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7청정에 이르는 길 3(견청정) - (사) 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법문

담마마-마까 2023. 12. 10. 12:25

https://youtu.be/YMEfVR0cUrc?feature=shared

 

* 7청정에 이르는 길 3(견청정)

 

이번 달은 견청정 부분입니다.

계청정부터 심청정, 그리고 나서 오늘은 견청정 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떡하냐? 견청정에 이르르면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일으켰던 반응들을 할 수가 없는데. 노래 잘 부르면 “아! 잘한다” 이래야 되는데, 그걸 못해버리게 되는데 큰일났네. 그마만큼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르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조금 전 같은 그런 반응들이 필요하기는 하죠? 그런데 안 하는 사람들만 계속 있으면 어떻게 될까? 재미는 없겠죠. 다른 것으로서 재미를 찾겠죠. 그렇다고 해서 조금 전에도 스님이 박수는 쳤습니다. 자기 할 일은 하긴 하는데 뭐 그렇게 기뻐하고 슬퍼하고 이런 것은 없어져버리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이 들뜨고 동요하는 것들이 없는 상태가 되고, 「나」라고 하는 것들이 일시적으로 아마 사라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이 나쁜 방향으로 흐르는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상태가 쭉 유지가 되긴 합니다. 그래서 다른 거로 재미를 찾기는 합니다.

수행으로 재미를 찾든지 아니면 바라밀을 행하는 것으로서 재미를 찾든지 그런 식으로 바뀌어나가기는 하는데, 아마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참, 저 양반 재미없게 사네’ 하는 그런 상태에 이르게는 될 겁니다.

 

오늘 저녁이 지나고 나면 스님이 또 태국으로 잠시 갔다 와야 됩니다.

가사 불사라고 알죠? 한국에서 얘기하는, 그거하고 비슷한 거 '톳빱바' 라고 하는 의식이 있어요. 가사를 올리는 의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까티나'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다음에 '빵수꿀라' 라고 하는 의식이 있고, 그다음에 지금 같은 '톳빱바' 라고 하는 의식이 있는데, 이거는 뭐냐면 스님들이 안거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경에는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목욕가사를 소지를 해야 된다. 목욕가사 없이 목욕을 하지 말아라." 쉽게 말하면 하의를 가리고 샤워나 목욕을 하라 하는 그런 뜻으로서 목욕가사를 받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국에서는 참 큰 행사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또 안거 다가오기도 하니까 제자들한테 가서 용돈도 좀 줘야 되고 그렇습니다. 잠깐 갔다 오는데,

 

그래서 어찌 보면 할 일이 없어질 거 같지만 법랍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할 일들은 더 많아지는 게 이 승가의 구조인 것 같애요. 그마만큼 수행을 통해서 사람들을 좀 더 이끌어줘야 되는 것도 많고, 또 챙겨줘야 되는 것도 많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한테 여법하게 그 모습 그대로를 갖다가 보여줘야 되는 부분도 훨씬 많아지고, 그래서 그마만큼 바빠지기는 하는데, 요즘 같으면 몸이 잘 안 따라서 걱정이기는 합니다.

 

오늘은 견청정 부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견청정에 이르르면 뭐가 좋을까? 마음의 청정 부분은 읽어봤죠? 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어떻겠어요? 좀 그래도 나쁜 짓은 안 할라고는 하겠지?

(수행자 대답 : 계를 지키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

그렇죠. 심청정에 이르르면 계는 자연스럽게 자꾸 지켜지게 되는 거고,

거기다가 심청정에 이르르고 나면 어떠한 경우든지 불선한 것들은 안 하게끔 자꾸 됩니다. 물론 실수하는 경우들이 생길 수는 있는데 실수하기 전에 ‘아, 이거는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구나’ 하고 생각해서 미리 스스로를 자꾸 방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안 만들려고 그렇게는 하죠. 그래서 마음이 조금 뭐랄까? 좀 더 여유로워지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조건들은 됩니다.

 

그런데 견청정에 이르르면 어떻게 될까?

심청정하고 견청정하고는 어떤 차이가 날까?

