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20240504)

담마마-마까 2024. 5. 4. 20:07

https://youtu.be/C_if0C6guM8?si=mBd5VXGT8TrosPPj

 

*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20240504)

 

요즘 덥죠? 날씨가 더울 때도 있고, 또 추울 때도 있고,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오늘은 덥다가 내일 추우면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자 대답 : 옷 입어야 됩니다.)

옷 입으면 되죠!

그런데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몸도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잖아. 병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또 누군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똑같은 물질적인 현상인데 왜 여러분들 몸은 그렇게 못 가게 막 잡고 그러지?

 

요즘은 모르는 사람들이 문답을 하는 게 좀 많아졌어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런데 어떨 때는 그냥 ‘질문을 안 하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걸 내한테 왜 질문을 하지?’ 하는 그런 경우들도 있어요.

특히 “누구 말을 듣고 하, 성질이 났는데 스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뭐라고 해야 되나? 그거를.

남이 말을 할 때 그 사람한테 ‘내가 이런 말을 함으로 인해서 너는 괴로워져라 괴로워져라’ 이렇게 빌지는 안 했을 거 아니라. 그 사람은 그냥 자기 할 얘기들을 그냥 했을 건데, 받아들이는 본인이 괴로워하고 있잖아.

왜 남의 말 때문에 자기가 행복하고 불행하고 하는 게 결정이 돼야 돼? 그건 좀 뭔가 모순된 거 아니야?

 

다른 것으로 인해서 자기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이 되고, 또 그것에 영향을 받는 건 그건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건 왜 그렇게 그것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게 될까?

, 내가 하는 것, 내 생각이나 내 관점은 옳고, 저기서 얘기하는 거는 그 사람이 실제로 화를 내고 얘기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이미 ‘화를 내고 했다’고 판단을 하고 있는 거라. 그러면서 본인은 또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워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는 거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지금 행복한지 불행한지?

행복하다면 뭐 때문에 행복한지, 불행하다면 뭐 때문에 불행한지 한번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 . .

생각해 봤어요?

자기 자신한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얼마나 돼요?

(수행자 대답 : 저는 제 자신한테서 찾습니다.) 그건 잘 한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밖에서 찾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꾸 판단하는 훈련들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가지고 그걸 판단하고 자기가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하게 됩니다.

수행할 때도 수행을 열심히 하다 보면 누가 소리 들려도(소리 내도) 소리가 안 들리죠? 외부적인 영향을 안 받게 됩니다. 그거 수행 잘하고 있는 겁니다.

수행 잘못하고 있을 때는 오만 소리 다 들립니다. 그것으로 인해 짜증도 나고 기쁘기도 하고. 외부적인 영향들을 그렇게 많이 받아가지고 뭔 수행을 하겠어요?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계속 그게 패턴화되고 계속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수행을 해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 거라.

 

수행에서 가장 먼저 도달해야 되는 게 adināvakathā아디나-와까타-〕」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대로.

밖에 원인이 있다고 보지 않고 본인에게 원인이 있고 본인이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하고 불행하고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렇지 않아도 내일 비온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비 오면 우산 써야지 뭐 별 수 있나?

그냥 간단한 거라! “왜 비와?” 하고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인데, 똑같이 물질적인,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행복해지고 한다? 그것 참 의미없는 짓 아닌가?

 

경전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바른 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위에 신경을 쓰거나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바른 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단지 자기 자신의 착한 업과 착하지 않은 업을 잘 살펴야 한다."

 

밖에서 아무리 나를 칭찬한다, 남들이 아무리 나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그거 신경쓰지 말아라는 거라.

그 소리를 듣고 인해서 내가 일어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보라는 거라. 화가 일어나면 ‘아, 화가 일어났네’ 하고 화를 다스려야 되는 거라. ‘내가 행복해지고 기분이 좋네’ 하면, ‘아, 이것도 무상한 성품이다’ 하고 보고, 그냥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선한 업과 악한 업들이 뭔지를 잘 살펴보아야 되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지 밖에 탓만 자꾸 할 것 같으면 그건 답이 없게 되는 거라.

 

“저 사람이 뭐라 했기 때문에 내가 화가 났는데, 스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답이 없는 걸 내한테 답을 달라고 그러면 뭘 어떻게 답을 하라는 거라?

 

이렇게 한번 해보십시요.

상대방이 뭔가를 말을 했든 행동을 했든 그걸 보고 뭔가 싫은 마음이 탁 일어난다. 그러면 마음을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요.

‘아, 또 내가 옳다는 생각을 또 일으켰네.’ 자기도 사실은 불완전한 인간이면서.

