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붓다의날 법문_Aappamādavaggo 불방일(20240518)
「불멸을 목표로 한다면 불방일이야 말로 불도의 실천입니다.」
프린트물 다 받았죠?
오늘은 위사카 뿌자(visākha pūjā) 붓다의 날입니다.
태국에 있을 때 많이 기억에 남는 행사 중에 하나가 이 붓다의 날이라. 다른 거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꼭 그날 하루만큼은 스님들이 이렇게 쭉 앉아 있으면 신도들이 전부 돌아가면서 손하고 발을 씻겨줍니다. '세족식'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손하고 발을 씻겨주는데 남자들만 씻길 수 있으니까 여자들은 남자들 뒤에 손을 이렇게 딱 대고 있으면서 모든 대중들이 전부 스님들 손과 발을 다 씻겨줍니다. 그게 그래도 붓다의 날 때 최고 마음에 남아있는 현상입니다.
오늘은 손발을 씻겨주는 것이 아니고 목욕하는 수준으로 했어요. 어쨌든 고맙고, 고마운 거는 고마운 거고.
붓다의 날은 부처님 탄생하고 성도하고 열반에 드신 날이죠!
세 가지 경사스러운 날 중에 어떤 날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부처님 탄생하신 게 가장 마음에 들어 했을 거고, 테라와다에서는 뭘 보통 기릴까?
(수행자 : 성도) 성도? (수행자 : 열반) 열반입니다!
탄생은 붓다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날이지만 우리하고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성도를 해도 법을 설하지 않으면 그것도 의미가 없는 날이라. 그런데 성도 하시고 나서 쭉 45년간 법을 설하시고 나서 마지막 몸까지 버리시고 완전한 열반에 드신 날은 그래도 부처님을 회상하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에 많이 하는 법문 중에 하나가, 거의 대부분 정해져 있습니다. 그날은 태국 같은데도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고 꽃이 한참 많이 피는 때이기 때문에 "꽃도 피었다가 지는 성질이 있다" 하는 얘기들로써 부처님오신날 붓다의 날 법문을 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죽기 전에 빨리 공부해라. 빨리 공덕을 쌓아라" 하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십니다.
그다음에 많이 하는 게 뭐냐면 부처님 열반할 때 마지막 게송, 뭐라고 했어요?
(수행자 :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appamādena sampādethā(압빠마데나 삼빠데타)?
'와야 상카레나' 하면서 하는 게송이 있죠?
"모든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방일하지 말고 노력해서 깨달음을 이루어라" 하는 그런 말입니다.
불교에 부처님 말씀은 참 많은데 그래도 대부분 잊어버리지 않는 게 이 '불방일(不放逸)'이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입니다. 빨리어로 뭡니까?
(수행자 : 압빠마다)
'압빠마다(appamāda, 不放逸)' 그렇죠. 그래서 그걸 모티브로 해가지고 오늘 법문 자료를 준비를 한 겁니다.
다른 것보다는 스님한테는 기억이 참 많이 남아있던 게 공부할 때,
꼬살라국의 왕이 부처님을 만나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바쁜데 부처님한테 가서 내내 법문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그냥 나는 이 세상을 잘 다스리고 싶은데 잘 다스리고 성공할려면 우찌하면 좋습니까? 길게 얘기하지 말고 딱 한마디만 얘기해주십시요” 하고 얘기합니다. 내가 길게 들을 시간이 없으니까 짧게 얘기해달라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한 말이 이 "압빠마다(appamāda)"라고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유일한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덧붙여서 하는 얘기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줄'이다. 딱 하나 있는 생명줄은 그것밖에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압빠마다 없이 살아가는 것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걸 붙잡고 있어야만이 살아가는데 바르게 살아가지고 또 깨달음에 이르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생명줄과 같은 거니까 그것들을 꼭 붙잡고 그대로 실천을 할 거 같으면 이 세상에 더 많은 이익이 있게 될 것이다 하고 얘기하는 거와 같습니다.
오늘은 어쨌든 그 생명줄을 여러분들이 붙잡고 있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게 '생명줄'이라고 했을까?