심청정까지만 이르러도 그래도 뭐 잘 살게는 되겠죠? 그런데 심청정하고 견청정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부터는 이제는 본격적으로 수행의 단계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부처님이 세 가지를 얘기를 했는데, 보통 불교를 배우고 듣고 해가지고 잘 이해하는 것이 있고, 그다음에 또 하나는 자신이 생각해서 ‘아, 이거는 이럴 것이고 이거는 이럴 것이고’하고 추론해가지고 이해하는 것이 있고, 그 두 가지보다도 더 좋은 게 실천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견청정부터는 본격적으로 인제는 체험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체험이 되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아무리 여기서 견청정 얘기를 해봐야 본인이 직접 그걸 체험하지 않으면 다음 시간부터는 오면 재미가 없어져.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반드시 지금부터는 체험을 해야 된다 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여기서 딧티(diṭṭhi)라고 나오는데, 견해죠. 견청정 견해인데, 여기서 칠청정에서 나오는 견해하고 팔정도에 나오는 정견 삼마딧티(sammā-diṭṭhi)하고 뭔 차이가 날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팔정도의 「견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견해도 가지지 않는 것을 쉽게 말하면 정견이라고 얘기한다'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이나 자기의 의견들을 내세우지 않고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걸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되고.

여기서 칠청정에서의 「견해」라고 하는 것은 그거하고는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잘못된 것들, 사견 부분에 해당이 된다',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기 위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백중 지났습니까? (수행자 대답)

안 지났어요? (수행자 대답) 아, 그래요. 백중되면 절에 가서 제사 올리죠?

왜 올립니까? (수행자 대답) 돌아가신 분 영가를 천도한다든지 아니면 좋은데 태어난다고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거는 왜 그렇지? 영혼이 항상 있는 건가? (수행자 대답)

있는데 그러면 왜 그걸 해? (수행자 대답)

이걸 그 의식이 잘못됐다고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견청정에서의 「견해」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가 '상주한다는 생각은 잘못됐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죽은 영혼뿐 아니라 ''라고 하는 것도 무슨 변하지 않는 진아가 있어가지고 뭐 어떻게 된다든지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첫 번째 그거만 들어도 그냥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해가지고는 안 되겠죠? 머리로는 절대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아까 얘기하듯이 "견청정은 실제 자기가 체험해가지고 아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머리로 아무리 이해할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그건 아마 여러분들이 잘 안 가지는 견해일 건데 '죽고나서 윤회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든지, 학자들이 보통 그런 얘기 많이 하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행한 행위에 대해서 내가 받는 것들이 꼭 좋은 걸 행했으면 좋은 걸 받는 것도 아니고 어떨 때는 나쁜 걸 받기도 하고 뭐 이러기 때문에 그거 뭐 선인선과 악인악과 하는 것도 별 의미 없다. 그냥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잘살면 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 그런 것들이 해당이 됩니다.

그런 것은 아마 여러분들은 해당이 안 되겠죠?

 

왜 그럴까? 왜 그런 견해들을 가질까?

윤회는 경험해 볼 수가 없는 거잖아. 그런데 수행해서 체험을 통해서 윤회를 경험해본다면 말이 좀 틀리겠죠. 그래서 체험해보지 않으면 그런 견해들을 가질 수는 있다는 거라. 그것들도 ‘아, 이게 잘못된 거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되게 되는 거고.

 

또 하나는 참 극복하기 어려운 건데, 앞에 두 개 부분은 가끔씩 일어나는 견해들인데, 지금 말 할려고 하는 '유신견'이라는 것은 이거는 마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이따가 수행 가르치고 할 때도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이렇게 하라, 그러면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이리 하면서도 '내가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는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그거는 누가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거기에는 자연스럽게 그냥 내가 개입이 돼. 내가 개입이 돼. 왜 그러냐면 내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져요. 그리 안 하는 사람 있어요?

 

그런데 유신견이 완전히 떨어지면 참 좋은데 견청정 가지고도 완전히 떨어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안 일어나게 만들 수는 있다는 거라. 해보니까 ‘어? 이 속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네’ 하고 체험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이 3개만 들어도 상당히 체험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견청정은 체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여러분들이 직접 해봐야 되는 거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한번 해볼까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지금부터는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사마타는 개입이 안됩니다. 여기부터는.

그전에 심청정까지는 사마타가 개입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부터는 일단은 사마타에 빠졌든 어쨌든 간에 거기서부터 나와야만이 견청정부터가 이루어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한번 스님 한번 보십시요. 보입니까? (예)

눈을 한번 탁 감아보십시요.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안 보입니까? 그러면 다시 눈을 뜨고 한번 보십시요. 누가 본 겁니까? (눈이 봤어요.)