, 내가 또 옳다는 생각을 또 일으켰네.’ ‘내가 또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네하고 마음을 먹어라는 거라. 그렇게만 일단 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위들이나 말들로 인해서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 그다음에 내가 해야 될 것이 보여집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일으켰네’ 하고 했으면 그게 원인이 되어서 ‘그렇지 나도 완전하지 않은데 저 사람도 저렇게 화를 내고 저런 행위를 하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 사람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거라.

화가 나 있는 자기 자신에게 매몰돼 있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내가 해야 될 것이 보여지는 거라.

그러면 차분하게 “그래, 왜 그렇게 화가 났어?” 하고 물어보든지, 아니면 저런 행위들에 대해서 ‘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구나’ 하고 다시 한번 고찰해 볼 수도 있고.

 

봄이니까 꽃향기들이 많이 일어나죠? 꽃나무들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속성들이 있다고 그럽니다. 향기를 피우는 속성들.

경전에는 물론 그렇게도 나와 있습니다. 뱀은 기본적으로 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그럽니다. 그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 그 차이가 있는 것뿐이지,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뭘 가지고 있을까?

딱 두 가지만 생각하십시오. 자애와 평정심!

어떤 대상을 보든지 똑같이 볼려고 해야 됩니다. 탐·진·치 없이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볼려고 하는 마음가짐들을 가져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 마음속에는 자애를 지니고 대상을 보도록 자꾸 해라는 거라.

적어도 인간인데 그 두 가지는 지니고 있어야 안 되겠어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룰 때 보면 "지혜의 눈이 일어났다" 하고 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런 대목 많이 있죠?

여러분에게 지혜의 눈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곁에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이미 판단하고 있는 거라. ‘저 말은 좋은 말이다 나쁜 말이다’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고 「내가 옳다」는 것이 존재를 해야만이 선이나 악이 필히 일어나게 됩니다. 적어도 지혜의 눈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선과 악의 구분을 이미 뛰어넘어 버렸다는 얘기라.

 

대상은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겁니다.

그게 싫은 소리든 좋은 소리든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들린다고만 알아차리면 간단한 이치인데 그걸 자꾸 소리가 ‘들린다’고 안 하고, 무슨 소리로 인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판단들이나 주관적인 입장하고 배치된다 아니다' 하고 자꾸 싸움을 하고 있는 거라.

배가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다’고 알아차리면 되고, 배가 꺼지면 ‘사라진다’고 그냥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거 아주 간단한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외부적인 작용들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하느냐는 거라.

 

일단은 마음속에서 좋다·싫다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는 당장 본인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 내가 또 사띠 안 하고 있구나

사띠 안 하면 문제가 자꾸 생깁니다.

일평생 해야 되는 것이 사띠해서 알아차리는 것들인데,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데, 자꾸 놓치는 거라. 외부적인 대상으로 일어나는 것이든 아니면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이든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에다가 계속적으로 그냥 끄달려 들어가는 거라.

 

그런데 좋고 싫고 하는 것,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은 누구 겁니까?

그것도 본인 겁니다. 그거 누가 준 것도 아니고 본인이 스스로 만든 겁니다.

본인이 왜 자꾸 윤회의 고리를 자꾸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거는 결과가 안 나타납니까? 당장 얼굴에 나타나고, 당장 행위로써 나타나지고, 그런 것들이 다 윤회의 고리들이 됩니다. 그것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서 불안도 일어나고 각각의 감정들도 일어나고.

 

저기서 하는 얘기들로 인해서 좋다·싫다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 아니고, 저기서 하는 얘기들을 그냥 소리들림으로써 알아차리면 조건에 인해서 성립되는 겁니다.

실제로는 ‘소리들림’ 입니다. 누군가 말을 했기 때문에.

그걸 ‘들림’으로 알아차리면 원인 결과로써 그렇게 받아들이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사띠를 놓쳐버리니까 ‘싫은 소리’로 탁 들리고, ‘좋은 소리’로 탁 들리는 거라.

, 이래서 조건에 인해서 성립되어지는 현상이구나하는 것들을 탁 이해를 하게 되는 거라.

그게 「adināvakathā〔아디나-와까타-〕」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것이든 조건에 인해서 성립됩니다.

조건이 없으면 일어날 것도 없고 받을 결과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조건지워져 있고,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에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게 돼있습니다.

날씨가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듯이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도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그냥 그걸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꼭 조건에다가, 실재하는 조건에다가 '나'를 개입하고 '내가 옳다'는 걸 개입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곡돼버립니다.

 

수행을 잘 하고 있다가도 사람들이 ‘어, 이게 뭐지?’ 하고 관찰을 합니다.

