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인오선원 개원기념법회_아짠 빤냐와로 큰스님 법문[1] (20240331)

담마마-마까 2024. 4. 1. 16:01

https://youtu.be/QXZy2tTWdWM

 

* 인오선원 개원기념법회_아짠 빤냐와로 큰스님 법문[1] (20240331)

 

대연스님한테 작년이죠? 작년에 법문요청을 받았어요. 법문내용을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어떻게 될까? 믿고 따라야만이 잘 살아간다" 하는 그런 얘기를 들려주십사 해서, 그걸 중심으로 여러분들한테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 따르고 있습니까?

따라야 뭔가 결과물이 있을 거 아니라. 부처님이 "성질내지마라" 했는데 성질 다 부리잖아. 요즘 같은 봄철에는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가지고 보면 ‘보인다’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어머! 벗꽃이네!” 하고 놀러다니고 다 그러잖아요.

부처님 가르침을 안 따르는데 스님이 오늘 법문할 이유가 있나? 있어요? 따르는 사람들이 그중에는 있겠죠? 그중에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부처님 법이 참 좋은 게 뭐냐면 이 중에 오늘 내준 프린트물 한번이라도 읽으면 다행이고, 또는 중간에 읽고 버리더라도 그것도 좋은 건데, 그래도 ‘아, 내가 이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좀 자신들을 바꿀려고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게 부처님이 법을 설한 목적이 됩니다.

점심 공양 하셨죠? (대중들 : 예)

배가 든든하니까 인제는 다른 거 생각 안 하고 법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은 됩니다.

법을 들을 수만 있으면, 그걸 있는 그대로 듣기만 하면 됩니다. 잘 듣기만 하면 그 속에서는 내가 틀림없이 얻는 것은 생겨나는 거라.

더불어 법을 들으면서 ‘아, 진리가 이런 것이구나’라고 탁 깨우치기도 하는 사람이 생길 수가 있다는 거라. 그 딱 한 사람 때문에 사실은 법을 설하는 거라.

 

부처님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자리에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참 적었습니다. 물론 경전에는 "500명이 전부다 수다원에 이르렀다, 아라한에 이르렀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그거는 극히 일부고, 그렇게 많은 법을 설했는데 대부분은 그냥 흘러들어버리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봐집니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면서 법을 들으면서 그걸 듣고 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고 그럴까?

잡생각 안 하면 됩니다. 잡생각.

망상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 망상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난다라고 하는 분이 있었어요.

이 스님이 어느 날 좋은 가사가 하나 생겼거든. 그래서 본인이 안 입고 ‘이 가사를 내가 부처님한테 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확 드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부처님 방을 깨끗하게 치워놔놓고 탁 기다리는 거라.

부처님이 오시니까 난다가 “부처님, 제가 이 가사가 생겼는데 부처님이 이걸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착 드리는 거라.

부처님이 가만히 보니까 이 난다가 목적이 있거든.

대승불교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경우들이 많죠? 만약에 백중이다, 백중기도를 착 스님한테 드렸단 말이라. 기도는 왜 드리죠? 뭔가 목적이 있죠? 그냥 드리진 않을 거 아니라? 틀림없이 뭔가 목적이 있다는 거라.

 

난다도 마찬가집니다. 부처님한테 착 드리니까 ‘내가 부처님한테 이 가사를 드렸으니까 당연히 자기가 그 공덕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깨달음에 이르겠지’

그래서 그런 ‘깨달음에 이르겠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거라. 부처님이 가만히 보니까 ‘이게 그냥 가사를 나한테 주려고 하는 게 아니네’ 하는 게 보이거든.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일반적으로 어른 스님들은 대부분 와서 뭔가 얘기를 하면 그 목적이 눈에 보입니다. 스님도 마찬가지고. ‘저 사람이 왜 와서 인사를 하고 저런 말을 하지’ 하는 게 눈에 보여.

