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7청정에 이르는 길 1(계청정) -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담마마-마까 2023. 12. 6. 16:52

https://youtu.be/PbLpyMPYHBA?si=WDlqQgSA1j-9mvTk

 

* 7청정에 이르는 길 1(계청정) -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칠청정, 작년에는 「37보리분법」 했죠?

올해는 「칠청정」 부분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일곱 가지니까 또 스님이 겨울에 외국 나가기 전에는 마치도록 그렇게 조절을 하겠습니다.

 

경전에 칠청정 부분이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예. 있습니다.)

어디에 나와요?

(수행자 대답 : ---)

예. 역마차교차경인가 하는 거기에 있죠. 거기에는 자세히는 안 나와 있죠! 그냥 일곱 개의 말, 마차 갈아타는 것만 얘기를 해놔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나와 있죠. 첫 번째 마차를 쓰고 나면 두 번째 마차에 도착하면 첫 번째 마차는 버려버려야 되고 그렇게 해서 일곱 개의 마차를 번갈아가면서 타서 마지막에 해탈에 이르른다 하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뭘 얘기하는 거죠 그게? 칠청정이 그러면.

(수행자 대답 : ---)

뭐 그것보다는 '차례차례로 탄다'는 것은 빠알리 말로 하면 '아누뿝바(anupubb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순차적으로 이루어져나간다.' '순차적으로 수행한다' 하는 그런 뜻이지 '단박에 뭔가 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일곱 가지 청정도 마찬가지로 계청정부터 해서 계청정이 이루어지고 나서, 그다음에 심청정으로 가지고, 그다음에 견청정으로 가지고, 이렇게 간다는 그런 걸 내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장님이 얘기를 했지만 역마차교차경에도 칠청정 부분이 나오는데 자세하게는 안 나와 있죠.

 

또 어디에 나올까, 칠청정이?

(수행자 대답 : ---)

청정도론에, 당연히 청정도론에는 나오겠죠.

청정도론은 계··혜라는 삼학을 기초로 해서 청정도론이 써졌죠! 그런데 칠청정도 계··혜 부분에 들어가죠!

(수행자 대답 : ---)

그래서 위빳사나의 지혜 열여섯 단계도 그중에 어딘가에 포함이 돼있을 거고, 쉽게 말하면 계·정·혜 중에 정에 들어갈지 혜에 들어갈지 어디에 들어갈지 하는 것들이 있을 거고, 수행에서도 어느 정도 도달하고 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들이 이루어지고 하는 그런 형태들을 띱니다.

 

청정도론에 나온다고 그러는데, 붓다고사는 왜 청정도론을 썼을까?

그 복잡하고 어려운 걸. 스님이 봐도 너무 복잡해, 너무 자세하게 해놨다 하는 정도인데, 왜 그래 놨을까?

물론 부처님 가르침을 총망라해가지고 거기에다가 집어넣을려다 보니까 그런 것도 있는데 여러 가지 배경들이 있죠? 청정도론이 쓰여졌던 배경은. 그게 5세기 때이니까 부처님 입멸하고 나서는 한참 시간이 지난 거죠? 천 년이 너머 지난 시간인데, 그 천 년 동안 그러면 부처님 가르침은 변하지 않고 있었을까? 안 변했을까요? 안 변했다고 봐야 되겠죠! 변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배우고 있는 것도 잘못된 것들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사실은 청정도론이 쓰여진 것은 변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쓴 겁니다.

3차 결집 때부터 해가지고 스리랑카에서는 이미 '아바야기리'파(派)라고 해서 무외산사파들이 세력을 강성하게 하면서 새로운 사상들을 자꾸 받아들이게 됩니다.

대표적인 게 뭐냐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라고 하는 것이 있다', '진아가 있다, 불성이 있다' 하는 그런 것들, 그다음에 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들 중에 하나가 '아라한 위에 뭔가 다른 계위가 있다' 하는 것들, 아라한이 완전하지는 않기 때문에 아라한 위에 부처라든지 아니면 보살십지라든지 이런 결과를 둬가지고, 아라한도 떨어질 수가 있고 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그런 것들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불교의 장로스님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험한 사상들입니다.

