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2024년 담마와나선원 붓다의날 법회_부처님의 4가지 위력 (20240519)

담마마-마까 2024. 5. 21. 09:40

https://youtu.be/hPUDfhhCt7E?si=U4gaeO2-VpJ0d3JM

 

* 2024년 담마와나선원 붓다의날 법회_부처님의 4가지 위력 (20240519)

 

오늘은 붓다의 날이죠!

위사카 뿌자(visākha pūjā)라고 하는 날입니다.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열반하신 삼대 길일을 한 날에 치르는 날입니다. 부처님 대단하죠? 이렇게 사람을 모이게 하니까.

 

오늘은 「부처님의 4가지 위력」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4월초파일 이래서 절에서 굉장히 바쁘고, 일반 재가자들도 등공양 올리기 위해서 많이 힘을 씁니다. 한국에 처음 들어와서 느낀 게 너무 틀리다(다르다). 밖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들을 어떤 것을 하는 것이 맞을까 해서 갖가지 것들을 생각해냅니다. 그래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음료수나 먹을 것들을 주는 것들을 동네마다 설치를 하고, 부처님이 또 고맙고 하니까 부처님 주위로 꽃이나 여러 가지 장엄하는 것들을 많이 하고, 그리고 그날은 대부분 사원에서는 하루 종일 부처님 말씀을 독송을 합니다. 한쪽에서는 또 명상을, 부처님 명상을 하고, 그게 거의 주류를 이룹니다.

 

쉽게 얘기해서 부처님 고마움을 내가 직접 실천함으로 인해가지고 그것들이 자기 공덕이 되도록 하는 일들로 하루를 보냅니다. 근데 한국에서는 어찌 보면 초파일 때는 등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들을 보면서 한국에 어쨌든 와서 살 때는 제발 저러지는 좀 말아야지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어요. 물론 뭐 사원 경제를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공덕을 짓게 하기 위한 날이 돼야 되는데, 너무 상가 스님들이 안일하게 경제적인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좀 씁쓸한 그런 마음도 들 때가 있습니다.

 

근데 이리하든 저리하든 왜 우리가 붓다의 날을 이렇게 자꾸 기념을 하고 있을까?

부처님이 어떤 분이라서 그런 거라요?

중부경전에 보면 「우다이경」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하 사꿀루다이'라고 하는 경, '마하 사꿀라 우다이'죠. 그 경에 보면 우다이가 부처님을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낸 게 있습니다.

첫 번째가 부처님은 하루 한 끼 드시거든. 적게 먹으니까 좋은 거라.

그다음에 부처님 가사는, 스님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세 벌 가사 외에, 세 벌이 한 벌이 되는 거죠? 한 벌 가사 외에는 더 이상 가지지를 않는 거라. 그러니까 의복 부분에서 아주 간소하기 때문에 그렇고,

또 부처님이 머무는 공간을 보면 그렇게 큰 공간도 아니거든. 조그마한 공간에서 이렇게 머물고,

또 부처님이 보통 계신 곳들을 보면 한적한 곳에 계십니다. 한적하게 홀로 수행하다가 또 나와서 법문 할 때 되면 법문하시고 이렇게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 부처님이 그래서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생각은 어떨까? 아니면 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떨까?

 

왜 부처님이 존경을 받을 거 같애요?

경전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아디실라' 부터 해가지고 '아디빤짜' 쭉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놓았는데, 그걸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해놓았는데, 그걸 통합을 한번 해볼게요.

 

부처님 같은 분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부처님과 똑같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우리는 부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이 설하신 부분을 우리는 배우고 실천해가지고 이 자리에 지금 있는 것들입니다.

수행을 해보시고 또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을 해보신 분들은 경험을 할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흠잡을 것이 있을까? 조금이라도, 시대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지금 안 맞는 것이 있을까? 그걸 찾을 방법이 없는 거라.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것들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해탈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행위들, 그리고 해탈에 이르는 수행방법, 딱 그 두 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여러분들이 붓다의 날에 해야 될 건 그것밖에 없는 거라.

