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qhRXmuhyNlc?si=8_MJX4Ej1AVlV1Mm
* 지금 사띠를 잘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 판별하는 기준(20240601)
오늘은 사띠를 하고 있는 것과 사띠가 아니고 착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자주 사띠는 하고 있습니까?
자주 사띠를 하고 있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차이점이 뭔지 아세요?
가끔씩 수행하면서 사띠하는 사람들은 대상을 내가 선택을 합니다.
배가 있다 -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대상이 되고,
걷는다 -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는 것이 대상이 됩니다.
근데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보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만 안 하죠? 가끔씩은 그게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때 어떤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들이 일어납니다.
자주 사띠하는 사람들은 대상을 일부러 선택하지는 잘 않습니다.
마음이 그때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자주 사띠를 안 하면 뭐 그렇다고 사띠를 안 하는 것은 아닌데, 자꾸 대상을 자기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선택하는 것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그것대로 분명하게 사띠를 하고 있으면 되는데, 문제는 뭐냐면 자기가 대상을 선택하게 되면 대부분 사마타 수행쪽으로 빠지지 위빳사나 수행쪽으로 빠지지를 않는다는 거라.
가만히 한번 보십시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한시간 좌선하고 있는데 한시간 내내 그냥 ‘불러오고 꺼지고’ 그것만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는데도 나는 그것만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신·수·심·법"이 수행대상이 되어야 되는 거고, 그 신·수·심·법으로 인해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져야 되는데, 그걸 그냥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거라.
물론 한시간 수행하면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편안함을 느끼고 육체적으로 많이 편안해지고, 또 스트레스도 없어지고" 하는 그런 것들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진전됐다고는 얘기하기가 힘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상생활에서도 사띠를 자꾸 놓쳐버리니까,
마음이 선한 마음보다는 불선한 마음들이 더 자꾸 많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과거생은 다 제쳐두고라도 이생에서 선한 행위와 불선한 행위 - 신·구·의를 다 포함한 겁니다 - 한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목이 기우는 추가 기울까? (수행자 대답 : 이렇게 돼있어 예.)
뭐가 많아요? (수행자 대답 : 아꾸살라, 꾸살라...)
송천님은 성질만 좀 안 내면 좀 좋겠는데, (웃음^^)
업의 영향으로부터 좀 벗어날 수 있을까?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이 다른 고행하는 사람들한테 한 얘기가 있습니다.
(고행을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고행을 하면 업을 감소시키고 나중에는 업을 소멸하게 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업이 소멸되면 당연히 다음에 환생하지 않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고행을 하는 사람한테 가서 그렇게 물어봅니다.
“이때까지 그렇게 열심히 고행했는데 업이 얼마만큼 소멸됐는지 아느냐? 남아있는 업이 얼마만큼 있는지 아느냐?”하는 거라.
아무도 답을 할 수가 없거든. 그런데도 생각은 그것으로 인해서 업이 소멸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거라. 본인도 얼마만큼 남았고 얼마만큼 소멸됐는지도 모르면서 그러고 있다는 거라.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불선한 업을 많이 지었는지 선한 업을 많이 지었는지 잘 모를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사띠하는 게 반정도는 됐다 싶으면 그래도 선한 것을 많이 했을 거고, 반도 안된다 싶으면 불선한 업을 많이 지었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평상시 때는 사띠를 안 하죠?
그게 대표적인 게 뭐냐면 대부분 수행을 해서 문답하는 사람들이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스님, 제가 지금 수행이 너무 잘되는데 좌선만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경행은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좌선에서 앉아서 수행을 하는데 그게 좀 불편하니까, 그리고 호흡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가 않으니까, 의자에 앉아서 그렇지 않으면 누워서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물어봅니다.
몸이 앉아있을 만큼의 많이 불편한 몸을 지니고 있는 신체 구조라면 그렇게 해도 무방은 한데, 또는 좌선수행에서 분명하게 현상들이 드러나서 힘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경행하는 시간을 좀 줄여서라도 좌선을 하라고 할 건데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거든.
대부분은 보면 자기가 좋은 것들만 할려고 하는 거라. 경행하는 것보다 좌선하는 것이 편하거든. 또는 그냥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서 하는 것이 편하거든.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하나를 항상 잊어버리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고(苦)가 생겨나야 됩니다.
몸과 마음에서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괴로운 것들이 생겨날 때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거라.
그런데 그걸 자꾸 박차버리는 거라.
갖가지 변명을 붙이고, 어떨 때는 거기다가 망상을 뒤집어 씌워가지고 현실을 도피할려고 그럽니다.
나이 든 사람들 앉아서 좌선하기 힘드니까 편하게 의자에 앉아서 하십시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는 그렇게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 스스로 자꾸 몸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수행을 할려고 그러는 거라. ‘이것으로 인해서 몸이 아프면 안 되고,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병들이 생기면 안 된다’는 몸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자꾸 수행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면은 자꾸 편한 것들을 찾게 되는 거라.
