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불기 2568년 담마와나선원 안거해제법회 법문 20241013

담마마-마까 2024. 10. 14. 16:39

https://youtu.be/Xc8sohuAnsw?si=GLfP48TA2Cn0DDj_

 

* 불기 2568년 담마와나선원 안거해제법회 법문 20241013
(11:50초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안거해제날이죠. 해제 때문에 스님들이 다 모였습니다.

빠와라나(pavāraṇā)라고 해서 안거 해제했으니까 한달 이내에 까티나가사축제 하고 스님도 훌쩍 만행을 갑니다. 만행 갈 정도가 되면 공부를 좀 많이 해야 됐겠지. 공부도 안 하면서 만행 다니면 못된 짓 하고 다니는 거라. 그래서 안거결제를 하는 동안만큼은 소중한 시간이 되게 됩니다.

 

태국에서 보통 칭호를 줄 때가 언제냐면 딱 이때입니다. 안거해제 끝나고 나서 보통 칭호들을 줍니다.
미얀마 같은 경우에는 큰 스님들이 다시 재출가를 합니다. 재수계라고 그러죠. 재수계 받는 것도 안거가 딱 끝나고 나면 보통 한두 달 내에 보통들 합니다.

재수계는 미얀마에서만 있는 좀 독특한 그런 겁니다.

왜 재수계 해줄까? 왜 재수계를 할까? 일반 수계하고 재수계하고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렇겠죠?

 

재수계를 받는데 일반 재수계는 어떻게 돼요?

분명히 환계를 하고 나서 다시 저 분이 비구 기간 동안에 4 바라이죄(Pārājika)를 안 저지르는 게 확신이 되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또 확인할 것들을 확인하고 나서 본인이 원할 경우에 재수계를 해줍니다. 그럴 경우에는 은사스님이 바뀌죠.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은사스님이 바뀝니다. 또 바뀌는 게 법납이 아무리 그전에 오래도록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또 초하 비구 1년부터 다시 들어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큰스님들이 다시 재수계하는 거는 그거하곤 틀립니다.

안 바뀌는 게 법납도 안 바뀌고 은사도 안 바뀝니다.

그걸 또 왜 할까? 왜 하게 될까? 무엇 때문에 하느냐는 거라.

그런 큰스님들은 재수계를 왜 하느냐는 거라.

2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수계받을 때 여러 가지 필요한 게 많습니다.

오늘 같이 이렇게 바리때도 준비해야 되고, 가사도 준비해야 되고, 그다음에 스님들이 공양을 올려야 되니까 공양물도 준비해야 되고, 손도 많이 필요하고 재정적인 부분도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근데 그렇게 여러 가지들을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건 공덕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특히 이제 큰 스님이 무슨 일을 하는데 큰 스님을 위해가지고 보시를 했다, 그럴 것 같으면 공덕이 더 커지는 상황이 되는 거라.

그래서 첫 번째가 재개자들이 조금 더 돈독하게 불교를 믿고 공덕을 쌓아주기 위해서 재수계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거는 이론적인 거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뭘까? 뭐 때문에 할까?

저 스님이 이젠 더 이상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래서 저 스님 꽁무니만 졸졸졸 따라가면 나도 그 법을 배워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상태가 된 스님에게 그러한 스님을 증명하는 거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재수계라고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적어도 수다원과 이상을 증득을 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 ñāṇa)에 이르렀든지, 그렇지 않으면

빳짜웩카나-냐나(paccavekkhaṇa ñāṇa)에 이르렀든지,

이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이 스님의 재수계를 재자가들이 청합니다.

“스님! 재수계를 해주십시오.” 스님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런 스님이 유신견이라는 것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나 재수계 할래’ 이러지는 않을 것 아니라.

그래서 재가자들이 “스님! 저희들을 공덕을 위해서 스님께서 재수계를 해주십시오.” 그러면 스님이 응해줍니다.

 

그런 게 인제 태국 같은 경우에는 각각의 자격을 줍니다.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으면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수행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면 수행 지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이런 여러 가지 자격을 갖다가 그때그때 줍니다.

그럼 그 스님은 그런 스님들은 대부분은 다시 환속하고 하는 것이 없어. 그리고 어느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뭐 바라이죄(Pārājika)를 짓는다든지 아니면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그런 데 휘말리고 그런 것들이 없어.