눈이 봤어요? 그런데 눈이 봤으면 눈을 감으면 안 보이는데? 안 그러면 옆으로 돌리면 안 보이는데? 눈은 자기가 보고 싶다 해서 지가 봐지는 겁니까? 그거는 뭔가가 머릿속에서 “봐라” 하고 시키겠지. 시키니까 봤을 거 아니라.

그 시키는 게 뭐라? 그게 여러분들 마음이잖아.

그러면 눈이 본 거에요? (마음이 본겁니다.) 마음이 본 거죠!

마음이 스님을 본 겁니다.

눈은 단지 스님쪽으로 향해있었기 때문에 보여진 거지. 마음으로서 보여지는 역할만 한 거라. 그런데 눈을 감아버렸으니까 인제는 마음이 아무리 볼려해도 볼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면 스님을 본 것은 누가 봤어요? 마음이 봤습니다.

맞습니까? 눈이 본 게 아니죠? 눈을 통해서 본 것뿐입니다.

그런데 눈이 봤을 때 귀는 조금이라도 역할을 했을까? 아무 역할도 안 했습니다. 지금 스님 소리는 들리죠? 소리 들리는 것은 뭔가 마음으로 소리들린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거는 보는 마음하고, 듣는 마음하고는 다른 겁니다. 전혀 별개의 겁니다.

 

마음은 하나뿐인데 왜 요기 갔다가 요리 갔다가 이럴까? 왜 그래요?

마음이 거기를 향해 있으니까 그것만 보이는 건데 여러분들이 착각을 하는 거라. 마음으로 두 가지를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거라. 그래서 보면서도 들린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럼 마음이 찰나 간에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을까?

그거 절대 못하는 거라. 못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이거를 착각을 하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분명한 거는 내가 본 것은 마음이 한 거고, 보이도록 역할을 한 것은 내 눈이 한 거라. 눈은 뭡니까? 물질이죠. 본 것은 마음입니다.

그걸 구분할 수 있나? 아직 구분이 잘 안돼요?

 

Q. 수행자 질문 : 눈을 통해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단계가 견해에서부터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물질이라는 눈과 듣는다는 마음이 구분해서 분리해서, 평상시는 그게 분리가 안 됐는데 견이라는 청정행을 닦아지면 보는 기능적인 눈과 마음이라는 것이 분리해서 자기가 인식할 수 있습니까?

A. 스님 답변 : 당연하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 폭우 쏟아지는데서도 가만히 앉아서 수행하고 있는데 폭우 쏟아지는 것을 모르지.

 

그래서 체험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죠?

분명히 이게 분리가 된 건 알겠는데, 분리된 줄을 분명하게 알아야 아, 이게 견청정에 이르를 건데, 이게 쉽지 않은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부지런히 자꾸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노력해야 돼?

아까 두 가지는 동시에 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한 가지만 자꾸 할려고 해야 되는 거라. 볼 때는 보는 것만 자꾸 할려고 하고, 들을 때는 듣는 것만 할려고 하고, 맛볼 때는 맛볼려고만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이것 저것 같이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섞여버리는 거라. 안 그래도 잘 못하는데 그거 섞어버려 놔놓으면 더 헷갈리는 거라.

그러면은 대부분은 마음은 재미없어져. 그래가지고 마음이 거기서 떠나버리는 거라. 수행 안 할려고 그러는 거라.

 

그래서 일단은 뭔가가 있기는 있는데 「몸」이라는 놈이 있고, 「마음」이라는 놈이 있어서 그게 다른 건 알겠는데 요걸 분명하게 구분을 못하겠다, 그럴 것 같으면

일단은 천천히 하고, 그리고 하나씩 할려고 하고,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이 지금 현재 일어난 대상을 알려고 해야 돼.

지금 대상이 아니면 어떻게 돼요?

그속에는 항상 내가 지어내게 되는 거라. 과거든지 미래든지, 아니면 조금 전에 휙 지나간 거다 ‘그게 뭐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거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날조를 하게 되는 거라. 휙 지나간 게 실제로는 포르쉐 승용차인데 자기는 벤츠라고 이렇게 착각을 해버리게 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이미 지나간 거라든지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거라든지 이런 거를 할려고 하지말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거, 보이면 눈을 뜨고 보면 보는 데다 집중할려고 하고 들리면 들리는 데다 집중해야 돼.

