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인오선원 개원기념법회_아짠 빤냐와로 큰스님 법문[2] (20240331)

담마마-마까 2024. 4. 1. 21:33

https://youtu.be/p9uqrC1lFg0?si=ymxe20H3QIp35-Fq

 

* 인오선원 개원기념법회_아짠 빤냐와로 큰스님 법문[2] (20240331)

부처님이 원하고 따라오기를 바라는 제자들은 어떤 경우든지 계가 밑바탕이 돼야 된다는 거라.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봅시다.

연세가 좀 들으셨죠? 연세가 좀 든 분들은 예를 들어서 "남의 여자를 탐내지마라" 하기 쉽죠? 안됩니까? 마음으로는 아니라도 형식적인 것은 안 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럼 다들 여러분들 나이가 들면 계는 지키기가 쉬워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정한 상태가 되면 계는 자연스럽게 지켜져야 되는 거라. 그때가 언제일까?

나이 들면? 그건 아니겠죠. 마음이 계를 받아들여야 됩니다.

어차피 '아, 이거는 지켜야 돼! 안 지키면 부처님이 내보고 제자 아니래!' 하는 마음이 탁 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거라.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거면 좀 기분 좋게 하면 안 돼? 받아들이면 계는 수월해집니다. 안 할라고 하니까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거라. 이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거 같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돼. 그건 할 수 있죠?! 그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 그럼 하나는 했다!

 

계를 지키고 나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럽게 좀 돼나간다고 하면 마음은 좀 더 편안해. 좀 더 고요해지고 또 여유가 생기게 되고, 그리고 누가 뭐 크게 잘못해도 ‘아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나게 되는 거라.

그러면 어느덧 내 마음에서는 자···사라고 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라. 자애의 마음을 항상 지니게끔 되고, 남을 도와줄려고 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나게 되고, 남들이 한 일에 대해서 잘한 일에 대해서 ‘아, 참 잘했네’ 하고 나도 같이 기뻐해주는 마음이 생기고, 그리고 그것이 잘했든 못했든 그리고 이 사람이 늙었든 젊었든 그냥 똑같이 평등하게 대할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라. 내 자식이 특별히 예쁘고 다른 자식은 천대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거라.

 

계를 자연스럽게 지켜나가게 되면 자·비·희·사는 하기가 쉬워집니다.

자·비·희·사가 돼나가면 마음은 더욱더 확장돼있습니다. '나 · 너'라고 하는 경계들이 어느 정도 허물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이 두 가지만 딱 하자 이! 우선은. 할 수 있죠?

이걸 해나가면 그다음에는 내가 하는 것이 보입니다.

내가 자애를 지니지 않고 말하지 않는 습관이 들면은 말을 할 때 내가 자애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야 될 거 아니라. 그럼 말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뭔가 행동을 할 때 내가 뭘(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걸어가고 있는지 왼발을 뗐는지 내렸는지 그걸 알아야만이 내가 자·비·희·사로 그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라. 평온하게 발을 떼고 있는 건지 성질부리면서 발을 떼고 있는지는 알 거 아니라.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지켜지면은 수행하기는 엄청 수월해지는 거라.

계율 지키고 자···사를 생활화하라.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여유해진다는 거라.

그러면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기가 훨씬 더 수월해지는 거라.

알아차려보니까 변하는 게 보이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몰랐던 사실들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눈을 통해서나 귀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자꾸 제어하거든.

 

볼 때는 볼려고만 하려고 하고 들을 때는 들을려고만 하게 되는 거고, 자기 자신의 행동도 자꾸 제어를 하게 됩니다. 지금 해야 될 건지 안 해야 될 건지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되는 거라. 실제로는 쓸데없는 것들이 많거든.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기 제어까지 되고 나면 마음은 기쁨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냥 맛있는 것 먹어가지고 기쁜 것이 아니고, 이런 걸 지키고 실천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굉장히 큽니다.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렀을까?

이게 수행입니다! 수행을 멀리 자꾸 생각하지 말아라는 거라.

내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해나가면서 수행의 진척은 틀림없이 이루어져 나가진다는 거라.

 

행하는 것들이 기쁨이 자꾸 일어나면은 마음은 한결 더 평온해집니다.

그리고 더욱더 그러한 방향으로 실천을 해나갈려고 합니다.

누가 와서 “야, 너 수행 그렇게 하면 안 돼. 저기 인오선원 가가지고 3박4일 확 틀어박혀가지고 (귀닫고 눈닫고) 보고 수행해.” “음, 그래. 그럴게. 다음에 시간되면 할게”

“아니야. 여기서 생각해보니까 스님도 없고 저기 붓다의길따라 가서 해.”

