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수행에 진척이 없을 때-장애요인 체크 (240921)

담마마-마까 2024. 9. 22. 18:06

https://youtu.be/EFc1bfCDIjU?si=nyE0-LVGRsfjVFMu

 

* 수행에 진척이 없을 때-장애요인 체크 (240921)

 

그래도 오늘 비가 많이 오는데 많이 왔네.

호흡 관찰하고 할 때 호흡을 관찰하다가 조금 있으면 변하는 것이 보이는 사람? 없어? 안 보이는 사람? 그거 안 보이면 뭐 하고 있어? 그냥 계속 그거 관찰하고 있는 거라? 대답들이 없노?

 

안 보이면 안 보이는 원인을 빨리 찾아야 됩니다.

그냥 계속 호흡하는 거 들이쉬고 내쉬고, -좀 소리가 좀 울린다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계속(알아차림)하면 마음의 특성을 모르게 됩니다.

사라짐만 보이기도 할 때가 있고, 무상한 성품들이 보이기도 할 때가 있고 해서 빨리 넘어가져야 되는데, 그게 안 되고 그냥 편안하게 그냥 밥 먹듯이 그냥 호흡하고 있으면 마음의 특성이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좌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경행을 하든지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더 훨씬 이익이 있습니다.

 

오늘 점심은 먹고 나면 저녁 안 먹죠? 그럴 때 수행하는 것 하고 그냥 저녁 먹고 일상생활 하면서 하는 수행하는 거하고 차이가 좀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차이가 큽니다.) 큽니까? (예) 그럼 계속 굶어. 저녁은. 이익이 있는데 왜?

음식의 적당량을 자신이 분명하게 체크를 해야 됩니다.

 

수행에 진척이 없으면은 틀림없이 원인이 있습니다.

그 음식의 적당량을 자꾸 체크를 해가지고 그 이상은 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저녁을 먹고 안 먹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바꿔야 되는 거라.

 

첫 번째, 음식의 적당량을 자꾸 체크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고.

일정하게 계속 먹는데도 그냥 호흡하는 것밖에는 모른다 할 것 같으면 먹는 양이 많습니다. 대부분 본인이 적당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적당하지 않고 몸에 과한 상태입니다. 그럴 때도 줄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수행하고 있으면 밖에 소리 들립니까? 눈 뜨고 있으면 뭔가 보입니까? 그렇죠?

그건 감각 기관이 제어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음에서 대상이 뭔가 다른 게 하나 일어날 것 같으면 금방 마음이 그쪽으로 쏠려버리게 되는 거라. 수행 오래 못 해 그러면.

하고는 있지만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지만, 좀 꾸준하게 이게 뭐 몇십 번이라도 좀 진행이 돼야 되는데, 소리 들리면 소리 들리는데 마음이 가있다가 냄새가 나면 냄새가 나는데 가있다가, 오만데 다 갈 것 같으면 좌선할 때도 그렇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경행할 땐 어떻게 할 건데? 마음이 발에 가 있는 게 아니고 거의 대부분 밖에 가 있다는 얘기거든.

 

두 번째, 감각 기관을 제어하는 것들은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초보자들은 되도록이면 좌선할 때는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소리 잘 들리지 않는 곳에 가서 좀 하든지 해서, 대부분 그걸 억제할 수 있는 곳들을 가야 됩니다. 그리고 경행을 하더라도 그냥 일방적으로 왔다 갔다만 하거나 눈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보는 대상들이 되도록이면 없는 것들로 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감각 기관을 자꾸 제어할려고 해야 되지, 그렇게 감각 기관을 그대로 놔둬 버린 상태에서 호흡을 알아차리고 수행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은 금방 벗어나버리게 되는 거라.