공덕을 쌓으면, 오늘도 공덕을 쌓는 일들을 했죠? 법문을 듣는 것, 오늘 또 팔계 지키면 계도 지키지, 또 스님들한테 보시도 올렸지, 여러 가지들을 했는데 그건 누구 겁니까? 그건 여러분들 것이지 스님이 가져가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그대로 받게 되는 겁니다. 근데 오늘 같은 날 다툼이 있었다, 그건 누가 짓는 거라? 그것도 여러분들이 짓는 거기 때문에 그것도 여러분들이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은 되도록이면 탐·진·치가 없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그런 날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닐 것 같지만 큰 이익들을 낳게끔 하게 됩니다.

 

아마 여기 있는 스님들은 대부분 그런 것들을 경험을 해봤을 겁니다.

한참 수행을 하는데 아무리 수행을 해도 안돼. 항상 제자리에서 머물러. 그러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거라. ‘내가 어디에 빠져있지?’

대부분은 보면 그 고요함에 빠져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고요한 상태에서 호흡이면 호흡하는 것은 보이거든. 호흡하는 것은 보이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딱 세 개만 들어라 할 것 같으면 무상 · · 무아인데 요게 안 보이는 거라. 이게 안 보이면서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만 현상만 보이고 있는 거라. 자기가 현상만 볼려고 하는 거지. 변하면 빠르게 마음도 변해야되기 때문에 그게 싫은 거라. 고요하게 그냥 머물러 있고 싶은 거라.

 

어떻게 빠져나갈까 그럴 때? 고요함에 머물러 있을 때는?

어떻게 빠져나가요? 본인이 고요함에 빠져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됩니다.

‘아, 내가 고요함에 빠졌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나서, 다시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와 가지고 다시 대상을 알아차리기 전에는 항상 수행을 하면 그 포인트에서 계속 고요함에 머물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걸 알아차리게 해주는 것은 뭐가 알아차리게 해줄까? ‘아, 내가 고요함에 빠졌구나’ 하는 걸 아는 것들은?

공덕도 쌓아보고 죄도 지어보고 해야만이 ‘아, 이게 선한 것이고 이게 악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은 나쁜 거 하면 나한테 나쁜 결과들이 온다는 것을 알면 그걸 안 하게 되면서 마음에서 항상 선한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들을 하게끔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일상생활에서 항상 자애의 마음을 항상 지니게끔 됩니다.

 

자애의 마음을 계속 지니고 있을려면 그냥 ‘행복하기를’ 해가지고는 안되거든. 진정으로 그 사람이나 그 대상에게 마음을 줘서 그 대상에게 마음이 향해있는 상태에서 ‘행복하기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자애의 마음이 영글어져 있을 때는 고요함에 빠져있을 때 빨리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어느 정도 사마타(사마디)의 힘들도 도움을 받고, 공덕의 힘들도 도움을 받아야만이 그 고요함에서 빠져나올려고 하는 거라.

그게 인제 수행할 때 가장 많이 빠지는 것 중에 하납니다.

 

근데 수행할 때 고요함에 빠지지 안 했는데, 또 항상 똑같은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못넘어가요.

대표적인 걸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상태가 돼서 그것들을 계속 무상한 성품으로서 보고 있는데, 그런데 그 성품은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보이는데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요. 왜 그럴까?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는 이유가? 뭐가 부족할까?

딱 두 가지만 생각해보십시요.

 

부처님이 수다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란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정직할까? 정직해요?

지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되는 거고.

근데 그 정직한 사람들은 언제 가능해요?

자기의 잘못을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은 수다원 이상이 돼야 가능합니다.

