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불기 2567년 담마와나선원 까티나가사 법회 (20231119)

담마마-마까 2023. 11. 20. 20:59

https://youtu.be/tfyq3EKuXqs?si=Xuy-gJZjlTWmr-EV

 

* 불기 2567년 담마와나선원 까티나가사 법회 (20231119)

「아직 일어나지 않는 악을 일으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27:24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언제 한번 '까티나 둣상' 한번 안 해보나?

'까티나 찌와라(Kathina cīvara)' 하고 '까티나 둣사 찌와라(Kathina dussa cīvara)' 하고는 다르죠? '까티나 찌와라'는 가사 다 만든 것 사와가지고 가사 공양 올리는 거고, '둣상'이 들어가면 천조각을 직접 바느질하고 염색하고 다림질하고 해가지고 가사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언제 한번 해봅시다. 솜씨가 바느질하는 거는 다른 데서 맡기더라도 천조각 자르고 하는 것들이야 안 하겠어? 언제 전에 연방죽 선원에서 아마 한번 했지? 염색하고, 그때도 완전한 건 아니었고, 그냥 흰 가사 가져와가지고 다 꿰매어져 있는 것에 염색만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오늘은 법문할 주제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악을 일으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하는 제목으로 법문을 하겠습니다.

노력의 4가지중에 한 가지죠! 상응부 권태경 쪽에 보면 나와있는 것을 인용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수행하는데 아직 안 일어나는 것들을 왜 스스로 일으킬까?

뭐 잘 일으켜요? 가장 대표적인 것? (수행자 : 생각)

물론 생각을 하는 것도 있고, 수행하면 조부는 사람들 그것도 자기가 일으킨 거죠? 평상시 때는 안 졸건데 수행만 하면 졸고 하는 것도 아직 안 일어난 악을 자기가 일으키는 것이 됩니다. 번뇌들이 전부 악에 속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 내가 열반에 들었나?’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참 큰 번뇌를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그걸 가지고 강연하는 사람도 봤어요. 그런데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이게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특히 스님한테 문답을 전화로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사띠는 놓치지 않았고 대상은 분명한데, 아주 고요하고 마음이 깨끗하거든. 그 상태가 계속 지속이 되니까 ‘혹시나 열반에 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반에 들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요? 그런데 본인이 그걸 알면 그런 착각은 안 할 건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냥 쉽게 말하면 게으름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냥 좋아가지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건데 열반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열반을 체험할 때는 전조증상이 항상 있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어떤 걸까?

그냥 대상 자체는 그게 물질적인 대상이든 정신적인 대상이든 그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런 것일 뿐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껴야 됩니다. 절실하게 느끼면서 , 나라고 하는 것이 진짜 없구나하는 걸 갖다가 가슴에 탁 박힐 정도가 돼야만이 그다음에 열반의 현상들이 일어나기 쉬워지는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걸 알았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 대상을 보고 있다. 열반이 일어나기 전인데, 그럼 , 하고 보고 있는데 대상이 없습니다. 대상 자체가 사라져버립니다. 들리는 것도 들을려고 하는데 들리질 않아.

 

열반에 이르기 전에는 전조증상이 반드시 있게 되는데 그거는 다 무시하고 수행에서 고요하고 너무 좋으니까 이게 열반인양 나는 평생 요렇게 살고 싶다 해버리고 빠져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게 스님이 처음에 얘기했듯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것들을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일어나는 겁니다.

이미 일어난 것들은 여러분들이 알아차리기 쉬워요. 그런데 일어나지 않은 걸 새로운 현상들을 발견한 것들을 그것에 대해서 번뇌가 일어나고 집착하는 것들이 생겨버리면 그땐 다시 악한 결과들을 낳게끔 된다는 겁니다.

 

보통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극복하기 쉽죠?

졸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자야지 뭐 졸리면. 그런데 많이 피곤할 땐 자야 됩니다.