 

그럼 지금 여러분들은 뭐해야 될까? (수행자 대답)

그럼 나를 보지 말아야 돼. 눈을 이렇게 탁 뜨고 보고 있지만 안 보여야 돼요. 소리만 들려야 되는 거라. 눈을 감은 거와 마찬가지로 소리만 지속적으로 들려야 되는 거라.

그게 사실은 맞는데 보이죠? 그게 참 '중생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래서 보이니까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거라. ‘아, 두 개를 할 수가 있구나’ 하고. 그런데 실제로는 마음이 빨리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두 개를 동시에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꼭 영화 보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각각의 컷트가 따로따로인데 우리는 그게 연속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뿐입니다.

 

자! 그러면 ‘듣는다’는 데만 한번 집중을 해봅시다.

만약에 들을려고 하는데 자꾸 보이면 어떻게 해야 돼요? (눈을 감으면 됩니다.)

감아버려야 돼. 감아버리고 듣는 데다 마음을 딱 집중을 해야 돼.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죠? 단순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일단은 눈을 감고 스님 소리를 한번 들어보십시요.

내 귀를 통해서 들리지만 스님이 소리를 내지 않으면 여러분들 귀를 통해서 소리가 들리질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그냥 소리가 들리면 들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면 됩니다. 들립니까? 소리가? (예)

그런데 여러분들 소리가 들리는데 스님이 무슨 얘기 했는지는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되면 이미 듣지를 않고 있다는 얘깁니다. 하! 어렵다!

그냥 들리기만 해야 되는데 아, 이게 뭔 말인지를 갖다가 이해를 하겠거든.

 

그래서 참 견청정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냄새맡으면 냄새맡는다고만 알아차려야 되는데, 대부분 그게 그렇게 안 된다는 거라.

(수행자 대답 : 소리를 분석하면서 들으니까 ---)

분석을 하고 안 하고 그거는 둘째치고, 그냥 들리기만 해야 되는데 그게 소리가 높은 음인지 낮은 음인지 무슨 내용인지 하는 것이 들려버린다는 거라.

그게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될까?

(수행자 대답 : ---) 예? 도를 덜 닦아가지고?

 

그마만큼 여러분들에게는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들이 과거생부터 시작해가지고 지금 이생에도 계속 적으로 쌓아왔기 때문에 그게 습이 돼있는 거라.

어릴 때는 그래서 소리가 들리면 그걸 백프로 다 무슨 말인지를 이해를 못하는데 지금은 자꾸 습이 돼가지고 익혀져 왔기 때문에 뭔 소리인지를 다 아는 거라. 그마만큼 거듭돼 오면서 그것들이 유신견이 점점 더 강화돼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들리는 게 이해가 되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데 나중에 되면 실제로는 이해가 되어야 되는데, 지금 이해되는 거하고는 차원이 틀려집니다.

쉽게 말하면 저절로 이해가 되어져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그걸 분석하고 사고를 해야만이 그 내용을 이해를 하게끔 되는 상태가 돼있습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자기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이해하는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의 상태이기 때문에 아마 스님이 한 5분 정도 얘기하면 각자 사람마다 이해하는 거는 조금씩 다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익혀온 것들이 습관들이나 환경들이 다른 상태에서 익혀왔기 때문에 그것에 맞춰가지고 이해를 하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분명히 A를 얘기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B로 이해하게 되고, C로 이해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엉뚱하게 또 이해를 하게끔 되는 상태가 됩니다.

 

일단은 견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그걸 먼저 부수어야 돼.

그걸 부수어야만이 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것들은 일단은 무시를 해버리자 하는 겁니다. 무시를 해버리자!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조금 전에 스님이 말하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면 ‘들림’ ‘들림’ 들린다고만 자꾸 이해를 할려고 노력해야 돼. 내용 이해 못해도 괜찮습니다. 수행할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냥 ‘들린다’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라는 거라.

그리고 보이면 ‘보인다’고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지 ‘스님이다’ 아니면 ‘남자다’ ‘여자다’ ‘고양이다’ 이렇게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수행의 기본입니다 이게.

이게 되지 않으면 아무리 수행해봐야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Q. 수행자 질문 : 그것은 명상수행을 할 때만 그것이 절대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A. 스님 답변 : 일상에서도 마찬가집니다.

