 것은 누가 들이쉬어요? 코가 들이쉽니까? 코가 지혼자서 지맘대로 들이쉽니까? 내가 들이쉽니까? 그거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은 살아있으면 어차피 들이쉬게 됩니다. 그거는 생명현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몸의 현상입니다. 몸의 현상으로서 들이쉬는 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들이쉰다고 알았거든. 그건 뭐가 안 거라요? 마음이 안 겁니다. 몸이 안 게 아니고. 몸은 저절로 지가 들이쉬어지는데 내 마음이 들이쉰다고 아는 겁니다. 그럼 만약에 ‘육체적인 현상인 들이쉬는 현상과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의 현상을 구분을 할 수가 있었다그러면 아, 이거는 진행이 많이 된 거라 수행이.

요까지가 쉽게 말하면 심청정에 해당이 됩니다.

쉽죠! 어려워요?

 

Q. 수행자 질문 : ---

A. 스님 답변 : 다른 거 오력 다 계산할 필요 없고 하나가 힘이 약하면 하나가 강해지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는 경전에서 그냥 공부만 하면 되고, 실제 수행에서는 그거 중요한 거 아닙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할려는 마음이 있었고, 거기에 집중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분명히 삼매에 들었다든지 아니면 그것들을 분명하게 따라가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노력과 집중과 사띠가 있으면 삼매에 드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오력을 갖다가 균형을 맞추니 다른 신심과 지혜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그거는 나중에 되돌아봤을 때 잘못했을 때 ‘아, 이게 과했구나, 말았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지,

 

계를 지키는 데도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음을 청정히 하는 데는 계를 지키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계속 유지될려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열번은 해야 된다고 했죠. 지속되는 상태를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 3개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마디에 드는 때든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을 계속 하는 때든 이거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거만 생각하면 되는 거지 다른 거는 염두에 두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됐습니까?

 

자! 그래서 지금은 사마타 수행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게 아니죠?

스님이 분명히 처음에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칠청정이라고 얘기했죠!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방법으로 칠청정이 돼야 될 거 아니라!

그런데 심청정은 사마디라고 했는데 아까 얘기했지만 "카니카사마디 찰나삼매도 심청정의 영역에는 속한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거는 경전의 구절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불교역사에서 논쟁을 통해서 이미 증명이 된 겁니다. 더 이상 토달지 마십시요. “경전 어떤 데는 본삼매와 근접삼매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찰나삼매 없는데 왜 그걸 얘기합니까?” 그런 소리는 안 해도 됩니다.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삼매를 경험해야만이 견청정으로 넘어가지는데, 어디까지 경험을 해봐야 될까?

예. 아까 얘기했잖아. 계·정·혜에서 정이 이루어져야만이, 사마디가 돼야만이 혜가 될 거 아니라! 견청정부터 해가지고 나머지 도비도지견청정이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전부다 혜부분에 해당이 되잖아!

어디까지 해야 돼요? 조금 전에 한 거 그겁니다. 그냥 호흡 그냥 쭉 지속적으로 해나가기만 하면 이미 삼매를 경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상태로 계속 수행을 해나가면 됩니다.

물론 힘은 약하겠지! 하다가 또 막 장애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하기 싫은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별스러운 것들 다 하겠지만 그때마다 다시 자기 마음을 붙잡아서 다시 가져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견청정이 되기 전에 심청정이 될려면 적어도 찰나삼매를 지속해나가면 됩니다. 찰나삼매 자체가 초선정입니다.

초선정은 적어도 어느 정도 경험되고 나서 ‘아, 이게 하다 보니까 사띠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는데 안 되고 자꾸 끊어지네, 조금 더 나는 깊은 삼매에 들겠다’ 할 것 같으면 초선정이 아, 이게 완전하지 못하구나 해서 2선정으로 넘어가지기도 하고 그렇게는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사실은 사띠의 힘들도 강해지기는 합니다.

 

지금은 겨우 그냥 마음을 그 대상에다 실재하는 대상에다 갖다 붙이고 있는 상태이긴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마음은 청정한 상태를 유지해나간다 하는 겁니다.

 

경전 곳곳에 '사띠 삼빠자나(sati sampajāna)'라는 것이 나옵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면 이 두 가지가 쌍으로 일어나야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하고 그렇게 나옵니다.