만약에 오늘 스님이 땅이 많이 파져있는 것들이 있어가지고 땅 메꾸는데 좀 들어줄 게 있어가지고 돌덩이라도 좀 들어주고 이렇게 해가지고 힘들어 죽겠어요. 그러고 나서 수행을 딱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졸음이 옵니다. 육체적으로 못 버티는 거야.

얼마 전에도 스님이 몸살을 한번 앓은 적이 있어요. 하루에 한끼를 먹으니까 오후에 뭘 좀 많이 일을 하고 나면 그날 저녁에는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아, 이거 또 몸살이 올 모양이다’ 하면서 거기서 그냥 그대로 잠잘 시간이 아닌데도 그냥 자버려요.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 수행을 하더라도 사마디에 빠져가지고 몸을 회복을 하고 깨어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졸음이 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졸음이 오면 수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아마 경험들을 해봤을 겁니다.

꼭 열반하고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아주 마음이 맑고 깨끗해요. 대상이 없고 그냥 공에 빠진 것처럼 이렇게 느껴져요. 아무것도 안 변하는데 마음은 청정하거든.

그러면 본인이 몸이 힘들어가지고 지금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 얘기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를 자기가 일으켰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안 하고 ‘아, 내가 수행이 새로운 패턴으로 좀 흘러가네’ 하면서 착각하면서 거기 그냥 머물러 있게 되는 거라.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시간 낭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피곤하면 자요. ! 그리고 수행을 통해서 극복할 수준이 될 거 같으면 사마디 수행을 통해서 조금 극복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행을 통해서 극복을 하고 해야 되지, 앉아서 좌선한다고 그냥 용써봐야 그때는 안됩니다.

 

그 대신에 육체적으로 피곤하지 않은데 졸음이 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거는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애들한테 공부하라 그러면 책만 탁 펴면 눈에 안 들어와. 게임 하라 그러면 잘하는데. 마음 상태는 그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기 싫어. 대상이 빨리빨리 변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보는데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든지, 일어난 단계에서는 어쨌든 그것도 다 재미있는 거거든. 재밌으니까 졸음이 오지 않는데, 대상이 고요한 상태에 빠져있는 상태가 되면은 대부분은 보면 자기가 게을러서 거기 빠져있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냥 거기서 그걸 즐기고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지금은 담마와나 선원 우리 도반들 선우들은 인제 수행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지금 조심해야 되는 것은 수행이 잘될 때 조심들을 해야 됩니다.

잘될 때 내가 이 대상에서 지금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뼈져리게 ‘아, 무상하구나’ 하고 ‘그냥 흐름일 뿐이구나’ 하는 걸 느끼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대상에서 머물러있지 말아야 됩니다.

머물러 있으면 , 오늘 또 내가 게으름에 빠졌구나하고 생각하고 빨리 거기서 빠져나와야 돼. 빠져나오는 방법은 다른 거 없습니다. 다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관찰하는 것부터 다시 들어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수행을 어느 정도 하고 나서 많이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왜 악을 스스로 일으키느냐는 거라. 아직 안 일어나는 걸. 그거 일으켜가지고 번뇌에 쌓여가지고 착각하며 살고 있고 시간 낭비들을 하는 거라.

 

업은 그렇게 지은 업은 결과는 분명하게 본인이 받습니다.

그게 자꾸 습관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수행하면 딱 그 지점에 가면 반드시 머뭅니다. 본인이 거기에 머물려고 그럽니다. 머물고 나서는 수행 잘했다고 한 시간 뒤에 일어납니다.

그게 자꾸 패턴화되면 인제는 점점 더 라고 하는 것이 더 강화돼버리게 됩니다. ‘아, 내가 그래도 요만큼 했다’, 다른 사람 얘기들을 하면 어떨 때는 심할 때는 스승이 얘기해서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뭐, 지가 뭘 알아. 나는 그래도 열반을 체험하고 열반에서 놀다 왔는데’ 이렇게 착각을 한다는 거라.

아주 안 좋은 버릇으로 자꾸 바뀌어나가서 그렇게 되면 그분은 거기서 딱 머물러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분이 있다, 어떻게 넘어가야 돼요?

