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쭐라 소따빤나와 소따빤나(수다원)의 차이 (241005)

담마마-마까 2024. 10. 5. 18:30

https://youtu.be/VqukjFcr77M?si=OLQS3OZo_kwJlvdP

 

* 쭐라 소따빤나와 소따빤나(수다원)의 차이 (241005)

 

오늘은 스님이 조금 몸이 불편해서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경전에 "예류과-수다원에 이르고 나면 게으름 피워도 일곱 생 이내에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게으름을 얼마만큼 피워야 될까?

(수행자 질문 : 수다원에 이른 분이 게으름 피우겠습니까?)

 

게으름을 피우니깐 이런 경전에 써놨겠지. 그런데 이 게으름 피운다는 걸 잘못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물론 수다원에 이르르면 아직 그 성냄도 있고 탐욕도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게으름 부릴 수는 있습니다. 근데 수다원에 이르르고 나면은 일단은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안에는 탐욕이 생기고 성냄이 있을지 몰라도 그게 밖으로 표출되는 법은 없기 때문에 그걸 게으름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럼 뭘 가지고 게으름 피운다고 할까? 여기서 중요한 거를 알아봅시다.

"수다원(sotāpanna)은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그러는데,

'작은 수다원'이라고 하는 '쭐라 소따빤나(cūḷa sotāpanna)'라고 하는 것은 몇 생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경지로 보면 별 차이가 없거든. 쉽게 말하면 한끗 차이라 한끗 차이.

 

수행하다 보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고,

그러다 보면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 구별해서 알아차려지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없어지고,

그리고 정신적인 현상이든 물질적인 현상이든 그것이 뭐가 원인이라서 생겨나고 뭐가 결과로써 사라지게 된다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압니다.

말을 할 때도 의도가 앞선다는 원인이 있어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원인 결과로써 이렇게 쭉 보다가 보면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만 돼도 이미 '작은 수다원' 가까이 이르른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수행하고 있죠?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면은 점점 더 대상 자체가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일정한 순간이 되면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사라짐'만 보이게 됩니다. 물론 그때는 의도적으로라도 '일어남'을 무시해버리고 '사라짐'만 보게끔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어떨까? 계속적으로, 쉽게 말하면 죽는 거라. 계속적으로 없어져버리는 거니까. 싫은 마음이 탁 들게 됩니다.

 

싫은 마음이 들어도 어쨌든 계속적으로 관찰하다 보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들도 일어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대상 자체가 평온해집니다.

좋고 싫어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버리면은 마음은 평온해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꾸 훈련을 하다 보면은 어느 순간 되면 외부적인 자극이 있든 아니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어떤 대상에서도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한번 봅시다. 대상을 보고 있다.

그러면 처음에는 ‘저 사람이 누구다’ 하는 대상이 보일 거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려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 거고,

그러고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은 대상 자체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대상이 보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시각 자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저 대상이 금방 그렇게 바뀌지는 않잖아요.

근데 그 마음은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고 나면은 조금 있으면 그냥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만 분명하게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 대상이 미운 대상이든 아니면 내가 원수진 대상이든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보이는 것만 내가 알고 있게 됩니다.

‘보인다’고 알게 됩니다.

대상이 변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평온하게 그냥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은 일단은 그 사람은 "쭐라 소따빤나(cūḷa sotāpanna)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작은 수다원은 왜 몇 생이 안 정해졌을까?

평온한 상태에 이르른 상태에서 조금만 더 가면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마음이 대상에 가 있지 않고 열반으로 향해버리면은 수다원으로 탁 들어가질 건데.

그건 사실 쉽게 말하면 한끗 차이인데 왜 그럴까?

물론 작은 수다원에 이르러도 사악처에 떨어질리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견고하게 수행을 할려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받아지니는, 평상시 받아지니는 오계를 어기는 법은 없습니다.

계를 항상 잘 지켜 나가게 됩니다.

수다원과 다른 게 하나도 없죠. 그런 거.

 

그래서 계만 잘 지켜도 천상이 태어나죠.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딱 서기 때문에 삼보에 대한 것들이 갖추어집니다.

수다원과 별반 차이 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차이가 날까? 하는 거라.

 

작은 수다원은 평온한 상태에는 이르를지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만약에 평온한 상태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이생에서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까 수행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계도 잘 지키고 삼보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악처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동일합니다.

 

그런데 다음 생에서 부처님 법 만난다는 보장이 있어요?

여러분이 아무리 대상에 대해서 평온한 상태를 항상 지니는 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다음 생에서 뭐로 가지고 그걸 보장을 할거라? 부처님 법을 만나는 거를.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하면 계속 윤회하면서, 악처에는 빠지진 않겠지만은 천상에 태어나든 아니면 인간계에 태어나든 계속적으로 윤회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쭐라 소따빤나와 소따빤나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평온한 상태에 이르르면 떨어지진 않지만은,

그래도 그건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빨리 수다원에 이르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 하나만 딱 전향시켜버리면 되는 건데, 그게 참 잘 안 됩니다.

 

지금도 작은 수다원에 이르른 사람들은 간혹 보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근데 수다원에 이르지 못하는 거는 대부분은 보면 평온한 상태에서 그냥 끊임없이 노력은 합니다. 수행은 하고 하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질 못하는 거라.

그래도 그걸 이르른 것만 해도 장한 거죠.

그래서 다음 생에서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하면 뭐 그냥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또 또 윤회하게 되겠죠.

 

경전에 보면은 데와뿟따 존자가 나오는데, 수행하다가 쭐라 소따빤나에 이르러서 평온한 상태에서 계속 수행하다가 그냥 죽어버렸어요.