 

마음이 벗어나는 게 왜 안 좋으냐 하면,

마음이 벗어나는 순간 여러분들은 이미 그냥 일상적인 고통스러운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이나 이런 느낌만 받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느낌으로 넘어가 버리고 거기서 갈애가 생기고 어리석음이 생기고 해서 연속으로 그냥 계속적으로 화살을 맞게 되는 형태들을 띠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런데 본인은 모르는 거라 그걸. 그렇게 맞고 있는데도.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손가락을 요렇게 지긋이 한번 눌러 봐봐요.
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떼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가 고통스러운 느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인해서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애까지 생기고 하는 거라.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넘어가는 것까지 연속으로 받고 있다는 얘기라.

그냥 눌리면 눌리고 있다고만 알아차리면 되는데 보통은 그렇게 안 하고 눌려지면 벗어나려고 합니다. 감각 기관을 제어 못한 상태에서는 계속적으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사람들이 대부분 보면은 경행을 잘 안하고 좌선만 할라고 그럽니다.

좋고 편하고 한 것만 찾는 거라. 좌선할 때는 장애들도 안 일어나고 수행이 잘 됩니다. 근데 그거 어디다 쓸 건데? 여러분 세계는 앉아있는 세계가 아니고 일어나서 밖에 나가 있는 세계입니다. 밖에 나가 있는 세계에서 그대로 다시 탐·진·치가 그대로 일어나지고 제어가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앉아있는 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대상은 앉아있을 때는 감춰져 있기 때문에 잘 안 일어납니다.

래서 본인이 잘 모릅니다.

근데 일상 할 때는 외부적인 대상뿐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대상들, 탐·진·치의 대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유지가 돼야 되는데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앉아있는 것들만 자꾸 할려고 그러는 거라.

회피하는 거라 본인이.

본인이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은 걸 갖다가 수행에서 역으로 오히려 좌선만 자꾸 할려고 하는 거라. 감각기관이 안 일어나는 방향으로.

안 일어난다고 해서 그게 진짜로 안 일어나져요?

 

그다음에 세 번째, 사띠에 전력을 기울이질 않습니다. 대부분 보면.

전심전력으로 기울여서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라.

사는 게 복잡하죠? 왜 복잡할까? 마음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과거나 미래로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복잡해진다는 거라. 현재만 자꾸 살아 봐봐. 아무리 복잡한 것도 현재밖에 없기 때문에 복잡할 일이 없어요.

그마만큼 사띠하는 것이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마음이 가 있지 못하고 자꾸 왔다갔다 하는 거라. 전심전력을 하지 못하는 거라.

사띠만 전심전력으로 딱 하는 습관을 들여놔 놓으면 호흡을 알아차리면 금방 호흡이 사라짐만 보입니다. 금방 그렇게 돼버려요.

빠르게 변하다가 바로 사라져 버립니다.

 

근데 전심전력을 안 하니깐 그때까지 시간이 엄청 걸리는 거라. 왜 그게 안 되느냐는 거라. 앉아서 호흡을 관찰을 하면은 일어나는 현상에서도 이미 '사라짐'만 보이는 거라. 사라짐에서도 '사라짐'만 보이는데 너무 빠르게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사띠를 잘하면 현재에 있으면 그렇게 딱 대부분 됩니다.

근데 그게 인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게 사라짐이 보이니까, 빠르게 변해 가니까 두려운 거라. 그래서 자꾸 끄집어내려고 그래. 일어나는 걸.

그거 왜 수행을 되돌릴려고 그래?

그래서 자꾸 자기가 사띠를 깨버리고 다시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꾸 보는 거라.

이런 멍청한 일이 어디 있어?

두렵거나 벗어나고자 하더라도 그냥 안 죽어. 그냥 사라지면 그냥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면 그냥 그대로 그것만 관찰하면 됩니다.

사띠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면은 금방 거기까지는 도달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근데 대부분 전심전력을 안 하는 거라.

단 1분을 하더라도 완전하게 사띠를 기울여서 사띠삼빠자나가 되도록 이렇게 쫙 해야 됩니다.

대상을 놓치지 않고, 그리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소란스럽지 않은 상태에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건 전심전력으로 기울이고 있다는 거라.