 

그래서 어찌 보면 출가하는 거는 참 수월할지 모르는데, 재수계라는 건 재출가입니다. 재출가하는 것은 당연한 출가자들의 의무인데 그걸 잊어버리는 경우들이 많다는 그런 생각에서 오늘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맨 위에 있는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부분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재가자들 모두 함께 :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집 없는 삶인 출가를 하는 자,

욕망의 생겨남을 완전히 소멸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고 설한다.]

 

담마빠다에 나오는 게송인데, 처음 부분은 출가하는 부분이 됩니다.

어렵게 마음을 먹고 출발을 하게 되고,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줄은 출가 후에 열심히 수행해가지고 다시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땅을 건너버리는 상황이 되는데, 그럴 때 다시 출가한 거와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저번 저번 주 목요일이었나 10월 3일날 스님이 허리를 좀 다쳤었어요. 일을 못하는 스님이 일을 할라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사람 다니는 데 좀 불편할 것 같아서 옮길라고 하다가, 큰일도 하는 것도 아닌데 일할 줄 모르니까 허리가 그때 ‘뚝’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허리가 안 펴지는 거라. 그래서 ‘아, 허리가 또 고장이 났구나’ 하고 마음을 먹으며 방에 들어갔지.

근데 그날은 또 해운대 있는 부부가 공양을 올리는 날이라.
그래서 공양 올리러 오는데, 앉아있으니까 아무래도 불편해 보이는지, “스님 어데 불편하십니까?” 그래서 “아, 허리가 조금 어긋난 것 같아. 걱정하지 마. 금방 풀릴거야” 그러고 나서 공양을 했어.

 

그러고 나서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허리 부분을 살펴보니까 허리가 조금 다친 거는 다친 것 같애. 그래서 그때 탁 드는 생각이 내가 수행을 하는데 얼마만큼의 힘이 있는가 하고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틀림없이 그 부위에서는 각각의 통증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어요. 쑤시는 것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고, 돌로 뭔가 꽉 눌러 가지고 한쪽으로 띡띡 걸리는 느낌도 분명히 있고, 송곳으로 쑤시듯이 하는 느낌들도 있고. 근데 어쨌든 그것들은 그런 느낌들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거잖아. 단지 그것을 내가 알아차리면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그러면 무난하게 관찰이 돼 나가.

그래서 마음에서 그 고통을 참을 수 있는가 하고 보니까 마음은 전혀 뭐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동요하고 하는 것이 없어. 그래서 아무 요동치지 않는데 뭐 굳이 내가 병원 가야되나? 그냥 이거는 관찰하고 있자 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나중에 한참 지나다 보니까 허리가 아픈 게 이제 좀 답답하게 굳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도 뭐 그냥, 어찌 보면 스님이 참 어리석은 게 ‘지나다 보면 낫겠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냥 계속 그걸 대상으로 해서 관찰을 해나갔는데,

한참 하다 보니까 분명히 도마낫사(domanassa)는 안 일어나는데 ‘내가 이거 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있나’ 하고 살펴보니까 마음에 이걸 고쳐야 된다는 생각이 안 일어나요.

 

그러고 나서 목요일 지나고 나면 금요일 토요일 되면 또 우리 울주에서 또 법회를 해야 돼. 법문도 해야 되고. 그런데 이걸 뭐 고치려는 마음도 없고, 그냥 ‘잘못돼가지고 이게 뭐 이렇게 붙는다 하더라도 그대로 살아야지 뭐’ 이런 마음이 자꾸 드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굳이 내가 지금 치료 안 해도 되겠다 싶어가지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아픈 부위를 탁 놓아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인제 목요일 지나고 금요일 지나고 또 토요일 법문을 하고, 토요일날 법문하려면 몸이 편치는 않지. 그래서 애초부터 “오늘은 좀 몸이 불편하니까 짧게 법문하겠습니다.” 하고 그러고나서 법문을 했는데.

 

그러고 나서 일요일까지 지났어. 4일이 지났잖아. 근데도 이게 안 낫는 거라. 그런 걸 보면 좀 늙었어. 그래서 월요일 돼가지고 한번 그래도 가서 내 생각에는 조금 밑에 척추뼈가 어긋난 것 같은데, 한번 가서 사진이나 찍어보자 해가지고 가서 사진을 찍어봤어요. 의사가 내 추측하고 딱 맞습니다. 똑같이 척추 마지막 뼈가 돌출되면서 계속 거기에서 염증이 생겨가지고 “많이 아플 건데 어찌 견디고 있었습니까?” 하고 그래요. 그래서 “그거는 잘 참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좀 받고, 그러고 나서 요 며칠 동안 계속 좀 치료를 받았어요.