몸에 대한 애착을 그대로 유지를 한 상태에서 앉아서 수행하든지 누워서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수행에서 첫 번째로 맨 처음에 일어나는 현상들이 뮙니까?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분리가 되어지는 것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나」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 엷어져 가는 상태가 됩니다.
그게 분리가 되니까 당연히 이 몸이 나라고 하는 것들은, 애착하는 것들은 점점 없어지게 되는 거고, 마음도 대상이 일어난 것들을 분명이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대상을 일부러 선택하지 않게 됨으로 인해서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뿐이라는 거라.
물을 비유를 한번 해볼게요. 물에다가 글씨를 쓴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이 가장 잘 아는 단어가 '엄마'라고 해봅시다. 그럼 이응(ㅇ) 쓰고, 으(ㅡ) 쓰고, 미음(ㅁ) 쓰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물에다가 글을 쓰면 어떻게 돼요? 이응(ㅇ)을 하는(쓰는) 순간에 이미 돌아가면서 이쪽 글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서 이응(ㅇ)을 다 하기 전에 내가 지금 쓴 그 글씨는 그냥 한 포인트밖에 없습니다. 지금 현재는.
맨 처음에 마음을 보는 것들은 그렇게 보입니다.
일어나고 존재를 했다고 싶은데 그게 금방 사라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밖에 없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그게 그렇게 보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돼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는데, 조건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내가 이렇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그게 조건으로 인해서 그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조건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조건없이 일어나는 것들 조건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순서들입니다.
실제적으로는 나는 '엄마'라고 글을 썼지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몸, 마음이라고 하는 거 사실은 실체가 없다는 거라. 아무것도 없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고 조건 따라서 일어나고 조건 따라서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이라.
그게 맨 처음 수행할 때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고 일어나는 지혜들이라는 거라.
그 얘기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나」라고 하는 애착들이 없어야만이 그러한 현상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자꾸 본인은 수행을 대상도 내가 임의로 만들어서 자꾸 할려고 그러고, 수행도 편하게만 자꾸 할려고 그럽니다.
괴로운 것들이 생겨날 때 그때 오온을 관찰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고, 그럴 때 마음은 아주 가벼워지고 아주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여집니다.
대상은 그냥 단순하게 사띠한다고 해가지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사띠한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거라. 걸어간다고 해가지고 사띠한다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럼 다른 얘기로 할 것 같으면 지금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스님이다’ 하고 알아차린다? 그걸 사띠라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냥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대상이기 때문에, 스님이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 몸과 마음에서는 눈에서 보이는 대상으로 인해서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보인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데 자꾸 ‘스님’이라고 알아차리는 거라.
물론 그게 사띠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는 그렇게도 봐야 됩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는 인식하는 것도 분명하게 해야 되는 거고.
그런데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갖다가 자꾸 신수심법을 떠나가지고 자꾸 다른 것들을 관찰대상으로 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리고 그 신수심법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들을 사띠를 해야 되는데, 대상을 자꾸 조작을 하게 되는 거라.
수행을 하기는 하는데 진척이 없게 됩니다. 내나 똑같은 자리에서 맴돌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수행할 때 수행이 잘 진척이 안 되는 것들이 뭐냐하면,
조그마한 사실을 알았으면 금방 전화해가지고 문답하고 그게 뭔지를 알려고 합니다. 어떨 땐 전화 받기가 ‘하..’ 그냥 그것도 대상이다 생각하고 알아차리면 사라져버릴 건데 그렇게 안 하고, 그냥 새로운 대상이 나타났으면 그게 대상이라고 생각 안 하고, 새로운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만 딱 강하게 생겨버리는 거라.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 못 봤던 것들을 봤다’는 자아가 탁 들어서게 되는 거라. 그러니 어떻게 해요? 그걸 자랑을 해야 되는 거라. 문답이라는 핑계 대고.
수행은 남에게 증명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스스로가 그것들을 증명한 것들이 확신이 들어야만이 그게 수행이 되는 것이지,
“나 여기에 이르렀다”, “나 수다원이다”, “나 아라한이다”, 그걸 왜 내세워가지고 증명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나는 이런 현상 알았어” 뭘 그렇게 애착할 게 많고, 스스로 욕심부리고, 「나」라고 하는 것이 내세울 게 많아가지고 그걸,
그것도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때 일어난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을 조작하지 말고 나타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지금 현재 사띠해야 될 대상일 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수행을 할 때 조심을 해야 되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지금 사띠를 잘하고 있는지 잘하고 있지 않는지 하는 것들을 잘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첫 번째 지금 내가 대상을 선택할려고 하는지 안 하는지.
