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수행이 잘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오력의 균형」 (20240615)

담마마-마까 2024. 6. 16. 12:59

https://youtu.be/-xOOrwWklVc?si=SXHPLn8p8yMMsOW_

 

* 수행이 잘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오력의 균형」 (20240615)

 

다음 주 수요일에는 스님이 태국 좀 잠깐 갔다 오겠습니다. 2주, 여기서 그다음 다음주 수요일, 화요일이니까 수요일 아침에 도착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시금도 좀 전달해야 되고 안거 전에 보름 법회 잠깐만 봐주고 그렇게 다녀오겠습니다.

 

오늘은 어느 정도 수행이 잘되고 있는 사람들한테 해당이 됩니다.

수행이 잘되고 있는 사람들의 「오력의 균형」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처음에 초기에 할 때 오력의 균형은 잘 알죠? 믿음과 지혜가 균형이 맞아야 되고, 노력과 집중이 균형이 맞아야 되고, 사띠는 자꾸 강화시키도록 하라는 그런 거는 대부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얘기할려고 하는 거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관찰을 해보니까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관찰을 하는데 너무 괴로운 사람들, 이게 빠르게 변해서 괴롭든지 그렇지 않으면 육체가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상태로서 마음대로 지 하고 싶은 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로 그렇게 움직이는게 보인다든지 할 때 괴로운 느낌들이 좀 많이 강한 사람들이 해당이 될 겁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무상에 대해서 체험도 하고, 무아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고, 그리고 괴로움에 대한 것들도 체험들을 했기 때문에, 그게 글을 통해서든 아니면 실제 수행을 통해서든 어느 정도 확립이 돼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사실은 <오력>이 균형이 맞아야 되거든. 그래서 <오력>의 균형이 완전하게 맞는 사람들은 아라한 밖에 사실은 없어요. 그래도 균형이 맞아야만이 수행의 발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겁니다.

 

믿음(saddhā) 부분은, 보통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그렇게 혼란한 게 별로 없습니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계속적으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단지 마음이 혼란할 때가 뭐냐면 괴로움이 너무 강하게 다가와질 때 그럴 때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는데, 대부분 그럴 때는 보면 대상에 너무 마음을 밀착해가지고 감정이 일어나버릴 경우가 마음이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사실은 그런 사람들은 아, 내가 믿음 부분이 너무 강했구나, 감정이 일어나버리면 믿음 부분이 강했구나 하고 판단을 내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좀 떨어뜨려야 되는데, 대부분은 이런 현상들은 잘 안 일어나집니다.

 

단지 이 부분은 뭐가 있느냐면 "마음이 혼란하지 않은 상태가 얼마만큼 오래도록 지속하느냐"를 가지고 측정을 해야 됩니다. 혼란하지 않고 그냥 마음이 고요하고 가벼운 상태에서 대상을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있는데 그게 변하는 것들이 보인다든지, 느낌들이 빠르게 생멸하는 것이 보인다든지, 이런 것들이 지속되는 시간이 얼마만큼 되느냐에 따라서 ‘아, 내가 조금 더 믿음을 더 키워야 되겠다, 안 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대부분 이런 정도의 수행을 하고 있으면 좌선시간 한시간 보다도 긴 경우들이 대부분인데, 두 시간이라고 칩시다. 두 시간 동안 할 동안에 대부분 결정을 하고 들어갑니다. '두 시간 동안은 대상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관찰을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시간 동안에 어쨌든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겠다' 하는 그런 어떤 마음들을 지닌 채 탁 들어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하다 보면 그 결정심이 점차 약해져버리는 거라.

결정심이 밑바닥에 딱 깔린 상태에서 대상을 사띠를 해야 되는데, 그 결정심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띠를 하게 되니까 괴로움이 자꾸 커진다는 거라. 변하니까,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분들은 그럴 때마다 스톱을 하고 다시 결정심을 자꾸 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게 인제 어느 정도 수행이 진척된 사람들이 믿음(saddhā)을 조금 더 강화시키는 방법들입니다.

첫 번째 마음이 혼란하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만큼 지속하느냐! 하는 거라.