Q. 수행자 질문 :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라면 스님이 앞에서 법문을 하고 계신다면 소리만 집중하고 있으면 그 내용이 뭔지 전연 모른다고...

A. 스님 답변 : 나중에는 이해가 되어집니다.

Q. 수행자 : 나중에는 이해가 됩니까?

A. 스님 : 그렇죠. 견청정을 넘어서가지고 계속 나아가지면 그게 이해가 되어지는데 지금은 그냥 이해 못해도 괜찮으니까 일단은 소리 들리는 것만 ‘들린다’고만 알아차려라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듣는 이해의 수준과 여러분들이 듣는 이해의 수준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린아이가 듣는 이해의 수준과 여러분의 이해의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인정을 해야 되는 거라.

인정을 해야 되는데 있는 그대로 들을려고 할 것 같으면 일단은 어떤 경우든지 들리면 ‘들린다’고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보이면 ‘보인다’고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움직이면 ‘움직인다’고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배가 불러오면 그냥 ‘불러온다’고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가장 대표적인 움직이는 것들을 먼저 알아차리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게 전제조건이 항상 돼야 됩니다.

그런데 전제조건인데 그거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만!"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일어나는 게 없으면,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럼 마음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래서 안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려고 하지 않거나 아니면 게으름 부렸을 경우에는 그것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을 동안에는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참 어렵죠?

좀 간단하게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대표적인 거 4가지만 딱 얘기해놓았습니다.

"걸어갈 때, 앉아있을 때, 서있을 때, 누워있을 때 이 4가지 때만 알아차리는 것부터 먼저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걸어갈 때는 어떻게 해요?

그냥 왼발 들렸으면 ‘왼발’이라고 알아차리고 오른발 들렸으면 ‘오른발’이라고 알아차리고, 조금 더 천천히 갈 때는 ‘들어올리고 내려놓음’ 하고 알아차리고, 또 ‘들어올리고 내려놓음’ 하면서 알아차리고, 그것만 하라는 거라. 다른 거 일체 하지 말고.

발이 어떻게 내디뎌지고 그거 지금은 아무 의미 없다는 거라. 디뎌졌으면 그냥 ‘디뎌졌다’고 알고 올렸으면 ‘올렸다’고 알고, 나아가면 ‘나아간다’고 알고, 이렇게만 하라는 거라. 걸어갈 때는 그렇게만 하라는 거라.

 

만약에 여기 부분에서 여기까지 그렇게 걸어갔다, 집중해가지고 그렇게 걸어갔다 할 것 같으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까?

(수행자 대답 : 벽이 나타납니다.)

벽이 나타나면 그냥 벽에 부딪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갑작스럽게 누가 차가 탁 튀어나왔다, 내가 걸어가고 있으면 그냥 차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초심자들한테 이렇게 해라고 할 때는 안전한 곳에서 해야 되겠지. 그냥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걸어다니는 차도 나오고 뭐도 나오고 하는 그런데서 하라고 할 것 같으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일단은 안전한 장소에서 무조건 걸어가보라는 거라.

벽에 부딪치면 ‘아, 부딪쳤네’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또 돌아가고. 그런 식으로 무조건 걸어보라는 거라.

그래서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걸 갖다가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그다음에 왼발 그렇게 갔으면 오른발 해야 되잖아. 그럼 ‘오른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거기다가 집중을 해보라는 거라.

이 집중이 먼저 돼야만이 그다음 단계로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일단은 걷는 것부터 먼저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그렇게 훈련을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냥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들만 보여집니다.

그런데 발을 들어올릴 때는 ‘들어올린다’고 분명히 알아차렸죠? 나아갈 때는 ‘나아간다’고 알아차렸죠?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는다’고 알아차렸죠?

발을 들어올리는 거는 실제 내 발이 들린 거죠? 물질적인 현상이 들린 겁니다. 그런데 들린 걸 아는 것은 마음이 안 거죠.

탁 밀착돼 있으니까 이걸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림’ 하고 분명히 알아차렸는데 마음이 알아차린 겁니다. 탁 멈췄다 할 때도 ‘멈췄다’하고 알아차리고 나아갈 때는 ‘나아간다’고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 겁니다.

발이 이미 내려가고 있는데도 ‘나아간다’고 얘기를 해서는 안 되는 거죠.

 

일단은 지금 현재 이것만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인 마음은 딱 톱니바퀴에 맞아지듯이 맞아진 상태로서 알아가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엇박자가 나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엇박자가 난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걸 안 하고 딴 생각했다든지 다른 작용들이 나에게 들어왔다든지 이랬을 때 그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러면 딱 멈추고 ‘아, 또 내가 놓쳤네’ 하고 마음먹고, 다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무조건 그리해야 됩니다.