이게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조금 전에 했던 호흡 열번 하고 있는 게 사띠 삼빠자나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사띠(sati)는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 내쉬면 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이고 탁탁 끊어지는데, 삼빠자나(sampajāna)는 그다음에 또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그게 끊어짐 없이 쭉 지속해나갔을 때는 삼빠자나가 일어난 겁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꼭 굳이 수행을 앉아서만 할 필요가 전혀 없겠죠.

걸어가면서도 하고, 밥 먹으면서도 하고, 오만 것에서 행주좌와에서 다 할 수가 있습니다. 말할 때도 할 수가 있고, 말을 들을 때도 할 수가 있고, 모든 게 가능해져버립니다.

그런데다가 그렇게만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 자체가 그렇게 쭉 해나가 보니까 아, 진짜 잡생각이 없어지고 계속적으로 해나가는데 알아차리는 방식이 조금씩 변화되는 걸 알게 됩니다.

조금 전에 걸어갈 때는 발을 ‘왼발, 오른발’하고 왼발이면 ‘왼발’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오른발이면 ‘오른발’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발을 들어올렸으면 ‘들어올렸다’고 알아차리고 내려놓았으면 ‘내려놓았다’고 알아차렸는데, 계속 하다보니까 다른 게 보이거든.

 

! 한번 같이 또 따라해봅시다. 위빳사나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손바닥을 한번 딱 대봐봐요. 맥박 뛰는 소리가 들립니까?

손바닥이 안 되면 이게 약한 사람은 손바닥을 심장에다가 한번 대봐도 괜찮습니다. 뭔가 맥박 뛰는 소리가 들리긴 합니까?

어떤 사람은 맥박 뛰는 소리가 탁깍 탁깍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맥박소리가 탁깍 탁깍할 때 뭔가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느낌을 ‘아, 이게 따뜻함이 있구나’ 손바닥이든 심장 쪽이든 ‘따뜻함이 있구나’ 아니면 ‘조금 무거운 느낌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알아차리고 있을 동안에 내 마음이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보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동안에 이게 그냥 맥박이 뛰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맥박 뛰는 것에도 분명하게 단계들이 있다는 것들을 알아차립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수행이 진행되면 이렇게 방법들이 조금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그 모든 게 수행대상이라는 거라. 실재하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수행 대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뭘 해야 될까? 어떤 걸 해야 돼요?

위빳사나를 하는데 조금 전에 내가 여러 가지들이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 여러분들은 뭘 해야 돼요?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이 뭔지만 알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지금 현재 내가 안 것이 뭔지만 알면 됩니다.

만약에 따뜻함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따뜻함’이 지금 현재 일어난 겁니다. 심장 맥박을 안 것이 아니고 ‘따뜻함’을 안 겁니다. 그러면 ‘따뜻하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심장이 따뜻하다고 알고 있는데 마음이 ‘아, 좋네’하고 알아차렸다고 할 것 같으면 ‘좋다’고 하는 것이 지금 현재 여러분들의 관찰대상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법 어떤 것이 일어나더라도 두 가지는 동시에 할려고 하지 말고 하나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라.

느낌이면 느낌, 몸이면 몸, 마음이면 마음, 그다음에 여러 가지 현상들이면 현상!

 

이 하나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나면 그것은 어떻게 돼요?

따뜻함이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죠? 일어났으면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왜 태어났을까? 죽기 위해 태어난 겁니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Q. 수행자 질문 : ---

A. 예. 맥박 뛰는 소리 때문에? 왜 그러냐하면 지금 현재 내 관찰대상이 이게(손) 아니고 여기(배)잖아. 여긴데 이 맥박뛰는 소리가 나중에는 굉장히 크게 들리거든. 그러면은 이것(손)이 관찰대상이 딱 돼버리면 좋은데, 마음은 요기(배)에 자꾸 갈려고 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손가락(엄지와 검지)을 붙이지 마요. <좌선 수행시 손을 두는 방법> 예. 되도록이면 손가락 끝이 다 맞닿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거는 수행의 테크닉적인 부분이고,

 

어쨌든 "···법이 여러분들에게는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게 수행대상이고 사띠가 머물러야 되는 곳이다" 하는 것만 분명하게 알도록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상태를 쭉 이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는데 느낌만 계속 알아차리고 싶다, 절대 그렇게 안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느낌도 사라지기 위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사라지고 나면 뭔가 또 다른 게 일어납니다. 그것이 꼭 느낌이라고 보장을 못합니다.