그래서 "이대로 두어가지고는 부처님 말씀이 자꾸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하는 생각 때문에, 그래서 그때 왕을 피해서 지금의 캔디 남쪽에서 3차 결집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왕이 이미 아바야기리파에 속해서 거기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하위하라'라는 대사파쪽에 있는 장로들은 그 눈을 피해서 "부처님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하고 확정을 해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게 인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3차 결집인데,

 

그러고 나서도 지속적으로 계속 다른 사상들이 불교에 침투가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대로 둬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서 만든 것이 뭐냐면 5세기 때 붓다고사를 통해서 스리랑카에서 싱할라 말로 구전되어 오고 있던, 그리고 패엽경으로 수지하고 있던 것들을, 주석서들이지요. 그걸 다시 마가다어인 빨리어로 다시 재번역 하는 작업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서 이 청정도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주석서들이 쓰여지게 됩니다.

 

어찌 보면 부처님 가르침은 계·정·혜라고 하는 큰 카테고리에 다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이 청정해질 수가 없다,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해지지 않으면 지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것이 실천적인 부분에서의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끔은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있습니다. '굳이 계율을 안 지키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수행을 해나가서 마음이 청정해지고 또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그렇게 하지만, 아직 불교 역사에서는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정해지는 단계를 어디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견(異見)들이 있는데, 삼매로 볼 것인지, 아니면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들을 순간순간 사띠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 하는 차이점은 있을지는 몰라도, 그래서 수행방법에서는 차이가 날지 몰라도, 어쨌든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으면 지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일어나는 지혜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잘못된 지혜에 해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칠청정을 배워야 되는 것은 실천수행하기 위한 겁니다.

그냥 교리적으로 그냥 자꾸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 그래도 내가 계율부터 좀 자꾸 지킬려고 하고, 마음이 그래도 조금 더 청정해지고 고요해지면서 아,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어떤 대상이든지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려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더 부처님 가르침하고 맞는 옷을 입게끔 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칠청정을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야지, 그냥 항목적으로 칠청정은 이거 이거 이거다 하고 알려고 해가지고는 스님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교수들이나 여러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한테 차라리 교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도 물론 칠청정이 나와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을 압축해놓은 것이 어찌 보면 또 칠청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말고도 경전에는 칠청정에 대한 부분이 다수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꼭 일곱 개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고 어떤 데는 구청정으로 나오는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십상경」 같은 그런 것들은 '구청정'으로 나옵니다. 칠청정에다가 덧붙여져가지고 두 개가 더 들어가지는 형태들을 띱니다. 그런데 뭐 그 두 개 덧붙이는 것은 다 칠청정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보면 일곱 가지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설명을 할 때 편하게 하기 위해서 칠청정으로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칠청정이 무슨 뜻이죠? 일곱 가지 청정에, 뭐라구요?

스님의 견해로는 빨리어 원문을 봤을 때 지극히 노력해가지고 청정에 이르는 것들을 의미할 때를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직접 실천해가지고 노력해가지고 그 청정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청정에 이르렀을 때 그다음 청정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그런 의미들을 띠는 것이 이 칠청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칠청정을 하면서 한번 노력을 해봐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 배워야 되는 게 맨처음 계청정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재가자들은 계가 몇 가지죠? (수행자 : 오계)

오계! 맨 처음에 뭐에요? (수행자 : 살생하지 않는 것)

그럼 살생 안 할려면 자꾸 노력을 해야 될 거 아니라.

그런데 지극하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거는 힘듭니다. 왜 그럴까? 살생하는 것은 되게 많거든. 자기도 모르게. 그냥 그게 나쁜 건지도 모르고 그냥 살생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거 진짜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Q] 수행자 질문 :

그런데 스님, 찬스를 놓쳐버리면 여쭙지 못할까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예를 들면 우리 뱃속에는 수없는 그런 세균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나의 생명체인데, 예를 들어서 배가 아프면 어떻든 간에 이런 세포에 그런 생명체들에 언바란스가 되든 뭐가 되든 해가지고 항생제를 먹지 않습니까? 그 항생제를 먹게 되면 먹는 그 자체가 생명체를 죽이는 거거든요. 그럴 때 딜레마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했을 때 그거는 뭐라고 얘기를 해주실 수 있는지요?

