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더러워진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고, 행복은 마음이 맑은 사람의 권리이다. (20231202)

담마마-마까 2023. 12. 3. 15:27

https://youtu.be/mTT4lMCXPvY?si=X0XZhMXgYcodG1yT

 

* 더러워진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고, 행복은 마음이 맑은 사람의 권리이다. (20231202)

 

오늘은 가장 기본적인 얘기, 「더러워진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고, 행복은 마음이 맑은 사람의 권리이다.」 하는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다 알고 있는 거죠? 마음이 더러워지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마음이 맑게 돼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길 바라면서 마음이 더러워져 있을 것 같으면 그건 앞뒤가 안 맞는 거죠.

그런데 마음이 '더러워져 있는 마음' 그건 누구 마음입니까? 누구 마음이라?

(수행자 대답 : 더러워져 있는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렇지. '더러워져 있는 마음'은 그냥 '더러워진 마음'이지 '내가' 더러워진 것이 아닙니다.

 

수행의 포인트가 사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계속 수행하면서 사띠를 하다 보면,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자꾸 분리가 되는 상태가 지속이 되고 나면, 설혹 지금 내가 성냄이나 탐욕이나 이런 것을 끊지는 못하더라도 탐욕이 일어난다든지 성냄이 일어난다든지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날 거 같으면 그냥 그건 줄 압니다.

‘미워하는 마음이다’ 하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고, ‘성냄이다’하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고.

그러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분리가 돼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면 자연스러운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그게 사라져버립니다.

 

그럼 를 일으킬 만한 근거는 전혀 없어져 버리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은 화가 일어나면 ‘내가 화가 일어났다’하고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런데 내가 화가 일어난 게 뭐 때문에 일어났죠? 저 사람이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해서 일어났으니까 저 사람이 나에게 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돼버리는 거라. 그러면 그 사람한테 내가 뭔가를 말을 나쁜 말을 한다든지 나쁜 행위를 하게끔 되는 거라.

 

사실은 그것이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더럽혀진 마음이 안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일어나면 그냥 더렵혀진 마음을 ‘더렵혀진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걸 자꾸 ‘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게 문제가 되는 거라.

 

이게 사실은 수행의 첫 단추인데 그 첫 단추를 끼우지 못하면 그다음 단계로는 절대 못 나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마음이 더렵혀져 있으면 좋지는 않죠? 본인도 나쁜 결과들이 있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본인도 안 좋은 상태에 이르는 거고. 그런데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본인은 틀림없이 좋아지는 걸 압니다.

그러면 평상시에 마음이 자꾸 더렵혀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평상시에 본인 마음이 자꾸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남을 비난하고 부정적으로 자꾸 생각하는 것보다 그걸 이해할려고 하고 용서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왜 자꾸 성냄이 일어나면 ‘내가 성냈다’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될까? 욕심이 일어나면 왜 ‘내가 욕심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게 될까?

아까 얘기했듯이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분리가 되어야 되는데, 분리가 될려면 어떻게 되어요?

자연스러워져야 됩니다!

자연스럽게 호흡을 알아차리니까 호흡을 들이쉬는 게 내가 들이쉬는 게 아니고 지가 쉬고 싶어서 쉬어지는 거고 지가 내뱉고 싶어서 내뱉게 됩니다. 그것을 단지 마음으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뿐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게 알아차려야 되는데, 수행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알아차려요?

"수행한다, 좌선 시작" 하면, 탁 앉아서 눈 딱 감고 배부터 먼저 관찰을 할려고 합니다. 아니면 코끝부터 관찰을 합니다.

또는 "경행 시작" 하면 경행할 때 평상시 걷는 것하고는 관계없이 아주 천천히 몸과 마음을 조절해가면서 아주 천천히 걷는 겁니다.

‘들 어 올 리 고, 나 아 가 고, 내 려 놓 고’

왜 그렇게 하는데? 그거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평상시 때는 앉아있을 때 그렇게 앉아있지 않고, 걸을 때도 그렇게 걷지 않는데 왜 자꾸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

 

그리고 언제 스님이 수행을 시작하면 수행 시작하자마자 대상부터 알아차리라고 그랬어요?

그건 의도적으로 마음이 그쪽으로 가야 됩니다.

대상은 드러나져야 되는 것이지 내가 다가가면 안됩니다.

그래서 앉아있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먼저 만들고 나서 마음이 뭘 하는지를 먼저 보라는 거라. 마음이 배에 가 있는 건지 코끝에 가 있는 건지, 아니면 딴데 가 있는지를 먼저 보고 나서, 그것들을 먼저 볼려고 해야되는 것이지 그냥 다 무시를 해버리고 배로 들어간다?