강하지 않으면 그것을 내가 사띠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지금 심장 뛰는 움직임이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게 사띠의 대상이 돼버리는 거라. ‘어! 심장이 뛰고 있네’ 하는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 되는 거라.

 

물론 각각의 선원에서는 선원 나름들의 방식대로 너는 느낌에 대한 관찰만 해라”, 안 그러면 너는 마음에 대한 관찰만 해라이렇게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기본 조건이 뭐냐면 내가 신···법을 분명히 알았을 때 그게 가능한 것이지, 신수심법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만 관찰하면 자꾸 사띠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처음부터 여러분들은 그걸 구분하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지금은 어차피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을 그 대상에다가 붙잡아 와가지고 강제적으로 그걸 자꾸 사띠할려고 알아차릴려고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는 자동적으로 될 때는 뭐가 문제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무조건 지금은 강제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상태가 쭉 이어지더라도 사실은 초선정은 좀 불완전하죠?

선정 같지도 않고 내가 장애들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뭔가 개운하지는 않은 느낌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더라도 항상 뭔가 떨리고 있는 것들이 느껴집니다.

배를 보더라도 호흡을 보더라도 뭔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부드럽게 들이쉬고 내쉬어지는 것이 아니고 뭔가 떨림이 있으면서 들이쉬고 내쉬어지고 하는 것들이 느껴집니다. 사실은 그게 초선정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 이거 좀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면 사마디 수행으로 전환해가지고 그다음부터 2선정으로 넘어가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다음 선정으로 넘어가지기 위해서는 그게 숙달되어졌을 때, 그리고 그것이 ‘아, 이게 끝이 아니구나’ ‘ 아, 나 조금 더 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서 이걸 버려버렸을 때 그다음으로 넘어가지게 되는 거라.

버리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는 절대 안 넘어갑니다. 좋은데,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넘어가질 거라? 그래서 선정을 좋아하는 습관들을 가지면 안됩니다.

사람들이 자꾸 새로운 거 뭐 탁 경험해 보고 하면 그거 좋아갖고 매달려버립니다. 그러면 그다음 단계 못 넘어가집니다.

수행에서 도와 과를 이를 때는 번뇌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고 그러죠? 버려버린다는 겁니다. 하나씩 자꾸! 내가 가지고 있는 번뇌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버려야만이 그다음 단계를 버릴 수가 있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안 넘어가진다는 거를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판단하기에 이렇게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계속 쭉 지속하는데 ‘아, 너무 힘들다’ 할 것 같으면 일단 초선정은 경험해야 합니다.

초선정을 경험하고 나서 그것이 어느 정도 잘 숙달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마음에서 ‘아, 좀 더하고 싶다’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 자동적으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러는 거지 그냥 무턱대고 초선정에서 탁 나와가지고 2선정으로 넘어가지고, 2선정에서 탁 나와가지고 3선정으로 넘어가지고, 이런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다섯 가지가 자재가 될 때 그다음 단계의 선정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고 경전에서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스님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거든요.

처음에 수행을 하는데 선정에 들어요. 그런데 선정에 드는데 깨어날 줄을 모르는 거라. 아무리 옆에 불러도 모르고 그냥 그 상태에 그냥 있게 되는 거라.

왜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좋아가지고 그냥 머물고 있는 거라. 사띠는 분명하게 있어가지고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데, 행복이면 행복을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구분할 줄도 압니다. 행복의 크기도 구분하게 되고 행복의 느낌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되고 하는데, 좋으니까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누가 불러도 모르고 누가 꼬집어도 모르게 되는 상태가 되는 거라. 나중에 그걸 알았어요.

 

스승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수행에서 진척이 안 될 때는 그 대상을 붙잡고 있다.”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붙잡고 있으면 나는 그다음 단계로 못넘어가집니다.

(수행자 질문 : ---)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그냥 놔버린 상태에서 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돼. 왜?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은 것을 쭉 따라가게 되는 거라.

그거는 뭐 여러분들이 자꾸 경험해보십시요.

그리해도 어쨌든 자꾸 하다 보면 인제는 놓는 법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특정한 소리에는 내가 분명히 삼매에서 나오는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그(선정) 상태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될까?

사띠가 분명하게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알아요?