‘어, 내한테 뭔가 새로운 게 생겼네’ 그게 생겼으면 생긴대로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근데 거기서 스톱을 하고 이게 뭐지?’ 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 실재하는 거는 이미 다 달아나버립니다.

자꾸 조건지워지는 것들을 갖다가 막을 씌우고 칸막이를 해서 거기서 스톱을 시키지 말아라는 거라.

자아가 개입되든, 내가 옳다는 것이 개입되든, 아니면 그걸 회상해서 뭔가를 볼려고 하든, 자꾸 왜 칸막이를 막느냐는 거라. 칸막이를 막더라도 조건지워진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일어났으면 사라지고 계속 흘러가게끔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그 흘러가는 것을 그냥 그대로 사띠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맛보면 맛본다고 알아차리고,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평온해지면서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게 nekkhammakathā넥캄마까타-(방폐·떨어지는 것)라고 하는 겁니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겁니다.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려지게 될 때 대상은 드러나집니다.

사마디(samādhi)가 그냥 일어나지 않고, 지혜가 그냥 일어나지질 않습니다. 반드시 과정들을 겪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 상황이 된다? 그거 바보 같은 짓들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다스려나가야 되는 것이 해야 될 일인데, 여러분을 목숨줄 쥐듯이 행·불행을 결정하는 것이 외부적인 요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거같이 바보 같은 일이 어딨어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자꾸 볼려는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행위가 옳고 그르고 하는 것들로 인해가지고, 자신의 고통스럽고 행복해지고 하는 것을 늘릴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행복도 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고통도 쉽게 말하면 불만족도 그 무상의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이 해야 되는 것은 그때 일어나는 마음을 잘 관찰해서 다스려야 될 것은 다스리고 더 증장시켜야 되는 것은 더 증장시키는 것이 자신이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면서 또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이,

그런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고요함은 방해를 받습니다.

외부적인 조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으로 인해서 영향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줄이는 것이 좋습니다. 만날 놀러 다니고 만날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그거 영향 안 받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가지고 만날 수행처 와서 수행하고, 조금은 덜 받겠지만 그래도 또 영향을 받는 거라. 고요함으로 인해가지고 행복한 것이 일어나는 영향을 또 받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계속 그냥 수행처만 또 찾게 되는 거라.

실제로는 반대적인 작용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본인은 그러고 있는 거라.

 

"줄여라"는 거라.

수행처에 자주 가는 것도, 여기 선원에 오는 것도 줄여라는 거라.

평상시에 못하는데 왜 자꾸 똑같은 패턴들을 반복하느냐는 거라.

사람들을 만나고 떠들고 놀고 하는 것도 줄이라는 거라.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적게 하면 마음이 좀 더 고요해지고 바르게 사띠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은 많아집니다.

반대로 분주해지면 잘못될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집니다. 사띠를 놓칠 가능성이 더 많아집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다른 사람이 싫은 소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싫은 소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에서 ‘아, 저 사람 싫은 소리 했어요’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고 할 것 같으면, 동남아시아에 가면 모기가 말라리아를 몰고 오죠? 가져옵니다.

"모기와 같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요. 모기에게 탁 물리면 그 모기는 아주 작고 그런 건데도 그거한테 물리면 말라리아에 걸려서 자신이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싫은 마음이 일어나서 다른 사람을 비방할려는 마음들은 모기하고 물린 거 하고 똑같습니다. 그것이 금방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설혹 말라리아가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렵고 하는 것들은 한참 동안 가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가슴에서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하면 그 말은 오래갑니다. 마찬가지로.

자애의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말을 통해서 일단 나가버릴 것 같으면 그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본인이 가슴에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 자애의 마음은 한참 동안 또 오래가게 됩니다. 그 말이 운율도 없고 평범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자애를 지니고 안 지니고의 차이는 굉장히 나게 됩니다.

본인의 마음이 달라져 있습니다.

 

부드럽게 말을 할려고 하고,

항상 이익이 되는 말들을 하고,

자애를 지니고,

때를 잘 가리면서 말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가장 좋은 거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최고 좋습니다.

 

말을 안 하고 듣기만 한번 해보십시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평온하게 마음을 가지고 마음에서 욱하는 마음이든지 아니면 싫은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거 그냥 관찰하라는 거라. 그래서 평온하고 고요해지게 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그 소리가 그냥 소리들리는 것으로, 그냥 들리는 것으로만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마음은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고 가볍게 돼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깨달음의 길이 탁 열립니다. 지혜의 눈이 탁 일어나게 됩니다.

판단하지 않는 상태가 됐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삶들을 계속 살도록 노력들을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