또는 경행할 때도 평상시 여러분들 걷던 대로 걸어라는 거라. 평상시 걷던 대로 걸을 것 같으면 전혀 마음을 일부러 거기에 둘려고 안 합니다 발에다가. 그러면 그냥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고만 알아차리면서 ‘왼발, 오른발’ 해도 충분한데 그리 안 하고 자꾸 늦게(느리게) 할려고 하는 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 의도적으로 뭔가를 수행을 할려는 표를 냅니다.

그게 ''를 강화시켜 주는 것들입니다. ? ‘내가 수행을 하고 있고, 내가 알아차리고 있고, 내가 걷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안 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게 된다는 거라.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분리가 돼야만이 수행은 스타트가 돼나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놔둬 보십시요 마음을.

자연스럽게 되면 생각도 일어나게 되고 또는 마음이 자꾸 벗어날려고 하고, 그냥 그대로 두라는 거라.

 

그 대신에 마음은 구속하지 말고 놔두면은 고요해지면은, 대상을 알아차릴 게 앉아있으면 호흡을 알아차릴 수 있게끔 됩니다. 자연스럽게 됩니다.

왜 그럴까?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한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마음이 멈추는 순간 여러분들은 잠깐이라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라.

 

그리고 그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이나 주변에 대해서 신경쓰이는 것들이 없어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호흡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 호흡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생각이 없어져버리고 밖을 신경쓰는 것들이 소리들리는 것들이 없어지게 되고 하면 마음은 뭐 하겠어요? 끊임없이 일어나야 되는데. 콩닥콩닥 뛰고 있는 이 호흡밖엔 없는 거라. 그러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호흡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먼저 알아차리라는 거라.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먼저 보이고 더 자연스러워지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아! 이것이 물질적인 현상이구나’ ‘저절로 되는 것이네’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것을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호흡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거라. ‘어! 마음이 알아차리는 거네’

그런데 마음이 또 다른 게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있으면 소리가 들리면 그쪽으로 휙 달아나버린다는 거라. 그때는 호흡은 분명히 있는데 마음은 소리에 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런 경험들을 자꾸 하면서 "물질적인 호흡"이라는 것을 '물질적인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인 마음'이라는 것이 분리가 되는 것들을 자꾸 경험을 하게 되는 거라.

 

수행은 그렇게 시작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게 첫 번째라고 하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지 않고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으로 구분하게 될 수 있게 될 때 호흡은 시작된다 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내가 의도를 낸다? 그건 이미 내가 개입된 거라.

왜 자꾸 의도를 내가지고 호흡을 알아차릴려고 하고, 왜 의도를 내가지고 걸을려고 하느냐는 거라. 걷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그냥 서있으면 돼요. 서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면 호흡을 보게끔 돼있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마음이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을 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좀 놔둬보십시요.

 

그거 이때까지 못 놓아가지고 문제들이 자꾸 생겼는데 그거 좀 놔둬보도록 그렇게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놔둘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마음이 더러운 생각이나 더러운 것들을 할려고 하는 것들을 안하는 것으로 자꾸 해줘야 됩니다.

? 괴로움이 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그리 안 해도 수행에서는 괴로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상만 잘 알아차리면 괴로움은 일어납니다. 굳이 내가 일부러 일으켜가지고 괴로움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이 분명히 구분이 되고나면, 그 다음에는 수행은 자연스럽게 '큰 무더기'를 볼려고 그럽니다.

 

마음은 너무 바빠. 의식을 못 따라가.

그러면 정신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것들이 자꾸 보입니다.

그래서 호흡 하나도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게 변해지는 게 보이게 되는 거라. 내쉴 때도 그냥 내쉰다고 보여지는 것이 아니고 내쉬면서 변해가는 것들이 보이게 되는 거라.

변해가는 것이 점점 빨라질 겁니다.

빨라지면은 여러분들은 빨리 늙고 빨리 죽고 싶어요? 안 그러죠? 대부분 오래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존재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빨리 변해가면 변해갈수록 점점 괴로워집니다.

 

수행에서 괴로움이,

''라고 하는 것이 떨어지고 나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보이고 나면,

'육체적인 것에서 괴로움'이 먼저 보이게 됩니다.

변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보이기 시작하고 괴로워지게 되면 수행은 그래도 조금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건데도 그게 괴로움으로 다가와지는 거라.