사띠는 분명히 하고 있는데 마음이 혼란해지는 경우들이.

두 번째가 결정심을 지속할 수 있느냐! 하는 거라.

 

그런 분들은 일상생활을 할 때도 사띠를 물론 지니고 있지만 자꾸 선한 법을 자꾸 들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선한 법을 자꾸 듣고, 그게 법문이 되든 아니면 경전이든 뭐든 선한 법을 가까이 할려고 하는 노력들을 자꾸 할 거 같으면 믿음 부분들은 어느 정도 내가 필요한 부분들은 채워지는 상태가 됩니다.

단지 너무 거기에 지나쳐버리면 초심자들은 삿된 믿음으로 빠지기 쉬운데, 어느 정도 수행한 사람들은 감정에 끄달려들어가버립니다. 감정이 자꾸 일어나게 돼버립니다. 그 부분을 자꾸, 그럴 때는 스톱을 하고 다른 것들로서 채울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노력 부분입니다. 정진 위리야(vīriya)라고 하는 것.

물러서지 않으면 참 좋은데, 대부분 느낌이 너무 강하고 빨리 변하면 지레 겁을 먹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 대상으로부터 물러나버리고, 다른 대상을 찾게 되는 거라. 그래서 노력의 힘이 어느 정도 배가되고 균형이 맞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 대상 자체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되는 거라. 대상에서 물러서는 습관을 자꾸 들이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위리야를 더 증장시킬 수도 없고, 또 오력의 균형이 맞아지질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대상은 끊임없이 관찰을 하고 있는데 대상이 자꾸 바뀐다, 이러면 다시 한번 자기가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은 보면 빠르게 변하고 또 느낌들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과연 이것 갖고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들을 하게 됩니다.

그게 믿음에 대한 의심들입니다.

 

위리야(vīriya)가 약해도 일어나지고 위리야가 강해도 일어나집니다.

특히 위리야가 강할 때는 업에 대한 것들도 받아들일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가 그냥 사띠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노력의 힘만 자꾸 배가시킬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노력의 힘이 균형이 맞을려면 필요한 게 뭐가 있느냐면 3가지를 갖춰야 됩니다.

"보시 · 지계 · 수행"

그런데 앞에 걸 두 개를 자꾸 빼먹어 버리는 거라. 수행만 자꾸 할려고 하는 거라.

보시하는 것, 계를 지키는 것, 보시하는 것은 단독적인 거지만 계를 지키는 것은 수행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계를 지키는 것을 자꾸 하찮게 생각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본인은 계를 지키고 있다고 자꾸 판단들을 하는 거라.

그런데 미미한 미세한 계들은 본인이 어쩔 수 없이 어기는 것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도 계의 영역에 속하는데도 무시해버리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너무 열심히 할려고 하는 위리야가 너무 강해도 그런 폐단들은 있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부족한 게 뭔가’ 하는 것을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보시하는 게 부족한지, 쉽게 말하면 베푸는 것들, "베푼다는 것은 남을 인정하고 남에게 선한 마음들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를 지킨다는 것은 본인의 행위들, 말과 행동으로서 하는 것들이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것들이 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도 허물도 저지르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이 자꾸 강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뒷받침이 되고 해야만이 수행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는데, 자꾸 앞에 것들을 두 가지들을 빼먹어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문답하는 사람들을 보면, 문답하는 사람들이 절대 여기 선원에 안 옵니다. 필요한 것은 문답이기 때문에. 근데 그걸 알면서도 스님은 그걸 또 해주고 있어. 어떨 때는 ‘어휴, 참 저사람들 저렇게 해가지고는 일정하게는 어느 정도는 올라갈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힘드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당장 뭐 급하다고 하니까 어쩔 수없이 해줘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런 분들은 보면 대부분이 이 앞에 두 개 부분을 대부분 빼먹고 그냥 노력할려는 힘이 강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되고, 지나쳐버리면 수행 자체를 포기를 해버리게 되는 경우들이 생겨버리는 거라.