 

[A] 스님 답변 :

그건 나중에 우리 이자랑 교수님한테 여쭤봐야되지, 계율에 관한 거는.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거를 죽일 때 “성불하시오” 하면서 죽인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경중을 따져가지고 “내가 죽는 것보다 니가 죽는게 낫다” 해가지고 죽이기도 하고 그런다고 그러는데, 그거는 뭐 하나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거고,

 

그런데 죽이는 대상이 뭐냐 하는 것들은 틀림없이 있겠죠?

의식을 지닌 생명체인지, 아니면 그냥 감각적인 생명체인지, 무생물인지 이런 것들은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그 대상 자체가 출가자인지 재가자인지에 따라서 또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

그런데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어쨌든 자기 의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일 거 같으면 일단은 죽여서는 안됩니다. 일단은 죽여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이든 뭘 하는 것이든 간에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죽이는 것들은 금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는 것이 보통 세 가지로 이렇게 나뉘어집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일반적인 계를 지키는 것하고, 수승한 계를 지키는 것, 그다음에 아주 뛰어난 계를 지키는 것 그렇게 해서 세 단계로 나뉘어지기는 합니다.

그래서 아까 우리 회장님 말씀에 의할 거 같으면 몸속에 있는 바이러스나 이런 것들을 안 죽이기 위해서는 내가 약을 먹으면 안 되겠죠? 그럼 그 정도로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아라한 정도가 돼야만이 사실은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아주 뛰어난 것들을 여러분들한테 지키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거는 틀림없습니다. 아주 뛰어난 것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그걸 죽이는 목적이 뭔지를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아니면 내가 좀 더 고통을 덜 받기 위해서? 그럼 모든 생명체는 평등한 건데 그래서 되는가하는 생각들은 항상 해야 되는 거라.

만약에 그게 의식이 있는 것일 때, 쉽게 말하면 바이러스 같은 그런 경우에는 해당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개미나 모기가 집에 들어왔다, 이걸 죽여야 될 때 그럼 여러분들은 죽이는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마 그런 경우에는 합리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직접적으로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몰아낼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는데 지금 죽인다고 하는 것은 살생을 꼭 예를 들기 전에 내가 그냥 편하게 하기 위해서 내 본위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낮은 계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몸 안에 있는 바이러스다, 만약에 이걸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된다, 그럴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당연히 그러면 죽여야 되겠죠. 그런데 바이러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확인할 수 없죠!

그래서 그냥 일반적인 계를 지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내가 살의를 가지고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생에는 해당이 안 되게 됩니다.

그런데 출가자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출가자들하고 재가자들하고 차이가 나는 부분이긴 한데,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죽이는 행위는, 의식을 가지고 자기 의지로서 뭔가를 행하고 하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죽이는 행위는 금해야 된다 하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살생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지켜야 되는 것들은 좀 이해하기가 수월할 겁니다. 됐습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수행을 해나가면서 어느 정도 성취를 해나가면 사실은 내가 뭔가를 항생제를 먹어가지고 죽이는 것들도 꺼림칙하게 생각해서 잘 안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수행으로 다스릴려고 그러고, 또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놔둬가지고 내가 시간을 좀 지체해서 좀 늦게라도 그걸 낫는 방법들을 동원을 하는 것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재가자들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안 해도 됩니다.

 

어쨌든 계를 지켜야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지극히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계를 지켜야 됩니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이미 여러분들에게 정해진 계율이 있습니다. 오계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되는 것들이죠! 또 불재일마다 팔계들을 지켜야 되는 거고. 기본적인 오계는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빼고, 어떤 것들만 지키겠다 하는 법도 없고.

쉽게 말하면 "술 마시지 마라" 그러니까 “취하지 않을 만큼만 먹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 얘기하는데 그거는 경전을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취하게 하는 것들이 술이나 약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을 술이나 마약 같은 약물들을 하지 말아라는 뜻이지, 취하게 하지 말아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술 마시지 말아라는 거라. 좋은 것들이 있는데 왜 굳이 술을 마시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보면 여러분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극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계를 경전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실천수행하는 사람들, 부처님 가르침을 진짜 실천하는 사람들의 장신구와 같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몸을 치장하는 그 장신구들과 같이 여러분들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계를 지키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계를 지키지 않고 뭔가 다른 일을 한다, 그러면 아예 다음부터 심청정부터는 안 들어도 됩니다. 그 정도로 계율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계를 지키라고 그럴까? 왜 계를 지키라고 그래요?