대부분은 보면 뭔가 그렇게 성자들이나 아니면 큰 스승들한테 뭔가 보시를 하고 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경우들은 아주 극히 소수고, 또는 법을 얻어가지고 가서 내가 실천할려고 하는 사람들도 더더구나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보면 어떤 일들이 있어가지고 그것들을 조금 떨쳐버릴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강한 게 보여집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난다한테 “나 이거 가사 못 받아. 나 가사 있으니까 다른 스님들 줘” 하고 얘기합니다. 세 번을 청했는데 세 번을 다 거절 당했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떨 거 같애요?

우리 대연스님이 “너는 보기 싫으니까 여기 선원에 오지마” 만약에 그렇게 했다, 그럼 어떻게 돼요? “스님이 뭐 때문에 오지마라 가지마라 해” 이러지?

난다도 마찬가지라. 화가 확 올라오는 거라. ‘내가 지극정성으로 부처님한테 가사를 올릴려고 하는데 왜 안 받아’ 하면서 화가 확 일어나는 거라.

그냥 화가 한번 일어나면 괜찮은데 대부분의 화는 장작불에 불을 지펴놓은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냥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다른 걸 다 태워버려요.

 

화가 일어나면 대부분 보면 누가 화를 냅니까? 누가 화가 난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화가 난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화라고 하는 것이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뭔가가 접착제가 돼가지고 '나'가 거기에 딱 결합이 되면 내가 화를 내게 되는 거라. 그냥 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요게 딱 결합이 되고 나면 세멘트 같이 단단해져가지고 이게 떨어지지 않아요. 내가 화가 일어나니까 내가 화가 일어나서 뭔가 또 다른 일들을 자꾸 만들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망상을 하게 되는 거라.

 

계속 망상을 하게 되는 거라. ‘왜 부처님이 안 받을려고 할까. 내가 이 가사를 가지고 다른 일을 할 것 같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은데, 에이 내가 여기에 출가하고 있을 필요가 뭐 있어? 그냥 나 집에 갈래. 그리고 이 가사 이 좋은 가사, 비단 가사 이거 내가 팔아가지고,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토끼를 한마리 샀다, 그거 잘 키워가지고 염소를 사고 다시 또 뭘 하고 해가지고, 마누라 얻고 옹당옹당 잘 살면 되지’ 이러면서 막 망상으로 번집니다.

 

그냥 성냄이 하나가 있을 때는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데, 대부분 ''가 결합하고 나면 결합하는 순간에 망상이 계속 증폭된다는 거라.

누구 하나 미운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미움이 한번으로 끝나면 좋은데 그 사람이 미운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그리고 '상대방'이라고 하는 것이 딱 개입이 되고 나면 그사람이 미운 게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라. 그래서 그사람이 뭘 말해도 제대로 안 들리게 되고 그 사람을 용서할려는 마음이 안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참 '나'가 결합이 되면 참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이렇게 부채질을 하고 있는 동안에 부처님도 다른 사람하고 얘기를 하고 법에 대해서 전해주고 이리 하고 있는데, 그게 부채질이 잘 되겠어? 오만 망상을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부처님을 탁 때리거든. 때릴려고 때리는 게 아니고 망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부처님을 때려버린 거라.

여러분도 그런 경우 있죠? 자식이 말 안 들으면 내 자식이 그리고 나를 화나게 했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화만 내는 게 아니고 줘패버립니다. 나중에는 패고 나서 “아, 엄마가 잘못했다” 하고 그럽니다. 왜 그렇게 바껴?

 

난다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와 같이 바뀌어나가는 걸 부처님은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니가 줘패느냐? 니 망상부릴 때 그냥 니 혼자 망상부리는 게 아니고 그 망상이 얼마나 큰 위험이 있다는 걸 인제 너는 알겠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처음에는 조그만한 거였거든. 부처님이 내가 올린 가사를 받지 않는 거라. 부처님이 받을 조건이 안되니까 안받은 거 뿐인데 본인은 '내가 올린 가사를 안 받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화가 일어나고 망상을 자꾸 하게 되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 참 좋은데 부처님 가르침을 난다라고 모르겠어요? 여러분도 부처님 가르침이 뭔지 알죠? 대표적인 거 한번 얘기해봅시다.

부처님 가르침이 뭐에요?