 

그래도 스님이 공덕을 잘 쌓았는지 치료받을 때가 되니까. 또 하여튼 또 짠디님이 전화가 왔어요. “스님, 어디 아픈 곳이 있으십니까?” “어. 허리 좀 다쳤어.” 그러니까 현금을 또 얼른 쏘아줘요. 또 있으니까 루삐니가 전화가 와가지고 한번도 전화를 안 하다가 왜 그때 하는지 몰라. “어디 아픈 데 없습니까?” 해서 “음. 조금 허리가 좀 아파” 그래서 한약 한약을 허리 아픈데 드시라고 해서, 그거 먹고도 많이 좀 나아졌는데. 내가 그걸 보면서 ‘아, 중 생활 그래도 헛되이 한 건 아니구나. 저 공덕들을 그래도 내가 다 갚아 줘야지’ 하는 그런 마음들이 생기더라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과연 여러분들은 그런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들이 일어났을 때 끊을 줄을 알까?

정신적인 고통 내지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넘어가지지 않고 평온하게 그 느낌들을 관찰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정신적인 것으로 넘어가지 않아야만이 그것으로 인해서 '갈애(ṭanhā)'가 생기질 않고, 갈애가 생긴지 조차도 모르는 '무지(avijjā)'로 또 넘어가지질 않습니다.

대부분 탁 다쳤다 그러면 맨 먼저 뭐해요? ‘아이고야! 큰일났다’ 하면서 병원을 먼저 찾습니다. 그러면서 통증으로 인해 가지고 아파 죽겠어. 뭐 마음도, 그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들이라?

 

하나의 화살을 맞았는데 연달아서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인데 도마낫사(domanassa)로 넘어가지고, 딴하(ṭanhā)로 넘어가지고 아윗자(avijjā)로 넘어가지고, 연달아 4개의 화살을 맞게 되는 거라.

사실은 윤회의 고리를 끊는 거는 이 웨다나(vedanā)가 있을 때 탁 그거 관찰해가지고 도마낫사(domanassa)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윤회는 끊는데.

 

그마만큼 수행에서 사띠에서 그 대상이 변하는 것, 한순간도 단 두 찰라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만 하면 마음은 쉬어져. 그거 간단한 거잖아. 실제로 그렇잖아.

대상이 한순간도 똑같은 게 없고 변하고 있는데, 꼭 변하는 것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걸 뻔히 아는데 그것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무슨 마음으로 출가를 했을까?

여기 있는 출가 스님들은 뭔 마음으로 출가를 했을 거 같애요? 그래도 ‘아! 이게 이 법이 좋구나. 이 법을 계속 따라서 수행을 하다 보면 나도 부처님과 같이 아라한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요것만 할라고 출가를 했지 않았을까요? 그렇겠죠!

그렇게 안 하면 누가 출가할라고 하겠어? 그냥 세속적인 부분에서 출가자의 범부가 되고자 똑같은 패턴으로 뭐 오만 욕망 다 누리고, 오만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내 먹고 싶은 거 내가 만들어 먹고, 이럴려고 출가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라? 그래도 출가를 했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출가를 한 겁니다.

그래서 출가를 한 것만 하더라도 “아! 참 대단하다” 하고 여러분들은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못하고 있잖아. 왜 못하는지 알아요? 지켜야 될 것들이 많거든.

가족도 지키고 재산도 지켜야 되고 뭐도 지켜야 되고 너무 지킬 게 많아. 근데 그걸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는 거라.

그런데 출가했다는 것은 그걸 이미 내려놨다는 거죠. 그걸 내려놓고 오로지 여러분이 못하는 것 자기자신을 위해서 투자를 하고 있는 거라.

재가자도 사실은 그걸 내려놓지 못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마는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게 투자를 못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얘깁니다.

 

자기 자신에게 투자를 해야 됩니다.

누가 내가 아무리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지만은 죽음에 임박해가지고 “아이구, 우리 아버지하고 우리 어머니 잘살았습니다. 저 천상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하면서 데려다 줘? 누가 데려다 줄 수 있느냐는 거라. 본인밖에는 없다는 얘기라. 본인이 지은 행위들 본인이 지은 수행력으로 갈 수 있는 것이고,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럼 가족을 위하든 재산을 위하든 뭘 위하든 할 때 내가 그것이 공덕이 되도록 하려면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그것이 수행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하는 대상에다 마음을 갖다가 딱 두고 그것을 사띠를 하면서 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든 없든 그것이 중요한 부분이 아니고 그것들은 다들 나의 수행대상이 돼버리는 거라. 나의 공덕행의 대상이 돼버리는 거라.