(수행자 대답 : 수행이 잘 될려고...)

수행이 잘 될려고? 계 안 지켜도 수행 잘하던데?

'계청정'이잖아 '청정!' 계를 지키면 뭐가 돼요? 청정해집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에 꺼림칙한 것들이 없이 당당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한 거죠. “나는 죄지은 거 없어”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죄지은 것이 없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도 나가도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팔계를 지켜보면 계를 지키는 것이 참 어렵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점심때 이후에는 그다음날 아침에 해가 떴을 때 손을 딱 폈을 때 요 손금이 보이는 시간 전까지, 그 시간 전까지 아무것도 씹는 것은 먹지마!" 이것을 지켜보면 참 힘들다 하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잠자는 시간 외에는 눕거나 기대거나 하는 것들을 하지 말고 바르게 살려고 자꾸 해봐!" 참 힘듭니다. 되도록이면 기댈려고 그러고 누울려고 하지, 조금만 피곤해지면.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할려고 하거든.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그렇게 하면 아, 계를 지키는 것이 참 힘드는 부분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되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인해가지고 나에게 얻어지는 이익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알면 계를 지킬려고 합니다.

그래서 계청정은 참 중요한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아까 계를 지키면 마음이 청정해진다고 그랬죠?

 

부처님 당시 때 일화를 하나 얘기해드릴게요.

상낏짜라고 하는 일곱 살짜리 사미승이 있었는데, 상낏짜는 태어날 때부터 참 희한하게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가 다됐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옛날에는 그런 게 참 많았죠. 그래서 어머니를 인도에서는 화장을 하듯이 화장을 했습니다. 이 뱃속에 애기가 있는 채로 화장이 된 거죠. 화장이 됐는데 다른 거는 다 타버렸는데 자궁만 안 탄거라. 자궁만. 그래서 검시하는 사람이 이렇게 하다가 툭 찔렀는데 왼쪽 눈을 약간 좀 찔렀어요. 그러면서 그 애기가 자궁속에서 튀어나오게 된 거라.

그래서 애가 태어나서 결국은 출가를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출가를 해서 일곱 살이 됐을 때 아라한에 이르르게 됩니다.

경전에 일곱 살짜리 아라한이 곳곳에 등장을 합니다. 이 상낏짜도 꼭 마찬가지죠.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는 왜 이렇게 금방 아라한에 이르렀을까? 왜 그럴까?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법문 듣고 바로 아라한이 되고, 뭐 그냥 물 떨어지는 거 보다가 탁 아라한에 이르르고, 왜 이렇게 쉬웠을까?

여러분들은 못난이라는 뜻이라. 이 스님을 비롯해서. 부처님 당시 때 태어나지를 안 한 것이 참 원통하죠.

그정도로 마음이 맑고 깨끗한 상태가 돼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고 깨끗한 마음은 금방 대상에 몰입을 하게 됩니다. 금방 진리가 뭔지를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마음이 먼저 고요하고 가벼워져 있어야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쉬워지고 그것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냥 무조건 먼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이 어떻게 돼있는지를 신경쓸 겨를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왜곡시킵니다. 그래서 수행은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는 이미 사람들이 그정도의 바라밀들이나 여러 가지들로 인해서 돼있는 상태들인 거라.

 

법문 들으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는 거라. 여러분들의 마음이 맑아져 있으면. 법문을 들으면서 듣는 데만 집중을 하는 거라. 그러면은 앞에 있는 스님도 안 보이고 다른 소리들도 일체 안 들리고 오로지 법문 듣는 것만 그대로 집중해서 듣게끔 됩니다. 그러면은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냥 그냥 그대로 듣게만 됩니다.