무조건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해야 됩니다.

 

이렇게 계속 집중하고 있으면 그속에는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할까?

거기 유신견이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그 현상밖에 없습니다. 들어올려지는 물질적인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딱딱 맞아떨어지면 그것밖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가 개입이 될 때는 언제 개입이 될까? 놓쳤을 때 '내가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다'고 알게 되는 거라. 놓쳐버리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안 놓쳤을 경우에는 이것밖에 없다는 거라. 그냥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발이 들어올려지고 나아가지고 내려놓고 하는 것, 그에 맞춰서 알아차리는 마음도 들어올리는 걸 알고, 나아가는 걸 알고 내려놓는 걸 알고, 그것밖엔 없는 거라.

 

아마 그 상태에서 5분만 해보면 ! 재밌네이렇게 보통 반응들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잡념이 없거든. 잡생각 없이 그냥 그것만 하니까 마음이 지금 하고 있는 그것만 알아차리면서 딱 하고 있으면 굉장히 편안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래서 그 상태를 그냥 유지를 해보라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조금 더 미세해집니다.

들어올려지는 게 보입니다. 분명히 내가 알아차리고 있는데 알아차리는 게 분명히 보이는 거라. 그게 발이 들어올려지면 발이 들어올려지는 것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 조금 전에는 그냥 발이 들어올려지면 ‘들어올려진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나아가면 ‘나아간다’고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내려놓는다’고 알아차리고,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똑같이 가면서 그냥 그대로 편안하고 고요하고 좋았단 말이라. 깨끗하고.

 

그런데 그게 계속 하다보니까 발이 들어올려지는 게 보여.

왜 보이게 될까? 이렇게 보십시요.

조금 전에는 들어올려진다는 하나의 현상밖에 없었고,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의 현상밖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어올려지는 게 이게 만약에 두 개로 나눠졌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요.

그러면 들어올려지는 게 구분되어져서 보여지는 거라.

마찬가지로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도 그것이 구분되어서 보여지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변하는 현상이 보여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상태의 초입에 이르렀다 하고 보면 됩니다.

 

이게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지 않으면 그냥 편안하고 고요하고 좋은 상태 잡념이 없는 상태에서만 계속 하게끔 됩니다. 물론 그렇게만 하더라도 막 오만 생각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낫겠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몸에 대해서 집착 안 하고 살 자신이 있어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냥 하면서 그냥 살 수 있는 자신이 있느냐는 거라. 그건 안 된다는 거라.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할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해탈에 이르지도 못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다음단계로 넘어가지지도 못하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는 이게 구분되어지도록 보여야 됩니다. 들어올려지는 게 끝나고 나서 나아가지는 게 보여지고, 나아가는 것이 끝나고 나서 내려놓는 게 보여져야 됩니다.

그래서 조금 더 나아가면 들어올려질 때 그냥 한 번에 들어올려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번 들어올려지는 게 보여야 됩니다. 나아갈 때도 여러번 나아가는 것이 보여야 됩니다. 내려놓을 때도 여러번 내려놓는 것이 보여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은 똑같이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서 보고 있는데도, 이게 여러 개로 보여지기 시작 해야만이, 그래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구분을 할 수가 있게끔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가장 정확하게 볼려면 전에도 한번 그런 얘기한 적이 있는데, 새끼줄 같이 요렇게 생긴 것이 있으면 이게 개미들이 줄지어서 쭉 가고 있는 것들이 실재하는 건데 이걸 볼려면 어떻게 돼요?

개미 한마리 한마리 한마리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보여야 만이 그리고 그게 움직이는 것이 보여야만이 ‘개미가 줄지어서 가고 있네’ 하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그냥 뭉뚱그려서 보면 저 뒤에서 보면 그냥 가는 줄로 보입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면 뭔가 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죠? 사실은 개미 개미 각각이 다 떨어져서 이동하고 있는 상태라.

그래서 구분돼서 보여지지 않으면 실재하는 것들은 사실은 알기 어렵다는 거라.

 

조금 전에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했지만 그거는 실제 사실하고는 관계없이 내가 스스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가지고 몸과 마음이 탁 일치되면서 단지 고요하고 편해져 있는 상태에 든 것뿐이라는 거라.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라. 실제로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는 거라. 그게 보여야 되는 거라.