"악한 일하지 마라." 쉽게 말하면 악한 말, 악한 행동, 악한 생각들 그런 것들은 천한 것이다 해서 악한 일들을 하지 마라 라고 그럽니다.

그걸 잘 안단 말이라. 그런데 하고 있죠? 왜 그래요?

그게 가슴속에 와닿질 않거든. 그리고 그걸 실천할려고 하는 마음이 안 생긴다는 거라.

 

또 부처님 가르침 중에 대표적인 게 뭐에요? 어떤 거에요?

"항상 자기 자신이 말을 하고 행동하고 할 때는 자애를 지니고 행하라."

근데 알기는 아는데 자애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거 그냥 다반사로 합니다. 그냥 툭툭 뱉어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애를 지니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라고 했습니다. 그걸 알고 있단 말이라. 그런데 못하고 있는 거라.

 

또 부처님 가르침이 뭐가 있어요?

"세상의 견해들에 조종당하지 말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매체가 많아가지고 오만 거 다 듣고, 누가 여기서 뭐 뭐가 좋다고 할 것 같으면 귀가 솔깃해가지고 그걸 탁 사버리고, 뭐 저기 했다 할 거 같으면 가가지고 탁 그거 하고 그럽니다.

자기 자신이 그것들을 경험해보고 그것을 따르고 말고 결정해야 되는데, 다른 것들에 인해서 조종당하는 생활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해나가는 거라.

그런데 그걸 대부분 계속 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아요. 조금 하다가 그만두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해나가면 즐겁지 않게 되는 거라. 아무리 맛있는 것도 한 삼일 계속 먹어봐요. 맛이 없어. 그와 같습니다.

세상의 견해나 세상에서 하는 것들은 계속적으로 할 것 같으면 싫어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지닌다는 거라. 왜? 무상한 성품들이기 때문에. 그런데 본인이 처음에 결정하고 그걸 따를 때는 그게 최고 좋은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라.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하기는 어렵진 않죠?

자애 지니고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거 그러면 될 거 아니라. 그렇게 어려워?

그리고 이게 나쁜 일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거 좀 안 하면 어때? 그거 할 수 있잖아.

또 세상 사람들이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자신에게 그렇게 필요없다 할 같으면 그거 그냥 신경쓰지 말아라는 거라.

왜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능력들을 낭비하느냐는 거라. 간단한 거라는 거라. 그러면 본인은 여유도 생기고 말하는 것도 자애있게 얘기를 하고 나쁜짓 안 하고 하니까 자기 자신이 우선 좋아. 살아가는 게 ‘아,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르다 보니까 이렇게 좋은 걸’ 하고 느끼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 그렇게 하죠? 인오선원에 오신 분들은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니까 ‘나 참 좋더라’ 하는 그런 마음들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참 좋은데 그냥 좋기만 하면 되겠어요?

자애를 항상 지닌 채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까? 나쁜일 안 하고 나쁜 행동 안 하고 그렇게 잘 살아갈 자신 있습니까? 없죠? 대부분 없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뭐 부지런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하고 행동할려고 하고 안되면 아예 하지 말아라는 거라. 말도 하지 말고 행동도 하지 말고 '이게 나쁜 일이다. 이게 성내고 욕심부리고 하는 거다.' 하지 말아라는 거라. 크게 손해 보는 거 없어요. 그거 잠깐 안 한다해가지고 뭐가 그렇게 인생이 바뀌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잠깐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거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자애를 지니고 행동하게 되고 항상 선한 일들을 게으름부리지 않고 선한 일들을 자꾸 하는 패턴들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실천함으로 인해가지고 마음 속에는 계속적으로 ‘아, 내가 부처님 가르침 만나 이렇게 좋구나’ 하는 기쁨들은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더욱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려고 하고 그대로 따를려고 하게 됩니다.

 

스님이 (여기 인오선원에) 육년 전에 왔다구요?

(수행자 대답 : 개원 10주년 법회 할 때 오신 것 같습니다.)

음, 그래요.