이 상낏짜도 그런 방식을 통해가지고 깨달은 아라한이 되었는데,

 

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러 떠날려고 하는데 부처님이 사리뿟따한테 얘기를 합니다. 상낏짜를 저기 같이 보내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부처님 말씀하시는 게 뭔지를 알아채리고 상낏짜를 불러서 저분들 가는데 너도 따라가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스님들이 가서 수행하는 처소가 외진 곳들이거든 대부분이. 그래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도둑들이 재물을 바치기 위해가지고 이 스님들을 잡아 죽일려고 그럽니다. 한 사람의 재물을 바치면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가 있고, 그러니까 옛날도 그렇지만 지금도 인도에는 그런 희생제물을 많이 바쳐가지고 신에게 예배드리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구 스님들한테 다른 사람들은 다 살려줄테니까 한 사람만 죽을 수 있도록 보내라 하고 얘기하니까, 다들 먼저 할려고 했는데 결국은 상낏짜 스님이 가게 됩니다. 죽여야 될 거 아니야, 일곱 살짜리지만.

여러분들 같으면 희생제물을 일곱 살짜리를 죽일 수 있어요? 내가 잘되기 위해서? 그런데 인도에는 합니다. 그게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합니다.

목을 칠라고 칼을 탁 댔는데 칼이 튕겨져 나와요. 아무리 죽일려고 해도 그 일곱 살짜리 상낏짜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거라. 왜 그럴까?

 

혹시 마음이 청정해져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청정해져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갖다가 막 욕을 하더라도 나는 그 욕에 대해서 그걸 욕이라고 생각 안 하고 그냥 듣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칭찬한다고 하더라도 그거에 관계없이 그냥 자기는 자기 할 일만 합니다.

그런데 삼매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이미 청정해져 있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더더구나 이 사람은 어떤 외부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질 않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그런 게 많이 나오죠? 천둥번개가 치는데도 부처님은 그 천둥번개가 치는 줄도 몰랐던 경우들도 있고, 삼매에 들어있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불을 태웠는데도 불에 타지도 않고, 그런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삼매에 들었을 때는.

 

실제로 스님이 그런 경우들을 많이 봤습니다.

태국에서 삼매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체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앉아있으면 삼매에 들은 건지 자는 건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외부적인 자극을 가해주는 방법을 통해서 그걸 확인을 합니다. 아주 강한 냄새라든지, 아니면 뭔가를 가지고 간지럽힌다든지, 아니면 팔을 꺽어버린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로 외부적인 자극들을 통하는데도 전혀 숨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거의 삼매에 들 때는 나중에는 숨조차도 거의 쉬지를 않는 상태가 됩니다. 반응이 없으면 아, 이 사람은 삼매에 들었다, 아니면 삼매라도 그것이 2선정인지 3선정인지 하는 것들을 구분을 해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와 같이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심청정 부분만 어느 정도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뭐라고 해야 될까? 본인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본인의 할 일들을 열심히 잘해나갈 수는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게 뭐냐면 그걸 훈련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자극이 있을 때 그거에 대해서 반응할려고 하는 것들을 자꾸 줄일려고 하면 됩니다.

맛있는 거 들어왔다, 그러면 맛있는 거 자꾸 먹을려고 할 것 같으면 ‘어, 내가 자극에 대해서 반응을 하네’ 하면서 딱 일단 스톱을 하고 그냥 먹을 때는 먹는 데만 집중을 하도록 하고, 맛있다고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먹는데 집중할려고 하고, 보고 있으면 ‘예쁘네’ 이렇게 하고 반응을 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본다’고 자꾸 반응을 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훈련을 하다 보면 마음이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을 잘 안 하게 됩니다.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서 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느냐 하는 것들은 그런 외부적인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보통 측정을 합니다. '저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있다, 아니다' 하는 것은 그렇게 합니다.

 

상낏짜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보고 이 도둑들이 그때 후회하는 마음이 듭니다. 뭐 할려고 했죠? 죽일려고 그랬죠. 여러분들도 뭔가를 죽였을 때 마음이 후회가 들 때가 있죠? 그와 같습니다. 아, 이 칼도 저 청정한 사람을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는데 내가 저분을 죽일려고 했다는 마음이 드니까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칼을 내려놓고 그 상낏짜의 제자가 돼버립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만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음이 청정해지게끔 만들어주는 역할들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계청정은 향기를 거슬러서 퍼져나간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마만큼 계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하게 그냥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좀 더 좋은 사회라든지 좀 더 좋은 가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될 것들이다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계청정이라는 건데,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자신의 감각을 제어하지 않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도, 계를 잘 지켜서 마음을 청정하게 해서 수행하는 것이 하루를 살더라도 훨씬 더 낫다"는 거라.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번 보십시요. 여러분들에게 준 프린트물에는 재가자는 오계만 지키면 된다, 그리고 나머지 4가지 부분은 출가자들에게만 해당이 된다 하고는 써놨지만, 감각기관을 지키지 않고 단순한 오계도 지킬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의 라고 하는 감각기관, 이걸 지키지 않고 어떻게 오계를 지킬 거라?