생명줄이 좀 튼튼해야 되는데 대부분 여러분의 생명줄은 그게 안 튼튼해. 붙잡고 있으면 툭 끊어져 버리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사띠를 내내 하고 있으면 참 좋은데, 사띠 하다가 뭐 다른 일이 생기면 사띠 탁 놓아버리고 그거 그냥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생명줄을 놔버리고 그냥 여러분들이 지금 일상생활 중에서 바쁜 것들 거기에 탐진치가 있든 없든지 간에 그거하기에 바쁘다는 거라. 그거 하면서 생명줄을 붙잡고 하면 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그냥 탁 놔버리는 거라.
왜 그럴까 이? 그냥 계속 붙잡고 있으면 좋은데 왜 그렇게 탁 놔버릴까?
안 놓아지는 사람은 언제 안 놓아지게 돼요?
퇴보하지 않는 상태! 언제가 되면 가능해요?
(수행자 : 예류과) 그렇죠.
수다원이 되고 나면 더 이상 퇴보하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줄을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부터는 자동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게 목욕을 하는 일이든 화장실에 가는 일이든, 밥을 먹는 일이든 아니면 집중수행을 하는 일이든 어떤 일이든 '사띠와 함께' 그 일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퇴보하지 않는 상황이 그때가 되면 가능한데, 그때가 안되면 어쩔 수 없이 퇴보를 하게 됩니다.
되도록이면 그 시간을 줄이는 게 여러분들 수행의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찌 줄일 수 있을까?
탁 놓쳤으면 ‘아, 또 놓쳤네’ 하고 탁 붙잡아야 되는 거지 뭐. 다른 수가 없는 거라.
어떨 때 놓치게 돼요?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날 때, 감각적인 욕망에 빠지면 그 생명줄은 탁 놓게 됩니다.
한번 그래봅시다. 감각적인 욕망에 탁 빠졌다. 그러면 ‘어, 또 내 생명줄을 놓쳤네’ 하고 사띠를 해야 되는데,
사띠를 못하고 있을 때는 맨 처음에 뭘 해야 될까?
최고 먼저 하는 게 자기 통제부터 먼저 해야 됩니다.
‘어, 내가 술 먹을라 하네’, ‘내가 욕심부릴려고 하네’ 그것부터 먼저 알아차리고 딱 자기를 통제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술도 못 먹고 욕심도 안 부리게끔 먼저 탁 막아서야 됩니다.
비유적으로 얘기하면 수행을 할 때 스님이 항상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순수하게 그냥 위빳사나 수행만 먼저 할려고 하지 말고, 어느 정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서 대상이 드러나지면 대상을 보라" 하는 얘기를 합니다.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사마디(samādhi)에 가까운 상태, 사마디가 아니라도 사마디에 가깝다고 해야 됩니다. "계정혜 중에서도 정을 먼저 닦아라"는 뜻과 같습니다.
자신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대상은 드러난 걸 갖다가 자기가 임의로 조작을 하게 되는 거라. 내가 아직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들을 판을 짤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내가 호흡을 할려고 하게 되니까 내가 개입된 호흡은 그건 자연스러운 게 아닌 거라. 그래서 일단은 놓고, 놓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진 상태를 먼저 만들고 나서 대상이 드러난 것을 사띠를 하라 그럽니다.
욕망이 일어났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첫 번째가 압빠마다! 두 번째가 사띠입니다!
사띠는 지혜를 닦는데 필요한 것인데, 압빠마다는 실제적으로는 정을 닦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압빠마다와 사띠가 동의어로 쓰여지고는 있지만 엄밀하게 볼 것 같으면 다른 계통들입니다.
그래서 먼저 욕망이 일어났으면 ‘어, 이러면 안돼’하고 자신이 멈추고 절제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자꾸 일으켜야 된다는 거라.
