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수행자는 대장장이와 같다.(20240406 탁발법회)

담마마-마까 2024. 4. 6. 16:37

https://youtu.be/Bl_H6GE4ZvU?si=8_6SKYAVKjSl7MJ6

 

* 수행자는 대장장이와 같다.(20240406 탁발법회)

 

오늘은 「수행자는 대장장이와 같다」 하는 이야기로써 하겠습니다.

어제가 사전투표였다면서요? 어제 한 스님이 찾아왔어요.

테라와다를 가르친다고 하는 스님인데 한국승복을 입고 있는 스님인데, “투표하러 온 김에 겸사겸사 해가지고 스님 한번 얼굴 뵈러왔습니다.” 하면서 왔더라고. 그러면서 첫마디가 “스님은 투표 안 하십니까, 하러 안 가십니까?” 그러시더라고.

태국에는 스님들이 투표권이 없습니다, 선거권이. 투표를 안 해요. 출가를 해서 승적을 얻고 나면 승적이 바뀜과 동시에 선거권 자체가 박탈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막 열변을 토하는 거라. 꼭 투표해야 된다면서, 뭐 자기가 좋아하는 정당의 이름을 얘기하면서 강요하다시피 막 얘기해. 그래서 계속 얘기해봐야 머리만 아플 것 같고 해서 “예. 알겠습니다. 투표하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지 좀 있다가 한다는 얘기가, 우리 앞에 저기 돌복숭아꽃 피어있죠? 그 꽃나무를 보더니 꽃이 참 예쁩니다. 이거 좀 어떻게 분지, 분지라고 그러나? 그걸 뭐라고 그래요? 가져가는 걸? 삽목? 저게 삽목이 돼나?

그래서 저걸 좀 어떻게 가져갈 방법이 없느냐길래 아무리 주위를 봐도 조그만 나무가 없어. 그렇다고 스님이 '가지 꺽어가시오' 하는 소리는 못 하겠고, 그래서 요기는 지금 없으니까 나무 파는데 가면 틀림없이 요게 있을 거다 하고 얘기를 하고, 버들 식으로 이렇게 눕는(가지가 아래로 쳐지는) 돌복숭아 나무니까 그걸 달라고 해가지고 하나 사가십시요 하니까, 아무 소리를 안 해.

 

그걸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게 참 힘들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까 선거 얘기를 할 때 선거 투표를 안 한다고 하니까 금방 싫은 마음이 탁 일어났거든. 그건 왜 일어날까? 원인이 투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게 원인이 돼서 투표를 안 한다고 하니까 싫은 마음이 탁 일어나게 되는 거라.

경전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즐겁고 괴로운 마음은 의도를 조건으로 해서, 의도를 원인으로 해서 다른 조건들과 결합해가지고, 이 '다른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나 여러 가지들이겠죠. 그런 것들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난다 하는 그런 경전 구절이 있습니다.

투표하겠다니 금방 좋아져버리는 거라. 마음이 자기가 일으키는 견해에 따라서 이렇게, 그것도 출가한 스님인데 좋고 싫은 마음들을 계속 확 드러내가지고 되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여러분은 안 그러죠?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어떻게 했을까?

수자타 유미죽을 탁 받아 드시고 나서, 어떤 마음이 생겼을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 이 자리에서 안 일어난다고 했죠!

굳은 마음을 탁 가지고 거기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그 밤을 새는 동안에 주변에 일들이 왜 없겠어요? 어둠도 내려오고, 들짐승 소리도 들릴 거고, 그다음에 마음에서도 온갖 번뇌들도 일어날 거고, 참 많은 것들이 일어나는데, 경전에는 아무것도 안 적혀있습니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오직 도를 이루겠다는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들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참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금방 도와 과에 들 건데,

"수행자는 대장장이와 같다" 하는 얘기를 했죠! 벌겋게 달군 쇠는 어떻게 해요?

원하는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 그 쇠가 식기 전에 어쨌든 두드려야 됩니다. 힘들다고 탁 멈춰버리면 그 쇠는 내가 원하는 형태로 안 만들어집니다.

"안 만들어진다"는 것은 "수행에서 일정한 상태가 도달하기 전에 자꾸 주변 것이 눈에 보이면 수행은 멈추는 겁니다."

 

멈추면 어떻게 돼요? 쇠가 식어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다시 처음부터 달구어야 되는 거라. 그냥 한 2~3분 죽자사자 그걸 두드렸으면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거라든지 원하는 방향 비슷하게라도 돌아갈 건데 그렇게 안 하는 거라.

대부분 어떤 장애들에 탁 부딪칩니다.

되게 좋다든지 아니면 내가 열반을 체험했다고 상상하든지 이러면서 탁 멈추어버리는 거라.

 

그리고 실제로는 열반을 체험한 것은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 열반은 어떤 걸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다 탁 끊어진 상태가 찰나 간에 몇 찰나 동안 계속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대상이 보이게 되는데,

실제로는 나중에 그것이 열반을 체험했느냐 하는 것은 그뒤에 내가 안 일어나는 번뇌가 어떤 건지를 내가 유추를 해보면 알게 되는데, 그렇게 안 하고 대부분은 뭔가 새로운 걸 탁 경험을 하면 그걸 열반이라고 착각을 한다든지, 그러면서 잘못 이해를 하는 경우들이 생겨납니다.