 

쉽게 말하면 남들이 나쁜 말을 했다, 자기가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저 사람을 미워하는 말을 안 할 자신 있어요? 감각기관을 못지키면 못합니다 그거는.

거짓말하지 말아라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거짓되게 말하는 것들은 다 해당이 됩니다. 여러분들 오늘 처음 만났으면 뭐라고 얘기해요? “안녕하세요?” 하고 얘기하죠. 사실은 그것도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또 수행을 하기 위한 도구로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기 위해서, 아니면 나쁜 마음들을 싫어하는 마음들을 품은 것들을 드러내는 말들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그냥 입에 발린 말들을 잘 하게끔 됩니다. 전부 그게 거짓되게 말하는 것들에 해당이 됩니다.

 

그거는 감각기관을 제어를 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루를 살더라도, 하루를 살더라도 감각기관을 잘 지키면서 하루를 살아라는 거라.

왜 그럴까? 감각기관을 잘 지키면서 하루를 살면 적어도 천상에 가는 거는 여러분들에게 보증해 준다는 거라. 그런데 감각기관을 못지키고 백년을 살면 천상에 가는 것은 보증해 줄 수가 없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많이 쓰는 극락에 가는 것, 죽고 나서 극락에 가든 아니면 살아 생전에 극락에 가든 극락에 가는 것은 보증해 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마만큼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렇게 해보십시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생각하고 할 때 무조건 그것들을 말을 붙여보십시요.

뭔가 본다, 내가 그러면 ‘본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라는 거라. 들으면 ‘듣는다’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일차적으로는. 뭔가 맛보면 ‘맛본다’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물론 맛보다가 ‘맛있다’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할겁니다. 그러면 "즉시 중단"을 하라는 거라. 중단을 하고 다시 또 맛을 보라는 거라. 그러면 ‘맛본다’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조금 힘들겠죠? 그런데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를 지키는 것은 힘들다는 거라.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않고는 계를 지킨다는 것은 그마만큼 힘이 듭니다.

 

아까 황회장님이 얘기했지만 조그만 거 몸 안에 있는 바이러스? 피상적인 이런 것들만 자꾸 ‘이게 죽이는 것에 해당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고 알려고 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여러분들은 계를 지킬려고 할 것 같으면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갖다가 자꾸 측정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계는 지켜지게끔 돼있고, 자동적으로 마음은 청정한 상태로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아까 칠청정은 어떻다고 얘기했죠? 그게 완성이 돼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거라. 뛰어넘어 갈 수도 없고 그것들을 뒤죽박죽으로 거꾸로 다시 내려왔다가 올라가고 이렇게 할 수도 없다는 거라.

그러면 계를 잘 지켜야만이 다음 「마음청정」의 단계에 가는데 계를 어떤 식으로 지킬거라?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감각기관을 자꾸 잘 제어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고 단지 듣고, 보고, 맛보고 하고 있다는 것들만 자꾸 알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재미없을 거 같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재미있습니다.

왜 재미있을까? 부차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이겠죠. 맛보고 있으면 ‘맛본다’고 알 것 같으면 적어도 내가 멈출 줄을 아는 거라. 그전에는 멈추는 법을 몰랐는데 인제는 멈출 줄을 아는 거라.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고 있을 거 같으면 그전에는 그것이 자꾸 발전합니다. ‘예쁘다, 갖고 싶다, 꺽고 싶다’ 이렇게 발전하는데 발전 안 하고 그냥 거기서 멈춘다는 거라.

 

그래서 계를 지키는 것이 그마만큼 일상적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하다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계청정에 관한 것들을 간략적으로 얘길했습니다. 이 칠청정은 여러분들이 실천해서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야 되는 것들이지 그냥 한꺼번에 팍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조금 조금씩 실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