그때 왔을 때하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바뀌었어요? 좀 늙었겠지 뭐. 스님도 늙었으니까. 늙어가고 하는 거는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거기에 시간 투자해야 되는 게 아니고 그마만큼 마음이 성장해 있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성장해있지 않으면, 마음은 거름을 주지 않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자꾸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하나 더 물어볼게요. 육년 전보다 좀 더 수행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습니까?

그때도 수행에 대한 얘기했을 건데, 수행들을 조금씩 많이 하고 있어요?

(수행자 대답 : 네)

그걸 자꾸 어렵게 생각하면 수행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할려고 하게 되고, 또 정해진 시간에만 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건 죽은 수행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있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뭔가를 접하고 에너지를 생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 볼 수 있어요? 안 들을 수 있어요?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요? 그건 못한다는 거라. 감각기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뭔가를 접촉을 해야 됩니다. 사실은 그게 다 수행 대상인데 그걸 대상이라고 생각을 안 해버리고 무조건 가가지고 ‘에헴’ 하고 앉아야만이 수행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단초부터 잘못 끼우고 있다는 거라.

 

지금부터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일상생활하면서도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거를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보라는 거라.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네’, 반찬을 먹었다 그럼 ‘씹고 있네’, ‘삼켰네’, ‘다시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펐네’

그냥 그거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딴짓은 안 한다는 거라. 밥 먹으면서 테레비 보면서 밥맛이 어떻게 되는지, 뭘 먹었는지도 모르게 되는 거고, 그리고 자꾸 맛있는 걸 먹을라고 그러고 맛없는 거는 안 먹을라고 합니다. 수행하고는 점점 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거라.

 

오늘 스님은 오면서 건천휴게소든가, 경주 지나가지고 건천휴게소에서 라면에 밥을 말아서 먹었어요. 맛있게 먹었거든. 그런데 이상한 옷을 입은 스님이 가만히 앉아갖고 한 숟가락 먹더니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입만 꼼지락꼼지락 하고 있으니까 저쪽 주인이 왔어요. 그러다가 몇번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뭐 안에 잘못된 게 있습니까?” 하는 거라. 나는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게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막 사람들하고 떠들면서 맛있게 맛있는 걸 자꾸 먹을려고 하고 이래야만이 뭘 잘 먹었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탐·진·치를 가지고 밥을 먹으면 그건 탐심으로 먹게 되고, 진심으로 먹게 되고,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먹게 되는 것이지 그걸 그냥 먹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지금부터는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요.

먹을 때는 먹는 데만 집중을 하고 들을 때는 듣는 데만 집중을 해보십시요.

지금도 그리 안 하고 있죠? 소리는 들리는데 스님은 보인다는 거라. 보지 마. 들릴 때는 그냥 듣기만 하라는 거라. 앞에 대상이 있든 없든 간에 무시해버리고, 나는 온 마음을 귀에다가 두라는 거라.

들리는 소리에다가 집중해가지고 들을려고 해라는 거라. 포커스를 맞추면 맞출수록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은 많아집니다. 마음이 산란해져 버릴 것 같으면 알아차림도 분산돼버립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그럴까? 뭐 때문에 그래요?

 

왜 들을 때는 듣는 데만 집중하고 볼 때는 보는 데만 집중하고, 먹을 때는 맛보면 맛보는 것만 알아차리라고 할까? 왜 그래요?

그거 그렇게 알아서 뭐 할 건데? 뭐 할 거라?

 

그렇게 듣는 걸 예로 들어봅시다.

듣고 있으면 스님이 계속적으로 말을 하고 있어도 스님은 뭔가를 사고를 해가지고 끊임없이 말을 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한번 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완전한 고요로 인도된다." 그렇게 얘기했다 칩시다.

'가르침을' 하고 나서 스님은 이걸 잊어버려야만이 '따르면'을 할 수가 있습니다. '따르면'을 잊어버려야만이 '완전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에 거하고 중복되게 되면 실수를 하게 됩니다. 앞에 거는 분명히 사라져버렸고 새로운 것이 일어난다는 거라. 간단한 하나의 문장이지만 스님의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졌다는 것뿐입니다.