 

근데 왜 자꾸 사띠를 놓쳐?

왜 뭔가 하면서 (불화?)한 마음을 가지고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뭔가를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패턴들을 빨리 바꾸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재가 범부 중생이지만 그래도 내가 이 법 만난 것들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 이 법을 계속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갈려고 하게 되는 거라.

 

특히 한국에 살면서 오늘도 기차를 타고 오는데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요.

와 가지고 “한국 분이세요?” 그래서 “예.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왜 이 옷을 입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한국 승복 입어야죠” “예. 고맙습니다.” 이러고선 말았는데, 여기 있는 스님들은 다들 겪어 봤을 겁니다. 한국에서 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그마만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뭘까? 단지 이게 뭐 보기 좋아서?

힘듭니다. 이 승복은 한국에서는 실제로는.

 

특히 스님 같은 경우에는 운동을 좀 하기는 해야 되는데 이 가사를 입고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걷는 거 외에 못해. 뭐 할 거라 밑에 홀라당 다 까져있는데. 뭐 어디 다리를 올릴 수가 있어, 물구나무를 설 수 있어, 뭘 할 수가 있어? 못한다는 거라. 그러면 그냥 꾸준히 걷는 거 외에는 못해. 그뿐 아니라 이것으로 인해서 제약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승복을 입고 있다는 것은 법의 소중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 법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달라졌고, 부처님 법이 소중하고 그마만큼 그걸 설하신 부처님에 대해서 고마움이 있기 때문에 이 승복을 입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걸 왜 입고 있겠어?

그래서 다른 한국 스님들보다도 오히려 테라와다 승복을 입고 있는 한국 스님들은 진짜 우러러 봐야 됩니다. 그분이 출가자로서의 범부라고 하더라도 이 가사를 입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아! 그거 참 대단합니다. 그 정도의 인내심이면 스님께서는 언젠가는 도와 과에 이를 겁니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냥 이 승복만 입고 죽어버리면 우짜겠노. 여러분이랑 똑 마찬가지지. 윤회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윤회를 안 하려고 또는 도와 과에 이르러서 우리 눈에 보이는 기간 동안에 그래도 내가 완전하게 해탈하기 위해가지고 이 승복을 입고 꾸준하게 수행들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 여쭤볼게요. 법에 대해서 확신들은 있어요? (수행자들 : 네)

뭐로 가지고 확신을 해요? 죽을 때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 하면 홀라당 바뀔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라? (수행자들 : 예)

 

법에 대한 확신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얘기할게요.

오늘 스님이 법문하는 내용이 귀에 들어옵니까? (수행자들 : 예!)

내용이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까? (수행자들 : 예!)

그러면 법에 대한 확신들이 있겠구나.

이 2가지로 판단들을 합니다.

 

법에 대한 확신들은 법을 설하는 자(자리)가 되면 열심히 그걸 들으려고 마음을 기울인다는 거라. 모든 사띠를 그 소리에다가 두고 듣게 된다는 거라.

당연히 그걸 듣게 되면 어떻게 돼요? 그것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것들이 이해가 되면은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어요? 실천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 자들이 100% 그렇다 할 것 같으면 법에는 확신이 든다고 내가 받아들일 게요.

그래서 법에 대한 확신들이 어느 정도 들었다, 그러면 하나 더 물어볼게요.

 

여러분이 잘 못하는 거, 잘 안 떨어지는 번뇌들이 뭐가 있어요?

그리고 다시는 안 일어나는 번뇌들은 뭐가 있어요? 없어?

(수행자 대답 : 번뇌가 일어나기는 하는데 제어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일어나기는 하는데 제어할 수 있다?

(수행자 대답 : 번뇌가 일어나기는 하는데 그걸 보고 알고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습니다. 제어를 잘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게 표출은 안 되는 거라? (예) 그 번뇌가 밖으로? 마음속에만 있어?

(수행자 대답 : 예. 마음속에서 생각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거가 이제 말이나 행동으로 연결하면 이게 이유가 되고, 이제 다시 윤회한다라는...)

 

왜 번뇌가 있다는 것들이 제어가 안 돼? 표출은 안 하면서 왜 제어를 못 하는 거라?

그런 분들은 반드시 밑으로 떨어집니다.

잠재돼 있는 것들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것으로 인해서 큰 코를 다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밑으로 수행도 더 떨어집니다.