참 많이 해야 가능하겠죠?

부단하게 노력을 해서 그상태가 돼야만이 그다음에 견청정에 이르르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견청정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계단계를 밟아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걷는 것뿐 아니라 앉아있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앉아있을 때도 움직이는 것이 뭐가 움직여요? 호흡이 움직입니다.

그럼 호흡을 관찰해야 됩니다.

코끝에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관찰하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한다든지, 둘 중에 하나를 딱 택해가지고 관찰해야 됩니다.

코끝에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한번 관찰해보십시요. 그리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해보십시요. 아마 걸을 때보다도 훨씬 더 이게 집중이 잘되고 변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숨을 들이쉴 때 내쉴 때, 아니면 배가 불러오고 꺼질 때.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숨이 불러올 때 배가 톡톡 터지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거 왜 터지는 것이 보일까? 그전에는 예리하지 못했으니까 그냥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고 꺼지면 꺼진다고만 알았는데, 인제는 불러올 때 보니까 하나의 불러오는 현상에 어, 요쪽이 한쪽이 볼록했다가 요쪽이 한쪽 볼록했다가 이러거든.

구분해서 보인다는 거라. 잘하고 있는 거라.

계속적으로 보면 불러오는 게 어떨 때는 파도치듯이 푹푹푹푹푹 이렇게 불러와지는 거라. 그러면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돼요.

그게 실재하는 것이고 그게 맞는 거라. 그렇게 보여야 돼요.

 

아까 발도 마찬가지라.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도 똑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구분되어서 보여지기 시작하면 그뒤부터는 하나가 일어나고 나서 그게 사라져야만이 다음 게 일어나집니다.

생멸이 없는 상태에서 다음 것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가 분명히 일어나고 사라지고 나서 그다음 것이 일어나지는 것이 보인다는 거라.

그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뒤부터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나서는, 뭔가가 멈추는 것이 잠깐 보이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보여져요.

실재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실재하는 것들이 그렇게 보인다는 거라.

 

내가 모르던 것들을 점점 더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흥미가 생겨서 더 볼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집중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인제는 멈추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마음이 먼저 그걸 볼려고 하는 것이 보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먼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인제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을 하게끔 됩니다.

 

과정이 많이 복잡하죠? 그런데 어떡하나?

실재적인 것들을 체험을 할려면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견청정에 이르질 못한다는 거라. 그런데 견청정에 이르르지 못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없고, 어떠한 경우든지 깨달음 하고는 관계없는 상태로서 그냥 살아가게끔 된다는 거라.

 

수행이 간단한 것 같아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끊임없이 그냥 현재 일어나는 것 알아차릴려고 노력하는 수밖엔 없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이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그것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거라.

수행하는 시간이 많겠어? 일상생활을 하는 시간이 많겠어? (일상생활 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그게 습이 돼가지고 수행을 안할려고 할 뿐아니라 수행하더라도 일상생활의 패턴대로 그냥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그냥 크게 뭉뚱그려서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배가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아차릴려고 하고 꺼지면 꺼진다고 알아차릴려고 하고, 세밀하게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자꾸 거기서 그냥 끝나는 거라. 한시간 동안 앉아서 수행했는데도 그것만 보이는데 뭔 재미가 있겠어? 재미가 없으니까 그다음부터는 또 안 할려고 그럽니다.

계속 이 패턴으로 가지고 몇십 년이 흘러도 심청정 다음에 견청정에 이르르지도 못하고 그냥 끝나버리는 거라.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도 어떠한 경우든지 자꾸 수행과 마찬가지로 알아차려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는 단계까지만 탁 이르르면 참 좋은데, 고까지만 이르르면 수행은 반은 완성을 한 겁니다. 실제로.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는 거라. 그런데 어떡하나?

나머지 반을 완성할려면 일단은 거기에는 이르러야 되는 거라.

그럴려면 되도록이면 수행시간을 늘려라는 거라.

일상 생활하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수행하는 시간을 자꾸 늘려야 됩니다. 늘려서 이 과정들을 자꾸 밟아나갈려고 해야 되지, 그렇지 않고 그냥 타성에 젖어서 할 것 같으면 항상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구분할 수 있는 상태까지는 이를 수 있겠죠?