 

들리는 여러분들의 귀는 어떨까 그러면?

그냥 듣기만 하고 있을 거 같으면 끊임없이 그것도 '부' 할 때는 '부'가 들렸다가 사라지고, '처'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라지고, '님'이라는 소리가 들리고 사라집니다. 집중이 돼있으면 돼있을수록 그냥 그거 들리는 것만 지속적으로 들리게끔 됩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속에는 망상부리고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잘 안 일어납니다. 그냥 들리기만 합니다.

그런데 들리기는 하는데 앞에 것들은 분명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걸 내가 생각 안 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음 소리가 지금 현재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대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내가 거기에 어떤 것이라도 집착하고 있으면 뒤죽박죽이 돼버립니다.

 

대상은 어떤 것이든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스님이 법문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소리들은 들리게끔 돼있고 끊임없이 그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어디에도 집착하고 있을 대상이 없고 여유가 없다는 거라.

 

대상을 집착하지 않게끔 되면 그마만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에 점점 다가가게 됩니다. 뭘 발견하게 될까? 조금 전에 얘기했습니다.

변한다는 거라. 모든 것이 변한다는 거라. 그게 처음 와닿는 거라.

여러분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 것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들은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더욱더 집중해서 들으면 그 변하는 것이 빨리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합니다.

'부처님'의 '부'자 하나 듣는데도 그냥 물질적인 거 하나 '부' 소리가 들리지만 그 떨림이 일정시간 영 점 몇초라고 하더라도 일정시간 계속적으로 떨림이 진동이 있게 됩니다. 그게 보여지는 거라.

그 떨림이 '부우우' 하면서 그냥 파도치듯이 쭉쭉쭉쭉 와지는게 보입니다. 물질적인 게. 그것을 또 알아차리는 마음은 얼마나 바삐 움직이겠어요?

그보다도 훨씬 바삐 움직이는 게 보입니다.

조금 그냥 편안하게 들렸으면 좋겠는데 계속적으로 변하면서 들립니다. '부'자 하나에도.

 

그게 좀 더 집중하고 나면 알아지는 '()'라고 하는 겁니다.

'고(苦)'라고 하는 것이 괴롭다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아, 안 변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라. 그냥 한소리만 딱 들렸으면 좋겠는데 안 그렇거든.

그걸 '불만족'이라고 그럽니다. 만족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모든 현상은 그와 같이 만족스럽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렇게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면 그속에는 그냥 현상만 있는 것뿐이지 그리고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뿐이지 그 어떤 것도 없어.

여러분이 기도해달라고 했다, 여러분이 없는데 어디다가 기도 할까? 꼭 그와 같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려라는 거라.

수행이 어렵죠? 그런데 어떡하나?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실천되지 않으면, 이렇게 실천되지 않으면 그건 여러분들 것이 되지 못합니다.

 

스님이 태국에 갔을 때 스승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항상 내가 니 가르칠 줄 알지? 그것도 때가 있다. 나는 언제든지 나이가 있기 때문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거고, 또 그게 아니라도 나는 또 다른 데로 갈 수도 있다. 내가 있을 때 단디 공부해라.”

 

여러분 곁에는 언제까지 부처님 가르침이 있을 거 같죠?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조건이 될 때만이 여러분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일이 바빠가지고 사는데 쪼달리다 보면 부처님 가르침이 어딨어요?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또는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언제까지 여러분들 곁에서 지도를 해줄 거 같애요? 못합니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될 때 공부는 해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언제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 보장은 없습니다. 당장 여기서 나가다가 사고로 죽을지, 그걸 모른다는 거라.

앞일을 모르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없어져버린다? 그거는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해하고 납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실천돼서 자기 것이 될 때 부처님 가르침이 살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따를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완전한 고요로 인도될 때까지는 해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조그만 거 성취했다? 그냥 그치면 그것밖에는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항상 얘기를 합니다. 간곡하게!

"가르침은 이해하고 그것들을 내가 직접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하게 될 때 부처님 가르침은 살아있게 된다" 하는 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왜 부처님 가르침이 살아있어야 돼요?