그렇게 될 때 현상들이 변하는 것들이 보이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그래서 마음이 그다음에는 사마디 쪽으로 빠질려고 하고 하는 것들로 자꾸 바뀌어 나갑니다.

 

도와 과를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면 그다음에는 뭐가 일어나질까?

호흡으로 인한 느낌들이 없어져버립니다. 호흡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호흡에 가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이 딱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그냥 마음하고 대상밖에 없어요. 그것만 딱 보여.

그게 뭐냐면 마음이 선정 상태로 들어갈려고 하는 거라.

 

그때 잘 잡아야 되는 거라.

그런데도 아직은 뭔가를 알려고 하는 마음도 생기고, 사고하는 마음도 생기고, 그리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마음들도 생기거든.

그걸 탁 놓아버려야만이 마음이 평온하게 그냥 대상과 그걸 바라보는 마음만 딱 있는 것이 보여집니다.

 

대상에 마음을 탁 기울일려고 하는 마음이 탁 사라지고 나면은 너무나 평온해. 편안해. 그렇게 해도 아직은 멀었거든. 어쨌든 편안하더라도 아직은 내가 깨달음에 이른 상태가 아닙니다.

그럼 그냥 편안한 걸 그냥 계속 그대로 바라보고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러다가 마음이 착 진행이 되면은, 그다음에는 마음이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가 사라지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거라.

쉽게 말하면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하는 마음조차도 일으키질 못하는 상태라는 거라.

 

사실은 그때가 되면 가장 사띠의 힘이 강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열반을 구하게끔 되는데 사띠가 강해지는 상태가 되도록 자꾸 사띠의 힘들을 키워야 되는 거고, 전심전력으로 사띠할려고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 그런 식으로 넘어가지는데 그걸 안 하는 것들이라. 두려워서.

그냥 끝내버리고, 이게 전에 하던 방식하고 틀리기 때문에 끝내 버리고, 느낌이 없으면 느낌이 없다고 끝내 버리고, 대상이 사라지면 대상이 사라졌다고 끝내버리고, 자꾸 그렇게 스스로를 만드는 거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하다 죽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대신에 대상을 사띠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현재! 미래로 왔다갔다 하지 말고!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 자체가 단순하게 되고 복잡한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현재에 자꾸 머물러서 현재 일어나는 것들만 자꾸 알아차리고자 하는 습관들을 가지면 됩니다.

-들어오십시오.-

 

사실은 이런 게 인제 마음의 특성들인데, 부처님은 그걸 요리사에 비유해 놓은 게 있습니다.

요리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렇게 해서 맛있게 만들어서 왕에게 갖다 주더라도 왕이 그걸 잘 먹는지 안 먹는지 어떤 거는 먹고 어떤 거는 안 먹는지 하는 걸 갖다 관찰하지 않으면은 발전하는 것이 없다는 거라. 그 사람은 맨날 그 요리만 만드는 거라. 근데 왕이 뭐 맨날 똑같은 입맛이라? 그건 아니잖아. 오늘은 이게 맛있기도 하고, 내일은 다른 게 맛있기도 하고.

왕의 요리사는 어떠한 경우든지 요리도 잘 만들어야 되지마는 왕의 상태를 정확하게 살펴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다음에 만들 것들이 생각나지고 그걸 이행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걸 부처님은 요리사에 비유했는데,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 마음의 특징들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걸 알려고 하지 않으면 수행의 발전은 없다는 거라. 똑같은 패턴으로만 계속 수행을 한다는 거라. 한 달을 해도 똑같애. 1년을 해도 똑같애.

 

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대장장이와 같다고 생각해라" 하고 한번 법문한 적이 있습니다.

쇠가 달궈진 것들을 계속적으로 두드려서 펴 가지고 원하는 방향으로 하지 않으면 쇠는 식어버립니다.

사띠가 끊어지면 안 됩니다.

사띠가 강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은 지금 내가 현재의 상태인 거고, 그건 여러분들이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사띠가 끊어지지 않고 현재 일어나는 것들만 계속적으로 사띠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벗어날려고 할 것 같으면 안 됩니다.