‘어, 내가 자비심이 없었네’ 하면 아, 자애수행을 한다든지 그렇게 돌아가져야 그게 순서가 맞는 것이지, 그냥 반성도 없이 ‘아, 내 놓쳤네’ 하고 놔줘버리고 그냥 바로 사띠로 들어가버린다? 좀 있으면 또 일어나진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되는 게 이 압빠마다와 사띠가 연이어서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작용들이 항상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리해야만이 거기에 톡 떨어지고 퇴보하는 것들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막지는 못하더라도 거기서 크게 떨어지는 것들은 막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의 경험을 잘 한번 돌아보십시요. 그러면 답은 금방 나올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계, 정, 혜 각각의 단계에서 퇴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죠? 오늘 팔계 지키죠? 팔계 자기는 잘 지키고, 다른 사람은 누가 팔계를 안 지켰다, 그러면 저녁 때 누가 밥 먹는 거 같으면 “야, 니 또 밥 먹었네” 하면서 놀립니다. 왜 그렇게 될까? 자기는 잘 지키더라도 잘 지킨 게 너무 좋은 거라.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비교를 할려고 그럽니다. ‘저 사람이 잘 지키고 있나?’ 잘 안 지키면 어떻게 해요? 비난하게끔 됩니다.
그다음 오늘 붓다의 날이니까 수행 열심히 하고 있거든.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수행을 안 해도 여기 오면 어쨌든 평화롭습니다. 평화로우니까 좋은데 누가 탁 그걸 깨는 행위를 했다 그러면 성질이 발딱 일어납니다.
수행 열심히 하고 사띠를 열심히 잘하고 있어가지고 대상이 일어났으면 사라지는 것이 금방금방 보이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써 구분을 해서 잘보고 있는데 누가 수행 안 하고 자꾸 떠들고 있다 그러면 성질이 또 발딱 일어납니다.
계·정·혜의 각각의 단계에서 항상 일어나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그게 뭐라? 비난하고 비교할려고 하는 성질입니다.
그게 일어나면 일단은 자신이 퇴보한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떨어져버린다고, 생명줄을 놓아버린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특히 수행자들은 그걸 조심을 해야 됩니다.
지가 잘 지키고 있으면 또 잘 하고 있으면 그냥 지거 해! 왜 넘의 거 자꾸 신경을 써? 괜히 참견할려고 하지 말고 “너는 경행을 이렇게 하면 안 돼. 천천히 해” 그건 그 사람이 했을 때 왜 니가 신경을 쓰느냐는 거라.
자기는 자기 방식대로 계정혜를 닦으면 됩니다.
오히려 닦다가 다른 사람을 비교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 사람에게 진짜 내가 자애의 마음을 보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걸 비교하고 비난할려고 하는 마음이 들면, 일단은 동아줄을 생명줄을 놓는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걸 방패삼지 말아라는 거라. 자신이 잘하고 있는 계정혜를 방패 삼아서 남을 비교하고 비난할려는 마음을 거두어들일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행위는, 그건 당연히 생명줄을 놓는 것은 생명줄을 놓는 거고, 반드시 그 과보들은 자신이 또 받게 된다는 거라.
두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언제 또 생명줄을 놓고 퇴보하게 되느냐면, 수행에서 뭔가 빠지기 쉬운 함정들이 있습니다. 고요함에 빠질려고 할 때.
고요해지고 편안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호흡도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변하지 않아도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계속 보고, 고요해져서 호흡이 점점 멈춰지는 걸 바란다는 거라. 그러면 실제로 호흡도 그렇게 점점 멈추어집니다. 들이쉬는지 내쉬는지도 모르고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한시간 동안을 보내고 있는 거라. 그게 자기 자신을 딱 붙잡고 있는 함정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그렇게 붙잡고 수행을 한다는 거라.
고요함을 찾을려고 하는 것들, 평온함을 찾을려고 하는 것들, 거기에 빠져들어 버리면 그 수행시간은, 물론 육체적으로 피곤하면 이런 것들은 몰아낼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인이 육체적으로 편안해지니까 ‘아, 수행잘했다’ ‘아, 기분좋다’ 하고 얘기하는 것뿐이라. 그래서 그걸 좇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수행할 때는.
근데 그걸 좇으면 어떻게 될까요? 근데 그거는 자기가 쫓든 말든 그건 자기가 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해도 돼.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고요함과 평온함을 좇아가다 보면 굉장히 예민해집니다. 그러면 옆에서 소리가 나도 금방 짜증이 나요. 다른 때 짜증이 일어나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일어납니다. 또 그 소리가 그냥 일상적인 소리인데도 굉장히 강하게 와닿거든.