불교 안 믿어도 다른 종교들이 많은데, 좋은 가르침 많잖아요.

왜 꼭 부처님 가르침이어야 돼요?

이생에서 잘 살도록 가르쳐주는 가르침이 있어요? 없습니다.

이생에서 바르게 살아가고 인간답게 살아가고 잘 살아갈 수 있게끔 가르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 부처님 가르침을 계속적으로 실천하면 진짜 이 힘든 윤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거라.

 

아마 여러분들한테 와닿지를 않을 거라. 윤회를 안 믿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는 죽고 나면 끝이라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그리하더라도 안 지겨워요? 오늘 밥 먹고 나면 내일 또 밥 먹어야 되는데? 오늘 화냈으면 내일이라도 화 안 냈으면 좋겠는데 내일 또 화내야 되는데?

윤회라는 게 그런 겁니다.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거라.

그거 좀 탁 끊어버리면 안 돼요?

 

그걸 탁 끊을 수 있는 거는, 그렇게 가르치는 건 부처님밖에 없다는 거라.

대부분 다른 종교들은 다음생에서 뭐 어떻게 어떻게 된다 하고 얘길 합니다. 그걸 어떻게 믿을 거라?

부처님 가르침은 그걸 실천하면 실천할수록 지금 즉시 그게 탁 나타나집니다. 화가 일어났는데 화가 일어나는 것이 탁 보인다는 거라. 그래서 꾹 참아가지고 화를 안냈다, 그럼 ‘휴우’ 안도감이 든다는 거라.

그걸 화를 내지마라 했으면 그것을 화를 안 내도록 해야 되는데, 화가 일어나는 게 탁 알았거든. 그게 나쁜줄 아니까 탁 안 하게 되는 거라.

 

즉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거라.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거라.

바로 그냥 그대로 결과들이 나타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단순하게 암기하고 그것을 가슴에 새길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대로 자꾸 살려고 해봐야 된다는 거라.

 

이걸 스님이 여기(프린트물)에 써놓은 것은 천천히 여러분들이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단계들에 대한 것들을 약간씩 적어놓은 겁니다.

실천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뭐가 선행조건이 되어야 될까?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할려고 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야 되겠지. 부처님이 뭔지도 모르면 안되겠지.

그런데 그 팔만대장경을 다 여러분들이 볼 수는 없잖아요.

그럼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오늘 처음 시작하면서 여러분들 오계 받았죠?

오계는 어떻게 지켜야 되는 거죠? 내가 원하는 거 몇개 한 세 개만 지키고 두 개는 안 지켜도 되는 거라? 그런 거 없죠.

계라고 하는 것은 완전해야 됩니다. 다섯 개를 다 지켜야 됩니다.

"술 먹지 마" 했으면 '안 취하도록 먹으면 되지' 그런 거 없습니다. 입에도 대지말아라는 거라. "거짓말 하지 마." 선의로 거짓말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거라.

 

계를 잘 지키는 것부터 한번 해보십시요.

쉬울 거 같죠?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회생활 하면서, 오히려 스님들은 더 쉬울지도 몰라요. 그런데 계는 그냥 겉모습만 지키는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의 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계가 세 단계로 나뉘어집니다.

그것도 맨 위에 거는 마음으로서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애초부터 마음에서 자비심이 있을 거 같으면 싫은 소리는 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싫은 소리 안 하는 것보다도 마음에 항상 자비심이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거라. 그게 더 쉽게 말하면 똑같은 계지만 계가 마음의 계하고 그냥 형식적인 계하고는 차이가 난다는 거라. 그런 의미입니다.

 

계 잘 지킬 수 있죠? (대중들 : 예)

노력은 해볼 거에요? (대중들 : 예)

그래 가지고는 안돼.

마음을 굳게 딱 먹어야 됩니다. "계는 반드시 지킨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는 불교도가 아니다. 부처님 제자가 아니다."

부처님이 원하고 따라오기를 바라는 제자들은 어떤 경우든지 계가 밑바탕이 돼야 된다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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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가님과 마하나마님을 비롯한 인연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