 

수행은 멈춰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다시 관찰을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다시 반복을 해야 된다는 거라.

 

경전 주석서에는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때의 그때의 마음의 상태"를 그렇게 파악을 합니다.

도를 이루겠다는 확고한 마음을 탁 가지고 수행을 하니까 당연히 정진하는 힘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다가 대상을 놓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니까 당연히 다섯 가지 오력이라고 하는 것이 균형이 맞아지는 거라. 얼마만큼 뭘 관찰해야 되는지, 또 지금 내 상태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수도가 터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일단 물새는 걸 막아야 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물 새는 걸 빨리 막아야만이 그다음에 그걸 다른 기구로 가지고 끼워가지고 물이 새지 않게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만약에 원자로가 유출된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은 지금 당장 죽음 앞에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든 죽기 살기로 그 원자로가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 됩니다.

 

수행은 그냥 편하게 그냥 할려고 생각하면은 절대 일정한 경지까지는 못 올라갑니다.

죽기살기로 해야 됩니다. 죽기살기로!

그렇게 하는 타이밍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특히나 어느 정도 수행이 잘돼서 사띠가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가 되면 대부분은 마음을 흐트려버립니다. 수행이 잘되기 때문에, 사띠가 잘돼고 일어나는 것들은 금방금방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보면 탐진치에 빠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어떻게 탐·진·치에 빠질까? 조금 전에 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무상한 성품으로 봐야 되는데 예쁘다고 보게 되는 거라. 꽃이 지면 그게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쁘다 하면서 즐거운 느낌으로 그냥 쭉 계속 가게 됩니다. 일정한 시간 동안을 그렇게 즐거운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즐길 거리를 또 찾게 되는 거라. 벗꽃이 지니까, 벗꽃이 떨어지고 나면 또 뭔 꽃이 피죠? 그거 또 보러갈려고 그럽니다.

 

또 하나 실수하는 것이 어떤 거냐하면, 스님도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하는데,

문답하러 와가지고 수행에 대한 문답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걸 자꾸 물어봐.

“스님,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애가 안 바꾸는 것을 스님이 그걸 어떻게 할끼고? 하여튼 그런 것들을 자꾸 물어보면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여러분들 수행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하다가 일상생활을 해야 되죠? 일상생활을 할 거 아니라. 그러면 수행을 놓아버립니다. 그냥 일상생활을 가볍게 알아차리는 형태로서 바뀌어버립니다. 그런데 그게 좋고 싫은 느낌이 안 일어나고 탐진치 없이 일상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까? 대부분 거의 힘듭니다.

왜? 아직은 일정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 같은 경우에는 법에 대한 것이나 수행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다른 걸 물어보면 그냥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씨익 웃어줍니다. 한참 동안 자기가 얘기하다가 자기가 문제를 발견하고 답을 알고 자기가 스스로 그만두게 되는 거라.

 

여러분은 말을 할 때 어떤 말들만 하고 삽니까?

법에 대한 것만 얘기합니까? 자기의 수행에 대한 것만 얘기합니까? 해탈에 대한 얘기들만 합니까?

적어도 여기 선원에 왔으면 그것만은 해야 될 거 아니라? 다른 거 하지 말고. 뭘 그렇게 얘기할 것이 많아가지고 다른 세속적인 얘기들을 계속적으로 하느냐는 거라.

그걸 하는 순간에 수행은 나락에 탁 떨어집니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여기서 좌선하고 경행하고 해가지고 좀 어느 정도 올려놓으면 또 나가면서 그러면서 또 탁 깨버립니다. 좌선하고 경행하고 집중했던 수행 시간들을 가면서 일상생활하는 것으로서 그대로 바뀌어나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냥 탁 깨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소리 들리면 그냥 즐겁게 듣고 기분 나쁘게 듣고, 그냥 ‘들린다’하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거라. 보면 ‘보인다’고 하고 해야 되는데 ‘예쁘다 밉다 잘생겼다’ 이러고 있는 거라.

 

수행은 타이밍입니다.

어느 순간에 딱 법에 대한 것들만 확고하게 돼서 그것만 탁 해버리면 부처님과 같이 한나절 만에 깨달음의 길로 탁 들어섭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들을 안 품는 거라.

지금 당장 원자로가 누출됐다, 아니면 불에 달구어진 쇳덩이를 빨리 제련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자꾸 옆길로 새면서 안 그러면 식혀버리고 아니면 그냥 유출되는 걸 그냥 놔둬버립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걸 보든지 매순간 변해가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고 볼려고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그냥 개념적인 성품으로 자꾸 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수행에서는 굉장한 장애다 하는 것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하는 그런 상태가 없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올곧이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들만 해야 됩니다.

 

해탈에 이르는 두 가지 조건 전에 얘기한 적 있죠?