혐오스러운 것으로 (알아야 됩니다.)

‘또 내가 여기 빠졌구나’ 하고 판단을 하고 진절머리가 나도록 ‘왜 내가 계속 이렇게 악한 것들을 자꾸 새로 만들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빨리 빠져나와야 되지 혐오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한데서 자꾸 머물러고만 합니다. 거기 왜 자꾸 머물려고 해? 그래서 그런 부분은 조심들을 해야 됩니다.

 

여신이 스님들이 수행하는 걸 딱 보니까 몇군데에서 딱 잡혀져 있거든.

그게 뭐냐면 첫 번째가 스님이 조금 전에 얘기했던 '졸음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부분이 '나른한 부분'입니다.

세 번째 부분이 '하품'이고,

네 번째 부분이 '지루한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부분이 여기에는 '나른한 느낌'이라고 그랬는데 '밥 먹고 나서의 나른한 느낌'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 대부분이 묶여가지고 그다음 단계에 넘어가지 못하고 있구나 하고 부처님한테 얘기를 합니다.

원인은 잘 파악을 했는데 답을 안 가르쳐줘. 여신은 답을 모르니까. 누가 가르쳐줘야 돼요? 부처님이 가르쳐줄 수밖에 없는 거라.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중에서 특히 더 중요한 부분이 하나가 있습니다.

'나른한 느낌'이라는 것!

하나 물어볼게요. 식사하고 나서 소화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충 몇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애요? 2시간? 3시간? 누가 수행에서 관찰해 본 사람? 없어요? 배 관찰하는 사람들은 관찰하기 쉬울 건데? 소화 활동들을 분명히 보잖아. 그러면 소화 활동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온 마음이 호흡에 100퍼센트 들어갈 때가 언제라? 그게 몇 시간 뒤라? 8시간 입니다. 스님 경험으로는 그래요.

저녁 먹지마! 수행을 할 때는 특히 집중수행 할 때는 저녁을 안 먹고 그 시간 동안은 오히려 수행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조그마한 거라도 마음이 거기에 쓰여버리면 고요한 상태에서 열반을 체험하는 것은 무리야! 안돼요.

 

경전에도 아마 열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시간들을 분석을 한번 해보십시요.

언제 되는가? 대부분은 보면 한밤중 아니면 새벽입니다. 낮 동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먹지마요! 오늘 저녁부터는 저녁 금지!

나른한 느낌이라는 거는 아주 미세한 거 같지만 수행에는 굉장히 큰 장애를 가져오기 때문에 안 먹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나른한 느낌들도 극복을 해야 만이 열반을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체험을 해야만이 여기 있는 스님들 까티나 가사 받을 자격이 있고, 그래도 스승으로서 삼배드릴 자격이 있구나 하고 마음으로 느낄 거 아니냐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말씀대로 따라서 쭉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 돼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그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를 천신이 원인을 얘기했는데 부처님이 딱 한 마디로 얘기합니다.

이걸 극복 할 수 있는 방법! 뭐라 했을까? 정진·노력입니다.

"정진·노력만 있으면 이 다섯 가지는 극복을 해낸다."

처음에 서두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악한 것들을 일으키지 말아라" 하는 얘깁니다.

괜히 착각해가지고 악한 것들을 만들어내지 말고, 있는 것도 물리치기 힘들어 죽겠는데 왜 그걸 자꾸 일으켜?

지금 여러분들이 열반을 체험을 했든, 아니면 내가 어느 정도 이상 경지에 도달해서 대상이 오롯하게 마음이 거기에 붙잡혀 있든, 아니면 생짜배기로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사띠를 하고 있든,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밖엔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열반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인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사람마다 수행 정도에 따라서 빠르고 느리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많고 그다음에 고요한 느낌이 많고 그 차이인 것뿐이지 그 과정들에 있는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대상 자체를 봤을 때는 그 흐름이 보여야 돼요.