왜 이르러야 되느냐면 수행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집착하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살아가는 상황이. 그럴려면 일단은 그게 구분이 돼야만이 그속에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단지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만날 거기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거라.

 

스님도 참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그렇게 많이 걸릴 수도 있고 금방 갈 수도 있습니다.

 

Q. 수행자 질문 : 스님, 많이 걸렸다 그러면 그 시간의 타임은 수백 년을 얘기합니까, 수천 년을 얘기합니까, 전생을 얘기합니까?

A. 스님 답변 : 아니 몇년 걸렸다는 얘깁니다.

Q. 수행자 질문 : 금생에 몇 년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A. 스님 답변 : 예.

그것도 그냥 수행 이외에는 다른 거는 안 했으니까. 밥 먹는 것도 수행이었고, 밥을 먹을 때도 다 수행으로서 들어올리면 들어올린다고 알아차리고, 먹으면 먹는다고 알아차리고 다 그렇게 했어요. 가사 입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면 일단 출가했으니까 나쁜 생각은 안 해야 될 거 아니라. 나쁜 행위나 나쁜 말은 안 해야 될 거 아니라? 적어도. 그럴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마음은 금방 나쁜 것들이 일어나게끔 되는 거라. 그럼 모든 것들을 지금 있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만이 그래도 나쁜 쪽으로는 흐르지 않고, 수행이 되든 안 되는 간에, 어쨌든 마음이 선한 쪽으로 자꾸 움직일려고 노력은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무조건 출가한 스님들은 똥싸는 것부터 해가지고 잠자기 전까지는 모든 것들을 다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안 알아차리면 스승들이 되게 뭐라 합니다.

“왜 출가했어?” 그럽니다.

“남들보다도 조금 더 선한 마음을 더 많이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선한 마음을 더 많이 일으키게 하기 위한다는 것은 그만큼 선한 공덕들을 더 많이 쌓는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네가 이생에서 해탈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네가 출가를 했는데 뭐하고 있느냐?”는 거라.

많이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러니까 딴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이 다 스님 같이 살아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스님은 후회를 안합니다. 그렇게 살아온 것들에 대해서. 그래도 잘 살아왔고 내가 이생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가지고 해야 할 일들을 했다 하고 이미 마음으로서 감사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 된 거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수행자 같이 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고 허투루 넘겨버리면 그 과보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 과보는.

그래서 어설프게 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태어났으면 치열하게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노력을 했을 때 모든 것들이 수행하는 시간들이 되고, 그러다 보면 대상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은 다음생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리고 이생에서 어떤 상태로 바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적어도 견청정에 이르르게 되면 이미 본인은 그걸 압니다.

내가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칠팔십프로는 틀림없이 좋은데 태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백프로 확신은 못합니다. 왜 그럴까?

아직은 완전히 유신견이 완전히 떨어진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자꾸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게 없습니다. 그런 버릇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는 마음이 더러움에 잘 물들지 않기 때문에 항상 고요하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돼있습니다. 항상 마음이 깨끗해있고 항상 마음이 고요하게 돼있는 상태를 유지를 하게 되는 거라.

이 견청정이 그마만큼 여러분들에게는 중요하고 반드시 이르러야 되는 것들입니다.

 

견청정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수월합니다.

그런데 견청정까지 가는 데가 굉장히 힘이 드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반드시 해야 됩니다.

언제 할 것 같애요? (수행자 대답 : ---)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죽음에 이르러서? 내가 다음생에서 그래도 좀 좋은데 태어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아니면 죽을 때 그래도 내가 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죽을 수 있다? 그런 상태는 돼야 될 거 아니라?

그게 가능한 게 견청정부터 가능하다는 거라.

 

그런데 죽을 때도 이롭고 살아서도 이로운 것들을 왜 안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좀만 열심히, 다른 거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남을 보면서 수행하라고 그래?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거, 자기 호흡하고, 자기 발걸음하고 이런 것들 그냥 사띠하고 알아차리라는 건데. 그거는 남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니라.

그래서 그 상태에는 반드시 이르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견청정에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제는 여러분들의 의지에 달린 겁니다.

견청정에는 반드시 이르러서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어지는 상태가 되고 나면, 그다음 시간에 오면 여러분 얼굴이 달라져 있습니다.

왜 달라져 있을까?

그런데 편안하고 고요한 게 안 좋아요?

잡념에 안 싸이고 얼마나 좋은데 그걸 안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한번 열심히 해보고 다음 시간에 오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