그게 자꾸 습관이 들면 직접적으로 짜증은 안 냈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짜증이 자꾸 일어나는 습관이 자꾸 들고 하면 일상생활을 할 때도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을 대하는 것들이 짜증섞인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인간관계도 원활하지를 못해요. 왜 악순환의 고리를 자꾸 물고 들어가느냐는 거라.
대상이 편안하고 고요한 것만 찾을 거 같으면 그냥 자는 게 가장 좋지 뭐라.
대상은 그런 게 아닙니다.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쉽게 고요하고 편안한 것이 있고, 또 고통스러운 것들도 있게 되고, 수행은 힘들어지면서 나중에는 힘든 것들을 벗어나는 단계가 돼야 되지 처음부터 그냥 편안하게만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건 수행의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는 거라.
절대 수행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면,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그걸 너무 찾을려고 그럽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말로 하면 ‘니밋따가 일어난다든지 부처님이 보인다든지 아니면 사띠가 아주 강해져가지고 그냥 대상이 깨질듯이 이렇게 사띠가 강해진다든지, 또는 대상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보이는데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인데 그게 쭉 유지가 된다든지’, 수행을 잘하고 있는데도 그게 장애로써 작용을 하게 되는 거라.
왜 그럴까?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것들인데 그게 장애가 됩니다. 실제로는 맞기는 맞는 건데, 대부분은 그게 일어나면 그것들을 더 좇게 됩니다.
대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보인다는 거라. 마음이 그렇게 끊임없이 사라지는 게 보이면 그냥 그대로 또 보고 있으면 되는데 그걸 더 볼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거라. 더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안돼. 거기서 대부분은 끝나버리게 되는 거라.
수행할 때 그런 것들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거는 그냥 대상일 뿐입니다. 그냥 대상이기 때문에 대상으로서만 보고, 그게 사라지고 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 것이지, 그것만 계속 보인다 할 것 같으면 이미 내가 그걸 쫓아가고 있는 거라. 동아줄은 이미, 생명줄은 놓쳐버리고.
그럼 어떻게 될까?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자꾸 빠질려고 그럽니다. 소리가 들린다고 그러면 소리들리는 신통을 개발할려고 한다든지 자꾸 초자연적인 것으로써 남들이 못하는 것들을 자꾸 할려는 마음들이 생겨나버린다는 겁니다.
수행은 안될 때도 문제지만 잘될 때도 여러분들이 항상 내가 지금 생명줄을 놓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점검을 해야 됩니다.
또 하나 문제가 뭐냐면 그렇게 해가지고 수행이 잘될 때 선정에 금방 쑥 들어가집니다. 그런데 선정에 들고나서는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선정에서 나올 때는 뭐로 전환해야 돼요? 위빳사나로 전환해야 되는데 전환이 안 됩니다.
왜 그럴까? 내가 그 선정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선정에는 들었다가 다시 나올지는 몰라도 그다음 선정으로 넘어가기도 힘들뿐 아니라 그 선정에서 나오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보기가 힘들어진다는 거라.
선정을 계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각각의 수행이 잘될 때 일어나는 현상들에 현혹돼가지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자꾸 빠져들어가버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선정이 계발되는 사람들은 선정에 또 매몰돼버린다는 얘기라.
수행은 여러분들이 항상 압빠마다라고 하는 것과 사띠가 같이 일어나는 것들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퇴보하는 단계들은, 이걸 부처님은 '질병'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질병.
「나」라고 하는 것이 아주 수승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는 상태!
아마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마음들을 많이 가질 겁니다. ‘나는 여러분들하고 틀려’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자기 자신이 엄청 잘하고 있다고 잘났다고 이렇게 판단하려는 것은 그사람의 문제인데, 문제가 뭐냐면 그렇게 되면 대부분은 예를 들어서 누가 얘기를 한다, 그러면 한두마디 듣고 그걸 다 들을려고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판단해버립니다. 그러면서 그것에 대한 답을 탁 줘버립니다.