고요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마음은 고요하더라도 그 흐름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거기에 머물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아, 무상하다’는 마음이 딱 간절해질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흐름만 계속 보이도록만 수행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게 노력입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이 노력으로서 이것들을 극복해낸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런 노력이면 뭐가 갖추어져 있을까요? 마음은 어떨까?

대상하고 딱 붙어있겠지! 붙어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들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은 항상, 대상을 관찰하는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되게 가벼워져 있어야 됩니다. 되게 깨끗해져 있다는 느낌이 딱 듭니다. 그때의 마음을 보면.

그래서 마음이 청정해져 있지 않으면 지금 내가 바른 노력 하고 있지 않은 거라.

만약에 용을 쓰고 있다, 그럼 일단 중단을 해야 돼요. 용을 쓰면 자기가 의도가 들어가서 자기가 의도하는 대로 대상을 관찰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면 일단은 스톱을 해야 돼. 스톱을 하고 마음을 오히려 고요하게 만들기 위해서 몸을 편안하게 만들고 그러고 나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나서 다시 대상을 관찰해야 되지 안 되는 걸 억지로 하고 있으면 그거는 용쓰는 것밖엔 안 되는 거라.

그래서 바른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마음은 청정한 상태가 돼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기준점으로 먼저 잡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렇게 바르게 노력을 하고 있으면 틀림없이 한 시간 전에 알아차린 거 하고 한 시간 뒤에 알아차린 거하고는 달라져있게 됩니다.

한 시간 전에는 분명히 대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 보여졌어요.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다시 수행할 때는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아, 이게 계속적으로 관찰할려고 하는데 뭔가 자꾸 뒤죽박죽이 된다든지 아니면 앞에 일어나는 것들은 보이질 않게 되든지 바뀌어져 있어야 된다는 거라.

 

한 시간 전이나 한 시간 후나 똑같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바른 노력에 해당이 안 되는 거라. 바르게 노력을 할 경우에는 한 시간 전이나 한 시간 뒤에든 분명하게 관찰하는 것이 다르게 보여져야 됩니다.

수행의 과정에서는 바르게만 할 것 같으면 반드시 다르게 보여집니다.

이걸 경전에서 얘기하는 것대로 할 것 같으면 지혜의 단계들이 점점 더 드러나지는 형태를 띠게됩니다. 실제로 바르게만 할 것 같으면, 이 두 가지만 딱 갖춰지면 금방 수행은 진척이 돼나갑니다.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라.

 

대부분은 보면 못하는 이유들은 뭔가 수행을 할 것 같으면 대상들이 안 할 때보다도 훨씬 더 많아집니다. 또는 수행을 하고 있을 거 같으면 훨씬 더 마음은 바빠집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머물려고 하든지 아니면 그걸 안 할려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다 하게 되는 겁니다. 마음은 항상 밀어내든지 당기든지 할려고 하게 됩니다. 이게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것만 안 하면 금방 이거 따라잡아가는데 이걸 항상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체크를 해야 되는 것이 이 부분을 해야 됩니다.

내가 뭔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또는 뭔가 내가 새로운 것들이 일어났다 해가지고 내가 그것들이 싫은 거라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수행을 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은 적어도 망상 피우는 거는 잡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게으름들이나 졸음들이나 나태함 같은 것들은 금방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몰아내야만이 그다음에 정신적인 현상들로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들 그걸 구분하는 방법들이 보여집니다.

 

물론 지금도 망상들이 일어날 겁니다. 그런데 망상은 수행이 깊지 않으면 그게 이렇게 잡기 힘든 거구나 하고 생각을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것보다 다른 것들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데 나중에 수행이 더 진행이 되면은 망상이 훨씬 더 몰아내기 힘들다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그때가 될 때까지는 이런 조그만 것들 졸음에서 관계된 나태함 게으름들은 빨리 몰아내야만이 수행이 본궤도에 올라간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도록 바랍니다.

 

악, 새로운 악,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일으키지 않도록만 하면 적어도 그렇게 돼나간다 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법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