 

그래서 위리야(vīriya)도 자꾸 강화시켜줘야 되지만 딱 하나만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대상에서 물러서지 않을려고 하는 것!

그게 괴로운 느낌이든 즐거운 느낌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이든 간에 그 대상으로부터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딱 확고하게 돼있을 때 위리야는 어느 정도는 확립이 된 상태라고 판단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앞에 삿다(saddhā) 부분 보다도 이 위리야(vīriya)가 지금의 이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경에서는 "마낫사- 상와로- 사-두 manasā saṁvaro sādhu" 라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노력하는 의지를 보호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하는 거라.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하는 것은 다 선한 일에 속합니다. 그것뿐 아니라 여러 가지 바라밀들은 이 사람의 노력의 힘들을 갖다가 보호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요즘 같이 바쁜 때 선원에 오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닐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그런 분들은 반드시 선원에 가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알고 있는 법문이라도 법문도 귀담아 듣고, 그리고 도반들하고 수행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들도 하고 하는 시간들은 반드시 많이 필요합니다. 그냥 수행만 해가지고 아라한에 이르겠다, 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잊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사띠(sati) 부분입니다.

사띠는 지나치고 그다음에 약하고 하는 거 없습니다. 자기의 지금 상태에 맞게끔 대상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놓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을.

그래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게 ''내가 대상을 놓치느냐 안 놓치느냐'' 그거만 생각하면 됩니다. 놓치지만 않으면 지금 그게 보이는 게 몸의 느낌이 변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든 아니면 마음이 변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현상들이 움직임만 보이는 것이든 그것이 지금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것이 보이면 그냥 그걸 놓치지 않을려고만 하면 되는 거라.

 

그래서 이 3개를 중점적으로 해야 되지, 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게 뭐냐면 사마디(samādhi)에 들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사마디에 이를 수 있는 좀 더 편한 길이 뭔가 하는 것만 자꾸 찾을려고 하게 됩니다. "그거 하지 마라" 그래도 꼭 그걸 할려고 그래.

 

그래서 이런 분들은 사마디(samādhi)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지혜(paññā)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저절로 이 세 개가, 앞에 3개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이루어지고 나면 사마디는 저절로 됩니다. 그런 거는 사마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나면 빤냐(paññā) 부분 지혜 부분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형태들을 띠고 있는데, 앞에 3개를 자꾸 무시해버리고 고요함만 찾을려고 하는 거라.

 

수행은 그렇게 해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대상이 빠르게 변하고 하는 것 느낌들이 자꾸 일어나고, 그것들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들이 자꾸 일어날 때는 이 부분을 반드시 참조해가지고 그 부분을 극복을 해나가야 됩니다.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자꾸 이렇게 괴로움들은 내가 사마디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판단들을 하는데, 절대 안 그렇습니다. 사마디가 부족한 게 아닙니다. 이걸 그렇게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분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삿다, 위리야, 사띠' 3가지 밖에 없다. 내가 조정할 수 있고 강화시킬 수 있고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은 이 3개 뿐이다" 하고 판단을 해야 되지 나머지 두 개를 자꾸 신경을 쓰면 안됩니다.

뭔 말인지 알겠죠?

 

그렇게 해도 만약에 좀처럼 대상에 몰입하는 삼매에 들지도 못하고 지혜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그러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도자한테 가가지고 조언을 자꾸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지도자한테 가서 조언을 구하는 걸 몸을 지가 움직여가지고 가가지고 얼굴을 맞대고 조언을 구할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전화로 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뭔가 대상이 탁 나타났다, 그러면 보통 ‘어! 이게 뭐지?’ 이게 뭔지 내가 한번 찾아볼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야 되는데, ‘이게 뭐지’ 하고 나서 ‘어, 물어봐야지’ ‘나 신비한 경험했어’ 요래 해버리게 되는 거라.

 

사띠가 잘 되고 할 때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택법각지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착각을 하는 게 택법각지를 본인이 해석을 하고 있다는 거라.

‘이거는 산냐(saññā)지’ ‘이거는 뭐지’ ‘이것으로 인해서 요게 일어났지’ 그거 왜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망상이지 그게. 택법각지는 절대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거라.