물론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수행하는 법을 잘 모르니까 일부러라도 대상을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인제는 여러분들은 그 상태는 이미 넘었다는 거라. 대상을 선택하지 않아도 사띠가 뭔지를 알고, 사띠가 일어나는 것들을 압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이, 일어나는 현상이 그것이 느낌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현상들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대상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선택하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수행이 깊어지지 않으면 대상을 선택하면 반드시 그분은 사마타쪽으로 머물러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좌선하고 경행하고 할 때 수행을 잘하고 있는지 하는 것들을 판단하는 기초가 "대상을 선택하고 있는 건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대상 자체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사띠 하고 있는지"로 구분을 하면 됩니다.
물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으로 보일 때도 있고, 일어나는 원인이 뭔지를 보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들을 볼 때도 있고, 그것이 또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고, 그것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또 다른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이 보일 때도 있고, 각각 틀릴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지금 그 대상으로 인해서 무상함 고 무아라고 하는 성품들이 그대로 드러나진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을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잘 사띠하고 있는 거라.
쉽게 말하면 대상을 선택하면 사마타로 빠지기도 쉬울 뿐 아니라 대부분은 사띠를 놓쳐버리고 망상을 하게 됩니다. 사띠를 놓쳐버리면.
망상을 하면 망상하면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다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배가 꺼질 때 ‘일어남’하고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망상하고 있기 때문에, 머리에서.
망상하면서 조작하는 기능들을 반드시 멈춰야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드러난 대상입니다.
그걸 자꾸 놓아두고 내가 인위적으로 자꾸 대상을 선택할려고 하는 것들을 자꾸 조금씩 놓아버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안이비설신의에서 일어나는 것,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것으로서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대상을 자꾸, 마음을 밖으로 간다든지 또는 대상을 집착을 하게 되면 망상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일상적으로 생활할 때 외에는, 수행을 좌선하고 경행하고 하는 시간에는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현상들로서만 자꾸 파악을 할려고 해야 됩니다.
실제로 대상이 뭔지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인식하기를 ‘보인다’고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거라.
대상을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현상들로서 자꾸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망상의 세계를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사띠를 안 하면 망상을 하겠지만, 사띠를 하면서도 망상을 하는 버릇들을 자꾸 들이게끔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보면 잘못하는 것들이 뭐냐면 "잘하겠다는 욕심을 부린다"는 거라.
‘내가 이 한시간 동안에는 열심히 사띠해가지고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겠다.’ 그렇게 마음 먹는 거는 좋아요.
그런데 그렇게 다 안 됩니다.
안 될 수밖에 없으면 본인이 ‘아, 내가 잘해야 되는데’ 하는 망상을 하게 됩니다.
잘 안되니까 성질나게 되는 거고.
수행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편안한 게 아닙니다.
또 수행은 잘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고요하고 편안한 걸 찾고 잘되기만 바라느냐는 거라.
그게 망상들입니다, 전부.
망상들을 깨뜨리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들을 가지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유신견」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신견을 보통 사람들이 이 몸에 대한 견해를 가지는 것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시스템입니다, 시스템! "이것으로 인해서 이것이 일어나지게 되고,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사라지게 되는 이 시스템"을 「유신견」이라고 그럽니다.
그 시스템을 알면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대상을 지금 현재의 것만 알아차리게 되는데, 유신견이 있는 상태일 것 같으면 그걸 끌어버리는 거라.
배가 불러온다 - ‘쭈우우우욱’ 불러와집니다. 배가 꺼진다 사라진다 - ‘쭈우우우욱’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으로 끌어버리는 거라.
배가 불러와지는 게 지가 한 번에 불러와집니까?
밥을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밥을 안쳤으면 밥이 다 됐다, 밥을 안쳤으니까 밥이 쑤우우욱 다 됐다, 누가 이렇게 얘기합니까? 밥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까? 물도 끓고, 밥알이 팽창도 하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는데, 그거 다 그냥 무시해버리는 거라. 시간 되니까 ‘쑤우우욱’ 그냥 된 것으로.
대상은 그렇게 보여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여지면 간단하기 때문에 편안은 합니다.
그런데 그 반비례적으로 유신견이 점점 더 강해지는 거라.
찰나찰나에 자꾸 사띠하는 습관들을 들여서 그때그때 찰나찰나가 조건따라서 바뀌어 나가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집착하고 애착하는 것들이 없어져야만이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3가지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서
"지금 사띠를 잘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으면 됩니다.
수행은 "담마누담마(Dhammānudhamma)"라고 그럽니다.
끊임없이 계속 반복해서 그 현상들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알아차리고 해서 무르익어질 때, 그때 지혜가 열리고 깨달음이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만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반복·반복하는 습관들을 계속 가지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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