그거 조종을 안 당한다는 거라. 그런 데에.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그사람이 말하면 그걸 그사람의 견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사람 말하는 걸 그냥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견해라고 생각해버리면 의견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그걸 따를지 안 따를지를 결정을 해야 되는데, 그냥 말이라고 생각해버리니까 그냥 듣고만 있는 거라. 사띠가 알아차림이 자동적으로 그사람이 말하는 것을 그냥 듣는 것으로만 하게 되는 거라. 어떠한 것에도 견해, 너의 견해 나의 견해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견해가 없으면 그것을 뭐라고 그래요? '수다원'이라고 그럽니다.

안 어렵죠? 수다원 되는 거.

 

수다원에 이르면 그런 사람들은 욕심이 일어날까? 성냄이 일어날까?

물론 경전에는 욕심도 있고 성냄도 있다 했는데 "기능하지 않는다"고 돼있습니다. 잠재되어 있기는 한데 그것을 완전히 떨쳐낸 건 아닌데 기능하지 않는다는 거라. 왜 그럴까?

불안감은 있거든. 내가 수다원 정도, 견해를 가지지 않는 상태가 됐는데, 그런데 난 아직 수행이 끝난 것 같지가 않거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끝난 것 같지 않거든. 그러면 마음에 불안감이 항상 존재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라. 그러면 성내고 욕심부리고 하는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럼 불안을 해결해줄 뭔가를 또 찾게 되는 거라.

 

그런데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나는 수다원이다." 하고 동네방네 자랑질하는 것들은 가능해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이미 견해가 없어졌거든.

유신견이라고 하는 견해가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스님, 제가 수다원에 이른 것 같습니다.” “너는 수다원에 안 이르렀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나는 이런 이런 상태가 됐고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불안한 것들은 있습니다.”

이거는 얼마든지 얘기하는데, 과정, 뭐가 됐다고 하는 것은 그건 개념이라는 거라. 개념을 얘기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수다원이 됐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아라한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 거짓말쟁이인 거라.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유신견이 사라진 상태가 되면 이미 나는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아, 그냥 이대로 그냥 계속해나가면 결국에는 내가 여기 말하는 고요한 닙바나로 인도되는 구나 하는 걸 알거든.

그러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인오선원 왔으니까 빨리어로 안 하고 한글로 한다? 그냥 한글로 하면 되는 거라. “아니야, 나는 빨리어로 할래” "빠나 띠빠따..." 그거 못 알아듣는 걸 뭐하러 하고 있어요? 그러한 것들은 이미 떨어져버린다는 거라.

족쇄가 뭐가 떨어졌다는 것은 본인이 압니다.

 

여러분들한테는 떨어져 나간 것이 뭐가 있어요? 없어요?

다른 거 믿을려고는 안 하죠? 그럼 그거는 하나 떨어져 나갔네.

'아, 부처님 가르침이 참 좋대' 그거는 생겨난다는 거라.

좋으면 그것을 배워가지고 실천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확신이 딱 들어서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은 상태가 돼나가는 거라.

 

여러분들이 그렇게만 되면 참 좋은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얼마 정도 걸릴 거 같애요?

부처님 가르침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빨리 도달합니다.

자꾸 문구만 가지고 붙잡다 보면은 영원히 안 오게 되는 거라.

그냥 스님 가르침대로 그냥 따르면 됩니다.

 

태국에 이번에 갔을 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전혀 수행을 모르는 사람인데 스님이 그런 얘기를 했거든.

수행할려고 하지 말아라.”

쉽게 말하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 이거 할려고 하지 말아라. 그냥 그건 내비두고 편안하게 앉아가지고,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만 먼저 만들어라.

그렇게 몸이 편안해지고 나면, 누워도 되고 앉아도 되고, 의자에 기대도 되고 그건 니 마음인데, 편안한 상태가 되면 마음도 틀림없이 편안한 상태로 바뀌어져 나갈 거다. 그럼 그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만 봐라. 망상하고 있으면 망상하고 있는 거를 알아차리고.

 

그렇게 알아차리니까 망상이 금방 사라지거든. 그런데 마음은 금방 또 뭔가 다른 걸 보고 있는 걸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뭔가 보고 있는 게 보인다는 거라. , 내가 보고 있네하고 나니까 또 마음이 금방 코끝에 와서 호흡하는 것이 보인다는 거라.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까 마음이 가는 것만 지 마음이 따라가면 되는 거라.