만약에 2선정에 들었다가 2선정에서 내가 탁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걸 어떻게 알아요?

(수행자 대답 : ---)

당연히 사띠 삼빠자나는 있는 거고,

호흡을 무슨 호흡으로 빠져나왔는가? 빠져나올 때는 호흡이 먼저 보입니다.

내쉬면서 그 상태를 빠져나오는 건지, 들이쉬면서 빠져나왔는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그게 돼야만이 뭐가 가능해요? 무상··무아라고 하는 위빳사나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거라. 그게 안 되면 그다음 단계에 빠져나오면 삼매가 탁 깨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공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부분입니다.

? 수행을 지속해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사띠가 끊어지지 않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부분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삼매는, 사마디는 어느 정도 경험을 해보는 것들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너무 빠지지는 말고!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다섯 가지 장애가 없는 상태만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왜 그럴까? 내가 아무리 삼선정, 사선정까지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선정만 얻은 것뿐인 것이지, 선정 그거 어디에다 쓸 건데?

 

(수행자 질문 : ---)

예. 맞습니다. 삼매는 어떠한 경우든지 통찰지를 얻기 위해서...

(수행자 질문 : ---)

그럼. 그렇게 생각을 딱 해야 됩니다. 삼매를 좋아하지만 않으면 그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삼매를 내가 경험해서 그속에서 계속 오래 있다 해가지고 실제적으로 내가 얻는 것은, 내가 무슨 수다원에 이르렀어? 아니면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 ñāṇa)라고 하는 어떠한 상태가 되더라도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고 청정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을 얻었어? 뭘 얻었어?

내 좋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너무 삼매에 집착할려고는 하지 말고,

단지 삼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띠(sati)하는 힘과 집중(samādhi)하는 힘과 그리고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아디목카가 선한 쪽으로만 계속 기울어져야 되는 거라.

 

아디목카(adhimokkha)는 어떤 거냐면 누가 원수진 사람이 탁 있죠? 그러면 원수진 사람은 안 봐도 그사람만 떠올려도 막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거기에 딱 달라붙어 있거든. 마음의 힘이. 그러니까 그런 자극만 조금만 뭔가가 주어지더라도 그사람이 탁 떠오르면서 싫은 마음이 탁 일어나는 거라. 그걸 달라붙어 있는 걸 아디목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아디목카가 좋은 쪽으로만 착 달라붙으면 대상에 착 달라붙으면 대상이 변하는 걸 그대로 알아차리면 좋은데, 요놈이란 게 나쁜 쪽으로도 자꾸 일어나지거든.

그런데 삼매가 강해지면은 아디목카는 자연스럽게 선한 쪽으로만 일어나지는 거라. 그런 작용들을 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필요하더라도 너무 집착은 하지 말아라.

 

단지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태어난 목적이 뭡니까?

(수행자 대답 : ---)

죽기 위해서? 잘 죽기 위해서? 잘 죽을려면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되는데?

(수행자 대답 : ---)

그럴 자신 있어요?

 

(수행자 질문 : ---)

아디, 아디 목카. 제가 발음이 좀 경상도 발음이어서 좋지는 않습니다.

아디(adhi)가 원래 아비(abhi)하고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아비'의 뜻하고는 반대입니다.

(수행자 질문 : ---)

아뇨. 그건 '아디(adhi)' 자체가 접두사입니다. 아비담마(abhidhamma) 할 때 '아비'와 마찬가지로 접두사로 쓰이는데, 아비담마 할 때 담마에 붙은 것(abhi)은 '뛰어나다'는 '수승하다'는 의미인데, 아디목카의 '아디(adhi)'나 '아비(abhi)'는 그런 뜻이 아니고 정반대로 그냥 '붙잡는다'는 그런 의미로서 '붙잡고 이끌린다'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용어에 따라서 조금 빨리어가 쓰여지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사실은 이 심청정까지는 조금 쉽습니다. 그렇죠!

그냥 스님이 하라 할 것 같으면, “계 지켜” 하니까 계 그냥 지키고, 마음 청정히 하기 위해서 그냥 대상에 장애들 일어나지 않게끔 장애가 일어나면 ‘에이, 또 엉뚱한 거 했네’ 하면서 놔버리고 그냥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하고 이렇게 쭉 해나가면 심청정은 어느 정도 달성이 돼나갑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죠.