 

특히 초보자들 같은 경우에 호흡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떨 때는 빠르게 호흡이 되기도 하고 뭐 어떨 때는 호흡이 잘 느껴지지도 않고 그럽니다. 그러면 전화가 와가지고 질문합니다.

“스님 그럴 때 자꾸 명칭을 붙여야 됩니까? 근데 명칭 없이 보아도 그게 보이는데요?” 그럽니다.

보이기는 보이겠지. 근데 명칭 하나도 그걸 붙이지 못하는 상태일 것 같으면 그거 어디다 써먹어?

 

왜 본인이 원하는 대로만 자꾸 수행을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이미 명칭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알지만, 가끔씩 호흡을 본다는 얘기라.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그냥 계속 흩어져가지고, 다른 데 가 있다가 다시 돌아오고 다른 데 가 있다가 돌아오고 하는데 본인은 그걸 몰라.

호흡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라.

근데 이게 ‘호흡이 미세하기 때문에’ 아니면 ‘호흡이 빠르기 때문에’라고 핑계를 댄다는 거라.

 

실제로는 호흡이 미세하지도 않고 호흡이 빠르지도 않아요.

마음이 그때 없었기 때문에 호흡이 미세하게 보이는 것뿐이고, 호흡이 빠른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

여러분 호흡이 가만히 지금 앉아있는데, 뭐가 그렇게 미세해지고, 뭐가 그리 빨라질 일이 있어요? 그게 아닌데 자꾸 마음은 벗어나 있는 걸 갖다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명칭조차도 놔버린 상태가 되는 거라.

수행 안 하겠다는 얘깁니다.

 

마음을 대상에다가 현재 있는 대상에다 마음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명칭을 붙이는 건데 그것조차도 싫어해 버리면, 스님이 답해줄 게 없어져버립니다. 답이 없어져버립니다. 명칭을 뗄 때는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지가 떼고 싶어서 떼는 것이 아니고!

그냥 붙여. 붙여서 그냥 지속적으로 해요!

그래야 그나마라도 마음을 거기다 붙잡아둘 수가 있는 거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수행할 것 같으면 절대 수행은 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장장이와 같이 계속적으로 그 대상을 갖다가 관찰하도록 해야 되는 거라.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원자로에 들어가서 원자로를 고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그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진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것들을 어떻게 변하는지를 잘 보고 관찰해서 그대로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습관을 들이면 금방 대상이 변하고 하는 것들이 보여진다는 거라.

어렵게 자꾸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거기 안 가 있다고 생각해야 되지, 수행이 자꾸 어렵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은 계속적으로 마음속에서는 생각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 내가 이게 맞나 안 맞나?’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일어나는 현상들을 자꾸 경전에 비춰봐 가지고 이게 뭐다하는 걸로 자꾸 대입할려고 그럽니다.

제발 그거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

 

만약에 계속적으로 습관이 그렇게 된 사람들은 방식을 바꾸십시오.

호흡만 볼려고 하다가, 호흡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호흡만 계속적으로 관찰해서 호흡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냥 보도록 한번 해보십시오. 실제로 호흡이 사라집니다.

느낌도 사라졌다가, 편안하게 다가왔다가, 그것으로부터 또 벗어나지게 되면은 느낌조차도 없어진 상태에서 호흡조차도 나중엔 싹 사라지는 게 보입니다.

 

그럼 호흡이 사라지고 나면 뭐 해야 돼? 뭐 해야 돼?

호흡이 없는데, 마음은 분명히 있는데, 호흡이 없어. 뭘 해야 돼? 뭘 해야 돼? 호흡을 다시 찾아야 돼요?

바보 같은 짓이라. 그냥 놔주라는 거라.

마음이 지가 알아서 뭔가로 이동하게 돼 있어.

근데 그 사이를 못 참는 거라.

호흡이 없으면 호흡이 없는 대로 놔줘.

물질적인 현상을 관찰하다가 정신적인 걸 관찰해야 되는데, 요걸 못 바꾸는 거라.