 

뭐하러 감춰두는데?

그냥 그게 일어났을 때 그것들을 분명하게 사띠를 하는 힘이 약하니까,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거라. 하나가 일어났으면 하나를 끝까지 봐! 그래서 그게 완전하게 사라져서 그것으로 인해서 희열들이 탁 일어나야 돼!

! 내가 인제 봤다보고 나면은 그것에 대해서 미련을 안 가지게 되는 거라.

근데 그걸 못 하니까 성향에 따라서 내가 잠재되어 있는 건 아는데 밖으로 표출을 안 하는 거라.

 

물론 표출 안 하는 것도 훌륭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다른 사람들한테 좋을지는 몰라도 자기자신에게는 그래도 마찬가지라. 잠재돼 있어버리면,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거기 때문에 빨리 그것을 끄집어내서 알아차려서 빼내버려야 된다는 거라.

 

수행을 하다 보면은 틀림없이 그런 번뇌가 ‘아, 이거 내가 완전히 봤어. 인제 이거는 나에게 영향을 못 미쳐!’ 하는 것이 탁 생깁니다.

그때까지는 그게 어떤 번뇌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그거는 해야 될 거 아니라.

밥 먹고 뭐 부처님 법 만나가지고 그걸 해야지 뭐 자꾸 딴 것들을 하려고 그래?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됩니다.

내가 왜 이 부처님 법을 듣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번뇌들이 제거된 것들이 나는 아직은 없다, 그럼 뭐 열반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겠네? 그걸 빨리 경험을 하라는 거라.

똑같은 대상인데 대상이 열반으로 바뀌는 것들을 보라는 거라. 대상을 그냥 대상으로서 보면은 아주 간단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미련이 없으면은 대상이 사띠의 대상이 열반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 물어볼게요. “왜 사느냐?”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 뭐라고 그래요?

왜 살아요? (수행자 대답 : 태어났으니까요)

태어났으니까 산다고? 그런 답이 어디 있어? 누구든지 살려고 하고 죽기 싫어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생존욕이 있기 때문에. 그게 갈애입니다. 갈애를 제거를 해야만이 수행해서 도와 과에 이르르게 되는 건데, 아직 제거가 안 됐다 해가지고 수행을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럼 왜 사느냐고 할 것 같다면 여러분들이 답을 해야 되는 거라.

그냥 생활하기 위해서 사는 거고, 죽기 싫어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몸이 있을 때 빨리 도와 과에 이를려고 지금 살고 있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가족도 챙기는 거고, 밥도 먹는 거고, 여러 가지 공덕들을 짓는 거고, 목적 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라는 거라.

그리 해도 지금 될 동 말똥 하는 판에 자꾸 그걸 잊어버리고 ‘내가 수행만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 그건 절름발이밖에 안 되는 거라. 그러면 앉아서 또 경행할 때 요때 외에는 수행을 안 할려고 하는 거라.

조금 말이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오계를 받아 지녔죠. 계는 자동적으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출가한 스님들도 부단하게 노력해가지고 계를 지키려고 합니다. 진짜 노력들을 힙니다. 스님 같은 경우에는 누가 와서 문답 하나 할려고 하더라도 여자 혼자면 오지 마라고 그럽니다.

문답이 중요한 게 아니고 스님 입장에선 계를 방어하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당장 지금 죽을 정도로 그게 급한 일이 아닐 것 같으면 사람들이 모일 때 오라고 그럽니다.

 

여러분은 딱 다섯 개입니다 지금. 그거 하나 못 지켜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조그만 구멍이 난 제방은 결국은 무너져 버립니다. 작은 허물도 짓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수행의 척도를 정하는 것들이 이게 또 하나의 척도가 됩니다.

계를 얼마나 진짜 열심히 지키려고 하느냐?

출가자도 그걸 못 지키면 무너져 버리는 거고, 재가자도 그걸 못 지키면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띠의 대상이다. 그래서 사띠하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마라.

그냥 단순하게 사띠를 할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이게 뭐다’ 하고 아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사띠를 안 해도 아는 건데. 인식하는 체계 자체가.

 

사띠를 한다는 것은 그 변하는 것들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함이 없이 마음에서 떨어뜨려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습관들을, 사띠하는 습관이 바르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할 수 있죠? (수행자 일동 : 예!)

 

오늘 해제했다 해가지고 안일하게 하지 말고 수행들을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출가한 스님들도 재출가가 되도록, 다시는 그 상태에서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마음들을 가지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