'까라니야 멧따'하고 '요니소마나시까라' 그 두 가지가 갖추어진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선우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안 계시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안 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뒤져보라는 거라. 뭔가 막혔으면 ‘아, 어디에서 막혔다’ 하는 것을 자기가 자꾸 그걸 들여다봐야 됩니다.

가르침은 그런 역할들을 해줍니다. 내가 수행이 벗어날 때 바로 잡아주는 역할들을 해줍니다.

 

그런데 실천수행하는 것은 요니소마나시까라 입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 대상들은 모든 대상들은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변해가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그렇게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경행을 한다. 발을 들어올린다, 내려놓는다. 왜 들어올려져요? 왜 내려집니까?

들려는 의도가 있어가지고 발을 들 때 바람의 요소가 작용을 하니까 발이 들려지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의도가 있고 바람의 요소, 사대 요소들에 대해서 ‘아, 바람의 요소가 있구나’

특히 나아갈 때 더 잘 관찰이 되어지는 거라. ‘아, 이게 바람의 요소구나’ 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 바람의 요소도 일정하지 않고 ‘그것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구나’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지 않으면 나아갈 때는 계속 나아가지게 됩니다. 들어올릴 때는 계속 들어올려지게 됩니다.

그 모든 순간에 의도가 개입되어서 멈출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고 딱딱한 것이 딱 생기면서 발이 멈춰지는 거라. ‘땅의 요소가 생겨났구나’

바람의 요소가 생겨났을 때는 땅의 요소가 없고, 땅의 요소가 생겨났을 때는 바람의 요소는 없습니다.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졌고 또 다른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의도가 일어나고 사라졌고, 바람의 요소가 일어나고 사라진 것뿐입니다.

수행에서 광명을 보든지 아니면 뭔가 공에 빠진 것 같이 해탈 열반을 경험한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도,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라는 거라.

 

왜? 본인은 알거든. 그 순간순간에는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

수행이 진척되면 가장 먼저 되는 것이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집니다.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그 부분이.

 

그리고 지금 일상생활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보면 본다고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맛보면 맛본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그렇게 맛보면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은 안 일어나는구나, 그냥 맛보는 것뿐이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나에게 인제 안 일어나는 것이 뭐고, 아직도 일어나는 것이 뭔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거라.

 

수행의 성과는 그런 겁니다. 직접적으로 내가 경험되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수행해나가다 보니까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탁 들여다보니까 정확하게 지금 내 얘기 내 상태를 지금 점검을 해주고 있거든.

그러면 ‘아. 부처님 가르침이 참 이렇게 소중하구나’ 하면서 환희심이 일어나는 거라.

불·법·승 삼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더더욱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확신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누가 와서 어디 놀러가자 하든 뭘 하든 그것에 동요 안 하는 거라. 또 내가 다른 사람을 선동해갖고 놀러갈려고 하지도 안 해.

다른 사람을 악으로부터 물들이지도 않고, 내 자신이 악으로부터 물들지도 않는 상태라는 거라. 그거보다도 나는 지금 수행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라.

조그만 실수도 안 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수행이 무르익어 가면은 "원인·결과 뿐이다" 하는 것도 분명하게 압니다. 생겨났으면 사라지게 돼 있고, 사라지는 것이 조건으로서 원인이 되어서 또 다른 생겨나는 것이 결과로써 나타나게 돼 있다는 거라. 원인·결과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탁 마음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뚜렷해지게 되는 거라.

얼마나 큰 수행의 이익이에요?

 

그런데 왜 자꾸 좋고 싫은 것들에 따라서 새로운 경험한 것 그런 것들을 자꾸 마음에 담아두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리고 그런 경험을 다시 또 할려고 하고.

그거는 수행의 장애입니다.

장애는 장애로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놓아버려야 됩니다.

한 곳을 향해서 전심전력으로 달려갈 때 그런 결과들은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 선원에 요 밑에 비가 좀 오면 저 밑에 웅덩이가 형성이 됩니다. 물이 빠지는 게 경사가 원만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데, 스님도 경행하러 내려갈 때 그 웅덩이를 지나가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웅덩이를 뛰어넘을려면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이 그 웅덩이를 뛰어넘게 되는 거라. 전심전력으로 달리지 않으면 저쪽에 가서 탁 건너뛰지를 못하는 거라. 물을 탁 밟게 되는 거라.

 

수행을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법에 관한 것들 외에는 생각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아직 수다원이 되기 전에도 그렇게 해야 되는데, 당연히 도와 과를 이루면은 더더구나 더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물론 아직은 마음속에서 성냄이 일어나는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좀 더 돈을 모을려는 욕심도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돈을 모으지 말고 항상 자애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해야 되는 거라.

돈을 모으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돈의 쓰임을 바르게 써야 되는 거고, 마음에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들이 생기면 아, 이거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자애로 바꿀려고 하고.

 

일상생활을 법에 맞게끔 자꾸 행해야만이 수행을 할 때 법을 향해서 전심전력하게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수행처에 와서 몇시간 딱 수행하고 그냥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간다, 그런 안이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수행을 하도록 노력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