일반인들은 아무리 정직할라 하더라도 어떠한 경우든지 일정 부분은 정직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사회에서 살면 더더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수다원이 아니라, 인제 겨우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변하는 속도만 다른 걸 알고 있는 초보자한테 정직하라면 그게 정직해져? 안 돼요. 아무리 해도 내가 정직할려고 하더라도 안 되는 거라.

 

안되니까 어떻게 해요? 그러면서 마음은 자꾸 색다른 걸 자꾸 찾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다가 신비적인 체험을 하는 거로 자꾸 바뀐다든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냥 고요함에 툭 빠져버릴려고 한다든지, 물론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마음은 육체적으로 편안하고 해지니까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하고 깨달음 하고는 관계가 없는 건데도 계속 그렇게 패턴을 유지를 해나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 두 가지를 들어 얘기를 하는 것이,

첫 번째가 정직함이고, 두 번째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정직한 것은 쉽게 얘기하면 사마타에 가깝게 되는 거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위빳사나에 가깝게 되는 거고.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그대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성질을 더 자세하게 볼려고, 자세하게 본다는 것은 거기다가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이지 과도하게 거기에 매달린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그래서 그 상태를 계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힘들이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다음 단계로 탁 넘어가게 되는 건데, 이 두 가지가 없으면 못 넘어가는 거라.

 

근데 '정직한 것'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평상시에 하고 있습니까? 하고 있어요? 반드시 해야 됩니다.

우리 스님들이 왜 일 년에 한차례씩 아니면 가끔씩이라도 남방불교 국가에 가가지고 참회를 하겠어요?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첫 번째가 뭐냐면 나는 정직하게 살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게 흠으로 되는 것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계로는 크게 위반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다른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들은 틀림없이 있게 되는 거라. 그럼 그것들도 참회를 해야 되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법납이 십 년이 됐든 이십 년이 됐든 인제 최하 비구로 돌아가가지고 다른 스님들 시중도 들고 다른 스님들한테 삼배도 올리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마음들을 자꾸 북돋아주는 거라. 여러분이 시어머니인데 며느리 역할 할 수 있어요? 한번 해봐요.

 

그래서 그것들을 할 수 있는 동력들은 부처님께서 열 가지 바라밀로써 설정을 해두었습니다.

과연 각각의 성질에 따라서, 그리고 각각의 수행하는 방법에 따라서 부족한 것들이 틀림없이 있게 됩니다.

빨리 그걸 찾아야 됩니다.

그걸 찾아야만이 단계들을 넘어갈 때 힘으로써 작용을 하게끔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찌 보면 흠잡을 데 없는 것이고, 또 부처님 가르침은 누구에게든지 그 법을 듣고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끔 한 것들이고, 그런 법을 설하신 부처님은 어느 하나도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상가스님들은 존경하는 이유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아, 그래도 우리보다도 훨씬 뛰어난 수행들을 하시고, 그 경지에 이르렀고, 또 흠잡을 수 없는 그런 행위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존경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져 버립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와서 얘기를 합니다. 푸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님, 나는 테라와다 불자는 아닌데 한국스님들을 보면 아, 내가 이걸 계속 왜 불자로 남아야 되는지, 수행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남고 안 남고는 그 사람 일이지만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그 스님을 봐서 그런 거라. 자기가 못마땅해 하는 스님을. 물론 상가가 훌륭해야 되겠지만 근본적인 그 책임은 그런 마음이 든 본인에게 있는 겁니다. 본인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르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니까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아무리 존경하지 못하는 상가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별개로 나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르고 실천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스님들도 훌륭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지혜가 드러나진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경전에는 '자나'라고 하는 표현을 썼는데 거기서는 자나는 선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 실천수행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실천수행을 잘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지혜롭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지 안 가져야 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리고 지금 해야 되는 것들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본인을 한번 돌아보십시요. 내가 과연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르고 실천하고 있는가? 실천하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안 생긴다는 거라.