 

고요하게 있으면 고요한 대로 그냥 놔줘.

무상하게 안 보이면 무상하게 안 보이는 대로 그냥 놔줘요.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아예 텅 빈 것처럼 보이면 텅 빈 것처럼 그냥 보라고.

그렇게 하고 있으면 이게 그다음에는 뭔가 다른 대상으로 탁 들어가집니다.

 

사실은 수월하게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은 보면은 수행하다가 어느 정도 좀 공부가 되면 요걸 자꾸 (경전에) 대입을 시키는 거라.

그거 아주 나쁜 습관이니까. 하지 말아요.

그걸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명심할 것,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판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들이쉬는 숨인데 ‘어, 내가 들이쉬고 있나...’ 하고 판단할려고도 하지 말아라는 거라.

내가 들이쉬는 숨인데 ‘들이쉼’이라 안 하고 ‘내쉼’이라고 하고 있는데, ‘어, 내가 틀렸네...’ 틀린 것도 판단하지 말아라는 거라. 냅두라는 거라.

냅두면 저절로 현상에 탁 마음이 가게 됩니다.

 

판단하는 순간 대상은 사라져 버립니다. 판단하는 마음만 딱 남아있습니다.

그럼 지가 스스로 조절을 조작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여러분 앞에 뭔가 돌을 하나 탁 던졌다 해보자. 어떻게 해야 돼요?

돌이 날아오고 있는데, 돌이 날아오는 게 보여요. 확 피해야 돼? 아니면 이걸 탁 손으로 잡아야 돼? 어떻게 해야 돼? 손으로 잡을 시간이 있으면 손으로 잡아야 되는 거고, 피할 시간이 있으면 피해야 되는 거지. 안 그러면 그럴 시간이 없으면 그냥 맞아야 되는 거고.

 

근데 그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마음은 동요하지 않아야 되는데, 중요한 거는 마음이 동요한다는 거라. 날아오고서 맞기 전에 이미 마음이 동요해서 피할려고 한다는 마음이 생기든지 막으려는 마음이 생기든지 뭔가가 생긴다는 거라.

판단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면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은 반드시 동요합니다.

판단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면은 그냥 그대로 보게 되는 거라.

그래서 보게 되면은 그다음에 내가 해야 될 것이 떠오릅니다.

 

막을 건지 피할 건지 아님 그냥 맞을 건지.

근데 그게 어떤 것이 되더라도 마음은 동요하질 않는 거라.

설혹 맞아 가지고 피가 철철철 난다고 하더라도 그냥 ‘피가 흐르네’ 하고 아는 거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은 동요하지 않는 거라.

그게 사띠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지가 잘한 것이든 바르게 하는 것이든 잘못하는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판단할려는 습관들을 가지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럴려면?

그냥 죽어라 하고 현재 일어난 것만 사띠할려고 하는 거라.

그 외에는 수행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현재 일어나는 것만 사띠를 할려고 하라는 거라.

 

경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니-꼬-상 까탕 까띤 사또-짜랑"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일어나는 대상들로 인해서 마음에서 파도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 하는 거라.

이미 파도가 생기면 이미 현재로부터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마음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까탕 까틴'이라고 하는 게 어떤 뜻이냐면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짓 하지 말아라'는 거라. 앉아 좌선해가지고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면 좌선해서 평생을 살아야 되는 거라. 근데 그렇게 안 되는 거라.

무문관에서 수행한다?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현재 생활하고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들로써 사띠를 찾을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직접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행하고 하는 것들 이게 다 사띠의 대상인데 이걸 놓아버리고 그냥 좌선시간을 따로 한다?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이미 그러는 순간은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사또-짜랑' 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지닌 채 살아라'는 거라.

이 3가지만 잘 유념하면은 적어도 현재 일어나는 대상들을 놓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수행은 현재만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나가면 금방 진척함이 있습니다.

본인이 어디에서 막히는지를 잘 판단해서 빨리 수행에 도와 과에 이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