이 사람이 그걸 얘기하는지 안 하는지도 생각 안하고 그냥 다른 사람을 판단을 딱 해버립니다. 그리고 '너는 잘난 사람, 너는 못난 사람, 너는 뭐가 부족한 사람'하고 판단을 해버리고 그걸 자기화시켜 버립니다. 그 사람은 항상 못난 사람이 되고 잘난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되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친구라든지 원수라든지 만드는 것이 그런 과정들을 대부분이 겪을 겁니다. 자기 자신이 견고하게 돼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원수가 십년동안 원수가 돼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십년 동안 ‘나는 저사람의 원수다’ 하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자기는 만들고 있다는 거라. 견고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또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드는 병중에 하나가 뭐냐면, 명상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그걸 자꾸 합리화시켜버립니다. 그게 맞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 그때는 어느 스승이 "아니다"고 얘기를 해도 안 들어갑니다. 소리가.
이상한 세상을 자기가 스스로 만든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현실을 자꾸 외면할려고 그럽니다. 나는 현실세계와 안 맞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는 현실세계에 살아야 되는데, 그래서 이걸 갖다가 부처님은 '중병'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자꾸 예방을 해야 됩니다.
생명줄을 꼭 잡는 훈련들!
사띠하는 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놓치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생명줄을 놓치지 않는 것은 사회성을 길러야 됩니다. 두 번째가 사회성을 기르는 것들이 돼야 됩니다. 자꾸 수행만 하고 싶다. 아니면 현실세계를 자꾸 외면하고 싶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이건 잘못 지금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두 가지는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압빠마다라고 하는 것은 사띠만 잘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다 돼서 지금 다할 수는 없는데 압빠마다에 대한 것들을 스님이 경전들과 주석서를 다 비춰가지고 뽑아보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압빠마다(appamāda)는 사띠를 놓치지 않고 아라한과에 도달할 때까지 그 목표를 망설이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선한 법들을 실천하는 것이 appamāda」라는 겁니다.
사띠를 잘해야 되는 거고,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완전하게 아라한이 될 때까지 그 목표를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 되고, 그다음에 세 번째가 모든 선한 법들을 실천하는 것! 보시를 하든, 지계를 하든, 여러 가지 다른 바라밀을 쌓든, 그것들 모든 것들도 다 압빠마다에 포함되는 것이지, 그냥 사띠만 잘하고 있다? 그래서 자꾸 수행만 하고 현실을 외면할려고 한다? 그러면 반쪽짜리 압빠마다 밖에 안 된다는 얘기라.
특히 오늘 같은날 들은 여러분들이 선한 법들을 익히고 쌓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그럴 때는 선한 법들이 더욱더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고, 그 선한 법들이 나중에 사띠가 다음 단계 단계 단계로 올라가는데 밑받침하고 북돋아주는 역할들을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
그래서 어느 순간에 인제는 완전하게 생명줄을 쥐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퇴보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르게 되면 이제는 더이상 다른 법이 필요 없는 거라.
꼰단냐가 법을 얻고 아라한이 되기 전에 수다원이 되고 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난 더 이상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물러서지는 않는다. 더 이상 다른 법은 필요 없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압빠마다에 중요한 역할들이기 때문에 그 세 가지들은 잊지 않고,
아라한이 될 때까지 그것들을 향해서 물러서지 않도록 하고,
사띠를 열심히 하고,
선한 법들을 증장하기 위해서 더욱 더 노력하는 것들은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늘 같은 부처님 오신 날에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될 몫이라고 그렇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23~2024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마와나선원 _ 붓다의날 오후 질의응답 (20240519) (1) | 2024.05.22 |
---|---|
2024년 담마와나선원 붓다의날 법회_부처님의 4가지 위력 (20240519) (2) | 2024.05.21 |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20240504) (0) | 2024.05.04 |
자애수행할 때 주의깊게 봐야되는 부분_자애수행으로 선정에 들도록(20240420) (2) | 2024.04.21 |
수행자는 대장장이와 같다.(20240406 탁발법회) (1) | 2024.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