 

어릴 때 스님이 이십대 중반 넘어 후반 때 태국으로 갔는데, 그때 맨 처음 갔을 때 (스님은) 외국인인 거라. 외국인을 지도하는 스승이 있었어요. 스승이 있었는데 그 스승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그래요. 왜 돌아가셨느냐고 나중에 알아보니까 차가 개울가로 떨어져가지고 익사를 하신 거라. 쉽게 말하면 외국인 스님들을 지도하는 지도법사 스님이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버린 거라. 그런데 인제 막 수행하는 스님인 내 입장에서는 마음이 어떻겠어요. ‘아, 내가 이 공부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공부를 해가지고 이십 년 삼십 년 된 스님이 저렇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니까 공부하기가 싫어지는 거라.

 

근데 그걸 잡아준 스님이 계사스님이라. 아짠 통 스님.

그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다고. “니 마음이 불편하면 세상이 다 불편할 수밖에 없다.” 네가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할 거 같으면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로서 보는 것뿐이라는 거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봤을 거 같으면 그냥 하나의 죽음으로만 보면 애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마음에 그런 마음이 안 들거든. 내가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습니다.

리고 수행을 더욱더 열심히 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또한 실천하다 보면 두려운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무엇이 두려울까 여러분들은?

아마 나이 드신 분들은 ‘아, 내가 죽고 나서 나쁜데 떨어지면 어쩔까?’ 또 ‘내가 지은 것들이 나쁜 것들이 있는데 그 나쁜 것들이 갑자기 결과로써 나타나가지고 나에게 영향을 미치면 어떨까?’ 이생에서 수행해서 깨달음을 이루어서 윤회로부터 끝내야 되는데 계속적으로 이렇게 윤회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너무 두렵다는 거라. 그게 실제로 호흡을 통해서 드러나지거든.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계속 윤회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거라. 그게 두려운 거라. 그런 여러 가지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 열심히 잘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런 두려움이 탁 사라져버립니다.

언제 가능할까? 두려움이 없어질 때?

꼰단냐 존자가 수다원이 되면서 그런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승은 오직 부처님 한 분이시고, 부처님 가르침 외에는 다른 것들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마음의 상태가 되게 됩니다.

경전에는 두려움의 종류들을 보통 4가지로, 어떤 데서는 10가지로 이렇게 나누어 놓은 게 있습니다. '아윗자'라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없어져야만이 아, 내가 인제 이 길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딱 확립이 됩니다. 그때서야 부처님이 제대로 보입니다. 아! 진짜 훌륭하신 분이었구나! 훌륭한 깨달음을 이루었구나! 그리고 부처님이 하지마라 했던 것들은 진짜 하지말아야 되는 거였구나! 그리고 해야 되는 것은 해야 되는 것이었구나!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서 나는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들이 확신이 딱 듭니다. 그럼 부처님이 위대해 보이는 거라.

 

그래서 그게 부처님의 권위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의 권위가 인정받을 때는 수다원이 돼야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권위를 보통 4가지로 얘기하는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들은 어떤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보통 그것을 한국에서는 사무외(四無畏)라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사무외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4가지 두려움이 없다는 것''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부처님이 이 정도로 권위를 지녔구나 하는 것들을 확립하는 것'하고는 차이가 조금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학교 다닐 때 그런 경험을 해봤을 겁니다. 공부 열심히 잘 가르치는 선생님 보면 그 선생님이 말하는 것들은 적어도 그것 부분에 대해서는 권위를 인정해주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그런 부처님의 권위에 대해서 한번 되새겨보면서 ‘아, 나도 빨리 부처님에 대한 위엄,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야지’ 하는 그런 마음들을 자꾸 가질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어떤 날이라고?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는 날!

그래서 그게 공덕이 되도록 하는 날!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하는 날!

그 두 가지는 잊지 않고 하루빨리 여러분들이 더 이상 퇴보하지 않는 상태, 부처님 가르침 외에는 다른 데로 물러서지 않는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그렇게 되도록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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