그러니까 오래 머물지도 안 해. 금방 머물렀다가 또 가고, 금방 또 마음에 생기고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있는 거라.

하루는 와서 그러더라고. 스님, 나 이렇게 봤습니다.”

 

그래. 잘했다. 계속 그렇게 해라. 그냥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말고, 수행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만 해라.”

 

그다음날 탁 왔는데 뭐라는지 알아요?

그렇게 보이는 게 너무 빨리 변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가벼우니까 보이는 게 금방금방 바뀌는 게 보이는 거라. 너무 빨리 돌아다닌다는 거라. 마음은 그와 같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걸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뿐이라.

 

그때사 스님이 그럽니다.

그래. 그렇게 힘이 들면 차라리 그러면 이번에는 그렇게 돌아다닐 때 딱 그마음을 코끝으로 한번 붙잡아봐라. 코끝에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릴려고 해봐라.”

 

그대로 그냥 따라갔는데 그다음날 안 와. 그래서 그다음날 그 하루 지나고 나서 왔어요. “왜 어제 안 왔나?” 하니까, 코끝을 그냥 따라가다 보니까 당연히 그렇게 빨리 변하는 게 보이면 집중하는 힘도 굉장히 크다는 얘깁니다.

코끝을 관찰하다가 코끝이 단순하기 때문에 그냥 딱 거기 머물러가지고 삼매에 탁 드는 거라. 그런데 삼매에 드는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고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것만 계속적으로 있다는 거라.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계속 보인다는 거라.

 

여러분은 안 될 것 같애요?

3~4일 만에 이미 삼매를 경험하고 초선정까지도 경험을 하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거라.

사실은 수행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라.

의도적으로 뭔가를 자꾸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개념화 돼버린다는 거라. 그거는 수행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나가는 과정들이라는 거라.

수행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그냥 드러내가지고 발견하는 겁니다.

할 수 있죠?

 

수다원에 이르렀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사실은 그전에도 물론 스승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더더욱 스승이 필요합니다. 수다원에 이르고 나면.

그때 스님이 준 프린트물이든지 아니면 다른 책들을 탁 보라고. 그러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이 직접 내한테 앞에 와가지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려요. 그 구절이.

스님도 그런 적이 있거든. 우연히 글을 읽는데 빨리어로 해서 미안한데,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당 웨디땁보 윈뉴히띠" 하는 게 눈에 탁 들어오는데 부처님이 그냥 그걸 얘기를 하시는 거라.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르르 나오는 거라. 너무 고마워요. 나에게 꼭 필요한 구절이었거든.

 

스승이라는 거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부처님이 스승이고 부처님 가르침이 여러분들의 스승의 역할을 하게 되는 거라. 눈 앞에서 직접 얘기하는 게 돼야지 그냥 그 구절이 되어버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한테 맞는 구절을 탁 부처님이 직접 얘기해주는 것처럼 “너는 이러 이렇게 이렇게 수행해” “너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 하는 것들이 탁 드러나진다는 거라.

 

그게 안 되면 어떻게 할까? 그러면 스승을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는 스승들을 찾아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스승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가 살아온 길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그게 전제조건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스승을 한 사람으로만 정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여기 스승으로 인해가지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고 내가 어느 정도 과정을 겪었으면 또 다른 스승으로 인해서 다른 과정들을 겪어야 된다는 거라.

스님도 한 다섯 분의 스승들을 국적에 관계 없이 계속 돌아가면서 스승으로 섬기고 따랐어요. 거기서 얻는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진행이 되면 여러분들이 곧 스승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걸 선우라고 합니다.

선우가 되기 위한 자격조건들을 그 뒤에다가 쭉 적어놓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선우가 되도록 더욱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르침하고 살아가는 것들하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여러분들한테 무슨 기대를 할까? 뭘 기대할 것 같아요?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게 부처님이 바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오늘 인오선원에 왔으니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갈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도 부처님과 같이 똑같이 행동할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한테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소리가 뭔지 알아요?

“너는 아라한이다. 아라한과 같이 행동하라” 인제 막 출가한 스님한테.

여러분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살아가야 된다는 거라. 안되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할려고 하고, 그리고 그렇게 자꾸 살아가다 보면 진짜 부처님과 같이 사는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든 분들이 그래도 ‘이 부처님 가르침 만난 것이 참 이렇게 좋구나’ 하는 마음들이 들 수 있게 되기를 소망을 해봅니다.

합장을 하고, 스님이 여러분들에게 축복게송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 따라 살아가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몸도 마음도 부유로워지며

이러한 공덕들로 닙바나에 이르기를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