대부분은 어떻게 어디 태어날까? 대부분 천상에 태어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수다원이 됐다. 그럼 거의 100프로 천상에 태어난다고 보면 됩니다. 인간으로는 잘 안 태어나집니다. 왜 그럴까?

바라밀도 많이 쌓았죠! 사띠하는 것은 전부 다 바라밀을 쌓는 겁니다. 계를 잘 지키고 있죠! 삼보에 대한 믿음이 있죠!

인간으로 나오겠어요? 인간으로 안 태어나집니다.

대부분 천상에 태어납니다. 쭐라 소따빤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이분도 천상에 탁 태어났는데, 천상에 태어나도 자신이 계속 수행하고 있는 거라. 수행하는 게 너무나 좋기 때문에. 자기가 천상에 태어난 걸 몰라. 그래서 다른 천신들이 천상에 태어났다는 거를 거울을 비춰주면서 천상에 태어났다는 거를 보여주니까, 이 분이 그렇게 평온한 마음이 갑자기 슬픈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나는 아라한이 돼야 되는데, 인간에서’ ‘왜 죽었지? 왜 천상 세계에 태어났지?’

 

그래도 7생 이내에 해탈할 수 있다는 걸 보장할 수 있으려면 수다원이 돼야 되는데 아직은 수다원이 아니거든.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면 수다원이 될까? 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천상세계에서 자신에게 법을 설해줘가지고 수다원으로 이르게 하는 사람이 있든지, 아니면은 천상세계에 있다가 자기 옛날 수행도반한테 가서 내 좀 가르켜 줘 해가지고 가르침을 받든지,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나 좀 제발 수다원이 되게끔 인도해 주십시오. 하고 청을 하든지 그 수밖엔 없습니다.

이 분도 부처님한테 와서 가르침을 받고 수다원에 탁 이르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는데.

 

수다원에 이르르면 여러분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있을까?

작은 수다원도 인간으로 태어나기 힘드는데, 그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인데, 대부분 이렇게 보면 됩니다. 작은 수다원에서 수다원에 이르는 것은 참 윤회를 많이 거듭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보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런데 공덕을 그렇게 많이 지었는데 천상 세계 수명이 다른 천신들보다도 길었으면 길었지 짧진 않을 거라.

 

그런데 작은 수다원과 수다원이 되고 나서의 천상 세계에 태어난 것의 차이점은 뭐냐면

수다원이 되고 나선 내가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법이 있을 때를 갖다가 아는 거라.

그래서 내가 가서 그 법을 듣고 다시 기억해내고 계속적으로 아라한까지 이를 수 있는 기회가 됐는지, 아니면 부처님 법이 아예 없는 상태인지를 알게 되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천상 세계에 태어나면 무수한 시간 동안 거기에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 정법이 인간의 수명으로 얼마만큼 갈 것 같습니까?

5천 년이라고 얘기하죠. 천신들의 수명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보다 훨씬 깁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 부처님 시대 때는 내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못 된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수다원에 이른 사람이 과연 게으름을 부릴 수 있을 조건이 될까?

그런데도 경전에는 게으름 부린다는 거라.

게으름을 부려도 일곱생 이내에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거라.

 

그게 게으름 부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사성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 생을 태어나더라도 4성제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수행을 해 본 분들은 이해가 될 겁니다.

1시간 동안 좌선을 한다. 좌선할 때 무슨 마음을 가지고 좌선합니까?

 

'내가 이 시간 동안에는 절대 사띠를 놓치지 않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좀 수행이 잘 된 사람은 '이 시간 동안에는 삼매에 들어서 나오지 않겠다.'

아니면 조금 더 수행력이 깊은 사람은 '이 수행시간 동안에 나는 수다원에 이르겠다.' '열반을 체험하겠다.' 이렇게들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수다원은 모든 게 평온합니다.

대상에 대해서 내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게 정신적인 고통으로 넘어가지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고통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사상제를 확고하게 알고 있거든. 고집멸도에 대해서.

그러니까 모든 대상을 보더라도 평온한 상태로 보기 때문에 내가 아라한이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거라.

사띠는 분명히 하고 있고 수행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냥 평온하게 그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거라.

 

그 전에는 대상을 보더라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마음을 막 기울였는데, 이제는 기울일 필요도 없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법문을 들을 때 마음을 많이 기울여야 법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수다원이 된 상태에서는 그냥 귀만 열고 있으면 그 소리뿐 아니라 그 소리의 의미까지 전부 다 쏙쏙 다 들어오는 거라.

 

오계를 물론 가끔씩 어길 때도 있지만은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지는 않는 거라. 그리고 아, 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걸 바로 시정해 나가게 되고, 마음이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게 되는 거라.

 

그러니 수다원에 이르러도 그냥 이번 생에서 그냥 끝나버리고, 또 다음 생을 또 태어나게 되고 이렇게 됩니다.

그게 "방일하다"는 뜻입니다.

 

"방일하다"는 것이 나태해져 가지고 오욕락에 젖어 있고 아니면 수행하는데 5가지 장애가 일어나고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해도 수다원에서 계속 있으면은 그것도 윤회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천상에 태어나면 또 언제 깨달음에 이르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른 사람이 참 위험한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마음을 빨리 전환시키기가 힘듭니다.

 

수다원에 이르른 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다음 생을 바라보려고 마음을 먹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대상은 분명하게 자동적으로 사띠가 돼 나가고, 마음은 평온할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윤회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빨리 일깨워줘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7생을 설정을 해놓은 거지, 다음 생에서 깨달을지 아니면 이생에서 깨달을지는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을 잘못 왜곡은 하지 말고, 또 수행은 언제 내가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르고 수다원에 이르를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시기만 딱 맞아떨어지면 금방 이르를 수 있기 때문에, 사띠하는 습관들을 놓지 않고 계속적으로 수행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