 

수행해 보신 분들은 알겁니다. 사띠가 잘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택법각지는 그게 아니고 이게 선한 건지 안 선한 건지구분하게 되는 것, 이게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이게 뭐지’ 하면서 보는 것들이 만약에 개념적인 것들을 자꾸 보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지금 내가 불선한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 그런데 그걸 구분을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택법각지가 아니라.

 

그래서 경전에도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수행이 잘 되고 있을 때는 "웃사헤뜨와 뚤레띠 뚤라위뜨와 빠다하띠 ussāhetvā tuleti tulayitvā padahati" 그렇게 얘길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뭐지하고 비교해 보는 것들입니다. 이게 선한 건지, 안 선한 건지 이런 것들을 구분해 보는 것들로써 넘어가지게 되고, 구분해 보고 비교해 보고 할 것 같으면 다시 또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거고, 더 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는 거고.

이 패턴으로 자꾸 돌아가져야 되는데, 비교해보는 것들이 이미 잘못돼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택법은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꾸살라(kusala)인지 아꾸살라(akusala)인지" 분명하게 구분하고 인식하는 것,

 

그다음에 "-왓자(sāvajja)인지 안아왓자(anavajja)인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수행 잘하고 있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망상피우고 있는 건지 구분해볼 수 있는 것들" 입니다. 쉽게 말하면 일상생활 할 것 같으면 내가 하는 행위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아유 잘했어” 하고 칭찬하는 건지 아니면 “저 나쁜 놈” 하고 비난을 하는 건지를 구분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라. 안와와짜, 아닌 거는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망상 피우고 있는 거는 전부 아꾸살라다. 그리고 망상부리고 개념에 자꾸 매이는 것들은 그거는 수행에 진척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도 좋아하질 않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것이 뭐냐면 "히나(hīna)-빠니따(paṇīta)" 해가지고 "수승한 건지 수승하지 않은 건지" 하는 것. 쉽게 말하면 수행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택법이 되면 저절로 사띠가 강해집니다. 그러면 그전에 사띠를 하고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대상들이 빠르게 변하고, 그리고 훨씬 더 대상들에 대해서 '나'라고 하는 것들이나 생존욕구들이 점점 더 엷어져나가는 게 보여야 되는 거라.

그게 수승한 건데 그렇지 않고 똑같은 상태가 돼버릴 것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다음에 마지막 것은 뭐냐면 "깐하 숙까 삽빠띠 바가(kaṇha sukka sappaṭibhāga)"라고 그렇게 나오는데, 이거는 "어둡고 밝고" 한다는 것은 뭐냐면 "죄가 되는 행위인지 아니면 공덕이 되는 행위인지"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거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들"을 얘기합니다.

 

수행할 때, 수행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공덕을 쌓게끔 됩니다. 왜? 매순간 사띠를 하고 있는 선한 마음이 계속 지속적으로 찰나찰나 간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자신은 택법한다고 하면서 망상부리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공덕이 아니고 죄(罪)에 속하는 거라.

택법이라는 것은 이걸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닌 것은 버리고 바른 것들은 점점더 하게 되는 것이 택법각지인 것이지 개념에 쌓여버리고 망상을 부리면서 ‘이게 뭘까’ 하고 자꾸 찾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와 같이 수행이 잘 되고 할 때, ‘이게 뭐지?’ 할 때 본인이 찾아야 된다는 거라.

그걸 안 찾고 택법으로 넘어가지질 않고, 자꾸 스승에게 물어봐버리고 이거 어떻게 해야 되죠?” “이게 뭐죠?” 이렇게 물어버리는 습관을 할 것 같으면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지는 거라. 물론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고 지도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좋은 방법이지만,

 

본인이 그 문제를 자꾸 헤쳐나가게 될 때,

개념적인 것들을 버려버리고 실재하는 것들을 자꾸 찾게 될 때,

수행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고 그러면서 집중하는 힘이 생기고 지혜가 일어난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오력의 균형이 맞아질 때 수행은 훨씬 더 진보하는 상태에 이르른다 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