 

심청정이 달성이 되면 그다음에 견청정이 돼야되는데, 견청정으로 못넘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럴까?

쉽게 말하면 자기 고집 탁 움켜쥐어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견해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면 견청정으로 못 넘어간 사람들입니다.

“나는 화두선만 할 거야” 아니면 “나는 테라와다만 할거야” 견청정으로 못넘어가지고 딱 거기 묶여져 있는 겁니다.

거 왜 그래요? 마음은 저 사람 참 착하고 좋은데, 청정하고 깨끗한데 왜 견청정으로 못 넘어가질까? 심청정이 완성이 되지 못한 거라.

 

아까 심청정의 마지막이 뭐라고 했죠?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될 때 심청정이 딱 끝나는 지점이 된다는 거라.

몸과 마음을 구분한다는 거는 쉽게 말하면 몸이 있는다는 걸 알 때는 다른 게 없습니다. 다른 건 놓아버렸습니다. 마음을 알 때는 다른 것도 놓아버립니다.

내가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하고 부딪쳤다? 그럼 내 견해를 고집 안 할 때는 놔버려야 되는 게 맞는 겁니다.

 

만약에 스님이 내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럼 여기 오면 안됩니다.

여기 오면 청법가 해쌌고, 찬불가 해쌌고 그래쌌는데, 우리 테라와다 불교에서 그런 거 하는 거 없거든. 삼귀의 오계도 자기들 마음대로 일어서가지고 삼귀의 삼창 해쌌고 이러는데 테라와다 스님이 봤을 때는 참 같잖아요.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고.

그런데 자기가 견해들을 가지지 않으면 그냥 내비둡니다. 지가 좋아서 하는 건데, 지 업 쌓는 건데 그걸 누가 뭐라 할 거라? 그냥 냅둬버리는 거라.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상가락키따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 때 스님이 있었어요. 어느 절에 주지로 계셨는데, 상가락키따 스님이 재가자한테 보시를 받았는데 아주 좋은 가사를 보시를 받았거든. 너무 좋거든. 그런데 자기 삼촌이 아라한을 얻은 장로로서 다른데 있는데, 자기가 기가 그렇게 욕심이 없었던 분이었겠죠. 그러하니까 이걸 삼촌스님한테 드리면 되겠다 해서 삼촌스님한테 가서 그 가사를 선물을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삼촌스님이 안 받을라고 그래요.

“난 그거 없어도 돼. 그거 없어도 나는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 니가 입어”

그런데 자기는 주겠다는 마음에 딱 묶여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계속 줄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삼촌 스님은 안 받겠다는 견해 묶여있었던 게 아니고, 여러분들도 그런 걸 경험을 해봤을지 모르겠는데 가사를 여러벌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는 만큼 더 거추장스러워집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안 가질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 들면 “됐어 그냥. 다른 사람을 주든지 니 입어” 이렇게 합니다.

 

삼촌스님은 별뜻 없이 그렇게 얘기했는데 이 상가락키따 스님은 뿔따구가 나는 거라. 내가 먼길 와가지고 큰스님한테 이걸 공양올렸는데 안 받아주니까. ‘에이, 이럴 것 같으면 내가 중 생활 안 하고 속세로 갈 거야 하고 마음을 탁 먹습니다. 그러면서 속세로 넘어가면서 음, 그래 난 마누라 얻어가지고 자식 새끼 낳고, 그래가지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 요렇게 요렇게 돈벌이 하고.. 이렇게 하는 생각(망상)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게 가정생활이 여러분들도 잘 알겠지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나쁜 일이 일어나니까 에이, 왜 이렇게 됐어?’ 하면서 탁 했는데, 그렇게 망상 부리고 있을 때가 뭐했느냐면 삼촌스님한테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는데 부채 갖고 삼촌스님을 탁 때린 거라.

 

그러니까 삼촌스님이 “야! 니 마누라 때리는 것도 나쁜 건데, 가만히 있는 나를 왜 때리냐?” 이렇게 하는 거라. 그때 마누라가 뭘 잘못한 게 있으니까 마누라를 탁 두드려팼겠지.

그때사 탁 깨닫습니다. 내가 뭔가를 집착하고 있는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집착하다 보니까 망상이 계속 늘어나는 거라. 집착하는 집착하는 것이 더 자꾸 늘어나는 거라.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십원 벌면 그거 집착하니까 안 잃을라고 조금 더 이십원, 삼십원, 백원, 수행 끝!