 

보이는 게 ‘배가 불러온다’ 그러면 불러오는데 그 움직임이 변해가는 것이 보이는 사람도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은 배가 불러올 때 각각의 느낌들이 쑤시는 현상이라든지 아니면 압박감이라든지 이런 것들로서 보여지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보여지는 것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변해가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은 동일하거든.

 

그런데 본인에게는 그런 느낌이 보일지, 아니면 그 움직임이 보일지, 아니면 그 육체적인 현상을 관찰하는 마음이 괴로움으로 인식이 될지 그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동시다발적으로 순차적으로 일어나기도 할 거고, 어떨 때는 하나가 강하게 일어나기도 할 거고, 그러면 그냥 보라는 거라 그렇게.

느낌이 있을 때는 그 느낌을 계속적으로 볼려고 하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린다? 그러면 깨져버립니다.

반드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현상은 여러 가지가 순차적으로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냥 그대로 보도록 하면 됩니다.

 

그것이 무겁든지 가볍든지 아니면 쑤시든지 땡기든지 아니면 누르든지 그게 그냥 움직이는 것으로 해서 그냥 사라지는 것으로 보여지든지, 그거 신경쓰지 말아라는 거라.

그거는 과정일 뿐인 것이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육체적인 현상이 변해가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두려움이 일어나고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그 변해가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힘들어지는 것들이라는 거라.

 

괴로움으로 다가와지게 되는 것들이 중요한 포인트이지,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그게 느낌이든 움직임이든 마음이든 뭐든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이게 주객이 전도되고 나면 변해가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은 놔둬버리고 그냥 그 변하는 것들만 자꾸 볼려고 그럽니다. 변해가는 느낌을 볼려고 그럽니다.

뭐 할건데? 그거 보면? 본인에게 경험된 게 다른 사람한테 다 똑같이 경험되는 것이 아닌데도 본인 것이 맞다고 하는 거라.

 

그런 오류들을 두 번째 단계, 성숙되는 단계에서는 범하지만 않으면 수행은 또 순조롭게 넘어가집니다.

 

그러고 나면 뭐가 보일까? 마음이 변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마음이 괴로운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전에는 육체적인 현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안 보였는데, 그냥 마음이 괴롭다고만 알았는데, 이제는 육체적인 게 오히려 잠잠해져버리고, 육체적인 것은 관찰하면 사라져버리고 안 보여.

그대신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라.

 

마음은 동일할 거 같죠? 괴로우면 괴로움으로 그냥 인식하고 있을 거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그것을 대상을 사띠하는 것과 동시에 마음은 여러 가지로 바뀌어버립니다. 하나의 마음이 두 번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아주 짧은 찰나 간이지만. 지속적으로 계속 바뀌는 것이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그런 경험 해본 적이 있어요?

잠이 올 때 아주 짧은 찰나인데 어떨 때는 확 잠이 달아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잠에 못 이기고 폭 고개가 고꾸라지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그게 뭐냐면 마음이 변하는 것들을 무시를 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쑤시고 따갑고 하는 그것만 자꾸 관찰할려고 하다 보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들이 변하는 것들을 보지 못하니까 잠에 폭 고꾸라들게 되고, 그렇지 않고 잠을 탁 몰아냈을 때는 뒤통수에서 구멍이 뚫린 듯이 바람이 확 지나가는 것은 뭐냐면 마음이 바뀌는 것들이 보이니까 가능한 거라.

 

마음의 괴로움이 훨씬 빠르게 변합니다.

아마 도망갈려고 할 겁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거기서 그만두어 버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본인 마음이고 본인 선택인데, 도망가지 않고 그만두지만 않으면, 마음이 변해가는 것들을 따라잡기만 하면은 고요해져버립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적어도 어떤 대상이 오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치지는 않는다는 거라.

 

수행의 과정들은 그런 과정들을 밟아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3월 10일까지는 스님이 없이 여러분들 자율적으로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동안에 항상 스님이 지금 얘기한 것들을 명심을 했다가 자꾸 형식적인 것에 매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중요한 포인트가 뭔지를 자꾸 잡아서 그것들을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3월달에 스님이 돌아오고 나면 문답할 것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꾸 사띠를 하는 습관들을 가져야 됩니다.

평상시 때 자꾸 사띠를 할려고 해야지 그냥 사는데 바빠가지고 다 놓쳐버린다?

그러면 지나온 생애에서 계속 그렇게 해왔는데 꼭 이번 생애까지 그렇게 해야 돼?

 

수행들을 잘하고 항상 마음에서 수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들이 자꾸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들 마음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일어나게 됐을 때, 사띠를 했을 때 행복은 여러분들의 몫이 되는 거고,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돼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냥 찾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걸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