그래도 괜찮습니다. 벌었으면 탁 보시할 줄도 알고 다른 사람한테 이웃이나 아는 사람들한테 흔쾌히 나눠줄 줄도 아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런 줄도 몰라.

(수행자 대답 : ---)

그러니까 끝이라는 거라.

 

집착을 하면 자기 것들을 버리질 못합니다. 그러면 더욱 더 쌓여간다는 거라. 여러분 집, 여러분들은 몸과 마음에 계속 쓰레기를 쌓고 있는 게 뭐가 그리 좋느냐는 거라. 버려버려도 생활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데, 버려버리는 게 스님이 뭐 돈을 버리라고 하나 뭘 버리라고 하나? (---) 그리 하나? 전혀 그게 아니잖아.

집착하는 것들만 버려버리면 되는데 그걸 왜 못해?

(수행자 대답 : ---)

그렇게 자꾸 자기 합리화시키지 말고.

 

그래도 살아가면서 그래도 ‘아, 참 마음이 청정하고 나 참 잘살고 있구나’ 하는 것들이 지속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집착하는 것들을 자꾸 버리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구분이 될 때, 몸과 마음이 분명하게 구분되어질 때, '구분되어진다'고 하는 것은 '내가 이것을 사띠하고 있을 때는 다른 것은 나에게 영향을 못미친다'는 겁니다. 그런 상태가 돼있을 때 마음의 청정은 완성이 돼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그다음에는 견청정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쉽죠! 마음의 청정 얻기! 그냥 이것만 하면 됩니다.

조금만 지속해나가면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기 때문에, 잡다하게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그대로 사띠할려고만 자꾸 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수행의 패턴으로 들어선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서 마음의 청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나면 본인이 더 나아갈려고 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견청정부터 쭉 진행을 해나가겠습니다. 끝.

 

 

[질의응답]

Q. 수행자 질문 : ---

A. 스님 답변 : 사띠(sati)를 한국말로 번역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어떤 사람은 '기억', 어떤 사람은 '마음챙김', '알아차림' 참 많이 있는데, 사띠를 다 포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띠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있습니다.

그게 첫 번째가 뭐냐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사띠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욕심이 확 일어나는데 내가 사띠하고 있다, 그런데도 욕심이 확 사라지지 않고 그냥 욕심이 일어난 거 그냥 나는 알아차리고 있다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건 사띠 안 한겁니다.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에 대해서 그게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일단은 불교적인 수행에서 사띠를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은 선한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사띠를 하다가 선한 마음 다음에 그게 원인이 돼서 그다음에는 결과적으로 또 다른 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띠를 안 하더라도 감사한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그거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사띠는 안 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거는 가능한데, 사띠를 하고 있는데 탐·진·치가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일단은 어떤 경우든지 사띠가 아니다 하고 판단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문맥에서 아까 얘기했지만 "사띠를 하고 있으면 불선한 마음을 억압을 하고 억제한다"고 하는 것은 "안 일어난다"는 얘깁니다.

그걸 갖다가 그렇게 은유적으로 얘길하는 것이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사띠를 하고 있으면,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서부터 숫자를 갖다가 1부터 30까지 써놔놓고 각각 칸막이를 해놔놨다. 그러면서 칸막이를 이쪽으로 쭈욱 하면서 보여준다고 할 것 같으면 1 하고 들어가지고 나서는 2가 들어가지고 3이 들어가지고 순차적으로 쭉 들어갈 거 아닙니까? 천천히 할 때는,

나오는 것으로 하면 이해하기가 쉽겠네.

1이 나오고 2가 나오고 이렇게, 그러면 1, 2, 3, 그것만 계속 보고 있으면 1, 2, 3, 4, 이렇게 쭉 지속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죠? 그런데 빨리하면 굉장히 헷갈리죠? 그런데 사띠가 강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빨리하더라도 그걸 휙 다 봅니다. 근데 그걸 갖다가 명칭을 붙여가지고 ‘1’, ‘2’, ‘3’, ‘4’, 이렇게 하지는 안 하더라도 이미 마음으로는 그걸 다 읽고 있습니다.

 

사띠가 강하고 약하고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변하고 있는 대상들을 갖다가 그대로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거는 분명하죠?

그래서 사띠를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연속은 해질 수는 있습니다. 한번 탁 사띠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아예 사띠가 탁 끊어져버리고 몰라버린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없습니다. 대부분 연속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띠를 하고 있을 때는 두 번째가 뭐냐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것들이 연속을 하게끔 되느냐? 일정시간 동안에는 계속 연속을 하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1일 때 1인줄 분명히 알았죠? 2일 때는 2인줄 분명히 압니다.

사띠를 하고 있을 때는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마음에 새기게끔 됩니다. 뭘 하고 있느지를 분명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발을 들면서 분명히 ‘듦’하고 들리는 걸 보면서 아는 것이지, 이걸 갖다가 발을 들면서 ‘내림’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분명하게 그것을 새기는 작용들이 사띠를 할 때는 반드시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사띠(sati)는 일차적으로 분명히 나는 거기만 딱 마음이 고정돼가지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것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하는 상태가 돼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게 한 달을 가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육십 년을 간다, 그것은 사띠의 강도 차이겠죠. 경전에도 그런 것이 나오죠? 몇십년 뒤에 그사람에게 그 구절을 암송해봐라 하니까 그대로 쭉 읊는다는 거라. 사띠가 강한 상태에서 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몇십년 뒤에 오늘 읽은 거 심청정 앞에 맨 첫머리가 뭐였지? 오늘 아니고 십분 뒤에 하면 다 까먹어버립니다. 사띠가 약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마음에 새겨진다는 거라. 그걸 여러분들도 분명히 압니다. 진짜 좋은 것들은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사띠가 그때는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거는 사띠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사띠가 아니고 단순히 그냥 인식하는 것에 해당이 돼버립니다. ()하고 사띠가 보통 헷갈리는 부분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사띠를 하면 어떻게 될까?

오온이 색·수·상·행·식이죠!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어요?

마음의 4가지는 동시다발적으로 확 일어나지고, 동시다발적으로 화르르륵 사라진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한순간에 2개, 3개, 5개가 같이 일어난다는 얘기잖아. 맞아요?

(수행자 대답 : ---)

그렇죠! 정확합니다. 쉽게 말하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더라도 사띠가 있으면 어떻게 돼요? 뭐가 먼저 일어났는지를 아는 거라.

느낌이 먼저 내가 알아차려지는 건지, 아니면 관념적인 것들이 먼저 일어난 건지, 아니면 상카라가 먼저 일어난 건지, 인식이 먼저 일어난 건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요것 다음에 요게 일어나는 거를 분명하게 알게끔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게 사띠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한순간에 사띠는 하나밖에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그게 순차적으로 보르르륵 일어나기 때문에 분명하게 그걸 구분해나가게 됩니다.

 

여러분들한테 숙제 하나 드릴까요?

수행을 하는데 수···식 마음의 작용이 4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게 대빵일까? 어떤 게 대장이라서 싹 끌고 가는 게 될까?

(수행자 대답 : ---)

느낌이에요? 뭐 느낌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일단 느낌은 땡!

그럼 내가 만약에 땡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인제는 두 개밖에 안 남는데, 숙제! 어떤 것이 대장 역할을 하면서 끌고 가는 게 보여져야 됩니다.

사띠가 물론 강해져야 만이 가능한데, 그래서 애초에 기대는 안 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는 안 될거라고는 보지만, 모르는 거라 그거는.

진짜입니다. 내가 한번 해보자 하고 달라붙으면 그게 보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보는 훈련들을 자꾸 하면 그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거는 숙제이고,

 

사띠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한순간에 하나만 분명하게 딱 인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 게 보통 사띠가 있을 때의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그게 만약에 없으면 '사띠가 아니다'가 아니고 '사띠를 안 한겁니다.' 안 한 상태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내 업은 내가 쌓는 것, 내 거라는 것, 다른 사람이 나한테 뭐라 하든 간에 내가 일단은 화를 내면 화낸 거는 일단 내 거라. 그 생각은 버려버리면 안됩니다.

 

수행하다 보면 맨 처음 분명하게 인식하는 게 뭐냐면, "업이라고 하는 것들은 나의 것이고, 내가 짓는 것이고, 내가 받는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걸 분명하게 인식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자기가 자기거 가져갈 건데 좋은 거 할려고 그러지, 안 하게 되는 거라. 그러면 조금 더 공부해야 되는 거라.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